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도서관이다. 따로 피서여행을 가지 못하는, 갈 수 없는 처지의 이들에겐 그나마 도서관이 최적의 피서지처럼 보이지만, 나는 오늘도 마음의 도서관이나 짓는데 만족해야 할 형편이다. 언젠가 명품 도서관들을 둘러볼 기회가 오면 좋겠다... 

책&(11년 8월호) 도서관으로의 피서여행

긴 장마와 폭염을 관통하고 있다. 무더위에 지친 당신에게 그래도 기운이 좀 남아있다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이기도 할 것이다. 어디로?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라도”(보들레르)는 시인의 선택이다. 이 세상 ‘안쪽’에서 골라야 한다면, 나처럼 도서관을 꼽을 이들도 있지 않을까. 물론 방학을 맞은 학생과 이런저런 수험생들로 북적이는 동네도서관을 뜻하는 건 아니다. 이 ‘동네 밖’ 도서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 내가 꿈꾸는 공간이자 우리가 같이 여행해볼 만한 장소다. 이 여행의 가이드가 될 만한 책 몇 권을 꼽아본다.   

가장 먼저 손에 쥘 만한 책은 최정태의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한길사, 2011)이다. 도서관학(요즘은 문헌정보학이라고 부른다) 전공자인 저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란 외국 화보집에 자극을 받아 직접 찾아다닌 국내외 도서관 15곳을 소개하고 있는 도서관 탐험이자 도서관 오디세이다. “도서관 여행을 하면서 경이로운 건축물의 아름다움도 살피겠지만 그 안에 있는 책과 시설물,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찾아볼 요량”이라고 저자는 적었고, 책은 그 결과다. 이 ‘도서관 테마여행’은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시작해서 해인사 장경판전에서 끝난다. 미국과 서유럽 도서관들이 주된 방문지이며 국내 ‘도서관’으로는 해인사와 함께 규장각이 포함됐다.  

눈길을 끄는 건 저자가 꼽은 세계적인 명품 도서관의 조건이다. 다섯 가지를 꼽는데, 첫째가 도서관 건물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이다. 둘째는 장서. 대체로 100만권 이상은 보유해야 한다고. 참고로 미국 의회도서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라는 하버드 대학도서관의 장서는 2003년에 1,500만권을 돌파했다 한다. 그리고 셋째는 세계사적으로 역사를 바꾸거나 움직인 인물 또는 사건과 관련된 포괄적인 장서나 기록물을 구비하고 있는가 하는 점. 저자가 부시 대통령도서관도 찾아본 이유인 듯싶은데, 미국은 대통령기념관이 아니라 대통령도서관을 설치‧운영하는 것이 법제화돼 있으며 그곳에 통치 사료와 각종 국정 자료들을 보관해놓는다고 한다. 넷째는 초기간행본, 좀더 정확히는 1450년대 이후부터 1600년 이전까지 활판인쇄로 간행된 책 또는 양질의 필사본을 어느 정도 소장하고 있는가. 이런 ‘명품’들을 소장하고 있어야 명품 도서관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끝으로 다섯째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또는 <36행 성서> 내지 셰익스피어 초판본을 보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 이건 서양의 도서관에 한정되는 조건이겠다. 저자가 제일 처음 둘러본 미국 공공도서관이 바로 이런 조건들을 두루 충족시키고 있는 최상급 도서관이라 한다.    

발품을 판 도서관 여행기로는 유종필 국회도서관장의 <세계 도서관 기행>(웅진지식하우스, 2010)도 필독서이다. 저자는 국가별 도서관 기행을 시도했는데, 한국을 포함해 11개국 40여 개 도서관을 소개한다. 장점이라면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에서 구경할 수 없었던 러시아와 중국, 일본, 그리고 북한의 도서관까지 둘러볼 수 있다는 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출발지로 한 이 기행에서 개인적으론 ‘레닌도서관’이라 불리는 러시아 국가도서관 방문기가 특히 반가움을 느끼게 했다. 그건 유일하게 나도 가본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광장에 도스토예프스키 동상이 세워져 있는 이 도서관이 미국 의회도서관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라는데, 중앙열람실만 해도 이용자가 하루 4천 명이 넘는다 한다. 1979년작으로 국내에서도 개봉됐던 러시아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에 나오던 모습 그대로이다. 이렇듯 독자가 저마다 방문해본 도서관의 기억을 중첩시켜서 읽는다면 더욱 흥미로운 독서 여정이 될 듯싶다.   

세계 각지의 도서관으로 눈요기를 했다면 이제 둘 중 하나다. 가방을 챙기거나 아니면 자신만의 도서관을 꿈꾸거나. 사실 도서관은 공공도서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도서관도 있고 또 마음의 도서관도 있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밤의 도서관>(세종서적)은 그런 개인의 도서관, 마음의 도서관에 대한 명상이다. <독서의 역사>의 저자이기도 한 망구엘은 아르헨티나 태생으로 서점 직원으로 일하던 젊은 시절, 작가 보르헤스에게 4년간 책을 읽어준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보르헤스가 시력을 잃어가던 때였다. 본래 책을 좋아하던 편이었지만 보르헤스로부터 받은 감화는 그를 더욱 독서에 탐닉하게 했고 세계적인 독서가로 만들었다. 독서가인 만큼 수집한 책이 재산일 텐데, 그는 반세기 동안 모은 책을 모아둘 도서관을 프랑스의 한 시골 헛간 터에 세운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시작된 그의 도서관 사색이 <밤의 도서관>에서는 15가지 주제에 따라 펼쳐진다. 개인도서관, 곧 서재는 그 주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모든 서재는 궁극적으로 에우테미아를 갈망한다”고 망구엘은 말한다. ‘에우테미아’란 그리스어로 ‘영혼의 행복’을 뜻한다. “에우테미아는 방해받지 않는 기억이며, 글을 읽는 시간의 편안함”이다. 공공도서관이거나 개인도서관이거나 어디인들 어떠랴. 이 여름, 우리가 에우테미아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라면!  

11. 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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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8-11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우테미아라 근사하네요

로쟈 2011-08-11 19:16   좋아요 0 | URL
도서관이 원래 근사한 장소이어야 합니다.^^

가넷 2011-08-11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5만권으로 힘들어 하는데 천만권이라니... 장서수로만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서도 천만권이 넘는 장서 수를 보자니 허걱!...@_@;;;; 그 역사와 전통에 비하면 참 초라해 집니다... 뭐 겨우 30살 밖에 안되는 도서관이니 그정도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겠죠. 더욱 더 분발해야겠습니다...ㅎㅎ;

로쟈 2011-08-12 07:46   좋아요 0 | URL
우리가 도서관에 욕심을 부린 나라는 아닌 것이죠.^^;

미국사람 2011-08-12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도서관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아주 아름답군요.

그 사회가 선진국인지를 알려면 그 나라에서 나온 사전의 수준과 도서관의 수준을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이라는 면에서 보면 한국은 소득수준과는 비교가 안되는 수준의 도서관을 가지고 있죠.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하버드 장서가 1500만권이라고 했는데 하바드 도서관은 다른 대학과는 달리 단일 건물은 아니구요. 하바드 건물중 상당 부분이 도서관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국으로 치면 단과대학 별로 도서관이 하나씩 있는 셈이죠.

미국회 도서관은 지하가 연결된 두개의 건물이구요. 규모가 엄청납니다. 하긴 가본 것이 20년이 넘으니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미국 대학에서는 제일 좋은 건물이 도서관이라고 보면 보통 맞읍니다. 우리도 그런 날이 와야할텐데 꿈이겠죠.

로쟈 2011-08-12 07:47   좋아요 0 | URL
네 꿈일 거 같습니다. 도서관을 짓는 지자체는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이고, 대학들은 그 돈이면 땅을 사지요...

VANITAS 2011-08-1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얘기는 아니잠 최근에 나온 '유럽의 명문서점'도 꽤나 눈을 사로잡더군요.
서점에 관한 서적도 종종 출간되었으며 좋겠네요.

로쟈 2011-08-13 09:1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갖고 있는 책이에요.^^
 

기획회의(301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정위안 푸의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돌베개, 2011)을 다루고 있다. 얇은 편에 속하지만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인데, 쓰다 보니 건드리지 못한 대목도 많다. 다른 기회에 보충하려고 한다.  

기획회의(11. 08. 05) 법가의 정체를 밝히다

중국의 법가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몇 년 전에 이상수의 <한비자, 권력의 기술>을 읽고서다. 한비자와 함께 법가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는데, 한편으론 유가와 도가 계열 사상가들을 우리가 편독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정위안 푸의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은 그런 관심의 연장선에서 읽은 책이다. 동양고전강의 시리즈로 나온 것인데 특이하게도 원저는 영어로 쓰였다. 저자가 베이징대학을 졸업했지만 현재는 미국대학에 몸담고 있어서이다. 원제는 ‘중국의 법가(China's Legalist)’(1996).   

그런 제목이라면 영어권 독자에게 법가 사상을 소개하는 일종의 ‘입문서’일 텐데, 보통의 입문서답지 않게 저자의 입장이 뚜렷하다. ‘절대권력의 기술’이라고 덧붙여진 제목, 그리고 ‘진시황에서 마오쩌둥까지, 지배의 철학’이란 번역본 부제가 암시해주는 대로 초점은 법가의 부정적인 면모에 맞춰져 있다. 원저의 부제는 아예 ‘최초의 전체주의자들과 그들의 통치술’로 돼 있다. 법가 사상가들을 ‘최초의 전체주의자들’로 규정하고 그들의 통치술이 중국 역사에 끼친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려는 것이 저자의 주안점이다. ‘전체주의’란 말이 유행어가 된 건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948) 덕분일 텐데, 거기서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를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꼽았다. 정위안 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 고대의 법가를 ‘전체주의자 이전의 전체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20세기 히틀러의 나치 독일, 스탈린의 소비에트 러시아,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중국에 드러난 현대 전체주의의 핵심 요소는 대부분 2천여 년 전에 법가가 주장한 것이다.” 

법가 사상이라고 하니까 보통을 법치, 곧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때의 법치는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통치’이다. 법이란 “군주가 백성을 통치하고자 이용하는 형벌 도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법이 형벌의 도구이고 공포가 가장 효율적인 정치 통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법가의 교의는 극단적인 독재 옹호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법가는 마키아벨리즘을 한참 앞선다. “중국의 법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저명한 이탈리아 학자 마키아벨리보다 1,800여 년 앞서, 마키아벨리보다 더 마키아벨리적인 저서를, 현대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논조로 저술했다.”    

법가와 마키아벨리 모두 정치란 근본적으로 권력에 대한 추구라고 생각하고 권력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과는 분리시켰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법가는 마키아벨리보다 더 급진적이었다(적어도 마키아벨리를 전체주의 사상의 원조로 꼽지는 않는다). 저자가 보기에 법가의 목적은 “군주와 정부가 백성의 사회생활 거의 모든 부분을 무제한의 권력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질서 구축”이었다. 현대 전체주의의 특징을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 단 한 명의 지도자가 이끄는 단 하나의 정당, 군대 장악, 언론 장악, 치안 통제, 경제 부분을 포함한 모든 조직의 독점 등으로 꼽는다면, 현대의 발명품인 정당만 제외하면 모두 고대 법가의 저술과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문제는 법가가 진나라의 천하통일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 발전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지만 이러한 사실이 잘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려진 대로 한 무제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은 이후 중국의 제국들은 유교 국가를 표방한다. 그건 조선도 마찬가지여서 유교적 권위주의 국가체제였다는 게 대체적인 이해다. 하지만 ‘외유내법(外儒內法)’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외유내법이란 대다수 중국 역사학자들이 중국 제국의 정치전통을 이르는 말로, 겉으론 유가를 표방하지만 속은 법가라는 뜻이다. 즉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우긴 했으나 실제로는 법가가 핵심 통치술이라면?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감춰져온 것이라면?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하니 바로 떠오르는 건 청나라 말의 사상가 이종오의 ‘후흑학’이다. ‘뻔뻔함(厚)’과 ‘음흉함(黑)’이 난세의 통치학이었다는 걸 발견한 그는 세계의 진화를 세 시기로 구분했다. 첫 번째 시기인 상고시대에는 인민들이 미개하고 그야말로 천진난만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이 요순시대의 회복을 염원하며 사회풍조를 태고시대로 되돌리려고 했다. 인의를 주장하고 예치를 설파한 유가는 이 제1기의 사상이다. 제2기는 조조와 같이 음흉하고 유비처럼 뻔뻔한 인물들이 운을 거머쥔 시대다. 전국시대의 사상인 법가는 그러한 후흑을 군주의 처세술과 통치술로 권장한다는 점에서 제2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지금은 조조와 유비와 같은 자가 널려 있는 시대라고 이종오는 말한다. 그래서 제3기에는 뻔뻔하고 음흉한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가 없다. 때문에 공맹의 도덕을 차용해야 한다. 속셈은 다르더라도 겉으로는 유가의 도덕을 앞세워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제3기다. 이종오는 이 3기를 자신의 시대로 잡지만 외유내법이 중국의 정치전통이라고 하면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한 무제가 유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만든 것은 재해석될 여지가 있다.   

기원전 136년 무제는 유학자 동중서의 기안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정하는데, 그러한 제도화가 실상은 법가가 추진한 세뇌 정책의 결과라는 게 정위안 푸의 생각이다. 가령 백성은 군주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여성은 남성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삼강(三綱)은 유교 윤리의 중추이다. 그리고 이 삼강은 중국에서 2000년이 넘게 공식적 기본 윤리 원칙이자 사회규범의 핵심이었다. 군주의 절대 지배를 유교적 이념으로 자연스레 정당화한 셈이니 유교를 세뇌 도구로 변형시킨 게 아니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또 청나라 때 황제는 황실 학술원에 나가 유가 고전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유학의 가면을 쓰고 법가 사상을 장려하는 관습으로 이해된다.  

저자는 20세기 후반의 <마오쩌둥 어록>조차도 “군주가 이데올로기, 교육, 대중 매체를 직접 통제하는 제국 법가 전통의 정점”이라고 평가한다. 요컨대 “법가가 중국에 끼친 영향력은 사실상 2,30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20세기까지도 그 영향력이 여전히 뚜렷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시에 “법가가 중국 사회에 끼친 지속적인 영향력은 어쩌면 중국 인민들에게 마르지 않는 불행의 원천이었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정작 인민들 자신이 그러한 불행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중국인들이 언젠가 법가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를 바랄 뿐”이라는 게 저자의 바람이다. 겉모양만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예외는 아닐 터이다.  

11.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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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와 법가식 법치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9-01 22:54 
    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지난달부터인가 화요일 연재에서 금요일 연재로 바뀌었다. 점심때까지 아이템을 놓고 고심하다가 '난세의 후흑학'에 대해 쓰기로 하고 서두로 '법가' 얘기를 꺼냈는데, 그걸로 그냥 분량이 차버렸다. 후흑학 얘기는꼼수로 아껴두기로 했다.경향신문(11. 09. 02) [문화와 세상]승승장구하는 ‘법가들’중국 전국시대에 나온 법가사상은 알다시피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법가에 근거
 
 
미국사람 2011-08-12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이 겉보기에는 유가로 통치한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법가로 통치했다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구요. 법가 이념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2대만에 몰락한 것을 거울삼아 한고조가 유교이념을 앞세웠다는 거구요.

개인적으로 한비자를 꽤 좋아하는데 나아진 번역이 있는지는 모르겠읍니다. 요즘 체세술책이 유행인 모양인데 그 대신 한비자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2000년전에 쓴 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실랄하지요.

로쟈 2011-08-12 07:43   좋아요 0 | URL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보통은 외유내법이 신해혁명까지 이어진 것으로 봅니다. 저자는 마오 이후 사회주의 중국의 치세도 그 연장으로 본다는 게 다르구요. 저로선 '그럼 조선은?'이란 질문을 갖게 되는데, '유교국가'로만 설명들이 돼 있어서 좀 미흡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 부분에 관한 연구/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추첨민주주의와 데모크라시 나우!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낮에 쓴 칼럼인데, 강준만의 <강남좌파>(인물과사상사, 2011)의 문제의식을 풀어놓고 싶었다. 같이 참고한 책은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가 쓴 <추첨민주주의>(이매진, 2011)다. 

  

경향신문(11. 08. 02) [문화와 세상]엘리트주의 청산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진단하고 비판함으로써 소위 ‘강준만 한국학’이란 걸 세워온 강준만 교수가 최근 <강남좌파>란 책을 한 권 더 얹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하건 ‘정치의 이권화’와 ‘승자 독식주의’를 없애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대선은 ‘밥그릇 싸움 도박판’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한국사회와 한국인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할 만한 저자의 발언인 만큼 정치판의 진보와 보수를 모두 겨냥하고 있는 그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봄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입장에 대한 주장이므로 먼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문제부터 정의하는 게 좋겠다. 한국 실업의 역사를 다룬 책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에서 강 교수는 “정치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그 주체들이 고급 일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일 뿐이다”라고 답했다. 어느 정치학 개론서에서도 찾기 어려울 법한 ‘독창적인’ 정의이지만 우리가 피부로 접하는 현실을 포착하고 있기에 부인할 수도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과 공공영역의 ‘사유화’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게 한국정치 아니던가. 권력자와의 연고·정실에 따른 ‘낙하산 인사’가 횡행하고, ‘보은인사’ ‘회전문인사’가 남발되는 것 또한 우리는 지겹도록 보아왔다. 간혹 여론의 비판이 먹힐 때도 있었지만, 몰염치하게 밀어붙이는 정권에서는 별무효과였다. 

문제는 이것이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그러니 인물을 바꾼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근본적인 해법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 교수의 진단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사회의 상수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은 엘리트주의다. 정치의 경우라면 좌우파를 막론하고 정치 엘리트들의 전담 영역으로 고착화돼 있다는 것이다. 정권교체가 ‘엘리트 순환’으로 귀결된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유권자는 고작해야 ‘밥그릇 싸움’의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것이니 말이다.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 좌우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라고 강 교수는 말한다. 그럼 무엇인가.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강남좌파’란 말은 이러한 투쟁 양상을 심각한 이념투쟁으로 포장할 우려가 있다는 게 강 교수의 염려이고, ‘강남’에 비하면 ‘좌파’는 부수적이며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란 것이 그의 견해다.

과연 우리는 엘리트주의를 청산할 수 있을까. 강준만 교수의 제안은 아니지만 추첨민주주의 같은 대안을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전체 인구의 극히 일부임에도 미국 하원의 경우엔 변호사의 비율이 40%가 넘고, 우리도 법조인의 비율이 20% 이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 엘리트에 의한 현재의 대의민주주의가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제대로 반영한다면 그게 오히려 놀랄 일이다. 민주주의를 믿는다면, 즉 모든 국민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의 주체라고 우리가 ‘정말로’ 믿는다면, 인구 비율에 따른 추첨에 의해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이 만민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가령 인구의 절반이 여성임에도 왜 우리는 국회의원의 절반을 여성으로 채우지 못하는 것인가. 여성은 정치적으로 열등해서인가. 겉으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믿어서인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고 진나라 말기 농민반란군을 이끈 진승은 물었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11. 08. 01.  

P.S.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라고 적었지만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라면 단연코 "따로 있다" 쪽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에서 인민이 최대한 참여해서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이라는 고전적 민주주의 이념을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이상이라고 비판했다."(<강남좌파>, 33쪽) 강준만 교수는 그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은 일반인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수준의 합리성을 요구하기에 비현실적이며, 일반인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것만 전적으로 현실적이라고 인식하는데, 정치는 이 범위 밖에 있다는 말이다. 그는 대중의 정치 참여가 지나치면 사회 안정과 자유주의적 가치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방법'일 뿐이며, "민주주의는 정치인에 의한 지배"라고 본 슘페터의 민주주의론은 정치에 대한 경박하고 냉소적인 견해라고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슘페터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걸 알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경박하고 냉소적이라고 반박했다. 

요는 막연한 '민주주의 만세'에서 벗어나 '인민에 의한 지배'로서의 민주주의와 '정치인에 의한 지배'로서의 민주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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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2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2 0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천도서관의 제안으로 8월 2-3주에 4회 동안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강좌 프로그램을 맡게 됐다. 제목은 '로쟈와 함께 떠나는 한여름의 세계문학 여행'이라고 나갔다(http://yclib.sen.go.kr/yclib_index.jsp). 무료강좌이며 행사당일에 선착순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청소년을 위한 강좌이지만 일반인도 참석가능하다고 한다.  

이미지 

일정은 매주, 화, 수요일 오후 2시인데, 한번 더 적으면 다음과 같다.  

1. 8월 9일(화)_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2. 8월 10일(수)_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3. 8월 16일(화)_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4. 8월 17일(수)_ 제롬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11.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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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마트에 나가는 길에 우편함에서 꺼내든 책은 평소 두 권 분량으로 나온 '기획회의'(300호)이다. '한국의 저자 300인' 특집에 차출돼 나도 인문 분야 저자들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다. 다행이다 싶은 건 분량상 길게 언급하지 못한 저자들을 다른 코너들에서 '체크'해주고 있다는 점. '키워드별'로 살펴보고 '분야별'로 다시 한번 걸르는 식으로 구성돼 있다. 이 시대의 저자들이 궁금한 독자라면 유용한 자료로 삼을 만하다. 11개의 '분야별로 살펴보는 한국의 저자' 가운데, 내가 맡았던 '인문' 꼭지를 옮겨놓는다. 명단이 주어진 상태에서 몇 명을 더 얹어 작성한 것이다. 제목과 소제목은 편집자가 붙였다.

    

기획회의(11. 07. 20)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그들

한국의 저자 300인’에 특집에서 내게 ‘인문 분야’가 맡겨진 것은 '전문가 리뷰'의 인문 꼭지를 담당하고 있는 탓으로 보인다. ‘내부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면 이런 무리한 일이 맡겨질 리 없을 테니까. 여하튼 청탁은 거절하지 못했고, 다만 너무 많은 저자가 할당된 이 분야를 조금만 더 한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역사분야를 제외한 인문분야를 다루게 됐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로 ‘문학’과 ‘철학’을 근거지로 한 저자들을 짚어본다. 물론 여전히 분야별 경계가 모호하며(가령 역사학자의 사회비평은 ‘인문’ ‘사회과학’ ‘에세이’ 모두에 걸린다) 저자에 따라서는 여러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기에 형식적인 분류가 궁색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기회에 한국 인문출판이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역사와 함께한 지난 14년, 그리고 <기획회의>의 발자취와 나란히 한 지난 13년 동안 활발히 활동한 대표 저자들을 더듬어보는 일은 개인적으로도 감회를 느끼게 한다.   

비평, 그리고 비평가들 
오래전 일이지만 러시아문학을 공부해보겠다고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인문대학’은 학과보다 한 단계 큰 소속기관일 뿐이었다. 집회가 있거나 교련교육이 있을 때만 ‘인문대’는 따로 호명됐다. 나는 문학개론이나 종교학개론 같은 인문교양과목을 많이 듣긴 했지만 나의 자의식은 인문학 전공자라기보다는 문학 전공자, 내지는 외국문학 전공자 쪽이었다. 애초에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기에(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고3때 읽었다) 나는 문학과 철학분야의 저자들을 즐겨 읽었는데, 문학평론가 김현(불문학)과 김윤식(국문학), 그리고 김용옥(동양철학)과 박이문(서양철학)이 내가 길잡이로 삼은 이들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들의 지속적인 학문적 욕심과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김현을 제외하면 지금도 모두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그때 받은 인상이 틀리지 않았다.   

김윤식은 자서전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이나 <내가 살아온 한국 현대문학사> 등을 통해서 근대문학 연구자, 현장비평가로서의 삶을 한국 문학사 자체와 중첩시키고 있다. 그러한 ‘중첩’이 가능한 것은 그가 펼쳐온 열정적이고 지속적인 글쓰기가 장관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관은 이미 ‘전집’을 출간한 대가 비평가들에게도 공통적인 것이다. 한국 인문주의의 새 지평을 열었던 비평가 김우창은 시평집 <시대의 흐름에 서서>와 <정의와 정의의 조건> 같은 정치철학적 에세이를 통해 성찰의 보폭을 꾸준히 이어갔고, 유종호는 <나의 해방전후>, <그 겨울 그리고 가을>과 같은 자전적 회고를 통해서 지나온 삶의 ‘결’과 ‘세목’을 재현해냈다. 비평가로서 그가 늘 강조해온 덕목을 몸소 보여준 것이면서, 과거에 대한 이해 없이 현재의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비평가적 신념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신념의 비평가로선 백낙청도 빼놓을 수 없다. 전집의 버금하는 <백낙청 회화록>을 간행한 이후에도 그의 쉼 없는 관심과 열정은 나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는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묻고,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을 되새긴다. 첫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와 같이 묶어서 다시 펴낸 것은 그가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의 ‘초심’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현재의 비평가’임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개인적으론 20년 전에 읽은 비평가들의 신간을 여전히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감동적이지만 한편으론 ‘비평’과 ‘비평가’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격세지감도 갖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의 어떤 시집이 나왔고 누구의 평론집이 새로 출간됐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게 80년대 대학가 하숙집 풍경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며 시대는 변하는 것이니까 왈가왈부할 수도 없다. 어쩌면 ‘지식인 시대의 종언’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은데, 지난 80-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비평가들의 이름을 지금은 자주 들을 수 없고 비평의 영향력도 쇠잔하다. <장소의 탄생>, <이상과 모던뽀이들> 같은 저작들은 계속 펴내는 시인이자 비평가 장석주는 오히려 ‘글쟁이’로 분류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그리하여 비평가 김영찬의 평론집 제목을 빌면 <비평의 우울>이 우리시대의 한 가지 표정이다. 중견 비평가들의 이름이 묻힌 가운데에서도 ‘젊은 피’를 느끼게 해주는 건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들이다.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로 김현 비평의 ‘레전드’를 재현할 기세인 신형철이 대표적이다. 그의 명민한 감각과 세련된 문체의 비평은 비평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으며 독자와는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방향타이다. 가라타니 고진 ‘전담’ 번역자로 이름을 알린 조영일은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에서 시작된 ‘한국문학비판’ 연작을 통해 한국문학 ‘주류’와 ‘문단문학’에 대한 ‘얼터너티브 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문학의 구조>로 계속되고 있는 작업이 그가 표방한 ‘장편비평’과는 별개로 비평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제시해줄지 관심거리다. 더불어 <시네필 다이어리>의 정여울도 대중문화 세례를 받은 세대의 비평가로서 영화와 철학, 대중문화를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비평’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들과 더불어 우리는 중후한 비평(혹은 무게 잡는 비평) 대신에 더 경쾌하고 더 확장된 비평의 세계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전통적인 문학비평이 독자들의 시야에서 한걸음 물러나면서 비평의 카테고리를 장악한 것은 문화비평과 고전비평이다. 김용석의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그러한 경계의 지표가 될 만하다. 그는 문화전반과 일상에 대한 문화철학적 성찰을 통해서 일종의 ‘블루오션’을 개척했고 <깊이와 넓이 4막 16장>과 <서사철학> 같은 유례없는 책을 낳았다. ‘해리포터에서 피버노바까지’ 아우르는 넓이에서만큼은 견줄 만한 저자가 드물다. 좀 더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비평 쪽의 새로운 강자는 이택광이다. 김용석이 ‘성찰’에 주안점을 둔다면 이택광의 방점은 ‘비평’에 놓인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와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를 통해서 그는 문화비평의 ‘이론과 실제’가 어떤 것인지 보다 본격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사회학자 정수복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통해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국식 문화를 낯선 성찰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의 최근 작업은 파리라는 도시의 인문학에 집중되고 있다.    

고전 읽기와 철학 하기
자칭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리라이팅’을 통해서 고전 읽기의 새로운 붐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신영복의 <강의>와 함께 우리 고전과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한문학자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이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낸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더불어 18세기 조선의 문화사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은 부지런한 한문학자들이 ‘잡문’을 쓰는 데에도 기꺼이 노력을 아끼지 않은 덕분이다. 문제적인 학술서도 여럿 펴냈지만 강명관은 <조선의 뒷골목 풍경>,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등의 책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와 선조들의 생각을 한층 친숙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안대회도 <선비답게 산다는 것>과 <고전 산문 산책> 등의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학술대중화에 자기 몫을 보탰다. 다산학 권위자인 박석무의 <조선의 의인들>도 이 분야에서 꼽을 수 있는 책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물론 동양고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제고에는 김용옥의 역할이 가장 컸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절차탁마 대기만성> 등의 저작과 대중강연을 통해서 동양고전의 현재적 의의와 함께 번역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설파해왔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병행해왔지만 <논어한글역주>, <중용한글역주> 등 최근의 한글역주 작업은 그가 자신의 ‘본령’을 찾았다는 인상을 준다. 김용옥 못지않은 다작의 저술가 박이문은 불문학박사이자 철학박사라는 독특한 경력을 갖고서 일찍부터 쉽고 명징한 언어로 다양한 주제의 교양서와 철학입문서를 펴내왔다. 개인적으론 대학시절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에서 예술철학과 과학철학까지 넘나드는 다양한 분야의 사유를 그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다(절판됐지만 특히 <시와 과학>은 내게 강한 인상을 준 책이다). 그의 여정은 ‘둥지의 철학’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통합의 인문학>과 <둥지의 철학>이 그 결과물이다.   

저술가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철학자로는 이정우를 꼽을 수 있다. 푸코 전공자이면서 들뢰즈 철학 연구자로 잘 알려진 그는 <세계철학사1>을 통해서 자신의 역랑과 함께 학문적 포부를 드러냈다. 김진석과 김영민은 한국적 현실에 착근한 사유와 고유한 개념어의 창출로 눈에 띄는 철학자다. <더러운 철학>을 통해 ‘한국에서 철학함’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김진석의 철학적 화두는 ‘포월’과 ‘소내’이다. 90년대에 탈식민적 글쓰기를 문제로 내걸었던 김영민은 <동무론>,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등을 통해서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으로서 ‘동무’라는 자신만의 주제를 탐구한다. ‘인이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다’라는 그의 <공부론>은 장정일의 <공부>,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등이 촉발한 ‘공부론’ 유행 가운데에서도 이채롭다. 공부론과 관련해서는 장회익의 <공부도둑>과 김열규의 <공부> 같은 원로 학자들의 체험적 공부론도 눈길을 끈다.   

동양철학 전공자이면서 서양철학을 넘나들며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강신주는 <철학, 삶을 만나다> 이후 ‘삶과 만난 철학’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이 필요한 시간> 등은 철학이 삶, 그리고 대중과 만나게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문교양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대표 저자로 강유원도 빼놓을 수 없다. 서양고전의 강의와 마르크스 저작 번역에 힘쓰고 있는 ‘지식주의자’로서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인문고전 강의> 등의 책을 펴냈다. 고전 읽기 바람을 타고 고전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베스트셀러 저자도 탄생했는데, <철학콘서트>의 황광우,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의 김용규 등이 대표적이다.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김용규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필두로 보다 본격적인 인문교양서 저술에 나서 앞으로도 기대를 갖게 한다.  

고전과 함께 신화 관련서 또한 고정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는 분야인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가져온 열풍은 그것을 비판하는 박홍규의 <그리스 귀신 죽이기>까지 낳았을 정도다. 이윤기에 이어서 신화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는 저자로는 <영혼의 역사>의 장영란을 들 수 있다. 더불어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의 정재서, <문학의 숲에서 동양을 만나다>의 김선자, <살아있는 우리 신화>의 신동흔 등이 신화 전공학자로 우리의 신화 읽기를 풍부하게 해주는 저자들이다.     

서평과 번역에 대한 관심
2000년대 들어서 고전 읽기와 함께 인문출판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건 책에 대한 책, 곧 서평집이다(이러한 풍경은 마치 비평의 시대가 저물고 서평의 시대가 도래한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한기호(<베스트셀러 30년>), 한미화(<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외에 최성일, 이권우(<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표정훈(<탐서주의자의 책>) 같은 출판평론가 1세대의 활동이 2000년대 벽두를 장식했고, 중반 이후로는 고명섭(서평기자), 이현우(인터넷 서평꾼) 등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최성일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시리즈를 통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평 영역을 구축한 글쟁이다. ‘책에 대한 책에 책’은 ‘책벌레들에 책’으로도 영역이 확장되었는데,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김풍기의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김상웅의 <책벌레들이 동서고금 종횡무진> 등이 그에 속한다. 서평과 함께 번역에 대한 관심도 2000년대 이후에 두드러진 현상으로 여겨지는데, 박상익의 <번역은 반역인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은 그 두드러진 성과다. 더불어 <개념어 사전>을 <철학>, <역사> 등을 펴낸 남경태는 전문 번역자가 일급 저술가의 자격도 갖추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몇 가지 범주로 얼기설기 나누어서 인문 저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독특한 색깔의 저자나 독립군적인 저자들은 이런 ‘그물망’을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나무인문학의 강판권(<나무열전>), 풍수인문학의 최창조(<최창조의 새로운 풍수이론>), 스토리텔링 인문학의 최혜실(<스토리텔링, 그 매혹의 과학>) 등이 그렇고, 에세이스트로서 이어령(<문화코드>)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 하나의 장르인 고종석(<감염된 언어>)과 전방위 공부꾼 고병권(<화폐, 마법의 사중주>) 등이 그렇다. 그러니 이 모든 저자들에 대한 얘기는 모두 흐트러트렸다가 다시 지어내야 온당할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동시대 저자로서 그들이 지금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11. 0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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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7-2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그려진 지형도를 보는 느낌인데요.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

로쟈 2011-07-22 14:06   좋아요 0 | URL
그런 걸 그려보고는 싶었어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7-2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좀더 큰 캔버스에 그려주시길...

로쟈 2011-07-22 14:50   좋아요 0 | URL
멍석이 먼저 깔려야 캔버스를 올려놓고 그려볼 텐데요.^^ 생각만 하고 집어넣진 못했는데, 저자 유형학도 다뤄봄직합니다. '학자-지식인-글쟁이'론입니다...

anathema 2011-07-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석주 문학에 대한 평가는 문단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7-23 00:35   좋아요 0 | URL
'독립군'이죠...

park6 2011-07-2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ㅎㅎ 그런데 로쟈씨께서 박이문씨 책을 인상깊게 읽으셨다니, 저도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로쟈 2011-07-23 00:35   좋아요 0 | URL
주로 학부시절에 읽었고요. 평이하게 쓰시기 때문에 입문용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2011-07-23 0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3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1-07-2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시대의 인문 저자들이 한눈에 잡히는 글 정말 잘 봤습니다! 넘 감사합니다. 하상 궁금했던 분야인데 한 번에 정리 됐네요^^

그나저나 저도 박이문 선생님 글을 처음 접하고나서 출간된 책을 거의 다 컬렉션화 했는데, 이사오면서 엔날에 출간된 반텀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어졌네요...현재는 7권만 보유중입니다. 엔날 국어 교과서에 '길'이라는 에세이가 실린 적도 있었죠.
저는 처음 단행본으로 <이성은 죽지 않았다>를 첨 접했네요...도서관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쉬지도 않고 읽은 책은 이 책이 유일할 겁니다..ㅎㅎ 근데, 제일 좋았던 책은 <노장사상>이었네요~ 로쟈님 서재에서 박이문 샘의 글을 보니 넘 반가운 나머지..ㅎㅎ

로쟈 2011-08-04 07:39   좋아요 0 | URL
<이성은 죽지 않았다>는 아마도 '중기 박이문' 정도 될 거 같아요. 저는 데뷔작인 <시와 과학>이 인상적이었어요. 자서전 <사물의 언어>도 반가운 책이었죠. 모두 지금은 '없는' 책들이네요...

미국사람 2011-08-04 0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같이 오늘은 무슨 책이 나왔나하고 들어왔다가 이 글은 오랬만에 꼼꼼히 읽어보았네요. 참 훌륭한 글입니다. 대충 저자들 그림이 그려지는 군요.

그리고 박이문 선생이 아직 살아계신가 보군요. 대학시절 학교 강연회에서 뵌 적이 있는데 말보다는 글이 훨씬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읍니다. 외국에 오래 사셔서 그런지... 1930년생이시니까 우리 나이로 82살이시군요.

로쟈 2011-08-04 07:37   좋아요 0 | URL
네, 달변은 아니신 분이죠. 그리고 초기 글들이 더 좋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