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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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훈의 책은 이 계절에 어울린다. 해뜰 녘의 아침보다 해질 녘의 고요함에 더 어울리는 것처럼 한 해의 시작보다 한 해의 저물 무렵이 그의 글들과 더 궁합이 맞다. 표지의 빛깔과 가라앉은 글귀, 그리고 빛바랜 느낌의 제목 모양새까지 모두 다 그렇게 한 짝으로 어울린다. 글은 어떤 분위기일까?

 여러 매체에 소개했던 여러 시간대의 글들을 함께 담아 놓았다. 첫번째 글이 '바다의 기별'이다. 칼의 노래 이후 팬이 되어버린 나는, 김훈 작가의 책을 몇 권 빠지지 않고 거의 읽은 셈인데, 그가 썼던 많은 책과 에세이들에 관한 짧은 단상들이 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걸 찾아 읽는 재미가 제법 컸다. 심지어 예전에 썼던 책의 서문에 '바다의 기별'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대목도 발견했다. 빙그레 웃게 되는 대목이다.

김훈의 언어는 생경하다. 그의 글쓰는 방식은 독특하다. 수사를 배제한 채 문장의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는 간결한 그 문장이, 오히려 온갖 수사를 동원한 문장보다 화려하고 힘이 있다. 이 작품은 시간대가 좀 더 위로 올라가는 글들도 제법 있기 때문에 한창 때의 그 간결단호한 글들보다는 다소 수식어가 있는 편이다. 옛 시절의 글과 지금으로 올라오는 글들을 거슬러 오며 읽어보는 맛도 근사하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소설을 더 아끼고 에세이집은 집중이 좀 힘들었다. 소설은 그 문장의 힘으로 몰입이 쉬웠는데, 에세이는 그 자신의 경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방해를 받는 편이었고, 간결함에도 난해해지기 쉬운 그의 문장이 나와는 겉돌 때가 많았다. 이 작품집 안에도 종종 그런 방향 잃은 헤맴이 내게 있었지만 대체로 한 걸음 안 쪽의 거리로 가까워진 독서가 가능해서 기뻤다.

1. 바다의 기별
2.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3. 말과 사물

이라는 제목으로 나뉘어 있는데, 2장의 내용들이 유독 마음에 담겼다. 특히나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편은 이미 고인되신 선생님의 그 꼿꼿했던 삶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해서 숭고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큰 기사감이 될 수도 있었건만 스스로를 자제했던 그 마음 써줌 역시 고마웠다.

3부는 강연 내용을 원고로 옮긴 것인데 차분하게 말씀해주시는 그 어투가 어찌나 친절하신지 김훈식 문장과는 참 차이가 있다. 실제로 작년 12월에는 강연회를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때의 분위기와도 사뭇 다르다. 역시 글쓰는 사람인지라 글로 표현할 때 여러 얼굴을 가질 수 있나보다.

부록으로 책들의 서문과 여러 상의 수상 소감을 함께 실었다. 솔직히 안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책의 서문과 수상 소감들은 이미 나온 단행본들에서 접한 것들인데 재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생각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꼬리를 내린다. 생각 외로 무척, 재밌고 인상 깊게 박힌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그 책들을 들춰보지 않더라도 그 책들을 읽을 때 가졌던 설레임과 감동이 함께 전해지는 것 같아서. 이를 테면. 이 역시 '편집'의 힘인가 보다.

오치균 그림 이야기가 나올 때 그림이 같이 실리면 좋았겠는 걸... 하며 아쉬워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뒤에 사북탄광을 그린 그림 몇 점이 실려 있다. 지두화로 표현한 사북의 풍광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연도를 살펴보니, 전업 소설가가 된 이후 거의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해 새 책이 나왔다. 그것은 소설이기도 했고 에세이집이기도 했고 또 기행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바쁘게 밥벌이를 해오신 김훈 작가는 자신을 가리켜 늦깍이 신인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이제 그 신인 딱지는 떼고도 한참 앞으로 달려가신 모양새다. 부디 늘 건강을 유지하셔서 해마다 이런 기쁨을 만나게 해주시기를... 자전거를 타시는 게 체력을 지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실 터이니 그 또한 안심되는 일이다.

덧글) 35쪽 4줄에 오타가 있다.  '머리카락이 늘어질고'>>>늘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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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8-12-2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읽고 싶은 충동이 생기네요. 저는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을 보았는데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거든요. 우선 보관함에 담아 두어야겠어요.

마노아 2008-12-24 07:00   좋아요 0 | URL
저는 에세이집은 개인적으로 취향이 아니어서 소설을 더 아끼고 에세이집은 한 번 읽고 마는 경우가 많았어요. 근데 이 책은 일단 무척 예쁘답니다.^^
 
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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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겨레에 연재하고 있는 '그까이꺼 아나토미'를 재밌게 보곤 했다.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혹은 2주에 한 번 접하게 되는 누군가의 고민에 공감하고, 거기에 대한 당찬 충고에 감탄하기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 글 모음들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당연히 기꺼이 지갑을 열 용의가 있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한 번 보고는 쉽게 덮을 수 있는 책이라 여겼다. 재밌겠다는 기대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무엇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거! 제대로 만난 거다. 이런 게 편집의 힘인 것일까? 중구난방 다양했던 질문과 고민을 주제별로 묶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임 에피소드와 깊은 충고가 이어졌다. 아, 이 책 사기를 너무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일년에 한 번 만나곤 하는 후배의 생일 선물로 한 권 더 주문했다.(그날은 알사탕 1,000개 주는 날이라서 더 구미가 당겼다!)

주제는 다섯 가지다.

1. 나, 삶에 대한 기본 태도
2. 가족, 인간에 대한 예의
3. 친구, 선택의 순간
4. 직장, 개인과 조직의 갈등
5. 연인, 사랑의 원리

여기서 주목할 점은 첫 번째 순서가 '나'라는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직장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올곧이 나 자신! 나를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나 밖의 다른 세상도 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우리 사회는 나를 관찰하고 나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의 아우성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에 너무 인색했다. 그게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지, 혹은 그게 왜 필요한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살았다. 다른 누군가도 그럴 테지만, 나는 분명히 그랬다. 그게 서글펐고, 그래서 동시에 기뻤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이 책을 내가 마흔 한 살에 만난 게 아니라, 서른 한 살에 만날 수 있어서. 스물 한 살에 만나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때는 지금만큼의 고마움과 감동, 감탄으로 마주서지 못했을 듯하다. 그래서 때라는 게 있는 가 보다. 혹은 궁합, 인연?

   
  자기 선택이 곧 자신이란 거, 이거, 사실, 곧이곧대로, 수용키 어렵다. 누구나 야비하고 몰염치하고 이기적이며 부도덕한 선택, 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 뒤 대다수는 사연부터 구한다. 그 선택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그리고 그 속에 숨는다. 그리고 공감해줄 사람 찾는다. 피치 못 할 사연 있었단 거지. 자긴 원래 그런 사람 아니란 거지. 그런데.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 객관화의 임계점이란 게 있다. 그랬으면 하는 자기가 아니라 생겨 먹은 대로의 자신을, 덤덤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순간 있다. 자신이 멋지지 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서 멋질 수는 결코 없는 법이란 걸 깨닫는. 이거 절로 안 온다. 도달해야 한다. 그러자면 대단한 분량의 용기가 지성과 함께 요구된다.  
   

주구장창 강조해 주는 한 마디, '자기 선택이 곧 자신'이라는 것!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오래오래, 내가 안고 있는 고민과 불만과 설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알지만, 그 원인의 가장 큰 대목을 나의 밖에서 찾고자 애썼다. 변명하고 싶었고, 핑계를 대고 싶었고, 모자라고 부족한,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인정하기 싫어하는 나 자신을 또 인정하기 싫어서 생각하기를 회피하고, 선택하는 것을 미루고, 그렇게 시간을 버텨왔다.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하지 못하자, 시간이, 또 다른 상황이 나를 선택하도록 나를 '방치'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혹은 인정하지 못하면서.

그러니까 그것들이 결국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 고리를 끊으려고 하는 결정적 선택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택에는 언제나 '대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대가를 올곧이 치러낼 자신이, 없었다. 그걸 감당한다는 게 무서웠다. 두려웠다. 그래서 외면했고, 그래서 더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내가 책임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대체 그 무엇이 책임질 수 있다고 그렇게 어리석게 굴었을까.

가족 파트는, 읽으면서 많이 울컥했더랬다. 오래도록 내 마음의 짐이 되어버린, 존재를 부정할 순 없는데 그 존재가 버거웠던 내 가족의 그림자를 한겹 벗겨낸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동생이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진한 위로를 느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가족이라는 고리가 내게 준 어떤 시련들을 당장 벗겨내진 못할 것이다. 거기엔 시간이 필요하고 역시나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러나 적어도 가족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 그게 존재에 대한 예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을 깊이 새겨본다. 모두에게 친절할 수 없고,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거다. 그런 콤플렉스 따윈 버려라. 그들을 위해 내가 사는 게 아니라는 것, 잊지 말고 꼭 기억하자. 거절하는 훈련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혹은 가족이니까 더더욱!

김어준 씨는 '어른'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어른의 선택, 어른의 사랑, 어른의 책임. '어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생물학적 나이로 이미 충분히 어른이 되어 있는데, 다른 지각과 자각이 그 생체적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역시 첫번째 파트의 문제다. '나'와의 만남이 이뤄지지 않은 까닭에 성장이 더디다. 무정차 통과란 없다. 월반도 없다. 한 번은 아파야 하는 것이고, 또 부러져 봐야 성장이, 변화가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앞서서 이 책을 더 늦게도 아닌 더 이르게도 아닌 지금 만나서 기뻤다는 말, 진심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여기까지의 나. 내가 선택해 온 내가 감당해온 만큼의 지금의 나. 부족한 게 많고 답답한 것도 많건만, 여기까지의 내가, 대견하다. 초라하고 때로 비루할 때도 있지만, 그 조차도 결국 내 모습이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더 멋진 나로의 비상도 가능하다는 걸 충분히 믿는다. 그건 사회적 성공, 물질적 충만함을 넘어선 자존감일 것이다. 내 스스로 존중해 주는 나의 모습이란, 아름답고도 감격스럽다.

   
  자존감이란 그런 거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부족하고 결핍되고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다 받아들인 후에도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굳건하게 유지하는 거. 그 지점에 도달한 후엔 더 이상 타인에게 날 입증하기 위해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한 해가 넘어가고 있고, 다시금 한 달도 안 남은 시간 뒤에 새 나이에 익숙해져야 할 때가 되었는데, 다른 때와 달리 그 사실도 싫지가 않다.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사람이 성숙해지고 진국이 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나이 때에 알아가게 되는 삶의 면면들이 분명 있으니까. 그 연륜이라는 시간의 띠가 보여줄 또 다른 세상이 궁금하고 벅차게 반갑다. 그렇게 시간마저도 긍정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다는 게 다시금 만족스럽다.

모두가 행복해지길 원하는데, 행복을 막아서는 외부적 조건들이 너무 거세어 휘청거리기 일쑤인 나날들이다. 그럼에도, 무지개 너머 행복을 향해 달려나갈 수 있는 나 자신을 믿어본다. 지금 이 순간 몹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미 한 발을 내딛었다고 과감히 말해 본다.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이 한 마디를 외쳐야겠다. "건투를 빈다."

ps.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지나치게 유치한 일러스트 그림이다. 김어준씨의 독특한 말투 때문에 부러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진지한 메시지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주범이 되어버렸다. 한겨레 신문에 실렸던 그 일러스트가 오히려 분위기에 더 맞았는데 안타깝다. 게다가 표지의 색깔도 안타깝다. 이 책이 '자기계발서'에 들어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먼저 준다는 것도 분하다. 그래도 잘 팔리고 있는 듯하니 다행이다. 역시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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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8-12-1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까이꺼 아나토미' 열심히 읽어요. 어른이 된다는게 참 쉽지가 않더라구요...

마노아 2008-12-13 11:14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고 나니까, 어른이 된다는 건 쉽지 않고 책임질 일이 많다는 걸 의미하지만 마냥 무서워할 일은 또 아니란 용기가 생겼어요. 그래서 기뻐요. ^^

가시장미 2008-12-1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리뷰네요 ^^ 김어준은 마음에 와 닿는 말은 참 시원하게 참 풀어내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저도 표지보니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동코너에 있어야 어울릴만한 표지라니.. -_ㅠ

올해 잘 마무리 하시고.. 마노아 언니가 원하는대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랄께요. ^^
근데 저 블로거 뉴스는... 다음에서 검색이 되도록 하는 것인가봐요?

마노아 2008-12-13 18:24   좋아요 0 | URL
장미양! 이 알흠답고 염장질 팍팍 하게 되는 멋진 이미지라니, 완전 부럽군요!
건투를 빌어주어서 고마워요~ 장미양은 이제 엄마가 되니까, 더 많은 축복을 빌어줄게요.
블로거 뉴스는 다음에서 본 적은 별로 없어요. 제가 다음을 잘 안 써서 그런가봐요.^^;;

꿈꾸는섬 2009-02-15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추천받고 마노아님 리뷰를 보니 우선 제가 먼저 읽어봐야겠단 생각이에요. 좋은 책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리뷰도 너무 좋구요.ㅎㅎ

마노아 2009-02-15 17:34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스무살 때 이런 조언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어요. 물론 엎어지고 넘어진 서른 뒤에야 더 찐하게 다가오긴 했지만요. ^^
 
내가 처음 쓴 일기 - 1학년 한 반 아이들이 쓴 일기 모음 보리 어린이 7
윤태규 / 보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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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의 연령대에 맞춰서 주로 4-6세용 동화를 많이 읽었다. 페이지가 짧아서 금방 읽으면서도 멋진 그림과 감동적인 글을 함께 만날 수 있는 멋진 독서였는데, 최근에는 초등 저학년용 글을 좀 찾아 읽게 되었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글이 어떤 느낌인지 체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골라본 이 책은, 사실 초등 저학년 아이들이 쓴 글이라서 내가 찾던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생각하고 움직이는 활동 전경이 눈에 펼쳐져서 좋은 만남이 되었기에 반갑기 그지 없다.

책은 좀 오래되었다. 96년도에 대구 금포 초등학교 1학년 2반 아이들이 매일매일 쓴 일기를 담임 선생님께서 엮은 책인 것이다.

초등 1학년으로 아직 많이 어린 아이들이라 맞춤법도 많이 틀리고, 사투리도 많이 나오고 문장도 엉망이었지만 말 그대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제대로 경험할 수가 있다. 게다가 아이들도 날마다 일기를 쓰다 보니, 일년의 마무리 계절에 가니 몰라보게 실력이 늘어있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의 일기를 읽고 나서 아주 짧은 메시지를 달아주시는데, 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무한한 이야깃거리들을 축하(?)해 주고, 투정부리는 아이들에겐 일기를 씀으로 화해와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음을 일러주신다.  아주 가끔은 선생님의 일기도 등장하는데 아이들의 맑은 눈높이를 함께 맞추고 계심이 독자에게도 전해져 부러움과 감탄을 같이 자아내게 하신다.

책의 맨 마지막엔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과 학부모님께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아이들에겐,

정직하게 씁니다.
일깃감을 잘 골라 씁니다.
자세히 씁니다.
밤에 쓰지 않습니다.
글자를 잘 몰라도 아는 대로 씩씩하게 씁니다.

라고 일러주셨다. 여기서 자세히 쓰라는 대목이 눈에 띄었는데, 날씨를 예로 들자면, '맑음, 흐림, 비, 갬, 눈' 이렇게 쓸게 아니라, 바람이 불기도 하고 해가 떴다가 다시 구름이 끼는 날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표현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일기장은 너무 획일적이었던 듯하다. 똑같은 그림 일기, 똑같은 날씨 표현.

선생님과 학부모님에게 주는 당부는 더 구체적이다.

일기 쓰기로 국어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일을 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길게 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잠자기 바로 전에 일기를 쓰게 하지 않았습니다.
생활을 반성하는 것이 일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이나 느낌을 넣어 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열 칸짜리 보통 공책에 쓰도록 했습니다.
일기장 내용을 두고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기를 숙제로 쓰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림 일기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부모님이 대신 써 주는 일이 없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어른부터 일기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이의 일기장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일기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적는 글이기 때문에 생각이나 느낌을 억지러 놓는다고 생각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 크게 공감이 갔다. 마찬가지로 꼭 교훈적이 되도록 반성의 의미를 넣도록 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림도 자기 표현이고 글도 자기 표현이니, 어린 아이라고 무조건 그림 일기로 시작하지 않게 하는 것도 신선했다. 아이들은 글로 표현하기 힘들면 이 책에서도 그림으로 그리곤 했는데, 그건 자기 마음에 내킬 때의 일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림 일기'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나 역시 중학교 때 썼던 일기장은 지금도 소장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시절 커다란 그림 일기장은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도 갖고 있더라면 더 큰 추억의 상자가 됐을 텐데 말이다. 얼마전 2집 앨범을 낸 가수 이지형은 어릴 적 썼던 일기장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고서 가사의 영감을 얻어 'I need  your love'란 타이틀 곡을 썼다는데, 그렇게 시간 흘러 나에게 또 다른 느낌과 감동을 주는 커다란 선물이 될 수도 있으니, 일기쓰기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숙제가 아니라,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쓰는 기록. 멋지다. 근사하다!

요새 조카가 날마다 일기를 쓰고 있는데 이 책은 언니도 보라고 해야겠다. 나보다 더 즐겁게 읽지 않을까?

금년에는 박희정 일러스트 다이어리를 아주 예쁘게 썼다. 다만 두꺼워서 무겁기 때문에 고생은 좀 되었다. 내년에는 가볍고 얇은, 그러나 알찬 다이어리를 써야지! 예쁘고 가벼운 다이어리 아시는 분 소개 좀....(이 뜬금 없는 마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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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10-2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린이도 이제 일기쓰기를 시켜볼까 하고 있는데 딱 필요한 책이 될 듯하네요.
그런데 그림일기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인상적이네요. 왜 그럴까요?

마노아 2008-10-20 01:19   좋아요 0 | URL
그림일기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고정관념인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것도 어려울 수 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병행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
이 책엔 그림이 많진 않지만, 아이들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 그림을 종종 그리더라구요. ㅎㅎ

bookJourney 2008-10-20 08:27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 말씀하시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경험으로 보면요,
그림일기로 시작을 하면, 일기에 부담을 적게 느낄 수 있어서 좋은 대신, 그림 그리기를 그닥 즐기지 않는 아이에게는 두 배의 부담을 주더라고요. 저희 아들 녀석이 바로 그런 경우였어요. 어느 날은 "엄마, 그림 안 그리고 글만 쓰면 안돼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다른 책에서 보면, 그림 그리기를 즐기는 아이들은 그림 칸이 없어도 그림을 쓱쓱 그려넣기도 하던걸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의 동시나 동요도 옮겨보고요~ ^^

마노아 2008-10-20 08:54   좋아요 0 | URL
우리 어른들도 아마 그림일기를 쓰라고 하면 더 어려워할 것 같아요.
중학교 1학년 때 쓴 일기장엔 할 말 없으면 시나 시조를 옮겨 적기도 했었는데 담임샘이 제가 쓴 건 줄 아셔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나요^^;;;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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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조선인 서경석씨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쁘리모 레비의 자취를 추적하며 쓴 기행 에세이이다. 

쁘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줄곧 살았으며, 그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자각도 그리 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그가 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 빨치산 조직에 가담하여 투쟁하다가 잡히고 아우슈비츠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겨우 풀려나게 된다.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버틴 시간은 1년 남짓된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한 사람의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온전히 박탈 당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서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화학자로 살았지만 증언문학가로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전쟁으로 도배되었던 그 험한 시기를 겪고 난 뒤의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끊임 없이 던져주었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곧 그에게 축복이 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그리 잔인할 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는 같은 '종'으로서 수치심을 느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모멸과 수치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우울증까지.  그 모든 상황들은 그를 끝내 '자살'로 몰아갔다.  그의 자살 원인을 딱부러지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자살로서 선언한 '침묵'에 대해서 남겨진 자들은 존중할 필요가 있다.

저자 서경식씨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어를 모어로 알고 성장했지만 일본 사회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나찌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범 국가인 일본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묘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두 형은 박정희 유신 정권 때에 19년, 17년 형을 살면서 모진 고문을 받고 단식 투쟁까지 했던, 그야말로 죽음을 늘 곁에 두었던 자들이었다.  이런 태생적 환경과 가족 기반은 그에게서 쁘리모 레비의 삶을 더욱 애처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흔히 독일은 침략전쟁에 대해서 제대로 사죄를 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 독일조차도 60년대까지는 뻔뻔한 편이었음을, 70년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에서야 달라졌음을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뻔뻔하게 구는 일본의 모습에는 갑갑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직접적으로 나찌 독일에 가담하지 않았던 무수한 독일인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본 정권과 상관없던 많은 일본인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를 단지 '독일인'이니까, 혹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또한 그들은 그 사실만으로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차분한 비판과 검열이 필요하다.  죄는 없어도 '책임'은 있는 것이니까.  '침묵'함으로써, 혹은 무지로 뒤덮어 '태만'을 통한 '공범'이 된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전쟁 책임국가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비윤리적 사건들, 거기에 죄가 없다고 책임까지 전가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가리고 귀 닫고 모른 척하며 살고 있는 우리는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힘들었던 20세기가 지나갔다.  그러나 21세기의 시작 역시 밝은 무지개빛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차별과 폭력과 굶주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 각 개인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비참한 시간은 올곧이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쁘리모 레비와 무수한 유대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면서, 또한 동시에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둔갑한 이스라엘의 침략적 행위를 규탄하면서, 우리 사는 모습을 가만히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기억해야 마땅한 시간을 깨우쳐 준 서경식 선생님의 책에 고마움을 느낀다. 몹시 좋았음에도 별 하나 감점은 번역어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는 쉽게 풀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약간의 오타에 대한 일종이 항의(?)랄까. 그래도 일독을 과감히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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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2-14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비윤리적 사건들, 거기에 죄가 없다고 책임까지 전가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가리고 귀 닫고 모른 척하며 살고 있는 우리는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에 공감중!!

마노아 2008-02-14 17:30   좋아요 0 | URL
젖은 가슴을 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에요. 연민과 긍휼이 줄 수 있는 힘을 믿어요.
 
자라지 않는 아이
펄 벅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대지>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탄 펄벅의 자전적 글이다.  선교사였던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서 성장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역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녀의 첫 아이 캐롤은 건강한 아이였는데 말이 너무 더뎠고, 몇가지 부자유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다.  아이가 세살이 되어서야 장애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 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모든 장애아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왜?'라는 질문을 던졌고, 대답은 누구도 해줄 수 없었다.  아이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서 찾아보지 않은 의사가 없었지만 아이는 정신의 성장이 멈춘 채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숨김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고, 하늘에서 내려준 운명의 일부라고 여겼으며 그 자체로 존중했다.  따라서 개인이나 가족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국인의 이런 철학은 펄벅으로 하여금 캐롤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반면 중국에서는 딸을 낳으면 버리는 관습이 있었으니 이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펄벅은 아이의 미래를 고려해야 했다.  그녀가 죽고나면 누가 캐롤을 돌볼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에서 중국인과 같은 시선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펄벅은 첫 남편과 이혼을 했고 줄곧 중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다른 친척들의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가 아이를 받아줄 수 있는 시설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를 인격체로 상대해줄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진 재단을 마침내 찾아냈을 때 그녀는 그곳의 아이들이 다른 시설의 아이들과 달리 밝고 자유로울 수 있는 까닭을 물어보았다.  그곳의 교장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으로 대했을 뿐이죠."  너무도 당연한 그 대답이, 그 시절로서는 파격을 넘어선 충격이었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도 변치 않는 진리이며, 잘 지켜지지 않는 숙제임도 아프게 상기할 수 있다.

펄벅이 아이를 맡긴 그때가 1920년대 말이었다.  장애아가 있다는 사실을 가문과 혈통의 수치로 여기던 시절이었으며, 그 아이들의 인권을 생각지 못했던 사회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펄벅이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아이를 세상에 공개한 것은 1950년이었다.  그때 이후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펄벅 자신이 가장 많이 변하였다.  그녀는 일곱 명의 아이를 입양해서 키웠고 아시아인과의 혼혈아를 미국 가정에 입양시킬 수 있도록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흑인 아이를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는 일도 주선하였다.  아이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시작한 글쓰기로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유명해졌고,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은 사회적 봉사활동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아이를 통해서 느꼈던 그녀의 슬픔은, 그녀와 같은 아픔을 가진 많은 사람들과 공유되어지면서 고통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정신 지체아들을 위한 연구를 촉구하게 되었으며 많은 사회적 관심과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그녀가 책에서 기술한 내용들은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잘못된 정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장애아 가족을 둔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하여 시대를 거슬러 깊은 공감과 위로를 얻었다.

책은 펄벅이 쓴 내용에 이어 그녀가 죽은 뒤 캐롤의 후원자가된 펄벅의 첫째 입양아(캐롤의 동생)인 재니스가 후기를 실었고, 다운증후군 아이를 가진, 그리하여 이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얻은 재블로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로 구성되어 있다.

장애아 가족이 느끼는 혼란과 슬픔에 대하여 독자 역시 큰 공감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가 장애아에 대해서 어떤 편견을 갖고 있는지, 또 그 아이들이 이 사회에서 해낼 수 있는, 마땅히 해야 하며 또 누려야 할 것들에 대한 정보도 같이 얻을 수 있다.

여러 인상적인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  펄벅이 대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1차적 원인은 캐롤이 있지만, 그 바람에 유명해진 그녀는 사회 활동으로 가족들에게 시간을 많이 내어줄 수 없었고, 그 바람에 그녀가 입양한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의 차가움을 목격하며 상처를 받은 채 자랐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녀가 가족들에도 완벽한 어머니였다면, 오히려 그녀의 이 이야기들이 덜 설득적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결핍은 다른 충족을 불러냈지만, 하나의 충족은 또 다른 결핍을 부르고 만 그 순환의 고리들.  그것이 인생이라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  뜻하지 않게 불현듯 읽게 된 책에서 오랜 여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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