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미술책'은 손철주 학고재 주간과 이주은 성신여대 교수가 같이 쓴 <다, 그림이다>(이봄, 2011)이다. 리뷰기사들이 올라온 걸 보고 어젯밤에 주문했으니 오후에는 받아볼 수 있겠다. 그중 하나를 옮겨놓는다.  

서울신문(11. 11. 05) 서양화 보는 여자 동양화 읽는 남자 通했다

요즘 화제인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불륜의 사랑이 불붙는 곳은 남녀 주인공이 우연히 마주친 미술관이었다. ‘다, 그림이다’(손철주·이주은 지음, 이봄 펴냄)의 저자 이주은 성신여대 미술교육과 교수는 “그림을 보면 나를 충족시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사람들이 팁을 얻으면 훨씬 재미있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며 미술 관련 서적의 꾸준한 인기 요인을 설명했다. ‘다, 그림이다’는 동양 미술에 대한 대중적인 글쓰기를 해오고 있는 출판사 학고재의 주간 손철주씨와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이 교수가 나눈 편지다.

 

●물과 기름 같은 동서양 미술 접점 찾아내

우리나라에서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미술사’보다 훨씬 많이 팔렸다. 게다가 일본인과 한국인들은 인상파 그림만 좋아한다는 선입견도 있다. ‘다, 그림이다’는 이런 편견에 맞서 물과 기름 같았던 서양 미술과 동양 미술을 솜씨 좋게 한데 녹여냈다.

그 소개는 작가 김훈이 맡았다. 김훈은 ‘다, 그림이다’의 서문에서 경주 황룡사 벽에 ‘노송도’를 그렸더니 새들이 날아들어 부딪쳐 죽었다는 신라의 화가 솔거를 언급한다. 그리고 “화폭 안과 밖에서 이야기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끝맺는다. 그 끝없는 이야기를 손 주간은 “움켜쥘 수 없는 것을 움켜쥐려는 화가의 속내를 우리 옛 그림에서 살펴보려 한다.”며 옛 시로 풀어낸다. ‘세상과 그림,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 내려오니 피지 않는 꽃이 없구려’.

이 교수는 “낮에 스치듯 바라본 그림이 간혹 의지와 상관없이 심연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 중 하나가 동요를 일으키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들곤 한다.”며 그림이 인간에게서 얼마나 많은 상상력과 이야기를 끌어내는지 일러준다.  

●명화보다 인생의 키워드 담은 그림 찾아 주고받아

책에 실린 그림들은 익히 알려진 명화보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이 많다. 저자들은 미술사에 많이 언급되는 걸작보다는 뻔히 아는 인생의 키워드와 자잘한 이야기를 간직한 그림을 골랐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책에 소개되는 첫 번째 그림은 2009년 타계한 미국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의 ‘결혼’(큰 그림)이다. 제목은 ‘결혼’이지만 턱까지 이불을 당겨 덮은 노 부부는 마치 시체 같다. 그림을 소개하는 이 교수는 “와이어스도 어느 날 아침 이웃집에 들렀다가 노 부부가 창백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인상이 강하게 남아서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한다. 



결혼’에 대한 손 주간의 화답은 18세기 조선의 선비화가 능호관 이인상의 ‘와운’(작은 그림)이다. 손 주간이 ‘결혼’과 ‘와운’에서 공통으로 읽어내는 것은 ‘비장한 아름다움’이다. ‘와운’은 조선시대 옛 그림치고는 무척 낯설다. 부글부글 끓는 먹장구름을 화폭 전체에 담았다. 화가 이인상이 한쪽에 쓴 글(‘시를 쓰고 싶었지만 술에 취한 뒤 글씨를 쓰니 구름이 덩어리진 듯합니다. 바로 이 그림과 같으니 웃음거리외다.’)로 보아 ‘와운’은 술 마시고 그린 ‘취필’(醉筆)이다.

저자는 이인상의 삶이 심장에서 피를 토하듯 눈물졌다고 설명한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모두 잃는, 세상 어디에 비길 수 없는 비극인 참척을 겪었고 아내마저 먼저 보냈다. 하지만 “슬픔을 노골화하지 않고 눌러 담는 심정이 애처롭도록 아름답고, 그 애처로운 아름다움의 에두른 표현이 곧 비장미”란 손 주간의 해설이 붙는다.  

●동서양 미술 소통… 인류의 공통성 찾아내

지난달 말에 끝난 간송미술관의 가을 전시에서는 4년 만에 세상 구경을 나온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려고 주말이면 두 시간 넘게 기다릴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손 주간은 혜원 신윤복을 흉내 낸 작자 미상의 미인도를 소개한다. 혜원의 미인이 변비나 치질에 시달리는 안색이라면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미인도는 남자 마음을 녹일 듯한, 배시시 웃는 입술이 압권이다. 조선 미인의 수작에 이 교수는 어깨에 날개를 달고 화살로 심장을 찌르려는 아기 천사를 그린 아돌프 윌리엄 부게로(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의 ‘에로스를 막는 소녀’로 답한다. 동서양 그림의 소통을 시도한 책은 예술로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느껴 보라며 손짓한다. 미술관에서 불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윤창수기자) 

11. 11. 05.  

P.S. 손철주 주간의 책에 대해선 예전에 <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현암사, 2011)를 계기로 한번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이후에 책이 더 출간됐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오픈하우스, 2011)와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오픈하우스, 2011). 생각의나무판의 개정판인 듯하다.   

 

이주은 교수의 미술책도 여럿 나와 있는데, <그림에, 마음을 놓다>(앨리스, 2008)와 <당신도, 그림처럼>(앨리스, 2009)이 대표작인 듯싶다. 나는 번역서인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시공사, 2007)을 <다, 미술이다>와 함께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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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증기 2011-11-0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보는 독자입니다^^ 이인상의 자녀들이 요절하기는 했지만 이인상 생전에 죽은 경우는 없을텐데 의아하네요. 학위논문을 쓰느라 족보를 검토했는데 제가 놓친 것인지.. 한번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점검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11-11-07 08:08   좋아요 0 | URL
네 확인하면 알려주시길...

수증기 2011-11-08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족보를 보니 아들 넷이 모두 이인상 사후에 별세한 걸로 되어 있네요. 딸 하나는 생몰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서 확실치 않지만 딸이 죽었다는 언급도 문집에 전혀 없고요.. 생전에 자식 넷을 먼저 보냈다면 더없이 참담한 일인데, 왜 이런 참담한 일을 만들어서(!) 언급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사소한 오류이지만 올려주시는 글 감사히 보는 터에 덧글 남깁니다.

로쟈 2011-11-09 07:50   좋아요 0 | URL
저자가 착각했나 보군요. 이 댓글을 보면 좋겠습니다...

2011-11-14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5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학로에 있는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지난달 15일부터 이달 30일까지 '몹쓸 낭만주의'라는 기획전을 연다(http://www.arkoartcenter.or.kr/artcenter_kor/exhibition/exhibition_artcenter_pr.jsp). 20명의 작가가 출품한 작품이 두 곳의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이 전시회를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렸는데, 자료로 쓴 발표문을 옮겨놓는다. 낭만주의란 기표, 몹쓸 낭만주의란 기획에 대한 소감을 적었다.   

몹쓸 낭만주의? 몹쓸 낭만주의! 몹쓸 낭만주의는 우리가 혹은 우리시대가 낭만주의를 다시 소환하고 호명하는 이름이다. 낭만주의는 ‘몹쓸’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나서야 동시대 미술장 속으로 ‘재입장’한다. 그것이 재입장의 조건이다. 낭만주의가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오기 위한 방책이고 간계이다. 그것은 왜 몹쓸 것인가. 왜 몹쓸 낭만주의인가. 

거창하게 역사적 낭만주의를 다시 회고할 필요는 없겠다. 낭만주의는 정의 불가능하다는 ‘엄살’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용도에 맞게 개념을 한정하자면, 낭만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대한 옹호이고, 규격화된 형식에 대한 조롱이며, 현실 너머의 이상에 대한 동경이고, 과도함에 대한 예찬이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가 시를 일컬어 “감정의 자연스런 분출”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달리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로도 유효했다. 낭만주의는 그렇게 규범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레 흘러넘친다. 그것은 거침없다. 바로 그렇게 거침없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도전적이고 도발적이며 반항적이다. 낭만주의는 자유를 구가하며 혁명을 노래한다. 릴케의 시구를 빌리자면 ‘너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명령한다.   

세상은 한때 혁명의 시대였고 낭만의 시대였으며 낭만주의의 시대였다. 세상은 바뀔 것처럼 보였고, 바뀌는 게 응당했으며, 그렇게 뒤바뀔 세상은 역사적 필연으로도 보였다. 지금은? 모든 것이 계산되고 관리되는 사회?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며, 모든 리스크는 주식처럼 분산‧관리되고, 개인은 스펙과 커리어로 통제된다. 간명하게도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낭만주의는 역사적 과오이거나 향수이거나 시대착오적 광기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낭만주의, 너는 졌다’라고 현실은 말한다. 한때 낭만주의는 자신의 정점에서 예술을 절대화하고 예술가를 세계의 새로운 창조자로 공포했지만, 이제 그것은 신화가 됐다. 세상은 만만치 않았고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예술일반의 대명사로까지 격상됐던 낭만주의는 예술의 과거사이자 뒤안길이 되었다. 현실을 과소평가한 대가인가. 혹은 현실의 저주인가.     


강민수, idyll(광장), 혼합기법, 155x195, 2010 ⓒ강민수 

그리하여 낭만주의는 죽었다. 예술은 낭만이 아니다, 라는 부인도 예술가들의 입에서는 나왔다. ‘예술이 밥 먹여 주더냐’라는 유구한 조롱도 맞장구치며 이와 함께했다. 예술은 현실이고, 예술은 실용이라는 선언도 어쩌면 놀랍지 않다. 하지만, 방부 처리하여 냉동고에 집어넣듯이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일까. 예술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던가. 우리에게, 우리시대에 여전히 예술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다면, 그리고 여전히 예술에 어떤 가능성이 남아있다면, 예술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자 꿈이고 우리 감각과 감수성의 갱신을 의미한다면, 예술은 꿋꿋하게도 여전히 낭만적인 것 아닌가. 낭만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자기 자리이다. 어떤 것의 최대치를 그 본질로 규정할 수 있다면, 낭만주의는 예술 자체이기도 하다. 현실과의 영원한 불화를 자기 존재의 불쏘시개로 갖는 한, 예술은 언제나 낭만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낭만주의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이면서 낭만주의가 되돌아오는 이유이다. 컴백홈. 컴백낭만주의.   

하지만 이 ‘돌아온 낭만주의’는 현실의 압도적인 위세 속에서 자신의 몸을 낮춘다. 낭만주의는 배제의 제스처, 거세의 포즈를 동반할 때만 현실 속으로 편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검열을 통과하려고 할 때 이제 낭만주의가 붙일 수 있는 표찰은 ‘새로운’이 아니라 ‘몹쓸’이다. 몹쓸 낭만주의는 목에다 밧줄을 건 낭만주의다. 당신은 이 낭만주의에 대해 마음껏 욕하고 비아냥거려도 좋다. 이것은 ‘몹쓸’ 낭만주의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용어들을 무료로 대여해줄 수도 있다. 무슨 뜬금없는 낭만주의냐고 반문하는 건 기본이다. 아직도 그대는 낭만주의냐고 조롱할 수도 있겠다. 혹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낭만주의도 돈이 되나요?  

그런 포즈가 당신에게 중요하다면, 그건 당신의 몫이다. 잘 챙겨 가시길 바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몹쓸 낭만주의’란 명명 자체가 당신의 고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 전시가 앞세운 ‘주권적’ 제스처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비난과 비방과 비아냥거림은 전혀 새롭지 않은 ‘표절’에 불과하다. 당신의 안목은 당신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새롭지 않다. 그것은 미적이지 않으며, 윤리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재미도 없다. 당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당신의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몹쓸 낭만주의’는 그런 점에서 한 번 더 몹쓸 짓을 했다. 이 시대에 감히 예술이 살아있다고 말하려는 시도, 그럼으로써 현실의 승리를 껍데기로 만들려는 시도 말이다. 자신의 목을 내놓은 낭만주의는 이로써 한 번 더 부활한다. 그리하여 낭만주의가 돌아왔다. 이번엔 좀 몹쓸 놈이다.  

11.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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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옮겨놓으려던 기사를 찾아 옮겨놓는다.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눈빛, 2011)에 대한 리뷰기사다. 평소 사진책에는 주목하지 않아서 책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는데 방송대TV의 '책을 삼킨TV'에서 다룬다고 하여 알게 됐다. 정서적인 만족도로 치자면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하다. 지난 세대 한국인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서울의 풍경이라지만 골목안 풍경은 내가 살았던 지방도시들의 풍경과 별로 다르지 않다. 사진에 찍힌 얼굴들도 그렇다. 2005년에 타계한 작가에게 뒤늦게 경의를 표한다. 



한겨레21(11. 09. 12) 좁은 길 사이 펼쳐진 아름다운 가난

사진하는 동네 바깥에서 김기찬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름 석 자를 대면 “누구?” 하고 되묻거나 “최민식, 강운구는 아는데…”라며 겸연쩍어하기 일쑤다. 이럴 때 그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사진 봤는데” 하며 반색하거나 “작가 이름이 뭐랬지?”라며 자세를 고쳐잡는 경우가 열에 아홉이다. 나물을 손질하는 아낙, 숙제 하는 아이들, 잡담하는 노파들, 흘레붙은 똥개 한 쌍 등 1970~80년대 한국의 대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던 빈민촌 골목길의 살가운 풍경이 그의 사진엔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가 공지영이 달동네에서 보낸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쓴 자전소설 <봉순이 언니>의 표지를 장식한 것도 1994년 김기찬이 찍은 서울 도화동 사진이었다.

 

집의 연장이자 소통의 공간  
<골목안 풍경 전집>(눈빛 펴냄)은 김기찬이 <골목안 풍경>이란 이름으로 낸 6권의 사진집과 미공개 유작 34점을 한데 모은 책이다. 실린 사진이 500점이 넘는다. 김기찬은 1968년부터 골목길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서울역 뒤 산동네인 중림동이 주요 무대였다. 처음 중림동을 찾던 당시를 회상하며 2003년 김기찬은 이렇게 적었다.

“1960년대 말. 사진 찍는 것이 좋아서 카메라 한 대만 달랑 메고 서울역전과 염천교 사이를 오가며 삶에 지친 사람들을 찍다 흘러든 곳이 중림동 골목이었다. …중림동은 참으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사직동 골목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 테마는 골목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안 풍경, 이것이 곧 내 평생의 테마이다’라고 결정해버렸다.”(589~590쪽)

30년 넘게 사진을 찍는 동안 골목길의 바깥 풍경은 현기증 나게 변했지만, 골목안의 시간은 정지돼 있거나 아주 느리게 흘렀다. 1990년대 중반에 찍은 사진이지만, 그 안에 담긴 모습이 2000년대보다 1970년대와 더 닮아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88올림픽을 치르고,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향해 달려가던 시절임에도 골목길의 아낙들은 길바닥에서 누룽지죽을 나누고, 아이들은 몰려나와 고무줄을 넘는다. 이들에게 골목길은 여전히 집의 연장이자, 소통의 공간이다.  

이런 김기찬의 작업은 종종 최민식의 그것과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평생을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했다. 도시의 가난이다. 최민식은 거리에서 조우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해 찍었다. 김기찬은 산동네에 머물며 골목길이란 공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함께 사진에 담았다. 최민식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사진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는 순간)을 포착해 가난한 자의 삶에 대한 애정과 가난을 방치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반면 김기찬은 가난의 고통보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쳐보이려 했다. 이를 두고 사회학자 윤일성은 ‘분노하는 자의 시선’(최민식)과 ‘그리워하는 자의 시선’(김기찬)의 차이로 구분하기도 했다.(‘도시빈곤에 대한 두 가지 시선-최민식과 김기찬의 사진 연구’)

김기찬에게 골목길이 그리움의 대상인 것은 그 자신이 산동네 골목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사실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그는 고백한다. “어렸을 적 아름답게 채색되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뛰어놀던 골목을 찾는다. 도심 한가운데, 빌딩숲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던 우리들의 고향의 모습이 떠오른다. 삶이 힘겹고, 딛는 땅이 비좁고 초라해도 골목안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서로를 아끼는 훈훈한 인정이 있고, 끈질긴 삶의 집착과 미래를 향한 꿈이 있다.”(33쪽)  

공동체를 향한 불멸의 소망
물론 가난한 자들의 삶이 왜 훈훈하고 아름답기만 했겠는가. 골목길은 세상의 모든 슬럼이 그러하듯 더럽고 냄새나고, 다툼과 악다구니가 넘쳐나는 비루함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기찬의 골목길 사진에서 남루와 비참의 기운이 풍겨나지 않는 것은 사진을 찍는 자의 마음과 시선이 부드럽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찾던 서울의 골목길이 급격한 재개발로 하나둘 사라지고 ‘제2의 고향’인 중림동마저 1997년 철거됐을 때, 작가의 그리움은 물리적 대상을 잃고 부유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말년의 작품 활동이 골목을 떠난 사람들의 변화한 모습을 담는 데 바쳐진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소설가 신경숙은 “과거에 묶여 있는 시간을 자유롭게 풀어주고자 한 노력”(478쪽)이라고 평가했지만,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던 작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는 작가의 슬픔이 화면 곳곳에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중림동 산동네가 사라지고 8년 뒤인 2005년 김기찬도 죽었다. 68살이었다. 도시연구자 김형국이 “사람이 한반도 땅에 정착해서 집단 취락을 이룬 이후 줄곧 이어져온 유구한 역사의 공간 양식”(228쪽)이라고 평한 골목길도 그 사이 서울과 대도시에선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이로써 골목길은 그리움의 대상에서 애도와 멜랑콜리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골목길에 투사됐던 ‘공동체’를 향한 도시인들의 소망은 시간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으리란 점이다. 이미 김기찬의 사진 속에서 그것은 ‘부재하는 현존’이라는 역설적 방식으로 불멸의 삶을 획득하지 않았는가.(이세영 기자) 

11.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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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람 2011-09-13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울에 30년을 살고 미국 온 사람인데 요즘 서울의 모습을 보면 한편 슬프고 한편 화가 납니다.

도시 개발을 이런 식으로 싹 밀어버리고해야 되는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아예 없어졌고 중고등학교 시절에 살았던 곳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전부 아파트로 되어 버렸고. 서울은 과거를 지우고 사는 곳입니다. 무식한 놈들이 서울 행정을 맡고 있는 탓이죠.

위의 사진을 보고 슬픈 생각이 나서 한자 적었읍니다. 김기찬은 여기서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만 아주 귀한 사진을 남겼군요.


로쟈 2011-09-13 09:58   좋아요 0 | URL
재개발 덕분에 먹고 살게 된 이들이 많으니까요. 그걸로 정치도 하고...

숲노래 2011-09-14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무라 이헤이, 토몬 켄.
이 두 사람을 나란히 읽어 본다면,
사진책이 '책'으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느끼면 돼요.

로쟈 2011-09-14 17:58   좋아요 0 | URL
검색이 안되는 저자들인데요. 번역돼 있나요?
 

오랜만에 미술 전시회 소식이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늘의 프랑스 미술'전 10월 16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특별히 '마르셀 뒤샹 프라이즈' 수상자와 후보자들의 작품이 대거 전시된다고. 좀 멀기는 하지만, 시간을 내 한번쯤 걸음해도 좋겠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 중인 마티유 메르시에가 2006년에 제작한 브론즈동상 ‘호모클러스’(Homoclus)  

경향신문(11. 07. 29) 현대미술 아버지, 마르셀 뒤샹에 대한 경의

‘오늘의 프랑스 미술: Marcel Duchamp Prize(마르셀 뒤샹 프라이즈)’전이 10월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본관에서 열린다. 프랑스 현대미술의 흐름과 첨단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프랑스 출신인 마르셀 뒤샹(1887~1968)은 1917년 남성용 소변기를 뒤집은 작품 ‘샘(Fontaine)’을 선보이며 ‘레디 메이드’라는 현대예술의 새 장을 개척,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현실주의 미술가다. 그의 아방가르드적인 정신을 기려 제정된 ‘마르셀 뒤샹 프라이즈’는 프랑스의 현대미술국제화추진회가 2000년부터 세계 미술 무대에서 영향력 있는 프랑스 출신의 젊은 현대미술가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이번 전시에는 마르셀 뒤샹 프라이즈 수상자와 후보자 45명 중 16명이 작업한 영상, 설치, 조각, 사진, 판화 등 100여점을 선보인다. 특히 4명의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해 자신의 작품을 직접 설치하는 등 한국 전시에 관심을 나타냈다.  

5개월 동안 준비한 이번 전시는 흔히 접할 수 있는 회화보다 설치와 미디어에 비중을 둔 게 특징이다. ‘오브제’라고 불리는 일상의 물건들을 예술적인 상황으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 ‘예술은 눈에 보이는 물건 자체만이 아니라 정신 속에도 담겨있다’는 주제를 강조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보다 역사의식을 되짚어보는 작품이 대부분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전통과 모더니즘을 연결해 작품에 녹인 작가 마티유 메르시에(41)는 산업화의 소산물인 일상적인 물건들을 삶에 끌어들여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슈퍼에서 구입한 알록달록한 생활용품들을 이용해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수직·수평선과 몇 가지 색을 조합해 시각적 형태를 표현했다.

작곡하면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창작품을 만드는 셀레스트 부르시에-무주노(50)는 전시관에 동그란 물통 3개를 바닥에 설치하고 펌프에 의해 생성되는 가벼운 전류효과로 회전하는 물통 안에서 도자기 그릇들이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도록 한 작품을 선보인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로랑 그라소(39)와 시프리앙 가이야르(31)의 영상작업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지난해 마르셀 뒤샹 프라이즈 수상자인 가이야르의 영상물 중에 ‘레이크 아치’는 1분30초 길이의 짧은 영상이지만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다. 강물의 수심이 얕은 줄 모르고 다이빙한 두 남성이 코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을 담았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초대작가였던 그라소는 3부작인 ‘데스 뉘안스키 레이온’에서 이익을 위해 싸우는 인간의 모습, 잘못 지어진 건축물의 파괴 장면 등을 통해 망가진 존재의 미학을 해부했다.

음식을 재료로 이용한 미셸 블라지(45)의 작품은 음식 썩는 냄새를 감당할 수 없어 전시하지 못하고 대신 설겆이용 세제를 이용한 거품 나는 그릇을 설치했다. 블라지는 ‘현재’와 ‘살아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작품 도록을 만들지 않고 대신 자신의 작품 레시피(요리법)를 제작하는 작가다.

한국 전시를 위해 내한한 프랑스 현대미술국제화추진회 질 푸시 회장(80)은 “1994년 설립된 현대미술국제화추진회는 300여명의 현대미술품 개인 소장가들을 주축으로 프랑스 미술의 홍보와 세계화에 앞장서는 단체”라며 “예술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향유하는 문화라는 생각을 지양하고 모든 사람이 예술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02)2188-6000 (유인화 선임기자) 

11. 07. 28. 

 

P.S. 뒤샹을 위한 책 몇 권도 골라본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휴머니스트, 2011)은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배경을 일러주는 책이겠고, 베르나르 마르카데의 <마르셀 뒤샹>(을유문화사, 2010)은 가장 두툼한 평전이다. 닐 콕스 등의 <마르셀 뒤샹>(시공아트, 2009) 표준적인 소개서. 그밖에도 화집과 인터뷰집 등이 다수 출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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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택배로 받은 책은 건축 전문지 <공간>(522호)이다. 이달의 북리뷰로 김형진의 <미술법>(메이문화, 2011)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생소한 분야의 책이어서 골랐지만 사례 중심이어서 아쉬웠다.  

공간(11년 5월호) 미술법 

“법과 예술이 만나면 서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마냥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또 피하는 것만이 상책은 아닐 때도 있다. 미술이 자기만족적인 행위를 넘어서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될 때, 미술시장과 미술산업의 대상, 곧 ‘예술상품’이 될 때 미술은 법과 충돌하며 또 법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실상 법의 간섭은 피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법의 도움은 받고 싶은 것이 ‘미술 본색’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로 피하는 것보다는 알아두는 것이 더 좋은 방책이 아닐까.   

김형진의 <미술법>은 ‘더 좋은 방책’을 마련하는 데 유용한 가이드북이다. 저자는 지적재산권 분야를 전문 변호사로 대학에서는 미술법을 강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술법은 “미술에 대한 법을 말하는 것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술법(Art Law)’이란 말 자체가 아직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지만 법조항에 미술법이 특정돼 있는 건 아니므로 ‘미술과 관련한 법’으로 느슨하게 이해해도 되겠다. 사실 미술작품에 대한 저자의 정의 자체가 포괄적이면서도 느슨하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 작가가 미술작품을 만들려고 했고 그렇게 하는 데 분명히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 작품은 미술작품”이라고 정의내리기 때문이다.   

저자가 들고 있는 사례지만 2001년 영국 미술계 최고의 영예인 터너상을 수상한 작가 마틴 크리드가 발표한 ‘작품번호88, 구겨서 공이 된 A4 용지 한 장’을 보더라도 그렇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종이를 구긴다면 쓰레기가 될 뿐이지만 터너의 구겨진 종이는 뒤샹의 ‘변기’가 그랬던 것처럼 당당히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품으로 간주될 경우에는 ‘대우’가 달라진다. 통관 시 관세면제 혜택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저작권법과 여러 관련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책은 미술작품이 법과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놓은 자료집처럼 구성돼 있다. 저작권에 관한 내용이 아무래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표현의 자유와 외설 문제, 미술품 관련 범죄, 미술과 전쟁, 미술과 세금 등 흥미로운 주제들도 포함돼 있다. 그중에서도 최근에 프랑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일부를 우리에게 반환한 사례와도 맞물려, 특히 작품의 소유권에 관한 장들이 눈길을 끈다.  

저자에 따르면 대체로 대륙법 국가들은 원소유자보다 현 소유자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유럽 국가들은 도난 발생후 시효가 지나면 더 이상 원 소유자의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영미법에서는 현 소유자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것과는 달리, 가령 프랑스에서는 설사 현소유자가 선의의 취득자가 아니더라도 도난 사건이 일어난 후 30년이 경과하면 원 소유자는 반환받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프랑스 정부는 시효에 관계없이 장물에 대해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다소 편의적인 법적용이란 인상이다. 자신이 훔쳐온 물건에 대해서는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남이 훔쳐간 자기 물건에 대해서는 반환청구권을 인정하는 셈이니까.   

프랑스의 사례라면 역사적 배경이 없지 않다. 널리 알려진 대로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군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엄청난 양의 미술품을 조직적으로 노획하고 약탈하여 나폴레옹미술관에 채워놓았다. 바로 루브르 미술관의 전신이다. 이렇게 약탈해온 미술품을 프랑스는 일체 돌려주지 않았다. 이와 견주어볼 만한 것이 2차 대전 시 소련의 약탈 사례다. 전쟁기간은 물론 전쟁 이후에도 소련은 독일과 동유럽에서 광범위한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 가운데는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약탈해온 미술품도 상당수 있었다. “소련이 보관하고 있는 많은 미술품 중에서 일부 밝혀진 발딘 컬렉션(Baldin Collection)은 약 2천 350만 달러 상당의 미술품으로 반 고흐, 뒤러, 렘브란트 등 거장의 작품이 포함돼 있었다.”   

요컨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1995년부터 러시아의 푸시킨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는 이들 약탈 문화 재산의 전시가 시작됐다(개인적으론 2004년에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본 인상파 컬렉션이 인상적이었다). 독일과 프랑스로선 유감스럽겠지만 미술품의 반환요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한다.   

미술법이 문제되는 갖가지 사례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읽은 건 미술품 훼손 사례다. 지난 2006년에 벌어진 일인데 세계적인 재벌 스티브 윈이 소장품인 피카소의 1932년작 ‘꿈’을 친지들에게 자랑하다가 그만 팔꿈치로 그림을 치는 바람에 2인치 정도 파손했다고 한다. 시가 1억 3900만 달러에 매각할 예정인 그림이었다. 비록 복구하긴 했지만 어이없는 실수로 수천 만 달러의 손실을 감수하게 된 그는 매각 결정을 포기하고 그림을 그냥 간직하기로 했다고 한다. 한숨을 돌리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 하느님, 그래도 제가 그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정말로 그의 안도에는 동감하는데, 훼손 당사자가 소장자 자신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 ‘기념비적인’ 훼손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탈리아 사람 피네로 카나타라면 예외였을까.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미술품을 훼손한다는 ‘상습법’ 카나타는 피렌체의 다비드 상에서 발가락을 자르고 잭슨 폴록의 작품에 매직을 칠한데다가 몬드리안의 그림에 오물을 토한 화려한 전력을 갖고 있다. 아무리 세계적인 재벌이라 한들 스티브 윈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아닐까 싶다. 

11.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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