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장바구니담기


긍정적인 태도를 권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런 얘기들이 너무 많다는 거다. 너무 많아서 당연하게 생각되고, 당연한 것이 되다 보니 다르게 생각해야 할 나머지 절반의 상황에서도 같은 관점으로만 사태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할 때도 있지만 중이 절을 고쳐야 할 때도 있는 게 세상 아닌가.
-5쪽

뭐든지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대표를 뽑을 때는 물론이고,
집이나 음식을 나눌 때도,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할 때도 사람들은 가위바위보를 했습니다.
연달아서 이기거나 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규칙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영원히 지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 사람, 이 규칙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 마을의 위험한 일을 맡았다가 손을 다친 후로 주먹을 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한 동안은 주먹만 내는 것으로도 웬만큼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서히 그가 주먹밖에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그와의 대결에서는 모두가 보자기를 내었습니다.-45쪽

농장 주인의 말에 모두들 곰곰이 생각을 했지만 자기도 좋으면서 남들은 불만을 가지지 않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끙끙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열다섯 냥 받는 일꾼 하나가 체념하듯 내질렀다.
"그러면 차라리 작업반장한테 줘 버리쇼. 그 사람이야 어차피 몇 냥 더 받아 봐야 티도 안 날 만큼 돈이 많으니 어느 누가 불만을 가지겠소."
모두들 그게 낫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작업반장은 매달 천 냥하고도 스무 냥 정도를 더 받게 되었다.
다른 일꾼들은 뭔가 알 수 없는 허탈함을 느꼈지만, 다들 그만 잊기로 했다.-77쪽

혼자가 된 빨강이는 일이 두 배나 많아지긴 했지만 즐겁게 일했습니다.
농장 전체를 책임지는 솜씨 좋은 일꾼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주인은 훨씬 더 즐거웠습니다.-91쪽

어느 날 무료함과 외로움에 지친 조물주는 자신을 즐겁게 해줄 개를 만들었다.
개들은 당당하면서 아름다웠고 온순하면서 용맹했다.
조물주는 그의 창조물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개들은 그들의 주인처럼 무료함에 지쳐 갔다.
그들에겐 그들의 용맹과 당당함을 증명할 무엇이 필요했다.
조물주는 자신의 사랑스런 개들을 위해 돼지를 선물했다.
돼지를 받은 개들은 늘 웃었고 늘 행복했다.
돼지들은 매일 신체의 일부를 잃거나 죽었다.
끊임없는 고통과 두려움에 지친 돼지들은 조물주에게 간청했다.
"개들을 없애 주십시오."
"내가 그들을 아낀다."
"그러면 저희에게서 개들을 멀리 떼어 놔 주십시오."
"내가 그들을 아끼고 그들이 너희를 즐긴다."
"그렇다면 저희에게 이 고통을 이길 무언가를 주십시오."
연민을 느낀 조물주는 돼지들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다.
망각과 웃음.
선물을 받은 돼지들은 여전히 고통받았지만 개처럼 웃을 수 있었다.
웃으면서 잊었고 잊으면서 웃었다.
그래서 개처럼 행복했다.-125쪽

"세상은 늘상 변하기 마련이야. 지금까지 뜨거웠던 적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란 법이 있나? 환경이 변하면 거기에 적응해서 살면 되는 거야. 변화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들이나 괜한 불평을 늘어놓지."-150쪽

"요 근래에는 나조차 버티기 힘들 정도로 괴롭긴 했어. 하지만 나는 곧 이것이 단순한 고통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이 고통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서 나는 삶의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되었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자만하며 살았는지 반성하게 해서 겸손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지. 또한 이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자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무한한 용기가 샘솟아 더 이상 무엇도 괴롭거나 두렵지 않게 되었지. 이 고통은 아마도 내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일 거야."
개구리들은 모두 그를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들도 고통을 선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민한 개구리는 고통을 참을 수도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는 냄비를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바보들아, 뜨거운 건 그냥 뜨거운 거야.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뜻일 뿐이라고!"
개구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민한 개구리처럼 불평불만만 늘어놓다가 이 순간의 소중함을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152쪽

숲의 표면은 그대로였지만 저절로 순환하던 숲의 역사는 멈춰 버렸다. 나무들이 커다란 몸을 유지하는 데만 온 힘을 쏟느라 새로운 씨앗을 떨어뜨리지도 않았고, 설사 새로이 싹을 틔우는 씨앗이 있다 해도 한 줌의 햇빛조차 흘려버리지 않을 만큼 빼곡한 잎의 성벽에 막혀 숲의 아래쪽은 늘상 밤보다 어두웠기 때문에 어떤 새싹도 자랄 수 없었다.
어둠을 싫어하는 동물들, 꽃을 찾던 동물들도 다른 숲을 찾아 떠났다. 새들이 사라지자 나무를 먹는 벌레들만 폭발하듯 늘어났다. 벌레와의 힘겨운 싸움에서 패배한 죽어 쓰러진 나무들의 썩은 몸만이 숲에 남은 유일한 양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먹고 먹이며 순환하던 나무들은 이제 이웃의 나무가 죽어야만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삶 또한 머지않아 모두의 파멸로 끝이 날 터였다.-19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민의 기생충 열전 -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7월
장바구니담기


기생충을 탐욕의 상징에 비유한 것도 잘못됐다. 기생충은 언제나 먹을 만큼만 먹는다. 세상에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22쪽

2009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총 39구의 미라가 발견됐다고 하는데, 그 후에도 미라는 쉬지 않고 발견되고 있다. 건조한 기후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운 기후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미라가 만들어진 비결은 뭘까? 답은 ‘회곽묘’에 있다. 15세기 후반부터 양반들이 쓰기 시작한 회곽묘는 17~18세기에는 중·하류층에서도 널리 이용됐는데, 우리나라의 미라들은 100% 이 회곽묘에서 발견된다. 서울대 신동훈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회곽묘가 미라를 만드는 메커니즘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산소 차단. 나무로 된 관 주위에 회반죽을 부으면 산소가 차단되어 산소를 좋아하는 호기성 세균이 다 없어진다. 둘째, 열 발생. 산소가 차단돼도 혐기성 세균이 남아 있으니 시체가 부패할 수 있는데, 회반죽이 굳을 때 발생하는 열이 남은 세균들을 모조리 죽인다. 연구에 따르면 섭씨 100도 이상의 고열이 세 시간 이상 지속됐다고 하니, 이 정도면 어떤 세균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실제로 신 교수가 쥐를 죽여서 회곽묘에 넣어 봤더니 일반 관에 넣은 쥐와 달리 3년이 지나도 거의 썩지 않고 원형을 유지했다고 한다.
-31쪽

미라가 나오는 회곽묘들은 대부분 우리나라를 좌우했던 명문가의 조상들. 그러다 보니 자기 가문의 조상이 미라가 됐으며 또 기생충까지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장 과정에서 발견되니 미라들 중 많은 수가 연구자 손을 거치지 못한 채 그냥 화장돼 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에서 나온 미라들의 연구 결과가 대부분 유수의 외국 학술지에 실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반 가문들의 대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그 당시 사람들 중 기생충에 안 걸린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또 하나는 고고학자들과 의학연구자들의 공동 연구다. 발견된 미라가 어느 시기의 것인지, 그 시기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기생충의 알을 많이 찾는다 해도 거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리라.
-37쪽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기생충학과가 의과대학에 먼저 생겼다는 거다. 기생충은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생물체가 기생충을 가지고 있어, 예를 들어 길을 가는 쥐를 잡아서 조사해 보면 거의 대부분 기생충이 발견된다. 그 기생충들 중에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신기한 것들이 많고, 그중 일부는 사람에게도 감염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각 대학의 자연대마다 기생충학과가 있고 그 후에 의과대학에 생기는 게 맞고, 만약 그랬다면 기생충 연구의 저변도 지금보다는 넓었을 것 같다.
-43쪽

회충 알은 회충 암컷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변을 봤을 때 외계로 배출된다. 막 나온 회충 알은 사람에게 감염되지 않으므로 친구가 회충에 걸렸다고 해서 절교할 필요는 없다. 회충 알이 감염력을 가지려면 적당한 온도와 습도에서 2~3주가량 숙성되어야 하며, 촉촉한 땅에서는 그 뒤에도 오래도록 살아 있으면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갈 날만 기다린다.
-85쪽

정부에서는 양성자를 색출해 회충약을 먹였다. 수많은 회충들이 회충약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갔고, 그 바람에 대변으로 나오는 회충 알의 개수가 확 줄었다. 겨우 살아남은 회충들이 대변으로 알을 내보냈지만, 회충의 감염경로를 제대로 파악한 우리 정부는 "인분 비료 사용금지"라는 철퇴를 내린다. 이는 대변에서 잘 숙성된 알이 배추를 통해 사람 입으로 전달될 방법이 없어져 버린 것으로, 회충 입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다. 게다가 변기가 점차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회충은 멸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70년대까지만 해도 50%를 넘던 회충 감염률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 1990년대에는 0.1%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한 사람 안에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던 시절은 갔고, 지금은 잘해야 한 마리가 고작인 세상이 됐다. 어두컴컴한 사람의 몸 안에서 자기 친구는 언제쯤 올까 궁금해하며 고독을 삼키는 회충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저 마음이 아프다.
-89쪽

편충은 영어로 ‘whipworm’이라고 부른다. ‘채찍 벌레’라는 뜻인데, 두꺼운 뒷부분이 손잡이 역할을 하고 가느다란 앞부분이 채찍의 때리는 부분에 해당된다. 편충의 슬픈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채찍 부분이 충체의 앞부분인데 사람들은 여기를 꼬리라고 생각해 ‘꼬리가 채찍처럼 된 벌레(Trichuris)’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느다란 앞 부분에 입도 있고 식도도 있다는 게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편충의 이름을 잘못 지었다는 걸 깨닫는다. 당황한 사람들은 뒤늦게 ‘머리가 채찍처럼 된 벌레(Trichocephalus)’라고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줬지만, 그전 이름에 익숙해진 학자들은 "그냥 쓰던 대로 쓰자. 편충이 서운해 봤자 지가 어쩌겠어?"라며 기존 학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는 시에서 보듯 제대로 된 이름은 하물며 기생충에게도 중요한 법, 이 사건으로 인해 편충은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94쪽

생선회 하면 누구나 일본을 떠올릴 만큼 일본의 전통 요리로 알려져 있지만, 혹시 우리나라에서 회를 먼저 먹은 건 아닐까? 일본에서 생선회가 널리 퍼진 건 임진왜란 후인 에도시대 이후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전에도 생선회를 먹은 흔적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다섯 살 아이 말고도 간디스토마의 알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묘에서 제법 발견되고, 심지어 삼국시대 화장실로 추정되는 구조물에서도 간디스토마의 알이 여러 차례 나왔다. 예컨대 가장 오래된 화장실로 알려진, 백제 시대에 사용됐던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도 간디스토마의 알을 발견했고, 그보다 이른 시기의 화장실에서도 간디스토마의 알이 나온 바 있다.
그렇다고 생선회의 원조가 우리나라라는 건 아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시경』에 구운 자라와 생선회 이야기가 나오고 ‘인구에 회자되다’의 ‘회자’가 ‘날생선과 구운 고기’라는 뜻이니, 다른 문화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생선회도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겠지만, 최소한 일본보다 먼저 회를 먹은 건 확실해 보인다.-110쪽

우리나라야 와포자충 감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지만, 다른 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상기하자. 외국에 나가면, 그게 설령 스웨덴이나 미국이라 할지라도, 물을 끓여 먹거나 메이커 있는 생수를 사 먹길 권한다. 좋은 물을 먹는 데 돈을 쓰는 것이 체류기간, 혹은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물설사를 쭉쭉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일 것 같아서다.
135
우리나라에는 뱀을 먹는 집단이 존재했다. 군대 말이다. 생존훈련이라고, 식량도 없이 낙하산으로 아무 곳에나 떨어뜨려 놓은 뒤 부대로 찾아오게 하는 이 훈련은 병사들을 강하게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스파르가눔과 서울주걱흡충에 걸리게 만듦으로써 전투력을 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119쪽

한 환자는 수시로 출몰하는 스파르가눔 때문에 7년간 여섯 차례나 수술을 했단다. 후자의 환자는 공수부대 출신으로, 군부대에 있을 때 낙하산을 타고 깊은 산골짜기에 투하되어 부대까지 찾아오도록 하는, 소위 생존 훈련을 여러 차례 받은 적이 있다. 산속에 먹을 거라곤 뱀과 개구리뿐이었는지라 그가 여러 마리의 스파르가눔을 갖고 있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듭된 스파르가눔으로 고생하던 그는 국가에 소송을 제기했고, 2007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는 그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163쪽

32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미라에서 선모충이 발견된 것처럼 선모충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돼지고기를 먹고 얼굴이 부었다면 돼지고기가 원인이라는 것 정도는 과거 사람들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부정한 것이다. 이런 것들의 고기는 먹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주검을 건드려도 안 된다."
성경책에 쓰인 이 구절을 보면 성서시대 초기에도 이미 돼지고기의 위험성을 알았던 모양이고, 과거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못 먹게 했던 것도 겉보기엔 멀쩡하게 보이는 돼지를 잡아먹은 뒤 쓰라린 경험을 했던 게 한 원인이 됐다고 한다. 7세기 경 모하메드가 식단에서 돼지고기를 금지한 것 역시 선모충의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측이다.-189쪽

1791년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모차르트의 사인으로 중독설을 비롯해서 연쇄상구균 감염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된 바 있는데,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선모충이다. 모차르트는 죽기 44일 전 돈가스 비슷한 돼지고기를 덜 익혀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 감염된 선모충이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인류가 모차르트의 주옥같은 곡들을 즐길 기회를 기생충이 빼앗은 셈이다.
-190쪽

호바스라는 학자는 얼룩말의 줄이 수면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로로 된 줄무늬가 편광현상을 일으켜 파리가 사물을 식별하는 데 지장을 준다고 한다. 즉 얼룩말은 원래 수면병에 취약한 동물이었는데 줄무늬를 만듦으로써 체체파리에 물리지 않게 됐다는 것. (...)진화 과정에서 줄이 있는 얼룩말이 더 많이 선택되도록 압력을 받은 결과라는 건데, 이 실험에 대해 한 언론은 얼룩말의 줄이 "세계에서 가장 영리한 파리 격퇴제"라고 격찬했다. 그러니 정 사파리를 가야겠다면 줄무늬가 있는 옷을 입는 게 좋겠다. 그냥 줄무늬가 아니라 세로 줄무늬 옷을.-211쪽

지독한 경험을 했을 때 ‘학을 떼다’라는 말을 쓰는 것도 말라리아가 그만큼 지독했다는 방증이기도 한데, 호란 때 잡혀갔다 돌아와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소현세자의 경우 독살설이 유력하지만, 학질로 죽었다는 설도 만만치 않다.
-223쪽

열대말라리아는 겨울철에 16~18도 이하로 떨어지면 전파가 안 되는데, 영하 10도 쯤은 우습게 넘기는 우리나라 겨울을 견뎌 낼 재간은 없다. 삼일열말라리아가 9개월이라는 매우 희한한 잠복기를 갖게 된 것도 사실은 우리나라의 겨울이 춥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구 온난화가 될 경우, 그래서 우리나라가 확 더워져 버리면 열대말라리아가 유행할 수도 있을까? 이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계속 걱정하는 사안인데, 지구 온난화는 혹시 백인들의 피가 먹고 싶은 말라리아의 음모가 아닐까?
-231쪽

회충이나 장디스토마처럼 장을 침범하는 기생충은 대부분 별다른 증상을 일으키지 않지만, 폐디스토마나 스파르가눔처럼 조직을 찾아 들어가는 기생충은 필연적으로 병을 일으켜 사람을 고통받게 한다. 더 이상 보약으로 가재즙을 먹는 사람은 없겠지만, 민물게장을 먹을 땐 폐디스토마 유충이 있는지 조심하자. 보름 이상 담근 건지 물어 보는 것만 잊지 않으면, 맛있는 게장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다. 보름 간 담궈 둘 여건이 안 된다면 하루 정도 냉동시키는 것도 기생충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27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구판절판


그에게서만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한마디였으나 나는 당신 어머니가 아냐, 라고 그녀는 토를 달지 않는다.
-203쪽

"복숭아가, 달고 맛있더군요, 저쪽 시장에서 어르신들 파시는 게."
조각은 이미 시작한 말을 도중에 멈추지 못한 채, 다만 자기의 말들이 조악한 질감과 형태가 있어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대로 과자처럼 바스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첫 어절을 떼면서는 뭔가 의도를 담고 한 말이 아니었지만 말을 하는 동안 왠지 거기에 모종의 위협이 담긴 것처럼 상대방이 받아들일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을 적에는, 당신 부모님이 파시는 과일의 품질과 맛이 좋으며 그런 물건을 파는 부모님 또한 좋은 분들인 것 같다는 그 이상의 뜻을 나타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맥락과 개연성에 따라서는 전혀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 ‘나는 당신 부모님 이미 찍어놨고 얼굴 다 알아.’ 후환이 두렵다면, 부모님이 안전하길 바란다면 그날의 일에 대해 누구에게든 술자리 안주로라도 입 벙긋하지 말라는 새삼스러운 재확인. 여기다 한층 더 이완된 얼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딸 아이의 순면 같은 두 뺨과 작게 돋은 온디콩 같은 점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면 쐐기를 박는 셈.-204쪽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222쪽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
지금 이렇게 두 팔을 둘러 오히려 조금 전보다 포옹을 견고히 하면서 할 말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조각은 잠자코 들었다. 그가 그렇게 믿고 말한다면 그의 말이 옳을 것이었고, 팔에 깊이 힘이 들어간 것은 이 기이한 제사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뜻했다.-236쪽

잊어버려.
그녀는 멈춰 선다.
왠지 언젠가 비슷한 장면이 실제로 있어서 그런 말을 누군가한테 했던 것만 같다.
그녀가 방역 현장을 제삼자에게 목격당한 경우는 많지 않다. 언제였더라? 순간 한기가 돌고 콧속이 간질거린다.-243쪽

이번 일만 끝나고 날씨가 풀리는 대로 녀석에게 산책을 좀더 자주 시켜줄 것이다. 보통의 노부인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목줄에 개를 끌고 다니고, 조금만 가면 사람이 개를 끄는지 개가 사람을 끄는지 모를 만큼 빨라지는 걸음을 숨이 찬 듯 쫓아가며, 역시 개를 산책시키는 다른 이들과 눈인사도 나눌 것이다. 동네의 다른 개들도 만나게 해주고, 서로 눈 마주치게 놔두어 탐색의 시간을 줄 것이다. 어쩌면 다른 개 주인들은 혈통이나 천 것을 운운하며 꺼릴지도 모르지. 분명한 것은 일상생활의 확장에 불과한 이런 평범한 약속을 운명처럼 걸어두어야 할 만큼 투우는 쉽지 않은 상대다.
-277쪽

그녀는 잠든 무용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깊이 파고들어보다가, 무용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참을 그 자세로 손가락만 대고 있다. 슬며시 흔들어보는 무용의 몸은 무겁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283쪽

최 씨의 대답을 듣기 전에 경고음이 몇 번 흐르다가 전화가 끊어진다. 주머니가 가볍고 남은 동전은 이제 없다. 단지 동전이 바닥났을 뿐인데도 조각은 지금껏 형태를 유지해온 자신의 남루한 삶 전체를 비워나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286쪽

그들은 손톱을 보고 바로 이어서 손톱 주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뜰지도 모르지. 도저히 당신과 같은 나이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장식이 아니라는 편견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다만 침묵하거나 헛기침하며 흘끔거리겠지.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332쪽

마지막까지 대출혈 자폭 서비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3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장바구니담기


"하여간 드라마 탓이야. 요즘 판검사가 무슨 대수라고. 품위 없게."
할머니가 품위를 따질 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그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어 혼란스러워지곤 했다.-33쪽

부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혜는 싸늘하고 냉소적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애가 아직 그들을 포기하지 않은 증거임을 알고 있었다. 사랑은 어쨌든 상대를 포기하기 전의 상태이므로, 지혜가 부모를 사랑한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46쪽

1994년 여름,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3384명이었다.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폐사한 가축의 빈 우리를 뉴스에서 보았다. 저런. 뜨거운 물에 우린 잎차를 마시던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할머니가 단언했다. 종말이 가까웠다니까요. 그들은 반팔 실내복 위에 칠부 소매의 얄따란 카디건을 덧입고 있었다. 그 집의 실내온도는 언제나 25.5도와 26도 사이를 유지했다. 나의 조부모는 한의사의 조언대로 찬 기운이 몸에 스며드는 일만큼 해로운 건 없다고 믿는 눈치였다. 세상에는 얼음도, 설탕도, 콜라도, 배달 치킨도 먹지 않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경건하지 않은 삶 말이다.-62쪽

나는 도서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여름방학 동안 이곳은 거의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넓지 않은 열람실에 낡은 선풍기 한대가 권태롭게 돌아갔다.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유지시켜주는 바람이었다. 아릿한 먼지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졌다. 서가는 어둡고 서늘해서 숨어 있기 좋았다. 나는 세계문학전집이 순서대로 꽂힌 책장 밑에 쭈그려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각권의 맨 뒷장에는 초판 발행일이 인쇄되어 있었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날보다 하루라도 먼저 나온 책들만 읽었다.-64쪽

책의 어떤 페이지에도 밑줄은 치지 않았다. 나만을 위한 빨간 줄을 긋는다고 해서 거기 새겨진 의미들이 내 것이 될 리 없을 테니. 나보다 오래 존재해온 글자들이 이 세계 어딘가 낡은 책장들 속에 납작 엎드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65쪽

그러고 보면 세미와 나 사이에는 거의 항상 지혜가 있었다. 셋은 비겁하고 안전한 숫자였다.
-127쪽

"면허 언제 땄어?
"안 땄는데."
"그럼, 운전 잘해?"
"몰라, 오늘이 처음이야."
"아, 미쳤어 정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지혜는 허리가 꺾이도록 웃었다. 세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는 가게에서 쓰는 미니 승합차의 열쇠를 주면서 트렁크에 실린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가지고 가라고 했다. 차를 통째로 가지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차가 없어진 사실을 알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맨 먼저 당황할 것이고 곧 화를 낼 것이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하느님에게 다 일러바치고 그분으로부터 답을 구할 테니까. 그리고 머잖아 편안해질 테니까.-145쪽

각진 얼음 조각을 억지로 삼킨 듯 목구멍이 아렸다. 자정께 받자마자 끊는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엄마도, 성우 오빠도 이 집 전화번호를 알 리 없었다. 서툰 희망이 생 전체를 서서히 좀먹어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체념하는 법을 배우기에 적절한 밤이었다.
-167쪽

준모는 과연 운전을 잘했다. 바르고 절도있는 운전이었다. 횡단보도의 금을 밟기 전에 부드럽게 멈춰 서고, 완전히 초록 신호등이 들어온 다음에야 움직였다. 누가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습격당하지만 않는다면 그는 쎄렝게티 초원의 기린처럼 아무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였다. 지혜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초식동물인 척 살 수 있을까?
-181쪽

출장 정원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정원은 나날이 황량해졌다. 감나무 가지 꼭대기에 채 떨어지지 않은 홍시 한 개가 매달려 위태로이 흔들렸다. 봄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고집스럽게 천천히 진군하여 온 세상을 점령할 것이다.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그때가 오면 나는 여기를 떠나 또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뿌리라는 게 내게 있기나 하던가. 반포 주공아파트를 떠나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먼 곳에서 여기 한남동을 그리워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감나무에 홀로 매달린 열매 하나는 채 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긴 겨울을 살아남은 것이었다.
-207쪽

"내가 마음은 안 그런데 완이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고모는 말끝을 흐렸다. 고모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고모는 완이가 옆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아이라는 존재에 옭매여 살고 있었다. 완이를 버거워하고 또 그만큼 사랑했다.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명제는 참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부모가 행복하다는 뜻은 아님을 나는 알게 되었다.-213쪽

비밀은 지켜졌고, 나와 지혜와 준모는 다시 모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내가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인 거였다. 준모도 지혜도 어딘가에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우스운 영화를 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면 원래 다 그런 거라고들 말했다.
‘너의 아이가 살고 있는 아침의 집에 너는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른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228쪽

"아니, 나도 같이 있을 거야."
자꾸 혀가 말렸지만 나는 또박또박 발음하려고 애썼다. 나 역시 진심이었다. 진심이라는 단어에 영원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때의 나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건 혼자만 배제되는 것이었다. 비겁하다고 낙인찍히는 것이었다.-23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솔로몬의 위증 2 - 결의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장바구니담기


"난 가시와기를 어른아이라고 생각했어."
몸은 어린아이인 채 머리만 어른이 된 녀석-
"반면에 오이데는 아이어른. 덩치나 하는 짓은 어른인데 머리가 어린애야. 정반대지."
어른아이와 아이어른은 어울릴 수 없다. 어른아이는 그 사실을 알지만, 아이어른은 모른다.-323쪽

"정말로 현명한 녀석은 시간과 타협할 줄 알아. 자기가 아이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꼭 남에게 말하거나 일기에 쓰지 않더라도 알고는 있어. 아니까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거야."
-324쪽

"눈보라까지는 아니지만 이따금 웅웅대는 소리가 들렸던 기억이 나. 특히 한밤중에. 눈 내리는 밤이 고요하다는 건 단순한 고정관념일 수도 있어."-349쪽

"이번 교내재판이 그애한테도 좋은 ‘자리’가 되면 좋겠구나."
어떤 ‘자리’일까. 거짓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무대?
"고발장을 쓴 그 여자애한테도."
가자미 선생이 가게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리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자기 말에 귀기울이고 믿고 편들고 함께 싸워주는 경험이 절실하게 필요할지도 몰라. 바로 지금 너희가 슌지 군에게 해주는 것처럼."-377쪽

"가시와기랑 노다는 같은 부류로 보였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어. 어쩌면 료짱도 그랬을지 모르고."
얌전하다. 눈에 띄지 않는다. 이렇다 할 장점이 없다. 인기가 없다. 여자애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겐이치는 속으로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하지만 개성은 달라. 그 당연한 걸, 학교에 갇혀 한데 섞여 있다보면 잊어버려. 선생님들도 그러지 않을까. 뭐랄까, 대충 뭉뚱그려버리지."-425쪽

"네가 미야케를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알아. 얘기를 들어보니 별로 호감가는 애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겠어. 그렇지만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말이라고 모두 거짓이라 단정하는 건 잘못이야.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오이데가 살인자 취급을 받았다는 걸 우리는 잊으면 안 돼."-434쪽

진실을 밝혀내려면 이런 서툰 연기가 필요해요. 오이데 슌지 패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들을 저질렀는가. 학교와 동급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쳤는가. 피해자 중 한 명인 미야케 주리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가. 그런 것들을 다 알면서도 학교는 얼마나 수수방관했는가. 그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기 위해 우리 검사 측은 굳이 불리한 제비를 뽑은 거예요. 처음부터 진 싸움이라고요, 아버님. 그리고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면,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보고도 못 본 체한 책임이 있음을 통감해 미야케 주리의 거짓말을 믿기로 했어요. 한 번쯤 온 힘을 다해 그애 편이 되어주기로 결심했어요. 우리는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패배하는 쪽을 선택한 거예요.-51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