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출판문화협회의 소식지 출판문화(548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 코너인데 이달에 다룬 주제는 '책의 혁명'이다. 책의 역사, 혹은 독서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손에 닿는 대로 열어본 소감을 적었다. 빌미가 된 건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였다.  

출판문화(11년 7월호) 책의 혁명, "손에 책을 들게 하라"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1996)로 유명한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의 신작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가 출간돼 들여다보면서 ‘책으로 읽는 세상’은 ‘책세상’이기도 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를테면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다. 또 다른 대표작 <책과 혁명>(길, 2003)으로도 널리 알려진 단턴은 ‘책의 역사가’로도 불리는데, 현재는 하버드대학교의 도서관 관장으로 재임중이다. 그가 책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눈길을 돌리게 된 배경일 듯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의 미래>가 제목처럼 전적으로 책의 미래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고, 책의 미래, 현재, 과거를 차례로 살핀다. 원제가 <책을 위한 변론(The Case for Books)>(2009)인 것은 그 때문이다.   

<책을 위한 변론>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이라고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 2011)에 인용된 제목이기도 하다. 번역본으로는 <속도에서 깊이로>가 먼저 나왔지만 원서는 <책을 위한 변론>보다 조금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손에 책을 들게 하라’란 장에서 단턴의 책을 언급할 수 있었다. 저자 파워스가 하버드대 출신인 걸 고려하면 두 저자는 우리식으로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이기도 하다. 파워스가 인용한 단턴의 말은 책의 지구력에 대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종이책을 말하는데, 책은 어떻게 해서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소셜미디어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책은 정보를 제공하고 쉽게 넘겨보기 편리하고 편하게 누워서 읽어도 좋고 보관하기도 쉬우며 쉽게 망가지지도 않는 정말 놀라운 도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업그레이드하거나 다운로드 받을 필요도 없고 부팅을 하거나 암호를 입력할 필요도 없으며 전원을 연결하거나 웹에서 가져올 필요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책이 갖고 있는 이런 편의성이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대체되는 걸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전자책이 대중화되고 어느 정도 종이책의 역할을 대신한다 할지라도 책의 종말은 있을 수가 없다.  

단턴은 물론 책을 사랑하며 특히 구식 책을 좋아하는 역사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의 미래에 대한 그의 견해까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기호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동시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 또한 대담집 <책의 우주>(열린책들, 2011)에서 책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라는 고정관념에 일침을 놓는다. 컴퓨터로 인해서 우리는 다시 구텐베르크의 우주로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글을 읽기 위해서는 매체가 있어야 하며 책보다 더 나은 매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컴퓨터도 매체가 될 수 있지만 “두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읽노라면 두 눈이 테니스공처럼 부풀어 오를” 것이다. 게다가 컴퓨터를 쓰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하므로 욕조 안에서나 침대에 누워서는 읽을 수 없다. 적어도 불편하다. 책도 하나의 도구라면 에코가 보기에 이미 그 기능과 효율성에 있어서는 완벽함에 도달해 있다. 즉 개선의 여지가 없다. 마치 수저나 망치, 바퀴나 가위 같은 것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놀랄 만큼 뛰어난 고안품이란 의미에서 책은 일종의 ‘슈퍼노멀’이다.     

 

도구로서 완벽함을 자랑하지만 사실 책은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 도구의 사용자, 곧 독자를, 독자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수저나 망치로는 대신할 수 없는 그 변화는 책을 통한 내면의 발견 혹은 발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자가 발명됐어야 했다. 문자로 된 어떤 기록을 담은 매체가 책이기 때문이다. 그 책을 사람들은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1000년 이상 동안 그 읽기는 ‘소리 내어’ 읽기였다. 도서관이나 수도원에 앉아 큰소리로 책을 읽었고 소리 없이 책을 읽는 묵독은 특이하거나 예외적인 경우였다. 때문에 독서는 외부 지향적이고 군중 지향적인 성격을 지녔다. 독서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었고 집단적인 경험이었다. 그래서 독서는 구두 기술이자 사회적 기술이었다. 일단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고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책 또한 아주 비쌌기 때문에 독서는 개인적인 경험이 되기 어려웠다. 아니 실상은 독서 경험이 진정한 ‘개인’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개인은 혼자서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는 행위가 탄생시킨 개인이다.  

알베르토 망구엘이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에서 환기시켜준 사실이지만 서양 역사에서 속으로 책을 읽은 최초의 인물은 4세기 후반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이다. “그는 눈동자로 책을 훑어보고 마음으로 의미를 이해할 뿐 목소리는 조용하고 혀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 적고 있는데, 이것이 묵독에 대한 기록으로는 가장 앞선다. 처음에 묵독은 특이하고 유별난 행동으로 간주됐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점차 독자들 사이에서 일반화된다. 이렇듯 혼자 읽는 경험은 함께 읽거나 소리 내어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속도에서 깊이로>에서 파워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읽는 것은 외부의 통제나 영향력에 종속되지 않는 나만의 내적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하지만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러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만의 읽기와 생각에 빠질 수 있는 ‘개인’은 아직 소수였다. 책이 너무도 비싼 사치품이었던 데다가 지배계급이었던 교회와 귀족층은 독서와 그로 인한 내적 경험이 보편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묵독은 위험한 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사업가이자 기술자였던 구텐베르크는 손으로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저렴하고 빨리 만들 수 있는 금속인쇄기를 개발해냈고 이후에 세상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구텐베르크 혁명>(예지, 2003)의 저자 존 맨이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구텐베르크는 무엇보다 사업가였으며 성경을 대량생산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한 ‘초기 자본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발명한 인쇄술은 예기치 않은 속도로 확산되면서 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455년, 그가 자신이 만든 인쇄기로 처음 성경책을 몇 페이지 인쇄한 해 유럽 전역에서 인쇄된 서적은 모두 합쳐야 수레 하나를 채울 정도였지만, 1480년 즈음에는 120여 곳이 넘는 유럽의 도시와 마을에서 책이 인쇄됐고 1500년까지 대략 3만여 종의 책 수백만 부가 찍혀 나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매년 100억 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이러한 양적인 팽창과 확산이 산업적 차원에서만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책의 확산은 독자를 일반화했고 읽기를 보편화했다. 이러한 독자 대중의 탄생이 정치적, 사회적 변화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셀러’를 원제로 갖고 있는 단턴의 <책과 혁명>이 보여준 바대로 ‘금서의 사회사’, 조금 일반화해서 ‘책의 역사’는 근대 사회사와 문화사의 핵심을 구성한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만들어낸 인쇄술을 인류사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발명으로 꼽는 이유이다.  

한편 그러한 막대한 파급력을 가진 금속활자의 발명이라면 우리가 구텐베르크보다도 앞서지 않는가? 스티븐 로저 피셔도 <읽기의 역사>(지영사, 2011)에서 이 점을 명시하고 있다. “1200년대 한국 인쇄업자들은 중국이 발명한 활자인쇄를 역사상 최초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한국 인쇄업자들은 1403년에 이미(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도 한 세대 앞선다) 조립식 금속활자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와 같은, 인쇄술의 급속한 파급과 책의 확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는 “상업적 시장도, 인쇄업자 조합도, 생산과 유통의 상승작용도, 경제적 부 혹은 사회적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읽기 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금속활자인쇄술과 자본주의적 기반의 상호 상승작용이었지만 동아시아는 그러한 배경을 갖고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15세기에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한글로 인쇄된 책자를 펴내게 했지만 고위층과 학자들에게만 수 백부를 배포한 식이었다. 예외라면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휴머니스트, 2008)가 보여주듯이 국가 정책적으로 보급한 <삼강행실도> 같은 경우였다.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윤리‧도덕 교과서로 활용하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이 역시 백성의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출판이었다.  

<읽기의 역사>에서 피셔가 지적하는 대로, 문헌 생산이 궁정과 봉건귀족들의 독점을 벗어나기 못했기 때문에, 앞선 기술에도 불구하고 출판의 상업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유럽에서 대량인쇄는 문자언어를 보편화시켰고 책이라는 상품을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독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근대적 개인을 발명함과 동시에 새로운 지적 공동체의 출현을 낳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쇄술에 의한 독서 혁명이야말로 근‧현대 서양을 지탱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축인 대의제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를 공고히 한 토대이며 자양분이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니다.”(육영수, <책과 독서의 문화사>) 분명 인간이 책을 읽기 위해 진화한 것은 아니지만 책은, 책의 발명과 대량보급은 인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책의 혁명’은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11. 07. 18.  

P.S. 칼럼에서는 언급하지 못했지만 글을 쓰면서, 그리고 쓴 이후에 모은 책들 가운데는 프랑스 저자들이 쓴 서양 독서의 역사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 2판)와 김상웅의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시대의창, 2008), 폴 콜린스의 <식스펜스 하우스>(양철북, 2011) 등도 포함돼 있다. 불볕 더위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나는 다른 '피난처'를 따로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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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9-19 23:19 
    이번달 출판문화(550호)에 실은 출판 칼럼을 옮겨놓는다.주제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에 대해 썼다. 원고를 써야 할 때쯤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돌베개, 2011)가 손에 잡히기에 읽은 게 빌미가 됐다.출판문화(11년 9월호)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는 질병, 책중독자지난 7월에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를 빌미로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란 주제를 다룬 바 있다. 구텐베르
 
 
비로그인 2011-07-18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을유문고로 나왔던 E. 그롤리에의 <도서 출판의 역사>(원제: 도서의 역사)에서 '구텐베르크의 시도에 앞서 인쇄된 한국의 어떤 책이 알려져 있다'는 식의 표현을 보고 기분이 묘했던 적이 있었는데요(한국의 '어떤 책'이라...) ㅋㅋ 그러고 보니 에스카르피의 <문학의 사회학>도 생각나네요. 이젠 옛날 책들이로군요^^

로쟈 2011-07-18 19:58   좋아요 0 | URL
역시 을유문화사 책에 정통하시군요.^^ 에스카르피는 저도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 너무 오래전인데요.^^;

2011-07-18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프레시안books'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715144535).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도서출판b, 2011)에 대한 것인데, 원고는 아침에 부랴부랴 2배속으로 작성해 보냈다. 일독해볼 만한 흥미로운 책이다.  

 

프레시안(11. 07. 15) 한국에 톨스토이 없는 이유는? '식민지' 없어서!? 

<세계 문학의 구조>(도서출판b 펴냄)는 평론가 조영일의 세 번째 책으로 나온 네 번째 책이다. 그의 해명에 따르면 네 번째로 기획된 책이지만 한권을 앞질러 출간된 것이어서 그렇다.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 문학>(2008년), <한국 문학과 그 적들>(2009년)이 '한국 문학 비판 3부작'으로 나온 두 권의 책이며 그 마지막 권보다 먼저 나온 게 <세계 문학의 구조>이다. 조영일은 앞서의 비평집들이 보여준 날선 비판으로 '한국 문학 비판의 대표 주자'란 평판까지 얻었는데, <세계 문학의 구조>는 적어도 제목만으로는 '비판'보다 본래의 '비평'에 더 다가간 느낌이다. 그는 '세계 문학의 구조 비판'이라고 쓰지 않고 그냥 '세계문학의 구조'라고 적었다. (보론으로 실린 글 역시 '세계 문학 전집의 구조'란 제목을 갖고 있다).

조영일의 비평적 입지는 독특하다.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 다수를 번역한 '전담 번역자'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긴 했지만(한국 문단에 큰 파문을 던진 <근대 문학의 종언>이 그의 손을 거친 번역이다) 동시에 한국 문학(그의 표현으론 '한국 문단 문학')의 경계 가장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어서이다.

그에 대한 반응은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이거나 (다수의) 매몰찬 기각인 경우가 많다. 양적으로 보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러니까 가장 많은 글을 써내는 비평가에 속하면서도 정당한 평가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불편한 물건'으로 간주되는 일이 많았다. 사뭇 논쟁적인 주장과 함께 여러 차례 실명 비판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논쟁이 벌어진 일은 거의 없다는 게 그 방증이다. 끊임없이 손수건을 내던지지만 아무도 그의 '결투 신청'에 응하지 않는다고 할까.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다. 그의 비평에 간혹 끼어 있는 논리적 비약이나 논거 부족 등이 상대할 여지를 축소시킨다는 의견도 나온다. <세계 문학의 구조>의 '책머리에'만 보아도 그렇다. 서두이다. 

"지금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백낙청)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못 분명한 사실 같다. 최근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5쪽)

 

백낙청의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창비 펴냄)을 염두에 둔 것인데, 그러한 물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나르시시즘이다. 보통은 "최근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정도로 진술하는 게 문맥상 온당하다. 그래서 그런 식의 문장 연결이 불편한 독자들도 있을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미리부터 책을 덮지만 않는다면 나름대로 충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나름 '슬로우 스타터'라서 그렇다.

스스로 '장편 비평'이라고 장르를 규정한 이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건 모종의 '자부심' 혹은 '기개'이다. 일단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제목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장이 일사불란하게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주제를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니고 "근대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가 오히려 핵심을 구성하지만 조영일은 당당하게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대담한 제목을 붙였다. 더불어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책 이름만을 박아놓았다(물론 출판사 이름도 하단에 들어 있지만). 



아무런 표지 장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내용'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조영일은 "나는 최근에야 스스로를 문학비평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까지 '책머리에'에 적었다. 이를테면 <세계 문학의 구조>에서 우리는 국민 문학과 국민 작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여주는 그의 주장을 읽으며 비평가 조영일의 '탄생' 또한 목도하게 된다. '3부작'을 완결 짓기 전에 <세계 문학의 구조>를 미리 펴내야 했던 이유 혹은 비밀이 거기에 숨어 있을 듯싶다. 조영일은 이 책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한다.

"<세계 문학의 구조>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일단 '장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고, 내용적으로는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세계 문학의 일부로서만 '한국 문학'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7쪽)

 

'장편'이란 말이 '장편 소설'을 연상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연작'에 가깝다. 네 개의 장과 보론이 조금씩 소재와 초점을 달리하면서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런 형식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습니다' 체 문장이다. 마치 강연 원고처럼 읽히는데, 짐작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1장 '세계 문학으로'는 노골적으로 가라타니의 '세계공화국으로'란 구호를 패러디하고 있다(<세계 문학의 구조> 표지 또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표지와 유사하다. 실제로 조영일은 가라타니의 이 최신작을 번역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물론 스타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조영일은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한 '근대 문학의 종언'론의 견지에서 다시금 백낙청을 비롯한 민족 문학론자들의 세계 문학론을 비판한다. 진즉부터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을 비평의 화두로 삼아온 백낙청은 괴테와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 세계 문학의 이념을 재정립한다. 요는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며 올바른 민족 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조영일의 비판은 흥미롭게도 세계 문학에 대한 괴테와 마르크스의 주장을 그 문맥에 맞게 다시 읽는 것이다.

가령 "민족적 편협성과 제한성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고, 많은 민족적, 지방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공산당 선언>)는 게 마르크스·엥겔스의 유명한 주장이었다. 조영일은 이 주장에 앞서 마르크스가 "국산품에 의해 충족되었던 낡은 욕구들 대신에 새로운 욕구들이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욕구들은 그 충족을 위하여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들 및 풍토들의 생산물을 요구한다"고 적은 대목에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마르크스는 세계 문학을 세계 시장의 형성과정에서 생겨난 '민족적 자족성의 불가능'에서 나온 파생물로 보고 있는 것"으로 교정한다. 한편, 괴테의 경우는 세계 문학을 '촉진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조영일에 따르면 그 배경은 전쟁이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보편적 세계 문학이 화제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이 너무나도 두려운 전쟁에 의해 시달린 나머지, 재차 자기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외국의 많은 것들에 대해 깨닫고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이제까지 몰랐던 많은 정신적 욕구를 여기저기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괴테의 '정신적 욕구'는 마르크스의 '새로운 욕구'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며 그것은 참혹한 전쟁을 통해 획득하게 된 어떤 강제적 충동이 만들어낸 '초국가적 연대감'이라는 것이 조영일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세계 문학 구상은 칸트의 세계공화국에 대한 구상과 나란하다. "자연의 계획이 뜻하는 것은 전 인류 안에 완전한 시민적 연합을 형성시키는 데 있다"는 칸트의 구상은 보편적 문학에 대한 구상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공화국이 국민 국가를 지양한 것이라면, 세계 문학 또한 국민 문학(혹은 민족 문학)을 지양한 것이다. '민족 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란 구호에 맞서 저자가 '민족 문학에서 세계 문학으로'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세계 문학, 혹은 세계 문학의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라면, 조영일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건 국민 문학의 기원이란 주제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것인데,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일본 근대 문학은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감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소위 '국민 서사'라는 게 가능하자면 그것은 국가 간 전쟁과 같은 일대 사건을 요구한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일본 '국민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소세키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에 일어난 러일 전쟁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이제까지 일본 문학이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었지만 러시아란 대국도 무찌른 만큼 문학 쪽에서도 대단한 무엇이 나올 거라는 전망을 그는 피력한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 국민 문학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발표된다. 그렇듯 근대 전쟁과 근대 문학은 '상호 협력'했다는 것이 조영일의 시각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조영일은 "국민 전쟁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국가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나라는 근대 문학이 발달했으나 어떤 나라는 그렇지 못했던 것일까요?"란 물음의 답은 그대로 주어진다. 근대적 서사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으로서 식민지를 가져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 곧 해당 국가가 내셔널리즘을 거쳐 제국주의까지 경험해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가 판단의 잣대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 문학사가 좀 부실해 보이는 것은 작가적 역량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이렇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한국 근대 문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제국주의적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것(그리고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3쪽)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이다. 같은 세대의 젊은 비평가들 가운데 가장 명민하거나 유려한 비평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조영일은 가장 흥미로운 비평가이다. "한국에는 근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한 적 없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는 비평가를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그가 각주로 처리한 대목을 보면 가라타니 고진도 "한국에는 애당초 근대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주장에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용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게 없다. 본문에 충분히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조영일은 미리 입막음해놓고 있지만,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해놓고 '충분히 썼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 마무리이다. 나폴레옹 전쟁과 러시아 근대 문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바 료타로와 이문열에 대한 이야기가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흥미로운 논거이지만 충분한 논거인지는 의문이다.

'장편 비평'이 '이론'의 무게까지 감당하는 건 아니라고 조영일은 말할지 모르겠지만, 근대 문학과 세계 문학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변경하고자 한다면 주장에 더 많은 무게를 실어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다음 '장편 비평'을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1.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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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11-07-1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영일씨 글들은 항상 너무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좀 더 많이 팔려도 될텐데...

로쟈 2011-07-16 08:4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2011-07-16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6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1-07-1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언젠가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해서 달았던 댓글의 논리와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군요. "제국주의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리에 선뜻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말입니다. 이 논리의 배면에 숨은 논거들은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요. 암튼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 문학'을 말할 때는 어떤 아우라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러한 아우라를 한국문학에선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제가 고진의 논리를 따라가기 힘들었던 이유였고 제가 고진이 말하는 류의 '근대 문학'은 한국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된 동기였지요.
중국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루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루쉰에게 느끼는 아우라를 그 중국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그에게 루쉰은 이미 낡은 작가였습니다. 암튼 근대 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논의들은 좀더 많은 검토와 연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7-16 17:16   좋아요 0 | URL
주장을 더 확장하자면 중국도 자체의 근대문학을 만들어내지 못한 나라이고 우리처럼 수입(이식)했던 것이죠. '근대문학'을 갖고 있는 나라는 사실 많지 않고요...

파고세운닥나무 2011-07-18 17:44   좋아요 0 | URL
루쉰을 '낡았다' 여기는 건 중국인들이 루쉰을 국민문학으로만 학습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한국인이 국어교과서를 통해 학습한 현대의 작가들을 고루하다 느끼는 것처럼요. 하지만 국민문학이라지만 루쉰은 다르죠. 제가 함께 얘기 나눴던 중국인은 중국인을 혐오스럽게 그렸다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루쉰을 싫어하더군요. 국민작가로 불리는 작가 중에 자국민을 저리 혐오스럽게 그린 작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건 같은 항렬로 놓고 보는 이광수나 후타바테이 시메이, 나쓰메 소세키를 비교해봐도 알수 있을듯 하구요.
루쉰이 근대 너머를 바라봤다는 인식이 든다면 '낡았다'는 생각은 안 들것 같네요.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숲, 2007)에 대한 감상을 몇마디 적었다(워낙에 대작인지라 짧은 지면에 몇마디 적어봐야 별로 표도 안나겠지만). 원고는 지난주에 보냈는데, 특집기사들 때문에 한주 순연되어 실린다. 개인적으론 <일리아스>를 강의할 기회가 있어서 관련자료를 많이 참고했는데, 윌리엄 J. 프라이어의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서광사, 2010),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책과함께, 2011)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겨레(11. 07. 16) 아킬레우스 시대판 ‘정의란 무엇인가’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킬레우스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양 고전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첫머리이다. 그렇듯 작품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해서 그 분노가 어떻게 해소되는가를 보여주며 끝난다. 1만5000행에 이르는 장대한 서사시를 가능하게 했으니 특별하면서도 대단한 분노다.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인류사적 의미를 갖는 분노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트로이아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헬레네의 ‘파괴적인’ 아름다움이었다면, 그 전쟁을 더 잔혹하게 만든 건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였다. 사실 그가 직접 무얼 파괴한 것은 아니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한 데 격분하여 칼을 뽑지만 아킬레우스는 아테네 여신의 충고에 따라 그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니까. 다만 그는 자기 막사에 틀어박혀 참전을 거부하며 이것이 희랍군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진퇴를 거듭하긴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빠진 희랍군은 결국엔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아군에 밀리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전투의 살상 장면은 현대의 여느 전쟁영화에서보다 더 잔혹하게 묘사된다. “오뒷세우스가 전우 때문에 화가 나 창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맞히자 청동 창끝이 그의 다른 관자놀이를 뚫고 나왔다.” “페이로스가 그에게 달려들어 창끝으로 그의 배꼽 옆을 찌르자 창자가 모두 땅 위로 쏟아졌고,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었다.” 같은 식의 묘사가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불만도 터져 나온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교양강좌 수강 체험담을 담은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에서도 <일리아스>는 제일 처음 읽히는 작품인데, 저자 데이비드 덴비는 “여성을 억압하고 전쟁을 찬미하는 시이며, 주인공은 소아병적인 영웅”에 불과하다는 일부 교수들의 불평을 소개한다.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일을 ‘옳음과 그름’이 아닌 ‘좋음과 나쁨’, ‘강함과 약함’이라는 척도로 재단했던 세계의 이야기를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현재적 의의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없지 않다. 가령 트로이아군의 사르페돈이 동료 글라우코스에게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장면이 그렇다. 사람들이 평소 남다른 대접을 하며 자신들을 존경해온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묻고서 그는 이런 전장에서 선두에 서라는 뜻이라고 답한다. 인간으로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명예롭게 죽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다른가.

한편으로 분노를 풀고서 다시 희랍군을 도와달라는 아가멤논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아킬레우스의 태도도 옹졸하기만 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푸짐한 포상에 대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심을 꺾지 않는 것은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불공정하며 정의롭지 못하다. 즉 여기서 아킬레우스가 요구하는 것은 사과가 아니라 규칙 자체의 변경이다.

그래서 고대 희랍 윤리학을 다룬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의 저자 윌리엄 프라이어는 그를 호메로스의 영웅들 가운데 관례적인 규칙의 한계를 깨달은 유일한 인물로 평가한다. 아킬레우스는 분노와 함께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찰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통찰이 아킬레우스에게 명예를 대신할 다른 규칙까지 일러주지는 못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다시 전장에 나서게 되니까. 무엇이 진정 좋은 삶인가.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11. 07. 15.  

P.S. <일리아스> 완독을 시도해본 것은 몇권의 가이드북을 참고할 수 있어서인데, 강대진의 <일리아스, 영웅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그린비, 2010)가 대표적이다(이 책에는 더 참고할 만한 책들의 목록도 포함돼 있다).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솔출판사, 2004)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며, <처음 읽는 일리아스>(웅진지식하우스, 2006)은 원작의 내용을 각권별로 간명하게 정리해주고 있어서 길잡이로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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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럴드 블룸의 '일리아스' 읽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7-17 11:52 
    <일리아스>을 읽으면서 참고한 자료 중의 하나는 해럴드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인데, 서양문학 '작가사전'으로 아주 유익한 책이다.블룸 자신의 기준에 따라 100명의 천재들을 선정하고 그 천재성을 분류해놓았다.비록 서양문학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무함마드와 <겐지이야기>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가 예외적으로 포함돼 있다)이만한 규모의 작가론을 써낼 수 있는저자는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
 
 
빵가게재습격 2011-07-15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래도 명예롭지 못한 인간이가봐요.^^; <일리아스>보다 <오뒷세우스>가 훨씬 재미있었거든요. 글을 읽다보니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이 눈에 띄는데, 서점에서 구경하다가 분량 대비, 가격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랬습니다. 그 가격은 너무 너무 '명예'로운 것 같더군요. 책 값의 명예를 따져보는 심히 '명예롭지 못한' 댓글을 혜량하세요.^^;

로쟈 2011-07-16 08:43   좋아요 0 | URL
저도 욕하면서 산 책인데, 그나마 내용은 좋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펴내는 월간 소식지 '책&'(396호)에 실은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도시로의 여행'이다. 도시를 주제로 한 책들은 아주 많기 때문에 여기서 소개하는 건 일각에 불과하다. 그래도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해냄, 2011) 같은 책은 공통적인 기본서가 될 만하다. 그에 대한 언급으로 '여행'을 시작한 이유이다.   

  

책&(11년 7월호) 우리들의 도시, 타인들의 도시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산다고 한다. 선진 산업국일수록 도시 인구의 비율은 더 높은데, 미국의 경우엔 국토 넓이의 3퍼센트에 해당하는 도시에 2억 4,300만 명이 모여 산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80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치다. 한 시인의 말대로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 신은 망했다.”(이갑수, 「신은 망했다」)고 할 만하다. 물론 우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부터 도시 인구는 급증해왔으니 말이다. 이러한 도시 인구 집중은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어서 현재도 매달 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개발도상국의 도시들로 모여들고 있다 한다.  

‘지구도시화’란 말이 등장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지구촌’이란 말이 한물 간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렇듯 도시는 일상적 삶의 지배적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해서, 도시의 역사와 도시적 삶의 의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여전히 도시는 우리에게 낯설거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인가? 도시에 관한 책들에 잠시 눈길을 돌려본다.   

가장 먼저 펴볼 만한 책은 도시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해냄, 2011)다. 제목 그대로 저자의 도시예찬론이다. 그는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를 묻고 답한다. 어떤 ‘노하우’였던 것인가? 하버드대학에서 강의하는 뉴요커답게 저자의 모델은 뉴욕이다. 애초에 뉴욕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신대륙 전초기지로 세워졌다. 그러나 18세기에 와서 보스턴을 제치고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로 부상했다. 19세기 경제 호황을 타고 인구가 6만 명에서 80만 명으로 급증하면서 뉴욕은 거대도시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해상 운송이 핵심이었지만 제조업도 뉴욕 경제의 기반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뉴욕의 제조업은 더 이상 비교우위를 갖지 못하게 됐고 경제는 쇠퇴해갔다. 그렇다고 끝이 아니었다. 뉴욕은 아이디어 산업과 금융업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그 동력을 저자는 대도시가 갖는 인접성, 혼잡성, 친밀성에서 찾는다. 도시는 똑똑한 거주민들을 서로 연결시켜줌으로써 생산성과 혁신의 속도를 높여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협력이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면 그것은 도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도시는 그러한 협력을 가능하게 하고 또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승리>에서 도시 일반론을 학습한 다음이라면 도시사학회에서 펴낸 <도시는 역사다>(서해문집, 2011)를 통해서 좀더 구체적인 도시들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볼 수 있겠다. 세계 주요 도시들의 기원과 성장과정, 공간구조, 도시 문화와 도시 이미지 등을 소개하는 글모음인데, 서울을 포함해, 도쿄, 오사카, 베이징, 상하이 같은 동아시아 도시와 런던, 파리,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고 시카고 같은 서구 도시가 주요 도시의 목록이다. 이 도시들은 단순히 도시에 그치지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복합텍스트’로서 의미를 갖는다. “역사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진 문화적 겹지층”이란 의미에서 그렇다.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를 표방한 전우용의 <서울은 깊다>(돌베개, 2008)의 표제를 빌려 말하자면 ‘도시는 깊다’.   

도시는 깊고 넓으며 또한 살아있다. 12명의 기자들이 전 세계 16개국, 29개 도시를 직접 찾아가서 심층 취재한 결과를 묶어낸 <소프트시티>(생각의나무, 2011)가 생생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예컨대 <도시는 역사다>의 파리 편에서 “2007년에는 누구라도 신청만 하면 파리 전역에 설치된 공중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는 ‘자유 자전거(벨리브)’를 도입했다”는 내용을 읽을 수 있는데, <소프트시티>에서는 그 현장을 더 자세히 소개해준다. 벨리브(Velib)는 자전거(Velo)와 자유(Liberte)의 합성어로 현재 파리 시 일대에는 벨리브 자전가 3만 5,000여대가 운행되고 있고, 이것이 파리의 풍경과 생활패턴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자동차 운행을 줄이고 보행자를 우선하는 파리 시의 지속적인 교통정책이 가져온 변화이다. 책에 실린 많은 도시의 사례는 도시가 역사적 산물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새롭게 가꾸고 변화시켜나가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걸 일깨워준다.  

그러한 변화의 모델로 브라질의 꾸리찌바는 어떤가. 박용남의 <꿈의 도시 꾸리찌바>(녹색평론사, 2009)와 <꾸리찌바 에필로그>(서해문집, 2011)는 도시의 새로운 모델로서 ‘창조도시’의 이론과 실제를 보여준다. 간단하게 창조도시란 “인간이 자유롭게 창조적 활동을 함으로써, 문화와 산업의 창조성이 풍부하며, 동시에 탈대량생산의 혁신적이고 유연한 도시경제 시스템을 갖춘 도시”를 일컫는다. 이러한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인식 변화와 시민의 의식 변화다. 새로운 문명은 건강한 지역공동체에서  출발한다는 공동의 신념과 합의가 ‘타인들의 도시’를 ‘우리의 도시’로 변화시켜줄 것이다. 도시가 우리 삶의 조건이라면 도시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11. 07. 11.  

P.S. 도시인문학 총서도 나오고 있을 만큼 도시 연구는 근래의 한 트렌드이다. 분량상 자세히 다룰 수 없었지만 생각으로는 도시의 이면, 혹은 이면의 도시에 대해서도 짚어보고 싶었다. 관계되는 책은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 2007), 임동우의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효형출판, 2011), 그리고 정진열/김형재의 <이면의 도시>(자음과모음, 2011)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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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299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를 거리로 삼았다. 아렌트 읽기를 새롭게 자극하는 책이지만 책장이 잘 넘어가는 건 아니어서 애를 먹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야스퍼스의 관계를 정리하다 보니 분량이 차버렸는데, 책의 전체적인 요지에 대해선 역자 해제를 참고할 수 있으며, 그게 더 빠르고 정확하다. 아렌트에게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새로움'과 '탄생성'이란 주제에 대해선 기회가 되면 따로 다뤄보고 싶다.

  

기획회의(11. 07. 05) 아렌트 읽기의 등불

“우리에겐, 가장 어두운 시대에조차 어떤 등불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 서두에 박혀 있는 문구다. 우리말 번역서보다 먼저 구입해둔 원서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역자나 편집자가 가져온 듯싶다. 서론에 등장하는 말이지만 제사로선 한국어본에만 있는 셈이다. 문맥을 바꿔보면, 굳이 한나 아렌트에 관한 책이 아니더라도 ‘어떤 등불’은 책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오락거리로 읽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아렌트 읽기>란 제목을 달고 있으므로 책은 말하자면 아렌트 읽기의 ‘등불’을 자임한다. 사실 어둡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아렌트의 책은 여느 철학자들만큼이나 일반 독자가 읽기에 난해한 면이 있으므로 그런 등불이 필요하다. 게다가 아렌트 전기의 결정판이라고 불리는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의 저자가 안내하는 길이고 보면 기대치는 꽤 올라간다.   

아렌트에 대해선 김선욱의 <정치와 진리>(책세상, 2001)을 읽은 이후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돼 주섬주섬 읽고 책도 긁어모은 편이지만 나는 서론에서부터 배운 게 있다. 새롭게 알게 됐다기보다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인데, 그건 아렌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야스퍼스의 관계다. 18살이 되던 해 마르부르크대학교에 진학한 아렌트는 열일곱 살 연상이었던 철학자 하이데거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이데거는 그녀의 첫 번째 스승이자 연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카트린 클레망의 소설 <마르틴과 한나>(문학동네, 2003)에 그려질 정도로 지금은 널리 알려졌는데, 처음엔 엘츠비에타 에팅거의 ‘폭로’가 있었다. MIT 교수인 에팅거가 아렌트와 하이데거 간의 미출간 서신들을 참고하여 <한나 아렌트/마르틴 하이데거>(1995)란 작은 책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스캔들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영-브루엘의 평가는 싸늘하다. “에팅거의 책은 그것이 비록 아렌트-하이데거 서신에 근거하고 있다고는 할지라도 하나의 공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에팅거는 “순진하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유대인 여학생과 매력적이지만 무정한 기혼의 가톨릭 교수”라는 두 배역을 설정하고 “열정적인 무모함과 배신, 그리고 배신당한 정부(情婦) 쪽의 노예적인 충성심이 뒤따르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영-브루엘이 보기에 이것은 한갓 ‘공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아렌트의 적지 않은 적진에 탄성을 일으켰고 그녀의 지지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아렌트 읽기’는 이러한 스캔들과 무관하게, 그 너머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사이의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들의 철학적 입장이 중요한 것이라면 말이다.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철학적 차이에 주목하고자 할 때 중요하게 부각되는 인물이 동시대 철학자 야스퍼스이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추천으로 아렌트의 지도교수가 되며 그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영-브루엘에 따르면, “이 두 철학자들, 즉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는 각각 아렌트가 한 사람의 철학도에서 정치사상가로 변신하는 경험을 엮는 데 결정적인 씨줄과 날줄을 제공했다.”  비슷한 경향의 철학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공적인 세계에 대한 관점에서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와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했다. 특히 나치에 대한 태도에서 두 사람은 대별된다.   

유대인 아내와 결혼한 야스퍼스가 생계의 방편을 잃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힌 데 반해서 <존재와 시간>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국가사회주의의 주장에 동조하는 오류를 범한다. 알려진 대로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 집권 직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에 임명되며 그해 5월 나치당에 입당하고 ‘급진적인 나치 이념가’를 자처하기까지 한다. 비록 1년이 안 돼 총장직에서 물러났으므로 그의 동조는 일시적인 것이긴 했지만 결코 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불미스런 연루는 그의 철학의 근본적인 관심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사회주의에 자신이 어떤 철학적 이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철학사적 스캔들 이후에 하이데거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선다. ‘세계’에서 물러나 관조적 고독 속에 침잠하면서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경멸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렌트가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동시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하이데거의 모습이었다.   

하이데거와는 대조적으로 야스퍼스는 “세계를 경멸하지도 자기 자신으로 후퇴하지도 않고 (...) 공적인 삶의 조류에 자신을 내맡기고 일관된 합당성을 견지하면서 공적인 이슈들에 관해 발언한 지식인으로서 거의 독보적”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아렌트에게서 특별한 존경을 불러일으켰는데, 세계에 대한 사랑과 공적 영역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아렌트 철학의 밑바탕이기도 했다.  

아렌트는 브레히트의 시구를 빌려 자신의 시대, 20세기 중반 전체주의가 판을 치고 곧이어 전쟁과 대량학살이 인간성에 대한 모든 희망을 좌절시킨 시대를 ‘어두운 시대’라고 불렀다. 이때 어둠은 죽음이나 비극과는 다른 무엇이다. 무엇이 어둠인가? “어둠은 사람들 사이에 열린 빛의 공간들, 사람들이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공적인 공간들이 외면당하거나 회피당할 때 다가오는 어떤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공적 영역으로서 ‘정치에 대해 지겨워하는 태도’다. 이미 20대 중반에 아렌트는 낭만주의자들의 ‘자아로부터의 도피’를 맹렬히 비판한 바 있다. 그때 자아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의 자아’이다. 그러한 자아로부터의 도피가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소외’, 곧 세계로부터의 소외이다. 그것은 인간조건으로서 ‘세계-사랑’에 대한 반란이다. 하이데거가 세계-소외의 철학자였다면 아렌트는 야스퍼스와 함께 세계-사랑의 철학자로 다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배운 것 한 가지를 너무 길게 적었다. 이후에도 저자는 타계한 지 30년이 넘은 지금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란 관점에서 아렌트의 생각과 그 현재적 의미를 반추해나간다. 저자와의 동행이 아주 평탄하지는 않다. 역자의 말을 빌면,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히 무겁고 진지한 필치”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 또한 매끄러운 편은 아니며 “미국과 유럽의 우파로서는(On the American and European right)” 같은 구절이 “미국과 유럽의 권리에 관한”(67쪽)이라고 번역되는 식의 오역도 군데군데 독서를 방해한다. 길잡이 등불치고는 사나운 등불이라고 할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옮긴이 해제’에 책의 요지가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나부터도 책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줄 수고를 덜었다. 

11.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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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ing 2011-07-0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 읽기'읽고 있는데(두번째로^^)저는 쌤의 글을 읽으며 다시 깔끔하게 정리되네요.ㅎㅎ
행위와 탄생성의 관계도, 용서를 정치의 필수조건으로 둔 것도...절로 줄을 긋게되었는데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어요.
찾아보니 푸른역사에서 '세계의 과거사청산'(안병직)이란 책이 있던데 도움이 될까요?

로쟈 2011-07-08 18:19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선 품절인데요. 푸른역사에서 할인가격에 구입하시면 될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