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2009년 3월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을 다루고 있다(작년 12월에 쓴 글이지만 다소 늦게 게재되었다).

  

SPACE(09년 3월호) 움베르토 에코 추(醜)의 역사를 상대해주다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세계적인 기호학자이고 철학자이지만 본래의 전공분야는 중세 철학과 문학이다. 국내에도 소개된 <중세의 미와 예술>은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26살 때 쓴 중세미학 연구서이기도 하다. 지난 2004년에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이후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며 27개국에서 번역된 <미의 역사>(열린책들, 2005)만 하더라도 그가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건 40년도 더 전인 1960년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수십 년간 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그가 <미의 역사> 저자로 나선 것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들 정도다.    

<미의 역사>에 이어서 출간된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에코는 유사한 책의 출판을 요청받고 ‘추의 역사’를 바로 떠올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그런 주제를 다룬 책으로는 거의 최초라고 하니 조금 놀랍기까지 하다. <미의 역사>에서 에코는 ‘미’의 관념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화돼 왔는지 추적한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미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다르게 규정되고 표상되었다. 에코는 그러한 변화의 양상과 차이의 파노라마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추의 역사를 상대해주겠다는 것.  

미학에서 ‘미’와 ‘추’가 짝이 되는 개념인 만큼 <추의 역사>가 <미의 역사>의 짝이 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한데, 이 추의 역사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얼핏 미의 역사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정의내린 추의 관념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말이다. 에코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자료를 수집하고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추가 미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를 흉내 내자면,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추함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이 제각각의 다양성이 양적인 차원을 넘어서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라는 두 가지 역사의 질적인 차이를 낳는다.    

에코의 말을 직접 빌자면, 미에 대한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서 루벤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 오늘날 곧바로 패션쇼 무대에 설 수는 없지만, 미는 대체로 비례와 균형 같은 몇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다. 즉 세기의 미녀로 꼽히던 은막의 스타 브리지트 바르도와 그레타 가르보의 코는 분명 크기와 모양새가 서로 달랐지만 일정한 길이를 넘지는 않았다. 반면에 추한 코는 피노키오의 코에서부터 넓적코, 매부리코, 비뚤어진 코, 콧구멍이 셋인 코, 종기가 많이 난 코, 술주정뱅이의 붉은 코 등 아주 다양하다. 따라서 <추의 역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갖가지 추의 이미지는 미의 이미지보다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다. 그러니 추는 미와 비대칭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윤리학에서 악의 개념을, 법학에서 불법의 개념을, 종교학에서 원죄의 개념을 다룰 수 있듯이 미학에서 추를 ‘부정적 미’로서 다루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 로젠크란츠는 1853년에 출간한 대표작 <추의 미학>(나남, 2008)에서 추를 ‘미의 지옥’이라 규정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가 사례로서 실제로 분석하고 있는 형식의 결여와 불균형, 부조화, 외관 손상, 변형, 불쾌함의 다양한 형상들은 너무도 방대해서 단순히 미의 반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에코의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추에 대한 규범적 정의와 기술은 불가능하다. 다만 가능한 것은 고대 세계의 추에서부터 중세와 바로크, 근대 세계와 아방가르드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불가능성을 낳는 다양한 추의 사례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추의 역사’가 아니라 차라리 ‘추의 분류학’에 가깝다(번역의 대본이 된  영어본은 <추에 대하여On ugliness>란 제목을 갖고 있다).  

에코 자신이 이미 서문에서 미적 관념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 같은 일을 추에 관해서는 할 수 없었다고 시인한 만큼, 명태 두름 꿰듯이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추의 역사’를 책에서 읽을 수는 없다. 아쉽지만 이것은 저자 에코의 한계가 아니라 추의 특수성이다. 그럼에도 추에 대한 두 가지 태도 정도는 추에 대한 원형적인 관념으로서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한 가지는 고대 그리스의 관념인데, 그들은 미를 일종의 ‘완벽함’으로 정의해 미와 추는 상대적이었다. 예컨대, 제법 단련된 복근이라도 ‘보다 더 완벽한’ 복근과 비교되면 추로 간주되는 식이다. 반면에 우주 전체를 신의 작품으로 간주한 그리스도교에서는 추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신학적 형이상학에서 추는 다만 예전에 좋았던 것이 손상되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소위 ‘범미주의’적 관점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추라고 보는 것일까.  

09.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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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좌빨에게 과학이란 무엇인가?
    from 급진적 생물학자 Radical Biologist 2009-03-13 09:32 
    수령의 릴레이를 받고 보니 릴레이란 시스템이 블로거간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일종의 윤활유로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트랙백은 왠지 댓글만큼 글을 쓰게 하는 어포던스가 약하다. 댓글은 해당 글과 같은 시야에서 볼 수 있지만, 트랙백은 링크를 타야만 볼 수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는 뭔지 알수는 없다. 여하튼 블로거들을 연결해 주는 시스템으로서의 트랙백이 가지는 어포던스는 게시판이 가지는 토론문화를 능가할 만한 어포던스가 아니다. 누군..
 
 
[해이] 2009-03-1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가격이 문제죠... 흙.... ㅠㅠ

로쟈 2009-03-11 23:57   좋아요 0 | URL
저도 청탁을 받고서야 구입한 책입니다.^^;

Kitty 2009-03-12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가격 ㅠㅠ) 꼼꼼히 읽지는 못하고 후루룩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미의 역사보다도 더 흥미롭더군요.
다만 읽고 나서도 뭔가 아른아른 잡히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로쟈님의 리뷰를 보니 머리속에서 확 정리가 되는 느낌이에요. ^^

로쟈 2009-03-12 08:06   좋아요 0 | URL
리뷰의 일이 정리하는 것이니까요.^^

마노아 2009-03-1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덜어낼 것이 없는 리뷰군요!

로쟈 2009-03-12 08:06   좋아요 0 | URL
덜어낼 수 있는 분량도 아닌데요.^^;

콩세알 2009-03-1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와 추의 역사'라는 제목을 읽고 순각적으로 'The history of Pendulums'을 떠올렸습니다. ^^ 아마도 에코의 소설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듯..^^;;

로쟈 2009-03-13 23:26   좋아요 0 | URL
ㅎㅎ 듣고 보니 그렇네요.^^
 

주말인 만큼 문화생활을 향유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지만 형편이 모자란 탓에 모니터로만 잠시 감상해보도록 한다. 멀리 산티아고에서 날아온 공연 소식인데, 2006년 방한한 바 있는 얀 파브르의 새로운 작품 이야기다. 기사에 이미지가 붙어 있지 않아서 호기심에 찾아보았고, 이왕에 찾은 거라 또 자료로 보존해놓는다. '성에 대한 기괴한 상상력'을 선보인다는 언급에서 지난주에 나온 <무감각은 범죄다>(이루, 2009)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용의자' 선상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감각'을 종종 갱신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공연 연습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http://www.facebook.com/video/video.php?v=1057528563213 참조). 아래 기사에서 파브르의 초연작을 '인내의 근원'이라고 적었는데, '인내의 난교'(Orgy of Tolerence)가 맞다.   

 

한겨레(09. 01. 16) 성에 대한 기괴한 상상력 퍼포먼스 거장 얀 파브르

종이 울리자 4명의 남녀가 팬티 속을 흔들며 자위 행위를 시작한다. 정한 시간 안에 누가 제일 많이 사정을 하는지 가리는 시합. 넷은 울부짖으며 흔들다 지쳐 쓰러진다. 뒤이어 소파와 사람의 섹스, 가방과 소파의 섹스가 갖가지 체위로 벌어진다.

2006년 한국에서 <눈물의 역사>라는 전위극을 선보였던 벨기에의 퍼포먼스 거장 얀 파브르가 산티아고 아밀 페스티벌에서 성과 자본에 대한 무한 상상으로 ‘미친 풍경’을 만들어냈다. 14일 밤 10시(현지시각) 칠레대학 부설 현대미술관에서 4일간의 무대 일정을 시작한 얀 파브르의 세계 초연작 ‘인내의 근원’은 남근적 자본과 물신주의가 성과 세계의 질서를 기형화시킨 지옥도 풍경이다.

남근 모양의 코를 달고, 총을 멘 괴한들이 어슬렁거리는 묵시록적인 무대가 배경이다. 카트 위에 걸터앉아 괴성을 지르며 통조림, 코카콜라를 출산하는 임산부, 패션 명품 가방의 지퍼를 열며 자위행위를 하는 여자, 카트를 이리저리 굴리며 왈츠를 추는 남녀들이 출몰한다. 괴기스런 중세의 고딕적 상상력으로 현대의 자본 만능 시대를 파고드는 풍경 속의 배우들은 ‘퍼킹’을 연발하면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테러리스트”라고 외친다.

지난해 9월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전시에서도 정액 분출 장면을 담은 ‘세계의 분수’ 등으로 민망한 화제를 낳았던 파브르는 산티아고에서 더욱 기괴해진 성적 상상력을 과시한 셈이 됐다.(산티아고/노형석 기자)   

09. 01. 17. 

P.S. 2006년에는 비슷한 시기에 공연된 레프 도진의 <형제자매들>에 온통 정신이 빠져서 얀 프브르의 <눈물의 역사>에는 미처 주목하지 못했었다. 뒤늦게 관련자료를 찾아 옮겨놓는다. OTR(Our Theater Review)의 공연소개이다(http://www.otr.co.kr/play/view.htm?sid=1469&mdevide=03). <눈물의 역사> 공연 클립은 http://www.videoplayer.hu/videos/play/30358 참조.

유럽 공연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현대의 다 빈치
얀 파브르는 현재 유럽에서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 희곡작가, 오페라와 연극의 무대연출가, 안무가, 무대장치와 의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보이는 다재다능함으로 인해 르네상스 시대의 다 빈치에 비견되고 있는 인물이다. 

<파브르 곤충기>로 유명한 곤충학자인 앙리 파브르의 증손자로 출생하여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곤충에 대한 지적인 관심은 신체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더불어 예술활동에 있어서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유년시절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거리의 표지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서 걸어놓는 것으로 예술활동을 시작한 그는 <돈 공연 Money-Performance> 공연 중 돈을 불태워 그 재로 돈(money)이라고 쓰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공연계의 주목을 받았다. 다른 공연에서는 자신의 피로 드로잉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훗날의 신체 3부작과 체액 3부작을 예견케 하였다.  

연극과 오페라 그리고 무용을 넘나드는 천재성
얀 파브르는 그의 공연을 항상 3부작으로 구성하여 연극에서 오페라로, 오페라에서 무용으로 그의 지평을 넓히는 장치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얀 파브르의 작품은 장르를 구분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번에 공연될 <눈물의 역사 History of Tears>도 규정할 수 없는 연극과 무용, 문학와 시각적 효과가 어우러진 종합적인 작품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80년대 연극에 대한 첫 삼부작 중 8시간이 넘는 연극 <이것이 바라고 예견해 왔던 연극이다 This is the theatre one should have awaited and expected>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얀 파브르는 이 작품과 베이스 비엔날레 오프닝 공연 이었던 <연극의 광기의 힘 The power of theatrical frenzy>을 통하여 현대연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의 하나가 되었다.  

90년대 중반  유명한 신체 3부작 <달콤한 유혹 Sweet Tamptations> <세계적인 저작권 Universial Copyrights> <불타오르는 상 Glowing Icons>을 통하여 본격화되기 시작한 얀 파브르의 신체에 대한 탐구는 2000년대에 체액으로 형상화 되어 체액 3부작의 첫 작품 <나는 피다 Je suis sang>와 2004년의 <울고있는 육체 The Crying Body>의 공연으로 이어졌다. 그동안의 공연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은 얀 파브르는 2005년 아비뇽 페스티벌의 주빈으로 초청되어 그의 체액 3부작의 마지막인 〈눈물의 역사 History of Tears〉를 초연하면서 다시금 세계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 세계에 충격과 논란을 몰고 온 얀 파브르의 최신작, <눈물의 역사>
세계의 공연계를 선도한다는 점에서 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아비뇽 페스티벌은 올해 벨기에의 얀 파브르를 주빈으로 초대하면서 그의 체액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눈물의 역사 History of Tears>를 개막작으로 선정하였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세계초연이 된 이 작품은 개막 전부터 논란이 예상되었는데 그 독특한 실험성으로 인하여 개막 후 곧 유럽 예술계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거대한 화두를 던졌다. 

눈물을 통해 표현하는 육체의 시
수 백 여개의 유리그릇과 수 십 여개의 사다리 같은 오브제, 10여명의 무용수가 15분 가까이 울음을 터뜨리는 첫 장면부터 20여명의 무용수 들이 옷을 벗고 뛰어다니는 등, 시작부터 끝까지 이 작품은 도발적이고 독특한 표현들로 가득하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얀 파브르가 배우들에게 8시간 내내 비평가들의 비평을 중얼거리게 하거나 여배우로 하여금 공연 내내 흰 천을 쥐어짜게 하는 등 얀 파브르 작품의 파격성을 알고 있던 관객들조차도 새로운 표현양식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얀 파브르가 이 작품을 통하여 결코 미리 계산해서 관객을 도발한 것이 아니라  눈물이라는 기제를 통하여 육체의 시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눈물을 이미지로 구현한 충격의 무대
이 작품은 신체의 3/4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찰에서 시작하였다. 얀 파브르는 기쁨 혹은 슬픔의 눈물, 두려움에 흘리는 눈물, 노동 이후 신체에서 흐르는 눈물(땀)을 신체의 눈물이라고 규정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를 신의 눈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기쁨과 슬픔, 고통과 쾌락, 환희와 절망 모두를 눈물이라고 하는 액체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얀 파브르는 이런 눈물의 근원에 대해 말하고 눈물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면서 서양의 오랜 역사에서 이성의 그늘에 묻혀있던 눈물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신체에 대한 오랜 관심에서 시작되어 2000년대의 체액 3부작으로 구체화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이 작품은 환상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신체와 눈물을 재조명 할 것이다.   

P.S.2. 몇 개 둘러본 동영상 중에서 '죽음의 천사'도 인상에 남는다(http://www.youtube.com/watch?v=DRHlijDlBZc&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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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17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처럼 겉으로만 고고하고 근엄하신 나라에선 당분간 보기 힘든 공연이겠군요..
(첫번째 사진 들고 있는 AK47 소총을 보며 테러리스트.연상했는데 바로 뒤에 글자로 테러리스트 나오는 걸 보고 혼자서 실실 웃었다는..)

로쟈 2009-01-17 21:14   좋아요 0 | URL
이름값으로 밀어붙이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명품'에는 또 환장들을 하니까...
 

어제부터 키보드(자판)가 먹통이 되는 바람에 할일은 줄었지만(!) 꽤나 불편하다. 조지아 오키프에 대한 기사 하나를 옮겨오는 데 몇십 분이 걸리는 식이니 말이다. 하는 수없이 노트북에서 마무리를 한다. 이번주 예술분야 신간들 가운데 한 권만 꼽으라면 내가 고를 책은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민음사, 2008)이다. '조지아 오키프'란 이름이 생소한 이라도 그녀의 '커다란 꽃 그림'은 낯익을 것이다. 그녀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는 예전에 '조지아 오키프와 산타페'(http://blog.aladin.co.kr/mramor/912676)란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다. 스티글리츠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사진작가이며 오키프의 남편이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에게 영감을 준 모델로 출발하여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하게 된다고.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관계와 자주 비교되는 이유이다. 이번에 나온 책 <풀 블룸>(원제) 덕분에 그녀의 예술과 생애에 대해 풀 스케일로 들여다볼 수 있겠다...    

문화일보(08. 12. 05) 사진모델서 화가로… ‘美모더니즘의 女神’

#1. 그리스 신화에 피그말리온이라는 키프로스의 왕이 있다.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한 피그말리온은 어느날 아름다운 여성을 조각하고 나서 그만 그 조각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조각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피그말리온이 여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아틀리에로 돌아와 조각에 입을 맞추자 조각은 사람이 돼 걸어 내려왔다. 이 여성이 갈라테아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미국의 여성 화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가 갈라테아라고 하면 그를 발견한 사진작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피그말리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키프는 아름다운 갈라테아에 멈추지 않고 한 사람의 예술가로 자립, “사물의 지극한 단순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미국 모더니즘의 개척자가 됐다. 오키프는 1940년대 추상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에서부터 1950년대와 1960년대 하드에지, 팝아트, 옵아트, 미니멀리즘에 이르기까지 미국 모더니즘 양식들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오키프가 숨진 뒤 2001년 ‘붉은 아네모네와 칼라’는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620만달러(당시 62억여원)로 팔려 여성 화가로는 최고가를 기록했다. 스티글리츠가 찍은 오키프의 손은 2006년 소더비 경매장에서 147만2000달러(당시 15억여원)로 사진경매가 최고를 기록했다.



이 책은 저자가 10년에 걸쳐 수십명을 인터뷰하고 그에 관한 수천통의 편지 등을 읽고 쓴 오키프의 전기다. 이 책에 따르면 오키프는 엄청난 고통, 전문가로서의 실패와 정서적 좌절과 행운,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지혜를 갖고 있는 여성이었다.

#2. 1908년 미국 뉴욕 예술계 명사였던 스티글리츠의 291화랑은 마티스, 브랑쿠시, 세잔, 피카소 등을 미국에 처음 소개한 진보적인 화랑이었다. 1915년 시골뜨기 화가 지망생 오키프가 찾아와 스티글리츠에게 수채화 추상화를 보여줬다. 스티글리츠는 “드디어 회화사에 진정한 여성 화가가 나타났다”고 격찬했다.

오키프는 화가가 되기 위해 아버지뻘 나이의 유부남이었으나 자신을 알아준 스티글리츠와 결혼했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와 2년동안 200점이 넘는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은 1921년 전시를 통해 오키프를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재능은 오히려 감수성이 강한 여신이면서 연약한 성적 대상으로 연출된 스티글리츠의 이미지에 가려져 버렸다.



#3. 이 책의 원제는 ‘풀 블룸(Full Bloom·만개·滿開):조지아 오키프의 예술과 생애’다. 오키프가 본격적으로 포착한 것은 만개한 꽃이다. 그는 꽃의 여성적 이미지에서 강렬한 전복적 의미를 추적했다. 그의 활짝 핀 꽃은 프로이트적 성적 의미를 넘어 남성의 시기와 두려움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예술은 뉴욕의 스티글리츠를 떠나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홀로 칩거, 천착한 해골이다.

오키프는 골반뼈 그림에 대해 “뼈의 구멍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였을 때 나는 골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볼 때 구멍 안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그것은 모든 인간의 파괴가 끝난 후에도 언제나 거기에 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김승현기자)

08. 1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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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0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판 프리다 칼로군요.스티글리츠는 앵글로 색슨 이름은 아닌 것 같고...조상이 누구일까요?

로쟈 2008-12-06 19:22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도 서양 이름엔 별로 감이 없어서... 독일이나 그 주변 같기도 하고요...

개츠비 2008-12-07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이책의 표지가 진중권 선생님의 <성의 미학>과
똑같은데요? 전 <성의 미학>인줄 알았는데 딱보고...ㅋㅋ

로쟈 2008-12-07 08: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책의 표지로도 쓰였죠...
 

지난 주말부터 덕수궁미술관에서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이 열리고 있다(http://www.laart.kr/#). 오늘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는데, 11월 9일까지라고 하니까 아직 여유는 있다. 행사를 공동주최한 경향신문에서는 연재기사로 라틴아메리카 중에서도 멕시코 미술의 '거장' 5명을 소개한다고 한다. 첫 꼭지인 '프리다 칼로'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7. 30)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의 작가를 찾아서]① 프리다 칼로

국립현대미술관·경향신문·MBC가 공동 주최하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덕수궁미술관·11월9일까지)에는 제목 그대로 라틴아메리카 예술의 대가들이 등장한다. 디에고 리베라, 페르난도 보테로, 알프레도 람 등은 세계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위주의 미술을 주로 접해온 한국에서 이들 작가의 이름은 낯설다. 경향신문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라틴아메리카 미술 중에서도 핵심으로 꼽히는 멕시코 미술의 대가 5명과 그들의 작품 세계를 멕시코 현지 취재를 통해 소개한다.

생명·고통 독특하게 표현 ‘멕시코 문화아이콘’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멕시코시티에 살아도 10번 미술관에 오면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1~2번 볼까말까예요.” 지난 17일 멕시코시티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찾았을 때 안내자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다 칼로(1907~1954)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두 명의 프리다’(1939년작)를 보기 위해 갔지만 해외 전시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멕시코에서 멕시코의 대표 작가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프리다 칼로의 인기를 증명한다. 멕시코시티의 교외 코요아칸에서 태어난 그는 드라마틱한 삶과 독특한 자화상 작품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다.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신체 장애, 이로 인한 불임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멕시코의 또다른 대표 화가이자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사랑 등이 작품의 소재가 됐다. 인디오 전통복식 등 멕시코 전통 문화를 작품에 담고 멕시코적인 민중미술 또한 보여줌으로써 원시적 생명력, 무의식, 정신적 고통을 독특하게 표현해냈다는 인정을 받는다.

“개인 인생사를 그림 속에 독창적으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습을 소박하게 반영한 측면도 있지만 이것이 보는 사람에게는 직접 전달되기 때문에 강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작가와 그의 작품은 이제 멕시코의 문화 아이콘이 됐다고 소개한 멕시코 틀락스칼라 주립미술관(이하 주립미술관) 헬레나 헤르난데스 관장의 말이다. 주립미술관은 서울 정동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이하 라틴전)에 전시되고 있는 프리다 칼로 작품 7점을 제공했다.



프리다 칼로 탄생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멕시코 정부는 해외에 있는 프리다 칼로 작품까지 모아 대대적인 전시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프리다 칼로의 생애와 작품은 새삼 주목의 대상이 됐다. 이 전시는 현재 미국 5개 도시 순회전에 나선 상태. 한국의 라틴전을 위해 프리다 칼로 작품을 구해야 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은 수소문 끝에 틀락스칼라 주립미술관에서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백남준 작품 12점을 주립미술관에 보내 교환전시를 열고 있다.

헤르난데스 관장은 “주정부가 25년 전 프리다 칼로의 친구인 시인 미겔 리라로부터 프리다 칼로 작품 7점을 구입했으며, 2004년 주립미술관을 세우면서 전시할 공간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주립미술관 안에는 프리다 칼로 작품을 모아 놓은 전시실이 따로 있다. 유화 2점과 수채화 3점, 스케치 1점, 나무 화판 1점 등이다. “작품 활동 초기인 1920년대 중후반에 그린 작품들로 사진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작업을 시작한 시기의 것들”이라고 말했다. 친한 친구였던 미겔 리라의 초상화, 멕시코 혁명 지도자 판초 비야와 혁명군의 생활상을 담은 작품, 수채로 그린 자화상 등이다. 한국의 라틴전에는 주립미술관의 프리다 칼로 작품 7점이 모두 들어왔으며 역시 별도의 방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프리다 칼로 작품은 130점 정도로 추정된다. 작품 수가 적고 소장처가 흩어져 있어 그의 작품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애가 타게 마련. 한국에서는 라틴전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됐지만 곧 프리다 칼로 관련 새 자료와 작품들이 멕시코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지난 17일 멕시코시티 코요아칸에 있는 ‘프리다 칼로 미술관’을 찾았을 때 시메나 고네스 큐레이터는 “최근 새로 발견된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의 유품 상자에서 2만2000여점의 자료와 작품이 확인됐다”면서 “오는 8월28일 이를 일반에게 공개하는 행사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프리다 칼로, 디에고, 그들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등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 프리다 칼로의 사진 작품 두 점과 색연필로 그린 자화상,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의 스케치·낙서·책 등의 자료가 포함된다.(멕시코시티·틀락스칼라/ 임영주기자 )

08. 07. 30.

 

 

 

 

P.S. 프리다 칼로에 대한 책들은 화보집을 포함해 많이 나와 있는 편이다. 르 클레지오의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2008/2001)은 예전에 나온 <예술, 그리고 사랑과 혁명의 길>(고려원, 1995)과 같은 책(<디에고와 프리다>)을 옮긴 것이다. 생각해보니, 멕시코 출신의 여배우 셀마 헤이엑이 주연을 맡은 영화 <프리다>(2002)도 국내 개봉된 적이 있다. 영화의 한 장면은 http://kr.youtube.com/watch?v=VetAAOkrQkU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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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8-07-30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표작으로 꼽히는 ‘두 명의 프리다’(1939년작)를 보기 위해 갔지만 해외 전시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앗! 바로 이겁니다! 저도 멕시코시티 미술관 두 곳이나 갔었는데 하나는 헛수고, 하나는 프리다 작품이 있긴 있었는데 제가 보고 싶어하는건 없었다는...ㅠㅠ
안내인한테 물어보니 미국에서 전시하고 있다고 해서 주저앉을뻔 했습니다. 흑.

어머나! 글 자세히 읽어보니 11월 9일까지 전시를 하는군요!! 게다가 디에고 리베라와 보테로까지!!!!!!! 보테로 완전 팬인데...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한국 가서 꼭 가봐야겠어요!!! 멕시코에서 못본 프리다 칼로 작품을 한국 가서 보게 생겼네요;

로쟈 2008-07-30 18:04   좋아요 0 | URL
아, 멕시코에 계시군요!..

람혼 2008-07-3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 선생의 저 아우라란...! ^^

로쟈 2008-07-30 18:05   좋아요 0 | URL
요즘은 '포스'란 말을 더 자주 쓰는 듯해요.^^

람혼 2008-07-30 20:34   좋아요 0 | URL
앗, 그렇다면 조금 더 나아가 수정해봅니다:
트로츠키 선생의 저 '간지'란...! ^^

수유 2008-07-3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인이죠.

로쟈 2008-07-30 22:04   좋아요 0 | URL
눈썹이 인상적입니다...

드팀전 2008-07-30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음악도 아주 좋았는데...

로쟈 2008-07-30 22:05   좋아요 0 | URL
겸사겸사 보고 싶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3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다 칼로 전기 어린이 용도 있더라구요.

로쟈 2008-07-30 22:08   좋아요 0 | URL
어린이용 전기물 시장이 오히려 더 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3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심지어 성인용에는 없는 판죠 빌라 전기도 나와요.타고르,낫세르도요.재밌는 건 스탈린 전기는 있는데 트로츠키 전기는 아직 어린이 용이 없더라구요.뭇솔리니,히틀러도 있어요.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한길그레이트북스' 100번째 책으로 나온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2008)을 실마리로 삼아서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게 무엇인지 적은 글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를 여러 차례 다루면서 언급한 적이 있기도 하다(http://blog.aladin.co.kr/mramor/802981 등 참조).

한겨레21(08. 05. 27)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예술의 종말’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그거 뭐 유행 아닌가? (근대)문학, 철학, 역사 가릴 것 없이 떼로 종말을 고했다고 하는데, 예술이 끝났다는 게 굳이 새로운 소식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재차 드린다. 예술은 언제 종말을 고했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그 종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너무 과한 질문인가? 얼핏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나름대로의 예술관과 예술철학으로 무장해야 할 듯싶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에 따르면, 너무도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함께 박스 하나만 잘 기억해두면 된다. 비누 상자다.

‘예술’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아트(Art)’가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미술’을 뜻하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술의 종말’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충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1964년의 한 전시회에서다. 그는 당시 뉴욕 이스트 74번가의, 마치 재고품 창고 같은 모양새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슈퍼마켓에서나 진열돼 있을 법한 ‘브릴로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는 걸 보고 미적 혐오감을 넘어서는 철학적 흥분을 느낀다(‘브릴로’는 청소용 세제의 브랜드다. 이 비누 상자 옆방에는 켈로그 상자들도 쌓여 있었단다).

물론 워홀이 마켓에서 이 상자들을 사다가 미술관으로 그냥 옮겨놓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상자들은 그가 브릴로 상자를 모방해서 직접 제작한 것이다. 즉 진짜 브릴로 박스는 골판지로 만들어졌지만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합판으로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재질의 차이가 육안으로는 식별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해서 겉보기에는 똑같은 두 종류의 박스가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단순한 상품상자로서의 브릴로 상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워홀의 팝아트 작품으로서의 브릴로 상자. 하지만 이 두 상자는 보는 것만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 흔히 무엇이 예술작품인가는 ‘보면 안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 경우엔 ‘봐도 모른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미술이 시각(눈)의 문제에서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미술은 더 이상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철학적으로 따져보자. 똑같게 보이는 두 상자가 어떻게 해서 하나는 그냥 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이 되는가? 어떤 사물이 예술작품인가 아닌가는 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여 단토가 내놓은 대답이 ‘예술의 종말론’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1965년에 발표한 ‘예술계’란 논문과 1981년에 출간되고 최근 번역돼 나온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펴냄)을 통해서 제시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더 이상 가능하지도 또 유효하지도 않다면 거기서 예술의 역사가 종말에 이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나쁜 소식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사실 국내에는 단토가 1995년에 이 문제를 다시금 총정리해서 내놓은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펴냄, 2004)가 먼저 소개됐다. 이 책에서 단토는 헤겔주의자로서 예술의 종말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는 하나의 중대한 목적을 갖는다. 곧 자유의 확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시대에 도달하게 되면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그것은 달리 역사의 완성이기도 하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여서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창작자가 될 수 있다면 예술은 종말에 이른다. 예술의 민주주의가 곧 예술의 완성이다

08. 05. 21.

 

 

 

 

P.S. 애초에 단토의 책을 글감으로 삼은 건 '한길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해서였다. 최신간이라 다 읽어볼 여력은 없었고 한두 장 정도 읽어보고 간단하게 감상을 적으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서문에서부터 책은 막히기 시작했다. 기념 띠지까지 두르고 나온 책으로서는 좀 민망한 일인데, 가령 단토가 '일상적인 것의 변용'의 선구적인 예로 뒤샹의 예술세계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보라.

"나는 먼저 뒤샹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상적 존재의 생활세계(Lebenswelt)에 속하는 대상 - 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 - 을 예술작품으로 변화시키는 미묘한 기적을 처음으로 행한 사람은 미술사의 선구자인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57쪽)

뒤샹의 작업이 갖는 의의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인데, 얼핏 읽어도 셋째 문장과 넷째 문장은 서로 모순 아닌가? 그에 따르면, 뒤샹은 (1)일상의 하찮은 대상들이 미적 향수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는 것이 되니까.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이 두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내가 보기에 일상의 하찮은 대상들이 "미적 향수에 부적합하다"는 건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을 잘못 옮긴 것이다. 'improbable'은 물론 '있음직하지 않은', '사실 같지 않은'이란 뜻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고 여기서의 강조점은 그럼에도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즉 미적 향수(감상)의 후보(대상)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뒤샹에 의해서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 있는지는 역자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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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서 단토 교수님한테서 답장이 오다 (작성중)
    from 마음―몸―시공간 2008-06-03 07:05 
      최근 아서 단토 교수님의 저서 『일상적인 것의 변용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김혜련 옮김, 한길사, 2008, 448쪽) 한국어판에 대한 번역 논쟁이 로쟈 님의 블로그에서 진행중입니다. (로쟈 님의 글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참조 → http://blog.aladdin.co.kr/mramor/2102426). 저는 그 논쟁에 참여하여 나름대로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제 견해가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원문의 의미는 통상적으로는 도저히 아름다움과는 아무 상관없는 물건들이 뒤샹에 의하여 미적지위를 획득했다...이런 취지인가요? 그러면 improbable은 직접적인 해석을 해선 안되고 일종의 반어법? 어렵도다...역시 외국어는 어렵네요.

로쟈 2008-05-22 01:04   좋아요 0 | URL
그게 상식에 맞지요. 그냥 방점을 improbable이 아니라 candidates에 찍어서 읽으면 되는데(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후보), 역자가 너무 축어적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뒤따라 나오는 문장들과의 호응도 무시할 만큼...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자번역을 넘어야 되는데...그건 그렇고 아서 단토를 몇 년전부터 많이 소개하시는군요.저는 여기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qualia 2008-05-22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로운 오역 사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길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 『일상적인 것의 변용』 번역판 57쪽에서 인용하신 번역문은 원문을 보지 않아도 오역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종의 논리적) 비문이군요. 번역자 분이 앞뒤의 의미상 동치 구문을 180도 정반대로 번역했으니까요.

즉 원문의 〈his acts〉에 해당하는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과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는 의미상 동치 구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번역문은 위 앞뒤 동치 문장을 완전히 180도 반대 의미의 대립 문장으로 옮겨 놓았네요. 번역자 분이나 편집자 분이 이 대목의 번역문에서 문맥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느끼셨을 법한데요. 아쉽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위 번역문에서 〈these unedifying objects〉를 〈하찮은 대상들〉이라고 옮긴 것도 미흡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정확한 의미는 앞뒤의 긴 문맥을 충분히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위 인용문의 내용으로 보건대,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미적 감흥(aesthetic delectation)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대상들”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혹은 저자의 의도)을 훨씬 더 정확하게 전달하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원래 〈edify〉는 “지적으로, 도덕적, 정신적으로 교화하다”, “지성, 지적 능력, 덕성 따위를 기르다”라는 뜻을 지녔으므로(To instruct especially so as to encourage intellectual, moral, or spiritual improvement), 위 문맥에서는 〈edify〉의 원뜻에서 유추하여 “미적 감상, 미적 감흥, 미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다”로 충분히 의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뜻을 지닌 〈unedifying〉이 쓰였으므로 “미적 감상/감흥/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따위로 번역해줘야 하겠죠.

따라서 〈these unedifying objects〉를 〈하찮은 대상들〉이라고 옮긴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미흡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열대 2008-05-2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이것은 그의 행위들이, 특정한 미학적 거리에다 품위없는 물건들을 놓아 두고 그것들을 미적 향수의 후보로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연출하고 있지만, 적어도 적합한 장소안에서는 아름다움이라 할만한 것들을 발견될 수 있게 실제적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는 그의 행위를 미학적 거리에서 볼 때 전혀 미적이지 못할 만한 것을 놓아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 practical demonstrations...) 특정한 장소안에서 그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뒤샹의 작업행위 자체가 모두 역설적이지요. ^^

qualia 2008-05-22 16:35   좋아요 0 | URL

규 님, 반갑습니다. 규 님께서도 번역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하지만, 규 님께서 제시하신 위 번역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원문의 의미를 전혀 올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는 번역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첫째, 규 님께선 원문의 문장 구성/형식을 전혀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둘째, 따라서 규 님께선 위 원문을 그 본디 의미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완전한 재창작 수준으로 오독 · 오역하였으며, 셋째, 규 님의 번역안은 원문의 의미를 떠나 우리말 문장 구성만을 놓고 볼 때도 말이 되지 않는 비문이기 때문입니다.

① 위 원문에서 〈It is (just) possible ~ aesthetic delectation:〉 부분과 〈practical demonstrations ~ in the least likely places.〉 부분은 역접 관계로 이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디 영문에서 쌍점(:, 콜론)은 앞 문장을 동일한 의미로 재차 설명하거나 부연 설명하는 뒤 문장을 이어주는 기능을 합니다. 영어로는 “that is to say”, “namely”, “viz”에 해당하고 우리말로는 “다시 말하자면”, “이를테면”, “즉” 따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규 님께선 위 앞뒤 문장을 역접적으로 잘못 파악했고, 따라서 잘못 번역하셨습니다.

② 〈in the least likely places〉에서 “the least ~”는 “적어도”가 전혀 아닙니다. 최상급 “the most”의 부정어로서, 위 원문에서는 “가장 ~하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을 〈그것들을 미적 향수의 후보로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연출하고 있지만,〉으로 번역한 것은, 위에서 로쟈 님뿐만 아니라 제가 설명했듯이, 원문을 잘못 읽고 잘못 옮긴 것입니다. 원저자가 의도한 내용은 그 정반대입니다.

③ 규 님의 번역문 [이것은 그의 행위들이, 특정한 미학적 거리에다 품위없는 물건들을 놓아 두고 그것들을 미적 향수의 후보로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연출하고 있지만, 적어도 적합한 장소안에서는 아름다움이라 할만한 것들을 발견될 수 있게 실제적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이 잘 되지 않는 불완전한 비문입니다. 주어와 서술어가 전혀 호응하지 못하는 문장이며, 주절과 종속절도 전혀 호응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능동과 피동이 뒤섞인 문장 구성도 문장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습니다.

이상과 같은 까닭들 때문에 〈뒤샹의 작업행위 자체가 모두 역설적이지요〉라는 규 님의 의미 있는 논평은 그 빛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coco 2008-05-22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esthetic distance는 여기서 '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적 기쁨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후보로 묘사'했다는 말에 맥락이 부여되겠죠. 대강 정리해보면,

"미적인 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을 배치했다고 , 곧 그 대상들을 미적인 기쁨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그의 행위를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qualia 2008-05-23 00:50   좋아요 0 | URL

carboni68 님, 안녕하세요? 토론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님께도 유익한 토론 거리를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문제의 원문과 그에 대한 carboni68 님의 번역문을 인용해 놓고 말씀드리죠.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미적인 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을 배치했다고 , 곧 그 대상들을 미적인 기쁨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그의 행위를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① 위에서 〈aesthetic distance〉는 잘 알려진 문학 · 예술 분야의 전문 개념의 하나입니다. 〈미적 거리〉로 번역하고 통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carboni68 님의 해석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② 게다가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뜯어와 「샘」이라는 제목을 떡하니 붙여놓고 눙치는 장난질 자체가 이미 예술 행위이고 미(학)적 행위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행위 자체는 소변기라는 대상에 대해서 이미 어떤 미적 태도/자세/관점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일종의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소변기를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런 정황을 언급하고 있는 원문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를 〈미적인 것과 거리를 둔 채 ~ 이러한 대상들을 배치했다〉고 독해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오독임을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③ 그리고 능동적 현재분사형인 형용사 “unedifying”이 들어 있는 〈these unedifying objects〉를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과 같이 수동적 과거분사형 어구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이라는 독해 자체가 오독입니다.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와 같이 일상적으로는 〈미적 감흥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않는 대상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원문의 맥락에 더 잘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④ 〈improbable candidates〉를 〈부적절한 것/대상/후보들〉로 옮기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서 단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적 대상으로서 적절한가 부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 작가의 의도나 감상자의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그럴싸한 예술 작품으로 변용되고 표현될 수도 있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주의 모든 사물들 중에 예술 작품의 소재로서 부적절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즉 모든 것이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이미 예술적 대상으로서 적절한 것이고, 우주 만물이 예술 작품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다면, 이미 그 적절함/부적절함의 문제 따위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일 것입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은 작가의 의도와 감상자의 해석에 따라, 때론 예술 작품이 되기도 하고, 때론 그냥 사물 그 자체로 존재할 수도 있는 일종의 가능성/비가능성(probability/improbability)의 문제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위 원문의 문맥에서 〈improbable candidates〉를 〈부적절한 것/대상/후보들〉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⑤ carboni68 님께서 번역하신 위 번역문의 내용은 인용한 원문의 마지막 문장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와 전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서로 반대의 내용을 말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마지막 문장은 앞 문장들을 부연 설명하고 있는 문장으로서 같은 내용을 말하는 동치 문장입니다. 즉, (앤디 워홀과 마르셀 뒤샹 같은 예술가들이) 평소에 아름다움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던 대상들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미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실제적으로 보여줬다는 얘기죠. 따라서 carboni68 님의 번역은 전체적으로 오역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열대 2008-05-2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다시 해보면,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그의 행위는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대상들을 특정한 미학적 거리에 배치하고, 그것들을 전혀 그럴듯하지 않음에도 그럴듯한 미적 대상의 대상으로 변모시킨 것으로, 다시 말해 가장 적합하지 않는 장소에 아름답다고 할 만한 것이 발견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qualia님의 의견에 따라본 것인데, 훨씬 매끄럽군요.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
(제가 처음에 그렇게 번역해본 것은 님이 말씀하신 반어법이 오히려 콜론 뒤에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the least를 at least로 잘못 해석한 것이었군요.ㅋ)

qualia 2008-05-23 01:46   좋아요 0 | URL

규 님, 고맙습니다. 제 의견은 그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규 님의 독자적인 의견을 더 듣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위 번역문은 조금은 나아진 듯합니다만, 여전히 덜컹거리는 문장이고, 요령부득의 비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뒷부분은 여전히 오역에 가깝고요.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그를 수도 있습니다. 비판적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규 님의 토론에 감사합니다.

coco 2008-05-2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틀린 부분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improbable 부분이 아니라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부분입니다. 이것을 '미적 거리에 포함하고'라고 번역하니까 뒤샹의 작품이 나름 아름다운 것처럼 이해되어서 뒷부분의 imprbable이 나오는 문장과 내용상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아름답지 않은' 이라는 내용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가장 뒷문장 "그럼으로써 그는 가장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법한 장소에서 일종의 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practical) 보여주었다."과도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at ... distance 관련하여 금성에이스 사전의 예문도 인용합니다.

⊙ He is usually kept at a respectful ∼. 그는 평소 경원(敬遠)을 당하고 있다.
(이 경우 at a respectable distance는 respect(존경)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로쟈 2008-05-23 00:21   좋아요 0 | URL
미적 거리, 혹은 심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는 미학 용어입니다. 어떤 실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미적인 인지와 감상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거리'를 말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책상의 사과는 심미적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식욕의 대상이죠). 하지만 식욕이 채워진 상태에서라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과를 미적인 대상으로 관조해볼 수 있겠죠. 그때 관여하는 것이 '심미적 거리'입니다...

coco 2008-05-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그럼 그것이 개념어인가요? 그렇다면 위에서 관찰자의 미적이 아닌 다른 이해를 차단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언급되는 연관된 부분이 있나요?...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죠^^

qualia 2008-05-23 01:48   좋아요 0 | URL

앗, 제가 carboni68 님의 글에 댓글을 다는 사이에 여러 개의 댓글이 이미 올라와 있었군요. carboni68 님의 견해에 대해서는 제가 위에서 자세하게 답변드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공부가 됩니다. 좋은 의견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coco 2008-05-23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의 the least likely places(가장 미적이지 않을 것 같은 장소)는 어디일까요? 바로 뒤샹의 작품 전시장이겠죠. 말하자면 그곳이 추(미의 반대라는 의미에서)해야 추한 곳에서조차 미는 발견된다는 생각을 관객들이 갖게 된다는게 뒤샹의 의도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가장 미적이지 않게끔 만들었다는 뒤샹의 의도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setting~ 과 rendering~ 의 두개의 동격의 동명사구에 의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setting~ 과 rendering~ 구문은 동격의 구문으로서 뒤샹이 작품을 미적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내용의 반복입니다. aesthetic distance가 미학용어가 되면 앞뒤 문맥이 맞는지요? 미적인 감상이 가능한 거리를 확보해 주었는데 왜 전시회장은 가장 미적인 것과 거리가 먼 장소가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문장이 심오해지기 시작하면 저자의 문제거나 우리의 독해력의 문제거나 둘 중 하나일 경우겠지요.

qualia 2008-05-24 02:13   좋아요 0 | URL

완전히 잘못 이해하시고 있습니다. carboni68 님뿐만 아니라 juin 님, 그리고 아래에 다시 댓글을 올리신 규 님까지 모두 아서 단토의 이야기를 엉뚱하게 오해하시고들 있다고 저는 결론적으로 판단합니다.

① 아서 단토의 위 원문에서 〈the least likely places〉는 “작품 전시장”(carboni68 님과 규 님 견해)도 아니고, “일상적인 공간”(juin 님 견해)도 아닙니다. 〈places〉라는 낱말의 표면적 의미(즉 장소)에 얽매여 전혀 엉뚱한 오해를 하신 것입니다.

예컨대 쉽게 말하자면, 그냥 냄새(혹은 환각적 냄새)가 코를 찌르는 소변기에 불과한 것을, 마르셀 뒤샹이 예술적으로 장난을 쳐서 「샘」이라고 해서 갖다놓으니까, 감상자들이 그걸 보고 “아하, 그럴듯한데!” 하고 일종의 미적 느낌을 말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일종의 아름다움이 발현되어 나오는(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 대상을 장소 개념을 동원해서 〈places〉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places〉는 굳이 “장소”라고 하지 않고 “대상”이라고 번역해도 될 것입니다. 전시장이나 일상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② carboni68 님의 위 설명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오독을 근거로 하여 설명을 하시고 있으니, 당연히 그 다음은 말이 될 리가 없습니다. 두 개의 동명사구 〈setting ~〉과 〈rendering ~〉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는 얘기도 맞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각각은 뒤샹이 소변기(혹은 일상적 기성품)를 가져와서 전시 공간 안에 배치한 행위의 측면을, 그 다음에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일상적인 것의 예술적 변용의 측면을 각각 나눠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③ 이해를 돕기 위해 문제의 원문을 우리말로 풀어서 제시해 보겠습니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 마르셀 뒤샹의 행위는 다음과 같이 해석이 가능하다.

㉡ 그는 전혀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일상적 대상들을 특정한 미적 거리 안에 새롭게 배치했다.

㉢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것들을 전혀 그럴듯하지 않음에도, 꽤 그럴듯한 미적 감흥을 자아내는 대상들로 변모시켰다.

㉣ 즉 그러한 작업은,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 모종의 아름다움이 얼마든지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제가 제시한 번역 초안은 아서 단토의 의도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해하기 좋게 하느라고 원문보다 길게 풀어서 번역했기 때문에 간결성이 떨어지긴 합니다. 혹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판바랍니다.

qualia 2008-06-01 07:56   좋아요 0 | URL

juin 님의 위 댓글에 간단하게 답변드립니다.

① juin 님 → 뒤샹이 미적 향수(저는 '심미적 쾌감' 정도가 더 와닿지만)를 문제삼았고 단토 또한 인지와 심미안을 미술작품의 본질에서 문제삼고 있는 맥락에서 볼 때, 저 문단은 부분적으로는 carboni68님의 해석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carboni68 님의 해석이 부분적으로는 맞다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곳의 논의 문맥에서), carboni68 님의 말씀 전부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맞는지 틀리는지 얘기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기본적 개념에 대한 초보적 이해조차 없이 문제의 개념들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난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② juin 님이 풀이한 해석 → “<뒤샹의 행위는 그러한 사물(오브제)들을 어떤 심미적 거리에 놓아서 새삼 관조의 대상으로 만들긴 했는데, 다만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는 채로 그렇게 했다(미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이런 퍼포먼스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 혹은 보여주게 된 것은 미(혹은 미 개념)라 할 만한 것은 대상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 “관조의 대상으로 만들긴 했는데, 다만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는 채로 그렇게 했다”고요? 이 해석은, 위 원문만 놓고 본다면, juin 님의 주관적인 확대 해석일 뿐입니다. 원문에는 역접적 표현이 없습니다(improbable의 역설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서 단토의 문맥과 상치된다고 봅니다. 뒤샹의 변용 작업은 미 혹은 아름다움의 전통적/통상적 개념에 대한 반발 · 재고 · 수정 따위를 불러왔다는 것이지, 뒤샹의 변용 작업이 (처음부터)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뒤샹의 변용 작업이 심미적 쾌감에 호소했느냐, 호소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사후적인’ 문제입니다.

③ juin 님 → “위 서평기사에 헤겔이 언급되어 있긴 한데, 두 링크를 읽고 제가 이해한 바로는 여기서 '발현'이란 뒤샹이나 워홀이나 단토의 의도와 전혀 다르지 않나 싶은데요. 차라리 '발견'이라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 그렇지 않아도 저도 처음에는 〈발견〉이라는 낱말을 넣어서 번역했었습니다. 즉 다음과 같이 번역했었죠.

㉣ 즉 그러한 작업은,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 모종의 아름다움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댓글을 작성해 올리면, 원래의 글 저자인 로쟈 님의 전자우편함으로 댓글이 자동으로 날아갑니다. 로쟈 님의 전자우편함에서 제 댓글을 확인하면 위와 같이 번역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견〉이 적절하냐, 〈발현〉이 적절하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즉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라는 원문을 사물을 주어로 해서 번역할 것이냐, 수동으로 할 것이냐 능동으로 할 것이냐 하는 따위의 문장 구성 문제로서, 각각의 경우에 따라 〈발견〉도 가능하고 〈발현〉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발견〉이나 〈발현〉의 용어 선택 문제와 “뒤샹이나 워홀이나 단토의 의도”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서로 번지수가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palefire 2008-05-23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로자님의 서재에 들렀는데 정말 흥미로운 번역논쟁이 진행중이군요. 전반적인 번역오류는 qualia님이 지적해주신 부분들이 맞습니다. 첨언하자면 improbable의 번역문제는 'aesthetic delerection('미적 향수'로 옮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뒤샹이 직접 했던 표현으로 "Apropos of Readymade"라는 1961년에 쓴 짧은 글에 나온 표현입니다.
"A point that I want very much to establish is that the choice of these "Readymades" was never dictated by aesthetic delectation.The choice was based on a reaction of visual indifference with at the same time a total absence of good or bad taste ... in fact a complete anaesthesia" (내가 정말로 확립하고자 했던 점은 이러한 '레디메이드'의 선택이 미적 향수에 결코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선택은 좋은 취향 혹은 나쁜 취향의 총체적인 부재를 동반한, 시각적 무관심의 반응 - 사실상 완전한 무감각 - 에 따른 것이었다).
(이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peak.org/~dadaist/English/TextOnly/readymades.html)
이 문맥을 참조할 경우 improbable candidate에서 'improbable'은 뒤샹 자신의 레디메이드에 대한 개념 - 즉 '미적 향수'에 대한 반란 -을 단토가 패러프레이징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즉 '그럴듯하지 않다/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의 주체는 단토이기 이전에 뒤샹이었던 셈이겠죠. 물론 단토는 뒤샹의 이러한 개념적 전환을 포스트모던/개념주의 예술의 맥락에서 중요하게 취급합니다.(이와 관련해서는 http://www.csulb.edu/~jvancamp/361_r1.html에 실린 단토의 다른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로자님이 지적하신 모호함의 의미가 풀립니다. 결론은 이런 맥락들이 제시되지 않고서는 지적하신 부분은 논리상 모순으로 보이기 딱 좋은 부분이므로('미적 거리'라는 개념에 대한 로자님의 지적은 맞습니다. 뒤샹이 변기를 전시장에 갔다 놨다고 해서 예술적 오브제와 관람자 사이의 미적 거리가 깨지는 건 아닙니다. 이건 지젝도 지적한 부분이죠), 역자가 각주처리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delelection은 enjoyment(향유)의 의미도 갖고 있지만 원래 delight와 동일한 의미라는 점에서 '쾌'에 해당하므로 '향수'라는 역어도 재고할 만한 대상으로 보입니다.

qualia 2008-05-24 02:26   좋아요 0 | URL

palefire 님, 도움 말씀 고맙습니다. 알려주신 글을 읽어봤는데요, 아서 단토의 글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다만, palefire 님의 오타 몇몇 개가 매우 마음에 걸립니다.

coco 2008-05-23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한가지, 여기서 unedifying objects는 빗자루나 변기 등을 예를 들면 피카소식으로 변형하거나 칠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는 뜻입니다.

qualia 2008-05-24 02:29   좋아요 0 | URL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위에서 설명한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coco 2008-05-23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듣고 본 것들을 저 몇문장에 투사하며 과시하는 대회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듯 하군요. 독해의 기본은 필자의 글에 대해 될 수 있는 한 내재적이어야 합니다. 내재적인 독해만으로 한계가 있을 경우 외부의 참조대상도 의미가 있겠지요. 하지만 일단은 내재적이어야 하며, 대부분의 글, 특히 유럽어의 글은 그렇게 외부대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글이 있다면 퀄리티가 나쁜 글이겠지요. 저는 뒤샹에 관심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저 간단한 문장에 대해 기본적인 단어의 의미와 앞뒤 맥락만 확인하는 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질적인 분위기인 듯하니 저는 이만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좋은 토론 되세요^^

qualia 2008-05-24 02:40   좋아요 0 | URL

웬 뜬금없는 말씀이신지요? 토론/논쟁은 본디 자기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상대방을 논박하고 논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장을 충분한 논거로써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행위입니다. 물론 상대방의 견해가 옳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상호작용 행위가 진정한 토론/논쟁이겠죠.

뜻하지 않게 서로 감정을 다치게 했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carboni68 님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열대 2008-05-23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로자님이나 qualia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미적거리'라는 말은 미학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어입니다. carboni68님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자주 사용되는 개념어까지 의심해가면서 번역을 한다는 것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단토의 책을 다 읽어 보지도 않고 미리 판단을 내리는 것 역시 무리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그런데 juin님이 하신 말씀은 제가 전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거로군요. 왜냐하면, the least likely places에 대한 해석을, 저로서는 계속 그 장소가 '전시장'일 거라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게 '일상적 장소'라고 해석한다면 또 이야기가 180도 달라지거든요. 아무튼 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나저나 전에 제가 들었던 수업 중에 아서 단토의 텍스트를 가지고 번역하는 게 거의 전부였던 수업이 있었는데 그 때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머리가 뱅글뱅글도네요. ^^단토는 워낙 유명한 사람입니다. 난해한 걸로. ㅋ

아열대 2008-05-2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in이 생각하신 것처럼 해석해 본다면, 뒤샹의 행위는 특정한 미적 거리에 these unedifying objects를 놓고, 미적향수를 위해서는 improbable한 candidates를 rendering함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발견하기엔 부적당한) 일상적인 장소에서조차 아름다움따위를 발견할 수 있게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정도가 되겠네요. 흠..

qualia 2008-05-24 02:45   좋아요 0 | URL

규 님, 규 님의 추가 의견에 대해서 답변이 될 수 있는 댓글을 위 carboni68 님 글 밑에 올려 놨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토론 참여에 감사합니다.

coco 2008-05-24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장을 미적거리가 있게 세팅할 수도 (아닐 수도) 있고, 미적거리의 정도를 조절(a certain)할 수도 있나요? 그럴 수 있는게 미적거리인가요? 미적거리를 통제하고 꾸미는 법에 대한 관련 서적 좀 소개해주시죠.^^ 그리고 전시장을 세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당연히 뒤에 나오는 place는 전시장이지, place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백번 양보하여 다 맞다고 치면 뒤샹이 의도했던 바가 전시장에서 변기의 아름다움을 확인한 후 이후에도 집에서 변기를 아름답게 생각하라는 것인가요? 여기 참 문제가 심각하군요....

qualia 2008-06-01 06:37   좋아요 0 | URL
carboni68 님의 위 말씀은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도대체 미적 거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이 무슨 논의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띄어 쓰기 좀 올바로 지켜주십시오.

① carboni68 님 → “그리고 전시장을 세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당연히 뒤에 나오는 place는 전시장이지, place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 “전시장을 세팅”하다니요? 여기서 〈미적 거리〉는 기본적으로 심리(주의)적 개념입니다. 공간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재거나 조절할 수 있는 실제의 거리 따위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미적 거리〉는 전시장 같은 물리적 공간과는 관련이 없는 개념입니다. 간접적이고 부차적인 관련은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미적 거리〉 개념은 그런 간접적 · 부차적 관련이 전혀 없이 성립할 수 심적인 거리 개념입니다.

② carboni68 님 → “그리고 백번 양보하여 다 맞다고 치면 뒤샹이 의도했던 바가 전시장에서 변기의 아름다움을 확인한 후 이후에도 집에서 변기를 아름답게 생각하라는 것인가요? 여기 참 문제가 심각하군요....”

⇒ 참으로 요령부득인 말씀입니다. 기본적인 개념 파악도 없으면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쟈 2008-05-2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순하게 'improbable'이 오역돼 있다는 걸 지적하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게도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인용문을 다 해석해두었더라면 오해의 소지도 줄었을 거란 생각이 사후적으로 듭니다. 일일이 답글 달지 않고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인용문에 대한 제 해석은 qualia님의 해석과 대동소이합니다. 한가지 차이라면 'places'를 저는 그대로 '장소들'이라고 본다는 것뿐입니다. 'the least likely places'를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장소' 혹은 '가장 예기치 않은 장소'라고 해석하구요, 그건 일반적으로 '변기'가 놓여있을 장소라고는 기대되지 않는 미술 전시장이죠. 그곳에 뒤샹은 자전거 바퀴나 변기 등을 갖다놓았고, 그럼으로써 이 오브제들의 전혀 예기치 않았던 '미적 감흥'이 발견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로쟈 2008-05-24 21:45   좋아요 0 | URL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확률이 가장 낮은 대상으로서이긴 합니다. 저로선 미적 감흥을 인지적 충격(이것도 예술인가?!)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qualia 2008-06-01 09:02   좋아요 0 | URL

로쟈 님과 juin 님께 답변드립니다.

① 로쟈 님 → “한가지 차이라면 'places'를 저는 그대로 '장소들'이라고 본다는 것뿐입니다. 'the least likely places'를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장소' 혹은 '가장 예기치 않은 장소'라고 해석하구요, 그건 일반적으로 '변기'가 놓여있을 장소라고는 기대되지 않는 미술 전시장이죠. 그곳에 뒤샹은 자전거 바퀴나 변기 등을 갖다놓았고, 그럼으로써 이 오브제들의 전혀 예기치 않았던 '미적 감흥'이 발견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 위에 인용해 놓으신 아서 단토(Arthur C. Danto)의 원문을 놓고 볼 때, 그 내용의 내적인 논리상, 〈the least likely places〉가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장소〉 혹은 〈가장 예기치 않은 장소〉따위로서의 전시장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고 이상해 보입니다. 아름다움 혹은 미(美)가 발견되거나 발현되는(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 대상은 구체적 사물이고 작품인데, 그리고 인용 문장 전체가 그 대상/작품과 관련지어 얘기하고 있는데,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앞 문장을 같은 의미로서 재차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문장인데, 그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전시장 얘기를 한다는 것은 내적인 내용 논리상 전혀 느닷없어 보입니다. 제가 파악하는 바로는 〈~ in the least likely places〉를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정도로 해석해야 그 내적 논리에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그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용 문장 자체가 지닌 내적인 내용 논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해석하자면,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따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저자이신 아서 단토 교수님께 직접 여쭤보기로 하고, 지난 5월 25일 몇 가지 질문을 적어 전자우편을 보냈더랬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답신이 없네요.

② juin 님 → “단토의 글을 보면, 그 오브제들이 예기치 않게 '미적 감흥'의 대상이 '된다'가 아니라, 여전히 '미적 감흥'과 상관이 없는 채 거기(미술의 장) 존재함으로써 미의 본질을 문제삼는 것이고 미술은 이제 개념과 철학의 문제이므로 그 어떤 사물이든 어떤 지각적 요소든 잠재적으로 자격을 획득한다는 것이 아닌지요.”

⇒ 아서 단토의 얘기는 문제의 오브제들이 “여전히 '미적 감흥'과 상관이 없는 채 거기(미술의 장) 존재”한다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아름다움과는 지극히 동떨어져 보이는 대상들이 미적 거리 안에 놓이게 되자 예기치 못한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켰고, 그 사실이 아름다움/미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재검토하게 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따라서 그 오브제들이 미적 감흥과 상관이 없이 거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모종의 새로운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거기 있는 것이죠.

그러한 새로운 미적 감흥이 있었기에, 즉 종래의 미 개념을 재검토 · 재정의할 만한 것이 있다고 봤기 때문에, 아서 단토가 문제의 예술철학적 저작을 쓰게 된 것 아닙니까?

로쟈 2008-06-02 13:15   좋아요 0 | URL
qualia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읽을 때는 아무래도 'places'와 'objects'를 동일시하기는 어려웠지요(저는 뒤샹의 작업이 갖는 의의를 '장소의 이동'이란 관점에서 읽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보니까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여전히 모호하긴 하지만. 단토 교수로부터 답신을 받게 되면 알려주시길...

아열대 2008-05-24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댓글이 꼭 화면에서 본 순서대로 달리지 않다는 게 신기하군요.^^
저 역시 places를 장소로 보지 않고 대상으로 본다는 건 지나친 억측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샹이 처음에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지 않았다면 이 모든 헤프닝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

qualia 2008-06-01 09:08   좋아요 0 | URL
규 님, “지나친 억측”은 아닙니다. 인용문의 내적인 내용 논리상 저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그 뜻이 정확히 밝혀지겠지만, 그래서 제가 그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현재로선 제 주장이 내용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coco 2008-05-24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e least likely ... 는 beauty에 연결됩니다. 이건 시가 아닙니다.

로쟈 2008-05-24 20: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시가 아니며 어렵게 해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qualia 2008-06-01 09:14   좋아요 0 | URL
carboni68 님, 위 말씀은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라는 짧은 문장에서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동어반복이죠. 다만,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하느냐가 문제겠죠.

coco 2008-05-2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qualia 2008-06-0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아서 단토 교수님께 지난 5월 25일 밤에 몇 가지 논란점에 대한 질문을 적어서 전자우편을 보냈더랬습니다. 아서 단토 교수님의 정확한 답변을 듣고 나서 논의하고자 지금까지 댓글을 올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6월 1일 지금까지 답신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다시 전자우편을 보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수신 확인조차 안 된 것으로 나옵니다.

아서 단토 교수님께선 1924년 01월 01일 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여든 다섯 살이십니다. 혹시 너무 연로하셔서 인터넷에 접근이 뜸하시기 때문일까요?

그리고 『일상적인 것의 변용』 번역판에는 로쟈 님께서 지적하신 것 이외에도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더군요. 예컨대, 227쪽 각주 6)에 〈찬사적 힘은 비언표적 힘(illocutionary force)의 한 사례이다.〉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여기서 〈illocutionary force〉를 〈비언표적 힘〉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류입니다. 〈illocutionary〉의 접두사 〈il-〉은 결코 〈not; 비(非)〉를 뜻하는 것이 아니죠. 〈in, into, within; 안, 내(內), 속〉을 뜻하는 접두사죠. 수많은 국내의 화용론(pragmatics) 관련 논문, 책에서 〈illocutionary force〉를 〈비언표적 힘〉이라고 잘못 번역해 쓰고 있습니다. 그런 오류를 답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올바른 번역어조차 천차만별로 중구난방의 극치입니다. 한국의 언어학계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것일까요? 전문 학술 용어는 통일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것의 변용』 한국어판의 성과나 중요성은 크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자 분의 노고가 크다고 봅니다. 몇 가지 오류 때문에 번역자의 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qualia 2008-06-0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서 단토 교수님께서 드디어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받은 날짜 2008-06-02, 22:58). 일주일째 수신 확인이 되지 않아 아예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젯밤 혹시나 하고 제 전자우편함을 열어봤더니, 〈arthur danto Re: Dear Professor Arthur Danto, I have so...〉라는 답신 문구가 첫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한밤 환호성을 질렀더랬습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저를 비롯한 토론/논쟁 참여자 혹은 참관자 분들께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제 블로그에 제 질문 편지와 아서 단토 교수님의 답신을 올려놨습니다만, 이곳의 댓글란에 그 전문을 올려서, 이 번역 토론/논쟁을 알차게 이어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아무런 논평 없이 편지 원문을 그대로 올립니다. (각각의 원문에는 몇몇 오타와 탈자가 있습니다만,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올립니다. 단, 제 실명과 전자우편 주소는 익명으로 하겠습니다). 많이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콸리아qualia의 질문 편지 ---------------------------------

Dear Professor Arthur Danto,

(Excuse me, Sir. But I already sent you my email concerning some questions about the various interpretations of some sentences in your book three days ago, and I am afraid that you have not yet check out my email. I also suspect that my email was treated as spam automatically, and so I want to send you my email again. I hope that my email can be received safely. My email addresses are: mind◇◇◇@naver.com; ♡♡♡mind@hanmail.net. Thanking you in anticipation.)

Hi, Professor Arthur Danto. My name is H-O-N. I am a Korean and translator. I live in Seoul, South Korea. I am very pleased to email you. I have some questions about the matter of translation of the meaningful sentences in your book. Would you give me some answers to my questions?

One of the most important books that you have written in 1981,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was recently translated into Korean by Professor H. Kim, Cheonan University. I congratulate you on the publication of Korean edition of your precious book.

By the way, the heated debate over the interpretation of some sentences of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is now going on in a Korean blog site. I am participating as a leading member in this interesting debate.

The sentences in your book that we are now enjoying debating on their correct interpretations are as follows: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I have some questions about the correct interpretation of the important words/concepts in the above sentences:

(1) What do “these unedifying objects” refer to? In my view, the meaning of “these unedifying objects” seems to be everyday objects that are not usually thought to give us any aesthetic delectation. Here, I interpret the word “unedifying” as ‘not evoking any aesthetic experience in our minds’ or ‘not wring any aesthetic feelings from us’. Is my interpretation corret? Other debater argues that “unedifying” means ‘undisguised’. Which one do you mean? I want to know what meaning you intended to express by the word “unedifying”.

(2) In the debate among us, the most intensively discussed problem is what the proper meaning of “improbable candidates” is. I suspect that the word “improbable” should entail antinomy or paradox that in the above context everyday objects can not only be the mere simple ordinary objects that usually give us no aesthetic enjoyment but also the probable art works that give rise to aesthetic delectation when set at a certain aethetic distance. In other words, it seems to have paradoxical double meanings that oppose each other. Some argue, however, that “improbable candidates” just means what is not suitable for aesthetic delectation. But I do not think so. What do you think about this problem?

(3) what is the exact meaning of “the least likely places”? Do “places” mean galleries or museums in the above sentences? Many of us think so. But I do not think so. I regard this word “places” as equivalent to ‘commonplace objects’. What is the correct interpretation?

We are very confused with your highly profound book. We need your help. I am very happy to look forward to your kind answers.

With best wishes,

H-O-N

▷ 아서 단토 교수님의 답장 --------------------------------------

Dear H-O-N,

Thank you for your kind letter, and for taking the trouble to write. I
realized when I re-read the sentence in your letter, that it is at once
high condensed, and at the same time rather casual, which was my style
at the time I wrote the book, and probably still is.

It is obviously bout Duchamp's readymades, which I took for granted were
unedifying. They were - and are - very familiar objects, with very
familiar uses, at least in American everyday life.
he snow shovel is meant to clear the ground of snow, the grooming comb
is meant to comb the hair of household pets etc. They are not
"edifying." in that they do not instruct, uplift, or make better persons
of us.

"Setting at an aesthetic distance." makes use of a familiar concept in
aesthetic theory, the idea of of "aesthetic distance" - it was an
expression first used by E. Ballough in a famous essay - and it means
displaying the object in such a way that there is no inclination to use
it, but merely to look at it. The notion of distance is metaphorical.
You would probably find Balloughh's essay in any anthology of Anglo
American aesthetics.

And the reference to beauty in "the least likely places" means: once we
set the object at an aesthetic distance, i.e., once we cannot use it,
then we might begin to see that the object is beautiful. The urinal that
Duchamp tried to exhibit in 1917 might have been set at an aesthetic
distance by virtue of its placement in an exhibition space, like a
gallery.There it would be unavailable for use, and one might be
impressed with the beauty of the form - something that we would be blind
to if we simply entered a men's room and urinated, without thinking of
the aesthetics of the receptacle.

The sentence was meant to be a little satirical. In fact the whole book
is full of satirical or ironical passages. This is one.

Thanks you for your interest, and your enthusiasm!

Good luck!

Arthur Danto

군말: 제가 아서 단토 교수님께 ‘서울’에 산다고 했는데요. 사실, 저는 지방 도시에 삽니다. 외국인한테는 한국의 수도를 말해줘야 감을 잡을 것 같아서, 편의상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산다고 한 것이랍니다.

로쟈 2008-06-03 13:21   좋아요 0 | URL
qualia님 해석이 맞네요. 저자의 설명을 들으니 명쾌합니다. 답변을 얻어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