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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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가요, 지쳤나요... 

지금 용기가 필요한가요?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의 멘토 마야 안젤루가 전하는 긍정의 메시지! 

멋진 카피다. 읽기도 전에 호감을 주는 문구들이다. 표지의 디자인도, 제목의 글씨체도 모두 예쁘다.  스물 여덟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160쪽의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까지,마음에 들었다. 작가 소개를 책을 다 읽은 뒤에 읽었는데 본문 속에는 그녀가 어린 시절 엄마의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한 충격으로 몇 년 동안 침묵 속에서 지낸 얘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해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알고서 읽었더라면 그녀의 목소리가 아마도 조금은 더 진중하게 들렸을 것 같다.

세번째 편지에서 그녀의 아이 이야기가 나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첫 성관계를 가진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 아이를 출산 직전까지 숨겼다가 새아빠와 엄마에게 그 사실을 밝히는 장면은 꽤 충격적이었다. 

   
 

 "아이 아빠가 누구니?"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애를 사랑하니?" 어머니가 물었다.
"아뇨."
"그애는 너를 사랑하니?"
"아뇨. 같이 잔 남자는 그애뿐이었고, 그것도 딱 한 번뿐이었어요."
"세 사람의 인생을 망칠 필요가 뭐 있겠니? 우리 집안에 아주 예쁜 아기가 태어나겠구나." – 31쪽

 
   

문화가 다르고 사고관이 다르고 또 경제 능력까지 모든 게 다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 딸이 학생 신분으로 아이를 출산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저런 반응을 보일 엄마가 있을까 싶다. 어느 쪽 손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정말 놀라웠다.  

더 대단한 것은, 대단한 부자인 엄마에게 전혀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무한 애를 쓴 마야 안젤루의 노력들이었다. 시련이 없거나 좌절이 없었던 게 당연히 아니건만 꿋꿋함 그 자체로 억세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그 열정에 감탄하게 된다. 게다가 재능과 영감은 또 얼마나 출중했던지... 

그러나 그녀의 사회적 성공과 그를 바탕으로 한 충고와 조언은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곳곳에서 저지른 실수로 인해 얻게 된 깨달음은 독자도 함께 큰 울림을 받았다. 모로코에서 길가의 촌로에게 대접받은 커피 한 잔. 그 속에서 나온 바퀴벌레 네 마리. 차마 그 앞에서 뱉어내지 못하고 삼켰다가 그들 앞을 벗어난 뒤에 다 게워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건포도였단다. 가난한 그들이 선사한 최고의 성의였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고, 그들 앞에서 뱉어내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게 된 극적인 순간. 독자도 함께 경악했다가 같이 미안해지고 고마워지고 안도감을 느꼈다.  

그밖에 흑인에게만 식사를 늦게 준비해주는 걸로 여기고 경찰을 부를 각오로 따졌는데 그저 식재료가 준비되지 못해서 지연된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가 갖게 된 민망함에서도 교훈을 갖게 된다. 지나친 피해의식과 선입견으로 인해 상대에 대한 불신을 미리 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몇몇 꼭지들이 꽤 감동적이었지만 대체로 평이했다. 에세이 형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더더욱. 게다가 제목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좀 겉도는 기분이다. 그냥 흔한 자기 계발서 느낌인데 저자의 유명세와 매끄러운 컨셉과 홍보로 좀 몰아가는 듯 보인다. 저자에 대한 감동과 놀라움과는 별개로 책에 대한 감상은 좀 낚인 기분이다. 나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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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크리스마스 -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
해리 데이비스 지음, 타샤 튜더 그림, 제이 폴 사진,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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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책이었다. 타샤 할머니의 스타일과 성향 역시 크리스마스에 딱 어울린다.  

표지의 왼쪽 초록색 부분이 이 책을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느끼게 한다. 그 옆에서 리스를 손수 만들고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더욱 그렇다.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그닥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못 느끼고 있다. 번화가를 많이 돌아다니지 않아서 캐롤송이나 찬란한 불빛을 많이 못 본 것도 이유겠지만, 집에서 크리스마스 향취를 못 느껴서 더욱 그럴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할 자신은 없지만 한달이나 그보다 더 전부터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타샤 할머니의 정성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준비하면서 한 차례, 그리고 선물하면서 한 차례, 모두 두 번씩 선물하게 되는 그녀의 독특한 크리스마스. 장식이든 음식이든 선물이든, 뭐든 직접 뚝딱 만들어내는 타샤 할머니는 진정 신의 손을 자랑한다.  



강림절 달력은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문화권이 다른지라 깊숙이 녹아있는 전통적 습성은 낯설 수밖에 없다.  





진저브래드를 직접 만드셨는데, 생각보다 안 이뻐서 어떻게 쓰이나 궁금했는데, 뒤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쓴 걸 보니 남달라 보였다. 어두운 주변 배경에 상대적으로 밝은 불빛 아래서 이 장식품은 투박함을 버리고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전통있는 크리스마스 잔치는 그녀의 작품 속에서 여러 차례 재생되었다. 타샤 할머니의 그림책으로 남다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미리 맛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더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문득,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언제부터 믿지 않았을까를 떠올려 보았다. 더 어릴 때의 기억은 별로 없는데, 확실히 일곱 살 때에 난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로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보다 더 전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확실히 알았다. 눈치를 차려서가 아니라,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믿을래야 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 산타 할아버지는 우리 집 말고 다른 집만 가는가...라는 불만은 있을 법도 했지만.  



집에 가서 넌지시 여덟 살 큰 조카가 산타 할배를 믿고 있는지 언니한테 넌지시 물어봐야겠다. 기왕이면 아이들이 더 오래오래 산타 할배의 환상을 갖고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이렇게 산타 할머니가 되어주시는 타샤 튜더 같은 사람의 정성이 더 의미있어질 테니까.  

언니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책. 근사했다. 아무렴, 타샤 할머니인데... 

그러니까, 오늘은 크리스마스 2부. 내일은 크리스마스. 모두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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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12-25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 딱~~ 어울리는 책인걸요~~^^

마노아 2009-12-27 01:08   좋아요 0 | URL
그쵸? 크리스마스에 딱 어울리는 책이었어요. 저대로 리본 포장해서 선물로 주어도 좋겠더라고요.^^

희망찬샘 2009-12-29 0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할아버지의 꿈이 깨어지는 날, 우리 아이는 한층 자라겠지만, 그 꿈을 오래오래 간직하길 바라봅니다. 예전 2학년 할 때 아이들이랑 이야기 하던 중 산타가 당연히 없다는 걸 안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 해 보니 그 때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을 보니 2학년이라도 믿을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하셨어요?

마노아 2009-12-29 21:18   좋아요 0 | URL
그렇게 어느 순간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고, 뒤늦게 그것을 슬퍼하다가, 또 어느 때가 되면 그것도 자연스럽다 인정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일년에 한 차례 산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사는 것 여전히 좋아 보여요. 메리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또 메리 크리스마스였어요. ^^
 
마지막 사진 한 장 - 사랑하는 나의 가족, 친구에게 보내는 작별인사
베아테 라코타 글, 발터 셸스 사진,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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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찾아와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호스피스 병원.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그들이 죽은 직후의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기꺼이 자신의 사후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허락해 준 것이 신선했다. 죽은 다음의 일이니 못할 것도 무엇이겠냐마는, 그래도 그런 요청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조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당연한 거지만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이렇게 어린 아이도...

첫 사진을 찍고 불과 두 달만에 죽은 이 아기는 고작 17개월 밖에 살지 못했다. 저렇게 천사같은 얼굴로 죽음을 맞았다는 게 아프고 동시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노인분들의 얼굴에선 확실히 '완고함'이 보인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죽음 이후까지 너무도 완벽히 준비해 놓아서 가족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죽는 순간까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신세지지 않으려는 환자의 절대적 의지의 표현이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독하단 생각은 들었다. 본인이 그 편이 편한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렇게 손 내밀기 힘든 삶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었다.



대개의 경우가 암환자였는데, 그래서였을까? 죽기 얼마 전의 사진을 보더라도 눈빛만은 형형하다. 암이 주는 고통이 적을 리 없는데도 눈빛이 풀린 사진은 거의 보지 못했다. 실제로 암환자들은 육신의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정신만은 멀쩡할 때가 많다고 들었는데 그렇기 때문일까? 살아 마지막 사진일지 모르니 더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고...



한 페이지에 사진이 담기지 않아 따로 찍었는데 같은 사람이다. 이 분이 인상 깊었던 것은 죽은 뒤의 얼굴이 가장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안식으로 접어든 것일까...


"고통을 덜어주면 환자는 안락사를 원치 않습니다."
호스피스 운동과 완화의학의 신조를 클라시크는 이 한마디로 요약한다. 적어도 그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완화의학에선 생명 연장보다 고통 완화가 우선이다. 따라서 설사 진통제가 생명을 단축하더라도 환자는 필요한 양만큼의 진통제를 제공받는다. 통증을 참을 수 있는 수준으로 줄일 수 없는 경우엔 통증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을 재운다. 완화의학에선 이런 통증 완화의 마지막 방법을 '말기 진정 상태'라 부른다. 물론 환자의 동의가 있을 때만 사용하며, 남은 생명이 며칠에 불과한 환자들에 한정한다. 
 
페이지 :  256  

호스피스 병원에서는 고통 완화가 더 중요하고 환자의 결정을 제일 중시하기 때문에 산소 호흡기를 쓰지 않을 때가 많았다.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바라보려고 하는 환자들의 곧은 의지는 강한 만큼 위태로워 보여서 참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때로 그들은 가족들과 혹은 자기 자신과 화해를 한 채 깊은 안식을 얻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시간이 맞지 않아 가족을 다 기다리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기도 했다. 남겨진 가족의 마음은 얼마나 멍이 들었을까. 그러니 우리는 후회하기 전에 지금 당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기회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고요한 죽음들이었다. 병마와 싸울 때의 격렬함 뒤의 저 잔잔한 평화로움이 애잔하고 또 허전하다. 특정한 누군가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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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09-12-1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들을 보니 돌아가신 분들이 생각나요.
우리 시할머니, 시할아버지, 시동생..
세 분 모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후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지요.
마치 주무시는 듯.
아직도 할머니 입관 때 입술에 번진 립스틱을 닦아드렸던 그 느낌이 남아있어요.
저 사진들을 보면서 저의 마지막이 너무 흉하지 않기를 기도하게 되네요.

마노아 2009-12-15 15:58   좋아요 0 | URL
저는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셔서 너무 마르신지라 눈도 못 감으셨어요.
그래서 마지막 모습이 평안하게 기억되지 않아 마음이 아파요.
나이들어 갈수록 삶의 여정이 얼굴에도 드러나는 것 같은데, 그래서 평소의 표정도 중요하고, 마지막 가는 길 남겨주는 표정도 중요해 보여요. 평온하게 떠날 수 있다면, 그또한 엄청난 축복 같아요.
 
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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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파울로 코엘료 류의 책들이 싫다고 했다. 이유는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다. 그게 짜증난다고. 비록 친구가 읽은 파울로 코엘료의 책이 '연금술사' 뿐이고, 연금술사를 싫어하는 사람을 많이 보긴 했지만, 어쨌든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에세이 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과도 조금 통할지 모르겠다. 에세이의 글감들은 글쓴이 자신의 경험이고, 그의 깨달음이며 그의 감동이다. 그것이 책장을 뛰어넘어 시간과 공간을 건너서 독자에게도 비슷한 감동의 전달을 해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물론 많다고 생각한다. '가르치려' 든다는 책도 그렇지 않을까. 그 사람의 깨달음에 동의하고, 감탄도 해내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 자신이 없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어휴... 하고 한숨부터 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이 그랬다고 말하는 것인가? 사실 어느 정도는 그랬다. 읽으며 감탄하고, 읽으며 부끄러워지고, 또 잔잔한 감동에 찌르르 전율도 느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충고하려 들지 말고 그저 침묵으로, 따뜻한 공감의 위로만 건넬 것을 거듭 강조하는 피에르 신부님의 가르침은 이 책을 읽는 불특정 다수에게 당신 같은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는다. 강조하지 않아도, 그분의 삶의 행적이 얼마나 숭고했는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객관적 사실들로도 이미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이 책에는 피에르 신부님이라고만 적을 뿐, 본명은 전하지 않는다.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9세에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수도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신부님.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고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6년간 일했으며, '엠마우스'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집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다가 지난 2007년에 96세의 나이로 소천하셨다.  

성경에는 한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으나 가진 재산을 모두 나눠주고 따르라는 말에 힘없이 돌아간 사건이 소개된다. 피에르 신부님은 한 걸음 더 나가지 못한 그 청년의 반대 모습이 아닐까. 국회의원이 될 때의 결심은 제도적으로 더 큰 힘을 갖고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겠다는 목표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자리에 있어보니 그게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다시 맨 몸으로 현장에 뛰어든 신부님. 어느 쪽만이 정답이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제도권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더 큰 힘으로 움직여줄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고,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직접 어루만지며 고통을 나눠주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혹은 정직한 방법으로, 그런 아름다운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게 기적처럼 보이는 오늘날로서는 막막한 도전이긴 하지만. 

꽤 옛날 분이시긴 하더라도 고리타분하지 않고, 또 고전적이신 분이면서도 합리성을 놓치지 않는 점도 신선했다.  

   
 

 고통받는 누군가에게 '당신은 참으로 운이 좋군요. 당신이 겪는 고통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두 가지 태도만이 바르다고 마음속 깊이 확신한다. 침묵하고, 함께 있어주는 것이 그것이다. – 212쪽

 
   

이 구절에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얘기가 잠시 언급된다. 그분을 위대한 성인으로 부르는 데에 결코 주저함이 없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바에 대해서는 물러섬이 없다. 그건 교황이라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수장으로서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저지른 인간적 잘못들에 대해서 사과했던 요한 바오로 2세가 에이즈가 엄청나게 퍼진 아프리카에 가서는 '금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설파했을 때는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교회가 취해야 할 행동의 방향, 복음의 진정한 의도, 희망과 소망의 차이를 말하는 피에르 신부님의 목소리는 결코 오버하지 않는 성숙하고 차분한 일관성을 보여준다. 그러한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더 깊은 신뢰와 의지하는 마음을 키우게 한다.  

   
 

 반드시 이민자들이 한 행위가 아닌, 불행에서 비롯된 범죄로 인해 살기 힘들어진 구역에 사는 일부 플아스인들의 분노를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못 가진 자들을 위해 프랑스 내에서는 물론이요 프랑스 국경 밖에서도 벌여야 할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연대의 노력만이 그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불법을 저지른 처지에 놓여 있는 이민자들 전부를 국경으로 인도함으로써 그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건 환상이다. 세계화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보다 광범위한 차원의 부의 재분배를 생각하는 문화권을 새롭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 190쪽

 
   

그가 보여주는 사랑과 봉사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고 구분하지 않는다. 비단 종교인들 뿐아니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인류애를 보여줘야 하는 당위성, 그로 인해 얻을 문제의 해결을 얘기한다. 그것이 프랑스를 넘어, 또 시간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고대로 적용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당신의 삶이 보여준 지극히 성자스러운 행보는 그의 직분에서, 자리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추구하고 행해온 삶의 자취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일 게다. 같은 삶을 살 자신은 없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단순한 기쁨'이 되도록......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기를 바라며..... 

사르트르에게 '타인'이 지옥이라면
피에르 신부에게는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이다.
타인은 내 삶의 '단순한 기쁨'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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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7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7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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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한 게 아닌데 본의 아니게 연속으로 마음산책 책을 읽게 되었다. 또 다른 책들을 두루 살펴본 게 아니어서 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최근에 읽은 책들은 모두 표지가 이쁘다. 특히 이 책, 미식견문록은 그 중에서도 탁월하게 예쁘다.  



워낙 많은 소개를 통해서 그녀가 러시아 어 동시 통역사라는 걸 알고 있었고,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많은 체험을 했을 테니 남다른 미식가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하나 빠진 걸 알게 되었다. 후천적 미식가 이전에 선천적 먹보 핏줄이라는 것 말이다. 이 정도면 만화가 요시나가 후미랑 거의 쌍벽을 이룬다 하겠다.  

책의 구성도 예쁘다. 서곡으로 시작해서 총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이사이 휴식과 간주곡이 들어가는데, 실제 책을 읽어보아도 그 경쾌함이 리듬같은 울림을 자랑한다. 제목 아래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꼭 둥둥 떠 있는 음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그림은 어떤가? 



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온 삽화다. 삽화는 전체 책 중에 몇 장 나오지 않는데, 저 줄기를 보고 있자니 역시 뭔가 노래가 솟구칠 것 같은 느낌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일본과 러시아, 그밖에 체코 등등을 오가면서 먹었던 음식, 혹은 체류 중에 먹고 싶었던 음식, 그때 먹었던 음식을 추억하면서 다시 찾으려고 애썼던 이야기 등등을 줄줄이 재밌게 엮어 놓았다. 한 반에 서로 다른 50개의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엌 소리가 나올 만큼 남다른 환경에서의 이야기. 그 아이들을 모두 홀렸다던 '할바'라니, 누구라도 먹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음식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나라, 어떤 문화권의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의 역사적 사실과 웃고 말/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같이 소개되기 마련이다. 겪어보지 못한, 상상하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주는 그 즐거움은 전혀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만났을 때의 설렘과 비슷하다. 물론, 그 음식은 얼굴을 찌풀릴 맛이 전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캐비어와 감자, 순무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철갑 상어가 3억 년 전에 나타난 고대어라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다. 식물도 아닌데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지구에서 살아온 동물과 같이 살고 있는 게 신기해서 말이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녀석이 100년을 넘게 산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어떤 물고기는 인간보다도 오래 사는구나! '상어'라고 해서 크기가 꽤 클 거라고 짐작했는데 철갑 상어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한다. 신기하고 재밌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캐비어가 너무 탐나진 않는다. 모르는 맛이기도 하거니와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에서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라서 말이다.  

감자 이야기는 더 재밌었다. 구황 작물로 유명하고, 지금은 식량보다도 다양한 음식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음식인데, 이게 유럽에 전파되기까지의 진통이 꽤 컸다는 게 놀라웠다. 감자가 잘 생긴 녀석은 아니지만 그렇게 못 생겼던가? 감자를 먹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는 황제의 엄포에도 감자를 먹으면 지옥에 갈 거라는 근거없는 미신에 더 벌벌 떨었다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인간의 무지함이 측은해지기도 한다. 신앙의 맹목적성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휘둘리며 살아온 것인지... 게다가 더 기막히게도, 목숨을 담보로 한 황명도 거부하던 사람들이 감자를 먹으면 금화를 주겠다는 조건에 바로 덤벼들었다는 이야기는 더 쉽게 이해가 되어서 더 참담하다. 이성보다도 신앙, 신앙보다도 돈이란 말인가.  

요네하라 마리가 읽었던 어릴 적 동화나 책 속에서 나왔던 음식을 커서 궁금해하고 만나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도 몇 차례 소개되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 헨젤과 그레텔은 나 역시도 읽은 책이건만, 어릴 때 그 책을 읽으면서 거기 나온 음식들을 궁금해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강렬한 욕망을 가졌더라면 지금도 생각이 났을 테지만, 그냥 그런 이야기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나 보다. 마리의 학교 친구들 중에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아는 아이들이 없었다는 얘기가 충격적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이 책은 책보다 만화 영화로 더 유명했던 게 아닐까? 그 만화는 일본에서 수입해 온 만화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에겐 더 익숙해진 것일 테고. 아마도 방영 당시에는 우리 만화로 알고 지낸 사람이 더 많았을 것 같고. 좀 씁쓸한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씁쓸해지고 불편해지는 건 그런 대목이 아니다. 즐겁고 경쾌하게 읽어나가다가 마주치는 이런 문장은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아시아 여러 나라 가운데 일본의 근대화가 한발 앞선 것은 다른 나라들처럼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오히려 주변 국가를 식민지로 삼은 덕분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본군이 강했던 것은 군인들이 형편없는 음식을 참고 견뎠기 때문이 아닐까. 전쟁은 무기나 연료, 식량 등을 조달하는 병참 능력에 달려 있고, 병참에서 식량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으면 낮을수록 국가로서는 이롭다.  

...... 

7대양에 걸친 식민지를 지배한 대영제국, 세계의 경찰로 불리는 미국. 현재 이 앵글로색슨족만큼 세계에서 공격적이요, 패권을 노리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그 저력은 혹시 맛없는 요리에 익숙한 덕분이 아닐까? (208-209)

 
   

하고자 하는 말이 일본의 근대화 성공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임을 모르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는 불편하다. 더군다나 식민 지배국이었던 일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면. 너희가 전범 국가이니 저런 얘기는 꺼내서도 안 되고, 입도 벙긋하지 마라...라고 할 수는 없다. 당신은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한, 그래도 소위 말하는 지성인이 아니냐... 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없다. 그래도, 역시 불편하다. 예쁘고 좋은 책을 실컷 음미하다가 맞닥뜨린 유일한 아쉬움이기도 하고.  

잘 읽다가 막판에 다소 찡그리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남들보다 할 얘기가 더 많을 법한 환경에서 산 사람이 침묵을 하고 있다면 그것도 낭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요네하라 마리의 다작은 독자에게 멋진 선물이 되었다. 그것이 과거형으로 끝난 것은 무척 안타까운 부분이다. 나로서는 첫 번째 책, 그러니까 '서곡'에 해당되었다. 더 다양한 악장의 그녀의 곡들을 음미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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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11-1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요 책 나비님 서재에서 보고 봐야지 했는데 그래도 미뤄두었는데 마노아님 서재에서 또 보니 괜히 미뤄뒀단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다음번엔 보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마노아 2009-11-13 00:19   좋아요 0 | URL
짤막한 글들이 많아서 조금씩 야금야금 먹는 기분으로 읽었어요. 양념이 잘 되어 있어요.^^

같은하늘 2009-11-13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나비님의 극찬으로 구입하고 다른 책들에 밀려 아직 책꽂이에 있는데...^^
정말 표지가 너무 깔끔하니 마음에 들어서 처음 받아보고도 좋았는데 마노아님 글을 보니 빨리 보고싶다는..

마노아 2009-11-13 12:08   좋아요 0 | URL
제가 이렇게 디자인에 꽂히는 인간인가 싶을 만큼 맘에 드는 표지와 제목 폰트였어요.
가볍게 보기 좋은 책이에요.^^

기억의집 2009-11-13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여자는 이것뿐만 아니에요. 제가 이 여자의 대단한 책 받아보고 흝어보다가 그 날로 반품 시킬 정도로 이 여자 우파, 맞아요. 러시아어 통역사이고 소녀시절 동구권에서 보낸 여자 치고. 전 마라의 마녀의 한다스만 좋아요. 그나마 그 책은 그녀의 우파 시선이 덜 들어갔거든요. 일본인이라 당연히 우파이겠지만 불편은 해요. 심지어 전 시오노 나나미도 우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분들하고 달리 전 마라나 나나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불편하고 불쾌해지는 이유는 뭘까요?

마노아 2009-11-13 12:09   좋아요 0 | URL
이책 뿐아니라 다른 책에도 그런 시선이 깔려 있군요. 일장기랑 일본국가 얘기는 지네 나라니까 그런가보다...했는데 원래 색깔이 좀 그렇군요.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읽을 때는 그런 생각을 잘 못했어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제국 중심의 환타지가 좀 있는 것도 같단 생각이 드네요. 로마인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읽을 생각인데 그때는 좀 더 꼼꼼히 읽어야겠습니다. ^^

건조기후 2010-07-2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살까하고 보다가 마노아님 리뷰 있길래 들어왔어요. 근데 끝에서 좀 엇, 했네요.
발명마니아에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본군들 성범죄가 일부나마 밝혀지고 있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 박학다식에 유머에 양심까지 있구나 했는데 으음

마노아 2010-07-21 11:36   좋아요 0 | URL
으음... 저도 그녀의 본심은 무얼까 궁금해져요.^^;;;
전 발명마니아 30쪽까지 읽다가 관뒀어요. 미녀냐 추녀냐도 읽다가 중단. 프라하의 소녀시대와 미식견문록은 재밌었는데 요 두 책은 지루하더라구요. 끄응...

건조기후 2010-07-21 12:39   좋아요 0 | URL
프라하의 소녀시대 완전 와아아안저언ㅎ 좋아요.ㅎㅎㅎ
음 발명마니아가 지루하셨구나.. 저는 엄청 재밌게 읽었는데^^:
은근 유치하고 단순하기도 한 것이. 취향에 맞나봐요 아하하. 그림도 너무 사랑스럽고 윽.
삘 받아서 요네하라 마리 책 다 사버릴 기세에요.

마노아 2010-07-21 13:11   좋아요 0 | URL
참 재주가 많은 분인데 일찍 돌아가셔서 안타까워요.
두 권의 책을 아웃시켰는데도 '대단한 책'이 궁금해요.
아직 내버릴 수 없는 매력이 유지되고 있어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