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책세상

이번달 출판문화(550호)에 실은 출판 칼럼을 옮겨놓는다. 주제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에 대해 썼다. 원고를 써야 할 때쯤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돌베개, 2011)이 손에 잡히기에 읽은 게 빌미가 됐다.   

  

출판문화(11년 9월호)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는 질병, 책중독자

지난 7월에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를 빌미로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란 주제를 다룬 바 있다. 구텐베르크 혁명의 결과이기에 ‘구텐베르크 은하계’로도 불리는 책의 지배적 형태가 전자책(e-book)으로 변화 혹은 진화해 갈 것인가가 책의 미래에 관한 핵심 쟁점이다. 책이란 말이 붙긴 했지만 ‘전자책’이 과연 책의 변신인지 아니면 책의 종말인지, 의견은 여러 갈래다. 하지만 그런 의견의 평균치나 평균적인 전망보다 더 궁금한 건 ‘책중독자’들에게 책의 미래가 어떻게 비칠까 하는 문제다. “책 없인 못 살아!”라고 외치는 책중독자들이 적어도 이런 문제에서만큼은 더 많은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들의 고뇌를 보통사람들의 경우보다는 더 무겁게 평가해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책중독자를 자처하는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독베개, 2011) 후기에서 저자가 다루고 있는 문제가 책의 미래이면서 책중독자의 미래다. 때로 혹은 허구한 날 “책에 대한 사랑으로 살짝 몸이 달아오르는” 책중독자들이 흠모하는 것은 물론 종이책이다. 책의 대명사로서의 종이책, 두께와 질감과 중량을 갖고 있는 책 말이다. 서점 혹은 책방이란 이 책들이 차려 자세로 진열된 공간이며, 책중독자란 기본적으로 그 ‘사랑스러운 것들’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자들이다. 이 책중독자들의 기본 영역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책방을 둘러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 책을 사서 쌓아두는 것, 그리고 책을 읽는 것. 전자책이 대세를 차지하는 책의 미래라면 이런 기본적인 영역의 ‘구조변동’을 의미한다.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책의 구입은 손으로 만져보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에서 다운로드받는 것을 뜻하고, 독자는 손바닥 크기의 디지털 독서 기기를 주머니에 꽂아가지고 다니게 될 것이다. 아니 독자가 아니라 ‘최종 콘텐츠 사용자’들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우리 책중독자들이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형의 것을 책이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 세상은 더 나쁜 세상은 아닐지라도 뭔가 다른 세상이며, 그 다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책중독자란 종도 도태되거나 멸종될지 모른다. 인터넷서점의 등장으로 이미 많은 동네서점이 문을 닫은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옛날 옛적에 책이라면 종이책밖에 모르던 책중독자들이 있었더라……”    

사실 책방을 둘러보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이미 생활의 기본 영역에서 빠져나간 지 오래다. 톰 라비는 1995년 즈음만 해도 다른 사람과 ‘우리의 사랑스러운 보물’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화 주제 가운데 하나인 에벌린 워의 초기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정신적인 피붙이를 만나기까지는 몇 시간, 때로는 며칠이 걸리곤 했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나도 워의 소설 <한줌의 먼지> 같은 걸 읽지 않았기에 그의 말상대가 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런 고충에 대해선 맞장구를 쳐줄 수 있다. 책중독자용 수다를 요즘과 같은 대형서점에서 나누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정은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책방들의 사정이 예전에 크게 나았던 것도 아니다. 책방 주인 내지는 서점 직원과 책에 대한 수다를 나눠본 건 개인적으로도 서점 순례 경력이 30년이 넘지만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수다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들을 만났을 때나 가능한 편이고, 대개는 온라인의 북커뮤니티를 통하는 게 빠르다. 다시 라비의 말을 옮기면, “문학에 관한 대화의 공간인 아마존닷컴이나 반즈앤노블닷컴, 또는 수많은 다른 웹사이트를 이용함으로써, 부지런한 ‘마우스질’로 책방을 둘러보고 대화를 나누고픈 욕구를 실컷 채울 수가 있다.”  

분명 그렇게 독서환경이 바뀌었다. 하기야 그런 변화된 환경이 아니었다면 나도 ‘인터넷 서평꾼’으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 라비도 비슷한 경험을 한 모양이다. “사실상 문학적 신실함을 증명해주는 거라곤 주변에 엄청나게 쌓아놓은 책 더미 외에는 없는 평민 책중독자가 자신의 초라한 신분을 넘어서 진정한 서평가가 될 수 있다.” 바로 인터넷 시대에는! 여기서 라비가 ‘평민 책중독자’라고 한 것은 본래 책중독이 상당한 재력과 서가공간을 필요로 하는 아주 ‘비싼’ 질환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 서양 귀족들은 유명한 애서가가 세상을 떠날 경우 그가 남긴 장서를 모두 사들이는 게 관습이었다고 한다. 비좁고 불편한 책방에서 서성거리며 어렵게 책을 골라낼 필요도 없고, 일반 대중과 섞이는 일도 없으니 여유만 된다면야 아주 편리한 방식이었다. 그들은 책방의 책을 모두 갖다달라고 하고선 “내가 원하는 건 갖고 나머지는 넘겨주겠소”라는 식으로 말했다. 예컨대 영국인 독서가 리처드 히버는 앉은자리에서 3만권을 사기도 했다고. 물론 그런 건 보통 사람들, 곧 평민들로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책중독자는 대개 재산가들이었다. ‘평민 책중독자’의 등장은 값싼 페이퍼백 혁명 이후의 일이다.  

분류하자면 나 또한 책중독자이다. 더 나쁘게는 평민 책중독자. “돈이 생기는 대로 우선 책을 사고 그다음에 옷을 사 입으리라”고 한 에라스무스의 말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면에서도 그렇고, 라비가 제시하는 책중독자 테스트 항목을 체크해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25가지 항목 가운데 ‘책을 몇 권이나 샀는지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다’거나 ‘책을 사들이는 것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들을 당혹스럽게 한 적이 있다’, ‘책방 직원이 찾지 못하는 책을 당신이 찾아낸 적이 있다’ 등은 주저 없이 ‘예’에 해당하고 ‘책을 읽다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징계를 받은 적이 없다’는 비록 해당사항이 없기에 ‘아니오’라고 답하지만 카드로 책값을 돌려막다가 신용불량자가 됐던 경험은 해고나 징계에 근접하지 않을까 싶다. 책중독자가 ‘되는’ 게 아니라 책중독자로 ‘태어나는’ 거라고 하면, 가족 중에 유독 나 혼자만 책중독에 빠진 걸로 보아 유전적 돌연변이인 것 같기도 하다(유감스럽게도 과학계는 어떤 유전자가 이 질환과 관계가 있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라비의 정확한 지적대로 대부분의 책중독자는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치유되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 영혼을 들어올릴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중독이라는 시궁창에서 나뒹굴어야 한다.” 이게 치유법인가? 그렇다. “책 사는 데 돈을 몽땅 쏟아부어 고통과 죄책감을 일으킬 때까지 책을 사들어야 한다.” 그런 고통과 죄의식의 밑바닥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도움과 구원을 요청하게 될 것이니, 이건 어떤 필연의 여정이다. 라비의 충고는 이렇다. “책을 많이 많이 사들여라. 그래서 심한 곤경에 빠져 다시는 책을 사고 싶지 않을 때까지.”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는 질병이란 점에서 책중독은 사랑의 열병을 닮았다. 역사적으로 이를 입증해주는 사례도 적지 않다. 19세기 프랑스 사람 실베스트르 드 사시는 “아, 내 사랑하는 책들!……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라고 부르짖곤 했단다. 전자책에 대한 책중독자들의 거부감은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형의 것을 책이라고 부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책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진 못하잖아”라는 식의 기분을 갖게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책중독자는 신기술을 반대하는 ‘러다이즘’ 신봉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과는 무엇인가. 책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사들여서 집안 곳곳에 쌓아두고 서가에서 빼내 냄새를 맡으며 훌훌 넘겨보다가 일부분을 읽고는 다시 꽂아두거나 쌓아둔다. 그러고는 다음날도 똑같을 일을 반복한다. 라비에 따르면, 굳이 라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런 것이 “우리 책중독자들에게 무척이나 유쾌하고 의미 있는 일련의 이벤트와도 같다.” 하지만 이제 ‘책의 미래’와 더불어 진정한 책중독자의 시대도 종말을 고할지 모를 일이다.  

사실 “아아, 결국 우리는 죽으리라”는 운명이 유별난 비애감을 자아내는 건 아니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애서가의 경우도 특별하지 않다. 책을 사랑하던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도래할 뿐이다. 사랑의 대상이 반드시 종이책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세대마다 취향은 다르니까. 달라질 수 있으니까. 세살 때부터 핸드폰과 아이패드를 만지작거리며 자라는 다음 세대에게는 전자책이 특별한 에로티시즘의 대상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책의 형태는 비록 달라질지라도 ‘읽는다’는 독서 행위는 적어도 당분간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게코스키의 독서편력>(뮤진트리, 2011)에서 저자는 “내가 읽었던 책들과 나의 이전 자아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자아를 형성시키는 이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된다”고 적었다. 이 읽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빛이 사라지고 밤이 드리워질 때까지, 더는 책을 읽지 못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책을 읽게 되리라.”   

11.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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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9-19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하핫! 아코, 죄송합니다. 집사람하고 글을 읽다가 웃어버리고 말았어요. '카드로 책값을 돌려막다가 신용불량자가 됐던 경험은 해고나 징계에 근접하지 않을까 싶다'에서 둘 다 유쾌하게 웃어버리고 말았어요. 마침 책이나 사서 읽으라고 들어온 '축의금(?)'-한 30만원가량 됩니다.-을 정말 책 사는데 다 쓸 것이냐고 옥신각신 중이었거든요. 집사람은 10만원만 쓰라고 못을 박았고, 저는 최소 5만원은 더 할당해줘야 한다고 연좌투쟁(?)중이었거든요. 덕분에 희망(?)이 보였습니다.^^ 여전히 바쁘시죠? 시험기간도 다가오네요.

로쟈 2011-09-20 23:13   좋아요 0 | URL
빵가게님도 얼른 책으로 수입원을 찾으셔야겠습니다. 원고료로 책값을 충당하는 게 한 방법이긴 해요...

영남자파 2011-09-1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님 제가 댓글달기 외람되오나 ... 낭만적이십니다.^^ 가난을 재밌게! 출산파업만 실천 한다면 모두에게 가난은 대수가 아니지요.

미국사람 2011-09-20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사러 다니는데 미친 놈이 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정말 위안이 가는 그런 글입니다.

빵가게 님은 마누라 님의 바가지를 어떻게 견디어 내는지 궁금하군요. 하긴 여기 눈팅하는 분들도 그런 분이 많을듯...


로쟈 2011-09-20 23:12   좋아요 0 | URL
책중독자 연합회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Daniel 2011-09-20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심히 공감되어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저에겐 위로의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11-09-20 23:10   좋아요 0 | URL
저도 감사합니다.^^

singing 2011-09-2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글 없이 칼럼만 읽어도 바로 선생님 얘기란걸 단박에 알겠는걸요.ㅎㅎ
저도 읽다 웃음났어요..(웃을일 아녔나?^^)
어중간세대인 저로서는..아... 어두운 책의 미래는 생각도 하기 싫으네요.

로쟈 2011-09-20 23:10   좋아요 0 | URL
신용불량자 얘긴 책세상에서도 한 기억이 있는데요.^^;

영남자파 2011-09-20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아이야아아아아~~ 쌓인 책, 문학적 신실함!('학창시절'이라는 기간까지만인 애도보다는 일분일초도 잊지못하는 극심한 우울증에 가까운 ㅋ)

...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 알 것 같아요^^

영남자파 2011-09-20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챙욕심이기에 망정이지, 그림이었다면?
어느 무명화가에서부터 고갱, 고야, 이중섭, 나혜석, 보티첼리, 벨라스케스, 라파엘로, 모네, 마네, 고흐흐흐흐.....
아부지 돈 쫌 필요!!^^

로쟈 2011-09-20 23:10   좋아요 0 | URL
그림도 '화집'은 괜찮은데요.^^

rolla 2011-09-20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민 책 중독자 하나 추가요^^ 왜 책장을 사도사도 이중삼중으로 꽂아도 자리가 없는 걸까요?? 서점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새 책 냄새에 짜릿한 황홀함을 느끼는 1인... 이보다 더한 쾌락이 어디 있을지... 얼마전에 과제로 이블린 워 단편 번역했었는데 재미있더군요ㅎㅎㅎ

로쟈 2011-09-20 23:09   좋아요 0 | URL
'이블린 워'가 왜 '에블린 워'가 됐는지 모르겠어요. 여하튼 재밌게 지내시군요.^^

park6 2011-09-23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냄새를 맡으며 훌훌 넘겨보다가..." 이 구절을 읽고 킥킥 대면서 웃었습니다. 저도 습관적으로 책 냄새를 맡거든요. 그러다가 혹시 누가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에 주위를 둘러보지요ㅎㅎㅎ

로쟈 2011-09-24 09:48   좋아요 0 | URL
일종의 페티시즘이죠.^^;

우리시온 2011-10-2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유익이 되는 책위주로 선택하며 읽고 있습니다
특히 서점에 가면 인문한 책들을 주로 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책들은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는 ...일부러 종교를 언급하고 싶지않지만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책들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책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수천년동안 사십명의 이상의 저자가 만들어진 <책중의 책>입니다
로쟈님과 그의 열혈 독자들에게 정중히 권해 드립니다
무종교이면 그냥 책들의 하나로서 읽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더 전진하고 진전된 곳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책중독자>이기 때문에 가눙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이 많습니다!

로쟈 2011-10-22 09:10   좋아요 0 | URL
같은 중독자라니 반갑습니다.^^

가명 2020-09-21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 라비 <어느책중독자의고백> 업데이트: 일하는 척 하면서 서류 사이에 구멍을 뚫어 책을 읽을 필요는 이제 없습니다 우리에겐 전자책이 있습니다!

가명 2020-09-21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요한건 단지 알트 탭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398호)에 실린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로 고른 건 조선시대 세계지도다. 관련서가 많지는 않지만 요긴한 책들이 몇권 있어서 골라보았다.   

책&(11년 9월호) 우리 지도에 담긴 세계의 인식 

세계란 무엇인가? 세계사에 관한 책들을 대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질문이다. 세계사, 곧 세계의 역사라면 ‘세계’라는 단위 혹은 개념이 필수적으로 전제돼야 한다. 이 세계라는 개념이 언제, 어떻게 형성됐는가 하는 문제는 늘 품고 있는 관심거리다. ‘세계’란 말 이전에도 세계는 과연 존재하는가라고 물으면 이건 철학적인 문제로도 비약한다. 주로 다양한 종류의 세계사가 이런 물음을 촉발하는데, 방향을 조금 틀어서 ‘세계지도’는 어떤가란 흥미도 생겼다. 세계에 대한 공간적 표상으로서 세계지도는 말 그대로 세계를 그린 것이니까 세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아주 직접적인 자료이다.  

오지 도시아키의 <세계지도의 탄생>(알마, 2010)은 그런 관심에서 손에 들 만한 책이다. “지도가 표현하는 것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데, 특히 세계지도에 대한 저자의 기본 관점은 유익한 지침이 된다. 지도의 구성요소로 과학성‧실용성‧사상성‧예술성 네 가지를 드는 그는 현대 지도에서는 과학성과 실용성을 중시하지만 사상성과 예술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도의 역사 자체가 사상성‧예술성에서 과학성‧실용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천해왔다. 그것을 저자는 세계관을 표현하는 ‘세계도’에서 세계를 표현하는 ‘세계지도’로 변화해온 것이라 정리한다. 세계도와 세계지도를 개념상 구분하는 것이다. 세계도에서 세계지도로의 변화가 곧 ‘세계도의 근대화’이다. 이러한 근대화를 선취한 것은 중세 이슬람의 이드리시 세계지도이지만, 세계도의 근대화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대항해시대에 이르러서이며 이를 주도한 나라가 포르투갈이었다. 1502년에 제작된 칸티노 세계지도는 지도에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알리는 지표이기도 했다.   

세계지도가 그러한 탄생사를 갖는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지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이 분야의 책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개리 레드야드의 <한국 고지도의 역사>(소나무, 2011)는 발군의 저작이다. 단행본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세계지도학계가 다양한 문화권에서 지도학의 역사를 조명한 <세계지도학 통사>(전8권) 가운데 ‘한국 지도학’ 편에 해당한다. 한국 지도학의 발달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뿐더러 서구 학계에 한국 전통 지도학을 알리는 데 기여한 저술이다. 저자는 전통시대에 한국문화가 중국 문명에서 많은 것을 빌려 썼고 지도학도 예외는 아니지만 한편으로 중국과는 매우 다른 모습도 보여준다고 말한다. “중국 문명이 지도제작 기술을 주도했지만, 한국의 지도는 이 관계로만 정의할 수 없으며, 동아시아 문명 내부의 위대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대단히 쓸모 있는 매개체이다”라는 것이 그의 평가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왕조 초기인 1402년에 완성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보통 <강리도>로 칭해지는 이 지도는 동아시아 지도제작 전통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다. 아쉽게도 현재 한국에는 남아 있지 않고 몇 개의 사본만이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류코쿠대학 소장본으로 레드야드는 147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1480-1534년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다). <강리도>는 14세기 중국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한국‧일본 세 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도를 연구해서 통합적으로 만든 지도이다. 레드야드에 따르면 이런 시도 자체가 당시의 지도 제작 표준에 비추어 놀랄 만한 것이다.  

<강리도>는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그리고 유럽의 윤곽까지 보여주는데, 한국을 매우 크게 확대하는 대신 일본 열도도 남중국해에 멀찍이 표시해놓은 게 특징이다. 이러한 상대적 크기와 배치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15세기 초 조선의 세계관이다. 중국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되 조선이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임을 분명히 하고 일본은 가능한 한 멀리 두려고 했다. 오지 도시아키의 구분에 따르면 <강리도>는 확실히 ‘세계관’을 표현한 ‘세계도’였다.   

현재 사본들이 모두 일본에 소장돼 있는 만큼 <강리도>에 대한 연구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많이 진행되었다. 미야 노리코의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소와당, 2010)는 <강리도>의 원천에 대한 연구서이다. 지도 자체는 조선의 것이지만 <강리도>는 당시까지 축적돼 있던 동아시아 지성의 산물로 큰 의의를 갖는데, 저자는 <강리도>의 모태가 된 두 장의 중국 지도, 청준의 <혼일강리도>와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를 추적하여 <강리도>의 탄생배경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준다.   

오상학의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인식>(창비, 2011)은 제목대로 ‘조선의 지도에 담긴 세계’를 읽어내려는 시도로 한국 지도학 연구 동향과 성과도 가늠하게 해준다. 저자는 15세기 <강리도>에서부터 17‧18세기의 원형 천하도, 그리고 19세기 최한기의 <지구전후도>에 이르기까지 우리 지도에 담긴 세계인식을 추적하며, 특히 원형 천하도의 의의를 높이 사고 있다. 학술적인 성격의 책이기에 레드야드의 <한국 고지도의 역사>가 제시한 윤곽의 ‘상세도’로 읽을 수 있다.   

11.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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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11-09-16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리도의 비대칭성을 보니 무슨 이유에선지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누구누구의 뇌지도'가 생각나네요. 동글동글한 섬 모양은 '환공포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어요.

로쟈 2011-09-17 09:12   좋아요 0 | URL
저렇게 다 그려넣은 세계지도가 처음이라는 것도 놀랍습니다...
 

기획회의(303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리링의 <논어, 세번 찢다>(글항아리, 2011)에 대한 독후감을 적었다. 리링의 책은 이중톈의 <백가쟁명>(에버리치홀딩스, 2010)과 함께 이번 여름에 읽은 가장 유익한 책이었다. 실제로 이중텐의 <백가쟁명> 원저는 <논어, 세번 찢다> 이후에 나온 책으로 리쩌허우의 <논어금독>(북로드, 2006)과 함께 리링의 <상가구>도 종종 언급한다. <상가구>도 얼른 번역되면 좋겠다...  

기획회의(11. 09. 05)  지식인 공자를 읽다

'공자'를 다시 읽고 있다. 아니 다시 보게 됐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싶다. 우리에게 ‘공자왈’의 공자만큼 친숙한, 고루할 정도로 친숙한 ‘성인’이 달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읽고, 다시 보게 됐는가. 두 종류의 공자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논어, 세번 찢다>의 저자 리링의 말이다. “역사적으로 두 종류의 공자가 있다. 하나는 <논어>에 있는, 피가 흐르고 살이 붙어있는, 살아있는 공자이고, 다른 하나는 공자 사당 안에 있는, 빚어지고 조각된, 향불을 피우고 머리를 조아리기 위한 공자이다. 전자는 진짜 공자이고 후자는 가짜 공자이다.” 이러한 일갈에 덧붙여 그는 이렇게 묻는다. “어느 공자가 더 사랑스러운가?”  

사랑스러운 공자? ‘공자’하면 자동적으로 ‘성인 공자’를 떠올리게 되는 우리로선 불경스럽게도 들리지만, 한편으론 통쾌한 느낌도 준다(사랑스러운 공자라니!). 새로운 발견의 쾌감이고, 해방의 쾌감이다. 리링의 제안은 물론 우리가 가짜 공자가 아닌 진짜 공자, 살아있는 공자와 대면해보라는 것이다. 그 진짜 공자는 ‘집 잃은 개’라고도 불린 불우한 지식인으로서의 공자다.  

 

우리 번역본에서 흔히 ‘상갓집 개’라고 옮겨진 ‘상가구(喪家狗)’를 리링은 ‘집 잃은 개’로 풀이하는데, 이 말의 출처는 사마천의 <사기> 중 ‘공자세가’다. 공자가 정나라에 갔을 때 그의 행색을 보고 한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몹시 지친 것이 마치 집을 잃은 개와 같다고 말한다. 자공이 이 말을 공자에게 전하니 공자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외모야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집 잃은 개 비슷하다고 말한 것은 맞구나, 정말 맞구나!” 춘추시대라는 난세를 살면서 이상을 펴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말년까지 여러 나라를 주유했지만 공자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나마 성공한 건 많은 제자를 가르친 것이며 그들로부터 깊이 존경받은 일이 그의 생애를 가치있는 것으로 조명해준다. 요컨대 진짜 공자는 “성인이 아니라 민간의 학자이자 사립학교의 선생님이었을 뿐이다.” ‘집 잃은 개’라고 불려도 자기 처지가 정말로 그렇다고 맞장구친 이가 바로 공자였다.  

베이징대 교수로 고고학, 고문자학, 고문헌학의 대가로 통한다는 리링은 그런 공자의 모습을 재조명하기 위해 <상가구>란 책을 펴내는데 원래는 2004-2005년에 베이징대에서 <논어>를 통독한 수업 강의록이다(<상가구>도 ‘리링 저작선’으로 번역돼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책이 나오자마자 제목이 주는 인상 때문에 리링은 원색적인 비난과 저열한 인신공격에 시달린다. ‘성인’을 모욕했다는 게 주된 이유다. 그가 <논어, 세번 찢다>를 연이어 펴낸 건 그런 비난에 대응하여 무엇이 오해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자신의 주장을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의도가 없을 리 없다. “나의 연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에 불어닥친 복고의 광풍을, 거의 미친 듯이 보이는 이 기이한 현상을 겨냥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논어>를 이해하려면 공자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지침을 <논어, 세번 찢다>에도 적용해보자면, 이 ‘복고의 광풍’은 왜 문제가 되는가. 

리링이 ‘지난 20여년’이라고 지칭한 건 대략 1980년대 말부터다. 이후에 지금까지 중국에서 크게 성행하고 있다는 공자 존숭 현상은 리링으로선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상식과 이치에 어긋난다고 판단해서다. 무엇이 상식인가. 일단 공자가 계급사회의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논어>에서 ‘사람 인(人)’과 ‘백성 민(民)’이 한 구절에서 대구를 이룰 때 ‘사람’은 인텔리(군자)를 가리키고 ‘백성’은 대중(소인)을 뜻한다. 공자의 관심은 오직 군자와 관련이 있을 뿐이며 소인과는 무관했다. 더불어 오늘날까지도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건 마르크스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한 종교이지만 공자는 도덕적인 가르침만 남겼을 뿐 종교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리링이 보기에, 공자에 대한 대중적 숭배는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논어>의 한 대목을 리링을 따라 읽어본다. ‘자로’편에서 ‘화이부동’이란 유명한 문구가 나오는 대목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되 동일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함을 추구하되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신영복의 <강의>(돌베개)에 보면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이다. 신영복은 그런 해석이 ‘화동론’의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새로 해석한다. 이런 근거에서 ‘군자화이부동’은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여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소인동이불화’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는 게 옳다는 견해를 밝힌다. 종합하면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란 뜻이 된다.    

 

반면에 리링은 ‘화’를 상류사회에서의 ‘조화’란 뜻으로 읽으며 이것은 구별의 기초 위에서 추구된다고 말한다. 구별이란 차이이고 차등이다. 조화란 고양이와 쥐처럼 서로 다른 것을 한군데 섞어놓을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에 비하여 ‘동’은 하층사회에서 부르짖는 ‘평등’으로서의 ‘동’이다. ‘동’이란 남녀가 같고, 군관과 사병이 같다는 등의 사회적 평등을 의미한다. 군자는 이러한 동을 말하지 않으며, 묵자식의 ‘같음을 숭상함’은 공자가 보기에 소인의 도이다. 공자는 인(仁)을 말하지만 그 또한 구별과 차등에 근거한 사랑으로 평등이나 박애와는 거리가 있다는 게 리링의 주장이다. 요점은 ‘공자왈’의 신화를 걷어내자는 것이다. 일종의 ‘공자 바로 보기’다. 

그런 점에서 리링은 1919년 중국의 5.4운동 정신을 계승한다. 당시 ‘공자의 거점을 타도하자’란 구호를 그는 ‘전통의 단절’에 대한 요구로 이해하지 않는다. 실제 타도대상은 ‘공자의 거점(孔家店)’이 아니라 ‘주가의 거점(朱家店)’이었고, 이는 공자가 성전에서 내려와 제자백가로 되돌아가게끔 했다. 난세를 살았던 한 지식인이 공자 본래의 모습이며, 리링은 “내가 그를 최대한 존중하는 방법은 그를 지식인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성인 공자’보다는 그가 제시한 ‘지식인 공자’가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우리에게 공자는 어느 쪽인가. 

11.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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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9-07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쏙쏙 들어오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저희 애기는 벌써 콜록이랍니다.^^;

로쟈 2011-09-07 17:29   좋아요 0 | URL
네 조심하고 있습니다. 저는 10월쯤 되면 애를 먹곤 하지요.^^;
 
법가와 전체주의의 기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달부터인가 화요일 연재에서 금요일 연재로 바뀌었다. 점심때까지 아이템을 놓고 고심하다가 '난세의 후흑학'에 대해 쓰기로 하고 서두로 '법가' 얘기를 꺼냈는데, 그걸로 그냥 분량이 차버렸다. 후흑학 얘기는 꼼수로 아껴두기로 했다.  

   

경향신문(11. 09. 02) [문화와 세상]승승장구하는 ‘법가들’

중국 전국시대에 나온 법가사상은 알다시피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법가에 근거한 가혹한 통치가 시황제 사후 진나라의 몰락을 초래했고 뒤이은 한나라 무제는 유가사상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는다. ‘냉혹한 법가’ 대신에 ‘부드러운 유가’를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고 법가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은 아니다.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의 저자 정위안 푸는 중국에서 관이 주도한 정통 유교가 실상은 정통 유가의 수사법을 법가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혼합물이었다고 말한다. 겉은 유가이지만 속은 법가라는 의미의 ‘외유내법’이 그 결과물이다.

법가의 목적은 군주와 정부가 백성의 사회생활 거의 모든 부분을 무제한의 권력으로 통제하는 사회질서의 구축이었다. 법가에 따르면 백성은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가축과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법가는 “천지는 어질지 않다. 천지는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다룬다”(도덕경)는 도가의 통찰을 더욱 확장한다. 군주에게 백성은 가축이자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법가는 군주의 이익이 곧 ‘공익’이라고 말한다. 백성의 최고 지배자로서 군주는 ‘공공’을 대표하기에 군주 개인의 이익이 곧 ‘공공의 이익’과 같다. 이러한 공공의 이익을 지키고 무지한 백성의 ‘사적 이익’을 막는 것이 법의 중요한 역할이다. 법가가 주장하는 ‘법치’란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통치’일 따름이다.

정위안 푸는 중국 정치에서 법가의 중요성이 마키아벨리가 서양 정치사상에 끼친 영향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법가의 요체는 마오쩌둥에 의해서도 계승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는 유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바뀌었지만 속은 여전히 법가라는 것이다. 정치권력의 장악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법가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법가적 전통에 대한 이런 통찰이 남의 나라에만 적용되는 것 같진 않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혹 민주주의란 허울을 앞세운 법치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교적 국가체제가 민주공화국 체제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권력자의 이익이 곧 ‘국익’이라는 법가적 관점이 폐기된 것 같지 않다. 요즘엔 그 권력이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으로 이원화된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군주, 곧 권력자를 제외하곤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법가의 평등사상이다. 그런 점에서 법가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상충하지 않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상대적 법치도 다 포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민은 과거의 백성들과 얼마나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가. 제물로 귀하게 쓰이다가 제사가 끝나면 버려지는 지푸라기 개처럼, 선거철에만 귀한 대접을 받다가 선거가 끝나면 다시 ‘가축’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사실 조작적인 여론몰이에 쉽게 휩쓸리는 ‘대중심리’는 법가의 육질 좋은 먹잇감이다. 공권력의 남용과 편의적 법적용에 앞장서며 승승장구하는 오늘날의 ‘법가들’ 말이다. 어쩌면 비싼 대학 등록금을 비롯한 고비용의 교육체계 배후에도 백성을 지적으로 열등하고 무지한 채로 놔두어야 한다는 법가의 가르침이 숨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백성이 유순하고 무지해야, 군주는 세속의 모든 쾌락을 즐기면서 천하를 안전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게 법가의 생각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건 말이 그렇다는 얘기인가

11. 09. 01. 

P.S.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의 역자는 '옮긴이 서문'에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가 2009년 용산사태였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를 다시 되묻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란 말인가? 왜 형법만 더 강화되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대로 한국을 위시한 동북아시아에는 법가의 잔재가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는데도 국내에는 이를 분석한 책이 거의 없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역자는 법가적 전제 정치를 우선 박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법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한 걸음 다가서려면 말이다.(11쪽)  

'법가적 전제정치'를 '민주주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외피를 쓴 '법가적 법치주의'라면 어떨까. 현재의 공권력이 휘두르는 전횡적 법치주의를 우리의 민주주의는 견제할 수 있을까. '사법개혁' '검찰개혁'이 구호로만 남아있는 현실은 역자가 희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직은 요원하다는 걸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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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우껴 2011-09-03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닌가요?

댓글들에서 봤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이거 본의 아니게 결례했네요..^^;

로쟈 2011-09-03 09:20   좋아요 0 | URL
댓글에서 보셨을 수는 있겠는데, 아무튼 제가 쓴 기억은 없습니다.^^;
 

서평과 서평가를 주제로 다룬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장정일, 김도언과 함께 나도 언급돼 있다. 기사의 일부는 <기획회의>(300호 특집)에서인가 읽은 듯싶다...   

주간한국(11. 08. 23) 주관적 독서, 서평이 되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

김경욱의 단편 '위험한 독서'는 독서치료사에 관한 이야기다. 이 직업은 독서가 단순한 정보 습득 차원을 넘어 사람의 삶 자체를 바꾸는 데 목표를 둔다. 책으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비단 소설 속 이야기로 한정되지 않는다.

'책에 대한 책'을 쓰는 저자 공통점은 그것이다. 90년대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시작으로 책에 대한 책은 출판계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저자들은 자신의 독서를 통해 자신의 삶과 사유의 방식, 감성의 결을 말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극히 주관적 취향으로 책을 고르고 읽고 소개한다는 것. 헌데 그 취향이 상당히 많은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들이 책에서 소개하는 책은 일반 독자에게 일종의 '가이드 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지독한 독서가
대중이 '책에 대한 책'을 인식한 계기는 아마 작가 장정일의 <독서일기>출간 이후 일게다. 그는 1995년부터 2007년까지 <독서일기>를 내며 서점가에 '책에 대한 책'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작가의 독서 습관은 독특하다. 우선 많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빌린 책을 읽다 좋은 책을 보게 되면 뒤늦게 산다. 이런 검증을 거치지 않고 산 책 가운데 읽은 뒤 버리는 것도 많다. 저자에게 받은 책도 내용이 시시하면 헌책방에 팔아치운다.

그가 <장정일의 독서일기> 등에서 밝힌 내용들이다. 버리기 전에 그는 꼭 그 책들을 기록해두는 것 같다. 7권에 달하는 <독서일기>와 지난해와 올해 출간된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2권은 습관적인 기록이 아니고서는 써낼 수 없는 책들이다. 물론 연재의 형식을 띤 서평이 많지만 말이다. 그가 쓴 '책에 대한 책'의 특징은 우선 방대한 책 소개다. 7권으로 출간된 <독서일기>는 각 권마다 수십 권에 달하는 책 서평을 묶는다. 형식이 '일기'이니 당연히 주관적으로 책을 읽고 평한다.

'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 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읽는 모든 책의 양부가 되고, 의사(psedo)저자가 된다. 막연하게나마 어린 시절부터 지극한 마음으로 꿈꾼 것이 바로 이것이다.'

<독서일기> 1권에 쓰인 이 말은 '장정일 표 서평'의 특징을 집약하고 있다. 개별 책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자유분방한 사유, 날선 독설은 '책에 대한 책' 붐을 만들었다. 그렇고 그런 서평집 중에서 그의 책이 단연 주목을 받은 이유는 이 주관적 독서 방식에 있다. 그가 쓴 '책에 대한 책' 내용 중에는 추천용 뿐 아니라 비판용 서적도 상당수 된다. 저자는 주관적 읽기를 통해 책의 내용을 검증하고, 비판하고, 요약한다.

<독서일기> 시리즈는 '책이 지식으로 축적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부분 번역 소설과 재즈관련 도서에 관한 서평으로 채워진 1,2권에서 시작해 2000년대 들면서 그의 독서목록은 점점 더 다양해진다. 2006년 <공부> 이후 펴낸 일련의 서평집에서, 장정일의 이런 독서 방식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공부>는 인문, 사회과학서를 주로 소개하며 우리사회 현실 문제를 다룬다. 이는 이후 낸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도 이어진다. 



장서가의 서재
장정일의 독서 습관이 '읽고, 버리기'의 방식이라면, 이현우의 독서 습관은 '쌓아두기' 방식이다. 그는 1만 권이 넘는 책을 집과 서재, 두 군데로 나눠 보관하고 있다. 그의 서평은 인문, 사회과학, 사상서에 집중돼있는데, 이런 편독에 대해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서평 책을 고른다고 답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들은 국내 지식인 사회서 가장 '핫'한 책이기도 하다. 그는 전공인 러시아문학 이외에도 들뢰즈, 지젝, 랑시에르 등 해외 지식인들의 국내 번역본에 관해 가장 먼저 서평을 올린다. 웬만한 출판, 문학 기자보다 이들의 출간 소식을 먼저 알고 있을 정도다. 그가 서평 쓰기를 통해 바라는 것도 전문가와 대중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터뷰 때 그는 "대학과 소수 고급 독자, 일반 대중독자로 나뉜 국내 인문학 시장의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 앞서 소개한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에서 활동으로 그는 젊은 지식인 사회에서 회자됐고, 그의 첫 서평집은 이미 인터넷에서 서평꾼으로 유명세를 탄 후 출간됐다. 첫 번째 서평집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블로그와 카페에 올린 글을 묶어 낸 책이다. 두 번째 서평집 <책을 읽을 자유>는 잡지 등 기성 매체에 발표한 글이 주를 이룬다. 첫 번째 책이 에세이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두 번째 책은 책 그 자체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 두 권의 서평집을 읽으면, 그가 책을 고르고 읽고 쓰는 동선이 그려진다.

1만 권의 책을 모으고, 최신 번역된 사상서의 리뷰를 가장 빨리 올리는 비법이 있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이른바 '초병렬독서법'이다. 10권의 책을 동시에 읽으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사고를 만드는 독서방법인데, 이 달인의 비법은 <책을 읽을 자유>에 자세히 나와있다. 경우에 따라 필요한 부분만 읽는 '발췌독'도 한다. 책을 읽고 서평할 때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 내용을 정리한다. 복사할 때 밑줄이 안 나오기 때문이란다. 번역서는 원서와 함께 본다. 사상서는 저자의 책을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다음 책은 다 읽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책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라"고 했다. 어느 선까지 저자를 이해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겠지만, 이후에는 자기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이용하라고 말이다. 그는 서평에서 노예 부려 먹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의 문학일기
2000년대 초반 출판평론이 관심을 끌면서 표정훈, 최성일 등 전문가들의 서평집이 봇물처럼 출간된 적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물론 '책'에 방점이 찍혀 있다. 요컨대 하루에도 수십 종씩 쏟아지는 책 중에서 양서를 가려 소개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임무였고, 사람들이 이들의 글에 주목한 이유였다.

최근의 서평집은 책보다 책을 읽고 쓴 저자의 '글'에 방점을 찍은 책들이 인기를 누린다. 소설가 김도언의 <불안의 황홀>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출판사 열림원의 편집장이기도 한 그는 줄곧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일하며 작품을 써왔다. 때문에 그의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독특하다.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쓴 일기를 엮은 이 책은 작가가 그동안 인연을 맺은 수많은 문인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인상을 솔직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독서목록은 대부분 시와 소설 등 문학에 집중돼 있는데 문단 안팎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저자 개인의 에피소드와 주관적 독서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를테면 저자는 이어령, 김승옥, 천양희, 김정환, 김훈, 이인성, 고종석, 이순원, 황인숙 같은 그가 존경하는 문인은 물론 김숨, 오은, 박진성, 함기석, 송승환, 안현미, 이준규, 김태용 등 같은 또래의 문인들과의 에피소드를 일기 형식으로 소개한다.

여기에 저자가 매혹 당한 동서고금 책들에 대한 감상이 덧붙여진다. 그가 읽은 책에 대한 노골적인 옹호와 편애 혹은 비판과 조롱의 내레이션을 따라가다 보면, 영민하면서도 섬려한 작가의 문학적 영혼이 과연 어디에서 기원해, 어디를 경유하고, 어디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이윤주기자) 

11. 08. 25.  

P.S. 어쩌다 보니 인터넷 서평꾼에다 서평가('도서평론가'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노릇을 하게 됐지만, 이런 기사는 내가 주관적으로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객관화해서 보여준다. 이런 자의식 때문에 애써 구해보는 책들도 있는데, 물론 '동업자'들의 책이다. 최근에 나온 것으로는 박찬운의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한울, 2011), <최재천의 책갈피>(폴리테이아, 2011), 그리고 한윤정의 <명작을 읽을 권리>(어바웃어북, 2011) 등이 오늘 배송받은 책이다. 저자는 각각 법대 교수와 변호사, 그리고 현직 기자. 그럼에도 '책에 대한 책'을 쓴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보람과 애로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김도언의 <불안의 황홀>도 주문을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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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TAS 2011-08-2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은 기본소양으로서 꽤나 좋고 풍부한 정보를 담고있군요..서지정보도 마음에 들고요

로쟈 2011-08-25 22:58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책이죠. 사상가 사전이라고 할 만한...

2011-08-25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국사람 2011-08-2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책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쌓아둘 자리나 있는지....

로쟈 2011-08-26 09:00   좋아요 0 | URL
만권부턴 장서가라고 하는 모양인데, 엄청나진 않습니다. 둘데가 없을 뿐이고(분산해놓고 있어서 제때 책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사하기가 곤욕스럽지만요.--;

소설가 2011-08-2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을 많이 소개해 주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