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없다 - 다시는 못 볼 아주 작은 추억 이야기
도종환 외 17인 지음,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엮음 / 학고재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으려고 찍어둔 책이 많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 책을 읽어야 될 것 같았다. 보수적인 직장 상사의 눈길이 신경 쓰여 북커버로 덮은 채 조심조심 읽어나갔다. 돌아가신 뒤에도 이런 대접을 해드리다니, 참 송구한 일이다.  

도종환 외 17인이 지었다고 적혀 있지만 도종환 시인은 책을 여는 역할만 했고, 추억을 본격적으로 쏟아낸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그 중에는 정치인 노무현을 취재했던 기자, 그에게 '바보'라는 별명을 처음으로 붙여주었던 어느 네티즌, 그와 함께 동지로서 민주화 투쟁을 했던 신부님, 또 순수하게 인간 노무현을 사랑했던 노사모, 아버지가 입을 옷을 사러 왔다고 말하던 의상 코디, 대통령께 마지막 점심 식사를 대접해 드리기 위해 퇴임 직후 봉하 마을까지 동행했던 청와대 요리사에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던 인물 등등, 많은 이들의 생생한 육성이 담겨 있다.  

그들이 추억하고 공유하는 노무현의 공통점은 소탈하고 순박함이었다. 뚜렷한 목표와 원칙을 갖고 용감하게 불가능에 도전하던 뚜벅이였지만, 인간적인 부분에서의 그는 시골 농사꾼과 전혀 다르지 않은 자연스런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옷도 까탈스럽지 않았고 식성도 까다롭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불규칙해지면 직원들의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음식 준비도 힘들어지기 때문에 규칙적인 식사 시간을 되도록 지키려고 애를 썼고, 일주일 내내 고생했는데 일요일까지 고생시킬 수 없다며 고구마와 라면만 준비해놓고 늦게 출근하라고 요리사에게 말해 주는 대통령이었다. 그런 대통령을 닮은 선물도 등장한다. 비닐 봉지에 꿀떡 한 봉지 달랑 담아서 보내오기도 했다니, 임금님께 바쳐지는 진상품보다 더 값진 선물이 아닐까.  

2년 전 그때에, 참 많은 사람들이 울어버렸다. 그를 보내면서 보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열을 쏟아내었다. 영국에서는 다이애너비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애도를 하는 바람에 국민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줄었다고 하던데, 우리도 그랬을까? 아니면 억울함과 분함에 오히려 스트레스 지수가 더 올라갔을까. 그의 빈소를 찾고서 돌아가는 승객들을 태우던 칠순에 가까운 택시 기사의 표현이 목구멍에 걸린다. 

   
 

 “살다 살다(군대도 가고 사우디에도 가보고 조기 축구회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자발적인 사람들은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렇게 자발적인 사람들을 며칠씩 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우리도 누군가를 굉장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싶어 했던 것 아닐까......”  -56쪽

 
   


퇴임한 전직 대통령이 고향으로 돌아간 예도 없었지만, 그렇게 고향에 돌아간 대통령을 한껏 반겨주던 국민들도 이전에 없었다. 그리고 고향 땅을 변화시키려 애쓰면서 그토록 행복해하던 대통령을 우리가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이 책 속에 등장한 17명의 필자들은 웬만큼 글 좀 쓰는 분들이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글 솜씨는 정혜윤 피디였다.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그녀의 책들이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퇴임 후 그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를 봉하마을 그의 집에 걸어두었다. 90살 먹은 우공 노인이 산을 옮기기로 결심한 이야기. 주변 사람 모두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하자 우공 노인은 나에게는 아들이, 그 아들에게도 아들이, 또 그 아들이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꿈 또는 의지는, 명사가 아니라 한없는 이름과 행위로 연결되는 동사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꿈을 꾸고, 내가 받아 다시 건네주는, 바로 그 행위 말이다. -59쪽 

그는 가고 없지만, 그가 남겨놓은 유산들이 있다. 정혜윤 피디의 말처럼, 그의 꿈 또는 의지가 하나의 단어로 머무르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의 꿈을 함께 꾸는 사람들이 있는 한 말이다.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의 꿈... 

희망을 말하는 것은 쉽다. 말은 언제나 간단하니까. 하지만 희망을 품고 사는 일은 만만치 않다. 때로 희망 그 자체가 고문일 때도 있으니. 하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재차 꿈꾸고, 염원하고, 열망하지 않고는 이 차갑고 서러운 세상을 살아갈 도리가 없다.   

이 무서운 세상에서 한때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던 한 사람을 추모해 본다. 그 자신이 희망의 상징이었으면서 다시 실패의 상징도 되었던 사람. 이제 그의 희망과 실패의 완성은 그가 아닌 우리 남겨진 자의 몫이 되었다. 다시, 우공이산의 꿈을 꾸도록 해보자. 오래 걸릴지언정 포기는 하지 말자.

정혜윤 피디의 글 한쪽으로 마무리를 지어 본다. 우리 앞에 어떤 미래를 둘 것인지,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그의 죽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를 지배했던 아메리칸 드림과 코리안 드림을 생각해 본다. 개인의 행동과 선택이 이 세상의 다른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숙고하는 사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주어진 권리처럼 배타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사회, 집단적 희생양을 만들지 않는 사회, 타인의 불행에 어떻게든 나도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하는 사회, ‘무질서보다는 불의가 낫다’고 외치지 않는 사회, 언젠가 올 유토피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는 가능한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기력한 우리 앞에 미래는 없다. – 62쪽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5-24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이 책 읽으며 참 많이 공감했어요.
그를 만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그분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끄덕임까지.
택시 아저씨 말씀에 나도 울컥했는데...

마노아 2011-05-24 10:10   좋아요 0 | URL
작년에 순오기님 리뷰 보고서 사둔 책인데 이제사 읽었어요.
초반 임팩트가 약했는데 뒤로 갈수록 마음이 계속 떨렸어요.
그렇게 읽고 있는데 송지선 아나운서 투신 소식 듣고 또 얼마나 기가 막히던징...ㅜ.ㅜ

책가방 2011-05-24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요.. (니 때문에 우리나라가 요모양 요꼴인거는 아나..??) 이 말이거든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정치나 정치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잘하면 박수를, 잘못하면 쓴소리라도 해야하는데 저는 너무 무관심해서 그렇다네요.
대통령 선거때... 해가 될지도 모를 사람에게 투표하는 게 아예 투표를 안하는 것 보다 낫다고.. 최소한 관심은 보여야 한다고 나를 볼때마다 열변을 토하는데.. 전 왜 관심이 안 생길까요..??
먹고 살기 바빠서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그 친구의 입을 막곤 하지만.. 은근 죄책감 비슷한 감정도 생기더라구요.
어떻게하면 관심이 생길까요..??

그 분이 가신지 벌써 2년이나 되었군요.
그 날 그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세월은 너무도 조용히 그리고 빨리 흘러버리네요.

우공이산..
(이어령의 춤추는 생각학교) 제1권 <생각 깨우기>에서 처음 알게된 얘기랍니다.
생각만 하지말고 일단 실천하라는 그런 내용이더군요.
고 정주영님의 (해보기나 했어?)라는 말도 생각나네요...

문득 생각이 많아져서 글도 길어지네요..^^

마노아 2011-05-24 10:14   좋아요 0 | URL
저도 기본으로 투표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 뽑을 사람 없으면 가서 기권표를 만들지라도 권리는 행사해야 한다고요.
그것조차도 하지 않으면 정치인 나쁘다고 욕할 수 없다고요.

참 어려운 문제 같아요. 먹고 사는 일이 너무 바쁘고 버거운 사람은 투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 투표를 통한 참여는 먹고 사는 일이 고단한 사람에게 더 필요한 일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 못하게 더 막장으로 치닫곤 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긴 했지만요.

우리의 아이들도 살아갈 세상인데, 이보다 더 망가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 권리에 이어 부채감을 갖고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노력해요.

시간이, 참 빨라요...

pjy 2011-05-2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쉽게 방치하거나 포기하지말고 희망을 가져야겠죠~
여름이 오기도 전 봄비에 둑이 무너지는 이런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에휴휴 -_-;

마노아 2011-05-24 20:55   좋아요 0 | URL
올 여름은 어떤 사단이 날지 몹시 두렵습니다.
최소한의 교훈은 모두가 얻었으면 해요. 자신의 욕망과 바꾼 결과가 낳은 참사에 대해서 말이지요.

귀를기울이면 2011-05-2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분 글 여럿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긋한 미소를 짓고 싶은데 '^^'이건 좀 경박해 보이는군요^^;)
떠오르는 생각은 책 한 권인데 아직도 2년전과 비슷한 기분이라 참...


마노아 2011-05-24 23:20   좋아요 0 | URL
하핫, :) 요렇게 하면 좀 지긋해 보일까요? 50보 100보 같아요. 그치만 경박까지는 아닙니다. 그냥 발랄한 거죠. ㅎㅎㅎ
떠오르는 책 한 권이 무엇일지 궁금해요. 여전히 참... 그렇죠...
 
노무현이, 없다 - 다시는 못 볼 아주 작은 추억 이야기
도종환 외 17인 지음,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엮음 / 학고재 / 2010년 5월
장바구니담기


슬픔이 가득할 것 같은 책 속에서 밝은 표정의 대통령 사진을 보아서 마음이 좋았다.
봉하마을 방문객들과 함께 했을 때의 모습인데 덩실 춤이라도 출 것 같은 모양새다.
책 속에는 대통령이 사실은 무척 춤을 잘 췄다는 증언이 곧잘 나왔다.
그 춤이 우리가 생각하는 춤이 아니라 곱사춤이긴 했지만...^^

1990년 3당합당 직후 민자당 반대 시위에 나선 송기인 신부와 대통령 사진이다.
저때도 골 깊은 이마의 주름은 여전했구나.
그때도 소탈한 웃음은 그대로였구나.
노대통령은 나이가 들면서 더 멋지게 패이는 주름을 가진 이였다.
노간지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이 책에는 인간 노무현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과 소회가 잔뜩 담겨 있는데 가장 나를 울컥하게 만든 이는 만화가 정훈이였다.
글도 쓰긴 했지만,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만화가 그의 감정을 더 잘 전달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이보다 더 슬프게 들릴 수도 있을까.

뜻하지 않게 나를 팍 건드려 나도 모르게 엉엉 울게 했던 것은 저 부분 때문이었다. 탄핵 반대 시위를 하러 가던 길에 차려입은 점퍼. 찢어져도 눈물 안 날 것 같은 점퍼라는 구절이다.
웃겨서 빵 터지며 웃고 말았는데 그게 어느새 엉엉 큰 울음이 되어서 나도 당황했다.
이렇게 웃기면서 절박하게 만들 수 있었던 그 사람이었다.

심지어 남자로 하여금 남자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
참 그립고 그립구나.

238쪽이다.

대통령이 사저 앞 만남의 광장에서
방문객들에게 인사하는 도중이었습니다.
진주에서 오신 88세의 어르신이 수백 명의 인파를 뚫고대통령을 향해 돌진해 왔습니다.
사진 한번 찍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경호를 뚫고 오는 분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거절하지 못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대통령에게 말합니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왜 요즘엔 텔레비전에 안 나옵니까?”

그러게 말이다. 이제는 그를 TV에서 보려면 가슴 한켠 찬 바람이 휙 불기 마련이어서......

249쪽이다.

대통령은 아이들과 눈높이를 잘 맞추었습니다.
인자하고 재미있는 할아버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대통령은 종종 꼬마들 사탕도 빼앗아 먹었습니다.
놀란 아이를 향해 익살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지요.
사탕을 빼앗긴 아이의 부모는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 박장대소합니다.

저 아이는 자신에게 어떤 추억이 있는지 먼 훗날 알아차릴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풍경 속에 자신이 놓여 있었는지 알게 될까. 기억 속에 따뜻한 웃음 짓던 대통령 할아버지의 모습, 남아 있을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5-24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높이 맞추는 할아버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몸에 밴 습관이지요.
우리 애들은 할아버지는 다 자기 할아버지처럼 근엄한 줄 알았다고...

마노아 2011-05-24 10:1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아무나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그 사람의 한 모습이, 그 사람의 전체를 보여줄 때도 참 많아요.
저 사진을 보니, 유독 더 그립네요.

책가방 2011-05-24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고 싶어졌어요.
사진을 보니 새삼 그립네요.

마노아 2011-05-24 10:15   좋아요 0 | URL
읽어보셔요. 코디나 요리사님 이야기는 이럴 때 아니면 접하기 힘들 것 같아요.
여러 곳에서 울컥했답니다.
 
상상목공소 -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김진송 지음 / 톨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인문에세이라고 하니까 또 마음이 달라졌다. 게다가 제목은 얼마나 멋지던가. 상상목공소. 웬지 꿈을 깎고 갈아서 멋진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 같은 기분마저 들고 말았다. 소제목은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고 적고 있다. 상상력과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나보다 준비를 하고 읽게 된다. 예상한 대로 역시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에서 집중하게 된다. 

인간의 사고 대부분이 언어중추를 통해서 일어나듯이 상상력 또한 대개는 언어작용에 의해 작동된다. 하지만 그 전에 언어는 상상력을 제한하는 사회적 도구다. 아이는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사물을 구분하고 대상을 구체화시킨다. 언어적 소통을 통해 타자와 자신을 분리해내는 인식이 발달하며 또 언어를 통해 사회적 교감을 이루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러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사회적 억압에 익숙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어는 사물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사물과 현상의 여러 측면에서 얻어지는 다양한 사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다만 하나의 축소된 개념에 갇혀버리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 21쪽  

상상력은 언어작용에 의해 작동되지만 언어는 동시에 상상력을 제한하는 사회적 도구라고 그 모순성을 지적했다. 이렇게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것이 관계 속에서 스스로 충돌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예가 많이 등장했다.  인간과 벌레도 마찬가지였다. 

벌레와 인간. 그들은 한 번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둘 간의 관계는 늘 적대적이었다. 인간은 수백만 년을 벌레에게 시달려왔음에도 벌레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확신한다. 벌레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목숨을 내어주면서도 자기의 길을 포기한 적이 없다. – 146쪽  

상상력에 대한 오해도 그 범주에 속한다.  

상상력에 관한 많은 오해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오해는 상상력이 동심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오해다. 그런데 한 가지 의심스러운 현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상상력은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한다. 따라서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창의력이 더 높을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어른을 뛰어넘은 수준까지 도달한 예는 거의 없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상상력이란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상상력은 얼핏 무관해 보인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는 경험이 적은(그래서 순수한) 사람들이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대상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이미 경험했던 대상에서 유추하여 대상의 형태와 성질 등 여러 가지 정보를 파악하게 된다.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반응은 빈약한 경험에서 비롯된 연상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쉽다. 경험과 사고의 부족에 기인한 엉뚱한 연상이 어른들의 눈에 기발한 상상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 172쪽


듣고 보기 그렇구나.... 라며 고개 끄덕이게 된다. 동심의 세계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그 상상력, 게다가 창의력의 원천이기에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상상력이 사실은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뜻밖이어서 놀랍다. 경험의 산물이라고 하면 누구든 그 상상력과 창의력의 샘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 느끼면서 살지는 못하고 있으니 등잔 밑이 어두운 기분이랄까. 

상상력은 사회적이다. 창의적인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회적이라는 의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 발상이 뛰어난 한 개인에 의해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적 공간이 없다면 상상력과 창의성 또한 발휘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창의성 혹은 상상력은 통념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열린 사고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 규준을 넘는 새로운 사고는 사회적 규준으로 평가될 수 없거나 측정되지 않는다. – 178쪽

상상력과 창의적인 작업이 모두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적 공간을 무시할 수 없고, 그것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걸 뛰어넘는 상상력과 창의적인 작업이라면 외면받거나 지탄받기 쉽다. 한없이 자유로울 것 같은 두 개념이 이렇게 사회 속에서 발목이 잡힌다고 생각하니 역시 모순적이다. 

목수인 저자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온갖 다채로운 설정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나무로 작업해낸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사이사이의 시행착오 등도 무척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문자로 설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는 저자의 작업들이 심드렁했다. 당신에게는 유의미한 작업이지만 그걸 책으로 한 다리 건너 문자로 읽어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공감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완성품을 사진으로 보니 꽤 멋졌는데, 그걸 동영상으로 보니 더 근사했다. 아마 실물로 보면 나의 심드렁함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릴 테지만, 그렇지 못하는 독자는 홈페이지의 동영상으로라도 만족감을 더해보련다.  

작품 동영상 보기 

주제는 상상력과 창의성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내가 모르던 것들에 대한 얘기가 등장할 때 글이 더 반짝반짝 빛났다. 이를테면 저자의 관찰에 의하면 봄꽃은 붉은색, 여름꽃은 흰색, 가을꽃은 보라색이 많은데 이는 주변환경과 보색을 이루기 위해서일 거라는 것이다. 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저 나무는 싱그럽고 꽃은 예쁘다고만 생각했지 꽃 색깔을 한 번도 눈여겨보지 못했다. 저자의 짐작대로 '보색'대비를 통해서 더 많이 벌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픈 욕망이 그렇게 발현되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이제는 계절마다 꽃을 볼 때 그 색대비를 신경쓰며 보게 될 것이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이니 반갑고 고맙다.  

책 속에서 나방이 자신의 천적의 천적인 뱀을 닮은 몸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등장했다. 나방의 천적은 새이고, 새의 천적은 뱀이라고 나와서 또 화들짝 놀랐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땅을 기어다니는 뱀에게 잡아먹힌단 말인가! 뱀은 개구리나 먹는 줄 알았지 새까지 잡아먹다니, 갑작스럽게 뱀의 신출기묘한 능력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뱀을 닮은 모양새로 진화한 나방에게도 역시 박수를 보낸다. 자연의 이치란 어찌 이리 기이하고 자연스러울까! 

꽃의 섹스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웠다. 페로몬을 발산하는 꽃과, 종을 넘나드는 꽃의 섹스라니, 단어의 파격성도 그렇지만 꽃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인간으로 대입하면 이건 파격 그 이상이 아니던가! 

인간은 왜 꽃을 좋아할까. 부드럽고 하늘거리는 꽃잎의 감촉, 도발적인 색채와 매혹적인 향기, 무엇보다 형태적인 면에서 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꽃에게 우리는 매력을 느낀다. 꽃향기는 곤충이 서로를 유인하는 페로몬과 닮아 있고 곤충의 페로몬은 향수의 성분과 유사하다(꽃이 향수의 재료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즉 꽃의 형태와 색채와 향기는 인간의 성적인 충동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섹스에 꽃을 이용하는 데 익숙하다. – 228쪽

좀 더 재밌고 자세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차마 옮기지는 못했다. 제4장 진화와 상상력 편이라는 것만 언급해 둔다. 

물봉선과 나도송이풀과 같은 꽃들은 보기에도 너무 야하게 생겨서 차마 따서 분해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아니, 어떤 꽃이기에! 당연히 호기심이 치솟는다. 이렇게 생겼다. 

 

이 꽃이 물봉선이고, 

 

이건 나도송이풀이다. 왜 야하게 생겼다고 했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흠, 뭐지? 뭘까??? 

다시 처음 패턴으로 돌아가서 모순되고 충돌되지만 그것으로 다시 조화를 이루는 예시는 또 등장한다. 

생태공원이나 호숫가의 구조물에도 방부목을 쓴다. 근처가 오염될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방부목을 없애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방부목을 사용한 이후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목재의 양을 엄청 줄일 수 있었다. 숲이 덜 파괴되게 하는 역할을 방부목이 톡톡히 해낸 것이다. – 242쪽  

참 아이러니하다. 방부목이 오염을 불러오지만, 그 방보목이 숲의 파괴를 동시에 막아주기도 한다는 것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자연의 양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인간의 삶의 속도는 자연의 삶의 속도마저 뒤바꾼다. 이를테면 돼지의 평균수명은 칠 년이지만 실제로 세상 모든 돼지의 평균수명을 계산해보면 칠 개월에 불과할 것이다. 도축하기에 가장 적절한 나이가 돼지의 평균수명이다.
닭이나 소, 돼지만이 아니다. 인간이 선택한 대부분의 꽃은 씨를 맺기도 전에 잘려 꽃병에 꽂힌다. 수반 위에 아름답게 장식된 꽃은 일생의 반을 빈사상태로 보낸다. 어시장의 물고기들은 운명을 스스로 마치지 못한, 자연에서 폐기된 시신들이다. – 243쪽

 
그렇다면 저자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 가장 사악한 존재이고 다른 생명들을 갉아먹는 존재라고 규탄하는 것일까? 그렇게 촌스러울 리가 없다.  

자연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소비하는 현대의 삶을 조절하지 않고는 사람 사는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자연과의 조화를 방해한 주범으로 지적되는 게 과학이나 물질의 발전이지만 따지고 보면 과학적인 방법 말고 인간이 자연과 조화할 수 있는 길은 쉽게 찾아질 것 같지도 않다. 이를테면 화석연료를 대치하는 새로운 에너지원은 과학적 발전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몽상에 불과하다. 이제 과학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아마 과학기술의 최종 발전 단계는 자연을 가장 적게 소비하는 방법을 찾는 길이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로 이어질 것인가? – 244쪽  

자연을 천천히 소비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과학의 힘을 빌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시행착오가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의 역할이 클 것이다. 저자는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해준 신의 선물이라고 멋진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 짓는다. 뭔가 판을 아주 크게 벌려놓고 마무리는 테두리 안에 끼워 맞추려고 애쓴 느낌이 다소 들지만, 상상력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에는 이의를 붙이지 않겠다. 우리에게 더 많은 상상력이 있다면 이 사회가 덜 각박해질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디자인이 무척 예쁘다. 띠지의 꽃분홍색이 책을 더 빛나게 해주는데, 띠지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바로 분리해버리니 그건 시각적으로 꽤 아쉬웠다. 사이사이 속표지의 어지러운 도면들도 분위기에 걸맞는 연출을 해주어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옥의 티는 역시 오타다. 

276쪽 마지막 줄에 불안해 견지지 못한다면>>>견디지 못한다면
296쪽 성깔 있는 목수가 몽니를 부리는 이유이라는 걸>>이유라는 걸이 맞지 않나? 문장이 어색하다.

그밖에 전반적으로 띄어쓰기 오류가 무척 많다. 그것까지 다 말하진 못하겠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5-14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다른 서재에서도 봤는데
느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군요. 마노아님의 리뷰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반짝거리네요.

그런데 상상력이란 인간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해준 신의 선물이라구요...
그럴 수 있겠어요. 타인의 느낌을 알고 공감하기 위해서, 또는 배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일 수도.

마노아 2011-05-14 20:20   좋아요 0 | URL
저는 읽으면서는 좀 힘들었는데, 리뷰 쓰느라고 밑줄긋기를 연달아서 읽으니까 내용이 좀 더 정리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쓰면서 좀 더 긍정적인 느낌으로 변했어요.^^
배신하기 위해서도 상상력이 쓰일 수 있겠네요. 분명히. 우리는 좋은 쪽으로 상상력을 쓰도록 해요.^^
 
청구회 추억
신영복 지음, 조병은 영역, 김세현 그림 / 돌베개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영복이라는 이름 석자에 드리워진 질곡의 현대사만 생각하고서 이 책을 지레짐작 무겁게 여기면 안 된다. 화사판 표지에서 느껴지듯이 밝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물론, 그 안에 약간의 슬픔이 빠지진 않았지만. 

 

때는 1966년 이른 봄철. 서울대학교 문학회의 초대를 받고 회원 20여 명과 함께 서오릉으로 한나절의 답청 놀이에 섞이게 되었다. 그때 마주친 꼬마 여섯 명! 녀석들도 서오릉으로 봄나들이를 가는 길이었다. 춘궁한 옷차림의 소년들을 흘끔 보던 선생은 꼬마들의 무리에 끼고 싶어서 머리를 굴린다.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선생은 첫 대화를 성공적으로 끌어내었다. 

"이 길이 서오릉 가는 길이 틀림없지?" 

상대에 대한 거부감 없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게다가 그들로 하여금 자선의 기회와 긍지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이 길이 맞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였고 자신들도 서오릉 가는 길이라고 덧붙여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꼬마들의 세계에 발을 담근다.  

꼬마들의 단체에 이름을 붙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도 했고, 학생들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나중에 사진이 나오면 보내주겠노라 하고 한 아이의 주소를 받아적고, 학교의 교수실 주소도 알려주었다. 한낮의 치기어린 장난 같았고, 순수한 꿈같았던 시간이 흐르고 헤어질 시간, 아이들은 진달래 한묶음을 수줍은 손으로 내밀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갔다. 이 어여쁜 아이들과 헤어지고 약 보름 뒤, 교수실로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이 어느덧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을 추억하는 아이들의 정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세 녀석이 보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 서로 베끼고 베끼며 보냈을 게 틀림 없다. 그 날의 소중한 시간을 자신이 장난처럼 남겨두었음을 깨달으니 더 이상 가만 있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장충 체육관 앞에서 만나자."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청구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모임이어서 청구회라고 부른 이 모임이.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6시의 모임이. 1968년 7월, 선생이 구속되기 전까지 이어진 인연이다. 아이들은 약속시간보다 꼭 일찍 나타나곤 했고, 그게 신경 쓰여서 더 일찍 나가면 아이들은 더더더 일찍 나가 있어서 6시의 약속은 5시의 모임으로 재현되고는 했다.  

그들은 서로 간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10원에 5개씩 주는 아이스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산책을 했다. 그 만남이 두 세번째로 이어지가 건설적인 합의까지 이루었다. 매달 10원씩의 저금을 하자는 것. 6명이 10원씩을 모으고, 선생이 40원을 보태어 매달 100원씩의 우편저금을 하는 것이다. 1년이면 1,200원. 10년이면 12,000원. 중요한 것은 이때의 10원은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번 것이어야 한다는 것! 아이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저금을 하였다. 그 금액이 1968년 7월까지 2,300원이 되리라고 선생은 기억했다. 간혹 사정이 생겨 모이지 못했던 부족액을 원고료에서 충당하기도 했고, 꼬맹이들도 자기의 무슨 수입에서 초과 불입하기도 했다. 

1966년 9월에는 청구회 회원 중 2명이 교체되었다. 집이 이사를 갔던 것이다. 2명의 결원을 충당하였는데 아이들의 표현이 재밌다. 

"요사이는 좋은 아이가 참 드물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 하지만 마침내 그 좋은 아이들을 구해서 청구회는 다시 7명의 식구를 갖게 되었다. 

청구회는 독서에 힘을 쏟았다. 선생은 매월 책 한 권씩을 회의 도서로 기증하였고, 회원 각자도 책을 한 권씩 모았다. 그리고 청구회 모임에서 낭동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문학소녀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니고 문학 소년들이 등장한 것이다. 아직 초등학생의 나이에! 아이들은 동네의 골목을 청소하거나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서 미끄러운 비탈길을 고쳐놓는 등, 스스로를 뿌듯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서 하곤 했다.  

이들 사이의 각별했던 사연이 있었다. 바로 선생이 담낭절제수술을 받고 입원했을 때의 일이다. 모임에 참석할 수 없노라는 사연을 간단히 엽서로 전하며 병원으로 문병오지 않도록 당부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문병을 오지 않았는데, 사실은 왔었지만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두 번이나 찾아왔다가 위병소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 

 

게다가 아이들은 삶은 계란까지 싸가지고 왔다는 말에 마음이 짠하게 울렸다. 소풍 날에도 좀처럼 먹을 수 없었던 귀한 양식을 선생의 문병을 위해서 장만했다니 말이다. 

그 밖에도 재미나고 애틋한 사연이 몇 차례 더 소개된다. 크리스마스에 얽힌 이야기, 이화여대 학생들과 육사생도들과의 청구회 연합 봄소풍 등등.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생의 구속으로 모임은 끝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청구회'의 정체와 회원 명단을 대라며 추궁을 하였고, 아이들과 함께 지은 노래는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의 의미로 둔갑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그렇게 정치적 탄압으로 새까맣게 짓밟히던 순간이었다.  

말도 안 되게 사형선고를 받았고, 마지막일 수도 있는 시간을 선생은 정리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에, 항소이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빌린 볼펜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보다는 회상에 가까운 글이었다. 글을 적고 있는 동안은 그 까만 옥방이 화사한 진달래꽃으로 덮였을 것이다. 선생의 참담함을 달래주었던 유일한 구원이 아니었을까.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되고 민간 교도소로 이송을 기다리던 즈음에 이 글묶음을 압수당할까 봐 선생은 근무 헌병에가 다급한 부탁을 전했다. 집에 전달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당신이 가져도 좋다며 맡겼던 글들. 그 글들을 출소 후 집에서 다시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1993년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영인본을 만들면서 '청구회 추억'을 실었다.  

그 후 천구회 어린이-이제는 어린이가 아니지만-와 다시 연결이 되기는 했다. 출소 후 3년 쯤 즈음에 청구회 어린이 중 하나가 전화를 했던 것이다. 어느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또 어떤 친구는 의정부 부근의 헬스클럽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가난한 달동네의 어린이들은 그때까지 만남을 유지하지 못했다. 많은 사연과 사정이 그 시간을 가득 메웠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를 주었던 그 이와도 연락이 끊겼다. 추억만 아스라이 남긴 채... 

 

선생은 자신이 청구회 어린이들과 만날 수 있었던 계기가 이 그림 덕분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의 작품 '전장의 아이들'. 출소 후에 다시 마주치고서야 이 그림 속에서 청구회 어린이들을 찾아낸 것이다.  

다시 연락하지 못하더라도, 어디선가 분명히 그때의 그 꼬마 아이들은 선생을 생각하며 이 책과 함께 추억을 곱씹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도 선생과 마찬가지로 진달래 향이 가득한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책이 참 예쁘다. 영역도 같이 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은 영어 문장으로도 감상이 가능하겠다. 무엇보다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다. 김세현 작가의 그림인데 내가 읽은 책의 그림도 많이 담당했다. 모랫말 아이들, 만년샤쓰, 준치가시, 엄마 까투리를 그리신 분이다. 정감 어리다. 

책에는 부록으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주년 기념 오디오북이 실렸다. 13개의 트랙은 성우분이, 그리고 세 편은 저자의 육성으로 녹음되었다. 기꺼이 추천하고픈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4-11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답고 애틋한 추억이에요~~~~
주말에 초등동창들과 예산에서 모여 추사고택과 수덕사를 들러 왔어요.^^

마노아 2011-04-11 11:55   좋아요 1 | URL
좋은 곳 다녀오셨어요. 순오기님의 추억담을 곧 들을 수 있겠군요.^^
 
그냥 - Just Stories
박칼린 지음 / 달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자의 자격-합창 편은 내가 본 남자의 자격 첫 번째 이야기였다. 우연히 보게 된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 석에 앉은 예쁜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같은 여자가 봐도 참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이후 합창단이 결성되고 연습을 하고 거제도에서 합창대회에 참석하기까지 빠짐 없이 챙겨보았다. 원래 노래가 주는, 게다가 합창이라는 하모니가 주는 감동이 있는 법이지만, 오합지졸에서 시작했던 그들이 그렇게 어우러져 멋진 무대를 장식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방송 이후 박칼린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는 쉴 새 없이 번쩍였다. 십 수년 전 명성황후 신문 기사도 포털의 메인을 장식했고, 그녀의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기사도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그 무렵에 이 책이 나왔다. 출간 시기만 본다면 인기를 확 끌고 있을 무렵에 덩달아 나온 것 아닐까 생각하기 쉽지만 내용을 읽어 보면 급하게 써서 나온 책은 아닌 것 같았다. 혹 좀 더 다듬어 나중에 나올 수도 있었던 책이 마케팅 차원에서 이 무렵에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또 나쁜 것도 아니지만, 암튼 밀도가 떨어지는 책은 아니었다. 음악 실력만큼 문장 실력도 우수하진 않았어도...^^ 

천천히 읽었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소설처럼 빠르게 읽히거나 빨리 읽고 싶어지는 장르도 아니니 서두를 것 없이 조금씩 야금야금 읽어내려갔다. 책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무릎팍 도사처럼 어린 시절부터 순차적으로 시간 순서로 이야기를 뽑아낸 것이 아니라 딱히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지만 내키는 대로(내 생각에)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적은 느낌이었다. 그녀를 알게 해준 남자의 자격 이야기는 책 말미에 아주 조금 나온다. 왜 그런 설정으로 구상을 했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답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이력이 정말 화려하다. 그녀를 구성하고 있는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모든 환경이 다양한 것처럼 살아온 족적도 그만큼 다양하고 다채롭고 화려하다. 한 사람이 하나의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익히고 또 뿌리며 살 수 있는 것인지 경이로울 만큼! 

박칼린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아주 어릴 적에 한국으로 돌아와 열살 무렵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고등학교 때 1년 간 한국(부산)에서 학교를 다녔고, 다시 미국에서 대학을, 그리고 한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다. 첼로를 전공하면서 마칭 밴드에서 테너 색소폰을 배웠고, 콘서트 밴드에서 오보에도 배웠고 퍼커션도 배웠다. 한국에서는 무려 박동진 선생님께 판소리를 사사받았다. 그밖에도 그녀가 어려서 만난, 또는 일하면서 알게된 인연 중에는 숱한 거장들이 있었고 놀랍게도 '우연'에 기반한 이끌림이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런 행운아를 보았나! 하며 감탄하게 된다. 열심히, 적극적으로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그같은 길의 앞잡이가 되어주었겠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 행적들에 기가 죽을 지경이다.  

어머니는 리투아니아인인데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하셨다. 그 어머니가 소련이 무너지면서 드디어 고향 땅을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에 있던 박칼린은 미국의 어머니가 리투아니아에 가져갈 선물로 손수 만든 십자가를 어렵사리 부쳤다. 두 손을 모두 다쳐가며 가족의 이름을 모두 새긴 나무 십자가가 극적으로 어머니께 도착했고, 어머니는 그 십자가를 고향 땅에 가져갈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먼저 이 책을 읽은 분께 이야기로 들었는데 들으면서도 막 눈물이 났더랬다. 얼마나 감동적이던지... 그런 생각을 해낸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온통 십자가로 뒤덮인 언덕을 보니 그네들의 문화였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엌칼로 나무를 다듬어 이름을 새긴 그 정성과 땀방울의 가치는 결코 바래어지질 않는다.  

또 나를 감동시킨 에피소드는 송일곤 감독과 함께 폴란드 여행을 했던 이야기다. 폴란드를 거쳐 리투아니아로 함께 가기로 했는데 폴란드에서 대중교통 파업이 일어나 겨우겨우 극적으로 리투아니아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된 시간을 하루 넘겼을 때였다. 게다가 기차역도 아닌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중 나오기로 한 생면부지의 사람이 공항에서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내민 빵 한 덩어리!  

"폴란드가 파업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지. 기차역이 마비되었을 테니 혹시 비행기로 오지 않을까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먼 길 오는 손님이 마을에 도착하면 우리는 마을 앞까지 마중을 나가. 이 빵을 줘야지. 오느라 배고플 테니 어서 먹어. 우리는 원래 그래." -124쪽 

낯선 곳에서 뜻밖에 마주친 파업과 어긋난 도착으로 발을 동동 굴렸을 그녀와 일행이 맞닥뜨린 구원은 참으로 따스했다. 빵 한 덩이를 준비했다가 먼저 내미는 그들의 문화도 훈훈하기 그지 없다.  

박칼린의 이야기 속은 넓다. 물리적인 거리도 대륙과 대륙을 오고 가고,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세를 그려낸다. 음악과 미술과 과학과 상상의 세계, 무대와 음악과 연주, 그리고 배우들의 이야기까지... 정말 종횡무진이다.  

글 속에서는 딱히 힘들거나 괴로웠던 순간들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다. 어려서 겪은 첫 인종차별에 대한 쇼크가 잠시 언급되었고, 청학동 한풀 선사와의 우정이 이간질로 인해 장벽을 만난 이야기 등이 다소 안타까웠지만 그밖의 다른 이야기들이 지나칠만큼 화려하고 멋진 것들이어서 금세 잊혀지고 만다. 아이가 언어를 쉽게 익힐 수 있는 나이를 고려해서 교육 환경을 바꿔주시는 부모님, 아침에 아이를 포옹과 키스로 잠을 빼워주는 엄마, 여행의 참 재미를 알려주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엄마와 언니들, 성장 과정에서 함께 하숙하며 알게 된 무수한 세계인들까지... 그 모든 게 그녀의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삶의 텃밭과 거름이 되어주었다.  

타고난 그녀의 복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해본다. 만약 그녀가 검은 피부를 가진 채 우리나라에서 성장을 했더라면, 악기라고는 전혀 배울 수 없을 만큼 가난했더라면, 여행은커녕 하루하루 밥벌이에만 급급한 생활 환경이었다면... 의미 없는 질문이기는 한데 이런 생각들이 이 화려한 빛깔의 영롱한 그녀에게서 자꾸 거리감을 갖게 한다.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고, 이런 정보가!!하며 눈을 크게 뜨게 만드는 재미난 이야기도 많고, 평소에 알지 못한 무대 뒤 이야기까지 모두 재밌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하다. 너무나 공통점이 적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덜 되는 것도 이유일 것이고, 부러움에 눈이 먼 질투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책임을 전가하여 그녀의 부족한 필력 때문일지도..^^ 

그냥...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감동적이고, 적당히 자극도 되는 그런 책이었다고 마무리를 지어본다. 읽어 나쁜 책은 아니었는데 딱히 아주 큰 장점도 별로 못 느꼈다. 그녀에게 느꼈던 매력을 이제 덜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지나칠 정도로 매력적이다. 삶 자체가 후끈후끈하다. 작가와 독자로서의 만남은 그냥... 정도였지만, 무대 감독의 그녀와 관객으로서의 만남은 이후로도 계속 기대를 가득 담을 작정이다. 그녀 역시 그걸 가장 원할 것이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2-15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읽고 나면 제목 한 번 잘 지었다 생각되지요~ 딱 거기까지. 그냥~ ^^
십자가 이야기가 최고의 감동을 불러왔지만... 낚여서 책 사신 거 같아 조금 미안해지는.ㅋㅋ

마노아 2011-02-15 10:54   좋아요 0 | URL
헤헷, 순오기님께 얘기 듣기 전에 산 거예요. 그러니까 '알사탕'에 낚였던 거죠.^^
뭐랄까... 이번 논쟁의 김영하스런 입장.. 그런 느낌이었어요. ;;;

마녀고양이 2011-02-17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김빠진 맥주 같죠, 이 에세이? ㅠㅠ
나름 이쁘긴 하지만, 박칼린이라는 카리스마에 비하면 좀... 좀.... 그냥 그런.
그래서 제목이 '그냥' 일까요? 아하하.

마노아 2011-02-17 13:51   좋아요 0 | URL
충분히 떠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되어 있는 사람이 너는 왜 아직도 안 떠나니? 당장 떠나!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하여간 제목은 참 잘 지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