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미리 옮겨놓는다. 무얼 써야 하나 고심하다가 오전을 공치고 오후에 들어서야 겨우 써보낸 원고이다(덕분에 다른 원고들이 다 순연돼 아직도 갈길이 멀다). 어제 서울시장 보선 결과에 대해선 기사나 칼럼이 많을 듯하여, 약간 비껴서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 얘기를 조금 적었다...

경향신문(11. 10. 28) [문화와 세상]‘닥치고 정치’와 염치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에서 불공정 측면을 지적들 하는데 이 분야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불공정이 많이 대두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어록이다.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오랜 국민적 인식에 바로 공감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 감동적이다. 게다가 짐작엔 현직에서 가장 자주 눈물을 보인 대통령 아닌가. 서민의 고통에 대한 뼈저린 공감이 없었다면 민생 경제를 위해 그만큼 애를 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불공정한 사회적 관행을 타파하고 고질적인 병폐들을 마치 전봇대처럼 훌쩍 뽑아내기 위해 불철주야 전력을 다해온 점 또한 이명박 정부의 치적으로 손색이 없다. 공정사회론에 뒤이어 동반성장과 공생발전을 국정운영의 지표로 내세운 것도 CEO 대통령의 혜안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정치가 아닌 국민 다수를 위한 정치를 지향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대개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냉정하며 인색하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과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론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스럽게도 몇달 전부터 그런 ‘죄의식’을 좀 덜어주는 새로운 형식의 방송이 생겨났다. 청와대 비서진도 미처 생각지 못한 ‘가카 헌정방송’ <나는 꼼수다>가 그것이다. 방송을 통해서 우리는 온갖 비방과 유언비어에도 불구하고 “가카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시다”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고,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꼼꼼히 챙기는 대통령의 스타일에 환호하며, 사소한 도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호연지기에 경탄하게 된다.

하지만 경탄만 하고 있을 수 없고 어떻게 이런 방송이 탄생하게 됐을까 궁금해서 책을 손에 들었다.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닥치고 정치>다. 애초에 스마트폰용 방송을 새로 시작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사람들이 몰라. 하지만 이거 대박 난다.” 그리고 실제로 대박이 났다. ‘무학의 통찰’임을 내세우지만 저자의 예지가 범상한 수준을 넘어선다.

‘명랑시민 정치교본’을 자처하는 <닥치고 정치>에는 <나는 꼼수다>와 마찬가지로 명랑한 아이러니와 풍자가 가득하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정치적 ‘좌’와 ‘우’가 인류의 조상이 원시 사바나에서 겪은 공포에 대한 두 가지 대처방식이라고 정리한 김 총수는 그 ‘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유재산이라고 말한다. 왜 중요한가? “그로 인해 자신의 위계와 계급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그 사유재산이 바로 자신의 가치와 신분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니까. 동물이니까 그게 얼마나 초라한 건지는 전혀 몰라.”

하지만 사실 그 ‘초라함’은 우리의 기본조건이다. 우리는 모두 일단은 동물이니까. 동물에서 시작하니까. 동물 혹은 유인원의 처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되는 건 모든 게 먹고사는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승인할 때이다. 일가의 재산과 부동산만이 유일한 관심사라고 한다면 우리의 수준은 ‘잘사는 동물’ 정도에서 멈출 것이다. 부러움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니다.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돼 사회적 대의에 눈감는다면 딴은 ‘순결한 동물’이라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김 총수의 표현을 빌리면 “뇌가 완전 청순한” 상태를 가리킨다. 반면에 정치란 ‘먹고사니즘’이 전부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행위다. ‘먹는 게 남는 거’라며 안면 몰수하는 게 아니라 내 몫이 정당한지 염치를 갖고 따져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정치적 동물’이 된다. 단지 동물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을 앞두고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냥 먹고 살기만 하믄 무슨 재민겨?” 

11.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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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t 2011-10-2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꼼수다를 들어보시지 않은 것 같네요.. 대통령헌정방송은 반어법인데..혹시 제가 이글의 반어법을 이해 못한 것인지?

알케 2011-10-28 00:33   좋아요 0 | URL
로자님의 반어법으로 읽히는데요
나꼼수 어법의...ㅎㅎ

알케 2011-10-28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무선 음성지원 모듈을 책날개에 장착했더군요^^;

로쟈 2011-10-28 11:32   좋아요 0 | URL
전 김어준씨와 격주로 보다 보니 현장음으로 들리더라구요.^^

그후 2011-10-28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6일 나는 꼼수다의 김용민 평론가의 맨션에 의하면) 김어준총수 왈 "이제 태클의 쓰나미가 몰려올거다". 나꼼수가 일종의 반작용이었는데, 메이저 방송 및 언론들의 나꼼수에대한 반작용이 앞으로 점입가경이 될듯 하네요.

로쟈 2011-10-28 11:33   좋아요 0 | URL
나경원캠프에서 벌써 고발을 했더군요...

전호인 2011-10-2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카께서는 깊게 생각하시고 실행하는 판단과 통찰력 그리고 불도저식 결단력도 뛰어나시죠. 나꼼수의 내란음모 방송으로 인해 서울시가 종북좌파세력에게 점령당했음을 직시하고, 선거다음날 명박산성을 만들어낸 어청수장군을 경호처장으로 임명하는 신속한 결단을 하셨더라구요.신변의 위협을 느끼셨나봐요ㅜㅜ우리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동물적 감각에 혀를 내두르게 하니 대단한 정수인 거죠(절대 꼼수 아니죠?ㅋㅋ). 5.18때 군홧발과 몽둥이 찜질을 당하던 선배동지들의 모습을 다시볼 수 있게 해 주신 분도 어장군님이잖아요. 이젠 가카께서 안전하시겠죠?

로쟈 2011-10-28 11:34   좋아요 0 | URL
꼼수인데, 보통 복잡한 꼽수는 아니더라구요. 나름대로 배려하는 거 같아요.^^;

봄날 2011-11-0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 왔네요..태클의 쓰나미를 보고 있었는데, 여기서 닥정을 보다니 너무 반가워요 ㅋㅋ

로쟈 2011-11-04 08:57   좋아요 0 | URL
닥정이 뭔가 했네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는 강연차 광주에 내려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그런 일정이야 일기에나 적으면 될 일인데, 뜻밖에도 기사화까지 됐다. 이왕 들통난 김에 '기념사진'을 대신하여 스크랩해놓는다(사진만 크게 올라오기도 했다). 내용은 특별히 새로운 건 없었고, 기사도 강연자료를 조금 발췌해놓은 것이다.(조선대 늬우스는 http://blog.naver.com/chosununi/140142904477 참조.) 

 

머니투데이(11. 10. 26) "독서력은 민주사회 토대이자 버팀목”

‘로쟈’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인터넷 서평꾼 이현우씨가 조선대에서 강연을 가졌다. 이 씨는 25일 오후 4시 서석홀 4층 대강당에서 열린 ‘문화초대석’ 강사로 초청돼 ‘책을 읽을 자유’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연재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그는 “독서는 ‘나’를 ‘우리’로 확장시켜주면서, 사회역사적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며 “기본적인 독서력은 민주사회의 기본 토대이자 버팀목이다”고 강조했다.

이 씨는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이 ‘한 달에 한 권’ 정도”라며 “독서량과 독서문화는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다수의 책을 읽는 일은 독서가 습관이자 문화일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독서 습관과 문화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책을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읽는다”고 했다. ‘우리시대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에 대해 이 씨는 “사고력과 판단력의 원천이라 할 지식과 교양은 책과 독서를 통해서 얻어진다”며 “하루에 30분씩만 책을 읽어도 200~300쪽짜리 책을 일주일에 한 권은 너끈히 읽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독서목록보다는 독서력, 책을 읽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면서 “책과 많은 연애를 하는 사람, 그런 연애를 통해서 가끔 혹은 자주 새로운 책을 낳기도 하는 사람이 곧 독서의 달인이다”고 말했다. 

11. 10. 26.  

P.S. 광주의 조선대에는 어제 처음 가본 것이었는데, 교정도 크고 무등산 자락의 전망과 '백악관'이라 불린다는 흰색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나희덕, 이장욱 두 시인 교수와 담소를 나누고 더불어 두 분의 신간 <더 레터>(좋은생각, 2011)와 <생년월일>(창비, 2011)도 선물로 받았다. 밀린 원고들 외에도 강의와 강연으로 정신없이 한주 한주가 지나가고 있는데, 덧붙이자면 오늘도 일반강연이 있다. <애도와 우울증>(그린비, 2011)에 대한 강연을 종로도서관에서 저녁 7시부터 갖는다. 혹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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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린고양이 2011-10-2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과 비슷한 외모를 상상했는데... 음음, 더 멋지십니다.

로쟈 2011-10-26 15:51   좋아요 0 | URL
제가 흉내낼 수 없어서 그렇지 멋있는 거야 지젝이 멋있죠.^^;

2011-10-26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6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6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7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8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31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1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7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8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10-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광주에 오셨었군요. 미리 알았으면 로쟈님 뵈러 갔을텐데....아쉽네요.
조대의 하얀건물은 백악관이 아니라 '악마의 성'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지요.^^
이장욱 시인은 지난 8월에 유홍준 선생님과 완도 보길도 답사길에 함께 해서, 해남에서 광주까지 고속버스도 같이 타고 왔는데...^^

로쟈 2011-10-28 11:32   좋아요 0 | URL
네 암행모드로 다녀오긴 했는데, 기사가 떠버렸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10-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광주에 오셨군요.조선대 외에 어디어디를 들르셨나요? 유명한 광주의 음식도 맛보셨는지요?

로쟈 2011-10-29 18:00   좋아요 0 | URL
당일치기이기 때문에 들를 여유는 없고요, 점심엔 한정식, 저녁엔 이탈리아식 뷔페를 맛봤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29 20:48   좋아요 0 | URL
다음번엔 넉넉히 시간 잡아서 부근의 담양이나 화순 쪽도 들러보세요.

가명 2020-10-31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예전에 강의들을 때부터 느낀건데 인상이 너무 날카로우세요 웃으면 괜찮으신데 자주 웃으세요
 

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28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요하네스 발라허의 <경제학이 깔고 앉은 행복>(대림북스, 2011)을 거리로 삼았다. 독어 원제는 '더 가치 있는 행복'이란 뜻인 듯싶다. '윤리경제학'에 대응하여 '경제윤리학'의 자리와 의의에 대해서 짚어주는 책으로 읽었다.  

  

매경이코노미(11. 10. 26) 소득이 더 많으면 더 행복하다고?

한 가지 실험에서 시작해보자. 당신이라면 다음 두 가지 세계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두 세계가 가격과 구매력에서 조건은 동일하다. 첫 번째 세계에서 당신의 연간 소득은 5000만원인 반면 사회 전체의 연평균 소득은 2500만원이다. 두 번째 세계에서 당신의 연간 소득은 1억원인 반면에, 사회 전체의 연평균 소득은 2억원이다. 독일의 경제윤리학자 요하네스 발라허가 <경제학이 깔고 앉은 행복>의 머리말에서 들고 있는 선택지에다 단위만 유로에서 원화로 바꿨다. 절대소득은 두 번째가 더 높지만, 평균소득과 비교한 상대소득은 첫 번째가 더 높다는 게 핵심적인 차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실험에서 피설문자의 절반 가까이가 첫 번째 세계를 선택했다고 한다. 절대소득보다는 자신의 소득이 차지하는 상대적인 위치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또 한 가지 실험이 있다. 역시 두 가지 세계가 있다. 첫 번째 세계에서는 당신에게 2주의 연차휴가가 주어지는데 다른 사람들의 평균 연차휴가는 1주일이다. 두 번째 세계에서 당신에 4주의 연차휴가가 주어지는데 다른 사람들의 평균은 8주다. 이번에도 두 번째 세계가 절대 휴가일은 더 많지만 평균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다. 이 실험에서는 피실험자의 절대 다수가 두 번째 세계를 선택했다. 휴가일이 다른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되더라도 첫 번째 세계보다는 더 많은 여가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정리하면 소득의 경우에는 남들과의 비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여가에서는 상대적 비교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저자는 이 두 실험결과를 통해서 ‘더 높은 소득은 곧 더 큰 행복’이라는 일반적 공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행복에 관한 그런 ‘옛날이야기’에서 벗어나는 개인의 행복이나 사회 전체의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게 그의 제안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경제와 윤리의 결합이다. 경제와 윤리를 서로 별개 영역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옛날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더 오래된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경제(economy)라는 말은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에서 온 것이며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가계를 꾸려나가는 일을 뜻했다. 그런데 이 가계경영으로서의 경제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엔 더 높은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것은 시민의 성공적인 삶, 흔히 행복이라 불리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를 위한 수단이었다.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또한 윤리철학자로서 <도덕감정론>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까 경제와 윤리는 애초에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런 분리가 비롯된 것은 사상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칸트부터이다. 칸트는 행복을 윤리학의 핵심 범주로 다루지 않았다.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터이므로 행복에 대한 보편적 진술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러한 판단을 계승해 경제학의 신고전학파는 행복이나 이익에 대한 개개인의 생각을 비교하는 게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린다. 행복 대신 이윤만이 경제학의 관심사가 된 배경이자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탄생하게 된 맥락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이 가진 수단을 이용하여 최대의 이익을 창출해내는 ‘경제적 인간’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행복 추구’는 ‘이익의 극대화’와는 별개의 문제로 간주됐다. 아니 소득이 올라가면 행복은 당연히 보장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소득과 행복 사이의 긍정적 상관성은 1만 달러 정도가 한계치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서는 나라들의 경우엔 소득이 늘어나도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소득의 한계효용 체감’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는 소득보다도 건강과 교육수준, 민주적 참정권, 안정된 직업과 사회적 기회 보장, 투명성 등이 삶에 대한 만족도와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변화된 상황에서도 국민소득만을 행복의 지표로 내세운다면 좀 멋쩍은 일이다

1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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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내 2011-10-18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한하게도 이번에 주류 시장주의 경제학계에서 노벨상이 나왔더군요.....
한 쪽에서는 反 월가 시위하고 있는데요...^^;

로쟈 2011-10-19 22:31   좋아요 0 | URL
비주류 학자가 수상했다면 그게 희한한 일이겠죠.^^;

헌내 2011-10-21 09:39   좋아요 0 | URL
엇, 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는 나름(?) 비주류 아닐까요? ㅋ~

로쟈 2011-10-22 09:08   좋아요 0 | URL
'나름'으론 그럴 수 있겠죠.^^
 
러더십의 진화심리학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399호)에 실린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에 다룬 주제는 리더십, 아니 팔로워십이다. 계기가 된 건 <빅맨>이었는데, 리더십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접근이 눈길을 끄는 책이다.

책S&(11년 10월호) 팔로워십의 형성

송사릿과에 속하는 열대어 거피는 번식력이 좋아서 생물학 실험에 널리 쓰이는 관상어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구자들은 한 실험에서 수조 반대편 끝에 놓은 먹이를 향해 얼마나 빨리 나아가느냐를 기준으로 이들을 대담형과 소심형으로 나누었다. 그러고는 대담한 거피 한 마리와 소심한 거피 한 마리를 수조에 한꺼번에 넣었다. 결과는 항상 대담한 거피가 먹이 사냥에 앞장서고 소심한 거피가 그 뒤를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담한 거피와 소심한 거피 짝은 소심한 거피 두 마리나 대담한 거피 두 마리가 짝이 되었을 때보다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했다.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거피 세계에서 리더와 팔로워가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 동시에 그러한 행동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적응 행동’이라는 점이다.  

마크 판 퓌흐트와 안자나 아후자가 지은 <빅맨>(웅진지식하우스, 2011)은 리더십의 탄생과 진화를 그러한 적응 행동의 관점에서 다룬다. “리더십과 팔로워십이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생겨났고 그 토대가 인간이 진화하기 훨씬 전부터 갖춰졌다”는 생각에서 ‘진화 리더십 이론’을 제창한다. 즉 진화 과정을 통해 인간 사회에 리더와 팔로워가 자리 잡았고, 그러한 행동의 원형이 우리 두뇌에 ‘내장’되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키 큰 정치인은 존중하고 키 작은 정치인은 얕보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남성 경영인은 포부가 큰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여성 CEO는 폄훼하는 것일까? 저자들은 약 200만년 동안 아프리카 사바나에서의 오랜 진화 기간에 형성된 우리의 ‘원시적 뇌’가 현재의 환경과 잘 맞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로 본다. 이른바 ‘부조화 가설’이다. 이러한 부조화로 인한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리더십과 팔로워십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이해는 필수적이다. 

인간은 본성상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팔로워십은 일종의 디폴트 세팅이다. 리더가 소수인 반면에 팔로워는 다수인 것은 비범한 소수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런 본성이 생겨난 것은 진화적 이익 덕분이다. 팔로워십은 집단을 결속시키고,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었으며 리더를 따름으로써 리더 역할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리더를 따르는 일이 유리하지만은 않다. ‘나쁜 리더’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65년부터 1997년까지 아프리카 자이르를 통치했던 모부투는 통치 기간 동안 대략 50억 달러에 달하는 국가 소득을 착복했다. 정치적 라이벌들은 탄압하거나 회유하고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그는 자신을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로 지나가는 발자취마다 불을 남기며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며 전진하는 전능한 전사’라는 의미로 ‘모부투 세세 세코 은쿠쿠 은벤두 와 자 방가’로 개명하기까지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런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리더에 맞서기 위한 전략도 진화시켜왔다는 점이다. ‘권력자에게 맞서기 위한 전략’으로 저자들은 험담과 소문, 공론, 풍자, 불복종, 그리고 암살 등을 든다. 인간의 본성이 형성된 장기간 아프리카 사바나의 수렵채집사회에서 평등주의와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체화되었기에 부당한 통치에 대해 분노하는 성향도 우리의 진화적 본성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리더십을 강의하는 바버라 켈러먼도 팔로워십에 주목한다. <팔로워십>(더난출판, 2011)에서 저자는 비효율적이거나 비도덕적인 리더를 나쁜 리더로 규정한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의 리더가 나쁜 리더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바로잡는 일은 팔로워의 몫이다. 우리가 리더뿐 아니라 팔로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팔로워의 유형을 방관자, 참여자, 운동가, 완고주의자로 구분하면서, 켈러먼은 팔로워도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공공부문에서 팔로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저자는 미국 부시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예로 든다. 그에 대한 지지율은 아주 낮았지만 그럼에도 이라크 침략에 대한 그의 결정을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적었다. 다른 선택이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2004년 대선에서 미국민은 부시 대신에 다른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도 있었다. “좋은 팔로워가 되려면 능동적으로 선호하는 리더를 후원해야 하며, 동시에 능동적으로 후원하지 않는 리더와 대립해야 한다.”고 저자는 충고한다. 요컨대 좋은 리더와 나쁜 리더가 있는 것처럼 좋은 팔로워와 나쁜 팔로워가 있다. 좋은 리더를 선택하고 나쁜 리더를 제재하는 것이 좋은 팔로워의 역할이다. 팔로워의 힘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것이 켈러먼의 주장이다.  

팔로워의 역할과 영향력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동양적 전통에서 팔로워십에 대해 이해를 정리해주는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후웨이홍과 왕따하이가 공저한 <노자처럼 이끌고 공자처럼 행하라>(한스미디어, 2011)가 중국식 리더십 교본으로 소개돼 있다. 중국에서도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게 되면 팔로우십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게 될는지 모른다. 

1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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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내 2011-10-1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이제야 시험이 끝났습니다...

로쟈 2011-10-13 22:42   좋아요 0 | URL
ㅎㅎ

2011-10-12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3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학신문'에서 '독서에세이'를 청탁받고 쓴 글을 옮겨놓는다. 강의차 최근에 조금 들여다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서 썼다. 지면사정으로 분량이 2매쯤 더 늘어났음에도 '서론' 정도에 머물렀다(루카치에 대해서, 혹은 루카치와 벤야민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길게 써볼 생각이다). 

  

대학신문(11. 10. 10)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루카치, 또는 유토피아에 대한 꿈

『대학신문』에서 원고청탁을 받는다고 반드시 대학시절을 떠올릴 필요는 없을 텐데, 연상효과 탓인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생각났다. 내게 이 책은 80년대 후반 대학가의 풍경과 분리되지 않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학부시절에 읽은 가장 난해한 책 두 권이 『소설의 이론』과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였다. 두 책의 요지에 대해서는 ‘강의’까지 할 수 있게 됐지만, 직접 읽어나가는 건 별개의 문제다. 어느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전망이 어떻다는 걸 다 알더라도 그 정상까지 올라가는 건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읽기’는 ‘인식’과는 종류가 다르며 어쩌면 용도까지 다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읽기는 경험이니까.

가장 난해했던 책이란 인상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읽어보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생각만큼 빨리 재회하게 되지는 않았다. 『소설의 이론』에 한정하자면 학부시절에 읽은 것과는 다른 번역본이 그간에 새로 나왔고, 그 또한 바로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뒀지만 진득하게 손에 들 기회는 내지 못했다. 아마도 단순한 책 한 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어서가 아닌가도 싶다. 가볍게 손에 들기에는 너무 무겁고 묵직하달까? 거창하게 말하면 『소설의 이론』은 그냥 ‘이론서’가 아니라 한 세대의 ‘청춘’이고 ‘역사’다. 하다못해 내 경우만 해도 그렇다. 언제나 플래시백을 동반하는 청춘의 역사.

남학생의 경우 대학시절은 학부생시절과 복학생시절로 나뉜다고 억지를 부린다면, 내게 학부시절은 2학년까지였다. 5공화국 시절의 대학 2년을 용케 버티며 다니다가 3학년에 올라와서는 한달만 강의실에 고개를 내밀다 군대에 갔기 때문이다. 끌려간 건 아니고 자발적으로 갔다. 그게 89년 봄이었다. 그리고 복학한 게 91년. 보통은 동기들이 아닌 후배들과 강의를 듣게 되니 복학생에게 대학생활은 또 다른 풍경이고 또 다른 생활이다. 하지만 내 또래 학번에겐 ‘또 다른 역사’이기도 했다. 이 경우는 스케일도 커서 ‘세계사’다.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연이어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해체됐다. 곳곳에서 레닌동상이 철거되고 끝내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세상이, 아니 역사가 일상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바뀌어갔다. 어쩌면 사회적 격동이란 게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오히려 예외에 속했는지도 모른다. ‘기적적인 일상’이란 것 말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사이 꽃잎에 이슬이 맺히는 기적!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동기들과 소련의 ‘젊은’ 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의 희망처럼 보였고 더 강력해진 사회주의가 곧 우리 눈앞에 등장할 것처럼 여겨졌다. 착각이었다.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대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소련이란 나라는 ‘적성국가’였다. 동창회 자리에 나가 전공이 ‘소련’이라고 결연하게 얘기하면 박수를 받던 때였다. 하지만 학부를 졸업하기도 전에 소련이란 나라는 말 그대로 과거, ‘역사적 과거’가 됐다. 자칭 스탈린주의자였던 이들조차도 소련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향수의 대상이거나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고는 다들 곧 무관심한 표정이 됐다. “역사는 끝났다!” 모두 심드렁한 표정으로 카페에 앉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그렇게 가을이 저물어갔다.

돌이켜보니 그런 분위기였다. 그런 마당이었으니 학부시절 강의실과 과방에서 명예롭게 울려 퍼지던 루카치란 이름이 퇴물의 대명사가 된 건 당연하다. 그는 교조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이었다. 하기야 “최악의 공산주의라 하더라도 최상의 자본주의보다 더 낫다”고 단언한 골수 공산주의자가 루카치 아니던가.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에서는 세계의 본질이 시간과 함께 주어진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참으로 ‘소설적’이고, 진리에는 소설적 계기가 있는 듯하다. 역사의 종말과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포장되던 신자유주의의 치세도 지난 2001년 9.11 테러와 함께 종언을 고했다. 한 철학자의 표현을 빌면 ‘현실 사회주의의 종언’에 뒤이은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종언’이다. 죽었다던 역사는 다시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건재를 확인시켰다. “나 아직 안 끝났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점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그렇게 다시 길을 묻는 시대에 루카치를 손에 든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고 그는 『소설의 이론』 서두에 적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판단이 전제돼 있다. 즉 지금은 복된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유토피아를 우리가 되찾아야 한다면? 다시 회복해야 한다면? 어쩌면 인류의 위대한 망상 혹은 오랜 망집일지도 모르는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루카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복창하며 ‘황금시대’에 대한 열망이라고 불렀다. ‘진정하고 조화로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하고 조화로운 관계’가 가능한 시대다. 혹은 문화와 문명이 인간의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는 상태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꿈을 포기할 수 없다고 루카치는 말했다.

애초에 『소설의 이론』 자체가 도스토예프스키론의 서론격으로 쓰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본격적인 도스토예프스키론은 쓰이지 않았다. 그건 제1차 세계대전에 직면해 무엇이 파국에 직면한 서구 문명에서 우리를 구해줄 것인가를 고민하던 루카치가 도스토예프스키적 세계에 대한 전망으로 나아가기 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근대 러시아문학 전체는 1917년 혁명에 수렴된다고까지 그는 적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자리는 ‘1917년 이전의 루카치’고, 우리가 다시 읽는 루카치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루카치’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지지와 옹호도 지금에 와서 다시 읽으면, “최상의 자본주의보다 못한 공산주의라면 공산주의도 아니다”란 뜻인가도 싶다. 현실사회주의를 ‘현실과 타협한 사회주의’란 의미로 이해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직 우리에게 꿈이 있는가.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사무엘 베게트)란 경구를 실천할 용기가 있는가. 그런 생각과 함께 『소설의 이론』을 다시 펼친다. 

11.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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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10-0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소설의 이론>을 읽어본 건 99년이니까 로쟈님하고 대략 10년정도 차이가 나는 셈이네요.^^; 추억을 되새기는 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와 계급의식>, <청년헤겔>도 구비는 해 놓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있네요. 로쟈님의 루카치 / 벤야민론도 기대하겠습니다. 중간고사 바쁘시죠?^^

로쟈 2011-10-09 23:49   좋아요 0 | URL
학부시절이라고 확장해놓긴 했는데, 대학1-2학년때 읽은 듯해요. 중간고사로 제가 바쁠 일은 전혀 없는데요.^^

빵가게재습격 2011-10-10 09:12   좋아요 0 | URL
아, 네.^^ 근데 시험 안 치시나요? 문제내시고, 채점...?^^;

로쟈 2011-10-11 11:04   좋아요 0 | URL
문제내는 건 너무 간단하구요, 채점은 기말에 몰아서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0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카치의 저작은 어렵지만 그의 생애가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두툼한 전기가 한권 번역되면 좋겠습니다.리히트하임이 쓴 전기는 너무 얇아서...루카치가 지지했던 임레 나지를 다룬 영화가 있었는데 그의 최후를 보니까 그럭저럭 루카치는 임레 나지보단 낫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로쟈 2011-10-09 23:51   좋아요 0 | URL
자전적 기록이 <맑스로 가는 길>로 나왔던 적은 있습니다. 두툼한 평전은 저도 아쉽습니다...

olikim 2011-10-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글 잘 읽었어요..안 그래도 오늘 수업 준비 때문에 벤야민의 The Storyteller를 읽다가 루카츠가 나오길래 찾아보려던 참이였는데 마침 선생님이 루카츠 관련 글을 올렸네요^^ 아 전 올가에요~ 선생님 블로그에 종종 들리곤 했는데 흔적은 처음 남긴 거 같아요..

로쟈 2011-10-11 11:00   좋아요 0 | URL
강의준비? 반가워, 오랜만이네.^^

미국사람 2011-10-1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영역본을 구한 뒤 복사를 떠서 읽으려했다가 두페이지 쯤 읽고 도저히 못 읽겠어서 그만두었는데 그리고 십몇년 지난 뒤 영역 불역을 모두 다 구했는데 읽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

그 이후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책장에 그냥 있읍니다. 영어 좀 한다고 읽을 수 있는 책은 전혀 아닌 듯.. 죽기 전에 읽어보고 죽을지 모르겠네요.

로쟈 2011-10-11 11:01   좋아요 0 | URL
네, 독일 정신과학 전통에 익숙치 않으면 읽기 어려운 책으로 돼 있어요...

msjpolitics 2011-10-13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부때 루카치 책만 들었다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 교수님중에 한 분도 쏘련의 농업정책쪽으로 박사논문을 끝내자마자 소동구가 무너져서 참 난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네요.

로쟈 2011-10-13 22:42   좋아요 0 | URL
논문 주제를 바꾼 사람들도 꽤 됐었지요. 그때로선 세상이 바뀌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