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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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양장본의 느낌은 좋지만 이중 커버는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요새는 띠지가 표지의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어서 더 귀찮아졌는데 디자인도 좋지만 낭비가 심한 것 같다. 이 책은 양장본에 이중커버인데 표지를 벗겨낸 속표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보통 작가와 역자 정보는 커버에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이 저 두꺼운 표지 뒤에 가 있으면 좋겠다. 커버를 잘라서 속에 붙이는 것도 참 매번 못할 짓이다. 

장영희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막 출간됐는데, 그러고도 다 엮지 못한 글들이 남아 있었나 보다. 고맙게도 이렇게 다시 그 흔적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에세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도 장영희 선생님 글들은 잔잔하고 마음도 편안하게 만들어주어서 좋았다. 지나치게 교훈적이지도 않고, 너무 개인적이어서 공감을 못하게 하지도 않고 딱 적당히 보편적으로 공감하게 만드는 중용의 힘이 있었다. 이 책의 에피소드들도 그랬다.  

대부분의 글들은 문학전도사 답게 영미 소설이나 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 컨셉의 칼럼 연재를 하셨던 건데 그 신문들이 모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여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참 강경조의 신문들인데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살가운 느낌의 글을 채워주셨던 건 아닐까, 선생님의 글은... 

교단에 계셨던 분인지라 학생들과의 이야기도 많이 있다. 그 학생들과의 일들은 다른 기억들을 찾아내게 하고, 그 안에서 그날의 하고 싶은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선생님이 느꼈던 어떤 감동과 깨달음은 그렇게 신문 독자들에게, 다시 이 책의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영감을 주었던 그 대상자들은 자신이 이렇게 하나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그 자신도 흐뭇하겠지만 몰라도 좋다. 그렇게 퍼진 향기는 저절로 본인에게 돌아갈 테니까... 

66쪽에 소개된 피자 배달 청년의 인터뷰 내용이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진행자가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좋은 냄새가 나는 가정을 갖고 싶다고 답한 것이다. 피자 배달을 하기 위해서 현관문에 들어섰을 때 집집마다 특유의 독특한 냄새가 있다는 것이다. 그건 단지 화학적인 냄새가 아닌 정서의 냄새였다. 아늑하고 따뜻한 사랑의 냄새가 나는 집이 있는가 하면 어딘가 냉랭하고 서먹한 냄새가 나는 집도 있는 것이다. 그가 원한 건 아늑한 냄새가 나는 집의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그게 어떤 냄새인지 알 것 같다. 지금처럼 추운 계절에 맞닥뜨린 냄새라면 더더욱 절실하게 와 닿았을 것이다. 가정의 냄새도 그렇거니와 개인의 냄새도 생각해 보게 한다. 나에게서 나는 향은 어떤 것일지... 누군가 꺼리는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혹은 무색 무취에 무미건조한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본다. 선생님이 돌아보신 것처럼... 

 

75쪽의 이야기도 참 좋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제이미는 연말 학예회 연극에서 배역을 맡고 싶어했다. 엄마는 아이가 배역을 맡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났는데 학교 정문을 나오는 제이미의 두 눈은 자부심과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엄마는 무슨 대단한 역을 맡았나보다 기대를 했는데 아이의 대답이 걸작이다. "엄마, 나 손뼉 치고 응원하는 사람으로 뽑혔어요!"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교과서에 실린 수필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가 수풀 역할이었는데 엄마는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어서 끝나고 나서 뭐라 말해줄 것인지 걱정했는데 아이는 엄마가 보지 못해서 제 실수를 못 알아차린 걸 다행으로 여겼다는 그 이야기...  

제이미의 이야기에서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감동적이었고, 동시에 아이에게 그런 자부심을 준 선생님도 놀라웠다. 배역을 맡지 못한 친구들이 더 많았을 터인데 그 아이들에게 너희는 손뼉 치고 응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주셨을 테니 말이다. 이 이야기는 '가능하면 자주 감동을 한다'가 치매 예방에 좋다는 얘기에 수록되어 있었다. 벅차고 거창한 감동도 물론 좋지만, 삶에서 마주치는 이런 소소한 감동이 진정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백신이 될 것이다.  

선생님이 미국에 머물 적 이야기들이 재밌었다.  

보통은 '사과'하면 빨간 동그라미에 꼭지 한 개 달린 것을 떠올리는데, 한 입 베어 먹은 반쪽 사과를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남과 '다르게' 생각한 재미있는 발상이다.
'다르게 생각하라'(...)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남보다 조금 더 창의적으로, 한 번쯤 다른 방향으로, 조금은 엉뚱하게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한 집단에서 이질감, 소외감, 부조화를 불러일으키고 소위 '왕따' 당할 수 있는 요인도 되므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말도 된다.
다양성을 기초로 시작한 나라니만큼,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할 뿐 아니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권장하는 것은 아마도 미국이 미국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일 것이다. 다른 모습, 다른 문화, 다른 언어 그리고 다른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다름' 속에서 통일성을 찾으며 변화의 기조로 삼는 것이다. – 108쪽


유난히 심한 길치였던 선생님은 미국에서 길을 너무 헤매다가 문학적 감각을 살려서 길찾기에 응용한다. 그때 건물을 찾아가면서 되짚었던 애플의 로고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격과 색깔을 드러나게 해주는 예였다. 나쁜 사례에도 워낙 많이 이름을 올리는 나라지만, 배울 것도 물론 많은 나라다. 어느 나라인들 안 그렇겠냐마는...  

시애나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미국 친구가 연구실에 맡기고 간 여섯 살짜리 꼬마 아이에게 '둥근 새'라는 제목의 동화를 읽어주었는데, 이 새는 몸이 동그랗고 날개가 작아서 날 수가 없었다. 무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둥근 새는 나는 것에 실패한다.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선생님은 둥근 새가 다른 새처럼 날아가는 끝이 아니어서 아쉽지 않냐고 묻는데 시애나가 의아한 듯 대답했다.  

"왜요? 둥근 새는 날지 못하지만 아마 둥글둥글 잘 구를 걸요." 

우문현답이다. 우리는 모든 새는 날아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문화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이라면 펭귄더러도 날라고 하고 타조랑 닭한테도 날라고 강요하지 않을까. 나부터도 그러고 살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같이 소개된 루스 시먼스 인터뷰 내용의 '어려운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해서 노력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때로 포기도 미덕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도 함께... 

 

137쪽의 경호 엄마 얘기도 먹먹하다. 경호는 키가 5,60cm 밖에 되지 않는 왜소증 환자다. 엄마가 휠체어에 태워서 공부를 시켰는데 한국 중학교에서는 교실이 3층에 있어서 1층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해서 전학을 가야 했다. 전학 간 학교는 화장실이 건물 밖에 있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야 했고 층계도 있어서 학교 다니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경호를 위해 공무원 아버지는 집을 팔아 경호 동생과 함께 본가로 가고, 경호 엄마는 경호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아침에 경호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낮 동안 이집 저집 청소를 하면서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한다고 한다.  

"경호를 학교에 두고 나올 때 자꾸 뒤돌아보곤 하지요. 일을 하다가도 경호 학교 쪽을 쳐다보기도 하고요." 
"왜요? 걱정이 돼서요?"
"아니요. 우리 경호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공부하고 있는 것이 너무 기뻐서요." 

남들은 우린라 교육이 잘못 되어서, 돈 잘 벌고 크게 성공하라고 자식들 데리고 미국에 온다는데, 경호 엄마는 단지 아들에게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기쁨을 주기 위해 이 먼 나라까지 와서 남의 집 마루를 닦고 있었다.-137쪽 


지탄 받는 문제성 유학도 많지만 저리 애절한 유학 이야기도 분명 많을 것이다. 요즘은 공공기관에서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화장실과 엘리베이터 설치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장애인의 활동을 평범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고 있다. 물리적인 불편과 심리적인 불편 모두 다... 

뒤쪽으로 영시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영시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는데 어쩌다가 만나게 되는 경우는 장영희 선생님 책을 통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셸 실버스타인의 시들은 동심 그 자체였는데 시인의 정보를 보니 1950년대에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군복무를 했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영국의 시인 퍼시 B.셸리 는 요트 항해 중 익사를 했는데 시신을 화장할 때 심장만은 타지 않았다고 소개되어 있다. 세상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책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한 시인의 두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때도 시인에 대한 정보는 아래 쪽에 작은 글씨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 어떤 시들은 시인에 대한 소개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249, 265, 281쪽에서 말이다. 누락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책의 곳곳에 꽃 그림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 책의 분위기와 몹시 잘 어울린다. 제목처럼 꽃비가 내리는 것만 같다.  

뒷부분에 이해인 수녀님과 박완서 작가님의 추모 글이 담겨 있고, 장영희 선생님의 일생을 펼쳐보게 만드는 여러 사진들도 소개되어 있다. 

 

첫번째 사진은 도도한 영화배우처럼 보였다. 무척 날씬하셨을 때의 모습이다. 두번째 사진은 미국문학을 강의할 때 사용한 교재인데 1967년판 너대니얼 호손의 '일곱 박공의 집'이라고 한다. 낡은 책장에 선생님의 손길이 잔뜩 묻어 있다. 학생들에게 힘이 되는 명언을 쓰고 직접 스티커를 붙여 만든 책갈피에서 소녀적 감성이 보인다. 과제를 잘 완수한 학생들에게 하나씩 선물하고 학기 말에 가장 많이 모은 순으로 상을 주기도 했단다. 나의 온라인 애인도 책갈피를 곧잘 만들어 선물하곤 하는데... ^^ 

세번째 사진을 보면서 탤런트 김여진과 심은경이 생각났다.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네번째 사진은 김점선, 장영희, 이해인 수녀님 사진인데 이때 셋 모두 암투병 중이었다. 수녀님 발목이라도 잡고 천당에 같이 들어가야겠다고 써놓은 덧글이 예쁘면서도 아팠다. 이 중 두 분이 벌써 운명을 달리하셨다.  

만화를 좋아해서 직접 그리기도 해서 선물하셨다는 선생님, 그 따뜻한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노래 선물도 담겨 있다. 작은 시디마저도 꽃비가 내리는 모습이다. 벅스에서도 들어볼 수 있다. '서율(書律)'이라고 적혀 있는데 '율'자가 저게 맞나? 붓률 자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음, 모르겠다...;;; 

이 책은 '내가 살던 용산'을 읽고 난 뒤 정서적으로 힘들어서 고른 책이었다. 뭔가 마음을 다독여줄 따뜻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장애를 안고 살면서 암 투병 중에 돌아가셨던 선생님의 고단함을 생각하면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소망이 되어주셨던 선생님을 떠올리며 즐겁게 읽었다. 선생님은 하늘에서도 여전히 방향치 길치이실 것 같고, 그럼에도 씩씩하게 문학의 향기에 취해 밝게 웃고 계실 것만 같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니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여전히, 여전히 따뜻하다. 글도, 사람도, 추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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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10-12-2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예쁜 책이예요.
저도 이중표지, 띠지 모두 싫어요.
책을 볼 때 아주 불편해요. ^^

마노아 2010-12-24 02:08   좋아요 0 | URL
물자 낭비로 이중표지 띠지는 일등감이에요..;;;;
 
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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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2년 대선 투표 결과를 기다리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대놓고 홍보는 못해도 브리 자를 들어 보이며 2번 찍자고 마구 꼬시던 나날들의 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당선 확정 문구를 확인한 순간 눈물이 났다. 살면서 그렇게 정치인을 응원해본 적이 없었고, 지지하던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 그렇게 기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그는 퇴임한 대통령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는 더 인기가 많아졌다. 5년 내내 너무 욕을 많이 먹어서 안쓰럽기까지 했던 그가, 이제 그 소박한 모습 그대로 고향 땅에 기대어 편히 살았으면 싶었다.  

그런데, 

2009년 5월 23일, 돌연 그가 죽어버렸다. 충격이었다. 그것이 자연사가 아니었고 사고도 아니었고 자살이었기 때문에 더 끔찍했다. 그가 죽음의 길로 떠나는 여정을, 국민들은 거의 생중계로, 실시간으로 맞닥뜨렸다. 고양이도 쥐를 사냥할 때 저리 구석으로 몰지는 않을 것 같은데, 불과 얼마 전까지 대통령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몰아간 대한민국의 현실이 섬뜩하리만치 무서웠다. 무엇보다 그가 가여웠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흘렀더랬다.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울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 앞에서 우왕좌왕했다. 그의 분향소에 꼬리를 물고 사람들이 찾아왔고, 국민장이 치러지는 동안의 그 수많은 인파, 그리고 봉하로 이어지는 추모 행렬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가 죽은 뒤에 많은 책들이 쏟아졌다. 생전에 준비하고 있던 책들도 있었고, 사후에 준비된 책들도 있었다. 많은 책들 중에서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 책이 나왔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생전에 원고 작업을 거의 해두었던 터였기에 '자서전'이란 이름이 무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출생해서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뛰어든 이야기는 '여보 나좀 도와줘'와 상당 부분 겹치지만 여전히 지루하지 않게 읽혔다. 그밖의 대통령의 자리에서 수행했던 많은 일들에 대한 고백과 퇴임 후의 이야기도 모두 그의 육성으로 들린다. 아직도 TV를 틀면 자연스럽게 나올 것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가난에 대한 설움을 온 몸으로 새기며 성장했던 인물이다. 대학을 가지 않고도 사법고시를 붙은 놀라운 이력을 가졌지만 그 무리 속에서는 여전히 미운 오리 새끼같은 존재였다. 판사가 되어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알아서 굽실거리는 사람들,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도 알았고, 나름 그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부림사건'을 맡기 전까지는... 

고되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훌륭한 판검사 혹은 변호사가 되어 약자를 보호해주는 인물...은 아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도 세속적인 가치를 아는 인물이었는데 독재 정권 하에서 죄없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죄인으로 둔갑하는 상황과 정면으로 맞닥뜨리자 그 안에 녹아 있던 연민이 폭발했다. 욱하는 성미가 있었던 그는 화끈한 느낌의 인권 변호사로 거듭났고,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동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87년 6월이 되었다. 뜨거웠던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라는 열매를 거머쥐었지만, 그 단맛을 마신 것은 엉뚱하게도 노태우였다. 양김은 분열하였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많은 피를 흘렸던 87년 항쟁이 그런 식으로 소화되는 것을 누군들 참혹한 심정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 와중에 김영삼 총재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는다. 그렇게 88년에 국회의원이 되면서 그는 정치인이 되었다. 연이어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도 각인된 이름이 되었다.   

3당합당할 때는 또 어땠는가. 모두가 비겁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주먹 불끈 쥐고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합시다."라고 외쳤던 인물. 이 장면을 나중에 TV에서 보면서 피가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쇼맨쉽이 아니라, 진정성,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되고 다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많은 고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진절머리나는 지역구도를 타파하고자 가능성도 없는 지역구에서 몇 번이나 선거를 치렀고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경선 과정의 험난함도 만만치 않았다. 보수 언론은 또 얼마나 그를 뒤흔들어 놓았던가. 그때마다 '원칙과 소신'을 외치며 물러서지 않던 그는 마침내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해프닝도 참 많았다. 대통령 후보가 미국 한 번 방문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측근들이 불안해 했던 것이다.  

기나긴 논란 끝에 미국 방문 문제를 정리했다. "갈 일이 있으면 간다. 일이 없어도 한가하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바쁜데 일도 없으면서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 갈 일도 없고 바쁘기도 해서 결국 미국을 가지 않은 채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이 일을 겪으면서 우리 나라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미국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일수록 더 그랬다.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국민들이 대통령 후보가 미국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것을 불안하게 여긴다는 근거 없는 불안감.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이런 것에 휘둘려 일도 없이 사진 찍으려고 미국에 가는 것은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187쪽 

버지니아 총기 난사 사건이 생각난다. 당시 살해범 조승희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기에 사람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에 무언가 불똥이 튈까 봐 전전긍긍했다. 오히려 이상하게 본 건 미국쪽이었다. 그 사건은 '그들'의 문제였지 대한민국의 일이 아닌데도 우리는 얼마나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가.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의 비교되는 사진이 오래오래 인터넷을 달구기도 했다. 슬픈 자화상이다.  

대통령 선거 전날 정몽준 의원이 후보 지지를 철회했었다. 하루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진 날벼락이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도 책 속에 언급되어 있다. 정몽준은 당시 권력분점을 문서로 보장받으려고 했다. 거절하자 구두 약속이라도 원했다.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측근들은 비공개 약속이라도 해주는 게 어떻겠냐고 설득했지만 그것도 거절했다. 거짓 술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실패한 대통령이 되느니 차라리 실패한 대통령 후보로 남겠다는 게 그의 의지였다. 여전히 원칙과 소신이다. 남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들이대는 그의 기준 말이다. 

결국 후보 단일화는 되었고 같이 유세장을 돌았다. 나중에 들으니 정몽준은 둘이 유세할 때 다른 정치인을 단상에 올리지 않기로 양해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에서처럼 선거운동 마지막 날에 그동안 함께 수고한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정동영과 추미애 의원을 단상에 올렸다. 구겨지는 정몽준 대표의 얼굴. 이것이 폭탄의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 그가 후보 지지를 철회한 것은 오히려 국민들의 뇌관을 건드렸다. 동정표가 쏟아진 것이다. '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는 제목의 조선일보 1면 기사 역시 양날의 칼이 되었다. 참으로 극적인 순간들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야당과 보수 신문들의 협공을 받아야 했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제목 아래 얼마나 닥달을 당했던가.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던 야당도 나빴지만 더 나빴던 것은 언론이었다. 

20년 정치를 하는 동안 언론과는 늘 불편한 관계였다. 정치인과 언론은 어느 정도 관계가 불편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신문들은 ‘특별하게’ 불편한 관계였다. 그들은 임기 내내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했다. 나는 그 신문들과 끝없이 싸웠다. 그들은 몇 백만 부의 발행부수로 표현되는 막강한 미디어의 힘으로 나를 공격했다. 논리의 힘, 사실의 힘, 진실의 힘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싸움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무기로 쓰지 않았다. 국민이 언론과 싸우는 데 쓰라고 그 권력을 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인의 권리, 시민의 권리만 가지고 싸웠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믿었기에, 패배했지만 끝까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독재 시대 그 신문들은 국가 권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정부가 준 보도지침을 충실하게 따랐고, 그 대가로 여러 가지 특권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려고 눈물겹게 노력하고 희생을 감수한 기자들이 그 시대 언론의 역사를 빛나게 했지만, 이 신문사들은 부당한 기득권의 성벽 안에서 정치 권력과 유착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정치 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난 보수신문들은 시장 권력과 유착되었고 그 자신이 새로운 사회적 권력이 되었다.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언론 자유의 과실을 먹으면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권력이 된 것이다. – 276쪽

권위주의를 벗어던진 대통령은 근사하지만, 그가 내던진 권위를 엉뚱하게 그의 정적들이 겹쳐 입었다. 대통령이 만년필을 쓰지 않고 플러스 펜을 쓴다는 것까지 트집 잡아 비아냥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난뱅이 상고 출신의 대통령이라니, 언감생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방해와 모략과 저주는 치열할 지경이었다.  

대통령 노무현의 모든 행보가 다 박수받을 만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어느 누구라고 그런 길을 갈 수 있을까. 양극화가 심화되었지만 그 한 사람의 탓으로 몰아붙이기에는 지나치다. 전 세계적 흐름이었으니까.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박정희 때부터 이미 준비했던 것이라고 한다. 서울, 정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지 않은가. 전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이라크 파병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의 이야기를 한 번은 들어보자.  

이라크 파병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서 파병한 것이다. 때로는 뻔히 알면서도 오류의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하는 대통령 자리, 참으로 어렵고 무거웠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보내기는 했지만 최선을 다해 효과적인 외교를 했다. 애초 미국의 요구는 1만 명 이상의 전투병력 파견이었다. 청와대 안보팀과 국방부는 최소 7,000명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참모들이 파병 자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론은 전투병 3,000명을 보내되 비전투 임무를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절충적 해법을 찾고 미국의 양해를 구하는 데서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파병 반대운동이 큰 의지가 되었다. 시민사회의 강력한 반대운동과 매우 비판적인 국민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도 이런 수준의 파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 245쪽

시민 한 사람과 대통령으로서의 선택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것이 일치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노력할 뿐. 그나마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저 정도 수준에서 그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 크게, 더 많이 반대하고 그리하여서 그것을 지지 세력으로 만들어 주었더라면 조금 더 힘낼 수도 있었을 텐데, 국민의 책임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남북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 때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었다. 아무래도 '효과' 측면에서. 저들이 불안해 하고 있으니 먼저 신뢰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얘기에 한숨이 나왔다. 남북관계. 이렇게나 멀어져 버리고, 이렇게나 힘들어져 버렸는데... 과연 저 위에서 '정치'라는 것을 하는 인물들은 '평화'를 바라기는 하는 것일까? '평화'라고 쓰고 읽기는 '전쟁'이라고 읽는 것은 아닌지...... 

재임 시절, 그는 권력기관을 자신의 정보 기관으로 전락시키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야 마땅했고, 그랬기에 지켰다. 검찰 개혁을 위해서 애썼지만 검찰은 바뀌지 않았다. 과거 독재 정권 하에서 온갖 비리와 인권 탄압에 앞장섰으면서도 과거사 정리와 그에 대한 반성을 끝까지 거부했던 자들이다. 드라마 '대물'을 보면서 하도야 검사를 마구 응원하게 된다. 저런 사람이 검찰 안에서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내부로부터 개혁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서 국세청을 동원한 적 없고, 국정원을 움직인 일도 없건만, 그가 퇴임한 이후 그는 말도 못할 수모를 그들로부터 당해야 했다. 측극의 목을 죄어오는 것이 그로서는 더 큰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그의 임기 말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우리는 못볼 꼴을 참 많이도 보았다.  

지난 시기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교체와 같은 민주주의 가치, 역사의 정통성, 권위주의 해체, 법치주의의 실현, 사회의 공정성과 투명성, 그런 것들이 주제가 되었다. 2002년 대선에서도 이회창 후보가 ‘반듯한 사회’를 주장했고 나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 ‘떳떳한 국민, 당당한 나라’와 같은 가치를 선거구호로 내걸고 선거전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것이 잘못되었다”, “무엇을 바로잡고 발전시키겠다”, “무엇을 개혁하겠다”, 이런 것이 없었다. 국가의 주요 과제, 예컨대 남북관계나 평화 정책과 같은 문제들이 전혀 쟁점이 되지 않았다. 토론회에서도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고, 그렇게 진행은 되었지만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 없이 다 그냥 넘어갔다. “경제 잘하는 솜씨 좋은 대통령이다.” 이런 주장만 들렸다. 지도자의 도덕성 검증도 흐지부지 지나갔다.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와 역사의 중요 과제가 제출되고 국민과 함께 토론하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새 정부가 그 과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그런 과정이 아예 생략되고 말았다. – 292쪽  

대선 후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건, 어떤 비리가 감춰져 있건 상관없이 무조건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오죽하면 그럴까... 라고 이해하기에는 용납이 되질 않았다. 사실, 묻고 싶었다. 그래서, 살림살이 많이 나아지셨나요?  

새해 예산안을 보고 기겁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후안무치일 수가. 형님 예산은 뭐고 영부인 예산은 또 뭔가. 밥 굶는 학생들 식비 하나 대주지 않고 강바닥만 파겠다고 하는 이런 나라를, 과연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환멸이 쌓이고, 불신만 높아가고, 좌절만 깊어간다. 그렇게 더 정치에 눈을 감게 만들고, 내 앞가림 하기에 급급하게 만드는 게 저들의 수작같은데, 그 수작에 놀아나지 않고 살기가, 너무 힘이 든다. 전직 대통령도 자살할 수 있는 미친 나라라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그가 죽었을 때, 그가 죽임 당했을 때, 분노와 두려움으로 오래오래 떨어야 했다. 꼭 그렇게 가야만 했을까, 원망이 들기도 했다. 그가 절망한 세상이 우리 모두의 절망 같아서 막막하고 먹먹하기만 했는데, 책을 보면서 오히려 조금은 기운이 난다. 그는 죽음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지만, 그것이 완벽한 포기와 절망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연민의 실타래와 분노의 불덩이를 지니고 살았던 그는, 반칙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대한민국을 그런 믿음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 믿음이 국민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한, 노무현이 대통령일지라도 그 시대는 ‘노무현 시대’일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다 이루지 못했던 꿈을 마저 이루기 위해 전직 대통령으로서 시민으로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 그 꿈을 모욕하고 짓밟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는 생명을 버렸다. 그가 생명을 던진 그 자리에, 이제 ‘사람 사는 세상’의 꿈만 혼자 남았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이 그렇게 살아 있는 한, 그를 영영 떠나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 351쪽

이 책을 정리한 유시민의 글이다. 그가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 그거 정말 우리 모두의 꿈 아니던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던, 열정이 가득했던 한 사내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꿈꾸고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 사는 세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만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던, 제법 괜찮았던 대통령을 한때 가진 적이 있었다. 참으로 순박하고 소박했던, 자연인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온통 피와 눈물로 얼룩진 현대사에 그런 인물 하나 새겨놓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지금은 고마운 기분이 든다. 그가 꾸었던 꿈을 함께 꿈꾸는 더 많은 사람들을 남겨놓았으니, 그는 할만큼 했다. 이제는, 부디 편히 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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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좋아 2010-12-11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담스러운 책이에요. 올려주신 사진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집에 이저런 노무현 관련 책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책만은 가지고 있기가 겁나네요.그런 책이에요...

오늘은 그리운 맘에 반가운 맘으로 마노아님이 올려주신 사진과 글 밨어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막힐 노릇입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도 아직 그 분이 이리 그리우니 어쩜좋습니까...

마노아 2010-12-11 10:42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부담스런 마음으로 사두고 한참을 못 읽었어요. 뒷부분까지 읽어나가는 동안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읽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서거 직전 부분부터는 감정이 자제가 안 되더라구요.
'노무현이 없다'를 읽고 싶은데, 조금 더 기다려야겠어요.
이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꽤 오랫동안 지고 가야 할 부채 같아요.
무겁다고 말하기도 미안한 빚 말입니다.

프레이야 2010-12-1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진지하고 정성들인 리뷰 너무나 잘 읽었어요.
특히 이라크 파병 관련 인용글은 그분의 마음을, 눈물나게, 들여다보게 하네요.
참 진심과 전력을 다했구나, 느껴집니다.

마노아 2010-12-12 00:49   좋아요 0 | URL
정말 열심히 진심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슬퍼요. 이제라도 알아준다면 좋을 텐데, 소원한 일 같기도 하고요. 생각하면 늘 마음이 짠해져요.

2010-12-12 0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2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12-12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인용문 만으로도 울컥 해버려서 저는 아마도 이 책을 읽지 못할 것 같아요.

마노아 2010-12-12 13:32   좋아요 0 | URL
책을 읽기 전에 준비운동이 필요했어요. 일년도 더 지났고, 그 사이 많이 무뎌졌을 법도 하건만 착각이었어요. 앞으로도 쉽게 편해지지는 않을 거예요.

같은하늘 2010-12-13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의 책을 여러권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사진집을 휘리릭~~ 넘기다 눈물을 흘린 후로는 그 분의 책을 다시 볼 수가 없어요. 책 속에 담긴 사진들이 뭔가를 얘기하는 듯 해서요.ㅜㅜ

마노아 2010-12-13 17:11   좋아요 0 | URL
영국에서는 다이애너비가 죽은 후 사람들이 많이 울어서 눈물에 의한 정화로 스트레스지수가 감소했다고 하던데, 우리나라는 도리어 기막힌 죽음에 스트레스지수가 더 높아진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 책도 마음 아프지만 찾아보려고 해요. 도서관에서 대출은 안 되지만 열람은 가능할 거예요.ㅜ.ㅜ

Mephistopheles 2010-12-13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보니 그냥 쳐다만 보고 있는 지경입니다..^^

마노아 2010-12-13 17:12   좋아요 0 | URL
책꽂이에 꽂아두면 제목이 눈에 박히듯이 들어와요. 운명, 일까요..

섬사이 2010-12-13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읽기가 두려워요, 저는.
그 분의 책을 읽다가 볼썽사나운 제 모습과 마주치게 될까봐.

마노아 2010-12-13 17:12   좋아요 0 | URL
우리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오래오래 마음에 담길 사람이에요.
 
최민식 Choi Min Shik 열화당 사진문고 19
최민식 지음 / 열화당 / 2003년 12월
구판절판


1957. 용산역 앞. 집 모퉁이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벗은 발과 집중하고 있는 국수 면발에서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이 읽힌다.
얼마나 흔하고 잦은 모습이었을까. 한 장의 사진으로도 서럽기만 하다.

1959. 부산항 부두의 막노동자의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럽다.
일거리를 얻지 못한 하루는 굶주리는 하루가 될 것이다.
집에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찢어진 어깨 죽지와 툭 불거진 손등의 심줄 사이로 가난과 절망이 흐른다.

1963. 부산 서구에 위치한 종교 마을 태극촌.
가까이 들여다보면 지극히 가난한 판자촌이건만,
멀리서 잡은 사진엔 규칙적인 배열로 인한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이 잡혔다.
역설적인 사진이다.

1964. 부산 광복동.
진열된 서구형 얼굴의 인형을 보고 있는 아이와, 잘 차려 입은 엄마의 모습과 교차된 남루한 옷차림의 소녀가 인상적이다.
아이 엄마의 하이힐과 남루한 소녀의 고무신의 차이라니...
지극히 가난한 몰골이건만 소녀의 눈빛에선 강렬한 의지가 엿보인다. 흩어지지 않는 시선이다.

1965. 부산 거제동.
동네 언덕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아이의 땡그런 눈망울.
뺨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하다. '엄마 마중'이 떠오른다. 그 책처럼 엄마와 끝내 만난다면 다행이건만, 아이의 엄마가 오지 않을까 이미 긴 시간이 흘렀건만 사진 너머로 걱정이 앞선다.
사진을 찍은 최민식은 아이에게 고구마와 사이다를 사 먹였는데, 아이는 떠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 어린 아이의 마음 속 장벽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1967. 부산항 부두.
엄마는 돈 벌러 나갔을 것이고, 본인도 아직 어리건만, 누이는 더 어린 동생들을 챙기느라 이미 어깨가 무겁다. 학교에 가서 재잘거리며 수다도 떨고, 눈빛 초롱초롱 빛내며 공부할 나이에 저 어린 아이는 이미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저 시대를 살았던 무수한 누이들의 초상이다.

1974. 부산
무수한 선거 벽보 아래 누더기를 입은 채 잠들어 있는 노인의 모습.
겹치지도 않는 선거 구호가 어지럽다.
독재자가 군림하던 그 시절에 소중한 한 표의 행사가 과연 조국 번영에 이바지 했는지 궁금하다.

1984. 경상북도 선산. 한 달 이상 가뭄이 계속되어 비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농민의 얼굴이다.
지친 눈빛에 비에 대한 갈망과 절망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거친 피부에 새겨진 깊은 주름 마디마디에 생의 탄식이 맺혀 있다.
과연 비는 언제쯤 왔을까. 비만 오면, 과연 해갈은 되었던가...

어렵던 시절의 인간 군상을 찍은 까닭에 사진들이 많이 어둡다. 그렇지만, 90년대와 2000년대의 사진이라고 해서 가난한 이들의 삶이 달라졌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컬러사진에서는 만나기 힘든 흑백 사진만의 강렬한 대조와 조화가 인상 깊었다. 작은 크기의 사진집이 주는 울림은 그러나 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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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1-1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 보는 삶이 고스란히 우리 역사네요.
이런 걸 잡아낸 작가의 시선이 느껴지고요.

마노아 2010-11-14 18:35   좋아요 0 | URL
이런 사진을 찍다가 간첩으로 신고된 적이 수십 번이라고 하네요.
고단했을 시간들이 충분히 그려져요.

카스피 2010-11-15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진정한 리얼리즘의 미학이네요.

마노아 2010-11-15 09:46   좋아요 0 | URL
정확한 표현이에요.^^

감은빛 2010-11-15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최민식 선생님 사진 정말 좋아합니다.
예전에 '고속철도 반대 투쟁'할 때,
멀리서 최민식 선생님이 지율스님 사진 찍는 모습 보고,
당장 달려가서 싸인 받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멋진 사진들이 정말 많아요!

마노아 2010-11-15 23:31   좋아요 0 | URL
싸게 구입할 기회가 생겨서 책을 샀는데 좀 더 지를 걸 마구 후회하고 있어요.
소장하면 더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최민식 선생님 사진을 좀 더 찾아보려고 해요.
사진의 깊이가 남달라요.^^

같은하늘 2010-11-1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모습이 그래도 보이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빈부의 차는 참으로...

마노아 2010-11-18 00:55   좋아요 0 | URL
사진이 왜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줬어요. 게다가 역사도 되는 걸요.

칼로. 2014-02-14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도서관에서 뭐 볼까 고민하던중 흑백으로 된 얇은 사진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최민식 선생님 사진집이었는데, 조금씩 펼쳐지던 책장에선 온통 삶의 고단함과 가난, 힘겨운 싸움을 이루는 사람들의 내음이 강렬하게 퍼져나왔습니다. 깊게 패인 주름살 사이로 먼지들이 껴있는 검은 줄이 하나씩 새겨져있고 힘겨운 생활의 고난은 그들의 몸에 새겨진 주홍글자같이 지워질 줄 몰랐습니다. 늘 아픔을 바라보는데에 있어 직선적인 선생님이 좋습니다.

마노아 2014-02-14 11:58   좋아요 0 | URL
선생님 가신지 꼬박 일년이 되었어요. 비록 그분은 가셨지만 남겨주신 사진들은 영속성을 갖고 우리 곁에 남아 있을 테지요. 칼로님 덕분에 또 다시 최민식 선생님 생각에 젖어봅니다. 그분이 바라보셨던 그 눈길로 세상을 보고 싶어요.
 
꽃이 되어준 남자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감동 휴먼 다큐 '울지마 톤즈'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증보판
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울지마 톤즈'를 무척 감동깊게 보았더랬다. 나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온 언니가 책도 구입을 하더니 먼저 보라고 내게 안겨주고 갔다. 눈물샘 터지는 것 아닐까 다소 긴장하고 시작했지만 전혀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았다. 슬픈 내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투병 이야기도 아니 나오고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에 대한 뻐김도 없고, 오로지 당신이 만난 아름다운 영혼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속에서 깨달은 신의 은총,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는 이야기만이 담겨 있다. 이분, 천상 절제의 미학을 아시는 사제시구나. 남기신 글자욱도 겸손하신 분이다.  

힘들다는 의대 공부를 마치고 머나먼 아프리카 오지에서 기꺼이 슈바이처가 되어주신 분, 왜 굳이 그곳인지, 왜 또 굳이 사제 서품까지 받으셨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본인도 모르겠다고 허허 웃으시는 분. 숭고한 사명의식이라고 그닥 틀릴 것도 없는 얘기로 뽐내시지도 않는다. 좀처럼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그곳 풍습과 문화 차이로 상처도 될 법 하건만, 오히려 아주 가끔 맞닥뜨리는 고마움의 표시에 황송해 하신다.  

보통 이곳 주민들은 약, 주사, 음식 등 모든 것을 무료로 베풀어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들고 와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문화의 벽을 깨고 직접 농사지은 호박이나 날씬한 아프리카 토종닭을 들고 와 고맙다는 인사를 한 사람이 8년 동안 딱 세 사람 있었는데, 그중에 두 명이 놀랍게도 나환자였다. 과부의 헌금처럼 닭 한 마리는 그들에게 엄청난 재산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육체적으론 문드러지고 사회적으론 버림받았지만 마음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부유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감각 신경이 마비되어 뜨거운 것,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해 손과 발에는 화상이나 상처가 가득하지만 감각 신경의 마비를 보완이라도 하듯 보통 사람보다 수십 배나 민감한 영혼들을 지니고 있다. 자그마한 것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그 감사를 기어코 무언가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영혼 말이다. – 74쪽

그들은 왜 고맙다는 말에 그토록 인색한 것일까? 척박한 땅에서 오랜 전쟁과 기아로 마음이 황폐해진 것인지, 먹을 게 부족해서 나눌 것도 없었기 때문인지 통 알수 없지만, 그 와중에도 그곳에서 가장 배척당하는 나환자들이 더 열린 마음을 보여준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감격스러우면서 동시에 안쓰럽다.   

신부님이 계셨던 아프리카 남수단의 톤즈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훈훈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할 때도 많았다.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죽 한 그릇을 두고 싸우던 부자의 모습을 보면 가족들의 정은 끔찍하다. 하루종일 굶었을 아빠와 함께 나눠먹어야 한다는 아들, 아프니까 혼자 먹으라고 사양하는 아빠가 고집 피우며 싸우는 장면이 꽤 먹먹했다. 반면 여자아이를 귀히 여기며 애지중지 키우는 모습에서 뭔가 기대를 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곧 소를 많이 받고 값을 올려 시집보내려는 매매혼의 풍습이란 것을 알고 나니 혀끝이 쓰디 쓰다.  

여아 선호 사상, 예쁘게 잘 치장한 여자들의 모습, 여자를 보물처럼 아끼고 잘 키우려는 것 등등 외형적인 것들만 보면 이곳은 분명히 '여자들의 천국'이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알고 나면 이곳은 외려 '남존여비 사상'이 철저한 곳임을 알게 된다.
여자 아이들을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하며 될 수 있는 한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은 받을 '소'의 수를 늘리기 위한 것, 즉 값이 더 많이 나가도록 상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 결코 여자를 한 인간으로서, 남자보다 더 귀중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은 아니다. (...)더욱 서글픈 것은 결혼 때 팔려 온 여인네들은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줄줄이 아이들을 낳고 소처럼 일해야 한다. 말 그대로 '소 값'을 해야 하는 것이다. – 25쪽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소의 생김새. 뿔이 찬란하다 못해 무시무시하다. 예쁘고 교육까지 받은 소라면 값이 올라 '경매'까지 들어가는 실정이라 한다. 소 200마리에 낙찰이라니..ㅜ.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크다는 딩카족. 이들에은 이마에서 후두부까지 여러겹의 칼자국을 내는 것으로 성인식(고르놈)을 치른다. 오랜 전쟁으로 용맹함이 곧 생존의 무기였던 그들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납득이 전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비명도 안 되고 눈물도 보이지 않고 그 피칠갑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살벌함이 느껴진다. 더불어 생니까지 빼야 한다니... 

 

문화의 차이를 미개함으로 몰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안타깝게 여겨지는 부분이긴 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이런 풍습들이 줄어드는 경향이라고 한다.  

고 이태석 신부님도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셨는데 이곳 톤즈의 아이들도 그랬다 한다. 35인조 브라스 밴드를 만들었을 때 노래 한 곡을 가르쳐서 합주에 이르기까지 두 세달을 예상하셨는데, 정확히 4일 만에 합주를 해보였다고 한다. 이거 천재 아닌가! 관악기 담당 아이들이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제대로 안 나와서 의아하게 여겼는데 생니를 뽑아놔서 아랫니가 없었던 탓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신부님도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다행히 다른 포지션으로 바꿔주셨지만. 

아무래도 저자가 사제인 까닭에 종교 이야기가 아니 나올 수가 없다. 당신의 신앙 고백서라고 해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 이야기가 나온다고 굳이 인상부터 찡그릴 필요는 없겠다. 신부님의 깨달음처럼 무조건적으로 신앙만 앞세우는 분이 아니셨다. 이분의 깨달음이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동일한 울림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은 종교인들이 종교를 앞세워 그동안 얼마나 오만했던가. 그 안에 당신들이 섬기는 참 신은 보이지 않은 채 말이다.  

다르푸르의 아이들은 정말 우리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들임이 틀림없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 그들이 가톨릭이나 개신교면 어떻고 이슬람교면 어떤가? 그들이 우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꼭 우리가 믿는 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내 안에 잠재된 강박적인 사고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에 대한 특별한 알레르기가 있었음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다. 이는 종교의 틀에 인간들을 끼워 구속시키려는 바리사이들의 사고와 행동에 맞서 '종교는 인간을 구속하는 정신적인 틀이 절대 아니다.'고, '오히려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정신적인 해방의 틀이다.'는 것을 외치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 194쪽

이번에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오면서 영화 '울지마 톤즈' 이야기랑 에피소드가 더 추가됐다. 언니가 주문을 언제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절판된 초판이다. 흐음, 뒷 이야기가 궁금한데 서점에서 읽어야 할라나.  

이제는 고인이 되어 더 이상 톤즈 아이들의 아버지도, 신부님도, 선생님도 되어주지 못하지만, 그분이 뿌린 씨앗이 이미 그 아이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려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상처입은 기억들을 보듬어 주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얼마나 바르게 자라는지를, 하늘 나라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느냐고. 기꺼이, 그네들의... 이 땅의 소외받는 많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대답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이미 울릴 것이다. 그 울림에 정직해질 차례다.  

덧)168쪽에 '부화가 난다'라고 적었는데 '부아'의 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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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1-08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못 봤지만 책은 볼 수 있겠군요.
이런 분들이 종교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살아간 모델이겠죠.

마노아 2010-11-08 22:28   좋아요 0 | URL
이런 훌륭하신 분들도 참 많은데 불명예스런 이름이 대표가 될 때가 더 많아 서글프죠.
 
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뉴욕에 사는 가난한 극작가 헬렌 한프가 영국의 헌책방에 편지를 보낸다. 본인이 찾는 희귀 고서적 목록 중에서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을 보내달라고. 런던 채링크로스 가 84번지의 마크스&Co. 서점을 대표해서 프랭크 도엘이 답장을 쓴다. 그녀가 찾는 책들을 적당한 가격에 맞추어서 발송하였다고. 책을 받은 그녀는 답장과 함께 책값을 보낸다. 프랭크는 우편환이 더 안전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헬렌은 줄곧 돈을 봉투에 우송하는 것을 고집했다. 우체국이 멀다나.  

프랭크가 보내주는 책들이 대개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만큼 좋았지만 가끔은 원성을 사는 책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기꺼이 항의를 했고 프랭크는 사과를 했다. 둘 사이에는 책과 돈만 오간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담은 편지가 먼저 도착했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선물들이 대양을 넘어 서로에게 전달되었다. 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배급제가 시행되던 즈음이어서 서점의 직원들은 모두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혹은 비공개적으로 그녀와 편지를 나누었고, 그렇게 그녀의 친구들은 서점 직원들과 프랭크의 옆집 할머니까지 영역이 넓어진다. 가끔 헬렌의 친구가 런던의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방문해서 서점을 휙 보고 가기도 했고, 산타 할아버지라도 된 듯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서점 식구들은 무엇보다 헬렌이 런던을 직접 방문해 주기를 원했고 그녀 역시 그러기를 원했지만, 그들이 서로 편지를 나눈 20년 동안 만남은 성사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치과치료로 돈이 많이 들어가서, 혹은 임대 아파트가 재건축이 들어가 급히 이사하느라 역시 경비를 다 쏟아붓는 등, 뭔가 계획을 잡을라치면 일이 생겨서 그녀의 런던행을 막곤 했다. 그녀는 가난한 작가였고, 쉬이 명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더디어지는 걸음은 핑계가 아니겠건만, 나는 어쩐지 그녀가 런던행을 진심으로 원하면서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랭크가 이미 가정을 가지고 있었고 둘 사이에 우정을 넘은 '연인'의 감정이 솟아서 그런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나로서는 보고 싶은 그 마음을 어찌 다스렸을까 답답하긴 하지만... 

무려 20년 세월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오고 가는 편지와 책, 그리고 선물꾸러미들. 무엇보다 거기에 담겨 있던 사랑과 우정과 인정이라니, 이보다 아름답고 귀한 인연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프랭크가 사망하면서 편지로 책을 사는 일은 끝나게 된다. 서점의 대표도, 그리고 프랭크의 아내도 편지를 보내어 그녀에게 소식과 마음을 전한다. 뿐인가. 이미 장성한 프랭크의 딸도 헬렌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후로도 그들 사이에 더 편지가 오갔을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이 시점까지의 편지를 책으로 묶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런던에서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렇게 묶인 편지 책이 그녀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이름을 떨치고 나서 그녀는 더욱 프랭크를 안타깝게 추억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서점과의 인연도... 

1969년 4월 11일자 편지는 이 책의 마지막 편지다. 헬렌은 '캐서린'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런던을 가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는데 그만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는 헬렌. 왜 아니었겠는가. 그녀가 말한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145쪽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 자리에 이 서점은 남아 있지 않다. 영화로, 뮤지컬로... 다양한 버전으로 그들이 나눈 우정이 재생산되고 있지만 그 진짜 흔적을 찾아볼 서점이 남아 있지 않다니 애석하고 서글픈 일이다. 비록 그 자리를 알려주는 기념 동판이 있다지만... 

다시 한 번 책 표지를 들여다 본다. 채링크로스 84번지라는 주소를 단 마크스 서점이 보인다. 아련하다.  

  

이 책을 며칠 전 사랑하는 공장장님 공연을 기다리면서 몇 장을 먼저 읽었다. 친구의 얼굴이 얼핏 스쳐지나가는 까닭은 이 책과 함께 다른 책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아, 에미와 레오가 떠올랐던 것이다. 이 책의 헬렌과 프랭크도 에미와 레오처럼 지적이면서 유머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에미와 레오보다도 몇 십년 전에 이미 그들은 편지를 통해 서로를 궁금해 하고 아꼈다. 150여 페이지의 짧은 책장 속에서 20년 세월의 깊은 우정이 전달되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넘어서는 진중함 때문일까?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잊혀지고 소비되는 디지털 세상에서는 찾기 힘든 느림의 미학, 기다림의 미학 덕분일까.  

폭염주의보가 내리는 한 여름에 어울리는 책이 아니었는데도, 줄어드는 책장을 안타까워하며 즐겁게 읽었다. 그들의 편지 책 구매가 끊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눈물까지 날 정도로. 좋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픈 예쁜 책이다. 헬렌과 프랭크처럼 아날로그는 아니지만, 그들을 닮은 인연과 우정도 내게 있는 듯하다. 고마운 일이다. 좋은 사람들의 얼굴이 두루 스쳐간다. 한 권의 향기나는 책이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그래서 더 좋은 책이다. 채링크로스 84번지. 

지식e 두 도시를 오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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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8-22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이 추천하던 책으로 기억하는데, 아직 못 읽어봤어요.
진심이 담긴 편지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군요.
지식e도 잘 봤어요~ 감사!
아래 댓글은 삭제했어요~ ^^

마노아 2010-08-22 09:4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은 가을에 읽으셔요. 가을에 읽으면 더 감동적일 것 같아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지식e예요.^^ㅎㅎ

다락방 2010-08-22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정말 좋지요? 제가 이 책을 좋아했던만큼 마노아님도 좋아했다는 게 리뷰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가고 싶었지만 가지 않았던 그 마음도 저는 알 것 같아요. 이 책 읽고 저도 서점에서 일하는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을 며칠동안 했었어요. 새벽 세시도 떠오르지만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클럽도 생각나지 않아요, 마노아님?
:)

마노아 2010-08-22 13:06   좋아요 0 | URL
너무 좋았어요. 이렇게 잔잔하고 맑게 깊은 울림을 주다니, 감동 그 자체예요.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 클럽도 이런 내용인가요? 그 책은 보질 못했어요.
좋다는 소문은 잔뜩 들었답니다. 개정판 제목이 약간 바껴서 이름이 너무 헷갈려요.6^^

다락방 2010-08-22 19:13   좋아요 0 | URL
다락방 4종셋트가 있지요. ㅎㅎ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 클럽], [채링크로스 84번지], [서재 결혼 시키기] ㅎㅎ

건지도 좋아요, 마노아님. 아마 마노아님께도 정말 따뜻한 책이 될거에요!

그나저나 일요일이 가고 있어요. ㅜㅡ

마노아 2010-08-23 12:41   좋아요 0 | URL
서재 결혼 시키기는 사두고서 아직 못 읽었어요. 건지는 중고 알람 설정해 놓았더니 어제 오늘 문자가 두 개 왔는데 중고가 아닌 중고값이네요. 서재는 날이 추워지면 읽어야겠어요. 추운 날에 더 좋을 것 같아요. ^^
일요일이 가고 월요일이 시작되었어요. 아침부터 너무 습해서 불쾌지수가 높아 힘들었는데 비가 많이 내리고 나니 확실히 식었어요. 다행이에요.^^

bookJourney 2010-08-2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소개에요. 지식e도요~.
가까운 시일 내에 읽기는 힘들겠지만, 이 리뷰를 별찜해둡니다. ^^

마노아 2010-08-23 12:43   좋아요 0 | URL
헤헷, 별찜의 영광을 주셨군요. 이 책이 곧 책세상님께 간택될 거예요.
그날이 기다려져요.^^

양철나무꾼 2010-08-2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서재도 들어오기가 두려워집니다.
아웅~이 지름신을 어찌할 것이냐고요~ㅠ.ㅠ

마노아 2010-08-23 12:44   좋아요 0 | URL
곳곳에 지름신 지뢰밭이 깔려 있어요. 못 벗어나요. 책의 미로예요.^^

마녀고양이 2010-08-23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갑자기 뭉클해여.
이 책은 사야겠어요....... ㅠㅠ

마노아 2010-08-23 16:26   좋아요 0 | URL
헤헷, 마녀고양이님께도 좋은 책이 될 거예요.^^

yamoo 2010-08-23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감동적인 책 같아여~ 얼른 사봐야 겠습니다~ 리뷰 정말 잘 읽었어여~ 감사합니다!

마노아 2010-08-23 19:42   좋아요 0 | URL
yamoo님의 맘에도 꼭 들었으면 좋겠어요. 잔잔한 감동이 일품이었어요.^^

같은하늘 2010-08-25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좋아요. 여기저기 지름신의 지뢰밭이라는 말이 딱이군요.^^

마노아 2010-08-25 15:00   좋아요 0 | URL
아찔하되 위험하지 않은 지뢰밭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