<공간(SPACE)>(515호)에 실린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편집자의 제안에 따라 <어둠의 도시> 시리즈를 다루기로 했는데, 그래픽노블은 아무래도 좀 생소하고 도시건축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이야기와 주제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주로 다룬 건 <우르비캉드의 광기>(세미콜론, 2010)이다.

 

공간(10년 10월호) 어둠의 도시들 

프랑수아 스퀴텐이 그림을 그리고 브누아 페테르스가 글을 쓴 그래픽 노블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는 가상의 행성에 있는 가상의 도시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 연작만화다. 1983년에 처음 선보인 이후 이제까지 스무 권 가까운 책이 출간됐는데, 국내에 일차로 소개된 건 <기울어진 아이>, <보이지 않는 국경선>, <우르비캉드의 광기>, <한 남자의 그림자> 네 권이다. 이 가상의 행성은 지구와 닮은 풍광을 보여주며,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비슷한 문명을 건설하고 산다. 다만 기이한 현상이 한 가지씩 등장하는데, 그것이 말하자면 이 연작을 이끄는 ‘어둠’이자 수수께끼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어둠의 도시들 가운데 개인적으론 우르비캉드 이야기를 가장 밀착해서 읽었다. 판타지이긴 해도 가장 ‘현실감’ 있는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도시건축가 유겐 로빅이고, 이야기는 로빅의 시점에서 기술되는 일기 형식이다. 우르비캉드란 도시는 원래 제멋대로 생긴 판잣집들 사이로 국적불명의 현대적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흉측한 상태였지만 로빅의 계획에 따라 새롭게 정비 및 재개발된다. 그는 널찍하고 기하학적으로 잘 구획된 거리와 건물들, 그리고 장엄한 정원들을 설계해 다른 도시들의 경탄을 자아낼 만한 수준으로 탈바꿈시킨다. 하지만 대칭과 연속성을 기준으로 삼은 그의 계획은 절반만 실현되는데, 도시의 남북을 연결할 제3대교 건설을 상급 결정위원회에서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도시의 두 연안이 합의에 따라 분리돼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통로가 생기면 새로운 틈새를 만들어질 것이며, 그것은 다시 새로운 통제체제를 필요로 하게 될 거라는 것이 반대의 정치적 이유였다.    

위원회와의 갈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로빅의 책상에 어느 날 작업장에서 발견됐다는 특이한 정육면체 구조물이 놓인다. 한 변의 길이가 15cm 가량이고 속은 빈 단순한 육면체였다. 그런데 이 육면체가 그의 책상에서 자연적인 생장을 시작해 도시 공간 전체로 확장해나간다. 이것이 우르비캉드 이야기의 핵심 모티브이자 수수께끼다. 로빅은 구조물에 ‘로빅의 네트워크’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자가 생성하는 이 네트워크는 곧 도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며, 그것을 제거하지 못하자 위원회, 곧 통치 권력은 무력화된다. 구조물은 북부 연안까지 뻗어나가서 도시의 남북이 연결되고 주민들은 서로 만나기 시작한다. 육면체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들은 직접 교류하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서로 집을 맞바꾸기도 한다.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물 때문에 새로운 생활양식과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네트워크 구조물이 구름 저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하고 폐허만을 흔적으로 남겨놓는다. 구조물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거나 간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돌아올 날짜를 계산하여 발표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위원회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친구 토마스는 로빅을 찾아와 네트워크를 대신할 거대한 건축물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한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자가 생성 구조물을 인공적으로 다시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로빅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됐으며, 그 계획은 우리가 겪은 그 놀라운 현상의 조잡하고 보기 흉한 아류를 낳고 말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런 상황에서 유겐 로빅의 일기는 아무런 설명 없이 중단된다. 이것이 우르비캉드 이야기의 전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전부는 아니다. 당혹스러울 수 있는 독자들을 위해 ‘구조물에 얽힌 전설’이 부록으로 이어지며 흥미를 보탠다. 과연 우르비캉드 이야기의 핵심인 구조물은 어떤 의미일까? 열 가지 이상의 해석이 제시된다. ‘비인간화된 도시에 자연이 승리하는 예’라거나 ‘실패한 대역사(大役事) 프로젝트’를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고, ‘무정부적인 전복의 움직임’을 암시한다는 정치적 해석도 있다. 천재적인 도시건축가가 사랑한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자 미쳐버렸다는 관점도 있고, 구조물은 신이나 악마라는 종교적 해석도 있다. 전화의 관점에서 ‘구조물은 통신망’이라는 해석도 억지스럽지만은 않다.  

이 다양한 해석에 대한 허구적 저자의 평은 모든 해석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진정한 교훈은 “인간은 내내 어둠 속에서, 무지함 속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간단하지만 무한한 결론을 향해 열려 있는 이 구조물은 신들이 어둠의 도시에 사는 인간들에게 보낸 신비한 물체일 수 있으며, 그와 견주어볼 때 인간은 한없이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이야기의 결말에 관한 가장 유력한 가설과 함께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심각한 천재지변이 우르비캉드를 덮치는 바람에 어둠의 도시들 가운데 가장 높은 콧대를 자랑하던 이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그 가설의 내용이다. 인류 문명에 대한 우화로도 읽힌다

10. 10. 02.  

P.S.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에서 내가 읽은 건 1차분으로 나온 <기울어진 아이>와 <보이지 않은 국경선>까지인데, 이후에 <한 남자의 그림자>가 더 보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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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실에서 택배를 찾아가라고 하여 내려가보니 전문 월간지 <공간(SPACE)>(512호)이 배송돼 있다. 보통 격월로 서평을 게재하는데, 한 번 건너뛰고 이번 7월호에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미술문화, 2010)에 대한 서평을 실은 바 있다. 건축 전공자가 아니라면 들여다볼 일이 거의 없을 잡지인지라 가끔씩 '문학평론가'의 서평이 실리는 게 신기하긴 하다.   

공간(10년 7월호)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의 부제는 ‘4인의 철학자가 들려주는 통섭강의’다. 아르코미술관 주최로 네 명의 인문학자가 참여한 강좌 ‘현대미술과 인문학’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전반적으론 미술사와 현대미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강의록’이라고는 하지만 ‘강의’는 빠지고 ‘기록’만 남았다. 강의의 현장감이 반영돼 있지 않은 탓인데, 독자에게 ‘들려주는’ 청각적 텍스트가 아니라 여전히 독자가 ‘읽어야 하는’ 시각적 텍스트에 머물고 있는 점이 흠이다. 무엇을 읽을 수 있나?   

먼저, ‘둥지의 예술철학’을 주제로 삼은 박이문 교수는 예술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예술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라고 전제하고 기존의 정의들을 검토한다. 예술을 ‘재현’과 ‘표현’, ‘형식’, ‘제도’ 등으로 규정해온 전통적 정의들이 어떤 점에서 만족스럽지 못한가를 지적한 후에 그는 ‘예술의 종말’론으로 유명한 아서 단토의 예술에 대한 정의를 검토하고 비판한다. 단토의 정의가 “눈으로 보아서는 어떤 것이 예술작품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그런가? 

  

단토는 1964년 앤디워홀이 뉴욕의 한 갤러리에 ‘브릴로상자’를 전시한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는다. 당시 워홀이 흔한 비누상자를 모방하여 제작한 이 ‘작품’은 적어도 육안으로는 기성품과 구별되지 않았다. 단토는 ‘지각적 식별불가능성’이란 문제를 도출해내며 지각이 더 이상 예술작품을 식별해주는 준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술이 ‘눈’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의 문제가 된 것이고, 이것은 감성학으로서 미학의 종언을 뜻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단토에 대한 비판은 다른 근거에서 이루어져할 듯싶다. 대신에 박 교수는 예술작품의 양태적 정의를 제안하며 예술작품의 구조적 모델로서 ‘둥지’를 제시한다. 새들의 둥지가 가장 바람직한 예술적 언어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둥지는 생태학적이며 친환경적이고,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건축공학적으로 견고하며, 감성적으로 따뜻하고, 영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중국철학 전공자인 임태승 교수는 ‘예술적 상상력과 동양의 사고’라는 강연에서 동아시아 미학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디지털미학을 위한 제언을 보탠다. 그에 따르면, 동아시아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과 원리이며 동아시아 예술은 철학적인 원리와 미학적인 범주 사이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한 전통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유가(儒家)미학이다. 격물(格物)에서 수신(修身)을 거쳐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유가적 알고리즘이 미학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래서 ‘물로써 덕성을 비유한다’는 뜻의 이물비덕(以物比德), 줄여서 ‘비덕’이 가장 전형적인 심미론 또는 창작론이 된다. 자연계의 물상이 모두 인간의 도덕적 정감과 관련되기에 ‘재현(再現)’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 ‘사의(寫意)’다. 실경(實景)보다 상징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예 임 교수는 동아시아 예술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동아시아 미학이 디지털미학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동아시아 신화와 역사의 수많은 내러티브들이 디지털기술에 스토리보드를 구축하게 해줄 거라는 것이 임 교수의 기대다.   

‘현대미술과 철학의 이중주’에서 이광래 교수는 서양미술사가 재현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탈재현(차이의 발견)과 반재현(차이의 생산)으로 변신해가는 과정을 기술한다. 푸코에 기대어 말하자면, 재현에서 재현을 통해 재현을 부정하는 탈재현으로, 그리고 그것마저도 거부하는 반재현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이 서양미술사의 전개과정이었다. ‘재현미술의 종언’ 이후의 미술은 곧 ‘엔드게임’으로서의 미술이다. 이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고 다른 게임, 즉 메타게임으로 대체되며 게이머들만 바뀐다. ‘미술의 종말놀이’라고까지 부르는 이유다. 급속하게 변화해가는 매체환경 속에서 미술작품도 무한변신을 시도할 수밖에 없으며 “마침내 ‘확장미술 시대’를 맞이할 미래의 사이버서퍼들은 스펙터클 엔드게임에 빠져들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전망이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은 ‘철학의 눈으로 본 매체’에서 매체 변화와 혁명이 가져온 의식 및 사회 변화의 양상을 기술하고 디지털 시대 새로운 형이상학의 밑그림을 그린다. 근대의 개인적 주체, 자본주의적 대량상품 시장 체제, 목적론적인 진보적 역사관 등의 확립이 모두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한 문자문화의 정착과 무관하지 않다면, 사진술의 발명은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모든 시각적 세계가 ‘인간의 눈’으로 본 세계였지만 사진술의 발명 이후에 인류는 ‘기계의 눈’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우리의 감각비율과 지각 패턴을 바꾸고 문화예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흐름을 바꾸어놓는다. 아직 진행중인 디지털혁명이 이미 존재 질서를 재편하고 우리의 정체성마저 변화시켰다는 주장은 그래서 가능하다. 아마도 우리가 인문학을 다시 또 만난다면 ‘미술관’이 아니라 ‘사이버미술관’에서이지 않을까.    

10. 07. 01.  

P.S. 엉뚱하게도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는 미술관이 아니라 영화관을 떠올려준다. 책의 후반부를 씨네큐브에서 <하하하> 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읽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검색해보니 아서 단토의 신작이 <앤디 워홀>(2009)인데, 구미가 당긴다. 하하하, 앤디 워홀이네!.. 

 

P.S.2. 아서 단토의 <앤디 워홀>은 <앤디 워홀 이야기>(명진출판, 2010)로 '번역'돼 나왔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청소년물로 각색되어 '번역'이란 말을 쓸 수도 없다('아서 단토 지음'은 어떤 의미로 적어놓은 것일까?). 편집자주에 따르면, "원저작물에 어려운 부분이 많아 엮은이를 따로 두었"고, 책은 그 엮은이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단토의 지적대로 워홀에 관해선 훌륭한 전기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하필 예술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책을 골라서 '전기'로 재가공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대하던 책을 하나 도둑맞은 기분이다. 단토나 저작권자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10.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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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앤디 워홀 이야기' 유감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4 20:07 
    저녁을 잘 먹고 소화 안 되는 기사를 읽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의 신작이 출간된 건 반갑고, 게다가 그 책이 지난달에 기대를 표한 <앤디 워홀>(2009)이라면 놀라울 정도인데, 정작 '번역서'라고 나온 <앤디 워홀 이야기>(명진출판, 2010)는 엉뚱하게도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의 하나로, 앤디 워홀의 전기나 소설처럼 꾸며서 훑어주는 책이다.    &#
 
 
 

어제 학교에 가보니 <공간>(3월호)이 강사실 책상에 놓여 있었다. 서평란에서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산책자, 2010)을 다루었는데, 여기에 옮겨놓는다. 다사다난하다 보니 두 주 전에 쓴 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공간(10년 3월호) 무미예찬 

무미예찬(無味禮讚). 그러니까 ‘맛없음’에 대한 예찬이다. 말이 안 되는가? 그런 염려는 저자도 염두에 두고 있다. “처음에는 역설로만 여겨질 것이다. 무미(無味)를 예찬한다는 것, 맛이 아니라 맛없음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가장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되는 일이다.”라고 처음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그가 말하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인 저자에게서 ‘우리’란 일차적으로 프랑스인이고 서구인이다. 따라서 무미에 대한 그의 예찬이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된다는 판단은 한국인 독자라면 보류해야 할 판단이다. 그럼에도 ‘무미예찬’에서 어떤 역설을 감지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미각과 사고가 서구화되었다는 반증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겠다.   

우리말로 ‘무미’라고 옮겨진 단어는 저자가 불어로 ‘fadeur’(영어로는 ‘blandness’)라고 옮긴 중국어의 ‘담(淡)’이다. ‘담백하다’고 할 때의 ‘담’으로 묽다, 싱겁다, 부드럽다, 자극이 적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저자가 보기엔 이 ‘담=무미’가 중국의 문화와 미학적 전통에서 중심적인 가치이자 바탕을 이루는 가치다. “그것은 유(儒)․불(佛)․선(仙) 모든 사상의 지원을 받으며, 시, 음악, 회화 등 다양한 예술에 공통된 이상을 환기한다.” 이러한 주장을 저자는 강하게 논증하지 않고 여러 예시를 통해서 담백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의미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게’ 하는 것이 또한 무미의 기술이다.   

담의 소리, 담의 느낌, 담의 그림과 시 등 “은미(隱微)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무미함에 대해 살펴나가는 저자가 무미의 전범으로 예시하는 것은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예찬(倪瓚)의 문인화다. 그림의 전경에는 잎이 성글고 가느다란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는 것이 전부다. 듬성듬성한 바위들이 물가의 윤곽을 드러내고 그 텅 빈 공간 건너편에 야트막한 언덕들이 밋밋한 원경을 이룬다. 네 개의 기둥으로 버텨놓은 초막이 아래쪽에 있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다. 전체적으론 윤곽선들조차 분명치 않을 정도로 연한 먹물로 그려졌다. 그래서 “도무지 사람의 눈길을 끌고 유혹하는 것이라고는 없지만, 그런데도 이 풍경은 풍경으로서 충만하게 존재한다.” 바로 무미의 풍경이다.  

화가 예찬은 나이 사십대까지는 막대한 재산 덕분에 지극히 고상한 세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몽골 지배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생애의 마지막 몇 십 년은 방랑으로 소일하며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초연한 삶을 살았다. 그가 평생 그린 풍경의 무미함은 곧 ‘무미한 삶’이라는 그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풍경의 무미함이 내적 초탈함이란 삶의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듯 ‘담’은 주체와 객체를 구별 없이 가리킨다.     

무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위(無爲)한 것이 삶의 기조가 된다고 하면, 이러한 태도는 서양의 주류적 가치관과 대비된다. 가령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밖에 던져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따름이다.”라고 제자들을 다그친 예수의 경우와 비교해볼 수 있다. 확실한 자기 ‘맛’을 드러내는 것, 곧 주장과 분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서양의 미덕이라면 중용적 태도를 이상으로 간주한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나 기적을 행하려 하는 것, 그럼으로써 후세가 자기에 대해 말할 거리가 있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삼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고, 소인과의 사귐은 단술과 같다”는 교훈도 나온다. 남에게 잘 보이려 할 뿐인 소인과 달리 군자는 말보다 행동을 중요시하며 말을 행동으로 뒷받침할 수 없을 때에는 남을 위하는 척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담백함’이 시(詩)․서(書)․화(畵)를 평가하는 기준일 뿐만 아니라 인재의 자질을 판단하는 잣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람의 재질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균형과 조화이다. 그런데 성격이 균형 잡히고 조화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범하고 담백하며 아무런 맛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때문에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는 평범함과 담백함이란 자질을 먼저 고려한 후에야 그가 총명한지 따졌다. 한 가지 덕목에만 빠지지 않아야 모든 덕을 지닐 수 있고, 또 그래야지만 공직생활에서 부닥치게 되는 가변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 시각에 공감하게 되면 “완벽한 성격에는 이렇다 할 성격이 없으며, 충만함은 곧 평범함이다.”란 말도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왜 그런가? 모든 자질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면 어떤 특징도 다른 특징보다 두드러지지 않을 것이므로 그의 사람됨은 남 보기에 특기할 만한 점이 없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저자의 ‘무미한’ <무미예찬>을 특기할 만할 것이 없는 책이라고 평한다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10. 03. 05. 

 

P.S. 개인적으론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을 접한 지는 몇 년 됐다. <운행과 창조>(케이시, 2003)란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그의 다른 책들을 바로 검색하여 <불가능한 누드>(2007)란 책의 출간을 한 출판사에 제안한 바도 있다(이 책이 나의 첫 소장품이다). 나는 <무미예찬>이 번역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은 <불가능한 누드>가 나오는 걸로 혼동하고 있었다. 제목은 선정적일지 몰라도 중국 미술에 대한 책이다. 그의 최신간 또한 중국 미술을 다룬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2009)이다. 이 두 권 정도는 더 번역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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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

오랜만에 학교에 와보니 건축전문 월간지 <공간(Space)>(506호)이 책상에 놓여 있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의 <이것이 현대적 미술>(갤리온, 2009)에 대한 서평을 실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미술평론가 반이정씨가 꼽은 '올해의 미술책' 두 권이 진중권의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와 바로 이 책 <이것이 현대적 미술>이었다. 우연찮게도 두 권에 대한 서평을 같은 지면에 썼다. 나름대로 책을 고르는 안목은 있었던 셈이다(서평대상은 편집자와 같이 고른다). 비록 두 권 다 너무 많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책이어서 개인적으론 좀 멀미를 느꼈지만... 

  

공간(10년 1월호) 이것이 현대적 미술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갤리온, 2006)를 통해서 “바로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떤 종류의 현대미술이 펼쳐지고 있는가?”란 질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는 미술평론가 임근준 씨가 세계미술의 동향으로 시야를 넓혔다. <이것이 현대적 미술>은 동시대 작가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가를 소개하는 그의 두 번째 보고서다.   

왜 ‘현대미술’이 아니라 ‘현대적 미술’인가? ‘현대미술’이란 말이 좀 모호하므로 개념을 잠시 정리해보자. 미술계에서 ‘모던아트(modern art)’의 번역어로 쓰이는 ‘현대미술’은 폴 세잔 이후의 미술을 통칭하지만 보통은 20세기 전반의 미술만을 지칭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의 미술은 ‘전후미술(post-war art)’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1980년대 이후의 미술을 가리키는 이름이 ‘당대미술(contemporary art)’ 혹은 ‘포스트-모던 미술’이다. ‘전후 미국 현대미술의 영웅’ 로버트 라우센버그에 대한 조명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으므로 이 책이 다루는 ‘현대적 미술’은 ‘전후 미술’과 ‘당대 미술’을 포함하는 ‘오늘의 미술’이다.  

‘오늘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오늘의 미술’이 지닌 여러 문제의 기원을 저자는 전후미술의 새로운 상황을 지탱한 두 가지 축, 곧 교육제도와 전시제도에서 찾는다. 일단 미술이 대학제도와 결합됐다. 거기에 현대미술 혹은 전후 미술만을 수집하는 미술관과 갤러리가 늘어나면서 전시 기회가 확대되고 많은 작품이 유통됐다. 그리고 비엔날레/트리엔날레 등의 전시가 유행처럼 늘어나면서 작가들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커졌다. 그 결과 현대미술에는 현대문학이나 현대음악, 혹은 현대무용 등의 분야와 비교하여 ‘황당할 정도로’ 주요 작가가 많다. 이 책에서도 60여 명을 다루고 있지만, 저자가 처음에 작성한 목록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양적 팽창은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부작용을 낳기 시작한다. 미술학교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예비 작가의 수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으며, 갤러리 수도 지나치게 많아지고 국제 비엔날레는 난립하고 있는 중이다. 2000년대 들어서 미술시장이 과열 양상으로 치닫자 많은 작가들이 ‘유행 논리’와 ‘시장 논리’에 휩쓸리게 되고 점차 예술적 혁신성을 잃어가게 됐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두 미술가의 반응이 이러한 상황을 잘 짚어준다. 먼저 전직 록 가수이기도 한 마이크 켈리의 말. “이제, 학생이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개인전을 열지 못하면, 자신을 낙오자라고 여긴다. 그들은 작가 생활로 먹고살 수 있기를 전적으로 기대한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 되고 싶어서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젊었을 땐, 미술가 노릇이란 사회에서 정말 자신을 배척시키고 싶을 때나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현대 회화의 태두로 불리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탄식. “미술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갔다. 러시아, 중국 등의 신흥 부자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 좀 느끼려면, 최소한 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바로 그런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저자는 “현대예술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전후미술의 금자탑을 세운 작가, 아니면 당대미술의 승자로 미술사적 위상을 확립한 작가, 아니면 바로 지금 현대미술의 전선에서 각축을 벌이며 문제적 지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작 작가”들의 사례를 통해서 답하고자 한다. 그 ‘너무 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는 1976년생으로 2002년 말에 <관찰을 통한 프랭크>란 첫 개인적으로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여성화가 데이나 슈츠이다.  



‘관찰을 통한 프랭크’ 연작은 “지구에 프랭크라는 백인 남자 한 명만 남았을 경우”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회화 실험으로 폐허가 된 암울한 상황하에서 원시적 삶을 연명해가는 마지막 생존자의 모습을 그림에 담고 있다. 이 ‘엉뚱한’ 연작을 통해서 작가가 던지는 ‘진지한’ 물음들은 이렇다고. “프랭크가 유일한 관객이라면, 내 그림은 여전히 예술일까?”, “내 그림을 통해서만 자아를 반추할 수 있는 프랭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극단의 상황에서 문화란 무엇일까?”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오늘의 미술’은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을 담은 예술”이다. 거기서 ‘세계’란 일차적으론 미술이 처한 현재의 상황, 혹은 미술세계의 현실이 아닐까란 생각이 책을 덮으면서 들었다. 한 미술 월간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09년에도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1위는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었다. 2005년 첫 조사 이후 5년 연속 1위다. 2, 3위는 각각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과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 더 이상 특정 작가나 그룹이 아니라 미술관 운영자들이 움직여가는 미술, 그것이 ‘현대적 미술’의 상황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미술은 무엇이고, 또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크레이지’하게 다시금 던져져야 할 지점이다

10.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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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10-01-27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학기 강의 준비 때문에 제 책상 위에도 이책이 놓여 있습니다. 몇몇 작가만 슬쩍 훓어 보았습니다만 말씀대로 너무 많은 작가 수 때문에 개략적인 소개에 그치고만 점이 좀 아쉽네요. 이정우씨나 반이정씨의 글 내용이나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겠습니다만 그들이 갖고 있는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이 부럽기는 합니다.(뭐 제 오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미술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당위적 요구가 점점 남의 얘기처럼 느껴지면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는 중년의 나이가 서글퍼지네요. 바깥에는 겨울비도 추적추적 거리는데 말이죠...그나저나 미술책은 저같은 동네 사람이 리뷰해야 되는거 아닌가요? ㅋㅋㅋ

2010-01-27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7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0-01-28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색과 소리와 맛과 문자 등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 색에 대한 집착은 많은 은유나 코드를 꿈꾸게 합니다. 일정 화면의 색채와 형태에 숨겨둔 이야기로 새로운 상상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인데요. 색채를 통한 이야기를 소유하려는 장르중에 현대 미술도 활용된듯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화상은 시장원리의 주체같습니다.
 

기억에서 거의 잊혀진 조각가 권진규의 회고전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다. 작가의 사진을 보고서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기억을 떠올렸을 정도. 이번이 최대 규모의 전시회라고 하니까 모처럼 이 겨울에 걸맞은 한 철저한 예술혼과 대면할 좋은 기회가 될 듯싶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9. 12. 22) "인생은 공, 파멸"… 인물상에 깃든 영원한 삶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로 꼽히는 권진규(1922~1973ㆍ사진) 회고전이 22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얼굴상과 동물상 등 조각 100점, 드로잉 40점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그간 국내에서 열린 권진규 전시 중 최대 규모다. 대학 졸업작품인 '나부'(1953) 등 처음 공개되는 작품도 16점 포함됐다. 



이번 전시는 일본에서 비롯됐다. 권진규의 모교인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이 개교 80주년을 맞아 이 대학 출신 대표 작가로 권진규를 꼽으면서, 지난 10월부터 이달 초까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과 무사시노미대에서 동시에 전시를 열었다.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한국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일본의 두 전시를 합친 것이 덕수궁미술관의 권진규전이다. 전시는 대학 재학 시절 제작한 작품, 인물상, 자소상, 부조, 동물상으로 나뉘어진다. 인물상의 경우 머리와 목 아래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유난히 긴 목선과 무표정하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시선을 잡는 권진규 특유의 기법이 뚜렷하다. 



'애자' '명자' 등 각기 다른 이름이 붙어있지만, 그 얼굴들은 특정 인물의 것이 아니라 작가가 추구한 순수와 영원성의 반영이다. 자소상(自塑像)을 통해 만나는 권진규는 삭발한 종교적 구도자의 모습이다.

그는 비구니상에 자신의 얼굴을 중첩시켜 표현하는 등 불교에 심취했다. 1961년 숭례문 중수 때 제도사로 참여한 경험을 담은 부조 작업들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전통 문양의 변형과 콜라주 등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볼 수 있다.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실린 '지원의 얼굴'로 익숙한 권진규는 한국적 리얼리즘을 정립한 조각가로 평가된다. 일본 유학 시절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다 1959년 귀국해 테라코타와 건칠(乾漆)이라는 특유의 기법으로 절제된 형상의 인물상을 빚어냈다. 

그러나 추상이 득세하던 당시 한국에서 그의 작품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됐고, 병고와 외로움에 시달리다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는 유언을 남긴 채 51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생전에 "인간의 아이는 언젠가 죽지만 내가 만든 아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테라코타를 선호한 것도 고대 무덤의 부장품들이 입증하듯 쉽게 썩지 않는 시간성을 지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시는 내년 2월 28일까지.(김지원기자) 

09.12. 22.  

P.S. 작가에 관한 책은 어린이 그림책을 제외하면 <권진규>(삼성문화재단, 1997)가 유일한 듯하다.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된 듯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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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22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물사진과 인물조각품이 좋습니다. 예술인의 일생은 순탄치 않군요. 프랑스 화가였던 '모딜리아니'도 처음엔 조각가 였지만요. 작품의 질감에서 풍기는 단호함이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해서 겨울에 감상하기에 좋겠습니다.

로쟈 2009-12-22 08:47   좋아요 0 | URL
'지원의 얼굴' 같은 작품은 굉장히 오랜만에 보게 되는데, 새삼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펠릭스 2009-12-23 12:14   좋아요 0 | URL
저마다 '지원의 얼굴'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반짝이 설원을 넘은 환상일까요! 북쪽 출신 애국자(김구,안중근 등)나 예술가들이 더 강인하게 느껴집니다.

로쟈 2009-12-23 23:44   좋아요 0 | URL
인상 자체는 좀 서구적인데요. 작가도 그렇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그런지도...

Mephistopheles 2009-12-22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과서에 실렸던 조각품들 중에 권진규, 자코메티의 작품들은 아직도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로쟈 2009-12-23 23:42   좋아요 0 | URL
네, 요즘 교과서에도 실려 있나 모르겠네요...

무해한모리군 2009-12-2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보고 싶네요.
지원의 얼굴은 리움에서 본적이 있어요.
제자였던 지원님도 꽤나 어려운 삶을 보냈다고 하던데..

로쟈 2009-12-23 23:43   좋아요 0 | URL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나 보군요...

homania 2009-12-2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진규의 조각 "지원의 얼굴"
홍대 조소과 다니던 여성이 나와 비슷한 이미지라고 이 조각의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내게 줬던 기억이..
사귐이 끝나면서 뭐 사진도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지만...-_-;;
어쨌든 권진규는 그때 이후 항상 내가 가장 친근함을 느낀 조각가였지요 ㅎㅎ

로쟈 2010-01-10 22:45   좋아요 0 | URL
전시회는 꼭 보려가셔야겠는데요.^^

josephine 2010-01-10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선생님, 여기서 만나뵙게 되는군요. 전시보러 덕수궁 한번 오시죠. 오래 간만에 드릴 말씀도 많을 듯 하네요.

로쟈 2010-01-10 22:44   좋아요 0 | URL
저 지난주에 다녀왔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