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택배로 받은 책의 하나는 도올 김용옥의 <대학 학기 한글역주>(통나무, 2009)이다. '동방고전한글역주대전'의 세번째 책이라고 하는데, <논어>와 <효경> 역주에 이어지는 모양이다(알라딘의 에러로 오늘 검색이 되지 않는다. '정전'인 셈치고 서재질도 쉬어야겠다!). 책은 생각보다 큰 판형의 하드카바. 이런 역주 작업이 도올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진작에 나섰어야 할 분야가 아닌가 싶다. 혹시나 싶어 관련기사를 찾으니 엉뚱하게도 지난 초가을에 있었던 그의 딸 김미루 작가의 사진 전시회에 관한 것만 잔뜩 뜬다. 뒷북이긴 하지만, 흥미를 끄는 작업이어서 관련기사와 몇 작품의 이미지를 옮겨놓는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기사(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5962)에서 가져왔다.    

  

여성신문(09. 09. 04) 김미루의 사진전시회 ‘나도(裸都)의 우수(憂愁)’ 

거물급들도 쉬이 전시를 하기 힘들다는 갤러리 현대 강남점에서 한 20대 신진 작가의 첫 개인전 ‘나도(裸都)의 우수(憂愁)’전이 열리고 있어 눈길이 쏠리고 있다. 그 주인공은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전공한 김미루씨. 버려진 도시공간의 이면을 속속들이 잡아내어 과거로 침잠해 있던 시간을 끌어올리는 50점의 작품을 이달 13일까지 선보이는 중이다. 



작가는 의대 진학을 포기하고 사진작가로 변신하기까지 겪었을 그 감정의 위태로움처럼 까마득한 도심지의 교각, 버려진 설탕공장의 창고 등 방치된 도시구조물에 홀로 올라가 위험을 감수하며 거대도시의 황폐함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왜소함을 사진 속에 담았다.

황량한 도시풍경 속에 옷을 벗은 여성의 몸을 시각적 프리즘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일련의 사진작업들을 보면 ‘왜소함’을 통해 오히려 해방감과 안락감을 얻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맨발로 콘크리트 바닥을, 차가운 철로를 걷고, 맨가슴으로 도시의 음습한 치부를 호흡하고 대화하는 젊은 여성으로 분한 작가의 발가벗은 몸은 지극히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연출된다. 그리고 이 취약함은 2007년 뉴욕타임스에서 포착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기사는, 작업이 인간의 나약함과 거대도시를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데 그러한 효과는 “단지 에로티시즘이라기보다는 여자의 벗은 몸이 인간의 취약함(vulnerability)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자신이 직접 작업의 누드모델이 된 경위를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살아있는 생물을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 나 스스로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나는 모델을 고용할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런 위험한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다. 나는 이런 곳을 들어가길 좋아하니까 가능하다. 누드는 문화적·시간적 요소를 모두 제(거)하기 위한 방법이자, 전 세계적인 공통 언어가 인간의 몸이기에 자연스러웠다. 옷을 벗고 촬영하다 보면 공간이 변한다. 위험하게 느껴지는 공간이 편안하게 다가오며 나만의 공간으로 변한다.” 또 누드로 작업한 것에 대해서는 “나의 작업은 누드 그 자체에 초점을 두기보다 장소에 대한 느낌을 전하는 것이 더 크다”고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나 ‘개인적(private)’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유명인의 딸’(김씨는 도올 김용옥의 딸로 일찍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여자의 누드’(많은 언론이 여성인 작가 본인의 누드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에 대한 색안경을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는 현실을 작업과정에서 좀 더 노련하게 다루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작품은 20대 젊은 여성이 나체 상태로 후미진 도시의 버려진 공간에 들어가, ‘누구라도 행여 들어올까’ 싶어 조마조마하게 재빨리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업들이 ‘이 세상의 지배적 시선’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수많은 ‘다른 시선의 소유자’들에게 긴 여운이 남는 한 가닥의 떨림으로 다가서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 어쩌면 지금 한국에서 김미루씨의 작업은 사회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차단된 무균무떼의 예술이라는 진공관에서만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페미니스트 사진작가이자 사진 전문 트렁크갤러리 관장인 박영숙씨는 김미루의 작품세계에 대해 “사람들은 속은 안 보고 겉만 보는 데 익숙하다. 김미루씨는 이번 전시에서 사물의 속을 본 것”이라고 평한다. 그에 따르면, 김미루의 작업은 작가 자신의 말처럼 탐험이며, 한 명의 탐험가로 마치 위, 심장, 콩밭 등 우리 몸 내장을 들여다보듯 아무도 가지 않는 도시의 속을 들여다본 것이다. 박 작가는 “그가 옷을 벗고 도시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옷을 입고 도시의 원시림으로 들어가면 옷자락이 여기저기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며 향후 트렁크갤러리에서 김미루의 이러한 ‘탐험가로서의 측면’을 보다 상세하게 조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에게서 잊힌 도시의 공간에 잠시나마 내가 거함으로써 낯설기만 했던 곳은 친숙한 곳으로, 위험한 곳은 놀이터로, 거친 곳은 평화로운 곳으로 탈바꿈하였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러한 사회로의 탐험에 나침반이 필요하다면 작가의 작업노트와 작업설명을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김미루 홈페이지 www.mirukim.com (정필주 객원기자/ 이화여대 예술사회학 박사과정)  

09.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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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12-16 21:52 
    [알라딘서재]김미루와 벌거벗은 도시의 우수
 
 
펠릭스 2009-12-1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문학을 전공하고 해부학을 공부하다 말고 사진작가의 길을 가군요. 미국 대학은 부전공 제도가 잘 된듯 합니다. 해부학은 몸의 내부를 해체하여 구조적인 면 등을 공부하는 것인데, 그 몸의 외형을 지상의 사물 사이에 배치하는 전환성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차가움과 따뜻함, 죽은 것과 산 것, 정지와 흐름 등을 연상케합니다. 또한 <도울 김용옥 비판/김상태/옛노을>과 MBC 여성 앵커모습도 생각납니다.

로쟈 2009-12-17 08:11   좋아요 0 | URL
꽤 화제가 됐던 듯한데,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sophie 2009-12-1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옷을 모두 벗은 여자의 몸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드네요. 인간의 몸이 말랑말랑하기 때문인가 싶기도하고요.

알케 2009-12-17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열살인 아들 이름이 미루입니다 ^^ 두루 彌 새길 鏤 아이 이름을 짓고 보니 도올선생 아이 이름과 같더군요. 아이 낳기 전 언제부턴가부터 그 이름이 입에 맴돌더니...^^

저는 도올선생의 <논어한글역주>를 읽고 있습니다. 주희 역주 위에 沃案이라고 역주를 단 도올의 서지학, 고문학 지식과 도발적 역주에 경악하고 있습니다.
 

'공간' 11월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격월로 서평을 게재하는데, 이번에 다룬 것은 두 명의 디자이너가 쓴 <슈퍼노멀>(안그라픽스, 2009)이란 책이다. 내가 고른 것은 아니고 편집부에서 제안해준 책. 생각할 거리가 없진 않아서 나름대로는 소득을 얻은 책이기도 하다.   

공간(09년 11월호)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 슈퍼노멀

슈퍼노멀? 일단 제목이 ‘노멀’하지 않다. ‘규칙’이나 ‘규범’을 뜻하는 라틴어 ‘노르마(norma)’에서 나온 ‘노멀’은 표준적인, 정상적인, 평범한 것을 가리킨다. ‘슈퍼’는 ‘위의’나 ‘너머의’라는 뜻이니까 ‘슈퍼노멀’ 자체가 조어상으로는 모순형용이다. 보통 특별하면 평범하지 않고 평범하면 특별하지 않은 법인데, ‘특별한 평범함’이라니? <슈퍼노멀>(안그라픽스, 2009)은 후카사와 나오토와 재스퍼 모리슨, 두 명의 제품 디자이너가 안내하는 이 ‘특별한 평범함’의 세계다. 책의 부제가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인데, 덧붙이자면 그 감동에는 예기찮은 놀라움도 포함되어 있다.     

 

책에는 저자들이 발견한 '슈퍼노멀' 오브제 50여 점이 작품 설명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전시장에 진열된 ‘작품’이기도 한 이 슈퍼노멀 제품들이 첫눈에 주는 인상은 소박함과 단순함이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던지는 방향으로 살짝 기울어진 쓰레기통과 철사를 조금 두껍게 하고 간격을 기능에 맞게 조정한 과일바구니, 공기환기구의 창살을 빼다박은 공기청정기와 과장된 아치가 다리부분에 포함된 욕실의자, 그리고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여 사용자가 손을 다치지 않게끔 배려한 쇼핑바구니 등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노멀한’ 물건들에 ‘특별함’을 부여할까?       

이 슈퍼노멀의 특별함을 저자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드러내주는 용어로 ‘와비사비(侘寂)’와 ‘슈타쿠(手澤)’라고도 표현한다. ‘와비사비’는 어떤 물건이 시간이 가면서 갖게 되는 고요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용적인 미를 통달한 이후에 나타내는 아름다움이다. 물건을 오래 사용하다 보면 물건 속에 깃든 혼이 자연스레 진가를 드러내고 광채를 나타내지 않는가. ‘슈타쿠’는 ‘손으로 윤을 낸’이란 뜻이다.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만지고 또 만지다 보니 윤기가 흐르게 된 것을 가리킨다. 모두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발생하고 또 얻게 되는 아름다움이다.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도 남아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장식적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인 아름다움일 수밖에 없다. 슈퍼노멀은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사용자와 어떤 일체감을 얻게 된다. 주방의 도마가 그렇고 병따개와 스탠드 옷걸이, 종이클립과 디지털카메라가 그렇다. 이런 것들을 우리 생활의 일부로 늘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저자들이 든 예로, 간디가 살았을 적에 그가 기거하던 방에서 사용하던 단출한 물건들, 즉 안경 한 벌과 밥그릇 하나, 옷 하나가 간디에게는 슈퍼노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두 저자가 정의하는 슈퍼노멀은 이렇다. “슈퍼노멀은 우리가 무언가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아름다움의 메아리입니다.”(후카사와) “슈퍼노멀은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른 수준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와 관계있다고 봅니다. 즉,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사용하다 보니 아름다워지는 아름다움, 매일 일상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볼품없지만 실용적이고 오래가는 아름다움 말예요.”(모리슨) 

이런 슈퍼노멀이 왜 새삼 주목받고 있는가? 그것은 저자들의 지적대로 새롭거나 아름답거나 혹은 특별한 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흔히 기존의 것을 개선하고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지만, 그의 과도한 의욕은 기존의 좋은 다자인마저 무시하거나 간과하도록 만든다. 새롭고 획기적인 것을 기대하는 입장에서라면 이미 알고 있고 오래 쓰고 있는 물건들이 평범하고 추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즉 노멀만 보고 노멀 안의 존재하는 슈퍼노멀의 가능성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디자이너들이 주창한 슈퍼노멀은 지각의 자동화에 맞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본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미학론과도 닮았다. 후카사와와 모리슨은 슈퍼노멀이 ‘이론’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자각하는 것”이 슈퍼노멀이라면, 그것은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함으로써 지각의 과정 그 자체가 미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러시아 이론가 슈클로프스키의 입장과 먼 거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형식주의 예술론에서는 지각과정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상을 ‘낯설게 하는’ 예술적 기법과 예술가의 창조적 개입이 중요하지만, 슈퍼노멀은 그런 ‘창조적 자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곧 슈퍼노멀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기 때문에 누가 만들었을까란 궁금증도 갖게 하지 않는다. 디자이너의 생각과 예술가의 손길을 관심 대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바로 슈퍼노멀의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특별한 기교나 장인의 솜씨 없이도 특별해질 수 있다는 것, 가장 평범한 것이 비범함을 품고 있다는 슈퍼노멀의 발견은 일상 속에 파묻혀 지내는 우리를 뿌듯하게 한다. 

09. 11. 08. 

P.S. 내 주변에도 '슈퍼노멀'이 없을까 둘러보다가 생각이 미친 건 애용하는 형광펜이다. 풀네임은 모나미 에딩 '슈퍼형광'. 요즘은 태국산으로 판매되는데, 그런 탓인지 가격이 저렴하다. 개당 200-250원. 책을 읽으며 줄을 긋기 위해 주로 활용한 게 몇 년쯤 된 듯싶다(주로 초록색만 쓴다). 가장 저렴하고 가장 단순하지만, 내겐 필수품이어서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 정도면 슈퍼노멀로 손색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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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09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수첩(7x11)과 Petit펜입니다. 칼라티를 살때도 가슴 주머니가 있는 옷을 사죠. 돈과 지갑이 없으면 괜찮아도 수첩이 없으면 되돌아가 챙긴후 외출합니다. '간디'의 '슈퍼노멀'을 보니 '소로'의 '시민불복종'이 생각납니다.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주기 했구요.'소로','간디','톨스토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로쟈 2009-11-09 19:04   좋아요 0 | URL
네, 세 사람을 묶은 책이 나올 법도 한데요...

펠릭스 2009-11-10 17:57   좋아요 0 | URL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킹목사에게 영향을 주었고요.

me-polaris 2009-11-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께 저공비행을 샀습니다.
저에게는 낯선 작가라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열심히 읽어볼 생각입니다.
여기 제가 사는 버지니아에서 돈을 지불하고 인문계책을 사고 파는 행위는 서점의 주인과
고객에게 어지간히 극적이지요.

로쟈 2009-11-09 19:03   좋아요 0 | URL
버지니아에서 사실 수 있는 <저공비행>이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관심을 모았던 올해 노벨문학상은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 시인 헤르타 뮐러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올해는 물망에 오르지 않았던 의외의 인물에게 상을 주기로 한 모양이다. 한국 작가들에게도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물론 앉아서만 기다릴 순 없는 일이기도 하다. 40년 간의 겸재 정선 연구를 갈무리하여 펴낸 최완수 선생을 봐도 그렇다. 20대에 시작한 연구를 매듭 짓기 위해 평생 빈둥거릴 새가 없었다는 이 미술사학자의 고백을 그의 자부심과 함께 스크랩해놓는다. 이번에 나온 <겸재 정선>(현암사, 2009)은 고가본이어서 내겐 말 그대로 '그림의 책'이지만 형편이 좀 피면 소장해놓고 싶다. 

 

한겨레(09.10. 08) "영광스런 겸재 연구…빈둥거릴 수 없었죠” 

“내가 평생을 걸고 겸재의 삶을 밝히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의 화풍은) 이렇게 밝혀지지도 않았을거야….”  

쪽빛 두루마기 입은 노학자는 환한 웃음을 띄우며 거침 없는 자신감을 내뱉었다. 금강산을 비롯한 이땅 강산의 아름다운 진경을 처음 붓질로 펼쳐 보여준 18세기 대화가 겸재 정선(1676~1759), 이 거장의 200여년전 인생길을 자기 인생에 포개며 평생을 연구한 미술사학자 최완수(67·간송미술관 연구실장)씨의 풍모는 당당하고도 단단했다.  



겸재가 세상을 뜬 지 250주년인 올해를 맞아 그는 약 40년간의 겸재 연구를 집대성한 대작 <겸재 정선>(전 3권, 현암사, 32만원)을 최근 펴내며 마음에 아로새겼던 필생의 숙원을 풀었다. 지난 6일 마련한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이 책 속에 겸재 그림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자부했다.

<겸재 정선>은 1971년 간송미술관 첫 기획전으로 ‘겸재전’을 시작한 이래 이 미술관에서 8차례나 펼친 겸재 기획전과 그가 펴낸 관련 저술·논고, 다른 학자들의 연구 성과까지 총망라한 역저다. 1676년 서울 백악산 아래(현 청와대 근처)에서 태어난 겸재가 1759년 인곡정사에서 84살로 타계할 때까지 거장의 일대기를 고증해 되살리면서 <청풍계><해악전신첩>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등의 걸출한 산수, 풍속화 등의 명작들과 더불어 화풍의 변천, 관직 생활 등을 낱낱이 담아냈다. 2년 넘게 집필한 본문만 200자 원고자 3673장에 달하며, 원화처럼 재현한 도판 206장, 참고그림(삽도) 147장이 들어갔다. 저자가 직접 18차례나 교정을 거듭했을 정도로 지극정성을 기울였다고 했다. 겸재의 가계도와 가정 형편, 교우 관계, 학맥 등과 당대 정치·사회 정세까지 철저한 문헌 고증으로 세밀하게 담아내 겸재의 시대를 재구성한 것이다.

“저나 간송이나 겸재와의 만남은 숙명이었어요.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이 일찍부터 겸재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고 일제 강점기 명작들을 집중 수집했고, 1966년 간송미술관에 들어온 저는 그린 연대가 확실한 간송의 수집 기준작들을 보면서 연구를 거듭했으니 말이죠. 생전 겸재의 문집이 수십권이나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린 현실적 제약이 내게 그의 일대기를 복원하도록 만든 셈이지요. 글쎄, 약 40년간 겸재 연구는 한마디로 영광스러웠다고나 할까요. 그건 곧 조선의 문화가 영광스러웠다는 것이겠지….” 

숱한 겸재 기획전과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등의 기념비적 저술로 다진 연구 성과들을 갈무리 하기 위해 최씨는 “알려진 겸재 관련 문집은 거의 독파했다”고 한다. 특히 권섭, 이천보, 이하곤 등 1700년대 초반 태어나 이율곡의 조선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으며 성장한 18세기 선비 세대들이 겸재를 진경산수의 거장으로 등극시킨 핵심 지지세력이었음을 치밀하게 고증한 것도 이 저술의 성과라고 강조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 준비 과정에서 새롭게 발굴해 큰 화제를 모았던 겸재의 풍속 기록화 <북원기로회도첩>에 대한 상세한 분석글도 실려 눈길을 끈다.

“보탤 내용은 여전히 많지만, 올해가 겸재 서거 250주년이라 작심하고 일단 마무리지은 겁니다. 이전에 내가 냈던 겸재 관련 저술들이 그림 성격 등에 따라 작품들이 흩어져 있었다면, 이번에 나온 책은 시기의 흐름에 따라 총체적으로 서술하는 편년체 형식으로 작품들을 배치해 일목요연하게 그림들을 볼 수 있어요. 그림에 한문으로 적은 제시, 제발 등도 빠짐없이 번역했으니 앞으로 겸재 연구자들이 많이 나올 겁니다.”

잘 알려진대로 최씨는 1970년대 이래 간송미술관을 중심으로 조선 왕조 시대의 사상, 문화적 역량을 재조명해온 ‘간송학파’ 학자들의 수장이다.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기로 불리는 18세기 문예활동에 대한 집요한 연구의 결실로 ‘진경산수’, ‘진경문화’ 등의 용어를 유행시킨 주역 또한 그다. 특히 70년대초만 해도 ‘서민예술’‘실학의 산물’ 등으로 인식됐던 겸재 진경 그림의 성격과 위상을 재정립한 것은 오롯한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문화 중흥기 그 정점에서 진경산수화를 꽃피운 겸재의 인생 전모를 복원한 이번 저술 또한 그런 연구 작업의 한 획을 긋는 열매다.  

서울대 사학과를 나와 국립박물관에서 일했던 그는 자신의 은사였던 미술사학자 고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소개로 스물다섯 나이에 간송미술관에서 일하게되면서 겸재 컬렉션과 인연을 맺었다. “일제 근대사학의 영향으로 조선 왕조의 문화가 정체됐다는 당시 선입관에 맞서려면 조선왕조 500년 문화사의 절정인 18세기 ‘진경시대’를 조명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그 시각적 실체인 겸재의 그림을 연구하게 됐다”는 회고다. 평생 빈둥거릴 새가 없었다는 최씨는 “후학들이 진경 문화가 나온 시대상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당부도 했다.  

“1970년대 처음 국역 <추사집>을 냈던 추사 김정희의 작품들과 진경 시대 문화의 또다른 산물인 조선왕릉 석물에 대한 연구 성과도 정리하려고 해요. 나이들어 체력이 다하면 제자들이 뒷받침해주겠지요.”(노형석 기자) 

09. 10. 08. 

 

P.S. 형편상 <겸재 정선>을 소장하긴 어려워도 최완수 선생의 <우리문화의 홤금기 진경시대 1,2>(돌베개, 1998) 정도는 이 참에 가까이 두어도 좋겠다.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대원사, 1999)을 따라가봐도 좋겠고. 절판된 <진경산수화>(범우사, 1993)는 도서관에서 한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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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9-10-08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틀즈 앨범도 그렇고 뿌리깊은 나무의 판소리 전집도 그렇고 DG 기념반들도 그렇고 이젠 <겸재 정선>까지..소장가치도 가치려니와 정말 듣고 싶은 노래들이고 그림인데..제게도 그것들을 다 갖기엔 벅차요...한꺼번에 이렇게 쏟아지니.

로쟈 2009-10-08 22:22   좋아요 0 | URL
소장용이니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도 없고요.^^;

2009-10-08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8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0-08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송학파가 노론 계승의 성격이 강하지요.그 반대파는 정조-남인을 추앙하구요.교과서에 진경산수화라는 용어를 쓰게 한 이가 바로 최완수.이 책 출간은 오늘 거의 모든 일간지들이 다뤘더군요.아마 반대진영 학자들의 반응이 나올 겁니다.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로쟈 2009-10-08 23:13   좋아요 0 | URL
겸재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주장이 있는 건가요? 이 분이 거의 독보적인 업적을 쌓은 듯한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10-08 23:33   좋아요 0 | URL
예...반대파들은 최완수 씨가 진경산수화라는 용어로 당시 화풍을 규정한 데 대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게다가 간송학파는 이이-송시열-등 노론 정통을 주장하기 때문에 거기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겸재(물론 겸재나 추사가 노론계열인 건 사실이지요)가 노론인 것을 너무 강조하는 거 아니냐고 지적하지요.원래 영정조 시대가 논쟁거리가 많아요.아마 정조독살설 빼고는 진경산수화를 둘러싼 논쟁이 가장 치열할 겁니다.

네모선장 2009-10-09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등학교 교사로 있습니다만 이럴땐 제가 있는 곳(학교^^)이 좋아요.
학교 도서관에 교사용 도서로 신청해버리면 되거든요~^^
연 예산이 천만원 가까이 되니까요. 어디에 쓸 줄 몰라 쩔쩔매시거든요. 담당선생님이...
^^; 제가 보기엔 사야할 책들이 너무나 많은데....

로쟈 2009-10-09 10:10   좋아요 0 | URL
네, 고등학교 도서관이 대학도서관보다는 아늑할 거 같습니다. '소장'의 의미도 더 날 거 같고.^^

2009-10-09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9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0-10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라는 말속에는 문화재도 포함되었습니다. 문화재가 잘 보존되었으면 합니다. 첫째는 후대인들의 관심의 정도 같습니다. 최근에 10일간 전시된 '몽유도원도/안견'도 어떻게 일본으로 유출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내것이 벌건 대낮인데도 옆집에 버젖이 자랑스럽게 걸여 있다니,, 문화제가 사설로 유출되어 공공장소에서 빛을 못보고 있는 경우인데, 다른 나라의 박물관에라도 있으면 간접 홍보 효과도 있을텐데요.지성적인 재력가들이 사회환원차원에서 밖의 우리 문화재 수집에 대한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겠는데요. 비싼 그림 놀이공원 창고에 두신다니,,,
 

월요일자 '책읽는 경향'에 소개되는 책이 오래전에 읽은 톰 울프의 <현대미술의 상실>(열화당, 1977; 아트북스, 2003)이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미술관련서를 가끔씩 챙겨놓지만, 책을 손에 든 지는 좀 된 듯하다. 그림책을 보면서 휴일을 보낼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까?.. 

경향신문(09. 09. 21) [책읽는 경향]현대미술의 상실  

<현대미술의 상실>(톰 왈프·열화당)은 학창시절 교내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터라 ‘상실’이라는 제목에 유독 마음이 닿았다. 문고판의 이 얇은 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술이론에 끌려가는 현대미술에 대한 야유와 독설이 가득 차 있었다. 책을 볼 때마다 속이 후련해지는 저자의 쉽고도 정확한 비판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이 책은 원제 'The Painted Word'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론’을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현대미술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다. 또한 미술과 작가들의 창작활동이 미술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작동되고 견인되는 것에 대한 지적과 개탄이기도 하다.   

이따금 다시 책을 펼칠 때면 깔끔한 정장에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저자의 사진을 접한다. 그 사진은 1997년 작고한 미술평론가 고(故) 이일 선생을 생각나게 한다. 장안의 멋쟁이로 통했던 이일 선생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이른바 잘 읽히는 비평문으로 유명했다. 나는 그분을 통해 미술비평과 이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결국 그분이 학과장이었던 학과에 늦깎이로 입학했다. 졸업 후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며 선생께 청탁한 전시도록 서문이 그분 생전의 마지막 원고가 되었다.

다양한 비평문과 평론집을 매일처럼 접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글들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오래 살아계셨으면 하는 분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선생의 쉬운 글쓰기와 고운 웃음이 마냥 그립다.(박천남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09. 09. 20. 

P.S. 미술 작품 자체보다 미술 이론이나 비평이 더 득세하게 된 시대가 말하자면, 톰 울프가 진단하는 '상실의 시대'인데, 대략 그린버그의 모더니즘과 액션 페인팅 이후이다. 아서 단토의 표현을 빌면 그 '상실의 시대'는 '예술의 종말 이후' 시대이면서 '철학하는 예술'의 시대이기도 하다. 

    

소위 '이론 이후' 미술사에 대한 관심 때문에 구해놓은 책이 몇 권 있는데, 조나단 해리스의 <신미술사? 비판적 미술사!>(경성대출판부, 2004)와 마크 치담 등의 <미술사의 현대적 시각들>(경성대출판부, 2007) 등이 그것이다. 다시 검색해보니  겐 도이의 <미술사의 유물론적 이해>(경성대출판부, 2007)도 흥미롭겠다.  

 

덧붙이자면 키스 먹시의 책 두 권 <이론의 실천>(현실문화연구, 2008)과 <설득의 실천>(경성대출판부, 2008)도 챙겨놓기만 하고 아직 손에 들지 못한 책들이다. 너무 무거워서 들고다닐 수 없는, 할 포스터 등의 <1900년 이후의 미술사>(세미콜론, 2007)는 내 집 마련 이후에나 소장하려고 하는 나의 '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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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21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론'이라 하면 내포한 '의미'로 체계적인 해석과 주장일테고, 반대로 '무의미 하다'는 것은 단순하다는 것과 통할 것 같습니다. 미술이 미술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그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니면 서로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모호성이나(위장성) 희귀성 때문이겠지요. 현대미술에 대해 편히 읽을 수 있는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조영남/한길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한 미술로부터 위안(순수한)을 얻어 개인의 위기를 극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로쟈 2009-09-21 18:5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한데, 그게 과정을 보면 어느 정도 필연적이기도 한 듯해요...

펠릭스 2009-09-22 21:09   좋아요 0 | URL
로쟈님 빈틈이 없으세요...

2009-09-21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nousee 2009-09-24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안녕하세요, 미술하면서 이 블로그에 가끔씩 접속해 제게 밀린 소개글들 읽는 것이 소중한 시간인데 저 기사를 보면 도무지 미술은 없으면서 있는 척한다라고만 싸잡아 얘기하고 싶은 분위기로 얘기되는 거 같아 조금은 실망스럽네요.. 쿤데라가 말했듯이 '설명할 수 없는 것' 앞에서의 놀라움이 창작의 이유라고 한다면 그걸 설명하는 비평가들의 헛다리와 창작을 혼동하는게 반복되는 느낌이 들때도 있구요..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미술가가 조영남이라는 사실이 조영남의 화투그림이 좋은거라는 건 딴 얘기아닌가요? 그리고 이일 선생은 '쉬운 글쓰기와 고운 웃음'답게 주례사비평의 원조님이시기도 하지요...쉬운게 좋은 거고 좋은게 좋다는게 전 싫네요...

로쟈 2009-09-25 20:50   좋아요 0 | URL
이일 선생이 그러셨군요.^^ 사실 저는 톰 울프의 책이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걸 보면. 대신에 단토의 책들을 좋아합니니다. 아무래도 '그림'보다는 '말'이 전공이다 보니...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

어제 리뷰를 옮겨놓은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는 UAT시리즈의 두번째 책으로 나온 것이다. UAT는 'Ubiquitous Art & Technology'의 약자인데, '유비쿼터스 시대의 예술과 기술' 정도의 뜻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미래교육준비단에서 추진하는 출판 프로젝트로 앞으로 나올 3, 4권의 가제는 각각 '인공생명 예술의 이론과 실천', '예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로 돼 있다(1권은 이미 출간된 <컴퓨터 예술의 탄생>).   

한데, 지난번 한예종 사태 때 직격탄을 맞은 것 중의 하나가 기술과 예술, 그리고 인문학을 한데 아우르려는 이 '한예종판' 통섭 프로젝트여서 이후의 출간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건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이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는 한예종 심광현 교수의 신작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 2009)는 그런 시의성 때문에 눈에 띈다. 인터뷰기사를 보니 최재천 교수가 이끄는 이대 통섭원 주도의 통섭 담론에 대한 대항담론을 구성하는 것도 이 한예종 통섭론의 목표다. 그 대립의 구도는 '수직적 통섭론 VS 수평적 통섭론' 혹은 '환원적 통섭론 VS 비환원적 통섭론'이다. 통섭론의 향방에 대해서도 겸사겸사 가늠해볼 수 있겠다.  

한겨레(09. 08. 13) 기술공학-인문학 수평적 통섭 못하면 미래는 재앙

지난봄 계간 <문화과학>이 ‘지엔알(GNR·생명공학 나노 로봇) 시대의 도래와 문화변동’이란 주제를 특집으로 다뤘을 때 독자들은 당혹스러웠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서민의 삶은 벼랑에 내몰리고 용산 학살이 야기한 사회적 분노가 정치적 임계점을 향해 치닫던 상황이었으니, 유전학·나노기술·로봇공학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의 긴박함을 외면한 ‘먹물들의 한담’쯤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편집위원들 사이에서도 너무 ‘앞선’ 주제가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기술결정론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고요. 하지만 눈앞의 사태에 매몰돼 사회의 심층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심광현(사진) 교수의 문제의식은 최근 그가 펴낸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도르노 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영상이론을 가르쳐온 그가 ‘유비쿼터스’라는 기술공학적 주제로 책을 쓴 것이 의아할 법도 하지만, 그는 4년 전 프리고진의 복잡계 과학의 사유에서 인류 문명의 돌파구를 모색한 <프랙탈>(현실문화연구)의 저자이기도 하다.

심 교수가 <유비쿼터스…>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엔알 혁명에서 탈근대 문화정치, 학술·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데, 핵심 주제를 꼽으라면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이다. 지엔알 혁명이 가속화하는 유비쿼터스 사회는 필연적으로 자연과학과 기술공학, 인문사회과학, 예술 간의 접속과 소통을 요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지엔알로 상징되는 새로운 지식혁명이 근대화 과정에서 수백 개의 분과학문과 전공지식들로 세분화됐던 지식들을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을 매개로 하나의 통합적 지식으로 융합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본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지식의 통·융합이 대단히 위계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등이 주도하는 ‘통섭’ 담론이 대표적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과 제자인 최재천 교수는 모든 지식의 대통합을 강조하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물론 예술까지도 자연과학적(사회생물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심리현상도 인과관계가 있고, 이걸 찾아내면 사회도 인간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끔찍한 결정론입니까.”   

심 교수는 이런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 담론에는 예술을 과학자들에 의해 언젠가 정복될 ‘처녀림’으로 간주하는 근대 과학기술 제국주의의 오만한 전제가 함축돼 있다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수직적 통섭론이 신자유주의적 권력관계와 결합되는 상황이다. “유비쿼터스로 상징되는 기술 발전의 성과를 자본과 국가권력이 독점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라크전에서 선보인 무인공격 시스템 등에서도 드러났지만,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기계-기계(M2M) 간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와 같은 묵시론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 첨단 과학기술이 민주적 사회관계와 결합된다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지식과 지식 간의 수평적(비환원주의적) 통섭이다. 수평적 통섭에서는 예술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 이유를 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평적으로 통섭하려면 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예술이 대등한 지위에서 접속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이걸 시작하기가 어려워요. 전문가일수록 자기 영역이 아닌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술의 전문성이 뭡니까. 자기도 모르는 것을 떠드는 것입니다. 다른 분야에 손 내밀고, 이질적인 것을 섞고, 실험하고, 상상력을 제공하고…. 통섭의 촉매제이자 예인선 역할로는 예술이 제격인 셈이죠.”

심 교수는 이처럼 예술이 매개하는 수평적 통섭을 자신이 가르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유-에이티(U-AT) 통섭교육사업’을 통해 실천하려고 했지만, 상급기관인 문화부의 반대로 좌절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장관의 사업 중단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지난 6월 문화부로부터 ‘중징계’(파면·해임·정직) 처분 요구까지 받았다.  

 

“장관이 통섭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요. 자기가 아는 예술은 기악·발레·연극·회화 등 장르적으로 전문화된 것인데, 여기에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들어오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거지요. 모르면 토론을 하면 되는데, 일방적으로 누르고 (인력과 예산을) 자릅니다. 이건 예술과 학문의 자율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지시가 그런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불통공화국’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이세영 기자)  

09. 08. 13. 

P.S. 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예술이 대등한 지위에서 접속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인 듯싶다. 에드워드 윌슨과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는 '수직적 통섭론'이 과연 '끔찍한 결정론'으로만 귀결되는 건지는 의문이지만(맞거나 틀릴 수는 있지만 '끔찍하다'는 뭔가?), 책의 부제대로 예술-학문-사회가 수평적 통섭을 이룬다면 나쁠 것도 없다. 구체적인 방안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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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08-13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거나 틀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끔찍할' 수도 있는 거겠죠.

로쟈 2009-08-14 07:37   좋아요 0 | URL
예술은 자연과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는 게 일종의 고정관념이란 생각이 들어요. '예술의 최첨단'은 과학기술(유비쿼터스)과의 공생을 모색하면서, 담론상으론 대립적 구도를 설정하는 듯싶어서요. 그리고 통섭 프로젝트도 다 국가지원 사업인데요...

Sati 2009-08-14 20:25   좋아요 0 | URL
그럼 문학도 환원론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오!^^
대립적 구도 설정이라고 지적하신 부분은... <매트릭스>의 네오와 스미스 요원의 관계와 비슷하겠죠.

로쟈 2009-08-14 20:52   좋아요 0 | URL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환원'을 포함한다고 봐요. 그것이 얼마나 생산적인가, 혹은 유효한가라는 환원의 질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펠릭스 2009-08-15 12:33   좋아요 0 | URL
우린 이미 메트릭스에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읍니다.
디지털 매체속에 있습니다.(아날로그와 공존하지만),,,
이진법의 겉만 보고 있으니 착각하고 있는듯 하지만,
실상은 관련 프로그래밍이 2진법이 기본,,,

Sati 2009-08-15 20:55   좋아요 0 | URL
'환원'이라는 말 자체가 '통제'를 암시하는 동시에 폭력적인 것 같습니다. 생로병사를 쥐락펴락하고 인간정신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세상은 '끔찍'하죠. 특히 탐미자와 산 채로 해부 당하는 자가 갈릴 때는 말이죠.

펠릭스 2009-08-16 07:32   좋아요 0 | URL
환원,현미경,폭력,,,현상학적인(자연과학) 의미가 크죠. 두렵기도 합니다. 말씀처럼 질적인 유효성이 어느 정도냐를 생각해봄직합니다. 인간은 생존을 지향합니다. 발해의 멸망은 백두산 화산폭발이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처럼,,,자연의 재앙이 없다면요.

펠릭스 2009-08-13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공지영 님은 의과대학(병원),법과대학(법원 등)에 필수교양으로 문학(소설 등)이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김탁환 교수는 KIST에서 문학관련 강의중,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에게의 문학적 감동(응) 등.

저는 마그리트의 어떤 그림을 보면서 제 전공과 컴퓨터(애플8bit) 활용을 상상했던때가
있었습니다. 수평,수직적 통섭에 대한 큰그림은 잘은 모르지만 필요한 부분같읍니다.
인공지능적인 컴퓨터예술이란 말에 감이 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또한 예술적 감각
성이 개입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무언가 융합되고 혼용되는 참길을 찾는다면,,,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문가중에 비전공자들이 많이 있습니다.(안철수 등)

인문,사회,과학,예술 등의 기본이 언어라 하면 새로운 상상이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고전의 아류중에 '컴퓨터 예술' 또한 의미있습니다.

진중권 님은 현재 IT강국인 우리의 수준이 기능적인 면에 머물고 있으므로,
좀더 창의적인 응용이나 그 너머의 길(예술)로 가자는 의미같습니다.

로쟈 2009-08-14 07:39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게 어떻게 연결되고 서로 도움을 주는지 뇌과학자들이 연구해볼 만합니다...

skyrider 2009-08-1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 진짜 통섭의 전문가 선생님들(한국과학기술학회, KASTS)이 왜 가만히 계시는지 안타깝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의 통섭개념의 오류에 대해선 이미 작년 학회에서 김종영 교수님(경희대 사회학과)이 지적하신 바가 있죠. 통섭 담론을 약 10년 전부터 펴오고 계신 홍성욱 교수님(서울대 과사철 협동과정 phps.snu.ac.kr)을 비롯하여, 이중원 교수님(서울시립대 철학), 이상욱 교수님(한양대 철학), 김환석 교수님(국민대 사회학), 김경만 교수님(서강대 사회학) 등의 책을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한예종에도 이런 쪽에 관심있으신 분이 계신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가급적 해외학계와도 폭넓은 교류를 통해, 좁은 한국땅에서 우물안 논의가 되는 것을 피하고 세계적 수준의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사실 BK나 HK, WCU (월드-클래스 유니버시티?) 등 정부 프로젝트의 목적도 궁극적으로 이러한 측면의 강조에 있을 테니까요.



많은 분들이 담론의 장을 형성하시고, 정부 차원에서 연구소 수준의 지원(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 같은?) 것도 이루어지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

항상 로쟈님 글 잘 보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펠릭스 2009-08-14 07:20   좋아요 0 | URL
최교수의 통섭개념의 오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자연과학분야에서 관심을 갖은 분은 더 없을까요? (생물학 : 사회학, 과사철, 철학,,,)

로쟈 2009-08-14 07:31   좋아요 0 | URL
'통섭'이란 말이 이렇게 유행어가 될 줄은 최재천 교수도 예상치 못했을 거 같아요. 소위 학문의 '대통합'을 뜻하는데, 과학철학이나 과학사회학을 하시는 분들도 그런 방향으로 연구를 하시는 건가요? 방향이 다른 통섭?..

펠릭스 2009-08-14 09:48   좋아요 0 | URL
물리학에서도 통일된 하나의 힘을 찾는다는데요. 통섭, 역시 한 뿌리로 서로 통합이 가능하다는 얘기 같은데, 저는 어떤 소설가의 독서목록과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처음 들은 말(통섭)입니다. 그 개념을 조금 알고서야 생각했습니다. 우리 안으로 그 개념이 들오고 있거나, 이미 들어와 어느 정도 앞서가 있던가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