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도 꽤 찡했었던 기억이 난다.  부러 왼손잡이 연습을 하며 투혼을 보여준 이범수가 찡했고, 저 오늘 컨디션 최곤데요, 라고 한마디 대사밖에 없었지만 온화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공유도 참 멋있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재미란 상대가 안 될 만큼 멋진 책이 있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나서 알았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제목만 보면 이 요란한 표지의 책이 그저 과거 야구사에 화려한 한토막을 장식했던, 그러나 그만큼 빠르게 스러져갔던 그 구단의 팬 이야기인가보다 지나치기 쉽다. 뭐,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니었다.

작가 박민규가 서문 격으로 써낸 몇 페이지만으로도 배꼽 잡고 웃던 나는, 거기서부터 작가의 마이너틱한 성향이 느껴졌다.  주류에서 벗어난, 그러나 비주류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오히려 당당하고 그래서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그의 주체성(?)이 느껴졌달까.

초반 삼미슈퍼스타즈의 창단과, 인천 소년들의 눈물 겨운(그러나 몹시 웃겼던^^;;;) 이야기들에 눈에 주름잡힐까 걱정했던 기억까지 난다. 너무 웃어서 입가의 근육이 아플 정도로

그러나 이 작품은 웃고 즐기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 각오해, 준비해, 여기가 시작이야!하면서 진지함으로 들어가는데, 삼미의 마지막 경기를 보고 돌아온 주인공이 학교를 빼먹은 것에 대해서 부모님께 변명을 하며 고백하는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고등학생의 어린 나이로 소년은 이 사회 안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차이, 입장, 비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의 눈물 어린 고백(혹은 구라?)은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었고 동요시켰고, 그 자신도 동화시켰다.  그는 자신이 판단한 사회의 모습에 순응하는 것을 택했고, 그 나름의 최선으로 한 길을 달렸다.  사회의 기준으로 보아 성공한 대학인, 직장인, 가장이 된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길이 아님을 그는 어렴풋이 느낀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찾기 어렵다.  대체 왜? 왜 직장에서 잘리고 부인에게는 이혼을 당했는지, 그는 혼돈스럽기만 하다.

그때, 어린 시절 절친한 친구, 삼미의 추억을 공유한, 인생사 고단한 친구의 귀환은 그의 삶에 전환점을 준다.  우유 배달로 한달에 몇 십만원 버는 걸로 자족을 아는 그는,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있고, 때문에 팬도 갖고 있는 아주 독특한 사람이었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가 불가능한 그의 생활, 그의 사고관, 이야기들은 주인공을 변화시키면서 동시에 독자도 함께 변화시킨다.  그는 묻고 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 그렇게 악착같이, 아귀같이 달려들어 사느냐고, 여기서, 독자는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을 느낀다. 왜냐고?

달리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게 사니까? 바보같다.  다들 그게 답이라고 하니까? 한심하다.  그럼 대체?  우리가 목표라고 여겼던 그 언덕에 올라갔는데, 그것이 꿈도 이상도 무엇도 아닌 그저 허무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허탈함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경쟁'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 왔다. 경쟁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경쟁 뒤에 매몰되어 버리는 자아와 인간미를 우리는 하찮게 방치해두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테면 교사 평가제에 대해서 어느 전교조 교사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평가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경쟁'으로만 몰아가는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했었다.  동시에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얻어가는 것에 대해서 반성을 하게 되었는데, 나 역시 경쟁의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싸워온, 그리고 힘들어 한 기억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주인공은 삼미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친선 야구 게임에서 치기 힘든 볼 치지 않고, 잡기 힘든 볼 잡지 않는 그 이상한 경기에서 그들은 지고도 행복했고, 지고도 많은 것을 얻었다.  그는 아내를 다시 찾았고, 이제는 사랑해서 다시 한 집에서 부부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딴 생각이 나는데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애니스는 아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하자, 부부관계를 중단해버리며 그럼 같이 잘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얼마나 아내에게 상처가 되었을 지, 그녀의 기가막힌 얼굴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살면서, 한숨 나고 눈물 나고 마음 아픈 일이 얼마나 많던가.  그럴 때 내게 위로가 되어주며 씨익 웃게 만드는 말이 있다. "우리에겐 삼미가 있잖아."

괜찮다고, 그게 다가 아니라고, 더 좋아질 거라고, 막연한 위로의 말보다 더 힘이 되는 그 말, "우리에겐 삼미가 있잖아"...

멋진 책으로 다가와 준 작가 박민규씨에게 고맙고, 그래서 그 후 그의 작품들은 빠짐없이 사보는 열혈 독자가 되었다.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 책을 주변에 소개하고 나서의 반응을 살펴보면 재밌는 일이 있다.  뭔가 힘들고 마음에 위로가 필요한 이들은 '대박'이라고 말을 하며 쉬이 감동을 받고 또 다시 팬이 되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많은 것을 이루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덜한 사람들은 그냥 재밌었다, 정도로 일축한다.  나의 눈이 편견을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단면들을 보면서 이 책의 매력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난 여전히 삼미를 응원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으로 성석제씨를 만났다.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리뷰를 보고서는 책을 골랐는데, 그들의 반응이 곧 내것이 되었다.  너무 재밌고, 흥미로웠고, 놀랍기까지 했다.  작가의 정신 세계가^^

말장난이 좀 있는 편인데 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이 생각났다.  제대로 얘기하자면 그녀만큼 엉뚱하지는 않지만 그녀보다는 진지하다^^

몇몇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번쩍- 책보다 호흡이 긴 것이 오히려 읽기 좋았다.

천하제일 남가이가 절정이었는데 으하핫, 너무 웃어서 내 배꼽 도망갈 뻔하기도...(진부한 표현?)

근래에 무료 일간지 등에도 이름이 자주 보이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다작이 반가운 작가이니 그의 부지런함을 기원해 본다.

노란 표지도 특유의 익살을 잘 표현하는 색감이었다.  글씨체도.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작품이 가장 교훈적인 글로 느껴졌는데, 울컥!했던 그 감정은 직접 읽고서 느껴보시길...

혹자는 그의 말장난이 짜증난다고 하고, 심지어 이 책을 추천한 뒷편의 글에서조차 그의 글쓰기 형식을 비판하였는데, 난 크게 나쁘지 않았다.  과하면 모자람 못하지만, 눈살 찌푸릴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직은 즐기고 있는 편^^

이제 성석제씨도 내게는 미리 읽어보지 않고도 구입하고픈 소설가의 대열에 들어왔다.  작가에게는 기쁜 일일 것이다^^

우울하고 속상할 때, 가벼운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이 책을 만나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실업이 가벼운 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신나게 웃지만 그 안에 해학과 풍자가 있다는 것, 지혜로운 독자는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다.  ....라고 나 마노아는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키호테 논술 프로그램 세계명작 6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이광웅 옮김, 박공우 그림 / 예림당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중고등학생 시절의 청소년기를 훌쩍 지나가버린 나는, '고전문학'은 청소년기에 읽어야 제맛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래서 나이 먹어 구입하게 되는 고전 문학은 한참 고민을 한 뒤 고르게 된다. 너무 길지 않을 것(으레 지루하리라는 전제 아래...)은 그 중 중요하게 여기는 선택 덕목이다.

그래서 주니어버전으로 책을 골랐는데(사실 뮤지컬을 보고 싶어서 책을 구했는데, 뮤지컬은 보지 못했다..;;;)그래놓고도 책을 보고는 적이 놀랐다.  어찌나 글자가 크고 단어 설명이 친절하게 되어 있던지...ㅠ.ㅠ

난 청소년용으로 생각했는데 초등학생 논술대비용 책이었떤 것이다.T^T

누구를 탓하랴.  나의 잔머리 굴림이 낳은 결과인 것을.

그렇다고 책이 형편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비약이 심할 정도의 축소로 인해 책의 묘미를 다 알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울 뿐.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이 읽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OTL..;;;;)

그렇다고 다시 성인용(?)으로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을 만큼 열혈 독자는 아니기에 세르반테스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그렇다고 뮤지컬을 보게 될 때 낯설 정도는 아니니까^^;;;)

순수하게 책을 골라야지 너무 과한 계산은 내무덤을 파는 결과라는 것을 알려주었으니 아주 실패한 독서는 아니다^^;;;

초등생 혹은 중학생 정도까지는 읽기 아주 좋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너무 오래 되어서 기억도 안 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포루투갈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름만 보고 일본인인 줄 알았어요^^;;
제법 두꺼운데, 문장 부호가 하나도 없어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챕터 끝날 때까지 놓기가 아주 망합니다..;;;;
그러나 재밌어서 또 손을 놓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민망할 만큼 파고들어간 작품이에요.
그렇지만 그 시선이 늘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매우 독특한 유형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네요.
마지막 대사가 너무 섬짓했던....(스릴러 같았어요~)
읽고,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랍니다~

만약 정말로 온 세상이 다 눈멀어서, 사회의 모든 것이 정지되고 무법천지가 되고 생존만을 위한 싸움만 허용된다면,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 그리고 자부심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 결코 추하지 않게 살아남을 수 있을 지도 솔직히 자신이 없구요.  그래서 주인공 의사의 아내의 '현명함'에 반했습니다.  온 세상이 다 눈 멀고 혼자만 눈뜨고 있는 자의 고독과 불안을 과연 우리는 견디어 낼 수 있을까요.  또 온 세상이 다 눈을 떴는데, 나 혼자 눈 감을 시간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감당해낼까요.

질문은, 각자 스스로에게 해보고 답해야겠지요.  저는 부끄럽고 자신이 없어 고개만 돌리다가, 아직 밝은 내 눈에 안도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그리고 정신의 눈이라고 가정을 하면 또 얼마나 섬찟하고 무서운 지...

정직하게, 착하게 살아 '버릇'해야겠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순간에 '판단'을 해야할 때가 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습관'처럼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운 내가 되기를 원하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 여행자의 아내 - 전2권 세트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미토스북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추천 음악 : 이승환 5집 "애원" (가사를 염두에 두면서 들을 것)

추천 만화 : 박희정 "호텔 아프리카"

모두들 너무 떠들썩 해서 괜히 심드렁하게 책을 펴들었다. 마치 '얼마나 대단한 지 한 번 읽어봐 주겠어' 라는 심정으로... 책을 덮고, 그 자만했던 마음이 미안하고 이렇게 내게로 와 준 책이 고마워 찡-한 느낌에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시간 일탈 장애라는 판타지적 소재를 갖고 있지만 '사랑'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그리고 영원한 주제를 다룬 이 책은, 떠미는 것도 없이, 강요하는 것도 없이, 올곧이 그 진솔함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 진부하지도 가식적으로도 보이지 않고, 가슴을 울리는 절절함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독자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었다.

너무도 다양하고 이색적인 재미가 많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인데, 웬만한 걸로는 눈물 한방울 안 흘리고, 감동도 없다 하고 괜히 안티짓이나는 하기 일쑤인데, 그 건조한 감정을 갖고 사는 메마른 우리에게 '일생에 걸친 기다림=사랑'을 보여준 두 주인공의 '삶' 이 너무도 먹먹하여 참으로 오랜만에 눈물도 흘려보았다.

마치 거대한 퍼즐의 조각 하나하나씩을 짜맞춰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과거와 미래 현재가 중첩된 시간의 전개는 흥미와 재미를 떠나서 독자에게 그들의 운명을 선고하는 것 같아 절박한 긴장감마저 갖게 한다.

영화 '나비효과'에서도 시간을 이탈하여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주인공이 나오지만, 그가 바꿔버린 운명은 그가 원했던 숙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자리를 맴돌며 오히려 더 나락으로 빠질 뿐이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서 시간 일탈 장애를 겪고 있는 헨리는 '나비효과'의 주인공보다 소극적일지언정 훨씬 겸손하다.  그는 바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무리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지도 않는다.  닥쳐올 미래가 끔찍하고 감당하기엔 벅찬 시련이 몰려와도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기 보다 그 안에서 숨쉴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쓴다.  재빨리 도망칠 수 있게 달리기를 연습하고 자물쇠 따는 법, 소매치기, 심지어 적절한(?) 폭력까지도 익히는 그의 모습에,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것은 그에게는 치명적인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심지어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찾아가 그 기술을 가르치고, 미래의 딸을 위해 영상으로 남겨놓는 주도면밀?까지 보여준다.) 노력하고 애쓰지만 그에게 닥쳐온 미래란 너무 가혹했지만.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그의 운명은 그가 만들어 간 운명인 것도 사실이다. 

그가 클레어와 현실의 시간에서 만난 것은 클레어가 그를 알고 지낸 지 14년이 지난 후(1991년)였지만, 그녀가 그를 만날 수 있는 필연을 준비한 것은 미래에서 온 그가 알려준(1989년) '시카고'라는 단서가 큰 몫을 해냈다.  그는 이미 14년 전1977년)부터 그녀와 만날 조건을 만들어 온 것이다.  또 친구 고메즈가 미래에서 주식으로 큰돈을 번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주식 정보를 귀띔해 주지만, 그것은 그가 주가가 오를 종목을 알려주었기에 닥쳐오는 미래의 결과이다.  그에게는 미래와 과거가 시간과 공간의 구분을 떠나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그리고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삶은 '원인'과 '결과'과 순서 없이 뒤섞여 있다.  원인이 곧 결과이고, 결과가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모두의 만남은 곧 숙명이고 운명이 된다. 

사람이 미래를 모르고 살면 불안할 수는 있으나 불행하지는 않다고 홍세화씨의 글에서 본 기억이 난다.  역사 교육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나온 화두였는데, 이 작품을 보면서 '미래'를 안다는 것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보며 오싹해지는 서늘함을 느꼈다. 

그렇게 본인의 의지와 아무 상관 없이, 또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미래의 '진실'에 늘 무방비 상태의 헨리는 힘없는 약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헨드릭 박사를 설득해 내었고, 치료에 응했으며, 본인은 실패했을지언정 딸에게만은 희망을 주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런 그의 노력의 결과가, 그가 버겁다고만 느끼게 했던 시간 여행을 앨바에게는 '재미'를 주는 여행으로 느끼게 한 것이 아닐까.  그가 딸을 위해서 준비한, 그가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그것이 아니었을까.

재미로도, 막연하게나마 누구나 '타임머신'으로 과거든 미래든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 심심풀이 상상조차도 꽤 미안해질 만큼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단 한번도 서두르지 않고.(그래서 1권에서 아주 가끔 지루하기도 했지만) 고른 호흡을 유지하는 작가의 솜씨는, 첫 작품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해서 2권에 이르면 오히려 가빠지는 호흡으로 다음 장을 넘기기 힘들어하는 내가 약오를 지경이었다.

배달 받은 책 2편에 제본 오류가 있어서 8장이 누락되는 바람에 클라이막스 앞에서 좌절한 경험이 나를 아프게 했지만...;;;; (책 다시 오기를 못 기다리고 교보문고에서 재빨리 8장을 읽어주는 센스ㅡ.ㅡ;;;;) 오히려 그렇게 한템포 쉬어갈 수 있어서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결과가 좋으니 과정도 좋았다는 망각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왜 제목이 시간 여행자의 '아내' 일까 생각했다.  주인공은 헨리이고, 시간 일탈 장애를 겪는 것도 그이고, 그로 인해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만큼 비중이 있지만 조금 더 부수적인 역할을 한 아내 클레어가 제목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책을 다 덮고 알 것 같았다.   헨리는 '사랑해'라는 한 마디로 그의 아내에 대한 마음을 모두 표현해낼 수 있었지만, 그 '사랑'을 받고 또 그 이상으로 내준 클레어에게는 '사랑해' 라는 말만으로는 그 마음이 다 표현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매번 예고 없이 사라지고 언제 돌아올 지 모르는 남편을 향한 끝없는 '기다림'이 요구된다. (호텔 아프리카에서 아델라이드가 남편과의 짧았던 행복과 긴 기다림을 회상하며 울던 장면이 오버랩된다.)  <그러나 또 동시에 헨리가 그 위험천만한 시간 여행 중에서도 계속해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고, 또 돌아가고프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의 존재감이다.  나중에 그녀가 헨리의 오랜 부재를 버티게 하는 힘도 장차 만날 수 있는 헨리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은 몹시 아이러니하며 또 필연적이다.  > 그녀에게는 결국 "자신=남편"이었고, "그녀의 삶=남편의 삶"이었다.  그래서 동시에 그녀에게는 "사랑=기다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완성시키는 것은 클레어의 대가 없는 '기다림'인 것이다.  아마 결과를 알고 다시 태어난다 할지라도, 그녀는 같은 삶의 과정을 밟아나가리라.

작품의 엔딩에 나오는 영상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면(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녀가 그토록 오래도록 기다려온 남편과 재회할 때의 그 표정, 주변 배경과 그녀의 달라진 모습까지도 모두 세밀하게 상상을 해본다면, 이 슬프고 감동적인 작품을 우리는 박수를 치면서 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조금은 긴장이 되고 또 기대가 된다.  기네스 펠트로의 분위기는 클레어와 잘 맞아떨어질 것 같다.  몹시 섬세해야 할 이 작품을 감독이 얼마나 훌륭한 요리로 만들지 궁금하다.  혹여 작품의 묘미를 반감시킬까 조금 걱정도 되지만, 감독도 똑같은 감동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 믿고 기다리는 게 좋을 듯 하다.

작품에서 또 한가지 좋았던 점은, 미국인들의 생활, 그들의 삶, 문화, 가족 등등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 이것 역시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몸 담고 있는 그 종이 예술의 맛보기도 흥미로웠음은 물론이다.

덧붙여, 표지 그림도 참으로 따스하고 이뻤다.  겉표지에서 한지의 느낌이 났는데, 지극히 서양적인 책에서 동양의 향기를 느꼈달까.

정말정말 오랜만에 300% 만족의 책을 만나 먹지 않고도 배부른 뿌듯함이 넘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접하기를 바라며...

그러나 절대로 그런 장애를 겪는 사람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yuhwlove 2006-03-2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을 맛깔나게 쓰시네요~ 리뷰 보고 반해서 님 서재로 바로 놀러왔어요^^;
저도 마노아님처럼 알라딘에 들어오면 지름신때문에 잔뜩 긴장하는데 오늘은 님 덕분에 저지를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쿨럭... ㅡㅡ;;

뭉치미미 2006-03-29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 글 읽고 이 책이 너무 읽고 싶어지네요~

마노아 2006-03-2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부할 수 없는 지름신의 방문이 있죠^^;; 페퍼민트님 서재에도 다녀왔는데, 제가 즐겨본 책도 보여서 반가웠어요~ 역시 좋은 책은 두루두루 공감을 일으키는가 봐요^^

마노아 2006-03-2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월바라기님, 이름이 무척 독특해요. 발음이 이쁘네요. 시간 여행자의 아내, 진짜 강추에요~ 꼭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