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305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석영중의 <뇌를 훔친 소설가>(예담, 2011)에 대해 적었다. 마감일에 급하게 보내느라 퇴고를 하지 못했었는데, 편집자가 교정을 보느라 고생을 했다. 한 곳은 더 보태서 고쳐놓는다.  

   

기획회의(11. 10. 05) 문학과 뇌과학, 서로를 비추다

<뇌를 훔친 소설가>. 소설 제목으로 그럴 듯하지만, 뇌과학과 문학을 다룬 인문서이다. 이렇듯 두 분야가 겹치거나 교차할 때는 책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경우는 저자 석영중 교수가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자이기에 ‘인문서’로 분류하고 리뷰를 쓴다. 그렇다고 나름대로 문학에 식견을 갖춘 뇌과학자가 비슷한 유형의 책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과학보다 앞서서 인간 두뇌의 비밀을 밝혀낸 여덟 명의 예술가들을 조명한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지호)의 저자 조나 레러는 신경과학 전공자이고 이 책은 ‘뇌과학서’로 분류돼 있다. 그렇게 ‘교양 인문학’과 ‘교양 과학’의 경계가 어딘지 모호하다면 그냥 ‘21세기 교양’으로 묶어도 좋겠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대로 뇌과학 정도는 현대인의 필수교양이니까.   

일단은 분위기 파악부터 해보자.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적은 대로 “뇌는 21세기 인류에게 가장 흥미로운 화두 중 하나다.” 과학계에서도 인간게놈프로젝트와 함께 뇌지도 프로젝트는 엄청난 연구역량이 투입되고 있는 초국가적 메가프로젝트이다. 여파는 인접 학문에도 미치기 마련이다. ‘신경문학 비평’이라거나 ‘다윈주의 문학비평’ 따위의 분야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니 조만간 국내에도 소개되지 않을까 싶다. 대체 어떤 분야인가. 신경문학 비평은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거나 창작할 때 “두뇌에서 어떤 뇌세포가 어떻게 활성화되는지를 뇌 스캔으로 관찰하여 독서와 창작의 이면에 있는 생리학적 과정을 규명”하는 것이 목적이라 한다. 또 다윈주의 문학비평은 문학을 환경에 대한 적응의 표현으로 보고 “특정 작품의 특정 인물과 플롯은 그러한 생존방식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소개된 책도 없지 않다. 영문학자인 질리언 비어의 <다윈의 플롯>(휴머니스트), 생물학을 전공한 데이비드 바래시와 나넬 바래시의 <보바리의 남자 오셀로의 여자>(사이언스북스) 등이 바로 다윈주의 문학비평에 속하는 책들이다.  

그렇다면 <뇌를 훔치는 소설가>를 통해서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를 밝히고자 한 저자 또한 이러한 흐름에 일조하려는 것일까. 뜻밖에도 그렇진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화 문학이론과 신경문학 비평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라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도 분명하다. 현시점에서 다윈주의적이고 인지적이며 신경과학적인 문학연구 방법은 결국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로 귀착하고 만다는 판단에서다. 문학작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약간은 바꿔놓을지 모르겠지만 지각변동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서로 도움을 주는 ‘상호조명’은 가능하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책에서는 “문학적 내용과 자연과학적 사실이 서로를 비춰주는 가운데 드러나는 삶의 지혜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그러한 의도 하에 저자는 뇌과학이 밝혀준 네 가지 ‘자연과학적 사실’을 골랐고 거기에 부합하는 ‘문학적 내용’들을 나란히 배치해놓았다. 그것이 흉내, 몰입, 기억과 망각, 변화라는 주제를 다루는 네 장의 구성이다. ‘흉내’ 장에서 다루는 것은 거울뉴런의 발견이다. 1990년대 초 이탈리아의 신경과학자들이 마카크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처음 발견한 거울뉴런은 “누가 몸짓을 하든 그 몸짓에 반응하는 뉴런”이다. 영장류에게도 타인의 시도에 반응하고 느끼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흉내, 곧 모방행동과 감정이입이 신경생리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시사한다. 즉 타인의 마음상태를 흉내 냄으로써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연구자가 보기에 “거울뉴런은 문학작품이 다루어왔던 특정 현상을 신경생물학적으로 증명해준 것이다.”   

그럼 뇌과학보다 한발 앞서서 문학작품은 우리에게 흉내에 관한 어떤 진실을 말해주었는가. 저자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티야나를 일례로 든다. 어린 시절부터 책읽기만을 좋아했던 이 시골처녀가 오만해 보이는 포즈의 도시 청년 오네긴을 만나 단번에 사랑에 빠지게 된 건 무엇보다도 수많은 연애소설들 탓이다. “수백 권의 연애소설 속에서 수천, 수만 번의 사랑을 읽을 타티야나의 뇌에서는 소설적인 사랑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신경세포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표절의 여왕’이며 그녀가 오네긴에게 보낸 편지는 낭만주의 연애소설의 모사품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타티야나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모방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오네긴과는 달리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몰입’에 관한 장에서는 ‘보상 신경전달물질’로도 불리는 도파민이 소개된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도파민은 “뇌를 각성시켜 집중과 주의를 유도하고 쾌감을 일으키며 삶의 의욕을 솟아나게 하고 창조성을 발휘하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이 도파민과 관련한 사례를 찾자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키티와의 사랑에 흠뻑 빠졌을 때나 풀베기에 몰입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레빈의 모습이 전형적이다. 또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가 시를 쓰면서 체험하는 희열 또한 몰입의 대표적 사례다. 그는 시대적 혼란과 개인적 역경 속에서도 “시 쓰기에 몰입함으로써 삶도 죽음도 초월하는 창조의 지복을 경험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몰입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몰입과 중독은 같은 상태의 두 가지 다른 이름이기에.    

‘기억과 망각’이란 주제에 대해서도 뇌과학은 기억이 부호화, 저장, 인출, 망각이라는 네 단계의 과정을 밟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에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 바로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면밀한 관찰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를 통해서 주인공의 과거 기억이 환기되는 장면은 신경과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라고 한다. 물론 프루스트가 보여준 건 병적일 정도로 섬세한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과 중첩되는 기억이며, 이러한 통찰은 현대 뇌과학의 발견과도 일치한다.   

끝으로 ‘변화’ 장에서 저자가 다루는 건 뇌의 ‘가소성’ 문제다. ‘신경가소성’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뇌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가소성 역시 좋은 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의 뇌를 풍부하게 하는 한편, 외부 영향에 취약하게도 한다. 저자는 유달리 범속성과 범속한 삶을 자주 모티브로 삼았던 러시아문학, 특히 고골의 작품들과 곤차로프의 소설 <오블로모프>, 그리고 체호프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예로 들어서 가소성이 갖는 역설적 이중성을 짚어준다.  

뇌과학이 계속 발전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문학과의 접점은 더 많아지고 깊어질 것이다. 문학이 얼마나 많은 뇌를 더 훔쳐다놓을지 궁금하다.  

11. 1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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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11-10-0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지시학을 지난학기 박사 마지막 수업에 들어서 뇌과학과 문학의 접점에 대해서 공부했었습니다. 로쟈님의 소개해 놓은 부분만 보면, 위 책은 문학 연구에 대해 새로운 빛을 준다기 보다는, 뇌과학을 문학을 통해 소개해놓은 것처럼 보이네요. ^^

로쟈 2011-10-08 08:21   좋아요 0 | URL
인지시학 소개한 책은 저도 구입해놓았는데, 강의도 있다니 놀랍네요. '새로운 빛'을 경험하셨는지요?^^

2011-10-08 0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8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2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2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qualia 2011-10-26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시점에서 다윈주의적이고 인지적이며 신경과학적인 문학연구 방법은 결국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로 귀착하고 만다는 판단에서다. 문학작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약간은 바꿔놓을지 모르겠지만 지각변동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서로 도움을 주는 ‘상호조명’은 가능하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위 인용글이 석영중 교수 생각의 (혹은 『뇌를 훔친 소설가』의) 정확한 요약이라면, 석영중 교수 생각은 지극히 “나이브”하다고 할 수 있다. 『뇌를 훔친 소설가』 또한 (아직은 안 읽어봤지만) 범작일 가능성이 크다. 논문으로 치면 단순한 총정리 논문쯤(사실 총정리가 아닌 부분적 정리겠지만) 될 것이다. 위 서평만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무리지만, “흉내, 몰입, 기억과 망각, 변화”의 뇌과학적 사실과 (러시아) 문학 작품에서의 그 대응적 사례를 골라 짝지어 설명하는 것으로만 그쳤다면, “그래,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란 뜨악한 핀잔은 석영중 교수 자신이 듣게될 가능성이 더 크다.

어떤 연구 주제/설명 대상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문학 작품에서 이것 저것 뽑아와 대응시키고 (중언부언 동어반복적으로) 부연 설명하는 것이 문학과 학부생이나 초보 대학원생의 가장 흔한 논문 유형이다. 『뇌를 훔친 소설가』가 위 서평에서 요약한 대로만 했다면, 혹은 저런 식의 단순 정리 논문의 문학(비평)적 수식에 그친 것이라면, 그저 범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위 인용문에서의 발언 내용은 “그래,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에 그치는 단순 사례 수집/설명에서 한두 단계 더 나아가 심층적 통찰이나 독창적 사유를 제시하지 못했다는/않았다는 자기고백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석영중 교수께서는 마음철학/심리철학이나 인지과학철학 쪽은 과연 들여다보셨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저런 말씀 하실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이미 영미권에서는 『뇌를 훔친 소설가』 류의 신경소설, 신경문학, 신경비평, 인지비평 관련서들이 숱하게 출간된 것으로 안다. 이쪽 방면의 학부 초월 융합적/통섭적 연구 붐과 성과는 석영중 교수의 인식과는 전혀 달리 “지각변동을 일으킬 정도”라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국내의 한 교수님은 “인지혁명” 혹은 “패러다임 전환”까지 거론하신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한국에서도 『뇌를 훔친 소설가』 류의 저작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는 것은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뇌과학, 인지과학, 문학, 인문학과의 만남이 풍성해지리라 기대하게 한다.

(2011-10-26 11:32)
 

지난달 기획회의(304호)의 특집은 '읽고 쓰는 사람들'이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책에 대한 책'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리뷰 특집인데, 서평과 서평가의 역할에 대한 간단한 총론에 이어서 최성일, 이권우, 정혜윤, 고명섭, 장정일, 김은섭, 명로진, 윤미화 등이 대표 서평가로 다뤄졌다. 거기에 나도 포함돼 있는데, 한겨레신문의 최원형 기자가 맡은 꼭지의 제목이 '자유로운 '독서공동체'를 위하여'라고 붙여졌다. 로쟈식 서평의 방법과 지향점에 대해 잘 짚어주고 있어서 반가웠다. 일부를 발췌해놓는다.  

 

로쟈의 방법 

로쟈는 책과 책을, 사상과 사상을, 이 작가와 저 작가를, 대표 저작과 입문서를, 원본과 번역본을 어디에선가 불러와 끊임없이 묶고 엮고 꿰어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로쟈의 이런 작업 방식을 '배치하기, 짝짓기, 지도 그리기, 교정하기' 등으로 정리한 바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를 나란히 놓고선 '윤리로서의 미학'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슬라보예 지젝을 놓고 그 사상의 뿌리를 쥐고 있는 헤겔과 라캉, 마르크스를 오락가락하기도, 지젝을 앞세워 탈이데올로기 시대 이후의 한국문학을 들여다 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작업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확장된다는 점이다. <책을 읽을 자유>에 모아놓은 자크 데리다에 대한 글 모음을 보자. 데리다 사상의 핵심이 뭔지, 주요 저작은 뭔지, 그의 사상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어떤 입문서를 참조하면 좋은지, 데리다에 대한 중요한 비평가들은 누가 있는지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이 내용물은 한두 번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읽기-쓰기가 반복되면서 축적된 것이다. 

로쟈의 지향 

로쟈가 지향하는 것은 일종의 '독서공동체'다. 그는 <책을 읽을 자유>에서 책 제목을 정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적인 성격의 서평을 쓰면서 내가 바란 것은 그렇게 함께 읽는 '우리'의 확산이었다. 사회적 관심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좋은 책을 통해 얻은 시각과 통찰을 서로 나누고, 더 나아가 '책을 읽는 문화'를 다져가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로쟈의 읽기, 쓰기는 로쟈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읽기, 쓰기 속에서 퇴적물을 남기는 로쟈의 글쓰기는, 고매한 자기 세계에 빠져들어 불후의 명문을 써내는 것과도, 대중이 바라는 지식에 대해 시의적절한 명강의를 펼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의 글쓰기는 철저하게 모든 사람들이 책을 읽을 자유를 누리는, 독서공동체에만 충실하게 복무하고자 한다. 인터넷 서평꾼이나 곁다리 인문학자와 같이 조금 '비뚤어진' 정체성을 달고 있는 이유나, 글 모음이나 서재 등을 통해 자신의 정신활동을 최대한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세상엔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적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다. 필자는 글의 마무리로 자유로운 독서공동체의 전망에 대해 적었다.  

로쟈와 함께 

따라서 로쟈와 함께 이 자유로운 독서공동체에 참여하려 한다면,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한다'는 혼잣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로쟈처럼 나의 정신활동도 투명하게 까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공부해야 독서공동체에 조금이라도 이바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로쟈와 자유로운 독서공동체의 존재는, 학계와 출판계에서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 구실까지 수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역 짚기'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잘 몰라서 또는 번역자나 출판사의 얼굴 봐서 번역의 오류를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로쟈가 여러 차례 오역을 짚고 문제를 제기한 뒤로 출판계 전체에 번역에 좀더 공을 들이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와, 이 정도라면 자유로운 독서공동체의 앞날은 더 밝은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지 않겠는가.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한다'란 생각이 자극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부담으로 작용한다면 내가 바라는 '독서공동체'는 아니다. 최근에 나온 클레이 셔키의 책이 주장하듯이 '많아지면 달라진다'가 애당초 내가 가졌던 모토이다. 그래서 '대중지성'이나 '지식 품앗이'란 말도 곧잘 썼다. '오역 짚기'도 저마다 자신의 관심분야에서 일조할 수 있는 일이다(보통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을 따름이다). 여하튼 독서공동체는 '느낌의 공동체'이기도 하고 '생각의 공동체'이기도 하며 '관심의 공동체' '의지의 공동체'이기도 할 것이다. <애도와 우울증>에 대한 저자 인터뷰에서도 기대를 밝힌 바 있지만 '러시아문학 공동체'도 희망해볼 수 있다. 그렇게 책을 읽고 말하는/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과연 뭐가 달라질까, '로쟈'가 가장 궁금해하는 일이다... 

11.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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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 2011-10-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마지막에 단 코멘트까지 읽고 떠오른 건 알베르토 망구엘이 <독서의 역사>에서 언급한 몇 대목이네요. 가령 휘트먼에 대해: "여기서 그는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해, 그것은 광신이나 정치적 학파에 전혀 때묻지 않은 '자유로운 독서가들'의 사회라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같은.
이번 <기획회의>는 손에 집고 읽어봐야겠네요^^

로쟈 2011-10-03 08:05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면 미국도 아직은 휘트먼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회로군요...
 
호이징하와 호모 루덴스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면사정으로 두달인가 쉬다가 다시 시작하는데, 너무 오랜만인지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나갔다. 첫문장에도 오타가 있어서 교정해놓는다(아침에 부랴부랴 써서 보냈으니 오타가 없을 리 없다).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는데, 한겨레 지면에는 까치판이 소개됐다. 두 번역본을 다 확인하며 썼지만 주로 인용한 건 나중에 나온 연암서가판이다.  

  

한겨레(11. 10. 01) 놀이와 ‘유치한 놀이’의 차이점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로만 규정될 수 없으며 ‘놀이하는 동물’이기도 하다고 주장한 이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다. 알다시피 <호모 루덴스>란 저작이 낳은 명명이다. 저자는 놀이가 문화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며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에는 처음부터 놀이의 요소가 가미돼 있었다고 말한다. 종교와 정치는 물론 심지어 전쟁에서도 놀이적 요소를 식별해낸다. 그렇게 하위징아는 우리 자신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새롭게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그러한 제안과 더불어 <호모 루덴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현대 문명에 대한 유감이다. ‘현대 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 요소’라는 마지막 장은 놀이를 배척한 19세기 이후 오늘날의 문명이 예전 시대가 갖고 있던 놀이의 특성을 많이 상실했다는 진단과 염려로 채워져 있다. 판단의 척도는 진지함이다. 진지한 척과는 구별되는 진지함이야말로 놀이에서의 유희정신과는 대립되기 때문이다.

스포츠를 예로 들자면 19세기 후반부터 스포츠는 점점 더 진지한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전문화되고 제도화되면서 순수한 놀이적 특징을 점점 잃게 됐다. 아마추어와는 달리 프로, 곧 전문선수의 정신은 더이상 순수한 놀이 정신이 될 수 없다는 게 하위징아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를 현대 문명의 가장 뚜렷한 놀이라고 보는 일반적 시각에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더이상 어른이 동심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런 게임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체스와 카드놀이가 점점 진지해지는 경향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놀이와 도박의 차이는 진지함의 유무에 있다.

사회생활, 특히 정치와 관련해서도 하위징아의 염려는 이어진다. 가장 큰 문제점은 놀이가 아닌 것이 놀이처럼 보이는 경향이다. 놀이인 척하는 거짓된 놀이를 그는 ‘유치한 놀이’(Puerilism)라고 부른다. ‘유치주의’라고 해도 좋겠다. 20세기 전반기에 만연한 유치함과 야만성의 결합을 지칭하는 말이다. <호모 루덴스>가 쓰인 1938년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가 득세하고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자 진지한 정치의 유일한 형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거꾸로 ‘놀이로서의 전쟁’이란 생각이야말로 유치하게 여겨졌을지 모른다. 국가들 간의 관계는 ‘진지한’ 관계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지한 관계인가. 하위징아는 정치를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카를 슈미트의 사상을 표적으로 삼는다. 슈미트에게서 적은 내가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 그래서 파괴돼야 마땅한 자이다. 그렇게 되면 적은 경쟁이나 경연에서의 라이벌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오직 절멸 대상으로만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렇듯 정치적 공간에서는 적과 동지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위징아는 “야만적이고 병리적인 망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관점은 인류의 진지한 관심사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일 때만 성립할 것이다. 하위징아가 보기에 슈미트 식의 ‘진지함’은 우리를 야만의 단계로 끌어내릴 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전쟁은 놀이와의 연계를 모두 잃어버렸고 하위징아의 염려는 세계대전의 참화를 막지 못했다.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그의 기대가 헛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호모 루덴스인가 자문한다면, ‘놀이란 무엇인가’란 질문과 함께 ‘진지함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하위징아 자신이 그렇게 물었다. 우리가 유희적이길 멈추고 진지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야만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 <호모 루덴스>가 던지는 메시지이다. 

11. 10. 01. 

P.S. 기사에서 ‘유치한 놀이’(Puerilism)는 연암서가판의 번역이며 까치판은 '미숙성'이라고 옮겼다. '유치주의'란 번역어는 나의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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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1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1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원고가 몰린 날이어서 아침에 부랴부랴 작성했는데, 엊그제 배송받은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산처럼, 2008)의 한 대목을 거리로 삼았다. 책은 사실 두어 달 전부터 장바구니에 넣어 두고 오래 벼르다가(두 권이라 고가이기도 하고) 구입한 것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와그너의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일조각, 2007)이 다음 차례로 벼르고 있는 책이다... 

 

경향신문(11. 09. 30) [문화와 세상]조선 과거제와 사회개혁 

서평을 자주 쓰고 있기에 서평가란 직함으로도 불리지만 일이 아닌 증상으로 분류하자면 나는 책중독자에 속한다. 대개 이들은 “돈이 생기는 대로 우선 책을 사고 그 다음에 옷을 사 입으리라”고 한 에라스무스의 충고를 따르는 자들이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책을 사들여서 집안 곳곳에 쌓아두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보다가 다시 꽂아두길 반복하는 게 그들의 주요 일과다. 예전에는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는 귀족형 책중독자도 있었지만 재정을 고려해야 하는 ‘평민 책중독자’는 대개 특정 관심분야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몇 가지 주제의 책에 유독 탐을 낸다.

너무 읽을 게 많다는 이유로 젊은 시절에 일부러 제쳐놓았던 분야가 동양고전과 한국사 쪽이었는데, 인생 반고비를 넘기다 보니 더는 미루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오래 벼르다가 최근에 큰 마음을 먹고 구입한 것이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이다. 원서가 1280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으로 국외 학자의 한국사 연구를 대표하는 업적 가운데 하나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유학자로 전라도 부안에 은거하며 <반계수록>을 저술한 유형원을 이 서양학자는 20년 넘게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유형원과 조선 후기’란 부제의 이 책이다. <반계수록>은 1670년에 완성되지만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저자 사후 영조 때인 1770년에야 간행된다.  



하지만 제임스 팔레는 <반계수록>을 독창적인 경세론과 제도개혁론을 펼친 대표작으로 간주하며 높이 평가한다. 그의 이러한 안목과 필생에 걸친 연구가 없었다면 유형원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팔레의 저작 때문에 <반계수록>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 책중독자에게는 말이다.

벼르던 책을 손에 넣게 되면 잠시 어루만지다가 필요할 때 읽기 위해 고이 책장에 꽂아두는 게 보통 책중독자들이 하는 일이지만 간혹 일부를 읽어보기도 한다. 한국사회의 신분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펼쳐본 대목에서 저자는 조선의 과거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요컨대 국가는 거의 모든 범주의 양인이 과거를 치르고 관직에 등용될 수 있게 함으로써 조선 건국 이전이나 16세기 이후보다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좀더 확대시켰지만, 양반은 조상의 신분에 상관없이 양인들이 새로이 올라갈 수 있는 집단이 절대 아니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회개혁의 방향은 양반이 가진 세습적 특권을 약화시키고 좀더 개방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양반가문에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지위와 부, 그리고 권력과 권위를 보장받았고, 엘리트 코스의 훌륭한 교육을 받아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면 그 특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팔레의 스승인 에드워드 와그너의 연구에 따르면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전체 합격자의 53퍼센트를 배출했다. 과거제는 양반이 아닌 양인에게도 출세의 기회를 부여한 제도였지만 실제 결과는 그렇듯 일부 가문에 편중되었다. 이유가 없지 않다. 양인도 얼마든지 과거에 응시할 수는 있었지만 양반가문과 같은 경제력이 없었기에 책을 구입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이 공부했던 지방의 서당이나 향교는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사설 교육기관이나 가정교사에게 배우는 양반 자제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었다. 능력 본위의 인재 선발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과거제는 양반가문의 존속에 오히려 기여했다. 결국 조선의 사회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이 조선의 패망과 무관하지 않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11.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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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람 2011-09-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펠레의 (James B. Palais)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Yu Hyongwon and the Late Choson Dynasty 의 번역이 나왔군요. 엄청난 가격과 두께에 놀라 구경만 했던 책인데... 미국에서는 아마 1000권도 안 팔렸을 듯 합니다. 도서관에만 깔릴만한 책이죠. 어쨌건 이런 책을 번역해내는 한국의 저력에 놀랍니다. 출판사가 손해를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로쟈 2011-09-29 23:13   좋아요 0 | URL
나온 건 몇년 됐습니다. 제가 오래 벼르다 구입한 거구요. 읽을 여유를 내보려고 합니다...

미국사람 2011-10-01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어쨌건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책값이 너무 비싸네요. 상하권하면 10만원이 넘으니... 쩝. 하긴 아무나 읽을 책은 아니니 싸게 팔 수는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민주주의를 위한 인문학

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24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제안을 받고 인문서평을 격주로 게재하기로 했다. 첫 번째로 고른 책은 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이다. 추석 연휴 첫날에 독서실에 가서 읽은 책이다. 참고로 같이 읽은 건 곽준혁의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한길사, 2010)에 수록된 인터뷰이다. 이 책에선 '마사 너스바움'이라고 표기돼 있다. 서평을 쓰고 나서 <인간성 함양(Cultivating Humanity)>(1997)도 주문했는데 오늘 책을 받았다...  

  

매경이코노미(11. 09. 28) 교육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

“우리는 거대한 위기, 심중한 전 지구적 중요성을 지닌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꺼내들었다면 십중팔구 2008년 이후의 전 지구적 경제위기를 다룬 책으로 넘겨짚기 쉽다. 자본주의 체제가 낳을 수밖에 없는 주기적인 위기인지, 아니면 파국적인 위기인지 여하튼 우리를 포함한 세계경제가 아직 빠져 나오고 있지 못한 위기 말이다.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이라면 사실 새로울 건 없다. 모두가 의식하고 있는 위기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미국의 인문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에서 경고하는 ‘거대한 위기’는 “마치 암처럼 대개는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 어떤 위기”를 가리킨다.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교육에서의 전 세계적 위기’다.   

 

책의 원제는 구호처럼 간명하다.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Not for Profit)’. 물론 주어는 ‘교육’이다. 누스바움의 선택지에 따르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건 ‘이익을 위한 교육’과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 두 가지다. 중립적인 선택지는 아니다. 그가 보기에 바람직한 교육은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고, 이익을 위한 교육은 나쁜 교육이다. 누스바움이 우려하는 것은 각국이 국가 이익에 목을 매면서 교육현장에 밀어닥친 급격한 변화다. 경제성장만을 국가 발전의 유일한 척도로 간주하면서 빚어진 결과인데 이 때문에 인문교양과 예술 교육이 차츰 축소, 배제됨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 위축되고 있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만일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전 세계 국가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전통을 비판할 수 있으며, 타인의 고통과 성취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온전한 시민이 아니라, 유용한 기계일 뿐인 세대를 생산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교육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로 귀결된다.  

바람직한 교육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누스바움은 세 가지 능력을 양성할 수 있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첫째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둘째 지역적 차원의 열정을 뛰어넘어 ‘세계 시민’으로서 세계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셋째 다른 사람의 곤경에 공감하는 태도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 능력들은 바로 인문교양과 예술을 통해서 길러진다. 가령 예술은 우리의 내면적 자기 함양과 타자에 대한 대응 능력을 증진시켜준다. 누스바움은 시카고의 어린이합창단을 한 사례로 드는데, 리허설과 공연에 참여하면서 아이들은 인종,사회경제적 배경이 전혀 달라도 함께할 수 있는 체험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목소리를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와 맞춰나가는 과정에서 능력과 기율, 책임의 감각을 키우게 된다. 더불어 다른 시대와 장소의 노래를 배움으로써 자연스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도 익히게 된다. 합창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민주주의적 결속감과 존중심이 길러지는 것이다. 물론 합창뿐만이 아니다. 음악, 무용, 회화, 연극, 모든 것이 이러한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익을 위한 교육,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의 주창자들은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아이들을 내몬다. 그들은 학교에 ‘사려 깊은 시민들’ 대신에 ‘유용한 이윤 창출자들’을 배출하라고 요구한다. 그런 교육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인가. 인도 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시인 타고르의 표현을 빌면 ‘영혼의 자살’이다. 타고르의 경고가 무색하게도 오늘날 이익을 위한 교육을 택한 인도의 학부모는 기술, 경영 대학에 입학한 자녀들은 자랑스러워하지만 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자녀들은 부끄러워한단다. 누스바움이 보기에 이건 생각보다 끔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아무런 비판적 사고도 가르치지 않고 인종주의적 편견을 부추기면서 주입식 교육만을 밀어붙였던 인도의 구자라트 주에서 2002년에 폭동이 발생하여 힌두 우익 폭력배들이 2,000여 명의 무슬림 시민을 살해한 사건을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학교들이 인도식 방향으로 이동해가고 있는 현실에 “뼛속 깊이 두려운 마음으로 놀라야 한다”는 것이 누스바움의 경고다. 과연 우리와는 무관한 경고인지 생각해볼 문제다.  

11. 09. 20.   

P.S.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는 누스바움의 단독 저작으론 처음 번역된 것이다. 그런 만큼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솔직히 절반 정도까지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스러웠는데, 마지막 6장과 7장이 다행스럽게도 기대에 부응했다. 번역에 별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역자가 '문맥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였다는 [ ]가 너무 빈번하게 나와서 오히려 독서에 방해가 됐다. ( )까지 자주 등장하다 보니 뭔가 거추장스러운 느낌을 자주 받았다 . 그리고 두 번인가 '괴탄하다'란 말이 나오는데, '개탄하다'를 잘못 쓴 게 아닌가 싶다. 또 마지막 감사의 글(원서에는 서두에 나온다)에서 누스바움이 아마르티아 센 모자에게 감사를 표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the late Amita Sen and Amartya Sen"을 "최근의 아미타 센과 아마르티아 센"이라고 한 건 오류이다. "고(故) 아미타 센과 아마르티아 센"이다. 아마르티아 센은 보통 '아마티아 센'이라고 표기되는 하버드대학의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로 인도 출신이고 누스바움과는 공동 연구도 진행한 적이 있다.     

우리와 처지가 비슷하게 영국에서도 인문학자들이 정부기관에 연구비 지원을 신청해서 지원을 받는 체계인 모양이다. 누스바움이 보기에 "이는 실로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면서 "연구 주제를 왜곡하는 귀신"이다(미국은 대학 재정이 상대적으로 독립돼 있다). 그런 상황에서 빚어지는 에피소드 하나.  

최근 철학과와 정치학과를 합병하여 신설된 어느 학과에서 일하는 냉소적인 젊은 철학자는 내게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최근 그가 제출한 자금 지원 제안서의 제목은 6개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는 글자 수 제한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안서의 제목란에 "경험에 근거한(empirical)"이라는 단어를 6번 연달아 기입했다고 한다. 마치 제안서를 검토한 관료들에게 그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단지 '철학'만이 아니라는 점을 재삼 확인하기라도 하는 양 말이다. 그런데 그의 신청서는 결국 성공적으로 통과되었다."(214-5쪽) 

요는 'empirical'이란 단어를 많이 집어넣었더니 연구비 신청이 채택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에피소드의 내용이 잘못 번역됐다. "최근 그가 제출한 자금 지원 제안서의 제목은 6개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는 글자 수 제한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안서의 제목란에 "경험에 근거한(empirical)"이라는 단어를 6번 연달아 기입했다고 한다."는 "his last grant proposal was six words under the word limit - so he added the word 'empirical' six times"를 옮긴 것이다. '제목은'이나 '제목란에', '연달아'는 원문에 없는 걸 역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집어넣은 것으로 실상은 오독의 산물이다. 보통 '몇단어 이내'라고 지정돼 있는 연구비 신청서에서 6단어가 모자라기에, 곧 더 넣을 수 있기에 'empirical'이란 단어를 6번 집어넣었다는 것이다(그게 선정 '비결'이 아닐까란 것이고). 제목에만 같은 단어를 6번 연달아 기입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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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2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2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1-09-2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번역제목이 너무 마음에 안 듭니다. 개인적으로 '공부'는 혼자 하는 탐색활동이란 느낌이라면, '교육'은 누군가로 부터 배우고 길러지는 것이라서 저런 식으로는 쓸 수 없는 거거든요.

로쟈 2011-09-22 13:21   좋아요 0 | URL
네, 제목은 저도 맘에 안 듭니다.^^;

수증기 2011-09-2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들러서 즐겁게 읽는 사람입니다.^^

'괴탄하다'가 '이상하고 허탄하다'의 괴탄(怪誕)이라면
그런 뜻으로 쓰는 것은 종종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맥락이 이상해서 의심하셨겠지만 여기서 자양분을 많이 얻는 독자로서
혹시나 도움될까 해서 남깁니다

로쟈 2011-09-23 08:50   좋아요 0 | URL
그런 말도 있군요. 하지만 어떤 단어를 그렇게 옮겼을지는 좀 의문이에요. 문맥상으론 그냥 '개탄하다'여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