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잡지 <공간>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에 대한 것이다. 미디어아트에 절반을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에 별반 관심이 없다 보니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는 못한 책이다. 미디어아트의 현단계가 궁금한 독자라면 일독해봄 직하다.

 

공간(09년 8월호) 미디어아트, 예술의 최전선

“20세기에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이 벤야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미학을 구상하게 했듯이, 21세기에 컴퓨터와 디지털이라는 합성기술 또는 기술생성 역시 우리에게 새로운 미학을 구성할 과제를 제기하다.”   

‘예술의 최전선’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책 <미디어아트>의 편자가 서문에 적어놓은 문제의식이다.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8명의 인터뷰를 모은 이 책은 그러한 과제가 아직 완전한 형태로는 아니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게 한다. 디지털 예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서 미디어아트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현 단계의 성취를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상응하는 미디어아트의 구호는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소위 정보혁명의 생산패러다임이 가능하게 만든 ‘기술합성’은 오늘날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게 하는 대신 ‘혼합현실’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당초 군사․산업 용도에서 개발된 영상기술은 ‘뉴미디어아트’ 혹은 ‘디지털 예술 실천’을 낳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예술의 성격을 얼마만큼 바꿔놓을 수 있을까? 몇 사람의 주장을 따라가 본다.   

텔레마티크 아트의 선구자인 로이 애스콧은 디지털 아트가 창출해낸 ‘가변현실’이 우리의 자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여러 개의 인격과 정체성을 갖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며, 이러한 변형적 인격의 추가가 미디어아트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많은 자아, 많은 현존, 많은 세계, 많은 의식의 수준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네트 위의 모든 파이버와, 노드, 서버가 우리 자신의 일부이고 잠재성이라면, 이 네트와의 상호작용은 분명 우리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통합된 자아 대신에 다중자아를 갖게 될 것이며 그 결과는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게 애스콧의 낙관주의다.  

컴퓨터게임의 열광자인 도널드 마리넬리는 지금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다면 “세계는 비디오게임이고, 모든 인간은 그저 아바타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초당 100메가바이트의 속도로 어디서나 무선 접속이 가능해지는 현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북한 전역에 비행기로 닌텐도 DS 시스템을 대량으로 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한다.    

인터랙티브 아트 작업을 하는 사이먼 페니는 신체와 공간과 사물 사이의 ‘교섭’, 곧 오브제와의 신체적 인터랙션을 화두로 삼는다. 흥미롭게도 그는 아직까지 많은 미디어아트가 사람들에게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도 인정하는데, 작업의 목적과 거기에 사용되는 기술이 잘 융합되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그 역시 낙관주의의 대열에 선다. 20세기가 영화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게임의 세기가 될 것이며, 게임의 멜리에스나 뤼미에르가 등장하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모바일 게임의 셰익스피어도 탄생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인터랙티브 아트에서도 ‘작가’는 전통적 예술에서와 같은 의의를 갖는 것일까?).   

새로운 3D 디스플레이를 발전시켜온 일본의 가와구치 요이치로는 자기복제를 하는 인공생명의 창조를 예술적 과제로 삼고 있는데, 그에게 예술이란 한마디로 ‘생존’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과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생명체를 만들고 싶어 하지만, 컴퓨터그래픽이나 로봇의 형태로 아직까지 고안해낼 수 있는 유전적 알고리듬은 5억 년 전의 생명체 수준이다. 진짜 생명체의 신비로운 부분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며, 새와 물고기와 나비와 지네, 바퀴벌레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키네틱 아트 작업에서 로보틱 아트로 넘어가고자 하는 한국의 작가 최우람은 기계에 인간과 동등한 욕망이나 욕심, 잠재욕구까지 불어넣고 싶어 한다. 마치 조물주처럼 기계 생명체들의 생태계까지 만드는 것이 그의 예술적 야심이다. 그가 작업을 구상하는 시간의 30-40%는 동물과 식물을 바라보는 데 바친다고 한다. 그것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완결된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은 예술과 기술의 공조이고, 공진화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통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나고, 기술자(엔지니어)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미학을 관장해온 칸트적 미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미적 자율성’이나 ‘무목적의 목적성’ 같은 개념이 예술과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 형태인 미디어아트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과 ‘기술’을 모두 뜻하던 ‘아트(Art)’란 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싶다. ‘예술의 최전선’은 그렇게 ‘예술의 기원’과 만난다.  

09.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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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8-13 19:22 
    어제 리뷰를 옮겨놓은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는 UAT시리즈의 두번째 책으로 나온 것이다. UAT는 'Ubiquitous Art & Technology'의 약자인데, '유비쿼터스 시대의 예술과 기술' 정도의 뜻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미래교육준비단에서 추진하는 출판 프로젝트로 앞으로 나올 3, 4권의 가제는 각각 '인공생명 예술의 이론과 실천', '예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로 돼
  2. 현대적 미술이란 무엇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7 11:56 
    오랜만에 학교에 와보니 건축전문 월간지 <공간(Space)>(506호)가 책상에 놓여 있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의 <이것이 현대적 미술>(갤리온, 2009)에 대한 서평을 실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미술평론가 반이정씨가 꼽은 '올해의 미술책' 두 권이 진중권의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와 바로 이 책 <이것이 현대적 미술>이었다. 우연찮게도 두 권에 대한 서평을 같은 지면에 
 
 
펠릭스 2009-08-1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사 목적용 작전(출구전략 등), 기술(영상,로봇 등), 행정 등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군요.

펠릭스 2009-08-1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 교수가 대학의 '학내규정'에 따라 재임용에 거부되었군요.
조직과 개인 그리고 생각, 반대든 찬성하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면 눈여겨 볼만한 것들이 있을텐데,,,결정자들이 여유를 갖었으면,
"차이의 존중(조너선 색스/ 말글빛냄)"이 생각납니다.
 

교수신문에 연재된 '미술 밖 미술비평' 꼭지의 마지막회를 옮겨놓는다. 그간에 <1>김현 <2>김화영 <3>서경식 <4>김우창 <5>이가림 <6>박완서 <7>박정자와 박홍규 등이 다루어졌고, 마지막은 문학비평가 김윤식 편이다. 그의 '예술기행'을 살펴보고 있는데, 나열된 8권의 책들 대부분을 읽은 듯하다(기행문집은 이후에도 몇 권 더 있다). 특히 <문학과 미술 사이>는 기억에 학부 1학년때 읽은 책이어서 이런저런 추억도 떠올리게 해준다(더불어 내가 좋아했던 책은 <낯선 신을 찾아서>이다). 그런 용도의 스크랩이다.  

교수신문(09. 07. 14) 幻覺 또는 허무에 맞선 ‘포플라’의 운명

문학비평가 김윤식과 미술의 인연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는 책은 그가 1979년에 내놓은 『문학과 미술사이』이다. 이 책은 그의 많은 글쓰기 가운데 한줄기를 이루는 이른바 예술기행 양식의 출발점이다. 이후 그는 『황홀경의 사상』(1984), 『작은 생각의 집짓기』(1985), 『낯선 신을 찾아서』(1988), 『환각을 찾아서』(1992), 『설렘과 황홀의 순간』(1994), 『풍경의 계시』(1995), 『머나먼 울림, 선연한 헛것』(2001) 등으로 이어지는 ‘예술기행’ 모음집을 꾸준히 발표했다. 여기 실린 글들은 대부분 그가 직접 발품을 팔아 작품이 존재하는 현장, 또는 그 작품이 탄생된 공간을 찾아가 거기서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에세이로 정리한 것들이다. 물론 여기에는 문학, 미술, 건축 같은 작품들이 두루 포함된다.   



그런데 그는 왜 기행을 떠나야 했는가. 1996년 발표된 『김윤식 선집』 6권 해제에 따르면 김윤식의 예술기행은 ‘낯선 풍경과 환각을 향한 그리움’에서 발원한다. 환각(유토피아)을 향한 영원한 동경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이 세계의 무수한 곳을 편력하도록 이끌고 그 흔적을 남기게 만든 결정적인 추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윤식은 환각, 또는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 나그네다. 그에 따르면 이 환각, 유토피아는 “지상에 존재한 공상 중 가장 황당무계한 것”이지만 그것은 “모든 민족은 이것 없으면 산다는 일을 원치 않을뿐더러 죽는 이조차 불가할 정도”의 열도를 가진 황홀경의 환각이다(동양정신과의 감각적 만남). 인간은 이 ‘황홀경의 환각’ 없이는 살 수 없다. 그것은 김윤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가 환각에 집착하고, 유토피아에 집착하는 것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환각을 그리워해 찾아 나서지만 자신의 환각을 만들고 그 안에 칩거하지 않는다. 그는 환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환각에 맞선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두려움 또는 유토피아에 집착하기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떠날 때는 언제나 설레였고 돌아올 땐 한결같이 피로하였다. 이 가슴 설렘이란 내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누구나 갖고 있는 그리움이랄까, 에로스적인 것이라 할 수 없을까? …누가 이 장대한 황당무계한 환각 앞에 감히 알몸으로 맞설 수 있으랴. 내 피로함은 이 환각의 너무나 큰 압력에서 왔다. 나는 그 환각 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어야 했다.” (설렘과 황홀의 순간) 

그렇다면 그는 피로를 무릅쓰고 기행에 나서 어떤 환각들과 만났을까. 가령 그는 중국 서안에서 만난 대안탑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탑이란 무엇인가. 인간 염원의 하나이리라. 그것은 빈공간을 향한 발돋음의 표상이다. 이를 기도하는 자세라 부른다. 그것은 하늘 위로 솟아야 한다. 빈 하늘만 있으면 인간은 참지 못한다. 백지의 공포인 까닭이다. 이 빈 하늘의 아득함에서 그 두려움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의 끝이 마침내 탑을 지어내었던 것. 빈 하늘을 조금이라도 가리고 채우기의 한 가지 방식, 그것이 탑이다.” (풍경의 계시)  



그러니까 탑을 만들어내고, 그 탑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하늘이다. 그런데 이 하늘은 빈 하늘, 곧 허공이다. ‘비어있음’의 공포가 그것을 초극하려는 어떤 집단적 의지를 작동시키고 환각을 만든다. 그 초극 의지가 절박할수록 탑은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이렇듯 허공의 공포를 초극하기 위해 환각을 만드는 일은 자기 정체성 찾기와 짝을 이룬다. 김윤식에 따르면 자기 정체성 찾기는 자기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가령 일본 예술의 특질로 ‘사비’라든가 ‘유현’을 소리 높여 외치고 그럼으로써 일본예술을 서양의 그것과 구별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서양의 그것과 끊임없이 ‘닮고자 하는 지향성’을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다(머나먼 울림, 선연한 헛것).

‘비어있음’에 대한 공포는 환각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실 그 환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幻覺’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본적인 것’도 ‘조선적인 것’도 ‘서양적인 것’도 모두가 환각이다. 그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朝鮮美論를 이렇게 평한다. “조선의 미란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일본)이 멋대로 창출해 낸 헛것에 지나지 않는 것. 실제와는 상관없이 일본(서양)인 야나기가 멋대로 자기 취향에 맞게 조선의 미를 線으로 창출해 낸 것일 따름.”(머나먼…) ‘허공’에의 공포는 결코 초극될 수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러나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외면할 것이다.  



에세이 정신과 ‘여로형’ 글쓰기
“성현의 학문을 머리에 이고 하늘의 별을 바라본 집단”으로서 젊은 집현전 학사들이 그렸던 유토피아, 곧 「몽유도원도」는 텅 비어있지만 아름답다. 그러나 분열을 경험한 자는 다시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운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이렇게 분열을 경험한 자가 ‘허무와의 대결’을 통해 순도 높은 고통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김윤식이 생각하는 예술이다(동양정신과의…).

허무와 대결한다는 것은 ‘환각’을, 달리 말해 유토피아가 환각임을 알지만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김윤식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표지화로 건 『문학과 미술 사이』의 머리글에서 그는 일찍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철들면서 먼 도회지로 끊임없이 떠나고 싶었다. 그것은 생각컨대 근대적인 것에의 지향성이었으리라. 그 근대적인 것이 노예나 시녀의 길이었음을 깨닫고 황망히 돌아서려 하자 나의 들길은 근대적인 것이 통째로 삼켜 버리고 아무데도 없었다. 허무가 앞뒤를 가로막아 나아갈 길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허무의 안개 저편에 솟아오르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었다. 포플라의 모습이 바로 그것… 포플라는 줄지어 섰든 혼자 서있든 모습은 외로움이었다. 그러기에 포플라의 이미지는 내겐 릴케의 용담화이고 고호의 삼나무이다. … 포플라는 고독의 표상이기보다 고독 자체였다. 예술이나 문학이란 내게는 이와 같은 표상의 추구일 따름이리라.”

『문학과 미술 사이』에서 김윤식은 이 그림을 이렇게 묘사한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곳, 그러기에 태양도 달도 11개의 별도 함께 출석한 곳. 하늘엔 이것뿐이다. 이 무게 중심에 ‘나’가 놓여 있다. 그것은 실상 나가 아니라 꿈틀거리는 은하수이다. 별도 달도 태양도 이 성운에 휘말려 있다. 아니다. 성운이 별을, 달을 태양을 낳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세계의 자궁 속, 胎 내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포플라의 이미지를 곁에 두고 그는 집을 떠난다. 이렇게 집을 떠난 상태란 ‘여로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데 그 여로는 “뚜렷한 목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방랑도 아닌 여로”다.  

그의 예술기행의 근간을 이루는 에세이 정신은 그러한 접점에 깃드는 정신이다. 그 접점에 정신이 깃들 때 “세상과 사물은 본래의 자리에 놓인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이렇게 그는, 발레리의 표현을 빌면, 이질적인 것을 동시에 수용하는 모더니스트다. 따라서 그에게 문학에 대한 논의가 미술에 대한 논의와 겹치고 공존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아니 필연적이다. 이 모습은 어쩐지 모더니스트 이상의 그것과 닮아 있다. 

김윤식은 화가로서의 이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병들이 카페를 둘러싸고 자라고 있었는데 이러한 병들을 가장 통렬하게 앓아본 사람은 오직 이상뿐이었다. 그 많은 정신질환을 이상은 사랑하고 한 몸에 그들을 감쌌다. 그러기에 그는 아달린과 아스피린을 수없이 장만하고 그 알약들을 보석처럼 『날개』의 삽화에 그려넣었던 것이다. 그가 그의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방식은 오직 이러한 길뿐이었던 것이다.” (김윤식 선집 5)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고 (젊은 시절 김윤식을 매료시켰던) 루카치는 말했다. 그러나 이 복된 시대가 아니라(내적)분열의 시대에 김윤식은 산다. 그는 복된 시대를 꿈꾸나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여 그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자유는 “뚜렷한 목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방랑도 아닌 여로”에 나서는 일이다. 이 여로에 나서는 일은 그 자신에게나 그것을 지켜보는 자에게 똑같이 고통스러운 일, 권태롭고 피로한 일이다. 그러나 고통, 그 권태, 그 피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치열하게 구축한 개개의 유토피아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설령 그것이 곧 무너질 운명에 놓여있다 해도 말이다.(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09.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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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7-1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글에 대한 평론을 읽다보면 공감된 부분이 있다.
명확한 근거와 식견 부족에 의한 불투명을 맑게 해준다.

"문학과 미술",황홀경의 사상,셀렘과 황홀의 순간,~기행,
고흐의 그림 등,, 제목만으로도 궁금해진다.

그는 환각을 그리워해 찾아 나서지만 자신의 환각을 만들고
그 안에 칩거하지 않는다. 즉, 환각에 맞선다.

김윤식님의 탑은 빈 하늘을 향한다.
곧 허공으로 어떤 집단적 의지를 작동시킨다. 하지만 마을영화
신감독의 돌탑은 하늘을 의식하지 않는다. 탑의 몸체에 주목한다.

신감독은 돌마다 조화롭게 쌓아짐에 몰입되어 있다.
옛부터 탑은 기원의 경유지였다.

김윤식님 탑은 환각을 쫒는 벡터에 해당된다. 제동을 걸수있다.
신감독의 탑은 하늘로 향한 그리움보다는 탑을 이룬 돌간의
조화에 더 집중한다.

감독은 허공을 향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영화를 만든다. 그 작업을 즐기며, 밀폐된
공간과의 단절을 극복하려 하려한다.



로쟈 2009-07-19 18:41   좋아요 0 | URL
한두 권 읽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서경식 교수의 세번째 미술 에세이집이 출간됐다. <고뇌의 원근법>(돌베개, 2009). 부제는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그의 전작들을 접해본 독자라면, 이내 손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나도 출간 소식을 접하자 마자 주문을 넣어서 그제 받아본 책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주말 북리뷰들에서 주목할 만한 책으로 다루어졌는데, 한겨레의 기사를 옮겨놓는다. 주로 한국 근대미술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계기로 삼고 있다. 저자 자신이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이 책에 실은 글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랐던 이유는,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국에서 미술-그것도 근대미술-에 나타나는 미의식에 대한 위화감 때문이다."(6쪽)

 

한겨레(09. 06. 06) 한국은 ‘예쁜’ 미술에서 독립하라 

그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그야말로 전혀 개념이 다른 미술 에세이집으로 미술과 미의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뒤흔들며 1990년대 초 베스트셀러가 됐던 재일동포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 그 10여년 뒤 <청춘의 사신>이 번역·출간됐고, 이번에 그의 세 번째 미술 에세이집 <고뇌의 원근법>이 나왔다.

앞의 두 권은 일본에서 출판되고 나중에 한국어로 출간됐으나, <고뇌의 원근법>은 역시 일본의 여러 매체에 먼저 실리긴 했지만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건 한국 쪽이 먼저다. 차이는 그것만이 아니다. 더 두텁게 쌓인 연륜이 더 날카롭게 벼린 최근작일 뿐만 아니라, 2006년 4월부터 2년간 서울에 머문 그의 난생 첫 장기 한국 체험이 새롭게 부가한 문제의식을 짙게 반영한 편집이라는 점에서도 분명 다르다.    

 

» <댄서 아니타 베르버의 초상>. 1991년 슈투트가르트와 베를린에서 열린 ‘오토 딕스 탄생 100돌 기념 회고전’의 포스터가 된 그림. “이 잔혹하기까지 한 강렬함!”이라고 서 교수는 평했다. 

바로 그 한국 체험을 토대로 그가 던진 화두는 이것이다. “왜 내가 본 모든 한국 근대미술 작품은 그렇게도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실은 이 도발적인 의문이 오토 딕스 등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을 주로 다룬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다.  

서 교수에게 ‘미의식’이란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라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무언가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느꼈을 때는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지 되물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미의식은 실은 역사적·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도 인간의 일인 이상 그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돼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그런데 “지나치게 예쁘기만 한” 한국 근대미술은 ‘지루하다’고 그는 얘기한다.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 오토 딕스의 <늙은 연인들〉

위대한 화가들로 그가 꼽는 사람들, 곧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그리고 이번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 에밀 놀데,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프랜시스 베이컨, 빈센트 반 고흐 등은 결코 그들 작품이 예뻐서 감동을 주는 게 아니다. 이 거장들은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그 현실을 직시해서 그리려 했고”, 그게 바로 감동의 원천이며,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는 게 서 교수 지론이다.  

왜 한국 근현대 미술은 지루한가? 그건 실제 삶과 유리돼 있고, 뒤틀린 현실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목숨 건 대결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민중미술 계열의 일부는 예외적이라 했으나, 그것마저 거의 고사 단계란다. 그렇다고 그가 ‘위안’이나 ‘치유’를 구하는 예쁜 미술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미술이 판치고 있다는 것이다.

애초 이런 문제의식이 겨냥한 대상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90년대의 전세계적인 기억의 싸움 속에서 패배하고 있는 사회”, “예술과 싸움이 무관한 사회”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서 교수는 군국 일본의 참혹한 범죄행위에 침묵했을 뿐 아니라 공범자로 가담한 일본 근현대 미술이 과거 기억을 말살하고 날조하는 전후 일본 국가의 무반성과 파렴치에 편승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미술 에세이들은 바로 국민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미의식’을 통제함으로써 편향된 국민적 이데올로기를 조작해온 일본 국가의 의도에 놀아나는 일본 대중의 의식에 일본미술과는 다른 길을 간 서양미술의 진실을 통해 충격을 가하려는 고독한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두 형이 한국에서 장기수가 된 비통한 자신의 가족사와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근대 미학주의와 강고하게 결합한 국가의 억압체제를 깨뜨리는 ‘기억의 전쟁’은 국가로부터 독립한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으며, 독립적 인간은 단지 정치적 차원만이 아니라 미의식의 차원에까지 깊숙이 파고들어가 자기성찰을 통한 미의식의 독립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게 서 교수 생각이다. 그 출발점은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더 철저하게 바라보고, 더 격렬하게 창조하라!”

서 교수는 자신에겐 ‘금단의 땅’이었던 군사독재하의 처참한 한국 현실이 일본에선 불가능했던 치열한 미의식과 미술운동, 말하자면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군사정권이라는 역사를 겪어온 조선 민족에게 그 역사들과 길항하는 미술”을 창출했을 것으로 상상한 듯하다. 그는 그 가능성을 줄기찬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확인하고 꿈꾸어 왔다.

하지만 2년간 실제 겪어 본 조국의 미술은 그렇지 못했다. ‘성공한’ 근대 때문에 근대의 미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한국, 바로 그 일본한테서 ‘실패’를 강요당한 한국 현대미술이 근대의 수입 통로였던 일본의 한계를 복제하고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현실이 그에겐 더욱 절망적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그게 애초 일본 사회를 겨냥했던 이 책을 한국에서 먼저 묶어내는 이유다.

따라서, 살롱 회화의 정통 원근법의 한계를 비극적으로 돌파하면서 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인간 고뇌의 원형을 보여줬다는 고흐에 관한 지은이의 글에서 제목을 따온 <고뇌의 원근법>은 국가주의에 저항한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준 고흐와 카라바조에 대한 생생하고 정밀한 현장실사를 통해 우리 미술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돼 있는지, 돌파구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를 점검해보는 안내지도일 수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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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ousee 2009-06-0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했듯이 한국근대미술은 일본의 한계를 복제한 수입미술이었으며 미술잡지등의 사진이미지들을 통해서 체험된 감상적 미술이 주류미술로 인정되고 대학교편을 잡으면서 서교수가 지적한 '기억의 전쟁'이 부재한 뜬구름잡는 추세만 낳았다고 봅니다. 그럼 세계현대미술계가 자본의 흐름과 영향력때문에 주목하는 현재 중국은 어떨가요? 더 교활한 방법이 나타나죠, 이데올로기 문제를 아예 상품화 하는 경향인 거죠. 희생자들의 아픔을, 눈물을 대상화하며 공예품처럼 아주 잘 뽑아내죠...그가 실망한 한국은 그러나 나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다고 평가되기 시작했죠. 서교수가 2년 체류기간에 어떤 방식으로 미술을 접하셨을가요? 유명한 서양미술관들에 시간의 아우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명작'들이 어떻게 한국의 근대미술과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서교수도 고호에 관련된 선지식과 정보, 신화때문에 그 그림을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 어느 마을사람 눈에는 삽화수준의 별 쓸데없이 힘줘 그린 그림일 수도 있지 않을가요? 한국근대미술의 문제점은 어찌보면 '읽기'가 없는 전통에서 수입된 '읽기'로 짜맞추기를 힘겹게 하는 과정에서 비롯된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nanousee 2009-06-07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놓고보니 제가 댓글다는 일이 익숙치않아 다른 분들보다 좀 길게 쓰는 촌스러움을 저지른것 같네요..죄송-_-;;

로쟈 2009-06-07 20:15   좋아요 0 | URL
더 긴 댓글들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목은 더 자세하게 쓰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서평자로 적임이실 듯한데요.^^

펠릭스 2009-07-1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이 어떤 풍경이나 사물을 본 다음의 반응은 다양하다.
스치듯 본 이미지나 문구, 그것들의 연유를 알고 다시 음미하는,,,

토끼장에서 막 생산된 새끼를 봤다. 장맛비에 둥지는 젖어 있었고,
새끼들은 밖으로 흩어저 있었다. 붉은 토끼 새끼가 징그러웠다.
이미 죽은 새끼를 면장갑을 끼고도 집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시 생각했다. 어미 토끼는 어떨까, 어미는 무감각할 수 있다.
잠시 어미 토끼 심정을 상상했다. 그 어미의 심정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 왔다. 살아 있는 나머지 새끼를 직접 들어 마른 둥지로
옮기지 않는다면, 나는 독서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토끼보다 책을 편하게 읽을 욕심으로 다섯마리의
토끼 새끼를 직접 옮기는 행동을 찔금 감고 했을 것이다.

어찌했든, 어미 토끼의 마음과 살아 있는 새끼에 대한 연민,
내 자신의 얄팍한 술수가 조화된 지금, 토끼 새끼도 나 자신도
편할 것이라는 안도감에 젖어 있다.

창밖에 나무들이 심하게 흔들린다.
작가의 마음과 화가의 마음은 어느 부분에서 일치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다를 뿐, 그들에게는 나에게 없는 무엇이 있다.
나는 그 무엇이 내속으로 들어 오기를 기대한다.
 

갑자기 장대 같은 소나기가 내리는 탓에 학교 강사실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마침 건축 전문 월간지 <공간(SPACE)>(6월호)이 배송되었기에 막간에 잡지에 실은 서평이나 옮겨놓는다. 예술경제학서로 분류되는 한스 애빙의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21세기북스, 2009)에 대한 것이다. 글은 잡지에 게재된 버전으로 수정했다.

SPACE(09년 6월호)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란 소설 제목도 있지만, ‘예술가’를 가장 빈번하게 수식하는 형용사는 ‘가난’이 아닐까 싶다.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이야말로 예술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구성한다. 비록 ‘부유한’ 예술가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발표되는 예술가들의 경제형편에 대한 설문결과는 그러한 고정관념과 배치되지 않는다. 대다수 예술가들의 평균소득이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며, 창작만으로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소득 제로’ 예술가도 적지 않다. 반면 생존 작가의 그림이 100억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기도 하고 구스타프 클림트나 반 고흐의 그림은 1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낙찰되기도 한다.  

상위 5%의 스타급 예술가들이 전체 소득의 95%를 가져간다니 예술사회 또한 전형적인 ‘승자독식사회’지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뭔가 특이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가들의 소득수준이 낮은 이유는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왜 예술분야에서는 각종 지원이나 기부 등의 후원영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일까? 네덜란드의 예술가이자 경제학자인 한스 애빙은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21세기북스 펴냄)에서 바로 그런 질문들을 던진다.   

책의 부제는 ‘예술경제의 패러독스’로 간단히 말하자면 예술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 멋들어진 오페라하우스와 화려한 오프닝, 엄청나게 부유한 예술가와 부유한 후원자들의 세상이 하나의 얼굴이라면, 자기 돈을 써가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다른 부업과 여러 가지 지원금을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또 다른 얼굴이다. 한편에서는 예술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상업성을 외면하고 혐오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외면/혐오를 상업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대관절 예술이 무엇이기에?  

사회학적 관점에서 저자가 내리고 있는 예술의 정의는 이렇다. “예술이란 사람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것이다.” 즉, 무엇이 예술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정의에서 ‘사람들’이 가리키는 건 대중이라기보다는 ‘예술계’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이다. 즉,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자면 “예술이란 일부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인 셈이다. 이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예술이 특정한 사회적 계층이 갖고 있는 예술적 취향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으며 예술을 정의하는 힘은 사회적으로 불평등하게 분포돼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회적 계층에 따라 각기 다른 예술적 취향을 갖고 있다. 우월한 예술과 열등한 예술, 상위예술과 하위예술의 구분은 그러한 취향의 차이가 낳는다. 그럼에도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다면 그건 한 그룹의 예술적 취향은 무시되는 반면에 다른 그룹의 예술적 취향은 존중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저자는 ‘문화적 비대칭성’이라고 부른다. 알다시피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는 일부 계층이 독점하며, 예술은 그들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처럼 되고자 ‘신분상승’을 꿈꾼다. 즉 ‘사회적 사다리’에 올라타고자 하는 것인데, 상징적인 차원에서 그 ‘사다리’에 해당하는 것이 상위계층의 예술적 태도와 취향이다. 곧 상위계층은 하위예술을 무시하지만, 하위계층은 상위계층을 동경한다. 예술에 대한 신화와 일반적 숭배는 그렇게 탄생한다.  

예술은 실용품이라기보다는 사치품이다. 어떤 실용적인 용도를 목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경험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비실용적이고 사치스러운 예술이 진정한 예술로 정의되고 인정받는다. 왜냐하면 예술의 그러한 존재방식 자체가 귀족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비실용성은 실용성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매력이 된다. 자신의 지위와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시장은 문화적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장이 되며, 특정한 예술가에 대한 주목과 과잉경쟁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결과적으로 예술시장은 극소수의 예술가가 천문학적 수입을 올리는 승자독식시장이 되며, 마치 복권에서처럼 ‘당첨자’를 제외한 대다수 예술가들은 빈곤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그렇다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후원을 얻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강한 예술창작의 동인이 되는 것은 금전적인 보상을 대신한 ‘심리적 소득’, 혹은 ‘비금전적 내적 보상’이다. 바로 자신이 재능이 있고 뛰어난 인간이라는 자만심과 자기기만이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예술가들의 가난과 예술세계의 구조적인 빈곤이 지속되는 이유이다. 상위예술과 하위예술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게 되면 예술경제의 특수성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도 사회적 계층이 존재하는 한 예술경제의 특수성도 지속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09.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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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usDei 2009-06-0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책 출간 이벤트에 실력과 운이 없고 타이밍도 맞지않아 참여를 못했는데, 대신 '예술가는 왜 가난해야할까'라는 제목에 몇자 씁니다. 얼핏 쓰려니 거친말 같아서 네이버 사전을 찾으니 '사물의 모양새나 됨됨이'라는 뜻이 있군요. 꼴. 예술의 값어치는 꼴값에 표현하려는 내용이나 의미가 더해지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예술가도 돈을 벌수있어야한다, 돈을 벌 수있다 라는 생각자체를 폐기해야할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09-06-02 22:21   좋아요 0 | URL
저는 책을 예술사회가 왜 승자독식사회가 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진단과 분석으로 읽었습니다. 분명 일부 예술가들은 떼돈을 벌 수 있고, 또 벌고 있지요...

nanousee 2009-06-03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설치미술을 하는 작가입니다. 예술창작의 동인이 되는 것은 비금전적 내적 보상, 자신이 재능있고 뛰어난 인간이라는 자만심과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여전히 예술가라고 정의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작가신화 계급적 사고를 동의할 때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작가는 자만심보다는 좌절때문에 자기기만보다는 해야 하기 때문에 움직입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결론은 같다고 인정하나 일종의 개별의견을 내는 과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고호의 그림값, 5프로의 스타급 예술가 승자독식사회는 바로 지금 우리 여기에서도 같은 잣대를 쓰고 있기 떄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할까라는 질문에 이미 신화적 읽기가 반복되있다는 생각에 좀 긴 댓글남깁니다...

로쟈 2009-06-03 23:29   좋아요 0 | URL
예술가의 가난은 '신화'가 아니라 '사회학적 사실'이 아닐까요? 그리고 저자의 주안점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예술사회'입니다. 사회학자의 관점은 예술가내부의 시각과는 좀 다르겠지요...

nanousee 2009-06-0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그런데요, 이 정부 들어와서는 미술쪽 탄압도 심해졌고 기금들은 줄줄이 삭감되었죠. 그러면서 늘 이런 식의 얘기를 하죠. 예술가는 배가 고파야 작품이 나온다..빨리 죽인 다음에 값을 올리는게 남는 장사라는건 알겠는데 일반인들도 그렇게 굶어죽어간 고독한 화가여야 신화에 의존해 작품을 보려든다는 문제를 말씀드린겁니다. 사회학적 사실이 어쨋건 상위계층이 만드는 취향에 부단하게 전복하려는 노력을 작업에서 읽어낼 수 있는가를 덧붙여 주문해봅니다..

로쟈 2009-06-05 08:41   좋아요 0 | URL
서경식 선생의 <고뇌의 원근법>이 새로 나와서 보고 있는데, "상위계층이 만드는 취향에 부단하게 전복하려는 노력" 같은 걸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예술경제학은 그냥 예술'시장'을 대상으로 하지 예술가의 고뇌를 다루지는 않고,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신화는 또 별도의 문제라고 봅니다...

nanousee 2009-06-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뇌의 원근법도 로쟈님이 리뷰해주시리라^^믿으며..그리고 이 기회에 항상 보물창고같은 로쟈님 블로그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예술시장을 대상으로 하면서 예술가의 고뇌가 어떻게 가격으로 매겨지고 사회적 신화는 또 별도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면 이 책 이상할 것 같아요-_-;; 신화를 만들고 팔기 위해 그리는 작가들의 전략이 얼마나 또 복합적으로 결탁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취향의 계급을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해지네요. 아 제가 읽어보지도 않고 로쟈님 리뷰 마지막 단락에서 마음이 걸려서 처음으로 댓글을 쓰기 시작했었습니다. 이 김에 한가지 딴 질문 더 물어봐도 될가요^^*왜 지젝사진? 지젝이 설마 잘 생겨서는 아니시죠?^^

로쟈 2009-06-05 16:13   좋아요 0 | URL
그의 열정과 광기에 대한 경의 표시입니다.^^;
 

어제부터 내일까지 원고의 강행군이다. 중간에 학회 발표도 하고, 학회지 편집도 거들고 하면서도 5편의 글 120매를 써야 하고 마지막 책 교정도 보아야 한다. 정신이 없어서 토요일자 신문들도 미처 챙겨읽지 못했다. 뒤늦게 둘러보니 다행스럽게도 주머니를 털 만한 '시급한'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니콜라스 미르조예프의 <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홍시, 2009)은 지난주인가 이번 주초에 봐둔 책인데, 이미 <바디스케이프>(시각과언어, 1999)란 책이 오랜전에 소개된 바 있는 저자다. 이번에 나온 책은 원제대로 '비주얼 컬처'(시각문화) 입문서로 꽂아둘 만한 책인 듯싶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9. 05. 09) 보는 행위, 그 속에 숨겨진 ‘시각의 권력’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물리적으로는 각자의 눈과 거기에 연결된 시신경이다. 그러나 보는 방식에는 권력이 스며있다. 자신도 모르게 백인의 눈으로, 남성의 눈으로, 제국주의자의 눈으로 사물과 사건을 인식한다. 뉴욕대 교수인 저자는 근대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각문화를 대상으로, 보는 행위에 얽힌 정치적 함의를 풀어놓는다. 과거 존 버거는 미술작품에서, 로라 멀비는 영화에서 보는 자의 권력을 비판적으로 읽어낸 적이 있는데 저자의 분석은 더욱 광범위하고 체계적이다. 그는 미술의 혁명이자 근대적 보기의 시작인 원근법의 발명에서 시작해 회화·조각·사진·텔레비전·가상현실·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시각문화가 발전해온 역사를 서술한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도 있듯이 시각은 흔히 다른 감각에 비해 정확성과 객관성을 갖는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여러가지 반증이 있다. 원근법은 사물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식이었으나 실제로는 빈번한 왜곡이 이뤄졌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의 화가들은 원근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왕이 신하들보다 작아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배경은 원근법으로 하되 인물은 고전적인 비례크기에 따라 묘사했다.

시각의 권력은 현대사회로 오면서 점점 커진다. 미국 가정의 99%에서 하루 평균 7시간48분동안 켜져 있는 텔레비전은 파편화된 세계에서 집단경험을 제공하는 초강력 매체다. 텔레비전의 이데올로기 문제는 수많은 미디어학자들이 지적해왔다. 인터넷 역시 발명초기의 급진적 평등성을 둘러싼 허풍스러운 주장보다는 역사적·문화적으로 결정된 공간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오늘날 가상세계는 인터넷 사용자·호스트·네트워크의 60%를 차지하는 중산층 미국인을 위한 보호막이라는 것이다.

시각이 갖는 권력은 제국주의 역사를 관통해 왔다. 콩고사회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표피적 서술은 그들에게 식인종이란 낙인을 찍었고, ‘미개인’에 대한 이미지는 제국주의자는 물론, 피식민지인 스스로에 의해 실천에 옮겨진다. 현대의 신제국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더욱 교묘하다. 저자는 외계인과 싸우는 미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맨 인 블랙>을 남미와의 국경을 통제하는 일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읽어냄으로써 일상에 스며든 이미지의 권력을 고발한다.

그는 1996년 가을 미국의 크루즈미사일이 이틀간 두차례 이라크의 대공방위시설물을 공격했음에도 며칠 뒤 이라크군이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켰던 일화를 들면서 “보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상문화학, 비판적 문화연구의 바이블에 해당되는 책으로, 원서는 10년전 나왔다.(한윤정기자) 

09. 05. 09.  

  

 

P.S. 기사 중에 존 버거와 로라 멀비의 책이 언급되는데, 짐작에 <이미지, 시각과 미디어>(동문선, 1990)과 <1초에 24번의 죽음>(현실문화연구, 2007)을 가리키는 듯싶다. 예전에 '시각문화'와 '스펙터클'을 주제로 한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느라 나름으로는 이 주제의 책들을 몇 권 뒤적여본 적이 있다. 기회가 되면 묶어서 다뤄봐도 좋겠다. 미로조예프의 책을 기준점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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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0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akim 2009-05-1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라 멀비의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ima라는 기념비적 논문을 언급하는 듯합니다. 그녀의 최근작인 <1초에 24번의 죽음>은 영화매체의 존재론을 다루는 이론서로 1초의 24번이라는 것은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기계적 촬영과 영사의 과정에서 사라지는 혹은 드러나지 않는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음이라 본 것이죠. 영화의 유령성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화의 존재론적 특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이론서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9-05-10 22:32   좋아요 0 | URL
멀비의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ima가 번역돼 있던가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관련논문은 읽은 적이 있지만...

yoonakim 2009-05-12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번역은 되어 있는데 원문으로 보는 것이 훨씬 이해가 잘되죠. 원문은 movies & methods나 film theory & criticism 같은 엔솔로지 형태의 영화이론서들에는 거의 수록되어 있습니다. 로라 멀비는 <1초에 24번의 죽음>에 와서는 페미니스트적 색체보다는 영화의 존재론이나 형식미학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론가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는 듯합니다.

로쟈 2009-05-12 12:18   좋아요 0 | URL
네, 원문은 갖고 있어요. 번역됐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