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가끔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오타로 나가는데 이번주도 그렇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1850)에 대한 간단한 독후감을 적었다. 개인적으론 멜빌의 <모비딕>(1851)과 함께 이번 학기 교양강좌에서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두 작품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게 특기할 만하다.  

  

한겨레(11. 05. 14) 누가 주홍글자를 음란하다 했나

“미국인의 상상력이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소설”(D. H. 로런스)이라고 하면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다. 과거 그의 단편 <큰 바위 얼굴>이 국어교과서에도 실렸었기에 마크 트웨인만큼 친숙한 작가이지만 <주홍글자>를 ‘청소년 권장도서’라고 부르긴 어려울 것이다. 일단 주홍글자 ‘A’가 ‘Adultery’(간통)의 첫 글자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테니까. 실제로 미국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이 작품을 필독서로 지정할 것이냐를 놓고 적잖은 분란이 있어왔다고 한다. 도색적이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일부 학부모들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라면 몰라도 <주홍글자>에서 도색성과 음란성을 색출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17세기 미국 청교도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간통을 범한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에게 치욕의 징표로 주홍글자를 달아준 사람들조차 나중에는 ‘A’가 무슨 뜻인지 헷갈려한다. 헤스터가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걸 보고 그것이 ‘Able’(능력)을 뜻하는 걸로 해석하기도 하고, 밤하늘에 나타난 주홍글자를 보고선 ‘Angel’(천사)을 떠올리기도 한다. ‘A’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극적으로는 모호하며 불확정적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신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이 꿈꾼 유토피아의 역설에도 새겨져 있다. 그들은 인간의 미덕과 행복에 가득 찬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감옥과 묘지라는 걸 알았다. 삶을 가두고 매장하는 일이 지상천국의 전제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간통을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주홍글자>의 이야기는 ‘감옥 문’에서 시작한다. ‘간통소설’이 아니라 ‘감옥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공동체의 질서를 문란하게 만든 혐의로 갇혔다가 젖먹이 아이를 안고 가슴에는 주홍글자를 달고서 감옥에서 나오는 헤스터는 처음부터 타고난 위엄과 강인함을 가진 여성으로 소개된다. “이 키가 큰 젊은 여자는 몸매가 이를 데 없이 우아했다. 검고 풍성한 머리채는 너무나 윤기가 흘러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녀는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는 늙은 학자와 결혼하고 남편보다 먼저 신대륙으로 건너온다. 그러고는 젊은 목사 딤스데일과의 순간적인 사랑으로 딸을 낳는다. 딸아이는 그녀에게 신의 축복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주홍글자’였다. 헤스터는 혼자서 딸을 키우며 오랜 소외와 인내의 삶을 살아간다. 과연 다른 삶을 살 기회가 그녀에겐 주어질 수 없는 것일까.

호손은 이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장에서 헤스터와 딤스데일을 숲에서 7년 만에 재회하도록 한다. 똑같이 죄를 범했지만 처벌받지 않은 탓에 오히려 더 큰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딤스데일을 헤스터는 위로하며 그는 잠시 기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내게 기쁨의 씨앗은 벌써 시들어 버린 줄 알았는데! 오, 헤스터, 당신은 내 더없이 훌륭한 천사요!”

햇살이 흘러넘치는 대자연 속에서 두 사람이 다시금 맛본 삶의 기쁨은, 하지만 마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함께 새로운 삶을 꾸리자는 헤스터의 제안을 받고서도 딤스데일은 결국 죄의식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호손은 냉정하게도 두 사람의 행복은 세상이 성숙하여 좀더 밝은 시대가 올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리라고 본 듯싶다. 비록 실현되진 않았지만 “사회조직을 모두 깨부수어 새로이 세워야 한다”는 게 헤스터의 ‘새로운 생각’이자 신념이었다. <주홍글자>는 음란하다기보다는 매우 도전적인 작품이다.  

11. 05. 13.  

P.S. 번역은 주로 민음사판으로 읽었지만 을유문화사판과 펭귄클래식판도 참고했다, 서숙 교수의 영미소설 특강 <주홍글자>(이화여대출판부, 2005)도 유익한 참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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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아이템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강준만 교수가 지적한 '한국형 평등주의'에 대해 쓰게 됐다. 참고한 책은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인물과사상사, 2011)이며, 슬로터다이크의 말은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소셜네트워크 시대의 사생활과 사회윤리의 문제는,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최근에 불거진 서태지, 이지아 커플의 이혼 파문 등을 염두에 두었다.

       

경향신문(11. 05. 10) [문화와 세상]평화를 위해 때론 무관심 필요

대한민국은 특별한 나라인가? 강준만 교수에 따르면 그렇다. “한국인은 한국을 잘 알까”란 질문을 던지면서 ‘새로운 한국학’을 제안하는 그의 책 제목이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이니까. 지난 겨울에 나온 이 책에서 ‘영어의 문화정치학’이란 장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강 교수는 한국 사회의 영어 광풍을 한국형 평등주의란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형 평등주의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삶의 철학이다. 물론 “너도 하면 나도 하겠다”는 평등의식이 많은 부작용도 낳았지만 한편으론 한국 사회를 이만큼이라도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는 게 강 교수의 평가다. 한국인들에게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는 욕심만큼 강력한 성취동기도 드물었다. 

이 평등주의가 특별히 ‘한국적’인 것은 한국만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갖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좁은 땅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밀집해 살아온 것이 한국인의 삶이었다. 그래서 사회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고밀집사회’로 분류된다. 게딱지처럼 붙어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약 400㎞이고 KTX로는 두 시간 반 거리다.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선망하는 나라, 미국은 어떤가. 동서로 약 4300㎞에 이르고 네 시간의 시차가 있을 정도로 광활해 동서횡단이 말 그대로 ‘대륙횡단’이 되는 나라다. 아무리 성조기를 흔들면서 닮아보려고 애를 써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좁은 땅에 살다 보니 미국에 없는 것도 갖게 됐다. 이웃과의 강박적인 비교다. 다시 강준만 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이 ‘이웃 효과’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라다. ‘엄친아’나 ‘엄친딸’이란 말이 한국만큼 유행어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포함한 모든 일은 이웃과의 비교를 통해서 의미를 갖는다. 이렇듯 강한 타인지향적 인정 욕구가 ‘영어전쟁’에도 개입돼 있기에 단순히 ‘광풍’이라고 비판해봐야 먹히질 않는다는 게 강 교수의 지적이다. 애초에 영어전쟁의 목적이 영어를 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서열을 정하는 데 있기에, 혹 모두가 영어를 잘하게 된다면 이번엔 중국어 광풍이 불 나라가 한국이다.

이 이웃 효과의 또 다른 양상은 사생활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참견이다. 연예인뿐 아니라 대중매체에 노출된 일반인들까지도 ‘이웃’으로 간주돼 사생활이 까발려지고 품평의 대상이 된다. 이런 일에는 “우리가 남이가”란 태도도 한몫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한국형 평등주의가 사회 전체의 불평등에 대한 관심과는 자주 엇갈린다는 점이다. 사생활에 관한 고백과 폭로로 여론공간이 도배되는 일이 사회적 평등의 구현이라는 대의에 과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바야흐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이고 이웃의 범위는 전 지구적으로 확장됐다. 하지만 거기에 걸맞은 사회윤리적 규범을 우리가 갖고 있는지는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더 많은 의사소통은 무엇보다도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면서 세계화 시대에는 ‘서로를 이해하기’와 함께 ‘서로 비켜서기’란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웃 간의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물리적·정서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 비켜서기’다. 그러한 거리두기 혹은 소외가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기본권이라면 우리에겐 자신만의 고독을 온전하게 향유할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 때론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평화와 공존의 조건이다. 

11. 05. 09.   

P.S. 참고로, 일반적 평등주의가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 삼는 데 비해서 '한국형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삼는다는 비판을 강준만은 <88만원 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의 칼럼에서 인용하는데(238쪽), 해당 칼럼을 찾아서 옮겨놓는다.  

시사IN(08. 10. 07) 부자에게 유리한 한국형 평등주의   

세제개편안을 둘러싼 정부의 발언을 지켜보노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화가 나서? 아니, 웃겨서.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감세 효과의 53%가 중산층과 서민에게 돌아간다”라면서 밝힌 중산층의 기준이 “통계청 과표구간으로 연소득 8800만원 이하”란다. 통계청 과표구간상 연소득 8600만원만 해도 실제 연봉은 1억원이 넘어간다. 이 발언이 기사화된 직후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사람이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중산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류 인생이었다”라는 식이다. 여론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부자를 중산층으로 둔갑시키는 ‘강부자’ 정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애초 중산층이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허술한 개념이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 경향이 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건 ‘강부자 정권’이라 불리는 이 정부가 하는 일마다 부자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이다. 즉, 부자가 부자를 궁지로 몰아간다. 대한민국 서민이 ‘중산층’이라는 말에 얼마나 민감한데, 거기에 대고 “소득 8800만원” 운운했으니 작정하고 벌집을 쑤신 꼴이 아닌가.

어느 사회이건 지배계급은 자기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하기 마련이다. 그 ‘포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설득력 있는가가 바로 지배계급의 역량을 재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유능한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급소’와 ‘성감대’가 어디인지 귀신같이 파악한다. 대영제국의 신화는 무력으로만 이루어진 게 결코 아니었다. 식민지에 관한 방대한 지식의 집적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이렇게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지배계급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기 이익을 관철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그리고 한국의 부자를 보면 도무지 지배계급의 역량이란 걸 눈 씻고 봐도 발견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이렇게 무식한데 어떻게 이들이 대한민국을 지배할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의식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대개 한국의 부자는 “평등주의 근성이 나라를 망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라 망친다는 건, 자기가 망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저건 ‘한국형 평등주의’가 얼마나 부자에게 유리한 이념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피지배계급의 의식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라는 것이다. 반면 한국형 평등주의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으로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 삼는 데 비해,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 삼는다. 전자의 처지에 서면 필연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처지에 서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부자 되기’ 처세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하여 한국형 평등주의는 부자가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수탈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부자에게는 어떤 위험도 초래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구실을 한 게 바로 이것, 한국형 평등주의였다. 존재를 배반하는 피지배계급의 의식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지배계급의 무능을 상쇄시키는 한, 지배-피지배 관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슬프고 기묘한 균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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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0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1-05-1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형 평등주의..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주제이군요.
(시사인 기사를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사인 기사 퍼가겠습니다. 재펌이되겠네요.)

로쟈 2011-05-14 10:07   좋아요 0 | URL
일종의 '유사 평등주의'라는 거지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5월호)에 실린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자연 재난에 관한 책 세 권을 다루고 있는데, 책 선정은 편집부에서 했다.     

책&(11년 5월호) 자연 재난과 인류

지난 3월 동일본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는 자연의 재난 앞에서 인간과 문명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한 번 더 실감하게 해주었다.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인재의 성격이 강하다 하더라도, 가공할 자연의 재앙 앞에서 여러 도시가 초토화됐고 추정으로는 4만 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다. 이렇듯 아무런 예고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재난 앞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대자연의 무자비한 폭력에 어떻게든 맞설 수 있는 것일까. 최소한 어떤 의미라도 부여할 수 있을까.   

독일의 역사학자 볼프강 베링어는 <기후의 문화사>(공감IN, 2010)는 ‘기후’라는 가장 거시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운명을 조망하도록 해준다. “기후는 항상 변화해왔다. 기후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문화의 문제”라는 것이 기후의 문화사를 보는 저자의 기본 시각이다. 물론 한 인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문명단위의 역사도 변화의 연속이긴 하다. 하지만 기후의 변화는 스케일이 좀 다르다. 최근 100만년 동안의 기온변화 그래프를 통해서 저자는 빙하기와 간빙기(온난기)가 교체돼 온 것이 지구의 역사라는 걸 보여준다.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부수적인 문제다. 전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일정 수준으로 감축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이긴 하지만 미리부터 종말론적 예측에 기대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일례로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가 터져 나오기 전인 1970년대에 과학자들은 지구냉각화를 막기 위한 대책을 주문했었다. 좀 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는 저자는 기후변화가 일종의 ‘도전’이라면 이에 대한 ‘응전’을 통해서 인류가 긍정적인 발전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기후가 변화한다면 인간 또한 그에 적응하기 마련이라는 게 그의 ‘낙관적’ 전망이다.  

리처드 험블린의 <테라: 광포한 지구, 인간의 도전>(미래의창, 2010)은 그 ‘낙관적’ 전망을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부제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의 기록’으로, 1755년의 리스본 대지진, 1783년 유럽 기상이변,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분화, 그리고 1946년 힐로 쓰나미가 저자가 꼽은 4대 재난이다. 이들 재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검토하고는 있지만 초점은 피해나 참상보다는 그것이 가져온 변화에 두어진다. 가령 1755년 11월 1일 아침에 발생한 리스본의 대지진과 거대한 쓰나미는 번화한 항구도시를 순식간에 폐허로, ‘지상에 구현된 지옥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현세에서 신이 내리는 모든 심판들 가운데, 그 무엇이 갑작스럽고 파괴적인 지진보다 더 무서울 수 있을까?”라고 토로하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자연재앙의 의의는 그러한 신학적 해석을 끝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리스본 대지진은 ‘최초의 현대적 재난’이며, 지진에 대한 전례 없는 관심을 이끌어냄으로써 지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하게 했다. 지진과 기상이변, 화산폭발 등은 분명 지구의 위력과 함께 자연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진일보시킨 전환점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두 권의 책이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류 차원의 응전을 다루고 있다면, ‘타임’지의 기자 아만다 리플리가 쓴 <언씽커블>(다른세상, 2009)은 개인의 생존을 주제로 한다. 일종의 ‘생존을 위한 재난 재해 보고서’이다. 재난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 리플리 역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비록 모든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우리가 ‘재난인격(disaster personality)’에 대해 알아두면 생존가능성이 조금은 커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재난을 뜻하는 영어단어 ‘disaster’는 라틴어 dis(벗어나다)와 astrum(별)을 합친 말이니 “운명의 별이 궤도를 벗어나 운수가 사납다”는 뜻이다. 이 ‘사나운 운수’에서 어떻게 다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는 다양한 재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생존의 길’이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걸 발견한다. ‘거부’와 ‘숙고’,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세 가지 시간적 단계인데, 긴급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의 인지에서 상황에 대한 신중한 판단을 거쳐 행동에 나서기까지의 과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결정적 순간의 행동에 ‘마비’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동물들의 경우에도  도망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는 죽은 척하거나 병든 척하는 것이 합리적인 진화적 적응 전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자는 2007년 버지니아 공대에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을 예로 드는데, 비올랜드라는 학생은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마비 덕분에 조승희의 주목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가 프랑스어 강의실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렇다고 마비가 만능인 건 아니다. 1994년 에스토니아호가 발트해에서 침몰할 때 희생자 대부분은 충격에 얼이 빠져 있다가 그대로 수장된 경우였다. 누가 어떻게 재난에서 살아남았는지 아는 것도 우리의 재난 대처력을 조금은 높여줄지 모른다

11. 05. 09.  

P.S. <언씽커블> 계열로 재난으로부터의 생존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몇 권 연이어 나왔다. 벤 셔우드의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민음인, 2011), 코디 런딘의 <재난이 닥쳤을 때 필요한 단 한 권의 책>(루비박스, 2011), 제임스 웨슬리 롤스의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초록물고기, 2011) 등이다. '재난 생존법'이란 주제를 다룬다면 같이 묶어서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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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이달 16일부터 5주간(현충일 제외)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여행: 프랑스 현대철학편'을 진행한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7&tolclass=0000&subj=F90711&gryear=2011&subjseq=0001&booking=). 

 

주제가 '프랑스 현대철학편'이라고 나가긴 했지만, 구체적으론 '구조주의'를 다루며 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2010)가 부교재이다. 그 책의 부제가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이고, 강의 또한 그 수준에 맞출 예정이다. 책의 순서에 따라 푸코와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을 입문 수준에서 차례로 소개하게 되며 첫 시간은 구조주의의 창시자 소쉬르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다. 구조주의나 현대철학에 '이제 막' 관심을 갖게 된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의면 좋겠다. 일정과 함께 참고할 만한 (만화)책들을 골라놓는다.

1. 5월 16일_ 소쉬르와 구조주의 



2. 5월 23일_ 푸코와 계보학적 사고 



3. 5월 30일_ 롤랑 바르트와 '저자의 죽음' 



4. 6월 13일_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인류학 



5. 6월 20일_ 라캉과 정신분석 

 

11. 05. 05.  

P.S. 강의에 참고하기 위해 소집해놓은 책들은 프랑수와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1-4>(동문선)과 스튜어트 휴즈의 서구지성사 3부작 중 <막다른 길>(개마고원, 2007), 그리고 테렌스 호옥스의 <구조주의와 기호학>(신아사) 등이다. 역사적 배경과 이론적 개관을 제시해주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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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6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6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1-05-0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의를 듣기는 힘들겠지만 책 목록을 저장해 두겠습니다. 이제 막은 아니지만 아직 구조주의를 읽어본 적이 없는 제가 읽기에 부담이 없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5-07 21:33   좋아요 0 | URL
^^

2011-05-06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7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원 2011-05-07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의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서울까지 길이 멀군요. 늘 이 서재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그 점 감사드립니다. 이 글 스크랩해 가겠습니다. 구조주의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5-07 21:31   좋아요 0 | URL
우치다 타츠루의 책 정도를 읽어보시고, 관심 저자의 책으로 넘어가시면 됩니다...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어제 낮에 급하게 쓴 것인데, 이번주에 강의차 읽은 고골의 <죽은 혼>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 고골의 편지는 <친구와의 서신교환선>(나남, 2007)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겨레(11. 04. 16) 추악한 삶의 백과사전

“저에게 추악함이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저 자신이 상당히 추악한 편이니까요. 제가 아직 덜 추악하던 시절, 저는 모든 추악함에 당혹해했고, 추악함의 종류와 규모에 우울해졌고, 그리하여 저는 러시아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떨곤 했습니다.”

19세기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걸작 <죽은 혼>은 그 추악함 혹은 비속함을 한데 끌어모은 ‘서사시’이다. 비평가 벨린스키가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러시아 삶의 백과사전’이라고 부른 것에 견주면, 고골의 <죽은 혼>은 ‘추악한 러시아 삶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을까.

‘죽은 혼’이란 말은 중의적이어서 ‘죽은 농노’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륜마차를 타고 한 지방도시에 도착한 주인공 치치코프는 지주들을 찾아다니며 죽은 농노들을 구입하려고 애쓴다. 10년에 한번 정도 인구조사를 했기에 이미 사망한 농노들도 명부에 올라가 있었고 지주들은 그들에 대해서도 인두세를 물어야 했다. 그렇듯 농노 명부에는 들어 있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농노들을 사들여서 그걸 담보로 거액을 대출하려는 게 치치코프의 계산이다.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리석고 속물적이면서도 의심이 많은 지주들을 잘 구슬려야 했는데, 치치코프는 주인공답게 그런 ‘실용적인 측면’으로는 대단한 지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농노 200명을 가진 지주를 대할 때와 300명을 가진 지주를 대할 때, 또 500명을 거느린 지주를 대할 때 각기 다른 뉘앙스의 표현이 가능한 러시아식 대화법에 익숙했다. 



죽은 농노들을 사러 다니면서 치치코프가 만나는 지주들은 다만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될 뿐인, 곧 영혼은 이미 죽은 ‘죽은 혼’들이다. 다정다감하긴 하지만 항상 뭔가 모자란 듯한 마닐로프의 서재에 놓인 책은 2년 내내 같은 쪽이 펼쳐져 있고, 탐욕스러운 소바케비치의 방안 가구들은 모두 주인을 닮아서 “나도 소바케비치야!”라고 외쳐댄다. 거꾸로 보면 소바케비치 자신이 그런 소파나 의자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치치코프는 어수룩하면서도 이기적인 여지주 코로보치카와 저열할 만큼 구두쇠인 늙은 지주 플류시킨 등을 더 만나며 그들에게서 죽은 농노를 구입한다. 그의 ‘사업’은 잘 진행돼 나가는 듯하다.

하지만 지사가 주최한 파티에서 한 소녀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귀부인들의 질투를 사게 되고 그가 죽은 농노들을 사러 다닌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도시 전체가 치치코프의 정체에 대한 온갖 뜬소문과 유언비어로 혼란에 빠지게 되고 지방 검사는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다. 결국 치치코프는 서둘러 도시를 떠나며 말미에서 작가는 그가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살아왔던가를 일러준다.

분명 치치코프는 선량한 주인공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악한도 아니다. 다만 강한 소유욕을 가진 인물이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자본과 물욕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초상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고골은 인간에게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욕망도 있다고 믿었다. 보다 높은 섭리에 이끌리는 욕망이다. 그래서 치치코프의 차가운 내면에도 천상의 지혜 앞에 무릎 꿇게 하는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새롭게 변신하게 될 치치코프의 모습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부정적인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고골이지만 안타깝게도 ‘선량한 주인공’을 그려낼 능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러시아여, 넌 대체 어디로 질주하는 거냐?”라고 물었을 따름이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질주하는 것일까

11. 04. 16.  

P.S. '러시아 삶의 백과사전'이라고 하니까 떠올리게 되는 책은 유리 로트만의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나남, 2011)이다. '러시아 귀족의 일상생활과 전통(18-19세기초)'이 부제니까 <예브게니 오네긴>의 배경과도 겹친다. 러시아 문화사에 관한 책으론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8세기 이후 3세기 동안의 문화사를 다룬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이카루스, 2005)와 함께 러시아문화사에 대한 필독도서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 보탤 만한 책은 케임브리지 컴패니언 시리즈로 나온 <현대 러시아문화>(1999)인데, 올해 안에 번역본이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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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6 0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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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6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6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6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6 09: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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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1-04-16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만 매우 인상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소바케비치 자신이 그런 소파나 의자와 구별되지 않는다"...한동안 못 잊을 문구네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1-04-16 20:12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