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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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당의 여인들

올해는 감자 수확이 좋지 않지만
라당의 여인들은 우울해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밭을 오르내리면서도
소녀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대화한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죠.
풍년에는 베풀 수 있어 좋고
흉년에는 기댈 수 있어 좋고
우리는 그저 사랑을 하고 웃음을 짓는 거죠.”
- 21쪽

마당에 모여 앉아

가장 가난하여 가장 높은 곳에 살아가지만
정결하고 단아한 살림 솜씨가 빛나는 집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노을이 물든 마당에 모여 앉아
수확한 감자와 갓 볶아내린 향긋한 커피를 마신다.
“아이가 자라서 라당의 농부가 되면 좋겠어요.
밭을 밟고 오르며 농사짓는 건 몸이 좀 힘들 뿐이지만
남을 밟고 오르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지요.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 23쪽

천연설탕
아렌

아렌 설탕은 맛이 좋고 건강에 좋아 널리 애용된다.
소년 시절부터 야생 숲을 누비며 살아온 우딘(60).
십 미터가 넘는 나무를 타고 올라 수액을 받아내고
서서히 달여 아렌 설탕을 가내생산해왔다.
인도네시아에는 자연이 길러준 것들을 거두어
채취경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약 1만 년 전 농경정착을 시작하기 전까지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수렵채취로 살아왔다.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나무 열매도 산나물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도
눈부신 태양도 샘물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은 다 공짜다.
- 31쪽

하늘 호수의 고기잡이

하늘빛이 맑은 물에 그대로 비쳐
‘하늘 호수’라 불리는 타와르 호수.
아버지는 고기를 잡고 아들은 낡은 배의 물을 퍼낸다.
아버지와 아들은 고요한 호수처럼 말이 없어도
서로의 몸짓에 의지하며 서로를 깊이 느끼는 듯하다.
부모란 이렇듯 아이와 한배를 탄 좋은 벗이 되어
그저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고 삶으로 보여주며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사이가 아니겠는가.
- 53쪽

가장의 걸음

산정 외딴집의 가장이
자신이 기른 묵직한 양배추를 지고
십 리 길 아랫마을 장터로 나간다.
어깨는 무거워도 사랑이 가득 담긴
아내와 아이의 배웅을 등에 받으며
맨발로 내딛는 가장의 걸음에는
할 일을 다한 자의 당당함이 실려 있다.

- 55쪽

벌거숭이 아이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이야 어디서나 흐뭇하지만
인도네시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은 특별히 감동이다.
이 땅은 네덜란드와 일본의 350년 식민지 나라,
그들은 저항운동의 싹부터 말리고자
초등학교부터 아예 운동장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독립저항의 주체인 몸 자체에 전족을 해버린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잔인한 책략이다.

브랜따 항구 갯벌에서 벌거숭이로 뒹구는 아이들.
아이들은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마음껏 잠자고
마음껏 꿈꾸도록 그저 자유의 공기 속에 내비두면 된다.
자기 안에 이미 온전한 무언가를 다 품고 있으니.
- 63쪽

아빠의 ‘시간 선물’

수확을 마친 농부 아빠가 아들과 놀아주고 있다.
“이 의자는 아이가 처음 말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이 목마는 아이가 첫걸음마 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오늘은 대나무 깎아 새장을 만들어 줄 거예요.”
아빠가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시간의 선물’.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먼 훗날 한숨지으며 내 살아온 동안을 돌아볼 때
‘아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생각되는 순간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 시간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그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 69쪽

파도 속에 심은 나무가 숲을 이루다

2004년, 쓰나미가 아체 주민 수십만 명을 쓸어갔을 때
울렐르 마을은 가장 먼저 해일이 덮치고
가장 처참히 파괴된 거대한 폐허의 무덤이었다.
당시 울렐르 마을의 스물다섯 살 청년 사파핫은
손가락만 한 나무를 홀로 바닷물 속에 심고 있었다.
“이 여린 바까오 나무가 지진 해일을 막아줄 순 없겠지요.
하지만 자꾸 절망하려는 제 마음은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요.”
무릎을 꿇고 나무를 심던 사파핫은 끝내 파도처럼 흐느꼈다.
8년 만에 다시 찾아온 나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가느란 바까오 나무가 파도 속에 자라나 숲을 이루었고,
그는 오늘도 붉은 노을 속에 어린 바까오를 심어가고 있었다.
절망의 바닥에서 자라나지 않은 것은 희망이 아니지 않느냐고.
파도는 끝이 없을지라도 나는 날마다 나무를 심어갈 것이라고.
- 73쪽

짜이가 끓는 시간

하루에 가장 즐거운 시간은 짜이가 끓는 시간.
양가죽으로 만든 전통 풀무 마시키자로 불씨를 살리고
갓 짜낸 신선한 양젖에 홍차잎을 넣고 차를 끓인다.
발갛게 달아오른 화롯가로 가족들이 모여들고
짜이 향과 함께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탐욕의 그릇이 작아지면 삶의 누림은 커지고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

- 99쪽

아프간 난민촌 소녀의 꿈

파키스탄에는 160만의 아프간 난민이 살고 있다.
국경 인근의 유서 깊은 페샤와르는 ‘꽃의 도시’라는 뜻인데
지금은 ‘총의 도시’가 되어 하루걸러 총성과 폭음이다.
고향에서 피난올 때 엄마가 품고 온 어린나무에
소녀는 매일같이 물을 주며 귀향의 날을 기다린다.
“아프간 제 고향으로 꼭 초대할게요.
달콤한 석류랑 포도랑 살구 케이크랑 듬뿍 먹고
우리 함께 파란 하늘에 연을 날려요.
이 나무가 제 키만큼 자라면 꼭 돌아갈 수 있겠죠?”
아, 기다림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만 리 길도 걸어간다.
- 107쪽

코너에 몰린 생의 아이들

미군의 폭음과 홍수가 휩쓸고 간 오지 마을.
영하의 추위에 난로도 외투도 양말도 없고
책걸상도 공책도 칠판도 선생님도 없다.
자습이 끝나자 늘 허기져 눈만 큰 아이들이
품에 싸온 제 몫의 감자 한 알을 나에게 내민다.
아,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지구의 벼랑 끝, 막다른 코너에 몰린 생의 아이들.

- 113쪽

파슈툰 소년의 눈동자

10년 넘게 계속되는 미국의 침공 속에 자라난
파슈툰 아이들은 눈빛부터 다르다.
한 생에 겪을 고통과 비극을 다 보아버린 눈동자.
만년설산이 들어박힌 저 푸른 눈빛, 아니 푸른 불꽃.
부모를 잃은 어린 가장인 알람샤를 안아주자
만년설이 녹아내리듯 소리 없이 긴 눈물을 흘린다.
나는 한번만이라도 이 아이들의 웃는 모습과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보기를 바랐다.
눈물 젖은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나는 신神을 본다.
거대한 성전이 아닌 이 눈동자에서 신神을 만난다.

- 117쪽

쌀과 총

‘다섯 줄기의 강’이라는 뜻을 가진
끝이 보이지 않는 비옥한 곡창 지대 펀자브.
페르시아, 아랍, 영국도 탐을 내던 지역이다.
소작농들 주위에는 대지주들이 고용한
무장 경호원들이 총을 들고 감시 중이다.
독점하는 자는 어디서나 총구에 의지하고
독식하는 자는 언제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정직한 쌀에는 총이 필요없다.

- 131쪽

어린 양을 등에 업고

며칠 전에 태어난 어린 양을 등에 업고
양떼를 몰고 멀리 풀밭을 찾아가는 길이다.
“이 아이는 아직 풀도 못 먹고 잘 걷지도 못하지요.
어미 젖을 먹이고 햇살도 바람도 먹여야지요.
이 녀석들 모두 이렇게 제가 업어 기른 양들이랍니다.”
- 135쪽

내가 살고 싶은 집

높고 깊은 산맥에 소중히 숨겨진 가쿠치 마을.
흰 만년설과 푸른 하늘과 붉은 흙집과 노란 나무가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는 가을날.
남자들은 산 위에서 야크를 치고 땔감을 구하고
여인들은 양털을 자아 옷감을 짜고 빵을 굽는다.
따사로운 가난마저 고르게 빛나는 마을.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작은 흙집.
마음까지 환해지는 내가 살고 싶은 집.

- 142쪽

아름다운 배움터

한 자리에서 11개의 만년설산을 볼 수 있는 마을.
봄이면 살구꽃 자두꽃 앵두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노란 포플러잎과 빨간 사과가 마을을 물들인다.
맑은 햇살이 비추고 신선한 바람이 불 때면
아이들은 답답한 교실이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배운다.
지식 경쟁의 제도화에 얽매이기 이전의
마을 속 학교는 아름다운 삶의 배움터다.
- 147쪽

내 손으로 집 짓는 날

식구가 늘어나 집을 늘려 짓는 날.
기분 좋은 부인은 도와주는 이웃들에게
먹을 것을 들고 다니며 고마움을 전하고
남편은 물담배를 피우며 기운을 돋운다.
뜨거운 지열과 습기와 맹수로부터 안전하기 위ㅏ해
한 층을 비우고 한 층 높게 짓는 지혜의 건축.
살던 집과 새 집은 나무다리가 연결한다.
집이란 이렇게 사고 파는 부동산 가치가 아니라
내삶의 무늬를 새기며 오래될수록 아름다워지는
지상의 단 하나뿐인 기억과 소생의 장소이니.

- 167쪽

고산족 마을의 수력 발전

라오스의 산간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주민들은 지혜를 모아 강보에다 나무와 폐품을 조립해
자력으로 마을 수력발전소를 창조해냈다.
자연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자연의 힘을 살려 쓰는
개전個電은, 거대 독점 시스템도 고압송전의 낭비도 없고
블랙아웃과 전기세 걱정도 없는 최고의 적정기술이다.
전기는 태양과 바람과 강물을 타고 흘러야 한다.
방사능과 석유와 약자의 눈물을 타고 흐르는
눈부신 세상은 인간의 어둠에 다름 아니기에.

- 187쪽

아카족 마을의 햇살 학교

지도에도 없는 깊은 산 속의 아카족 마을.
고운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짝을 지어 학교에 모여든다.
선생님은 아이를 등에 업은 동네 이모다.
아빠들이 짜준 책상에 하나뿐인 책을 놓고
재잘재잘 웃음꽃을 피우다 공부 삼매경에 빠져든다.
누가 공부 잘하냐고 물어보자 서로 어리둥절하다가
“다 잘하는데요, 이 친구는 셈을 잘하구요
저 오빤 나무 타고 과일을 잘 따구요
얜 물고기를 잘 잡구요 전 노래를 잘해요.
아참, 저 이쁜 언니는 최고의 날라리래요.”
- 197쪽

꽃다운 노동

물 위에 떠 있는 광활한 농장 쭌묘는 최고 품질의
채소를 길러내는 버마 농산물 생산의 심장부다.
이 쭌묘에서도 심장부는 불전에 바치는 꽃밭이다.
버마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라도 소득의 1/10을 바쳐
꽃을 사고 매일 아침 불전에 올리며 기도를 드린다.
덧없이 사라질지라도 삶은, 밥보다 꽃이 먼저라는 듯이.
꽃을 기르는 마 모에 쉐(21)가 꽃 한 송이를 건넨다.
“쭌묘에서 꽃밭을 가꾸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아름다운 꽃들은 제 손에 향기를 남기지요.
꽃을 든 사람들의 미소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리고 부처님께도 가장 멋진 선물이 될 거예요.”
- 213쪽

오리와 소녀의 행복한 산책

아침 햇살 빛나는 만달레이 타웅따만 호숫가에
오리를 치는 소녀 판이쀼(16)가 나타나자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오리들이 금세 모여들어
새 을乙 자로 줄지어 산책을 나선다.
“꼬마 때부터 오리들과 함께 놀았어요.
기도할 때마다 오리들이 아프지 않게 빌어요.
먹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제 마음을 아나 봐요.”
드넓은 호숫가를 노닐며 산책하는 오리들도,
오리들의 친구가 되는 소녀도 행복한 아침이다.
- 228쪽

들꽃 귀걸이를 한 소녀

부드러운 아침 햇살 아래 열세 살 소녀 마 모우가
손수 짜 만든 대나무 멍석 앞에서 첫 손님을 기다린다.
이 무거운 짐을 이고 세 시간 넘게 산길을 걸어 내려왔건만,
낡은 옷은 풀을 먹여 빳빳하고 검은 머리는 곱게 빗어 묶었다.
힘든 노동 속에서도 이처럼 지극한 정성과 아름다움이 살아있고
자신의 인생이 깃든 생산물은 이토록 당당한 자부심으로 빛난다.
“우리 마을엔 전깃불은 없지만 철마다 꽃등불이 가득 피어나요.
너무 멀어 다 데려올 수 없어서 한 송이만 제 귀에 걸고 왔어요.”

- 231쪽

즐거운 나의 강

작은 마을들을 감싸 흐르며 인레 호수로 향하는 인떼인 강.
여인들은 빨랫방망이를 두들기며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물장구치며 놀다가 물고기를 잡고
물소는 몸을 씻겨주는 주인의 손길에 기분 좋게 목을 축인다.
내가 사는 가까이에 있고 내 몸과 기억 속을 흐르는 강.
강의 생명은 콘크리트 댐 속의 많은 물이 아니다.
강의 생명은 굽이굽이 흐르는 맑은 물이다.

- 234쪽

맨발의 입맞춤

인디아 여성 농민들은 논밭에서 맨발로 일하고
흙길에서도 맨발로 걷기를 좋아한다.
신발을 살 여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대지는 인간을 품어 기르는 신성한 몸이기에
맨발로 정중한 입맞춤을 하는 게 도리인 것이다.
맨발에는 금과 은으로 된 발찌와 발가락찌로
정성을 다해 치장하고 늘 청결하게 씻는다.
만족滿足이란, 발이 흙 속에 가득히 안기는 것,
대지에 뿌리박은 삶에서 행복이 차오르는 것이니.
286

- 275쪽

물 항아리 머리에 인 여인의 걸음

물 항아리 머리에 인 여인의 걸음으로 깨어나는 인디아의 아침.
묵직한 물 항아리를 이고 걸으면 등허리와 목선이 곧게 펴지고
단전에서부터 온 몸에 기운이 차오르는, 최고의 일상 요가가 된다.
인디아 여성의 늘씬한 몸매와 우아한 자태는
날마다 물 항아리를 이고 걷는 노고의 선물인 것만 같다.
고귀한 것은 늘 무거운 것, 고귀한 짐을 아름답게
이고 지고 가는 자가 고귀한 사람인 것을.
- 286쪽

푸른 초원 위의 낮잠

고단한 유목의 계절이 끝나고 마을로 돌아온 청년이
수고했던 말들을 풀어놓고 초원에 누워 낮잠을 잔다.
순백의 구름은 유유히 떠가고 들꽃 내음은 향기롭게 흐르고
보리를 베는 여인들의 노래 소리는 바람결에 실려온다.
자신의 할 일을 다 한 청년은 지구를 배경 삼아
푸르른 초원에 누워 깊고 달콤한 낮잠을 누린다.

-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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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부의 서재 - 어느 외주 교정자의 독서일기
임호부 지음 / 산과글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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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서 에세이가 많이 나왔다. 모두들 무림의 고수, 아니 인터넷 서점의 고수들이었다. 많은 글들이 책으로 묶여 나왔지만 가장 깊이있는 성찰을 보여준 것은 이 책이 아닐까 싶다. 평소 블로그에 글을 쓰실 때도 그 묵직한 감동에 반할 때가 많았다. 다시 시간 순으로 정리한 이 책에는 작가가 읽은 책에 대한 단상이 그의 일상 소사와 잘 어우러져 매끄럽게 흘러갔다. 간혹 문체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어려운 내용에 눈을 가늘게 뜨기도 했지만, 대체로 편하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읽어 내려갔다. 읽다 보면 궁금해지는 책도 많고, 오호! 하며 놀라게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를 가장 감동시키는 것은 작가가 직접 지은 토막 글들이다. 평소에도 나는 이분이 '소설'을 쓰면 무척 잘 쓸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의 문장은 소설가의 필력을 연상시킨다. 분명 남의 글을 교정하는 것보다 더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것 같은데 그는 좀처럼 동의해주지 않는다. 소설은 소설가가 쓰는 거라면서. 난 그가 소설을 쓰는 순간 소설가가 될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







'오늘은 우는 날'이라는 손바닥만한 소설(장편소설)이다. 짧은 글에서 긴 여운이 느껴진다. 눈물이 제공해주는 제의의 공간을 잠시 들여다 본 느낌이다. 이승환의 노래 '오늘은 울기 좋은 날'도 함께 떠오른다.

실제로 작가님이 밝히지 않았다면 구글링을 해서라도 이 소설의 제목을 찾고자 애썼을 것이다. 미리 알려주셔서 헛수고를 막았다. 삶의 페이소스가 진하게 묻어나는 이분의 다른 글들도 보고 싶다. 독서 에세이 말고 그냥 에세이를, 그리고 그보다는 소설을 읽고 싶은 게 가장 큰 바람이지만, 아무튼 간에 이 한권의 책으로 끝내지 말고 꼭 후속작을 무엇이라도 써주셨으면 한다. 애독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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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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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겨울에 이사간 집에 다락방이 있었다. 좁은 집이었고, 언니들도 독방이 없는 터 내방은 당연히 없었는데, 잡동사니가 가득한 다락방을 내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열심히 치우고 정리하고 닦고서 가만히 누워 보았다. 햇볕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고, 뭔가 따뜻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햇볕에 데워진 먼지 냄새였다. 아무튼! 나만의 그 공간에 집에 있던 문학전집도 몇 권 갖다 놓고 책도 좀 읽었더랬다. 나만의 조용한 시간이었고 독립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빨간 머리 앤이 살던 그 집이 떠오르는 낭만적인 구석도 있었지만, 계절적으로 다락방은 너무 추웠다. 결국 몇 번 못 올라가고 그곳엔 다시 먼지가 쌓였다. 대신 난 식구들이 모두 TV를 보는 방 한구석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등돌리고 읽다가 눈물 한방울 또르르 흘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끄럽고 복잡한 공간에서 어떻게 집중이 됐던 걸까 의아할 지경이지만,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때의 오랜 기억이 다시 떠오른 건 이 책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이유경 작가님의 블로그 닉네임은 '다락방'이다. '다락방의 꽃들'에서 가져온 이름이라고 했는데, 이 이름을 들으니 또 어릴적 기억을 마구 건드린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한동네 살던 친구와 같이 등하교를 했는데, 친구는 자기 언니의 소설을 몰래 몇 구절 읽고 학교 가는 길에 나에게 들려주고는 했다. 그때 들었던 몇몇 책 중에 하나가 바로 '다락방의 꽃들'이었는데, 친구와 나는 다락방에 갇힌 아이들이 가엾다고 참으로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친구는 자기 언니의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고 나도 그 뒷이야기는 알지 못한다. (심지어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제인 에어'와 마구 섞여 있기까지 했다!) 그렇게 '다락방'이라는 이름은 구석지기도 하고 비밀스럽기도 하고 또 조금씩은 서글픈 이름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락방은 내게 유쾌하고 밝고 명랑한 느낌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다 이 책의 저자 때문이다. 


처음 다락방님을 온라인이 아닌 곳에서 만난 때는 내가 심적으로 가장 힘들 때였는데, 그녀의 해피 바이러스는 금세 나를 감염시켜서 얼굴 근육이 마비되도록 웃다가 헤어진 기억이 난다. 그녀의 말과 몸짓, 표정과 심지어 식성마저도 나는 즐겁기만 하다. 그 즐거움과 못지 않은 따뜻함이 이 책에 옮겨져 있다. 내가 누리고 있던 그 행복한 기운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게 된 것은 인류애적 관점에서 보자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다소 아쉽다. 차별화된 기쁨이 공개된 것만 같아서. 


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아주 큰 즐거움이다.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만남이 생기면 서로에게 줄 책을 준비하게 되었다. 내가 즐겁게 읽은 책을 상대방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그런 판타지는 생각보다 충족되기가 어려웠다. 상대방이 이미 읽었거나 갖고 있을 수 있고, 내게 참 좋았던 그 책이 그에게는 별로일 수도 있다. 그녀는 아주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별로인 책을 선물 받았다고 해서 좋았다고 포장하는 법은 없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이제 어떤 책을 갖고 싶냐고 미리 물어본다. 혹은 책이 아닌 다른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한다. 책에 있어서라면 이미 자기만의 세계관이 충분히 잡혀 있고, 호불호도 분명한 그녀이기 때문에 낭만은 좀 떨어지지만 그편이 더 나은 선택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다락방님의 독서는 내게 좋은 선택지가 되어버렸다. 간혹 내게 익숙하지 않고 낯선 책이 책장에 꽂혀 있을 때 검색을 해보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다락방님의 페이퍼가 등장하고 만다. 그것은 그녀의 글을 읽고 호기심이 동해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렇다! 그녀의 글들은 늘 책구매 지름신을 부르고 만다. 유리지갑을 더 위태롭게 만들지만 결코 싫지 않은, 게다가 설레기까지 하는 소비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목록은 이 책을 읽는 동안 더 늘어나고 말았다. 


가을 선거에서 시장과 맞붙게 될 호적수가 지난주에 앤젤리나 V.리코에서 앤젤리나 V.아리코로 개명했다. 알파벳 순으로 기호 1번을 배정받기 위한 실수였다. 하지만 어제 로코 D.카로차 시장이 로코 D.아아아아카로차(aaaaCarozza)로 이름을 바꿨다. 

(...)

"시장님의 새 이름을 방송에서 어떻게 발음해야 합니까?"

"카로차입니다. 에이 네 개는 묵음입니다." (56-57쪽)


'악당들의 섬'이라는 책을 다루면서 저자가 소개한 유머감각이다. 난 이 글을 블로그에서 작년에 처음 보았는데, 직장에서 읽다가 너무 크게 웃는 바람에 동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이 대목을 읽어주었는데, 그들은 전혀 웃지도 않고 그게 뭐가 웃기냐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a 네개가 묵음이라는데 안 웃기다니! 그들은 내가 문과생이고 자신들은 이과 출신이어서 그런 것 같다고 정리했다. 비록 그들 때문에 다소 흥이 떨어지긴 했지만 이 부분은 이 책을 통해 다시 읽어도 여전히 빵 터지게 웃기다. 다락방님은 책의 줄거리를 세세하게 설명하는 법이 없고,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주는 일도 많지 않지만 이렇게 적은 부분만으로도 관심을 끌게 하고 크게 웃거나 크게 울컥하게 만든다. 


많은 이야기들이 소설에서 시작하지만 삼천포로 빠지면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로 통하는데 이게 또 엄청난 반전 매력이 있다. '그 숲에는 남자로 가득했네'라는 책을 읽으면서는 도시를 사랑하는 전형적인 도시녀인 다락방님이 숲에서 벌목꾼들을 위한 요리사가 되고 싶은 열망까지 갖게 한다.


완벽한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그러니까 나는 이종격투기 선수인 바다 하리를 닮은 벌목꾼과 사랑에 빠지는 거다. 어쩔 수 없이. 그래서 그와 나는 딸 둘 아들 둘을 낳는 거다. 숲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놀이터. 나와 바다 하리가 낳은 아이 넷은 60명 벌목꾼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주방 보조를 하면서 부주방장이 되고,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점점 더 뚱뚱해진다. 그러나 바다 하리는 뚱뚱해서 뒤뚱뒤뚱 걷는 나를 여전히 사랑해주고 여전히 튼튼하게 나무를 벤다. 아, 정말 아름답고 완벽한 이야기가 아닌가. -183쪽


삼천포는 보여줬고, 반전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라. 그녀의 상상력은 늘 상상 그 이상이었으니까!


재밌었던 책, 좋았던 책,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그런 책 이야기만 쏟은 것이 아니다. 때로 다락방님은 소설적 재능도 마구 펼쳐 보였다. 이 책의 제 4장은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실린 글들이 유난히 좋다. 특히 블로그에 썼을 때부터 나를 반하게 만든 '순례자의 책'과 '순수의 시대'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독자마저도 달콤하고 짜릿한 쾌감을 갖게 한다. 이것이 상상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책의 제목이 '독서공감'인데, 독서에서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강하게 공감하는 것이 작가 자신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섭고 아프기까지 했다. 캐서린을 따라 겁이 났지만, 스튜어트 덕분에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문을 여러 차례 점검하며 숫자를 셀 때 나도 같이 세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빨리 읽어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걸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자신의 집이 미묘하게 바뀐 걸 느낄 때, 나는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곳으로부터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러려면 빨리 읽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결국 그녀가 어떻게 되는지, 그러니까 강박증을 이겨내는지, 출소한 전 연인과 맞서 싸우는지, 이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고 싶었다. -80쪽

 

그녀의 몰입도는 굉장해서 소설 속 인물과 이미 물아일체가 되어 있고, 그 사건과 그 감정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특별한 공감을 끌어낸다. 그러니 독서공감이 '사람'을 읽게 만든다. 사람이 있고, 삶이 있고,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이 책 속에, 그리고 이 책을 읽어 나가는 독자에게도.


12월이 되었고, 2013년이 한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집어든 이 책은 유난히 손이 시려운 나에게 따뜻한 입김이 되어주었다. 긴긴 겨울밤이 다가올 것이고, 이맘 때면 나를 괴롭혔던 문제들이 다시금 고개를 들 테지만, 그럴 때 위로해줄 좋은 책도 여전히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새삼 알려주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더 풍성하고 더 재밌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아직도 블로그에 많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다. 그것이 큰 위로가 된다. 기왕에 공개된 차별화된 기쁨이 더더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때는 그녀의 소설적 재능도, 시트콤 작가 같은 유머 감각도 더 크게 펼쳐보였으면 좋겠다. 세상과 사물에 대해 예리한 관찰력을 가졌고, 필력도 훌륭하며 무엇보다도 성실하기까지 한 작가님에 대한 기대가 크다. 다락방님의 오감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 씨앗이 어떻게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지 즐겁게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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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3-12-0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이런...
전 리뷰 안 쓸랍니다. 아니..
못쓰겠네요. 이렇게 애정이 담뿍 담긴 마노아님의 리뷰를 읽고나니
못쓰겠네요...

그런데 웃긴건 다락방님 글 읽을때는 다락방님 목소리가
마노아님 글 읽을때는 마노아님 목소리가 들리는거 같아요. 하하핫 ^0^

마노아 2013-12-09 09:35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밑줄긋기 궁금해요. 어떤 부분에 밑줄 그으셨어요?
우히히힛, 제 목소리가 들렸나요? 냐핫, 그것도 좋은걸요.
우리 조만간 만나서 독서공감 이야기 더해요. 유훗!!!

그렇게혜윰 2013-12-09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해피바이러스~~와, 정말 궁금하네요^^

마노아 2013-12-09 23:54   좋아요 0 | URL
만나면 더 큰 바이러스에 덜컥! 감염이 되지만, 글만 보고도 충분히 감염될 수 있어요. 게다가 백신도 없다지요.^^ㅎㅎㅎ
 
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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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결혼식을 마치고 피로연장에서 만난 '처음처럼'. 그 글씨를 쓰신 이가 신영복 선생님인 것으로 알고 있다. 글씨로 이름을 떨치신 분답게 본인의 글씨가 새겨진 '변방'을 찾아다니며 그 글을 묶어낸 책이다. 그림책이 아니지만 예술품을 감상하는 재미를 같이 느끼게 한다.

첫번째 방문지는 해남 땅끝이었다. 변방 중의 변방이고 게다가 분교이기도 하니 더 낙후되었을 것만 같지만, 뜻밖에도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는 아주 활기찬 곳이었다. 폐교 직전까지 갔던 학교의 위기를 학부모들이 일심으로 도와 극복해낸 것이다. 그 학교의 도서관 간판이다. '꿈을 담는 도서관'이라니, 어쩐지 벅찬 이름이다. 작고 작은 분교 도서관에서 큰꿈을 키울 어린이들을 격하게 응원해주는 멋진 글씨다.

두번째는 강릉의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다.
양반댁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태어나서 재능을 다 꽃피우지도 못했고, 심지어 요절까지 한 비운의 허난설헌은 '변방'이라는 이 책의 기본 분류에 무척 잘 어울린다. 어쩌면 혁명을 꿈꾸었을지도 모를 풍운아 허균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인물들이 남매로 태어난 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강릉하면 신사임담 오죽헌, 율곡 이이가 먼저 떠오른다. 그들이 주류라고 한다면, 허균과 허난설헌은 변방이라고 할 만하다.

충북 제천의 박달재다. 울고 넘는 박달재란 노래 제목만 들어봤을 뿐, 실제로 들어보진 못했다. 박달재에 얽힌 슬픈 사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과거시험에 낙방한 박달은 면목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고, 기다리다 지친 금봉이는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리고 뒤늦게 돌아온 박달 역시 금봉이를 좇아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다.

지금 이곳은 터널이 뚫려서 직접 고개를 넘어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이조차도 슬픈 사랑 이야기가 스민 곳답게 적적하게 만든다.

충북 괴산의 벽초 홍명희 문학비와 생가도 찾아갔다.
홍명희는 그가 일궈낸 문학적 업적과, 또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월북 행적 때문에 지나치게 평가절하되었다고 본다.
북으로 가기 전 농지 17만 평을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분배해주고 갔다니, 그야말로 이상적 공산주의가 아닌가. 부친께서는 경술국치를 당해서 자결까지 했다고 한다. 나라가 망했는데, 그렇게 목숨뿌리는 선비 몇이, 그래도 조선에 있었다는 것에 500년 왕조의 마지막에 일종의 헌사가 될 수 있을까.

다음 방문지는 오대산 상원사다. 문수전의 글씨를 쓰셨다. 한국 최대의 종단인 조계종 사찰에서 변방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척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전. 깨달음의 세계인 ‘지혜’에서 ‘변방성’을 어떻게 엮어낼 것인가 저자는 몹시 고민했다고 한다. '지혜’와 ‘무소유’는 ‘상품’이 되지 못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살아남아 극적인 상품이 되었다. 변방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며,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변방의 존재이고, 변방이란 바로 자기 성찰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마치 철학자의 깨달음이나 성직자의 득도를 보는 기분이다.


오대산 상원사 입구에 저자가 쓴 표석이다. 거대한 바위와 그 안에 새겨진 검은 글씨와 금색 글씨가 인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저 돌 치우면 어째 손오공이 깔려 있다가 짠하고 나타나서 변신술이라도 부릴 것만 같다.

여섯 번째 여행지는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와 김개남 장군 추모비다.
5.18의 첫번째 희생자인 이세종 열사. 사망 장소가 도청이 아니었던 탓에 첫희생자로 인정받기까지도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라고 쓴 추모비가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고 쓴 김개남 장군 추모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대구로 썼다고 한다.
역사를 글로만 배울 것이 아니라 이런 현장을 찾아가서 그 숨소리를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야말로 찾아가야 마땅한 곳이다.

‘서’와 ‘울’을 각각 북악산과 한강수로 표현하고 “북악무심오천년(北岳無心五千年) 한수유정칠백리(漢水有情七百里)”를 방서로 풀어쓴 작품이다. 북악은 왕조 권력을,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상징한다. 이 글씨는 서울시청 시장실에 걸려 있다. 덕분에 박원순 서울 시장님도 함께 등장했다.
글씨도 아름답지만, 글씨로 그림까지 표현해 냈으니 그 창조성에 감탄했다. 그 서울의 한 민초로 살아가는 오늘, 북악산 좀 바라보고 하늘 구경도 좀 해야겠다.

마지막 방문지는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석이다.
이 글씨도 신영복 선생님 것이었구나. 뮤비 주인과 묘비 글씨의 먹먹함만 생각했지 글씨체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다시 봐도, 역시 먹먹하다.

'우공이산'의 글씨도 역시 저자의 것이다. 이것을 '노공'으로 바꿔 부르셨다지.
우직하게 묵묵히 제 일을 하는 분들. 그런 분들 덕분에 인류가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졸업 연설에서 했던 말도 떠오른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노무현 재단 전 이사장이신 문재인 의원도 보인다. 사진 보니 또 먹먹하다.
얼마 전 새벽에 봉하마을 묘비에 가서 울고 계시더라는 기사가 생각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아멘...이라고 해야 하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참 아프게 들린다. 김지하 시인이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썼을 때도 울었는데, 그 시를 썼던 이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얼마 전 미권스에 올라온 글을 읽으면서도 또 울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아주 긴 글이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울지 마라 민주주의야, 지지마라 민주주의여"

뜨겁게 되새겨 본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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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이성 친구 (작은책)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5월
품절


속 깊은 이성 친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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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9-25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렇군요.
이런게 바로..ㅋㅋ

마노아 2012-09-25 18:50   좋아요 0 | URL
그림 한장으로 설명이 가능하죠. 대단한 능력이에요.^^ㅎㅎㅎ

프레이야 2012-09-2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속깊은 이성친구ㅎㅎ 그림 참 좋아요.

마노아 2012-09-28 23:10   좋아요 0 | URL
상뻬의 감각이 늘 놀라워요. 멋진 작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