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 실은 '문화와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제 안팎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마땅한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해 최악으로 보낸 지각원고다. 자기 글을 블로그에 게시하는 건에 대해서는 오늘 오전에 알라딘측에서 회신이 왔다.

저작권법을 조사해보니,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기고한 신문 기사의 경우, 별도의 신문사 허락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블로그에 전문을 올려도 괜찮다고 합니다.(원고료를 받는다고 해서, 그 저작권이 신문사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저희가 잘 모르고, 로쟈님이 직접 기고하신 글을 브라인드 처리하고 메일을 드린 것 같습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이 경우는 내가 갖고 있던 상식이 법과 상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하튼 그래서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에 대해서는 이 서재에 계속 공개해놓는다.

 

 

 

경향신문(12. 01. 20)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나라

 

새해를 맞아 조선사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을 다시 보자고 제안하는 계승범 교수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읽은 것이 계기다. 알다시피 1392년에 개국한 조선은 200년 뒤인 1592년 최대의 국난을 맞이한다. 임진왜란이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침입으로 시작된 전쟁이지만 아무런 대응태세도 갖추지 못한 조선의 문제는 무엇이었던가. 국사시간에 미처 배우지 못한, 혹시나 배웠더라도 지금은 다 잊은 조선의 군역제에 대해서 다시 배운다.

조선 초인 15세기만 하더라도 군역은 의무인 동시에 권리였다고 한다. 군역에 종사하는 장정들에게 국가에서 일정한 반대급부를 지급했기 때문이다. 일부 토지도 지급하고 보인(保人)도 붙여서 군역에 따른 경비를 지원했다. 이 때문에 군역의 의무를 지는 군호(軍戶)는 대개 양반이거나 경제력이 있는 상민들이었고, 경제력이 따르지 않는 상민은 보인으로만 편성됐다. 즉 아무나 군역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자격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군역은 권리는 줄고 의무만 느는 쪽으로 변질됐다. 의무만 있다 보니 자연스레 군역 기피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16세기 중반에는 15만 군호가 대부분 하층민으로만 채워졌다. 양반이나 상층 상민은 다 빠져나간 것이다. 그렇듯 군역이 문란해지니 국력이 취약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임진왜란 전 16세기 말에 이르면 군역 대상자의 총수가 4만7820명이고, 그중 정예병은 7920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의 관군밖에 없었으니 약 20만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부산에 상륙한 지 18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까지 치고 올라왔던 사실은 우리가 잘 아는 바다.

놀라운 것은 초유의 국난을 경험한 뒤에도 양반의 군역은 부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금 양반도 군복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선비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무엇이 문제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사족(士族)도 군역을 지고 노비는 농민으로 전환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지배층 선비들은 자기들의 특권(군역면제)과 재산(노비)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비록 7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조선의 국방은 개선된 게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거친 이후에 200년이 넘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청제국의 질서 속에 편입됐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후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조선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기까지는 불과 십수년이 걸렸을 뿐이다.

이러한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계승범 교수는 “선비가 건설한 조선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전혀 없는 나라였다”고 꼬집는다. 더불어 오늘날에도 한국 사회의 소위 ‘지도층’ 자제들의 병역면제 비율이 전체 평균보다 다섯 배나 높다는 통계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는다. 실상 출범 초부터 유난히 병역면제자가 많았던 이명박 정부가 임기 마지막 해에 접어들면서 각종 비리 게이트에 연루되고 있다.

그중 외교통상부와 총리실 직원들이 카메룬의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권을 등에 업은 씨앤케이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었다는 ‘다이아 게이트’는 현 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엘리트들의 참담한 도덕 수준을 다시금 직시하도록 해준다. ‘우리가 아는 정부는 없다’고 해야 할까.

권력을 가진 자들이 특권만을 고집하고 사익에만 열을 올리는 세태는 과연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0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임진년 한 해 동안 고민해볼 일이다.

 

12. 01. 20.

 

 

 

P.S. 계승범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는 조선사 전체를 다시 보는 신랄한 문제의식과 함께 유익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책이다('어쨌든'이란 말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게 옥에 티다). 그래서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푸른역사, 2009)와 <정지된 시간>(서강대출판부, 2011)도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와 같이 읽은 책은 김연수의 <조선 지식인의 위선>(앨피, 2011)이다. 사림의 등장 이후 조선 후기사에 대한 서술로 명쾌하다. 학계의 '주류적인' 시각이 궁금해서 읽고 있는 책은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의 <조선시대 당쟁사1,2>(아름다운날, 2007)이다. 이이화, 강만길, 이덕일의 책들도 좋은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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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6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내주에 연휴가 껴서 합본호로 나왔다. 다룬 책은 김용진의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개마고원, 2012).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이란 부제가 내용을 말해주며 이미 마이리스트로 만들어놓은 바 있다. 결코 행복한 독서경험은 아니었지만, '의무감'으로 읽은 책이다. 우리가 더 많이 알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저들 또한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주간경향(12. 01. 31) 위키리크스가 벗긴 대한민국의 알몸

 

“역사가에게는 꿈이고 외교관에게는 악몽이다.”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대한 영국 역사학자의 평이다. 2010년 4월 5일 미군 아파치 헬기가 아프간 민간인을 살상한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공개함으로써 시작된 위키리크스의 충격적인 폭로는 그해 가을 미국 국무부가 해외공관과 주고받은 비밀문서 공개를 통해 절정에 도달했다. 이 외교문서 전문 25만1287건이 2011년 9월 1일까지 모두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졌다. 특정기간에 생산된 미국 외교전문에 한정된 것이라도 거의 완벽한 정보 민주화를 이뤘다는 평가다. 위키리크스가 제공한 이 ‘정보 대홍수’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정보를 건질 수 있을까.


막상 공개는 됐지만 너무도 방대한 분량인지라 어떤 정보가 얼마만큼 공개돼 있는지 파악하는 데만도 전문가적 손길이 필요한데, KBS의 탐사보도팀장을 역임한 김용진 기자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개마고원, 2012)은 미국 외교전문에 나타난 대한민국의 실상과 치부를 고스란히 까발려주는 그 탐사 보고서다. 먼저 현황이다. 위키리크스 공개문서 가운데 ‘KOREA’라는 단어가 한번이라도 들어간 문서는 모두 1만4165건이고, 주한 미대사관의 전문은 주로 2006년부터 2011년 사이에 작성된 1980건이다. 미 국무부의 부처간 정보공유 네트워크에 올라온 문서였는지라 이 1980건에 1급비밀은 들어 있지 않지만 2급비밀 123건, 3급비밀 971건이 포함돼 있다.   


이미 일부내용은 국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촛불시위 당시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이 미국대사관측에 도움을 청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고 말한 대목이다. 미국 쪽의 시각은 어땠을까? 2008년 2월 당시 버시바우 대사가 방한을 앞둔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본능적으로 미국에 이끌리는 대통령과 행정부”란 표현이 등장한다. 다른 문서에서도 “청와대에 있는 친미 대통령”이란 문구처럼 ‘친미적인’이란 수식어가 여러 차례 나오며, 심지어는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이라고도 지칭된다. 저자의 검색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전 세계 미국 대사관에서 작성한 수십만 건의 외교전문에서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이라고 표현된 유일한 이가 이명박이다. 외교수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최고의 대우를 받은 셈인데, 물론 이런 호의적인 평가가 근거 없이 나온 것은 아니다. 2008년 때는 쇠고기 시장을 개방했고,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의 환대를 받고 와서는 한미FTA를 날치기로 강행 처리했다. 미국으로선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에 대한 ‘융숭한’ 대접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한국의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의 친미적 태도가 혹 우리의 국익을 고려한 의도적인 전략의 산물은 아닐까. 국민으로선 나라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한미동맹의 파트너인 미국의 시각과 판단은 냉정하다. MB에 대한 지지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보면서 2009년 11월 스티븐스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런 전문을 보냈다. “이 대통령은 본능적으로 미국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이슈에 대해서 미국을 지지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요구를 단순히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 한다.” 좀 특이한가? 미국대사관의 판단도 그런 듯하다. 2008년 SMA(한미방위비분담협정)에 앞서 미국 국방장관에게 보낸 정세보고서에서는 “우리는 미국의 이익에 너무 부응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을 정치적으로 겁내는 친미 정권을 상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정부가 미국 입장에 우호적이긴 하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내비치길 원하지 않으므로 그런 사정을 잘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협상 대표들이 협상장에서는 미국의 압력에 대해서 맞서는 듯한 포즈를 취하지만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쇼를 위한 것”이란 점을 미국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한미FTA 재협상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에도 한국 정부의 공식입장은 ‘재협상 불가’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인상만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게 한국 정부의 주문이었다. 이런 것이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이라면 악몽은 외교관들만의 것이 아니다.

12. 01. 18.

 

 

 

P.S. 위키리크스 관련서로 더 참고하기 위해 <투명성의 시대>(샘터사, 2011)와 <위키리크스, 비밀의 종말>(북폴리오, 2011)을 더 구입했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프랑스의 사르코지를 지칭하는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2012)이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책이 아닌가 싶다.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2007년 프랑스와 한국에 부자들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사르코지와 이명박. 두 사람은 후보시절 자국의 국민들에게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 거쳐 간 길로 국민들을 인도해 줄지 모른다는 기대감. 그들의 삶의 맥락이 지니는 유난스런 박진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박을 걸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약속 속에 주어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부자였던 극소수의 사람들이 더 큰 부자가 되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되어 간 것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와 이런 쪽으로라도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자부심을 가질 만한가?! 다시 똑같이 대선을 치르게 되는 올해 두 나라 국민의 선택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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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402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아마도 올해까지 연재하게 될 듯싶다. 이달의 주제는 '조선의 왕'이다. 보지는 못했지만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인기를 고려해서 고른 주제다.

 

 

 

책&(12년 1월호) 조선의 왕과 왕실

 

세종의 한글창제 과정을 다룬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안방극장에 열풍을 몰고 오면서 세종의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평가되니 남다른 주목을 받을 만하다. 그런 관심을 아예 ‘조선의 왕’으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물론 TV사극에서 단골로 다루는 인물이 조선의 국왕들이기에 그들의 일상사와 말투까지도 친숙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의외로 역사학자들의 관심에서는 좀 벗어나 있었다. 왜일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왕실문화총서’로 출간된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돌베개, 2011)를 통해서 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근대화에 실패한 왕조의 군주라는 인식이 조선의 왕과 왕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덧붙여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 대한 서양인들의 편견도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석에 장애가 되어왔다. 최근 들어 조선 왕실과 왕실문화에 대한 다각적인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러한 부정적 인식과 해석상의 장애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는 뜻도 된다. 게다가 왕실 도서관 소장 자료의 영인과 해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연구 환경이 좋아진 것도 앞으로 넓은 시야에서의 깊이 있는 연구를 가능케 할 전망이다.


조선 왕은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서로서 <조선 왕으로 살아가기>는 국왕의 하루일과에서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문학적 세계와 건강관리법까지 두루 다루고 있어서 길잡이로 요긴하다. 조선의 국왕,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재위했던 국왕 27명의 평균수명은 47세였으며, 평균 재위기간은 약 19년이었다. 평균 재위기간이 고려 때보다 5년 정도 길며 이것은 그만큼 왕권이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이는 52년간 재위했던 영조이며, 숙종, 고종, 선조, 중종, 순조, 세종 등도 30년 이상 권좌에 있었던 왕들이다. 보통 재위기간이 길수록 왕권이 탄탄했다.

 

권력이 모두 집중된 만큼 왕의 업무는 과중했는데, 일과는 아침, 낮, 저녁, 밤의 네 단계로 구분됐다. 웃어른에 대한 문안인사와 경연, 그리고 아침식사 후의 조회가 오전의 일과라면 점심식사 후에는 다시 경연으로 시작하여 지방행정에 관한 보고를 받거나 민원을 해결하는 등의 업무를 보게 되며 대략 5시경에 종결된다. 하지만 공식 업무 후에도 다시 경연이 이어지며 저녁을 먹은 후에는 낮 시간에 미뤄둔 업무를 마저 보기도 했다. 이를테면 국왕의 야근이다. 촘촘하기로는 연간 일정도 마찬가지여서 왕은 정월 초하루부터 24절기에 맞춰 많은 일과 행사를 주관해야 했다. 물론 유교적 예치(禮治)를 표방한 국가였기에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제사였고, 왕의 1년은 제사로 시작해서 제사로 끝났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엮은 <조선 국왕의 일생>(글항아리, 2009)은 말 그대로 조선 국왕의 일생에 대한 주제별 스케치이다. 초점 가운데 하나는 절대권력자인 왕의 권한을 어떻게 통제했느냐이다. ‘종신직’으로서 국왕은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존재였기에 훌륭한 왕이 되게끔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왕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조선의 지식인들이 마련한 것이 ‘기록’과 ‘교육’이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국가 기록을 통해 국왕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했고, 정상적인 국왕이라면 이를 의식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왕은 왕세자로 책봉되고 국왕에 오르기까지 각종 교육과정을 거쳤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경연에 참석해야 했다. 연산군처럼 경연을 폐지한 경우가 아니라면 경연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경연이란 왕이 유가의 경전과 중국‧우리나라의 역대 역사를 공부하는 자리로서, ‘경연에 관한 모든 것’은 김태완의 <경연, 왕의 공부>(역사비평사, 2011)를 참고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왕에게 건강은 공부만큼 중요했다. 유학에서 사후에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법치보다 사전에 다스리는 덕치를 더 우선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질병에 대한 사후 처치로서의 약치(藥治)보다 더 나은 것은 미리 예방하는 식치(食治)였다. 평소에 먹는 음식을 통해서 건강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조선의 왕실은 다양한 종류와 죽과 차를 대표적인 식치 음식으로 갖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조선의 왕들이 모두 무병장수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함규진의 <왕의 밥상>(21세기북스, 2010)은 ‘밥상으로 읽는 조선왕조사’를 가지런하게 보여주는데, 흥미롭게도 세종은 왕실의 식치가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였다. 운동은 게을리 하면서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공부벌레였던 까닭에 재위 초년의 세종은 보기 거북할 정도로 뚱뚱했으며 서른 즈음부터는 당뇨와 합병증에 시달렸다. 고기반찬만 좋아하고 절식과 폭식을 반복했던 식습관도 ‘성군’의 이미지와는 얼핏 맞지 않는다. 하지만 세종은 궁궐 법주(法酒)에 들어갈 노루 뼈를 위해 사냥에 나섰던 사람이 멧돼지에게 받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는 술에 노루 뼈를 넣지 말라고 지시한 성군다운 일화도 남기고 있다.

12. 01. 14.

 

 

 

P.S. 왕정국가였던 만큼 조선은 왕이 통치하는 국가였지만 선비들의 강한 견제를 받았기에 실제로는 왕권이 그다지 강력하진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 관점에서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곧 선비들에도 관심을 가게 되는데, 어제부터 읽고 있는 계승범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역사의아침, 2011)가 개관으로 유용하다. 가령 직언을 마다하지 않는 신하를 뜻하는 <직신>(리드잇, 2012)이 조선 선비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준다면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는 조선 사회의 '독점적 지배층이자 유일한 지식인 계층'으로서 선비의 전체상을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저자의 결론은 사뭇 부정적이다. 김연수의 <조선 지식인의 위선>(앨피, 2011)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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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가들의 독서법을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다독가'로 호명돼 오전에 전화인터뷰에 응한 바 있는데, 장석주 시인, 김도언 소설가의 독서법과 함께 기사화됐다. 로쟈식 독서법은 '초병렬 독서법'으로 정리됐다.

 

 

한국일보(12. 01. 11) 책, 어떻게 읽을까… 다독가들에게 들어보는 독서법

 

새해맞이 연례행사인 '올해의 목표' 정하기. 여기에 금연, 운동, 다이어트와 함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독서다. 하지만 생활 계획이란 것이 으레 작심삼일의 관행을 비켜가기 힘들 듯이, 책 읽기를 습관화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책을 읽고 쓰고 기획하는 게 직업인 다독가 3명에게 독서 방법을 물었다. 책을 꾸준히 체계적으로 읽는 비법, 그리고 생활과 업무에 응용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마인드 맵을 그려라
장석주 시인 "키워드를 정해 읽으면 책의 내용 명료해져"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씨는 다독가, 장서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정오까지 원고를 쓰고 오후에는 책 읽고 저녁에는 개인적인 일을 처리한다. 종일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그의 일상은 마치 수도승 같다. 몇 년 전 경기 안성에 서재 '수졸재'를 지어 2만 5,000여권의 책을 보관하고 있는데 요즘도 한해 평균 1,500권 가량의 책을 산다.

 


장씨는 "보통 사람보다 빨리 읽는 편이지만, 속독을 배운 적은 없다"고 말했다. "책을 읽을 때 집중력이 좋은 편이에요. 보통 독자들이 책 읽을 때 집중하는 시간은 10분 내외로 짧습니다. 그래서 앞의 내용을 자꾸 들춰보게 되죠. 저는 3시간 정도는 집중할 수 있어요."

장씨의 독서법은 '머릿속에 마인드맵 그리기'다. 쉽게 말해 책의 중요한 키워드를 몇 가지 정해 이를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그때그때 정리해가며 읽는 방법이다. 그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선 직육면체 입체 공간을 머리에 떠올린다. 이 공간에 책의 주요 키워드를 배치한다. 그리고 각각의 키워드가 어떻게 상호 연결되는가를 유념하면서 읽는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읽은 이수영의 <명랑철학>을 예로 들며 원한, 가책, 위계, 거짓, 사유, 긍정 같은 키워드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읽었다고 설명했다. 이 독서법의 장점은 책 내용이 명료하게 정리되고, 저자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초보자가 장씨의 독서법을 무턱대고 따라 하기는 어렵다. 그는 "다독가가 되려면 우선 무조건 책 읽는 시간부터 내라"고 조언했다. "다른 취미 생활 중 하나를 빼고서라도 책 읽을 시간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책을 꼭 사서 읽으세요. 돈 주고 산 책은 언젠가는 읽습니다. 서평집이나 일간지 북 섹션, 서평기사 등을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책 고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습니다."

 



초병렬 독서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 "여러 책을 한꺼번에… 이해 쉬워 시너지 효과"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알려진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 역시 손 꼽히는 다독가, 장서가다. 전공인 러시아문학 외에도 들뢰즈, 지젝, 랑시에르 등 해외 유명학자들의 국내 번역본에 관해 가장 먼저 서평을 올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장서는 대략 1만5,000권 가량. 여러 매체에 서평을 기고하며 받은 신간을 제외하고 지난해에만 2,000만원어치 책을 사 읽었다.

이씨의 독서법은 이른바 '초병렬 독서법'이다. 일본 저술가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 권을 동시에 읽어라>에 소개된 독서법으로 일정 기간을 정해 문학, 경영학, 과학, 평전, 예술, 역사 등 다른 장르의 책들을 동시에 읽는 것을 말한다. 그가 이 방법을 택한 이유는 사실 일 때문이다. "글 쓰기와 학교 강의를 병행하다 보니 한꺼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씨가 지난주 읽은 책은 ▦플라톤 <향연>의 국내 번역본 7,8종 ▦잭 구디, 에이사 브릭스 등이 쓴 <탐사> ▦레이철 홈스의 <사르키 바트만>과 탈식민주의 이론서 5,6종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을 비롯한 사랑에 관한 인문학 이론서 5,6종 ▦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와 관련 사회학 이론서 5,6종 ▦브루스 커밍스의 신작 <바다에서 바다로>와 커밍스의 이전 저작 2,3종 등이다. 대부분은 강의와 집필에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읽고,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한 책은 서너 권이다. 번역서는 원서와 함께 보는 것이 원칙이다.

 

 

이씨는 "여러 책들을 동시에 읽음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고 말했다. 어떤 책에서는 잘 와 닿지 않던 내용이 비슷한 시기에 쓰인 다른 분야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될 때가 있다. 그는 "사상서는 해당 저자의 책을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다음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다. 선입견을 버리고 읽으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사실 다독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초등학생은 많이 읽는 게 도움되겠지만, 어느 정도 독서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읽은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죠. 책을 노예처럼 부려먹으세요. 어느 선까지 저자를 이해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나면, 이후에는 자기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이용하면 됩니다."

 



테마를 정하라
김도언 열림원 편집장 "사상·역사 배경별 묶어 독서… 메모·노트 병행"


출판?열림원 편집장이자 소설가인 김도언씨는 10여년 간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일하며 작품을 써왔다. 독서와 집필이 일인 셈인데, 업무 외에 읽는 책은 한 달 평균 10권 가량이다. 2004년부터 쓴 독서노트를 모아 재작년 서평집 <불안의 황홀>을 냈을 정도로 꼼꼼한 독서를 자랑한다.

 


김씨의 독서법은 '테마 읽기'다. 그는 "테마를 정해서 관련 책들을 찾아 한꺼번에 읽는다. 19세기 유럽의 정신과 지적 분위기를 다룬 소설, 17세기 고전주의 저서, 20세기 일본의 중간문학, 이런 식으로 어떤 주제를 정해 이와 얽힌 저작을 찾아서 읽는다"고 말했다. "모든 저작물은 역사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책 읽기 전 저자가 살던 시대 분위기와 사상적 조류, 책이 쓰인 역사적 배경, 지적 풍토를 면밀하게 파악하고, 그런 콘텍스트(맥락)를 함께 짚으면서 책을 읽습니다."

김씨는 또 책을 읽으면서 꼭 메모를 한다. 예를 들어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볼 때 일본의 1950년대 정치상황을 함께 살펴가며 읽고, 상호 영향 받은 부분을 메모하는 식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장은 두세 번씩 반복해 읽고, 다 읽고 나면 독서노트를 쓴다. 그는 "인상적인 책을 읽을 때 내가 느끼고 교감한 것, 의문이 든 점 등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그렇게 해야 책이 온전히 내 것으로 흡수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독서노트는 업무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 테마로 묶어 읽은 책들을 머릿속에 한 장의 지도처럼 그리면서, 앞으로 할 업무의 방향을 잡고 읽어야 할 책들을 가늠해 본다고.

김씨는 "독자들이 자신의 독서 수준을 의식적으로 높이려고 시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통 독자들이 자신의 독서 수준을 미리 낮추어 잡고 어렵다고 생각되는 책을 아예 읽지 않으려고 해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일부러라도 어려운 인문서나 고전을 읽었으면 해요. 어렵다고 생각했던 책과 교감하는 순간, 더 이상 책 읽기가 괴롭지 않게 될 겁니다."(이윤주기자)

 

12.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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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는 시지프스의 생각 여행'이란 부제의 책, 이윤의 <굿바이 카뮈>(필로소픽, 2012)에 붙인 해제 글을 옮겨놓는다. 작년 1월에 붙들고 있었던 원고가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필로소픽, 2011) 서문이었는데, 공역자 중 한 사람이 이윤 씨였고, 면식은 없지만 그런 인연으로 이번 책에 해제를 쓰게 됐다. 저자 또한 <빅 퀘스천> 번역을 하게 되면서 젊은 시절 고심했던 '삶의 의미'의 문제, 혹은 카뮈의 질문과 다시 대면하게 됐다고. <굿바이 카뮈>는 'Meaning of Life' 시리즈의 다섯번째 책이다.

 

 

굿바이 카뮈, 굿바이 청춘

 

굿바이 카뮈? 그런 의문과 함께 책을 손에 든 독자도 있을 듯싶다. 사실 카뮈와 작별인사를 하려면 먼저 카뮈와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떤 카뮈인가? 당신은 카뮈를 만난 적이 있는지? <이방인>의 작가, <시지프 신화>의 저자 알베르 카뮈 말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자살이야말로 유일한 철학적 문제라고. 그것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다급한 문제 제기였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물음이라고 젊은 카뮈는 말했다. 누구에게? 젊은 우리에게!

 

 


돌이켜보면 80년대 중반, 우리는 젊었다. <굿바이 카뮈>의 저자 이윤과는 책으로만 대면했을 뿐이지만, 80년대 중반 대학 철학과에 들어갔었다는 고백으로 보아 비슷한 연배이고 같은 세대다. ‘우리’라고 말해도 무방하다면, 우리의 청춘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최루탄이 터지던 교정과 거리에서 꽃이 피는 듯 마는 듯 지나가버렸다. 스러지기도 하고 밟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청춘의 고민’마저 생략할 수는 없었다. 왜 사느냐는 것. 요즘에야 알게 됐지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그런 질문을 세 번쯤 던진다. 갓 스무 살이 될 무렵에, 중년에, 그리고 노년에. 저자 또한 이렇게 말한다. “80년대 중반 내가 철학과를 지망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인생의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이 말하자면 ‘제1라운드’이다.


철학 대신에 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첫 학기에 문학개론과 함께 철학개론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수강과목으로 신청했던 기억이 난다. 철학개론은 나중에 종교학개론으로 변경해서 신청하긴 했다. 이유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줄 듯싶어서였다. 왜 사는지에 대해서. 고민도 심하면 병이다. 친구에게 “너는 왜 죽지 않니?”라고 물었던 걸 보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한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유한한 삶이라면 인생이 허무했다. 아니 허무해보였다. 학생생활연구소에 상담을 받으러 다니며 세계의 ‘원초적 적의’에 대해서 떠들기도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당신은 혹 이런 문장들에 매혹된 적이 있는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 전차,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의 네 시간, 점심식사, 전차, 네 시간의 근무, 저녁식사, 취침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수월하게 계속된다. 다만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며 모든 것은 놀라움을 띤 권태 속에서 시작된다.” 사무실에 다닌 것도, 공장에 다닌 것도 아니었지만, 고작해야 대학 강의실에 출석하는 정도였지만, 내게도 ‘왜’라는 의문은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마도 ‘우리’가 인생의 문제와 조우한 첫 번째 장면일 듯싶다. 우리는 카뮈와 그렇게 만났다. 


청춘의 열병을 앓아본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골몰할 수 있다. 하지만 병적인 집착은 다른 문제다. 왜 하필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그토록 관심을 갖게 됐을까. 아무래도 그 무렵의 ‘일부’ 고등학생들에게 카뮈나 사르트르가 끼친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맞는 말이다. 그 ‘일부’에 나도 포함됐던 것이고. 우리는 어쩌면 실존주의 세례를 입은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에 카뮈와 사르트를 읽고, 대학에 다니기 위해 상경할 때 가방에 <시지프 신화>와 함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챙기던 세대 말이다. 아무튼 그랬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존재’ ‘무’ ‘부조리’ ‘구토’ ‘실존’ ‘책임’ 같은 유행어들이 치어들처럼 헤집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한 세월이 지났다. 그 치어들이 이젠 좀 묵직해졌을까. 저자는 학부를 끝으로 철학 공부를 접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형이상학적 문제 대신에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씨름했다고 한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유’니 ‘의미’니 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고민했던 문제를 좀더 명료하고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 스키너를 읽고, 푸코를 읽고, 도킨스를 읽었다. 진화심리학을 읽고 정신분석학을 읽었다. 나는 인간이 어디까지 부자유한가, 그래서 어디서부터 자유로운가를 알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싶었다. 생활의 문제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고 직업을 가지겠다는 생각은 아주 뒷전이었다. 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부터가 이런 앎의 욕구 때문이었으니 인생의 문제 주변을 내내 맴돌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다 인연이 닿아 ‘인생의 의미(Meaning of Life)’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온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에 해제를 붙였다. 공역자였던 이윤의 ‘옮긴이의 말’을 유심히 읽고, 예사로운 공력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굿바이 카뮈>를 들고 나타났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오랜 갈증과 탐문을 ‘철학함’의 자세로 정리한 책이다.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제쳐놓았다고는 하지만 철학에 대한 녹슬지 않은 관심과 예리한 논리로 무장하고서 ‘삶의 의미를 찾는 시지프스의 생각 여행’을 안내한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중년의 관심을 ‘제2라운드’라고 하면, 이 책은 그 제2라운드의 결과보고서이다. 그가 도달한 ‘만족스런 답변’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더 큰 객관적 가치를 향한 자기초월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삶의 의미는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 속에서 자기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굿바이 카뮈’란 말이 뜻하는 것은 카뮈란 말로 상징되는 철학적 고민과의 작별이다. 바로 삶의 의미,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의 작별이다. 이 문제를 두고 저자는 영어권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고하여 면밀하고 체계적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런 스타일은 개념의 명료화를 지향했던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영향에 힘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분석철학에서는 보통 삶의 의미와 같은 실존주의적 물음을 문제로 성립할 수 없는, 되지도 않는 문제로 기각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논리를 지렛대로 삼아서 삶의 의미라는 바위, 매번 다시 굴러 떨어지던 시지프스의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고자 한다. 저자는 성공한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스무 살에 이 정도로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면, 굳이 철학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핏 <논리-철학논고>를 통해서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소했다고 자부한 비트겐슈타인의 자신감을 떠올리게 한다.


의미를 보는 다른 시각도 물론 가능하다. 가령 삶의 의미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아니 행위이고 운동이며 실천 자체라고 보는 관점이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제3자적 시점에서 인식과 평가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행위의 주체가 주관적 시점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고유한 ‘자유’와 ‘의미’를 정량적이고 범주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인식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자유와 의미는 파닥파닥 뛰는 ‘생생한’ 자유, ‘살아있는’ 의미가 아니다. ‘유레카!’라는 발견의 기쁨이나 우리가 각자 삶의 어느 순간 체험하는 환희가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되지 않거나 미흡하게만 전달되는 이유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삶의 의미와의 씨름, ‘제2라운드’를 눈여겨본 소감을 적자면, 이 씨름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굿바이 카뮈>의 ‘의미’는 저자가 도달한 결론보다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듯싶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이라는 말은 삶의 의미란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일부’이긴 하더라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뭔가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었던 독자라면 저자의 ‘생각여행’에 동행하면서 예기치 않은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의문이 다 해소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가 되면 다시 가방을 싸고 신발끈을 바짝 묶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노년에, 그러니까 ‘제3라운드’에서 한 번 더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슴 속에 새겨지는 별들을 이제 다 세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이제는 적지 못한다. 우리의 청춘은 지나갔다. 굿바이 청춘!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이 다하지 않는 한,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 또한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카뮈와 작별하고도 인생은 한동안, 어쩌면 오래 더 지속될 테니까 말이다. 

 

12.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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