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어찌 이리 폭력적인가”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 2011)에 대한 지난번 리뷰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대목을 마저 적었다.  

   

경향신문(11. 07. 05) [문화와 세상]분노의 기쁨

‘분노하라’는 메시지로 프랑스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의 올해 나이는 94세다. 1917년생인 그가 지난해 가을에 펴낸 <분노하라>는 30여쪽밖에 되지 않는 소책자이지만 젊은 세대에게 던지는 노투사의 단호하면서 열정적인 호소를 담고 있다.

무엇이 분노하게 하는가. 에셀은 점점 더 커져가는 빈부격차와 인권의 문제를 든다. 물론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사정은 다르지 않으니까. 가령 올해 30대 재벌그룹 총수와 직계가족 118명이 보유한 상장사 주식 평가액은 지난해보다 13조원이 더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교착상태에 있는 최저임금 협상에서 재계가 제시한 건 30원 인상이었다. 한국은행이 제시한 물가상승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삭감안’을 협상카드로 내놓은 셈이다.

이 13조원과 30원은 현 단계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말해주는 지표처럼 보인다. 애당초 이명박 정부가 부자감세의 명분으로 내세운 ‘낙수효과’가 혹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상위 부유층이 주식소득으로만 13조원의 이익을 얻게 되면 그래도 30원쯤은 노동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날로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인권의 현주소도 가끔씩 놀라움을 자아낸다. 비근한 예로 등록금 시위로 연행된 여대생에게 브래지어를 벗으라고 요구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 사건도 얼마 전 여론의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일인가. 물론 그렇다면 우리가 따로 분노할 일은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세상에 이해 못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반대로 그런 사례들이 진정한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지 않으며 보편적 인권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그래서 결코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없다면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사실 <분노하라>를 통해 되새기게 되는 교훈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면서도 방치하거나 용인해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참여와 행동이 필요하다는 걸 한 번 더 상기하게 된다. 더불어 불의에 맞서 분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분노할 수 있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국어판 <분노하라>에 실린 저자 인터뷰에서 에셀은 그 비결을 ‘기쁨’이라고 말한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조차도 결국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일 때 가능하다. 어떤 참여가 어째서 기쁨이 되는가. 자신의 존엄성과 행복을 지켜주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이 에셀의 체험담이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그에게 마치 의무라도 지우듯 들려준 교훈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한다. “네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야. 그러니 항상 행복해야 한다.” 에셀은 그 가르침을 평생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수용소에 끌려갔던 경험조차도 지나고 보니 긍정적이더란 낙관주의는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다.

자신의 낙관주의를 에셀은 ‘나이 많은 노인이 지니는 특권’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노인이 그와 같은 낙관주의자는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기쁨’ 혹은 ‘행복’이란 비결은 의미가 있다. 다양하고 풍요로운 경험과 함께 굉장한 연애도 해보았다고 자부하는 에셀은 한편으로 시를 읽고 암송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도 셰익스피어와 괴테, 횔덜린의 시구를 음미했다는 그다. 분노와 기쁨과 시,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11. 07.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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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pard 2011-07-05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11-07-05 13: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1-07-0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일이 있을 법한데, 특히 '많이 베풀 걸'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베푸는 삶을 실천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매달 유니세프 후원금을 내고 있는데, 작은 금액이지만 매달 실천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ㅋ이거 자랑인가요?)

부자들의 가장 큰 행복은 자선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11-07-05 22:18   좋아요 0 | URL
'박애자본주의'의 모토죠.

송야 2011-07-0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아서 일일히 지적하기는 어렵겠구요. 한 가지, 여대생 브래지어 사건은 한대련에서도 내부적으로 그 학생이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지 않았습니까? 구치소로 연행된 후 몇 가지 비 정상적인 행동을 벌였고 그래서 경찰쪽에서 자살, 자해의 위험성을 고려해 그런 일련의 조치를 취한 것이죠.
노사간 임금협상이나 감세의 효과 부분에서도 로쟈님의 경제학적 무지는 여실히 드러나지만 시간이 없어서 이만. 좌측에 보니 3년 째 서재의 달인으로 선정되었는데 경제관련 서적은 '신자유주의의 종말'따위의 제목을 가진 비경제인이 쓴 교양서정도만 읽으셨나봐요. 달인이시니까 글도 잘 읽으실텐데 이번 기회에 로쟈님 서재에 꽂혀 단 한번도 펼쳐지지 않은 채 먼지만 쌓인 '경제학 원론'을 읽어보시길. 1회독이라도 하고 나면 본문의 글이 너무나 창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물론 '박애자본주의'와 같은 의미도 본질도 불분명한 레토릭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생각도 사라질 겁니다.

미국사람 2011-07-06 00:13   좋아요 0 | URL
무엇이 앞뒤가 안맞는다는거지요?
노사간 임금협상이나 감세의 효과 부분에서도 로쟈님의 경제학적 무지는 여실히 드러난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린지?
프리드만 같은 시카고 학파의 책만 읽다 오셨나요?
아니면 공병호 계열의 자기개발서나 읽고왔는지?
무슨 이유로 경제학 원론은 읽으라고 하는지 궁금해지는구요?


페크pek0501 2011-07-06 00:31   좋아요 0 | URL
글의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을 찾아내려고 다시 읽어 보았는데,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섬나무 2011-07-06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곽봉효 님땜에 로그인하느라 잊어먹은 메일주소랑 비번 찾아서 글쓰기 합니다.
개인적으로 악감정이 있음이 분명해보이는 어투로 비방을 위한 반론을 위해 자신이 대단한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단어 몇과 책제목을 들먹이시는 걸로 보입니다. 왜냐구요?
곽봉효님이 들먹인'경제학원론'은 곽봉효님이 표현한'박애자본주의'와 전혀 짝이 안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지경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질 않습니까??? 에고 이 무슨 우셉니까...쯧

송야 2011-07-22 12:58   좋아요 0 | URL
'박애자본주의'라는 말은 경제학원론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말이라서 그렇습니다. 기업인의 양태를 지극히 감정적이고 이타심에 기반한 도덕으로 재단하면서 상대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경제행위를 감성이나 도덕으로 힐난한다면 결국 피해자의 열정적인 동의만 얻을 수 있을뿐 올바르거나 생산적인 논의가 될 수 없죠. '성토만해도 좋다'라는 식의 자위행위가 노사간의 임금협상과 같은 지극히 경제적인 문제의 상응하는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순진하거나 어리석거나 뻔뻔한겁니다.
이런 국지적인 문제를 꺼내고 싶진 않지만 본문에서 언급한 30원임금협상만 해도 그렇습니다. 임금은 한 번 올리면 내리기가 좀처럼 쉽지않죠. 물가상승률과 비교하시는데 그렇다면 경기침체시에는 임금을 내리는 데 동의할까요? 공무원의 임금은 사기업에 비했을 때 얼마나 오르고 있을까요?
또 하나, 임금을 올리면 정규직의 허들이 높아져서 그렇게 싫어하시는 비정규직의 숫자가 늘어나겠죠. 그것도 기업인의 탓입니까?
모든 문제가 그렇습니다만 경제문제는 특히 복잡해서 단선적인 시선으로는 오히려 현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해결책을 내어놓게 됩니다. 노동자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 동업자정신 다 좋은 말씀이시죠. 하지만 이 문제를 감성의 시작에서 바라보고 해결책을 낸다면 도덕으로 아주 높은 수준의 하지만 실효성은 없는 주장만 일삼게 됩니다. 그리고 그걸 아실만한 분이 엉뚱한 소리를 하시니까 뜻하지 않게 비방처럼 보이는 어투를 쓰게 되었군요.

송야 2011-07-22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으로 비-인문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도 공감하기 힘든데, 한대련 사건에서의 사실관계마저 교묘하게 왜곡시켜 인용하니 저의가 의심되는 겁니다.
 

이번주 시사IN은 '여름의 책꽂이'가 특집이다. 분기별 서평코너인데(계졀별이군), 인문사회과학쪽 추천위원을 맡고 있어서 이 분야의 서평을 쓰게 됐다. 중복추천을 받은 책이 없어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 2011)를 골랐다. 지난해 '정의'에 이어서 올해는 '분노'가 사회적 화두가 됨직하다는 생각에서다. 서평은 지면에 나간 대로 고쳐놓았다(약간 어색한 대목도 있다). 

  

시사IN(11. 07. 02) 늙은 투사가 노래하는 '폭력적 희망'

인문서로서 2010년 최고의 화제작은 100만부가 넘게 팔려나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덕분에 ‘정의사회’ 같은 관제적 구호, 혹은 ‘사법정의’ 같은 전문가 용어에서나 구경하던 ‘정의’를 한국사회의 언중은 되찾아 쓸 수 있었다. 모두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무엇이 정의인가를 토론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한권의 책이 낳을 수 있는 효과로선 충분하지 않았을까.   

기대를 모은 건 ‘정의 이후’였는데, 독자들의 선택은 정의에 대한 사회 관심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신의 처지를 돌보는 쪽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보이는 젊은 세대의 호응은 공적인 관심과 사적인 고민 사이에 놓인 그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던지는 조언과 위무의 수신자이고자 했다. 사적인 고민에만 매몰된다고 부정적으로만 볼일은 아니다. ‘홀로 선’ 청춘들이 공감의 공동체로 묶일 수 있는 가능성도 주어지는 것이니까. 그 공감이란 ‘아픔’이다.  

그리고 그 아픔이 ‘사회적 고통’이기도 하다는 인식까지는 한 걸음이다. ‘반값 등록금 투쟁’은 우리시대 ‘사회적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가늠해보는 시험대이다. 그것은 대학생들만의 투쟁이 아니다. 대졸자가 80%를 넘어가는 사회에서 등록금 투쟁은 곧 사회 전체의 투쟁이다. 단순히 ‘반값’의 쟁취가 핵심인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사느냐이고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이냐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이러한 고민과 투쟁에 힘을 보태는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로 읽힌다. 프랑스에서만 200만부가 넘게 팔린 이 소책자에서 1917년생 레지스탕스 투사는 오늘의 프랑스 사회가 과거 레지스탕스가 꿈꾸던 세상에서 비켜났다고 비판한다.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며, 노동이 창출한 부는 정당하게 분배하는 것이 스테판 에셀 같은 이들이 기획한 사회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없었다.” 그의 판단에 이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사회’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할밖에……”라고 말하는 것은 최악의 태도라고 에셀은 질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분노다. 자연스런 분노이면서 동시에 자각적인 분노.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가 바로 분노였다고 말하면서 에셀은 그 정신을 되살릴 것을 젊은 세대에게 호소한다.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 한국어 번역판은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총대’라고 할 만하다. 사실 분노의 용도라면 사르코지의 프랑스보다 훨씬 더 많은 게 우리의 자랑 아닌 자랑 아닌가.    

2차 대전 이후에는 주로 외교관으로 활동한 에셀은 분노를 호소하면서도 한편으론 격분을 경계한다. 격분이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이며 그 격분의 한 표출방식이 테러리즘이다. 그가 테러리즘 같은 폭력적인 수단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효과적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폭력적인 투쟁과 평화적인 봉기를 권유한다. 그가 유일하게 허용하는 폭력은 희망의 폭력, 혹은 폭력적인 희망이다.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빌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93세의 노투사가 희망을 노래한다면 우리에게도 절망은 없다. 

11. 06. 28.  

P.S. 아폴리네르의 시구는 번역본을 따른 것인데, 문맥을 살려 “희망은 어찌 이리 폭력적인가!”라고 해도 좋았겠다(이 시구는 '미라보 다리'에  나오는 것으로 번역본 시집 <알코올>에서는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라고 옮겨졌다). 한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책을 언급하니까 자연스레 '저항'을 주제로 한 책들도 떠오른다. 레지스탕스 총서로 나온 <호모 레지스탕스>(해피스토리, 2011)와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리, 2011)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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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분노와 기쁨과 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7-04 23:39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 2011)에 대한 지난번 리뷰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대목을 마저 적었다.경향신문(11. 07. 05) [문화와 세상]분노의 기쁨‘분노하라’는 메시지로 프랑스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의 올해 나이는 94세다. 1917년생인 그가 지난해 가을에 펴낸 <분노하라>는 30여쪽밖에 되지 않는 소책자이지만 젊은 세대에게 던지는
 
 
페크pek0501 2011-06-28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신문 보니깐 그 책을 샀다는 사람은 많은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은 드물다고 하던데, 전 이 책을 끝까지 정독했어요. 그것도 밑줄 그어가면서... 꽤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ㅋ 다른 책 세 권쯤을 읽은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할까요.

제가 이 책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세상엔 인간이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문제들 또는 상황들이 있다는 거예요. 문제의 답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 제시가 훌륭했어요. 이 책에 해법은 나와 있지 않지만, 최고의 결정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 또는 나 자신이 늘 옳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닫게 해 주는 책이에요.

로쟈 2011-06-29 20:41   좋아요 0 | URL
일단 독파하신 데 의의가 있습니다.^^

2011-06-2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9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1-06-2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가장 경계한 것은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력성임 최근에 느겼는데요.

로쟈 2011-06-29 20:43   좋아요 0 | URL
자유주의 철학자들이 '잔혹성'이라고 부르죠...

seti83 2011-06-30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했습니다. 분노하고 있어요~!

로쟈 2011-07-01 21:33   좋아요 0 | URL
책을 낸 보람이 있네요.^^;
 

어제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의 강의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여행: 프랑스 현대철학편'이 마무리됐다. 이름이 길지만 그냥 간단히 '로쟈와 함께 읽는 구조주의'였다. 한겨레의 강의는 7월을 건너뛰고 8월에 5주간 다시 진행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도스토예프스키 커넥션'을 주제로 잡았다. 작년 여름의 '도스토예프스키 깊이 읽기'를 염두에 둔 강의다. 공식적으론 '로쟈의 러시아 문학 여행: 도스토예프스키 커넥션'이다. 오늘 커리큘럼이 공지된 김에 좀 일찍 포스팅을 해놓는다. 강의시간은 8월 한달간 매주 화요일 저녁 19:30-21:30이다. 담당 큐레이터의 소개는 이렇다. 

로쟈 이현우 박사는 "톨스토이와 함께 국내 독자들에게도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이지만,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다"고 했다. 이번 강의에서 러시아 문학, 그 중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루게 된 이유인 셈이다.
이 강좌는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관련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해 가며 함께 읽는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알베르 카뮈, 미시마 유키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은 한국문학까지 두루두루 살피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알베르 카뮈의 <전락>을 함께 펼쳐놓고 두 작품간의 연관성을 살피게 된다. 한 전기작가의 말을 빌면, 두 작품은 모두 '(가장) 비참한, 그러나 낄낄거리며 조소하는 자포자기로 끝나는 유일한 소설'이라고 한다. 

1. 8월 2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스토예프스키 <분신> vs 나보코프 <절망> 



2. 8월 9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베르 카뮈(1)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vs 카뮈 <전락> 



3. 8월 16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베르 카뮈(2)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vs 카뮈 <페스트>  



4. 8월 23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미시마 유키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vs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5. 8월 30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한국문학   

11.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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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7-28 22:24 
    푸른역사 아카데미의 제안을 받고 8월중 네 차례에 걸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 4시-6시에 이루어지며 장소는 푸른역사 아카데미다(http://blog.daum.net/purunacademy/71). 강의 개요와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일독에 대한 욕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안내를 보태자면 내주부터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커넥션' 강
 
 
 
"만약 아내가 여러분을 배신한다면"

오늘자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대한 '해럴드 블룸의 읽기'를 바탕으로 적은 글이다. 번역본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고려대출판부),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에 실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등을 참조했다. 참고로 국내에 소개된 체호프 단편집은 이 작품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두 종류로 나뉠 수 있다.

 

한겨레(11. 06. 11) '중년의 불륜’ 그린 체호프 소설, 실은 자기 이야기?

인생은 아름다운가? 체호프적 자세라면 거의 언제나 아름다울 법하다. “만약 아내가 여러분을 배신한다면 아내가 배신한 것이 조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뻐하십시오”(<인생은 아름다운 것>)라는 게 이 러시아의 유머작가가 건네는 충고다.

그런 사고의 전환이 잘 안된다면 안톤 체호프의 가장 유명한 단편의 하나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주인공을 따라 바닷가 벤치에 앉아보는 것도 좋겠다. 여자들을 ‘저급한 인종’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여자들이 없으면 이틀도 살지 못하는 중년의 바람둥이 구로프는 휴양지 얄타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나를 만나 한번 더 수작을 걸고 잠시 연인이 된다. 안나와 함께 바닷가 벤치를 찾은 그는 드넓게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반복되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그 완전한 무관심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한마디로 유부남 은행원과 젊은 유부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휴양지에서의 짧은 만남 이후에 안나는 눈물을 지으며 남편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 구로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구로프는 여느 여인들처럼 안나도 잊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에 대한 기억은 더욱 생생하게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추억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그는 같이 카드놀이를 했던 관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얄타에서 얼마나 매혹적인 여자와 사귀었는지 아신다면 깜짝 놀랄 겁니다!” 하지만 흘려들은 상대방의 대꾸는 이랬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지난번의 그 철갑상어는 맛이 좀 갔어요!” 흔하게 주고받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구로프를 화나게 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야만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은행일도 지겨워졌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안나가 사는 도시로 무작정 찾아가고 오페라극장에서 그녀와 재회한다.

안나가 가끔씩 모스크바에 오는 걸로 두 사람의 밀회는 다시 이어지지만, 매번 눈물짓는 안나를 보면서 구로프는 자신이 처한 딜레마를 생각한다. 맙소사,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지금에서야 진정한 사랑에 빠지다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좀더 기다려보면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땐 분명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야 겨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됐다는 사실도 두 사람에겐 분명했다. 



체호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줄거리만 보자면 흔하디흔한 불륜담이고, 특별할 건 하나도 없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저명한 비평가 해럴드 블룸에 따르면 “그는 바람둥이 중 한 사람일 뿐이고, 그녀는 눈물짓는 여인 중 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독자는 이 두 주인공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두 사람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리키의 평에 따르면, 체호프는 “따분한 일상의 희미한 바다에서 비극적 유머를 드러낼 수 있는 작가”였다. 그런 따분한 일상 속에 잠겨 있는 인간 존재의 진실을 발견하는 일은 셰익스피어조차도 하지 못한 일이었으며 그것이 체호프의 가장 위대한 힘이라고 블룸은 말한다. 더불어 교묘하게 바꿔놓긴 했지만 구로프란 인물이 체호프 자신의 패러디라는 의견도 피력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개를 데니고 다니는 부인>은 건강이 악화되던 체호프가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 사랑에 빠진 시기에 쓴 작품이었다. 그러니 체호프에게도 인생은 아름다웠다. 다만 체호프식으로. 

11. 06. 11.   

P.S. 기사의 제목이 '중년의 불륜’ 그린 체호프 소설, 실은 자기 이야기?'라고 나갔는데, 노파심에서 적자면 비록 '자기 이야기'라 하더라도 '중년의 불륜'은 체호프와 무관하다(교묘하게 바꿔놓았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갈매기> 공연을 계기로 그가 크니페르를 만난 것은 1898년이며 미혼이었던 두 사람은 1901년에 결혼한다. 그리고 1904년에 체호프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체호프는 작품에 작가 자신의 모습이 반영되는 걸 극도로 꺼렸지만, 블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흔적을 이렇게 읽어낸다.  

사랑에 빠진 체호프는 스스로의 모습을 <갈매기>의 트리고린에 빗대어 풍자했고, 구로프는 그보다 더 뒤틀린 자신에 대한 풍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구로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안나가 눈물을 그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내칠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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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윤리위원회의 월간 소식지 책&(395호)에 실은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한국전쟁'이었고, 요령껏 그림을 그려보았다. 애초엔 3권의 책에 대한 소개가 될 예정이었지만 이것저것 뒤적이다 보니 몇권 더 언급하게 됐다. 거기에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책의 이미지도 몇권 더 추가했다. 아울러 지면에는 빠졌지만 병기된 책의 출간연도는 살려놓았다.

  

책&(11년 6월호) 역사가 돼가는 전쟁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해마다 6월이면 던져지는 질문이고, 이에 답하는 굵직한 저작들도 다수 출간돼 있다. 가장 많이 읽히는 책으로 박태균의 <한국전쟁>(2005)이 입문서 역할을 해준다면, 정병준의 <한국전쟁>(2006)은 방대한 자료섭렵을 통해서 ‘한국전쟁’뿐 아니라 ‘한국전쟁 연구’에 대한 조감도 구실을 한다. ‘전쟁의 개전․성격․형성’보다도 ‘한국전쟁사의 역사’가 먼저 다뤄지는 이유다. 실상 휴전 이후에도 두 세대가 지나면서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경험’이 아니라 ‘역사’가 돼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도 경험의 증언보다는 자료의 발굴․공개와 조사․연구에 더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병준에 따르면 한국전쟁 연구는 두 차례의 전성기를 맞았었다. 기본적으로는 모두 전쟁 당사국들의 자료 공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는데, 첫 번째는 1970년대 중후반 미국측 자료가 공개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비밀문서들이 대량으로 비밀 해제되어 공개됐고 이 자료들에 근거해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 2>(1981, 1990)는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커밍스는 연구대상을 남한과 북한 외에 미국으로 확대했고 1950년 6월 발발의 원인에 초점이 맞춰진 기존의 연구 시야를 1945-50년 남북한 내부 정치상황으로 확장했다. 그로써 커밍스는 ‘냉전의 소련주도설’을 핵심으로 하는 전통주의 해석에 반대하여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수정주의적 시각을 제시했지만, 그의 작업은 접근자료의 제한에서 비롯된 한계도 갖고 있었다. 구소련 문서들이 1990년대 초중반에야 공개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 미국 자료의 공개가 미국의 책임을 부각시켰다면 1990년대 소련 자료의 공개는 반대로 소련 또한 상당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에서 펴낸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2010)에 실린 기광서의 ‘한국전쟁 속의 스탈린’은 소련측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스탈린의 입장과 역할을 정리해준다. 당초 북한 지도부의 무력통일 방침에 대해 스탈린은 줄곧 반대의사를 표명했지만 1950년 봄 김일성과 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시 입장을 바꾼다. 입장 변화의 계기는 네 가지로 간추려지는데, 중국혁명의 성공으로 국제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고, 필요시 중국군의 파병이 가능하게 됐으며, 중․소동맹 체결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줄어들었고, 원자폭탄 개발로 소련이 고무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탈린은 대외적으로는 ‘전쟁 불개입’, 즉 공개적 개입 금지 입장을 전쟁기간 동안 견지했다. 중대한 정책적 오류로 판명이 나지만, 안전보장이사회 불참 결정도 북한과 전쟁을 공모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 계산이 앞섰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지만 비록 전쟁의 주도권을 행사하진 않았더라도 전쟁기간 내내 스탈린은 ‘사회주의 모국의 수령’으로서 북한과 중국에 대해 ‘총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북한과 중국으로선 ‘무의미한’ 전쟁의 휴전협상이 장기화된 것 역시 유리한 조건을 고집한 스탈린의 완고한 입장 때문이라는 게 필자의 견해다.       

러시아의 구소련 문서 공개 이후로 후기수정주의 혹은 신수정주의적 접근이 본격화되지만 그에 걸맞은 연구성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게 정병준이 <한국전쟁>에서 내리는 평가다. 게다가 러시아는 1950년부터 6월말까지 한국전쟁 개전 준비․발발과 스탈린의 역할과 관련한 핵심 문서들을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기에 한국전쟁은 드러난 진실만큼이나 감추어진 수수께끼를 갖고 있다. 더불어 북한과 중국측 기밀문서도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보완될 여지를 많이 남겨놓고 있다. 물론 새로운 자료가 등장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 간에도 전쟁에 대한 시각차가 너무 뚜렷해서 전쟁의 명칭 자체에서부터 의견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김학준은 <한국전쟁>(2010)에서 국제사회에서는 ‘the Korean War’라는 명칭이 통용되는 편이지만 이것을 바로 ‘한국전쟁’이라고 옮기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한다. 과거 ‘6.25사변’ 혹은 줄여서 ‘6.25’라고 부른 대로 북한이 전면남침한 전쟁 개시일을 부각시켜 이 ‘코리아의 전쟁’은 ‘6.25전쟁’으로 지칭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신전통주의에 가깝다는 이러한 견해는 보수주의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기도 한데, <6.25전쟁의 재인식>(2010)에서 제시하는 이유는 조금 더 명쾌하다. 미국과 ‘함께’ 싸운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이란 말은 자칫 미국이 한반도에서 한민족과 ‘맞서’ 싸운 전쟁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와 함께 싸운 건 미국만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강뉴부대도 유엔군의 일원으로 낯선 땅에서 피를 흘렸다. 1954년에 출간된 <강뉴>(2010)는 6,037명이 파병돼 124명이 전사한 강뉴부대의 한국전쟁 참전기이다.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란 질문이 한국인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해준다. 

11. 06. 09.  

P.S. 한국전쟁 관련서를 모으다가 범위가 좀 확장돼 아예 전쟁과 전쟁사에 관한 책들도 사들이고 있는데(최근에 구입한 것만 해도 20권 가까이 된다), 오늘 배송받은 것은 다케나카 치하루의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와 김동춘의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그리고 후안 고이티솔로의 <전쟁의 풍경> 등이다. 전쟁의 이모저모를 짚어주고 있어서 모두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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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전쟁 이해와 한국사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09 23:26 
    한국전쟁에 관한 책들을 몇종소개하면서 주요 저작 가운데 빠트린 책이 있는데,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2>(나남, 1996)이 그것이다. 책은 구입했지만아직 페이지는 넘겨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 2002)도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이다.한국전쟁에 관한 보다 온전한 그림을 그려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기에. 하지만 그보다 먼저 구입한 책은최근에 나온 <역사와 지식과
 
 
꼬마요정 2011-06-09 2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은 참혹해요. 그 중에서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간 이승만이 생각나는군요. 어쨌거나 이 전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건 일본이겠구요..

로쟈 2011-06-11 09:42   좋아요 0 | URL
그런 이해관계가 생기기에 전쟁은 계속되는 거겠죠...

그림자놀이 2011-06-10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 민간학살 문제를 주로 다룬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돌베게, 200)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6-11 09:43   좋아요 0 | URL
네, 빼놓을 수 없는 책입니다. 작년에 나온 책 3권에 초점을 맞추려던 글이어서 빠진 책들이 많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1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주의(이 용어도 좀 이상합니다만 관례대로 하겠습니다)가 우리의 사상을 오염시켰다고 비분강개하는 이들이 있지만 실제로 80년대에 번역된 수정주의학파로 분류되는 책들 중 현재 절판 안 된 것은 커밍스 것밖에 없습니다.나머지는 다 절판되었고요.

로쟈 2011-06-13 08:50   좋아요 0 | URL
그런 거 저런 거 이전에 전쟁에 대한 관심 자체가 만료된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