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2 소설 조선왕조실록 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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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군의 야망이 어디까지라고 보십니까?”
숲으로 사라졌던 매가 날아올랐다. 발톱엔 토끼 한 마리를 움켜쥐었다. 날갯짓이 힘찼다.
“삼봉, 자네보단 작겠지.”
“그럼 우리 셋 중 가장 작겠군요. 제 욕심이야 포은 형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까요.”-19쪽

“슬픔을 느끼지 않고 이치만 따지기 때문에 백성이 정치가를 믿지 못하는 겁니다. 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죽임을 당하는 일, 흉년이 들고 돌림병이 도는 일, 또 수십 년을 함께 산 황소가 갑자기 숨을 거둔 일, 이 불행들을 어떤 이치로 명쾌하게 설명하시렵니까? 우는 것 외엔 답이 없는 일도 꽤 많습니다.”
비로소 그 농부가 땅만 갈고 곡식만 심는 이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66쪽

반백 년 살며 마음에 머문 문장들을 꺼내 정리했다. 잡동사니로 가득 찬 고(庫)를 가지런히 청소한 기분이 든다. 오늘부터 찾아드는 문장은 강제로 등을 떠밀어서라도 날려 보내리라. 많이 지닐수록 어느새 많이 추한 나이다.
-105쪽

너는 언제나 백성의 편에 서라. 왕을 중심으로 역사를 쓰거나 읽지 마라. 왕은 다만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옳다 그르다 결정만 내리고, 그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는 책임을 질 신하를 고르는 데만 급급한다. 백성이 왜구에, 돌림병에, 굶주림에 죽어 나가도 왕은 애석한 표정만 지으며 귀신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연기나 피워 올린다. 도적을 물리쳤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풍년을 이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고행은 전부 백성이 하고 영광은 모두 왕이 누리니, 어느 백성이 그 왕을 자신들의 왕으로 떠받들겠는가.

너는 왕이 부르면 그 이유를 미리 살피고 꺼내 놓을 이야기와 왕이 던질 질문과 또 거기에 합당한 답을 고려하고 가라. 백성이 부르면 우선 가라. 고민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
-107쪽

너는 명심하라,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썼음을.
-108쪽

너는 왕의 신하로 만족하지 말라. 너는 왕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너는 함께 죽을 벗이 세 명 있는가? 있다면 멋진 삶이다. 두 명 있는가? 있다면 넉넉한 삶이다. 한 명 있는가? 있다면 헛되지 않은 삶이다.-109쪽

정처 없는 희망은 확실한 절망보다 절망스럽다.
-144쪽

기억의 관절이 비틀렸다. 내일의 성문들이 벽처럼 닫혔다. 단어나 문장이 되지 못한, 타인에게 전달하기 힘든, 그러나 한 생애를 이미 살아버린 쭈글쭈글한 외마디들이 그 벽 아래 시체처럼 쌓였다. 이것은 배신이다. 정몽주를 잃는 것은 세상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고 믿었건만.
-175쪽

한 입으로 두말하고도 지탄받지 않는 멀쩡한 이가 누구인가. 군왕이다. 백성과 관리들은 말 한 마디 잘못했다 하여 옥에 가두고 귀양을 보내고 때론 죽이지만, 왕은 말을 바꿔도 된다. 착각이나 실수였다 둘러대도 된다. 그래서 나는 왕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 왕이 요나 순이라고 해도, 그들은 한 입으로 두말을 한다. 그 때문에 누군가 지독한 상처를 입는다. 바로 오늘 나처럼.
-201쪽

이방원이 포은을 해치면 혁명의 완성은 더욱 더딜 것이야. 어쩌면 영원히 실패할지도 몰라. 포은과 내가 함께 법과 제도를 만들어 공표한다 해도 10년은 족히 걸릴 일이니까. 한데 포은이 없다면, 이 일은 20년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하지. 포은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긴 어렵네. 조준은 경제에만 밝을 뿐이고 하륜은 지리에만 조금 뛰어나며 윤소종은 공맹의 말씀을 깊고 넓게 해석하는 솜씨는 탁월하나 백성의 처절한 고통을 어루만지는 데까진 이르지 못했네. 남은은 배짱이 두둑하지만 정밀하지 못하고 남재 역시 마찬가질세. 포은밖에 없어.
-201쪽

정안군 이방원은 포은을 참살하여 내 발등을 찍었다. 대장군 앞으로 보낸 서찰도 막고 망량까지 죽였다. 나는 이방석을 세자에 올림으로써 그 빚을 갚아 주었다. 정안군과 나는 서로의 이름만 듣고도 심장을 뜯어 먹지 못해 분통을 터뜨리는 사이가 되었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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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소설 조선왕조실록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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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표적인 책사로 정도전과 한명회가 흔히 꼽히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한명회는 기껏해야 수양대군을 용상에 앉히는 데만 집중했다. 그에게는 제도와 사상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반면에 정도전은 법, 제도, 종교, 국방, 도읍지, 조세, 교육 등 가장 사소한 것에서 가장 거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새 세상의 전망과 방안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혁명과 건국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정도전은 이성계와 대등하게 이마를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였다. 이성계는 단 한 번도 정도전을 책사 취급한 적이 없다. 『맹자』를 탐독하고 유배라는 하방을 거치면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만난 문신과 숙련된 기병을 거느리고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무장의 기이한 우정은 멋지고 그윽하다. 대장부답다.
-7쪽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바다는-
아직 지나가지 않은 바다.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아이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세월은-
아직 오지 않은 세월.
그대에게 내 말하고 싶은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말은-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은 말.
-『옥중서한 제19신』-나짐 히크메트가 쓰고 백석이 번역하다.-13쪽

사람이 새로워지지 않고는 나라도 새로워지지 않는다. 사람이 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사람의 이치와 느낌을 분명히 남기는 것이, 미완일지언정 지금 꼭 필요하다. 스스로 잊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자서(自序)를 지어 붙이곤 여명에 질문을 던진다. 정도전, 너란 인간은 6년 전 높고 고운 나라(高麗)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가?
-19쪽

“여기 큰 집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당우(堂宇) 그러니까 지붕은 왕이고 동량(棟樑) 그러니까 용마루와 들보는 정승이며 기초는 백성에 빗댈 수 있습니다. 기초는 마땅히 단단하고 두터워야 하고 동량은 마땅히 편안하고 우뚝 솟아야 하니, 그다음에야 당우가 튼튼할 겁니다. 동량은 위로는 지붕을 받들고 아래로는 기초에 의지하여 서니, 재상이 왕을 받들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과 흡사합니다. 일찍이 상나라의 명재상 이윤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하는 위로는 덕을 펴고 아래로는 백성을 가르친다.’”
-55쪽

누구에게는 날갯짓 한 번에 깨는 악몽이 누구에게는 헤어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출세욕이며 찬탈이다.
-58쪽

나라를 위해서라거나 사직을 위해서라고 답했다면 실망했으리라. 그러나 대장군은 평생 거창한 명분보다 이웃의 행복을 소중히 여겼다. 백성을 최우선으로 두는 포은이나 나의 입장과, 이르는 경로는 달랐지만 종착지는 놀랍도록 똑같았다.
-76쪽

욕심은 열정이다. 욕심 없이 대의를 도모하긴 어렵다.-82쪽

물은 웅덩이를 모두 채운 후에야 다음 개천으로 흘러내려 간다. 이방원은 아직 더 차올라야 한다. 더 아파야 하고 더 외로워야 한다. 낮의 질주보다 밤의 침잠을 배워야 한다.
-83쪽

변방의 이름 없는 장수였던 이성계를 중앙의 문무 대신들에게 적극 추천하여 중용하도록 이끈 이가 누군가? 포은일세. 포은의 이토록 놀라운 추진력과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변화에 대한 갈망을 무시한 채 ‘고려에 충성을 다하려는 신하’로 묶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는 나보다도 더 깊이 절망했고 나보다도 더 뜨겁게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네. 다만 사전 혁파를 목소리 높여 반대한 한산부원군과 사제지간인 탓에 주장을 펴는 데 말을 아꼈고, 또 금상이 스승의 예로 포은을 대하니 그들이 돈독해 보일 뿐일세. 포은을 베겠다는 것은 곧 나를 베겠다는 것과 같아.
-87쪽

혁명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 줄 아는가. 절망이라네. 분노에 뒤이은 실패 그리고 절망. 이 셋을 반복하는 동안 혁명은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가 뻗고 가지가 펼쳐진 뒤 꽃이 피고 열매가 매달리지.
-192쪽

“수문하시중께선 늘 이런 식이라오. 정말 우릴 말릴 생각이셨다면 문을 열고 나와서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오. 한데 병을 핑계로 자리를 피한 것은, 그 침묵에는 최소한 우리가 어찌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뜻이 담긴 게요. 최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악도 아니니 걱정들 마시오. 우리가 계속 뜻을 굽히지 않으면 시중께서도 못 이기는 척 우리 편에 서실 것이오.”
-220쪽

멀리서 포은을 대한 이들은 넉넉하고 과묵한 인품에 반하여 독한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포은이 정말 일개 서생에 불과했다면, 권력에의 의지가 없었다면, 공민왕, 신우, 신창을 거쳐 금상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하였겠는가. 그는 언제나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우두머리를 놓치지 않았다. 착한 마음으로 어찌 으뜸을 얻고 유지하겠는가.
-230쪽

명나라가 중원의 최강자로 들어섰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 명나라를 공격하려고까지 하였다네. 명나라는 당연히 의심을 품고 있어. 그런 명나라를 안심시키기 위해선, 왕실에서 원나라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울 필요가 있네. 신돈의 씨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아. 공민왕이 신우를 아들로 인정하여 세자로 삼았고 신창이 아버지인 신우에 이어 왕위에 올랐네.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계속 원나라의 입김이 이어지고 있는 거야. 이를 확실히 잘라 내기 위해, 원나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방계 왕족 중에서 금상을 고른 거야. 자, 이제 고려는 확실히 원나라와 정리를 했습니다, 라고 보여 준 게지. 그리고 세자의 입조는 이를 증명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네. 신우와 신창을 내리고 세자를 명나라에 입조하도록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이가 누구인가. 바로 포은이라네.
-232쪽

암살에 성공하더라도 대장군이 쌓은 따듯함과 너그러움의 탑은 일시에 무너지고 마네. 광폭함을 숨겼다는 누명을 쓰게 될 걸세. 포은의 목은 얻겠으나 천하를 한순간에 잃게 돼.
-236쪽

왕도 사람이다. 어진 이도 있고 각박한 이도 있으며 똑똑한 이도 있고 멍청한 이도 있으며 유약한 이도 있고 강건한 이도 있다. 왕이 전권을 휘두른다면 혼군(昏君) 혹은 폭군의 도래는 시간문제다. 왕은 신하를 두려워해야 하고 신하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두려움은 힘에서 나오고 그 힘은 법과 제도를 통해 뒷받침된다. 내 구상의 핵심은 왕을 예외로 두지 않는 것이다. 왕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이지만 전체를 뒤바꾸지는 못하는 체계 속 일원이다. 이렇게 짜 둬야 왕이 설령 삼강과 오륜을 무시하더라도 체계 속에서 고쳐 나갈 수 있다.
-239쪽

인류는 현재의 화두로 과거를 끊임없이 재구축해 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과거이기에, 과거를 고찰하는 것은 곧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도약하는 방편이다.
-266쪽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일찍이 강조했다.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며 시간의 그림자이자 행위의 축적이다. 그리고 과거의 증인, 현재의 본보기이자 반영, 미래에 대한 예고이다.” 이제 조선에 새겨진 우리의 미래를 찾아 들어가려 한다. 서두르지 않고 황소걸음으로 한 문장 한 문장 최선을 다하겠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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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2-21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무성이 5.16이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라고 했다지요?
이런 사람이 대권을 바라고보 있는 현실이 참...
하긴 그 쿠데타의 수장의 딸이 대통령하고 있으니..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권력욕이며 찬탈이다.>
참 당연한 말인데 말입니다 큼큼..

마노아 2014-02-23 01:35   좋아요 0 | URL
욕심은 열정이다. 욕심 없이 대의를 도모하긴 어렵다.

전 이부분에서 지난 대선에서의 민주당과 문재인을 떠올렸어요.
충분한 표를 받고도 정당한 행사를 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자격도 없는 자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요지경 대한민국입니다...;;;;;
 
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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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게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내 고향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운명론자들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진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내 유년의 고향 마을은 물처럼 고여 있었다. 운명은 방죽에 고인 물과 같은 것이었다.
-19쪽

어린 나이였지만, 한 번도 어린아이다운 적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지긋지긋한(그는 내게 그 표현을 썼다. 그 나이에 벌써 현실에 대해 엄청나게 비극적인 상상을 하곤 했노라는 것이다)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상처받은 그의 자존심은 현실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기를 꿈꿨다. 요컨대 그의 독서에의 몰두는, 책속에서 낙원을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현실에 눈감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책들은 일찍부터 마취제였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어 책을 쓰고 있는 지금은 자신의 글 만들기가 마취제인 셈이라고, 그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나지막하게 고백했다.
-22쪽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그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
-23쪽

‘세상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가 아닌 모든 사람의 편이었다.’(《생의 이면》, 99면)
-76쪽

그는 두 개나 되는 재를 터벅터벅 걸어서 넘었다. 집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가 지나온 두 개의 재에 비하면 언덕이라고나 해야 할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더 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대신 오랫동안 버려진 채로 있는 교회당으로 갔다. 어둠이 매우 느리게, 그러나 아주 체계적으로 땅을 점령해 들어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77쪽

현실 속에서 부정해 버린 아버지를 신화 속에서 되살려 내려는 나의 무의식적인 기도를 아버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분은 신화 속에 자리를 잡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내가 지워 버린 현실 속으로 불쑥 얼굴을 내미는,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출현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86쪽

나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부정해 버린 아버지의 자리를 내 신화 속에 만들어 넣으려고 찾아온 무극사에서,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의 아버지를 만난 충격이 하도 커서 나는 정신을 가누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버지의 흔적>, 《생의 이면》, 198~200면)
-88쪽

그는 자신의 그 참혹한 가난과 외로움을 극복해 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대해 비난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비난하는 대신(비난하는 것은 참여한다는 뜻이다) 혐오하거나 기피했다. 말하자면 초월하려고 했다.
-108쪽

풍경화는 나를 질리게 한다. 서정시들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것들은 나의 심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침을 튀겨 가며 감탄해 마지않는 소위 명작들 앞에서 한없이 밋밋하기만 한 내 멀뚱한 심장을 노려보며 절망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나는 불행하다. 다른 정상인들처럼 색을 식별하지 못하는 색맹임을 알게 된 충격이 가세하여 한동안 기형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사실을 고박할 필요가 있을지.
-113쪽

나는 기억한다. 세상은 나를 힘들어했다. 내가 세상에 대해 그런 것처럼. 그것은 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 들어와야 한다고 세상은 내게 말했다. 세상 속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자기 품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사전에 이해를 확보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19쪽

아하, 쉼 없이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여태 이야기 상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왜 기도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자기 이야기를 마음 놓고 솔직하게 늘어놓기 위해서이다.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한없는 끈기와 인내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들어 줄 상대를 찾아서 사람들은 기도처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무슨 뜻이 있을까.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줄 상대, 이제까지 나는 그 상대를 찾지 못했었다. 그래서 늘 나의 일상은 불안하고 외롭고 헛헛했던 것이다.
-181쪽

살부(殺父) 인식은,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또렷해지면서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아버지는 이제 부재가 아니라 원죄였다. 원죄는 시간으로 지우지 못한다. 원죄의 무게 앞에서는 시간도 무력하다. 그는 자주 아버지를 살해하는 꿈을 꾸며 잠을 설치곤 했다. 때때로 아버지에게 그가 살해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의 편이 아니었으므로. 세상은 그와 너무 달랐으므로. 정신 이상의 아버지가 집안 어른들에 의해 감금된 것처럼 그 또한 세상으로부터 감금되어 있었으므로.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판단하고 일찍부터 세상에 대해 적의를 품고 살아왔으므로.
-215쪽

그는 다 식어 빠진 한 모금의 커피로 목을 축이고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의 쓸쓸한 웃음 뒤로 언뜻 회한 같은 것이 어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 강 상류로 헤엄쳐 올라온다는 연어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기억이 그의 영혼에 일으키고 있는 파장을 나는 그의 표정에서 읽었다. 나는 그를 재촉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쉼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띄엄띄엄 자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끔씩은 고통스러워서인지 얼굴을 찡그렸고, 때때로 부끄러움 때문인지 낯을 붉혔다.
-221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는 한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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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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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꽤 오래 시 강좌를 들었다. 강의가 실망스러우면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꽤나 흥미로웠다. 강사는 여러 번 나를 웃겼고 내가 쓴 시를 두 번이나 칭찬했다. 그래서 살려주었다.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인 줄은 여태 모르고 있겠지? 얼마 전에 읽은 그의 근작 시집은 실망스러웠다. 그때 그냥 묻어버릴걸 그랬나.
나 같은 천재적인 살인자도 살인을 그만두는데 그 정도 재능으로 여태 시를 쓰고 있다니. 뻔뻔하다.-9쪽

나는 오직 살인만 생각했다. 이 세상과 혼자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다시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그때는 DNA 검사도, 폐쇄회로 TV도 없던 시절이었다. 연쇄살인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다. 수십 명의 거동수상자와 정신병자가 용의자로 지모고대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몇몇은 허위 자백까지 했다. 경찰서들끼리는 서로 협조를 하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별개의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경찰 수천 명이 작대기를 들고 애먼 야산만 쑤시고 다녔다. 그게 수사였다.

좋은 시절이었다.-32쪽

며칠 후 내 시가 실린 지방 문예지 200부가 집으로 배달돼왔다. 등단을 축하한다는 카드도 동봉돼 있었다. 한 부만 남기고 199부는 땔감으로 썼다. 잘 탔다. 시로 데운 구들이 따뜻했다.
어쨌든 나는 그뒤로 시인으로 불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38쪽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
-42쪽

술만 마시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리는 동네 사람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52쪽

“고아원 원장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네 엄마는 죽었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엄마는 그럼 지금 어디 계실까요?”
“모르지. 어쩌면 아주 가까운 데 있을지도.”
예를 들면 우리 집 마당이라든가.-103쪽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 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중세 유럽에선 후배위, 동성애도 죄악 아니었나.
-115쪽

한 남자가 찾아와 만났다. 기자라고 했다. 그는 악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mr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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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3 - 법정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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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는 새삼스레 어떤 생각이 떠올라 눈을 가늘게 떴다. 가시와기 다쿠야가 학교에서 고립되었던 것처럼 다쿠야의 부모도 고립되어 있었다. 아이가 학교생활에서 외톨이가 되면 보호자도 같은 처지가 된다. 외부와 연결되는 파이프라인이 없어져,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중요한 것이든 하찮은 것이든 전혀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다.
-135쪽

아니야, 미야케. 농구부 활동에만 정신이 팔린 다케다는 너 같은 애 정말 몰라. 내가 누군지도 몰랐는걸. 같이 배심원을 하게 되기 전까지 몰랐단 말이야.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남들 눈에 띄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와 관계없는 곳에서 돌아간다.
-308쪽

난 어떤 어른이 되어도 괜찮으니, 별로 대단한 어른은 못 되겠지만, 저렇게 눈빛이 어두운 유령 같은 사람만은 되고 싶지 않다. 그것이 구라타 마리코의 인생 목표다.
-397쪽

“혹시라도 귀찮거나 자포자기해서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인정한다면, 그건 있었던 일을 없었던 걸로 하자는 말에 정말로 그래버린 저와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434쪽

-그제 뉴스에서, 체포된 가키우치 미나에라는 사람 사진을 봤을 때. 저런 얼굴을 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누구 얼굴인지 알았어.
내 얼굴이다. 주리는 생각했다. 가키우치 미나에의 얼굴은 나와 똑같다. 그것은 거짓말쟁이의 얼굴이다. 거짓말을 해서 남에게 상처 주고 자신도 상처 받는 인간의 얼굴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절망한 인간의 얼굴이다.
-그게 내 판결이야, 후지노.-508쪽

나는 이제 재판이 시작되기 전의 내가 아니다.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하루하루 새로운 날을 쌓아올리며 여기까지 왔다. 다음이 없는 게 아니다.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509쪽

그 피고인신문 이후로 슌지는 변호인과 제대로 눈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시종 부루퉁한 건 화가 났다는 표시일 테다. 아무리 변호를 위한 작전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고. 그렇지만 화가 폭발하진 않아 당황스럽기도 하겠지.
-왜 대놓고 화를 못 내는지 모르는구나.
예전처럼 버럭버럭할 수 없는 건 네가 화가 난 게 아니라 상처받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왜 상처받았는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틀림없이.
틀림없이-그러길 바란다.-514쪽

“저희 부모님은 불행하게 인생을 마쳤지만 늘 불행했던 건 아니었어요. 아버지도 맨 정신일 때는 다정한 분이었고 어머니와 사이도 좋았죠. 나약하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574쪽

네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나는 죽겠다. 이보다 비겁한 협박은 없다.
-580쪽

료코와 겐이치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고리가 목에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고.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가시와기를 떠올릴 때마다 그 고리가 조여들었다. 한꺼번에 확 조여드는 게 아니다. 1밀리미터, 3밀리미터, 5밀리미터.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조여들었다고.
-594쪽

제 아버지는-가즈히코가 목소리를 낮췄다.
“알코올중독으로 이성을 잃었고, 그 결과 어머니에게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닫고 나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으며 실은 정식으로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나약했던 아버지는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스스로가 저지른 행동을 견뎌내지 못했어요. 그래도 자기 책임을 제삼자에게 덮어씌우지는 않았습니다. 나약했지만, 그렇게까지 비겁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죗값을 치렀던 겁니다.”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가즈히코는 말했다.
“잘못을 저질렀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면. 더 늦기 전에.”-599쪽

살의는 공포와 분노와는 다르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굶주림이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가리지 않고 통째로 삼키려 드는 굶주림이다. 나는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다.
-604쪽

“본 법정에 소환된 증인은 모두 선서를 했습니다. 평의에 들어가기 전 배심원 여러분도 마음속으로 선서해주십시오.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마주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해주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평결에는 오이데 슌지라는 한 중학교 3학년생의 마음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비뚤어지고 철없고 제멋대로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살아 있는 마음은 바뀔 수 있습니다.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없애지 말아주십시오. 피고인이 이 법정에서 여러분에게 걸었던 것을 받아들여주십시오. 앞으로는 지금껏 시도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마주하고 변화해나갈 기회를 피고인에게 주십시오.”
-621쪽

“결국 자살방지 특효약이란 건 없는 거네.”
눈에 깃들었던 분노의 빛을 지우고 야마노 가나메가 중얼거렸다.
“음악가의 세계에도 비극은 무척 많아. 예술은 어떤 사람은 구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궁지에 몰아넣으니까.”-630쪽

그 녀석은 악마다. 나는 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그런 인간이 있다. 남들과 공존하지 못하는. 항상 자신이 특별한 존재여야 직성이 풀리는.
하지만-
열네 살이란 본래 그런 나이가 아닐까. 누구나 자의식이 과도하고, 끊임없이 주위와 부딪치고, 마음은 우월감과 콤플렉스가 뒤섞여 불안정하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그 시기를 빠져나온다.
나도 그랬다. 다쿠야도 그랬다. 그런데 왜 다쿠야는 그것만으로 부족했을까.-635쪽

“지금까지 말 안 했으면, 이제 와서 굳이 말할 거 없어.”
겐이치가 젓가락을 든 채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 얘기는 덮어두는 게 좋아. 말하고 싶은 건 그냥 한때의 충동일 뿐이야.”-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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