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 기획회의(30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마감이 지나 편집자의 애를 태우며 보낸 원고인데 당초 쓰려고 했던 책이 너무 두꺼워 다 읽지 못하는 바람에 급하게 따로 읽고 쓴 글이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동녘, 2011)과 <한국학의 즐거움>(휴머니스트, 2011)을 나란히 읽고서 백석 시 읽기에 관해서만 적었다.   

기획회의(11. 11. 05) 흰 당나귀와 나타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동녘)을 읽었다. 각각 14인의 시인과 철학자를 짝지어놓고 시를 통해 철학을, 철학을 통해 시를 읽는 책이다. 전작인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동녘)을 먼저 읽었기에 이어서 읽었다고 하면 독서의 이유로 자연스럽겠지만, 사실은 예기치 않은 독서였다. 각 분야의 전문가 22인의 글 모음집 <한국학의 즐거움>(휴머니스트)에 실린 강신주의 ‘한국의 사랑’을 읽은 것이 계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답하여 그는 “한국인의 내면을 이해하려면 한국인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란 생각에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꺼낸다. 여인의 이름은 조선권번의 기생이었던 김영한(1916-1999). 사랑에 짝이 없을 수 없으니 그이가 사랑한 남자는 백기행(1912-1995).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였다. ‘김영한과 백기행’이라고 하면 알아보기 힘들겠다. 백기행은 시인 백석(白石)의 본명이고, 그가 김영한에게 붙여준 이름이 ‘자야(子夜)’이다. 해서 강신주가 들려주려는 건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이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28)를 읽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시 말이다. 백석과 자야의 사례로 ‘한국의 사랑’을 읽어내는 저자를 좇아서 백석의 시 읽기를 사례로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 대한 리뷰를 대신해 보기로 한다.   

 

일단 강신주는 김자야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근거로 시의 ‘나타샤’가 자야를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관계를 좀 특이하게 푼다. 시의 마지막 연을 읽어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특이하다’고 한 건 그가 이 시에서 화자 백석의 욕망 대상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석에게 자야는 분열된 존재로 보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타샤가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글쓰기 재주까지 갖춘 지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면, 흰 당나귀는 성적 매력을 풍기는 관능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물론 정신분석적 해석이다. 백석의 의식 속에서 자야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다면 정작 분열된 건 백석의 의식 자체다. “결국 백석은 있는 그대로의 자야가 아니라 상상 속의 자야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백석은 자야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사랑의 대상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다. 나타샤가 ‘지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면 흰 당나귀는 ‘관능적인 여성’을 상징한다. 흔한 경우로 지적인 여성과 관능적인 여성이 각기 다른 두 여성이라면 백석의 사랑은 분열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면모가 자야라는 동일한 여성의 속성이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럼에도 강신주는 “이렇게 분열된 의식 속에서 온전한 사랑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고 적는다. 우리는 지적이거나 관능적인 여성, 어느 한쪽만을 사랑하는 건 온전한 사랑이지만 지적이면서 관능적인 여성을 사랑하는 건 온전하기 어려운 사랑인가. 하는 의문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자야’와 ‘상상 속의 자야’는 무엇에 대응하는 것일까. 지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인 여성이 ‘있는 그대로의 자야’이고, 그것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는 것이 ‘상상 속의 자야’인가. 이것은 특이하면서 좀 예외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다.  

통찰이 없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관능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백석에게 있어 자야는 나타샤의 측면보다 기생의 측면으로 더 강하게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강신주는 적는다. 어떤 관능성인가. 이에 대한 설명은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 실린 백석 편에서 보충적으로 읽을 수 있다. 백석이 감각에 얼마나 민감했던 시인이었던가를 얘기하면서 저자는 특히 이 시의 의성어들에 주목한다. ‘푹푹’과 ‘응앙응앙’ 같은 의성어이다. “‘푹푹’은 눈이 내리는 소리인 동시에 성교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이고, ‘응앙응앙’도 하얀 눈을 만지듯이 나타샤를 애무하는 백석의 손길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의성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의 화자가 혹은 백석이 푹푹 나리는 밤눈 속에서 그런 연상을 떠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시의 지배적 분위기는 관능적 에로티시즘보다는 ‘쓸쓸함’에 더 가깝다. 첫 연에서 ‘가난한 나’와 ‘아름다운 나타샤’의 사랑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라는 걸 암시한 다음에 백석은 둘째 연에서 이렇게 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시의 나머지 대목은 그렇게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는 화자의 취기가 불러낸 환영이다. 만약 나타샤와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 공간은 ‘여기’가 아니라 ‘어데서’이다. 그러니 그 사랑의 시제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저자가 이 시의 성격을 “스물일곱 젊은 시인이 겪고 있는 사랑의 열병이 차가운 눈발과 대조되어 낙인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애절한 시”라고 규정한 대로다. 하지만 거기서도 ‘푹푹’ 눈이 내리는 소리가 성교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이기도 하다면 ‘사랑의 열병’과 ‘차가운 눈발’의 대립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애절함과 쓸쓸함만이 묻어나는 시는 또 아니다. 그것은 ‘나는 나타샤를 사랑한다’는 핵심문형이 어떻게 변주돼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1연에서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라고 ‘나’와 ‘나타샤’가 행으로 분리돼 있다. 2연에서는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나’라는 주어가 빠져 있다. 3연에서는 “나타샤와 나는”이 주어로 붙어 있지만 ‘사랑’이 빠져 있다. 4연에 와서야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로 온전한 문형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5연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표현을 통해 환상을 통해서일망정 두 사람의 사랑은 ‘완성’된다. 

‘철학적 시읽기’는 보통 시를 통째로 파악하기에 이러한 ‘내러티브’에는 덜 주목한다. 대신에 저자는 백석의 시에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란 오감으로 세계를 느꼈던 시인의 ‘감각의 풍성함’을 읽어내며 이것을 일본의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과 연관 짓는다. 시와 철학을 동시에 읽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지적인 여성(나타샤)과 관능적인 여성(흰 당나귀)을 동시에 사랑하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11.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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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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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17: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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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인문학의 무덤인가

이번주부터 격주로 주간경향에 북리뷰를 싣는다. 첫번째 책으로 고른 것은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 이미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서평에서는 나대로 중요하다 싶은 대목을 간추렸다.    

주간경향(11. 11. 15)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 

“인문학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다!” 미국의 저명한 인문학자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미래>에서 던지는 메시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예언이나 확신이 아니라 희망이다. 이 희망이 인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인문학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진지한 자기반성을 통해서 제기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물음은 자연스레 인문학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포함한다. 문제의 발단은 한 세대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인문학은 가장 명망 있는 학문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은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원자탄을 발명하고 달 착륙 우주선까지 쏘아올린 자연과학이 급부상하여 학문의 패권을 차지한다. 가장 높은 명성과 경제적 후원을 누리게 됐다는 뜻이다. 자연과학에 뒤이어 사회과학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에 얹혀 갔고, 일부 인문학자들조차도 ‘인문과학자’이고 싶어 했다. 이렇듯 인문학을 둘러싼 학문 지형의 변화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경우 학문의 판도 변화와 함께 인문학에 들이닥친 또 다른 문제는 1970년께부터 갑자기 인문학 박사 학위자들이 빠지게 된 구직난이다. 카우프만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지목하는데, 첫째는 베이비붐 시대의 출산율이 주춤하면서 대학의 성장 또한 정체돼 버린 것이고, 둘째는 교수직이 1970년대를 기점으로 과거 25년간 젊은 사람들로 채워짐으로써 퇴임으로 인한 공석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요컨대 인구 문제와 인력 수급 문제가 ‘인문학의 위기’를 낳았다.  

대학의 팽창과 함께 미국에서는 1950년에서 1970년까지 약 2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인문학 대학원에 진학했고 이들은 학위를 채 끝내기도 전에 대학에서 자리를 제안받곤 했다. 교원에 대한 수요가 전례 없이 증가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인문학에 대한 가수요가 발생했다. 미국에서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중반까지도 지속되었고 결국은 철학분야에서만 2000여 명의 박사학위자가 교직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예술과 인문학 분야의 박사학위자 80% 이상이 자기 전공분야에서 직업을 찾을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한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고 덧붙이는데 사실 더듬어보면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경우는 미국보다 딱 한 세대 뒤인 1980년에서 2000년까지 대학이 우후죽순으로 증가했고 대학 진학율이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섰다. 인문학 교원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대학원 진학자도 증가했고 상당수는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에 교원으로 임용됐다. 하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출산율 저하와 함께 대학의 성장이 한계에 도달하고 인문학 전공자는 수요에 비해 초과 배출됐다. 카우프만의 책이 처음 출간된 게 1977년이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에도 적실성을 갖는다면 이런 공통적인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 이렇다고 하면 해법은 무엇인가. 특이하게도 저자는 인문학자의 유형론에서 문제의 단초와 해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인문학자는 그 마음가짐(에토스)에 따라 통찰가형과 사변가형, 저널리스트형과 소크라테스형으로 나뉜다. 각각은 일장일단이 있으므로 문제는 어느 한 가지 유형으로 편중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학의 교수들은 점점 사변가가 되어갔고 한 시대의 신념과 도덕을 엄밀하게 따지면서 문제 삼는 소크라테스적 에토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소크라테스형의 실종은 매카시즘의 광풍과도 관련이 있는데, 당시에는 일반 여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각자의 좁은 전공분야만 파는 사변가 역할에 안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대학의 인문학 연구마저도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숲’이 아닌 ‘잎사귀’ 연구에 치중하고 있는 게 전공논문 편수로 교수의 업적을 평가하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것이 “미국의 낙선한 부통령의 비서의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카우프만은 꼬집는다. 사변가들만이 득실거린다면 인문학의 미래는 없다. 인문학이 인류의 미래가 되기 위해선 인문학자들의 마음가짐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는 게 카우프만의 주장이다.  

11. 11. 07. 

P.S. 짐작엔 분량상 지면에서는 세 문장이 빠졌는데, 그중 하나는 "대학원 진학자들 가운데 “인문학이 의학이나 다른 유용한 전문지식들과 달리 별 쓸모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이다. '인문학 위기'가 실상은 '인문학자의 위기'라고 할 때 음미해볼 대목이다. 참고로 카우프만은 대학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것도 사변가형만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질타한다. 그러한 현실이 바뀔 수 있을까. 미국 대학은 과연 30년 전과는 사정이 달라졌는가. 선뜻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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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8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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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0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0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우프만은 아렌트가 학자가 아니고 저널리스트라며 평가절하하는데 로쟈 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로쟈 2011-11-09 07:48   좋아요 0 | URL
아렌트는 원래 저널리스트활동을 했으니까요. 한데, 카우프만의 분류대로라면 최소한 '통찰가'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좀 인색한 평가에요. 요즘에 아렌트 전공자는 있어도 카우프만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게 나름의 역사적 평가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09 16:12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의 나치전력 때문에 그와 사귄 아렌트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 정서가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물론 이런 식의 평가가 올바르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로쟈 2011-11-11 09:32   좋아요 0 | URL
비판의 논거가 생각보다 자세하지 않아서 '사감'이 얹힌 게 아닐까 싶은 거죠. 하이데거의 전집이 나오는 거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하고...

노이에자이트 2011-11-11 16:11   좋아요 0 | URL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굉장한 찬반논쟁을 일으켰고...아마 이런 일 때문에 카우프만은 아렌트가 센세이셔날한 것을 노리는 사람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달의 일정 가운데 하나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로쟈의 인문학 여행: 정치철학편' 강의다. 당초 7일로 예정돼 있었지만 두 주 순연돼 11월 21일부터 12월 19일까지 5주간 매주 월요일 저녁에 진행된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7&tolclass=&searchword=&subj=F91060&gryear=2011&subjseq=0001&p_selmenu=01 참조). 강의의 취지와 개요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정치, 민주주의, 국가, 정의 등 다섯 가지 소주제에 맞춰 최신서 중심으로 함께 읽을 책들을 골랐다. '진보적이되 정치적이어야 하고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박상훈 박사의 <정치의 발견>부터 그 누구보다 왕성한 연구 활동과 저술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현상을 분석하고 전망해온 최장집 교수의 <민중에서 시민으로>, 한국 사회에 '정의'라는 화두를 힘껏 내던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등을 함께 읽게 된다. 우리 사회의 정치 현상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생각들을 다질 수 있도록, 정치와 관련된 다양한 개념들을 정리하고, 제시된 책의 중심 생각과 사유들을 함께 살핀다.

구체적인 강의 일정은 아래와 같다. 커리큘럼은 지난 여름에 제시한 것인데, 그사이에 새로 출간된 책들이 있어서 약간 더 보충될 예정이다. 가령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에 대한 이야기가 더 포함되는 식이다. 강의에서 참고할 책들은 말 그대로 '참고'할 책이다(예정된 참고문헌에 한권씩 더 얹었다). 

  

1. 11월 21일_ 정치란 무엇인가

- <정치의 발견>, 박상훈, 폴리테이아, 2011
-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홍태영 외, 난장, 2010 



2. 11월 28일_ 정치는 누가 하는가

- <민중에서 시민으로 -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최장집, 돌베개, 2009
- <국민, 인민, 시민>, 박명규, 소화, 2009 



3. 12월 5일_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지젝 외, 난장, 2010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고병권, 그린비, 2011
- <민주주의의 역설>, 샹탈 무페, 인간사랑, 2006 



4.  12월 12일_ 국가란 무엇인가

- <국가란 무엇인가>, 가야노 도시히토, 산눈, 2010
-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돌베개, 2011 



5. 12월 19일_ 정의란 무엇인가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김영사, 2010
- <마이클 샌델의 정의사회의 조건>, 고바야시 마사야, 황금물고기, 2011 

11.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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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11-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로쟈와 함께 읽는...'으로 총서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로쟈와 함께 읽는 러시아 문학>, <로쟈와 함께 읽는 김훈>, <로쟈와 함께 읽는 철학>...건강하시죠? 인사하러 살짝 들렀다가, 썰렁한 농담으로 마무리하며 도망갑니다.^^

로쟈 2011-11-07 08:01   좋아요 0 | URL
<로쟈와 함께 읽는 김훈>만 빼고는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이번주 매경이코노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한겨레출판, 2011)을 읽고 내용을 간추려보았다. 제목에 답하자면, 인종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무관하다. 인종주의와 관련하여 나온 책 몇 권을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매경이코노미(11. 11. 09)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

‘중요하지만 대개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주제’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라는 저서에서 ‘인종주의’라고 답한다. 꺼려하는 이유야 물론 분명하다. 인종주의에 드리워진 어두운 현실과 야만적 역사 때문이다. 책의 부제는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라고 붙어 있지만, 사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인종주의가 가진 오래지 않은 역사, 오히려 ‘짧은’ 역사다.  

인종 구분만큼 오래되었을 듯싶지만 정작 ‘인종주의’란 말이 만들어진 것은 1930년대다. 독일 나치의 ‘유대인 청소’ 프로젝트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도입된 것이 인종주의다. 그렇다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종주의란 ‘인종주의의 전사(前史)’ 혹은 ‘인종주의 이전의 인종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종이란 말이 비록 인종주의보다는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쓰인 말은 아니다. 영어의 경우 ‘인종(race)’이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갖고 등장하는 건 16세기 중반부터라 한다. 16세기는 지리상 발견의 시대이고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화가 본격화되는 시대였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에게 신대륙 발견은 동시에 원주민과의 조우를 의미했다. 그들은 원주민에게도 인간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성을 갖고 있는 똑같은 인간이라면 기독교도로 개종시켜야 했고, 그렇지 않다면 노예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17세기 노예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아프리카인을 인간보다 모자란 존재로 보는 시각이 널리 퍼졌다. 그런 편견이 없었다면 아프리카의 흑인 2,000만 명을 악명 높은 노예 수송선에 싣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서양을 건너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철학자 칸트와 흄조차도 “어떤 사람이 피부색이 새카맣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19세기에 대두한 과학적 인종주의는 흑인종과 황인종이 열등하다는 걸 입증하려 애썼고, 여성과 하등 인종들이 백인 남성보다 추론 능력이 떨어진다고 간주했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빌미로 시민권을 제한하고 정치적 차별을 정당화했다.  

제국주의적 인종주의가 사회적 다윈주의와 결합하면서 나타난 것이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미국과 유럽을 휩쓴 우생학이다. 다윈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을 비롯한 우생학자들은 인류발전을 위해 ‘부적격자’의 출생은 낮추고 ‘적격자’의 수는 늘리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최악의 인종주의가 나치의 ‘유대인 청소’와 ‘최종해법’이다. “벼룩이 집에 살고 있다고 해서 가축이 되지 않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우리들 틈에 끼어 살고 있다 해도 그들이 우리에 속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한 괴벨스의 발언이 나치의 인종주의를 잘 대변해준다.  

물론 나치의 유대인 청소 프로젝트가 ‘과도한’ 것이긴 했지만 반(反)유대주의 역사는 뿌리 깊은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란 용어조차도 사실은 1870년대 후반에야 등장했다. 독일의 선동가 빌헬름 마르가 반유대연맹이란 단체를 만들고 유대인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면서 쓰기 시작한 게 기원이다.  

그러니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인종주의의 역사는 아주 짧다. 더불어 나치의 인종주의 과학이 시도한 인종주의의 정당화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 유전학에 따르면 인류가 서로 다른 유전자풀(gene pool)을 갖고 있는 인구 집단들로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유전자풀의 패턴이 다르고 표현형질에서 차이가 난다고 해서 ‘분리된 인종’이란 개념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오늘날 인종에 관한 과학적 견해다.  

즉 인종이란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 따라서 인종의 차이를 전제로 인종 간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인종주의는 근거 없는 허울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구상의 많은 분쟁이 인종화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게 또한 현실이다. 우리는 ‘탈인종적인 미래’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일단은 인종주의에 대한 바로보기가 필요할 듯싶다.  

11. 11. 02. 

P.S. 인종주의에 대해 그다지 읽은 바가 없어서 서평감으로 고른 책이지만 생각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종주의 자체가 몹시도 혼란스러운 개념이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역자 또한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미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은 인종주의에 대해 뭔가 '명료한 규정'을 원하는 독자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라고 '옮긴이의 말'에 적었다. "얼핏 보기에도 인종적-계급적-성적-지리적 개념이 혼재해 있는 다층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게 인종주의다.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인종/인종주의를 짧게 소개하는 것이다 보니, 책이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295쪽) 좀 아쉬운 부분이다.  

   

번역과 관련해서도 한 대목은 교정하고 싶다. 아무리 무난하고 깔끔한 번역이라도 언제나 옥에 티는 감추고 있는 법이니 그걸 고쳐나가는 일이 역자나 편집자만의 몫은 아니다.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결론 '탈인종적인 미래를 생각한다'의 한 대목이다.  

탈민족적, 탈부족적, 탈인종적인 세계시민으로서의 생각 틀과 정체성, 그리고 이전보다 더 과거 회귀적인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21세기에도 작동하고 있다.(283쪽)  

원문은 "A long struggle between attempts to create post-ethnic, post-national, post-racial, cosmopolitan frameworks and identities and more backward-looking projects is going to be a continuing feature of life in the 21thcentury."(170쪽)이다. 역자가 '오랜 투쟁(long struggle)'이란 표현을 옮기지 않아서 메시지가 좀 약화됐다는 느낌이다.  

다시 옮기면, "탈민족적, 탈부족적, 탈인종적인 세계시민이라는 인식틀과 정체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와 이전보다 더 퇴행적인 인종주의적 프로젝트 사이의 오랜 투쟁이 21세기에도 계속 우리의 삶을 특징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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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sbinder 2011-11-1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블로그에서 소개되는 번역된 한 권의 책에 관한 글을 읽을 때면 '두 권의 책을 비교해가며 읽고 있을'로쟈님의 모습을 떠올리곤 해요. 그런 성실함을 본받고자 합니다^^

로쟈 2011-11-24 11:42   좋아요 0 | URL
^^
 

네이버의 '오늘의책'이 어떻게 선정되는지 모르겠지만 10월의 마지막날 '오늘의책'에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가 올라왔기에(http://book.naver.com/bookdb/today_book.nhn?bid=6365013) 기념으로 스크랩해놓는다(기억엔 <로쟈의 인문학 서재>도 언젠가 선정된 바 있다). 글쓴이는 드보르작님이다. 덧붙이자면, <책을 읽을 자유>가 올해의 우수교양도서 410종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고 오늘 발표됐다. 

 

오늘의책(11. 10. 31) 인터넷 서평꾼의 십년간 책읽기의 기록

필요하다. 책을 읽을 자유. 생계 때문일까. 이 땅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다 보면 언제나 책 읽을 시간이 반 토막이 난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다. 이럴 때 포기하지 않는 사람, 책 읽기를 직업으로 한다는 인터넷 서평 꾼 로쟈를 만나보자. 그에게 책은 밥이다. 맛이 있든 없든 먹어야 사는. 이 책은 지난 십 년간 책 읽기의 기록이다. 스타킹보다 책에 대한 페티쉬가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혹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인문학 이유식, 떠먹여 주기 식이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닥치는 대로 먹자, 이유식을 먹고 크면 언젠가 갈비도 뜯을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이 안에는 무려 150여 권이 넘는 책들이 등장한다.  

행복이란 무엇인 가에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까지 저자의 관심은 광범위하다. 먼저 현대 사회에 대한 접근으로 시작할까.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소비사회란 상품의 사용가치보다 과시하기 위한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더 대단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 ‘행복의 신화’는 ‘행복’을 계량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현대 사회가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을 가져왔다고 진단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 그리고 ‘낙오자’와 ‘성공한 자’밖에 없는 거대한 ‘수용소’(조르조 아감벤, [호모사케르])에서 살고 있다. 이 사회는 그 둘이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사회를 고민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까. 경제학의 전제는 사회가 개인으로 구성돼 있고, 그들은 최소한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는 개인에게 무의미하거나 걸림돌이 되고 만다. 개인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사회 또한 개인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거나 실현된 사회는 없다. 억압적 사회는 하나의 목소리만을 허용할 것이다. 그런 사회라면 정치는 필요 없을 것이다. 상탈무페([정치적인 것의 귀환], [민주주의의 역설])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적대가 아니라 합리성과 중립성을 가장한 ‘합의’이다.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제비뽑기, 즉 통치할 자격의 부재(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이다.  

아감벤([목적 없는 수단])의 진단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하고 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역에 노숙자들을 쫓아낸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 있었다. 아감벤이라면 이러한 현실 정치에 저항하기 위해 목적으로부터 해방된 삶 즉,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을 주장했을 것이다.  

이런 삶을 단순히 비정상적인 삶이라고 단죄할 수 있을까. '정상'과 '비정상', '미'와 '추'는 어떻게 나누어 지는가. 움베르트 에코([추의 역사], [미의 역사])에 따르면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추함은 제각각이어서 더 풍부하고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오똑한 코는 하나지만 뭉툭한 코, 넙적 코, 매부리코, 비뚤어진 코, 술주정뱅이의 코 등 한결 다채롭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전복)이다. 어쩌면 예술이 필요한 것일 수도. 우리에겐 뒤샹('샘')도 필요하고 마그리트('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도 필요하다.  

이 밖에도 예술, 문학, 한국 역사 등을 망라해 지은이의 비판적 안목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지면상의 제약이 있어 아쉽다. 여러모로 유용한 책이다. 어려운 책을 알기 쉽게 풀이해 놓아 대학생부터 누구나 읽을 수 있을 듯하다.  

1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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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0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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