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

기획회의(29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사이토 준이치의 <자유란 무엇인가>(한울, 2011)를 만지작거리다가 아예 그의 <민주적 공공성>(이음, 2009)과 같이 다루게 됐다. 저자의 문제의식 정도를 간추렸다.   

  

기획회의(11. 06. 05) 자유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인문서의 한 갈래가 ‘인문서를 읽기 위한 인문서’라면 사이토 준이치의 <자유란 무엇인가>(한울, 2011)는 그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자유론의 현재적 쟁점이 무엇이며 어떤 주장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 ‘가이드북’의 역할이다. 원저는 일본의 이와나미출판사가 기획한 ‘사고의 프론티어’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나온 <자유>(2005). 저자의 책으론 국내에 먼저 소개된 <민주적 공공성>(이음, 2009)에 뒤이어 두 번째로 나온 것이다. 이 <민주적 공공성> 또한 같은 시리즈의 <공공성>(2000)을 옮긴 것이다. ‘공공성’과 ‘자유’에 대한 관심이 저자에겐 병행적이거나 연속적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하버마스와 아렌트를 넘어서’란 부제를 단 <민주적 공공성>의 키워드는 당연히 ‘공공성’이다(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바로 떠올리게 한다). 한데 일본에서도 이 말은 국가가 사용하는 말, 즉 일종의 관제용어였다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그러니까 책이 쓰인 시기를 고려하면 2000년대 초반 들어서 ‘공공성’ 혹은 ‘공공권(公共圈)’이란 제목을 단 책들이 출간되고 대학에서는 ‘공공철학’ 강좌가 개설되고 하는 식으로 붐을 이루고 있다고 전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국가가 ‘공공성’을 독점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의 확산과 맞물린 현상이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어판에 부친 서문에서 그는 “한국사회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라고 적었는데, 사정이 좀 다르다고 해야겠다. <민주적 공공성>이란 책 자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그 점에선 <자유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공공성이란 말도 일본만큼 널리 쓰이지 않는다. 드물게도 ‘공공성’을 제목에 달고 나온 조한상의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책세상, 2009)에서 저자가 ‘공공성과 시민사회’ ‘공공성과 국가’ ‘공공성과 언론’ 등을 각 장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 공공성의 초점은 아직 국가나 언론(미디어)에 두어져 있다. 반면에 <민주적 공공성>은 공공성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서 문제의 지형을 ‘시민사회와 공공성’ 쪽으로 옮겨가고자 한다. 이러한 재정의와 새로운 관심을 우리도 공유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정체(政體)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헌법 제1조에 명시돼 있듯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지만 박명림 교수와 함께 ‘공화국을 위한 열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다음 국가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1)에서 김상봉 교수는 ‘공화국’이 이 땅에서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민주국가’와 ‘공화국’은 서로 다른 정치적 범주인바, “민주국가가 모두에 의한 나라라면 공화국은 모두를 위한 나라”이다. 공화국은 의사 결정의 형식이 아니라 그 내용이 모두를 위한 것일 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그 말은 공화국이란 나라가 소수 권력집단이 사익이나 챙기는 기구가 아니라 ‘공공적 기구’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공공성과 공화국의 정신이 빠진다면 민주주의는 ‘내용 없는 형식’, 곧 껍데기로 전락한다(이명박 정부의 대한민국은 공화국인가 껍데기인가?). 우리는 아직 민주국가에서 공화국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셈이다.  

<다음 국가를 말하다>에서 두 저자는 이 공화국으로의 여정에서 같이 고민해볼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거기에 ‘자유’는 포함돼 있지 않다. 자유와 공공성을 나란히 다루지 않는 것은 자유가 ‘공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적인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깔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반면에 공공성에 대한 사이토 준이치의 논의는 ‘자유’에서 출발한다. 자유가 출현했다는 것은 자유가 출현할 수 있는 공공적 공간을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함께 먹는 식사 때마다 자유도 합석하도록 초대받는다. 비록 의자는 빈 채로 있지만 자리만큼은 마련되어 있다.”(<과거와 미래 사이>)   

아렌트를 따라서 사이토는 공공적 공간이 두 가지 정치적 가치와 연계돼 있다고 말한다. 그 하나가 ‘자유’이고, 다른 하나가 ‘배제에 대한 저항’이다. 아렌트적 의미에서 자유는 공공적 공간, 즉 공공성을 전제로 한다. 반면에 ‘사적(private)’이란 말은 타자의 존재가 박탈됐다는 뜻이다. 자신의 행위와 의견에 대해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공공적 공간이기에 타자의 부재․박탈은 곧 자유를 위한 장소의 박탈을 의미한다. ‘행위할 권리’와 ‘의견을 피력할 권리’를 위한 장소의 박탈이다. 따라서 아렌트에게서 사적인 삶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근대적 의미의 자유, 흔히 ‘간섭의 부재’로 정의되는 ‘소극적 자유’에 대한 옹호와 대비된다.   

<자유란 무엇인가>에서 사이토 준이치가 자유론의 출발점으로 검토하는 것이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론이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분은 벌린의 유명한 논문 ‘자유의 두 개념’(1958)에 근거하는데, 사이토는 벌린의 사고가 자신의 시대 인식에 토대로 두고 있다고 평가한다. “통제와 간섭이 도를 넘으면 소극적 자유의 개념이 우세해지고, 거꾸로 방임적 시장경제가 위세를 떨치면 적극적 자유의 개념이 우세해지는 것”이란 벌린의 주장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자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라는 전체주의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었기에 벌린으로선 소극적 자유를 옹호했으리라는 것이다.  

두 차례의 전쟁과 전체주의 지배를 경험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국가 폭력이 자유에 대한 최대의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것이 자유지상주의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 곧 ‘방임적 시장경제’ 하에서 사정은 바뀌었다. ‘정치적인 것’(국가)과 ‘사회적인 것’(고용보장이나 사회보장)이 ‘경제적인 것’에 의해 지속적으로 식민화되고 있는 것이 그간의 경과이다. 국가의 활동영역이 후퇴한다고 해서 저절로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의 경험은 말해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구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사적인 문제가 아닌 공공적 문제로 재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소극적 자유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와 공공성의 연계로 주장을 전개해나가는 저자의 결론은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우리 모두가 함께 자유를 누리기 위해 거부해야 할 것은 타자에 의한 간섭 일반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교섭을 미리 불필요한 것, 위험한 것, 그리고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상과 행동이다.”  

11.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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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두운 시대의 공공철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08 20:34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잠시 궁리해보다가 공공철학을 소재로 쓰게 됐다. 최근에 자유와 공공성을 주제로 한 책들과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등을 들춰본 탓이다.한겨레에 이어서 경향에서도 필명이 '로자'라고나갔는데, '로쟈'에서 '로자'로 개명해야 할는지도 좀 생각해봐야겠다...경향신문(11. 06. 07) 공공철학, 광장, 촛불“지금 인터넷에서 ‘공공철학’을 검색해 보면 수많은 관련 사이트가 눈에 띕니다.
 
 
2011-06-11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3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유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잠시 궁리해보다가 공공철학을 소재로 쓰게 됐다. 최근에 자유와 공공성을 주제로 한 책들과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 등을 들춰본 탓이다. 한겨레에 이어서 경향에서도 필명이 '로자'라고 나갔는데, '로쟈'에서 '로자'로 개명해야 할는지도 좀 생각해봐야겠다...  

  

경향신문(11. 06. 07) 공공철학, 광장, 촛불

“지금 인터넷에서 ‘공공철학’을 검색해 보면 수많은 관련 사이트가 눈에 띕니다.” 그렇다고 바로 검색해 보시지는 마시라. 이웃 나라이면서 언제나 ‘먼 나라’ 일본 얘기니까. 일본 학자 야마와키 나오시가 쓴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말인데, 저자에 따르면 ‘공공철학’은 사실 일본에서도 생소한 학문이라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대학마다 공공철학 강좌가 생기고 도쿄대학에서는 공공철학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했으며 인터넷에는 ‘공공철학 네트워크’라는 홈페이지가 등장했다. 굳이 남의 나라 유행에까지 참견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우리와 다르지만도 않다. 왜 갑작스레 공공철학이 주목받게 됐는가.

흔히 공공성은 국가나 정부가 전담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일본에서는 ‘정부 기관의 공(公)’과는 다른 의미의 공공성을 학문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관심이 일어났다고 한다. 거기에는 그냥 손 놓고 있으면 저절로 사회 공공의 이익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자성이 깔려 있다. 대규모 공공사업이나 공공기관 민영화에 대한 재평가 요구가 그래서 터져 나왔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만 하더라도 공공성 담론을 정부가 독점할 때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보여주는 일례다. 원자력발전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원전신화가 말 그대로 ‘신화’에 불과하다는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원전 발전비중이 전체의 34%나 되는 세계 5위의 원전국가인 우리로서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비단 원전문제만이 아니다.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밀어붙이고 있는 정부의 4대강 사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만료된다고 해서 파괴된 자연과 낭비된 예산이 저절로 복원되지 않는다. 공공성과 공익에 대한 관심을 정부에만 내맡길 수 없으며 공공철학에 대한 관심이 남의 나라의 관심일 수만은 없는 이유다.

 

지난해 미국의 ‘공공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하버드대 명강의’란 간판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공통적인 열망과 관심사를 두 나라 국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정의란 무엇인가>보다도 이후에 소개된 <왜 도덕인가>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 그 원제가 ‘퍼블릭 필로소피’, 곧 ‘공공철학’이었다. 책으로 묶은 평론들을 ‘공공철학의 모험적 시도’라고 이름붙이면서 샌델은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우리 시대의 정치적, 법적 논쟁거리들에서 철학의 근거를 찾기 때문이라는 것과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동시대의 대중 담론과 관계 맺게 하는 시도, 즉 공개적으로 철학을 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이다.  

물론 이러한 공공철학과 공공성에 대한 강조가 혹 사적 자유에 대한 홀대와 침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란 의혹을 가질 수도 있다. 최인훈의 <광장> 이후에 우리가 갖게 된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 때문에라도 그렇다. 하지만 공적 영역의 회복을 철학적 과제로 삼았던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공적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개인적인 교우관계나 목표 추구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가능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유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장은 그러한 만남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광장의 자유가 없다면 밀실의 자유도 없다. 이 광장의 자유가 억압받는 시대를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라고 불렀다.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가. 광장에 다시금 하나둘 촛불이 켜지고 있다.  

11.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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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부터 광화문 쪽에 마련된 강의공간 푸른역사 아카데미(http://blog.daum.net/purunacademy)의 목요강좌에 참여하게 됐다. 네 명의 강사가 매주 목요일 저녁에 돌아가면서 강의를 진행하며, 노성두(미술사), 김수영(철학사), 정준호(클래식음악), 그리고 로쟈(문학/인문)가 강사진이다. 나는 '천국보다 낯선 서재'란 타이틀로 매달 셋째주 목요일을 책임질 예정인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6월에는 마지막 주인 6월 30일에 강의한다. 첫 주제는 '문학들이란 무엇인가'로 잡았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푸른역사 아카데미 목요 특강

1. 시간 : 6월부터 첫째주 - 넷째주 목요일 저녁 8시 ~ 10시 (추후 수강생들의 의견을 모아서 7시30 -9시30분으로 당길 수 있습니다.) 

 

2. 장소 : 푸른역사 아카데미 강의실
 

3. 강좌 및 강사 소개

1) 첫째 주 : 노성두의 〈유혹하는 미술사〉
우선 서양미술사의 고전인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를 꼼꼼히 읽어 서양미술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고 나서 PPT 자료를 보면서 시대별 미술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할 계획입니다. 공부의 연륜이 쌓인 적당한 시점에 유럽 미술관 답사 여행도 기획할 예정입니다.

 
 

미술사학자이자 저술가. 한국외대 독일어과를 졸업, 독일 쾰른 대학 철학부에서 서양미술사, 고전고고학, 이탈리아 어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지은 책으로 <성화의 미소>, <고전미술과 천 번의 입맞춤>, <유혹하는 모나리자>, <천국을 훔친 화가들> <돌에서 영혼을 캐낸 미켈란젤로>, <창조의 수수께끼를 푼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빛의 유혹에 영혼을 던진 렘브란트>, <청동에 생명을 불어넣은 로댕> 등 수십 종과 다수의 번역서가 있습니다. 국가정보대학원, 사법연수원, 국립중앙박물관, 리움미술관, 프레시안 인문 학습원, 상상마당 등에서 강의하였습니다. 


2) 둘째 주 : 김수영의 〈철학자의 포스트잇〉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에 주석을 다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양철학의 두 기둥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집중적으로 다룬 후에 서양철학의 주요 흐름들을 공부해 나갈 예정입니다. 

 



현 "로도스” 출판사 대표,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연세대학교 생화학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철학과 석사 학위를, 독일 콘스탄츠대학교에서 플라톤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문학과사회”에 실었던 철학적 에세이들을 모아 출간할 예정이며, 헨리 밀러의 소설 <사다리 아래에서의 미소>를 번역해 낸 바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 그리고 성공회대학교, 문지문화원 사이, 도서출판 북성재 사랑방 모임 등에서 강의하였습니다.

3) 셋째 주 : 이현우(필명 로쟈)의 〈천국보다 낯선 서재〉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로쟈님이 선별한 고전과 좋은 책을 읽고 강사의 해설과 주석을 들은 후 토론을 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이끌어갈 예정입니다. 로쟈님의 책에 대한 날카로운 평설을 오프라인에서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인터넷 서평꾼, 한림대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한림대학교 연구교수로 활동하며,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에 서평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서점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꾸리고 있으며, 이른바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옮긴 책으로 <레닌 재장전>(공역)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책을 읽을 자유>가 있습니다.

4) 넷째 주 : 정준호의 〈클래식으로 들어오다〉
클래식 음악은 듣고 싶은데 어렵거나 지루하다는 선입관 때문에 입문하기에 망설이는 분들,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듣고 좋아하지만 무슨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들어야 할지 막막한 분들을 위해 체계적으로 클래식 음악의 흐름을 짚어 가면서 명곡을 감상하는 시간입니다.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현재 연세대 독문학 석·박사 통합과정 재학 중
.클래식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 코리아』 편집장 역임하였으며 현재 프리랜서 음악 칼럼니스트로 KBS제1FM(93.1MHz)라디오에서 “FM 실황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말이 먼저 음악이 먼저>, <이젠하임 가는 길>, <스트라빈스키-현대음악의 차르> 등이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예술 아카데미, 무지크바움, 삼성물산, 현대해상화재, 삼성카드, 아시아나항공,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강의하였습니다.  

11. 06.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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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른역사 아카데미와 역사 대중화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16 08:38 
    푸른역사 아카데미 강좌에 대해선 포스팅을 한 적이 있는데, 아카데미의설립 취지와 기획에 관한인터뷰기사가 올라왔기에 한번 더 옮겨놓는다.이 강의공간과 강좌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한겨레(11. 06. 15) 새로운 ‘역사 대중화’ 위해 학계·출판계 뭉쳤다<대장금>을 비롯한 텔레비전 사극들의 높은 인기가 보여주듯, 역사는 대중들이 누리는 인문교양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분야로 자리잡았다. 여기에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학계나 출판계에서
 
 
빵가게재습격 2011-06-0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찾아가겠나이다!^^(시간이 늘 걸렸는데, 6월 30일은 될 듯 합니다.) 혹시 이번 방학에도 한겨레에서 강좌를 여시나요? 혹시 강좌가 오픈되면 공지해주세요. 이번 7월에는 꼭 시간을 내 보려고 합니다. 건강하세욧!^^

로쟈 2011-06-02 08:52   좋아요 0 | URL
네, 한번 뵐 수 있겠군요.^^

2011-06-02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3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펴내는 소식지 <출판문화>(54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데, 이달에 화제로 삼은 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물음이고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을 길잡이로 삼았다. 프롤로그('왜 읽는가?')와 1부의 1장까지 따라가본 게 됐다.     

출판문화(11년 5월호) 홀로 행하는 독서의 즐거움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란 질문에 대해 ‘책읽는 세상’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다. 그게 “어떤 자전거를 타야 할까요?”란 질문과 마찬가지이며, 자전거를 탈 줄 알고 타는 걸 즐길 줄 안다면 ‘아무거나’ 골라잡아 타면 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느 정도 독서력을 갖춘 다음이라면 아무 책이나 읽어도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독서목록이 아니라 독서력이라고. 그렇다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은 어떤가. 이 또한 “자전거를 왜 타는가?” 혹은 “산에 왜 오르는가?”란 질문과 같은 성격의 것일까? 그래서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둘러대는 것이 우문현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책이 있으니까? 과연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잠시 미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견해를 참조해보도록 한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책을 잘 읽는 유일한 방법은 없지만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란 책을 통해서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블룸은 이미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루비박스, 2008)와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을 통해서도 ‘우리는 지혜를 갈망하기에 독서하고 사색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피력한 바 있으니 낯선 견해는 아니다.    

책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주장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블룸의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책이 지혜를 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아무 책’이나 읽어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블룸에 따르면 그렇다. 그래서 그가 권유하는 책은 소위 정전(正典)들이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서구의 정전>과 <셰익스피어: 인간의 발명> 등을 펴낸 바 있는 블룸은 성서와 소크라테스에서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거쳐 헤밍웨이와 포크너에 이르는 정전 혹은 문학적 천재들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결코 만만한 지혜는 아니다.  

지혜와 함께 블룸은 독서의 이유를 자아의 확장에서 찾는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또한 그의 주장이다. 국내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영향을 받은 예일학파의 일원으로 처음 알려졌지만, 악명 높은 ‘해체비평’의 일반적인 구호와는 달리 블룸에게 ‘작가’나 ‘자아’는 해체불가능하다. 오히려 ‘작가의 죽음’이나 ‘자아의 허구성’에 대한 주장이 우리가 독서를 통해서 몰아내야 할 유령이라고 그는 말한다. 각자가 갖고 있는 신념과 무관하게 우리는 “이데올로기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때문에 블룸은 독서의 원칙 가운데 하나로 “독서를 통해 자신의 이웃이나 주위 사람을 개선하려고 시도하자 말라”고 권고한다. 그가 보기에 독서의 즐거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삶이 직접적으로 향상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또 개인의 상상력이 성장하는 것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증가하는 것도 별개의 문제다. “홀로 행하는 독서의 즐거움”을 공익과 연관 짓는 모든 주장에 대해 그가 불편해하는 이유다. 독서는 순전히 개별적인 독자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즐거움이 없다면 독서는 와해될 것이며 자아 또한 해체되고 말 것이라는 게 블룸의 염려다.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서 지혜를 발견하고 자아를 확장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경험이다. 블룸은 이 독서의 즐거움이 대학의 엄숙주의와 도덕주의 때문에 평가 절하돼왔다고 말한다. “대학에서는 독서를 즐거움의 미학이라는 깊은 의미에서 즐거운 일로 가르치는 일이 드물다.” 게다가 이 즐거움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 쉽지 않은 즐거움, 곧 ‘어려운 즐거움(difficult pleasure)’ 혹은 ‘즐거운 어려움(pleasurable difficulty)’에 대한 갈망이다.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이 고차원의 즐거움이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숭고함의 경험이다. 그렇다, 블룸이 권유하는 독서는 숭고한 독서이다. 요컨대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숭고함을 경험하며, 그것은 ‘사랑에 빠진다’고 할 때의 위태로운 초월의 경험을 제외하면 “우리가 세속에서 경험하는 유일한 초월의 경험”이다. 고전들에 대한 블룸의 비평은 이 특별한 경험으로의 초대장이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은 단편소설과 시, 장편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들에 대해서 어떻게 읽을 것이며, 왜 읽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자 하는 책이다. 독서란 무엇인지 일종의 시범을 보여준다고 할까. 단편소설부터 시작해서 그는 시, 장편소설, 그리고 희곡에 대한 읽기를 차례로 선보인다. 그의 독서 여정에 들어서면서 내가 독자로서 품은 기대는 두 가지였다. 한편으론 작품을 읽어내는 그의 솜씨, 곧 ‘독서기술’이 궁금했고, 다른 한편으론 그 독서기술이 전수될 수 있는 여건을 우리가 갖추고 있는지 궁금했다.   

개인적으론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인지라 블룸의 단편소설 감상이 두 명의 러시아 작가에 대한 읽기로 시작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단편소설이란 장르의 여정을 투르게네프에서 체호프를 거쳐 헤밍웨이에 이르는 길로 파악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거론하는 것이 투르게네프의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1852)다. 발표된 지 한 세기 반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놀라우리만치 신선하며 섬뜩하리만큼 아름답다는 평이다. 스물다섯 편의 단편 가운데 특정 작품을 고르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블룸은 <베진 초원>과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 두 편이 자신의 베스트라고 말한다.   

<베진 초원>은 일반적으로도 <가수들>과 함께 <사냥꾼의 수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어떤 내용인가. 화자인 사냥꾼(투르게네프)이 7월 아침에 들꿩 사냥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어느 초원에서 노숙하게 되는데,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농부 소년들과 만난다. 일곱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소년들이 서로 주고받는 도깨비 얘기, 귀신 얘기 등을 그는 엿듣는다. 그중 파블루샤란 아이가 똑똑하고 호감이 가는 소년이다. 잠이 들었다가 동틀 무렵에 일어나니 파블루샤만 깨어나 사냥꾼을 바라본다. 화자는 집으로 향하며 초원의 아름다운 아침을 묘사한다. 그리고 말미에 슬픈 소식을 덧붙인다. <베진의 들판>이라고 옮겨진 우리말 번역에서 인용하면 이렇다. “슬픈 이야기지만 여기에 덧붙여 알려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파블루샤가 그 해에 죽은 것이다. 그는 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참 훌륭한 아이였는데 아까운 일이다.”  

왜 <베진 초원>을 읽는가? 블룸은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적어도 우리의 현실을 더 잘 알기 위해, 운명에 대해 상처받기 쉬운 우리들을 더 잘 알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투르게네프의 솜씨와 이야기꾼으로서의 표면적인 무관심을 미학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 소품에서 독자가 발견하는 아이러니는 운명의 아이러니다. 파블루샤처럼 가장 호감이 가는 아이도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 것이 운명이다. 이 운명은 초원의 풍경과 소년들과 사냥꾼과 마찬가지로 무구하다. 투르게네프는 아무런 도덕적 판단도 보태지 않고 베진 초원을 벗어난 어떠한 시점도 이야기에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블룸은 투르게네프가 가장 셰익스피어적인 작가라고 말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최고의 재능을 필요로 하며, 그런 재능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과 흡사하다는 게 블룸의 견해다.  

작품집에서 <베진 초원>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은 한 난쟁이 이야기다. 사냥꾼 투르게네프는 50세가량의 이 불가사의한 인물과의 짧은 만남을 들려준다. 돈강 유역의 ‘아름다운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늙은 난쟁이 카시안은 나이팅게일을 잡아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일을 한다. ‘벼룩’이란 별명을 가진 그는 자신이 읽고 쓸 줄 알며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특별한 능력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가족이 없다고 하지만 숲에서 갑자기 등장한 소녀가 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온전한 정체는 그냥 수수께끼로 남으며 투르게네프 또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에 대해 더 말하지 않는다. 결국 카시안은 자기만의 세계에, 농노의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판 성서적 세계에 남게 된다. 블룸의 감상은 이렇다.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을 읽으며 우리는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투르게네프로부터도 단절된 타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카시안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보상은 잠시나마 대안 현실의 세계에 들어서도록 허락받았다는 점이다.”  

짧은 분량이긴 하지만, 블룸은 명불허전의 솜씨로 이 단편들의 미학적 성취와 지혜를 요약해낸다. 덕분에 오래전 학부시절에 읽은 작품들을 다시금 읽어보면서 새로운 감상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건 현재 <사냥꾼의 수기>의 완역본을 우리말로는 읽어볼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의 한권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은 <끄라씨바야 메치의 까시얀>으로 번역됐다). 그마나 현재 유통 중인 몇 안 되는 번역본은 보통 원작의 1/3 가량만 수록하고 있는 발췌본이다. 미국의 노예해방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돼 있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새롭게 번역․출간되고 있는 것과 달리, 훨씬 더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러시아 농노해방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은 우리에게 ‘부재하는’ 작품이다. 비단 투르게네프만이 아니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 읽어나가다 보면, 장편소설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빈곤한 상황은 계속 이어진다. 고로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에 “책이 있으니까”라고 답할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어려운 즐거움’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실감하게 된다.  

11. 05. 19. 

P.S. 본문에서 언급한 <베진의 들판>은 <귀족의 보금자리>(신원문화사)에 수록돼 있다. 이 책에는 <사냥일기>라는 제목으로 8편의 단편이 번역돼 있다. <사냥꾼의 수기> 완역 단행본이 현재로선 없는 셈이다. 한편, "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 쉽지 않은 즐거움, 곧 ‘어려운 즐거움(difficult pleasure)’ 혹은 ‘즐거운 어려움(pleasurable difficulty)’에 대한 갈망이다."란 대목에서 대구로 적은 ‘어려운 즐거움’과 ‘즐거운 어려움'을 <해럴드 블룸의 독서일기>에서는 '쉽지 않은 즐거움'과 '즐거움을 주는 난제'라고 옮겼다. 나로선 대구 관계를 살려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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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5-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냥꾼의 수기>는 예전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16번에 <부자> <첫사랑>과 함께 실려있었는데 요즘은 안 나오나요?

로쟈 2011-05-19 22:41   좋아요 0 | URL
절판된 지 이미 오래인데요.^^ 그리고 <부자>와 같이 실렸으면 완역본이 아닙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20 18:33   좋아요 0 | URL
사냥꾼의 수기에는 다섯개의 단편이 들어있네요.더 많은 편수로 되어 있나 보군요.

로쟈 2011-05-21 15:41   좋아요 0 | URL
25편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21 15:50   좋아요 0 | URL
다 읽고 싶어요.분량이 대단하군요.

미지 2011-05-2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게네프로부터도 단절된 타자의 모습"... 찡합니다...

로쟈 2011-05-21 15:36   좋아요 0 | URL
좋은 해석이에요...

雨香 2011-05-2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왜 읽나? 나이가 들면서 계속 드는 질문입니다.
학생때는 책을 통해 삶의 방향을 세우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 둘 아빠에 40이 얼마 안 남고, 회사에서의 위치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의 책 읽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가 몇 년 전부터 저를 괴롭혀온 문제입니다. 그래도 읽는다라는 자세로 임하기는 하는데 해럴드 블룸의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다”로 수정해야 겠습니다.

멀기만한 주제인 고전읽기... 블룸의 책이 가이드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고전읽기 목록을 블룸의 책으로 잡아보겠습니다.

로쟈 2011-05-21 15:36   좋아요 0 | URL
좋은 가이드이긴 한데, 잘 읽히는 영어/번역은 아닙니다.^^;

페크pek0501 2011-05-20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기를 즐겁게 연주하려면 악기로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흥미를 잃으면 악기와 멀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책을 즐겁게 읽으려면 책 읽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때 흥미를 잃고 인내로써 읽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되도록 재밌는 책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조건 명작만 골라 읽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지루한 명작도 많으니까요.

책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중엔 다소 지루하거나 딱딱한 내용의 명작의 책도 즐겁게 읽게 되는 경지에 가게 됩니다. 명작이란 읽다보면 명작이라 할 만한 훌륭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어서 그 새로운 발견을 하기 위해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책부터 읽으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가령 연애소설처럼 흥미로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국내의 대중 연애소설부터 읽다가 세계명작 연애소설로 옮겨 가다보면 다른 분야의 책에도 자연히 관심이 갈 듯합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

로쟈 2011-05-21 15:38   좋아요 0 | URL
ㅎㅎ 연애소설이라면 재미없어 하는 독자들도 있는데요. 저처럼.^^;
 
[인터뷰] 서평계의 두 고수, 고명섭 기자와 로쟈 이현우를 함께 만나다

지난달 언젠가 알라딘과 사계절출판사의 주선으로 <즐거운 지식>(사계절출판사, 2011)의 저자인 고명섭 기자와 대담을 나눈 바 있다. 알라딘 인문MD님이 대담을 정리해서 올려주셨는데, '서평'에 관해 내가 몇 마디 거든 내용을 발췌해놓는다.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많이 쓰셨잖아요. 논란을 예상하면서도 굳이 그런 글을 쓰시는 거죠?

이현우 : 예상까지 한 건 아니고요, 예상 밖으로 논란이 생긴 경우가 있었지요. 서평의 경우는 아니고 오역 문제였는데, 사실 제가 번역한 <폭력이란 무엇인가>에도 오역이 조금 있어요. 쇄를 더 찍을 때 수정을 해야 합니다. 표현에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론서나 철학서는 많이 나가는 책이 아니라서 한 번 나오고 끝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이게 교정되지 않고 남는 건 독자와 저자 모두에게 손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달랑 정오표만 올려놓으면 재미도 없고 해서 오역을 지적할 땐 동기부여 차원에서 ‘내러티브’를 부여하는데 이런 게 필화 사건이 된 경우도 있지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경우도 있고요.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오역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한마디 적었다가 강서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어요. 나중에 학위증명서도 검사실에 팩스로 보내고 했었죠. 작년에 강유원씨 공역서 관련으로 문제가 된 일도 기억이 나네요. 의외였거든요. 신뢰받는 출판사에서 그렇게 책이 나왔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요. 그 이전에는 주로 지젝 책 관련한 이야기들이 있었고요. 

사회 : 대개 학자 사회에서는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상례 아닌가요?

이현우 : 저는 이게 품앗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번역비평학회 일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 보면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해서는 어떤 책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 대개 알아요. 그런데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한국사회의 안면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각자 알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공유되지 않는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교정되지 않는 지식, 이건 지적 냉소주의라고 생각해요. 이런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고 보고요. 그 과정에서 불편하고 불쾌한 일들이 있더라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한 이론서의 역자를 만났는데 저 때문에 한 번 더 보게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이런 것도 저 나름대로는 기여라고 생각되네요. 



사회 : 제가 인문사회 출판사 분들을 만날 때 이 책은 이현우 선생님께서 추천을 해주시겠구나, 고명섭 기자가 한겨레에서 서평을 쓰겠구나 하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두 분께서 요즘 벤또의 주재료로 삼는 주제가 있을까요? 

이현우 : 저는 조금 잡다한데. 블로그를 하다 보니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책 말고도 그 책에 대한 정보나 서평이 공유되면 좋겠다 싶은 걸 많이 다루거든요. 블로그에 기사를 스크랩해두지만 정작 제가 관심을 덜 갖는 책도 있거든요. 그래도 이런 책이 나왔다는 사실 정도만 알아도 좋겠다 싶을 때가 있는 거죠. 책이란 건 읽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다수가 읽는 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에요. 내가 지금 못 읽어도 우리 중에 누군가는 읽는다는 사실. 커다란 독서공동체 비슷한 걸 생각하는 거지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문학 전공이다 보니 철학이건 문학이건 생각을 자극하거나 충격을 주는 책들이 좋아요, 통념을 뒤집어보는 도전적인 책이요. 이런 게 철학이나 이론서가 갖는 강점이죠. 독서공동체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너무 어려운 책을 눈높이에 적절하게 맞춰주는 부분도 중요하죠. 블로그에서 이런 작업을 해왔어요. 지젝을 재미나게 같이 읽을 수 있도록 미끼를 던지는 일 같은 거요. 서평도 그런 중개의 역할이고요. 책을 당장 읽지 않을 사람에게도 책의 정보나 중심 맥락, 흥밋거리를 던져줄 수 있으니까요. 나중에라도 관심 가질 수 있겠죠. 그런 기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은 사실 서평보다는 비평 쪽인데, 이게 만족도가 더 높아요. 서평은 분량이 제한적이고 자기 주관을 드러낼 여지가 적으니까요. 조금 여유를 두고 진행할 생각이에요.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서평은 어떤 걸까요? 

이현우 : 저는 좋은 서평의 조건보다는 효과 면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저는 어떤 책을 안 읽도록 설득해주는 서평이 제일 좋아요. 돈과 시간을 절약하게 하거든요. 별 하나짜리 서평을 설득력 있게 쓰는 거죠. 본인은 불만이겠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유익하니까요. 별 다섯 개짜리 서평보다 오히려 하나짜리 좋은 서평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마존에서 서평을 볼 때 별 하나짜리와 다섯 개짜리를 보는데, 하나짜리도 짧은 거는 특별히 새길 게 없어요. 그런데 길게 차근차근 왜 이 책이 별 하나인가를 알려주는 서평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으로 좋은 서평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서평. 돈과 시간을 요구하는 서평이죠. (웃음) 사서 꽂아두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부추기는 글 말이에요. 세 번째는 잘 정리해주는 서평인데,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지만 읽은 척할 수 있게 해주는 서평이죠. 어디 가서 한 마디 던질 수 있는 서평이요. 고명섭 선생님께서 이런 서평을 많이 써주시죠.  

사회 : 이번 주에 에코의 <책의 우주>가 나왔는데. 에코의 장서가 5만 권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지인들이 찾아와서 다 읽은 거냐고 자주 묻는다고 해요. 그럼 에코는 다음 주부터 읽을 책들이다, 고 대답을 하고, 책을 언제 읽느냐고 물으면, 자기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유쾌하게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글을 쓰는’ 두 분께서는 책을 얼마나 많이 읽고 사시는지요. 

이현우 : 저는 책의 용도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종류에 따라 다른 독서법인 거죠. 문학 전공이다 보니 느리게 천천히 자세히 읽는 걸 훈련받았고 그런 걸 좋아해요. 시집을 한 시간에 다 읽었다, 이런 건 별 의미는 없잖아요. 잘 읽기 위해서 쓴다는 관점에서 ‘자기화’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게 제가 좋아하는 독서이고 권장하는 독서인데, 시간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만 읽을 수는 없다는 거죠. 때로는 속독을 필요로 하는 책들도 있거든요. 최근 원자력 관련 책들이 많이 나오는데 깊이 있는 독서를 필요로 하는 책은 많지 않거든요. 시사적인 책들의 경우에는 빨리 읽으면서 필요한 내용을 습득하는 독서를 요구하기도 하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고요. 그에 반해 정독을 요구하는 책은 다시 읽는 걸 요구하죠. 두 번, 세 번 말이죠. 문학 강의를 하다 보니까 어떤 책은 매 학기, 일 년에 두세 번 이상 읽는데 그래도 재미있는 건 그때마다 작품에 대한 생각이나 이해가 달라지고 추가되고 교정된다는 거죠.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동의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 책에서 <특성없는 남자>에 나오는 도서관 사서를 예로 드는데, 모든 책을 읽기 위해서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기로 선택한 자기희생 정신이 투철한 사서예요. 사서가 책에 몰입해 읽게 되면 자기 역할을 다 할 수가 없는 거죠. 서평가도 부분적으로 그런 운명을 갖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정독하면 좋겠지만 한 권의 책을 정독하기 위해서 열 권의 책을 거들떠 볼 수도 없는 경우도 있고, 거꾸로 열 권의 책을 보기 위해서 책을 정독하면 안 되는 처지도 있죠. 전자가 더 나은 운명이긴 하죠. 그런데 이런 경우는 소수일 듯하고요. 후자의 역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에요.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추천해주고 계시지만, 그래도 부탁을 드립니다.

이현우 : 읽은 책이라고 하면, 요즘 강의 때문에 읽은 책밖에 없어서.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이란 책이 최근 나왔는데, 전공서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교양서거든요. 서양 중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좀 읽는데 다른 문화권에 대해서는 잘 읽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스나 중세 문화는 교양서이고 러시아나 일본에 대한 책은 학술서로 분류가 되거든요. 관심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어요. 형편에 맞게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11.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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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5-15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 짜리 서평이야말로 정말 공들여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로쟈 2011-05-15 13:50   좋아요 0 | URL
'헌신'하는 것이죠.^^;

비로그인 2011-05-15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인문MD방에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명섭 기자의 서평은 주로 로쟈님의 페이퍼를 통해 보게 돼서 그런지 꼭 그분이 로쟈님 블로그에 초대돼서 대담을 나누는 것 같던데요^^

로쟈 2011-05-16 14:26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