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문 - 화보와 비하인드 스토리
마크 코타 바즈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7월
절판


트와일라잇 화보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재밌게 보았는데 '뉴문'도 같은 작가가 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클립스도 나오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이미 개봉했으니 브레이킹 던과 묶어 나올 수도.

사실 이런 책은 원작이나 영화의 팬들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 같은 거다. 이런 책에 문학성이나 작품성 혹은 대단한 정보를 기대하는 건 욕심이고, 그저 잠시 즐거움을 기대하는 거다. 운이 좋다면 진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원작은 '뉴문'을 가장 재밌게 보았는데 영화는 이미 개봉된 세 편 중 '뉴문'이 가장 재미 없었다. 그걸 감독이 바뀐 탓으로 여겼는데 어느 정도는 맞지 않나 싶다. 이 책에도 보면 첫번째 시리즈의 여성 감독 하드윅이 시나리오 작업에 더 시간을 쏟고 싶어 했는데 제작사는 시간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감독을 바꾸고 바로 제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아무래도 여성 취향의 작품이었고, 그래서 여성 감독이 핵심 포인트를 더 잘 잡은 것 같은데 감독이 바뀌면서 그런 부분들이 약해지지 않았나 싶다.

다만 감독이 최대한 CG보다 실제 촬영장소를 고집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볼투리 가의 거주지로 설정한 고대의 성벽이 둘러싼 도시 볼테라마저도 이탈리아에서 장소를 물색해서 촬영을 했다니 노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제이콥이 벨라에게 생일 선물로 건넨 꿈채반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꿈채반이 공기 중을 떠도는 꿈 중 좋은 꿈은 들여보내고 나쁜 꿈은 걸러보낸다고 믿었다. 디자인도 예뻐서 갖고 싶어질 지경이다.

뉴문의 사건 사고는 초반부터 진행되었다. 벨라의 생일 파티에서 피를 보게 되었고, 그 피 때문에 뱀파이어 가족이 충동을 이기지 못해 벨라를 해칠 뻔했다. 이 사고로 벨라는 팔을 다쳤는데, 자신 때문에 벨라를 지키지 못할 거라고 여긴 에드워드와 컬렌 가족은 모두 살던 곳을 등지고 떠나버린다. 이 장면을 찍은 에드워드의 집도 세트가 아니라 실제 집이었다고 한다. 천장이 4.5미터로 높은 곳이긴 했지만 와이어 장비를 달 구멍을 뚫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스턴트 작업이 힘들었다고 한다.

트와일라잇에서 나온 벨라의 아버지 집은 실제로 지은지 100년이나 된 고택이었다고 한다. 뉴문에선 촬영 장소가 바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 없이 새로 지어야 했다. 똑같은 집을 찾기는 어려웠으니. 제작진은 팬들이 달라진 차이점을 발견할까 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여기에 블루레이 디스크가 한몫을 했다고 한다. 저해상도 DVD에선 찾아내지 못한 벨라 침실의 벽의 질감. 벽 마감이나 그림자 등등까지 모두 재현해 냈다고 한다. 오, 기술의 발전이란!

결국 벨라와 에드워드는 헤어지고 벨라는 폐인 지경에 이른다. 사진은 외모에는 도통 신경쓸 여력이 없는 벨라의 축 처진 모습.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스타일이나 옷차림에서 어느 정도 체념이 느껴진다.(뭐, 그래도 충분히 예쁘다!)

벨라의 꿈을 찍은 장면에선 실제로 늑대를 촬영장에 데려와서 찍었다고 했는데, 해당 사진을 보니 영화에서 본 기억도, 작품에서 본 기억도 나질 않는다. 게다가 사진 찍는 것도 잊어버렸네..;;;;

제작진들이 1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그토록 큰 인기를 끌 거라곤 짐작 못했다 한다. 그런데 이미 뉴문을 찍을 때는 곳곳에서 팬들에 둘러싸이는 진기한 경험을 해야 했다. 농장에서 염소치기의 집을 색칠하고 있는데 아이를 안은 여자가 다가와서는 '여기가 제이콥 집인가요?'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보통은 '영화 찍으세요?'라고 묻는데, 단번에 제이콥의 낡은 창고를 알아본 것이다. 대단한 팬심이다.

이 책에는 출연진들의 인터뷰 기사가 많이 실렸는데, 이런 부분들이 재밌다. 컬렌 가 역을 맡은 배우들이 촬영장에서 행동을 굉장히 삼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반면 늑대 무리 남자들은 에너지가 넘쳤다고. 왕의 남자를 찍을 때 이준기에게 감독은 말을 삼가라는 주문을 했다 한다. 여성성을 보여줘야 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남성성의 본질을 죽이기 위해서 행동을 삼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말부터 아껴야 했던 것이다. 컬렌 가의 사람들도 그랬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였고, 행동거지가 우아했고 절제된 모습을 표현해야 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 모습을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보인다.

뉴문에서 벨라는 자신이 위험에 처해 아드레날린이 솟구칠 때 에드워드의 환영을 볼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에드워드를 느끼고 싶었던 벨라는 심지어 절벽에서 바다로 다이빙을 시도하는데, 이 장면을 실제로 절벽에서 찍었을 리는 없고, 수영장에서 수천 갤런의 물을 쏟아부으며 찍었다고 한다. 심지어 블루 스크린을 수영장 안에까지 설치해야 했다. 사진을 보니 벨라가 뛰어내린 높이는 기껏해야 1.5미터 정도지만 영화에서는 얼마나 사실적으로 보였던가. 특수효과 만만세다.

CG를 많이 쓴 티가 나진 않았지만, 사실은 많이 들어가야 했던 늑대인간들의 변신. CG가 들어가야 할 곳을 표현해낸 판인데 이거 한 장에 무게가 10~15kg이나 나간다고 한다. 이런 모형을 앞에 두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어야 했으니 배우들도 몰입하는데 좀 힘들었겠다.

벨라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읽어낸 앨리스와 그걸 발설한 로잘리 때문에 에드워드는 벨라가 이미 죽은 줄 안다. 절망한 에드워드는 불멸의 삶을 스스로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볼투리 가에 의해 죽임 당할 수밖에 없는 계획을 세운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곳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우수한 점이 이 부분인데 기존에 사람들이 갖고 있는 뱀파이어에 대한 관념을 많이 수정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햇볕을 보면 몸이 타들어가는 게 아니라 다이아몬드 같은 빛을 반사해내서 너무 눈에 띈다는 게 문제였다. 에드워드의 얼굴과 목 주위에 찍힌 점들은 바로 그 다이아몬드 반사 빛을 구현해 낼 CG 표시점이다. 그의 찢어지고 바랜 셔츠는 벨라를 떠난 뒤의 그의 삶, 그리고 벨라와 영원히 이별했다고 믿게 된 그의 절망을 드러내는 작은 부분들이다.

다행히 벨라와 해후한 에드워드는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볼투리 가의 시험을 받게 된다. 그리고 격투 씬에서 제작진은 벽에 부딪힌 에드워드의 피부가 갈라졌다가 다시 재생되는 효과를 집어넣으면서 원작에 없는 씬이 들어간 것에 잠시 고민했다 한다. 바로 스태프니 메이어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 씬이 문제는 없겠냐고 문의를 해보고, 괜찮다는 오케이 사인에 그대로 촬영을 진행했다고. 원작에 충실하려는 이런 마인드는 참 훌륭해 보인다. 늑대인간도 상처 재생 속도가 빠른데 뱀파이어도 거기에 뒤지면 안 되지... 독자는 냉혈인간 편!

볼투리 가 사람들의 등장은 다소 우스웠다. 물론, 2천년을 넘게 살아온 그들은 인간들의 삶이 우스웠겠지만, 그렇게 본인이 신이라고 착각하는 인물을 묘사하자니, 심각하게 가기보다 차라리 코믹하게 나갈 것을 원했던 것일까? 그러니까 인물들은 무게를 잡고 있지만 관객은 웃게 만드는...
여튼, 컬렌 박사도 오래 살기로는 별로 아쉽지 않은 인물인데, 뉴문에서는 애석하게도 주인공 에드워드보다도 컬렌 박사가 훨씬 멋있었다. 중년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얼굴, 지적인 움직임, 절제된 표정 등등. 1700년대의 모습으로 등장한 이 씬에서도 단연코 칼라일 박사가 가장 멋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클립스를 언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당황했다. 검색해 보니 금년에 개봉했다. 분명 영화도 봤는데 왜 기억에 없을까. 그만큼 영화가 인상적이지 못했다는 결론인가 보다. 뉴문보다는 재밌게 봤지만, 원작 4권 중 가장 재미 없었던 이클립스였으니 영화도 1편만 못하다고 느꼈나 보다. 다시 검색해 보니 4편은 내년 개봉이다. 그것도 두 개로 나눠서. 흐음... 4편의 결말이 좀 허황된 느낌이긴 한데 두 개로 나눠서 개봉이라니 조금 걱정이 된다. 그 사이 배우들이 너무 늙을 것도 걱정이고... 무려 불멸의 존재, 영원한 17세인데 말이다.
주인공 두 배우가 실제로 연인이라는 것도 검색하고서 알았다. 이런 영화를 찍으면서 가까워지지 않기가 더 어려울 듯하다. 두 사람이 영화처럼 소설처럼 예쁘게 연애했으면 좋겠다. 그런 것도 일종의 광고 효과를 쓰는 건 아닐까 우려가 되는 건 내가 너무 속물인 걸까? 뭐 암튼, 이제는 4탄 개봉을 기다려본다. 1년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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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1-1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마노아님! 그런데 이런 책이 있군요. ㅎㅎ 저는 역시 팬심없는 여자사람 ㅎㅎ
축 처진 벨라가 혈기 왕성한 다락방보다 예쁘네요. orz

마노아 2010-11-19 15:10   좋아요 0 | URL
중고로 건지고서 좋아했어요. 트와일라잇 화보집은 정가 주고 샀었는데 그때보다 팬심이 줄었죠.^^
헐벗은 에드워드는 잘 차려 입은 벨라보다 예뻤어요. 이를 어쩜 좋아요.ㅎㅎㅎ

2010-11-19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9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1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1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10-11-19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뉴문도 보다 말았어요. 선배남자교사 한분은 사모님하고 아무런 사전정보없이 예매율1위 영화로 이 영화 보러가셨다가 도중에 나오셨답니다 ㅎㅎㅎ. 의외로 고딩남학생들이 이 영화를 열심히봐서 놀랐어요.

마노아 2010-11-20 00:29   좋아요 0 | URL
사전 정보 없이 맞닥뜨렸다면 상당히 당황스러웠겠어요. 시리즈물의 두번째였고, 게다가 상당히 하이틴 물이잖아요. 오, 그런데 고딩 남학생이 관심을 갖다니, 상당히 뜻밖이에요. 제가 가르친 학생 하나도 남학생인데 아직도 성균관 스캔들에서 못 헤어나고 있는데 비슷한 교감인가봐요.^^ㅎㅎㅎ

비로그인 2010-11-2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했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어야....꺄아아아악

실없는 댓글이지요ㅠㅠ

마노아 2010-11-20 12:23   좋아요 0 | URL
Jude님의 감춰진 듯 살며시 보이는 듯한 서재 이미지가 바로 그 우아하고 절제된 모습이라지요. 후훗^^

후애(厚愛) 2010-11-23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 <트와일라잇 시리즈 세트 - 전4권>을 눈독 들이고 있어요.ㅎㅎ

이미지 너무 멋져요~ ^^

마노아 2010-11-23 09:56   좋아요 0 | URL
트와일라잇은 원서 표지가 너무 예뻐요. 원서 표지를 보는 순간 한국판 표지를 보니 눈 버렸어요. ㅎㅎㅎ
후애님은 원서로 읽으셔도 좋겠어요.^^
 
Friendship -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은 먼 법이 없다
정현종 옮김, 메이브 빈치 글, various artists 사진 / 이레 / 2002년 10월
절판


우정을 소재로 한 사진집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각각의 사진에는 짧은 제목이 붙어 있고, '친구'와 '우정',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명한 말들이 표제처럼 따라오기도 한다.
그것들을 찬찬히, 천천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컸다.

이 사진은 미국 텍사스의 휴스턴 국제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된 여섯 살 꼬마 무용수 나타샤와 미탈리가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 모습이다. 수많은 군중 앞에 서게 되었다는 긴장감을 서로의 눈빛과 미소 속에서 녹여내고 있다.

방글라데시 마르마족의 사촌들이 6년 만의 재회를 축하하기 위해 전통적인 수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 담배는 막내 할머니가 직접 만든 것이다. 우정과 사랑을 상징하는 유서깊은 담배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세 할머니는 대화가 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자매인 것을 알고 보니 확실히 셋 모두 닮아 있다.

바소토의 어린아이들이 16개월 된 조슈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이 사는 보콩 마을에서 백인 아이를 처음 본 것이다. 신기하고 예쁘게 보였을 것이다. 조슈아의 눈에도 까만 얼굴 하얀 이를 가진 형님들이 신기해 보였을까? 천진난만함이 읽혀진다.

말레이시아 시부 루마빌라의 강가에서 아이들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늘이라고는 한점 보이지 않는 해맑은 웃음들. 저 또래의 아이들은 저렇게 마냥 즐겁게 놀아야 마땅한데 우리의 아이들에게서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점점 더 추억속의, 이렇게 사진집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영국 런던의 한 노천 극장에서 젊은 친구 셋이 우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록 콘서트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산 하나도 좁지 않게 여기는 건강한 마음. 그런 마인드가 또 록을 사랑하는 자세가 아닐까.

브라질에 사는 네 살배기 피에트로와 다섯 살 유리가 동물원에 갔다. 두 꼬마는 자기들만의 신기하고 멋진 동물을 그림자로 만들어내면서 한껏 들떠 있다. 그림자 속에는 기린도 있을 수 있고, 상상 속의 그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뒷모습과 그림자만 보여주고 있지만 아이들의 우주가 보이는 것 같아 흡족하다.

88세의 베트남 여인이 임종을 앞둔 92세의 죽마고우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다. 양 날개를 펼쳐야 전체 사진이 보이는 기다란 사진인데 앞장에 이렇게 쓰여 있다.
"살아서 내는 용기는... 보통 삶의 마지막 순간의 용기만큼 극적이진 않다. 하지만 승리와 비극의 장엄한 조합임엔 틀림 없다." -존 F. 케네디

많은 글자보다 한 컷의 사진으로 더 많은 얘기들을 해내고 있었다. 그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나의 추억을 같이 떠올려 보는 일이 즐거웠다. 나중에 다시 찾아볼 때에는 은은한 커피 한 잔과 같이 만났으면 좋겠다. 좋은 친구와 같이 본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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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9-23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진집 참 좋다..........
가슴이 포근해지네요.

마노아님, 추석 잘 지내셨죠?

마노아 2010-09-23 22:18   좋아요 0 | URL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사진들이었어요. 마고님이 돌아오시니까 어쩐지 알라딘 서재가 북적북적한 느낌이에요. 반가워요~
 
뚜껑 대신 마음을 여는 공감 글쓰기
이강룡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좋은 글을 써서 내 글을 읽는 분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싶은 욕구는 있었지만, 그걸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지는 못했다.(못했던 것 같다...라고 쓰려다가 고쳤다. 이 책 읽고서 번쩍!) 이 책을 통해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밑줄을 그은 예는 많지만 당장 눈에 띄게 큰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읽기 전과는 분명 달라진 점이 있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목적은 달성한 셈! 

저자 분은 실제 글쓰기 강사를 하시는 분인데 살아있는 예시를 보여주며 쉽고 간결하게, 그리고 적확하게 글쓰기 훈련 책을 만드셨다. 표현이 너무 살아있어 어르신들 용은 결코 아니고, 인터넷과 블로그 등이 친숙한 젊은 세대에게 적합한 책이라 생각한다. 때로 표현이 너무 싼티날 때가 있어서 조금은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는데, 또 때로는 그래 이 맛이야! 싶을 만큼의 재미난 어휘구사가 지루할 법한 '작법'에 대한 교육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그 강약을 조절하는 것도 좋은 글쓰기 선생님의 내공일 테지. 

오리엔테이션을 마치면 1교시부터 무려 7교시까지의 수업이, 더불어 보충수업까지 전개된다.  

1교시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자 - 닫힌 표현과 열린 표현
2교시 한 사람을 움직이면 세상이 움직인다 - 구체성과 보편성
3교시 내 안에 나 있다 - 부분과 전체
4교시 기부는 수능이 아니라 검정고시다 - 개념 재규정
5교시 인생은 피자다 - 예시와 비유
6교시 흙이 마르면 물을 주세요 - 독자 눈높이에 맞추기
7교시 돌려막기 인생에 돌려차기를 날리다 - 글감 찾기와 개요 짜기
보충수업 소극적 제안과 적극적 제안 

'닫힌 표현'과 '열린 표현'을 염두에 두고 생활해 본적이 없는데 책을 보고 나니 아핫! 싶었다. 제시해준 예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오늘 전철역에서 싸이코를 만났다.(닫힌 표현)
2010년 4월 5일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에서 파란색 스판 바지 위에 빨간색 빤쓰를 입은 중년 남자를 보았다.(열린 표현) 

닫힌 표현이 더 필요한 글도 있을 테지만 대개의 독자는 열린 표현에 더 마음을 열고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글쓰기이다.  

 

객관적으로 말하기, 더군다나 네거티브가 아닌 '긍정의 말'을 이용했을 때의 효과가 눈에 보인다.  

 

요즘 오래 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으며 오타를 수정하고 있는데 오타뿐 아니라 저런 식의 쓸데 없이 무거운 문장들이 눈에 많이 띄어서 서술어를 많이 고쳤다. 중학생일 때는 '만연체' 느낌의 문장이 멋있어 보여서 좋아했는데, 언젠가부터는 지나치게 긴 문장들은 패쓰, 패쓰, 패쓰해 가며 넘어가버리는 경향이 생겼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질려버리는 것이다. 다시금 김훈 작가가 생각났다. 그의 문장은 수식어 없이 군더더기도 없이 깔끔하면서 무겁다. 그런데 그의 글이 주는 느낌은 장엄하고 엄숙하고 때로 화려하다. 수식어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의 힘을 돋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 서술어를 간략하게 쓰는 것이라는 이 책 저자의 지적과 상통한다.  

 

부사 뒤에 여러 조사가 붙어도 되지만 꼭 필요하지 않으면 붙이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한글 문서를 쓰다 보면 부적절한 표현에 붉은 줄이 북 그어지곤 하는데 저렇게 불필요한 부사어의 조사에서 많이 발견한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 '작문' 수업이 있긴 했는데, 그때 이런 것들을 배웠는지는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요새도 이런 걸 배우는지는 모르겠다. 모르지만, 이런 가르침이 꼭 필요함을 느끼고 말았다. 사실 읽기 전에는 막연히 느꼈지 정확히 몰랐지만. 

다만 이렇게 좋은 글과 나쁜 글의 차이점을 배우면 글을 자연스럽게 쓰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돌아보고 고치고 하느라 흐름이 끊기는 단점이 있다. 처음부터 익숙해져 있다면 달랐을 테니, 역시 한 번은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  

저자분의 말투도 재밌지만 그림이 주는 효과도 만만치 않다.  

 

저자의 어머니가 해주신 사례인데, 시골 노인 친목회에서 '자랑 벌금'을 책정했단다. 자식 자랑을 하면 천 원씩 벌금을 내야 하는데, 자랑을 많이 하고 싶으면 2천 원을 내야 하고, 특이하게도 손주 자랑을 할 경우 할머니가 아닌 며느리에게 벌금을 받는다고 한다. 오버한 것이지만, 얼마나 손주 자랑을 했으면 저런 금액이 나올까. 게다가 슬프게도 88만원 대라니..;;;; 총무님 패션은 거의 복부인 수준! 해맑은 표정의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복수하는 게 진짜 목적이었던 게 아닐까 상상하게 만든다.  

이런 소소한 재미가 있다 하면, 이런 특별한 재미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름대로', '내가 원래는 그렇지 않은데', '확실히 알진 못하지만'... 이런 표현은 얼마나 자주 쓰곤 하던가. 사실은 그게 비겁한 글쓰기라는 걸 알아차리며 뜨끔했다. 그렇게 시작하는 글을 찢어버리라는 과격한 표현에서 잠시 놀랐다면 중고샵에 팔지 말라는 얘기엔 피식 웃고 말았다. 저자분, 센스가 장난이 아니십니다! 

이렇게 무언가 알려주고 가르치는 책은 지루하거나 귀찮을 수 있지만, 그런 두려움(!)을 던져버린다면 꽤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한 권의 책보다 한 학기 정도의 강의를 직접 들으면 더 큰 성과를 누리겠지만 당장은 이렇게 책 한 권으로 만족하련다.  

유일한 옥의 티가 있다면 표지! 제목도 그리 맘에 들지 않지만 그보다 저 두꺼운 폰트가 너무 거슬렸다. 물결치는 글씨도 뚜껑을 열기는커녕 자꾸 내 마음을 닫게 만든다. 그것만 엔지였어요!  

어찌 됐든, '공감'을 끌어내는 저자의 글쓰기는 확실히 성공. 좋은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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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8-10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의 기본은 어렵지 않은데 지키는 건 쉽지 않지요.^^
제목의 글씨체는 정말 깨는군요.ㅜㅜ

마노아 2010-08-09 21:35   좋아요 0 | URL
쓸데없는 물이 많이 든걸 느껴요. 번역투 문장, 일본식 말투, 의미의 중복...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힘드는데 글쓰기의 기본까지... 해야할 게 참 많아요.^^
제목과 글씨체는, 정말 노 센스예요.ㅜ.ㅜ

카스피 2010-08-0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위에 객관적으로 혼내는 예라고 든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심히 비꼬는 투로 들리네요.혹 사람에 따라 틀리지만 한대 맞는것이 저런 말을 듣는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림도 있을것 같군요.ㅎㅎ 저는 당근 한대 맞고 끝내자 주의입니다^^

마노아 2010-08-09 23:42   좋아요 0 | URL
어떤 뉘앙스를 상상했는지에 따라서 다르게 들리겠네요. 설마 그 위의 버전이 다 좋은 것은 아니겠지요? 비교 대상은 두 개니까요.

꿈꾸는섬 2010-08-0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 책은 어떤 것이든 읽어보고 싶어요.^^

마노아 2010-08-10 00:27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은 처음인데 무척 재밌었어요.
강의를 직접 들으면서 연습도 해보고 그럼 더 신날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8-10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바로 장바구니로~.
마노아님두 나의 지름신으로 명명합니다.... 미워염!

마노아 2010-08-10 23:58   좋아요 0 | URL
우리는 서로에게 아바타가 아니라 지름신이에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랄까요.^^ㅎㅎㅎ
 
누들 로드 - 3천 년을 살아남은 기묘한 음식, 국수의 길을 따라가다
이욱정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읽은 지 한참 되었는데 리뷰를 쓰지 않은 게 생각났다. 소회도 다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건만 간단하게나마 기록을 남겨야겠다.  

어느 분 블로그에서 읽은 극찬 때문에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게 되었는데, 기대가 컸기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크게 재밌지 않았다. 국수의 기원을 찾아서 대장정을 벌인 그 노고를 깎을 마음은 없지만 뭔가 기대했던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이 책은 '다큐'나 '여행기'라기 보다는 '인문'이나 '역사' 쪽의 느낌이 더 강했다. 방송용 다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책만 보면은 그들의 기나긴 '여정'의 느낌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 사진이라도 좀 더 많았더라면 좋았겠는데 사진도 부족했고, 실린 사진도 현장감을 느끼기엔 뭔가 2% 부족했다.   

그래도 지적 충족감은 제법 채워주어서 오홋! 하며 읽은 부분은 제법 된다. 개인적으로 중국 '송나라'에 대한 관심이 많았느데 그 무렵에 폭발적으로 발전한 국수 문화에 눈이 번쩍 뜨였다. 확실히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중국 사극을 보면 등장 인물들은 항상 국수를 먹는다. ^^ 

송대 연구소장은 카이펑의 도시 규모가 인구 150만 명-당시 유럽의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인구는 40만, 런던의 인구는 10만 명이었다-에 이를 정도로 점점 커지면서 사람들이 성을 나가기 힘드니까 성벽을 없애고 가게를 열어 24시간 장사를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청명상하도」와 함께 북송시대 카이펑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동경몽화록』을 통해 당시 이곳 거리에 새벽 4시에 문을 열어 한밤중까지 영업을 하는 음식점과 상점들이 즐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경몽화록』은 남송 시대 맹원로가 쓴 역사서로, 북송이 금나라에 패해 어쩔 수 없이 남쪽에서 살게 된 맹원로가 옛 수도의 번영을 그리워하며 저술한 책이다. 때문에 이 책에는 북송의 풍속과 건축, 문화 등 다양한 모습이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음식문화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 제작진의 흥미를 끈 것은 송대에 이르러 국수가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들이었다. – 146쪽

이를 테면 당시 북송 카이펑 사람들이 먹었던 다양한 국수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양고기 국물을 낸 암생연양면, 마늘과 귤껍질로 만든 소스로 무친 이탈리아 파스타와 닮은 세물료기자, 돼지고기와 닭고기로 국물을 내서 담백한 동피면, 물로 식혀서 먹는 냉동기자, 밀반죽을 손으로 비틀어 불규칙하게 썰어 고기, 야채와 함께 먹는 흘달, 동피숙회면, 혼돈, 채면, 호접면 등 그 종류가 수없이 많았다. 이를 통해 국수가 송나라 때 매우 보편화되고 인기 있는 음식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 147쪽

송대에 국수가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은 “옛날에는 그저 숟가락을 쓰고 지금은 모두 저(箸)를 사용한다”는 보편화된 젓가락 사용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는 면 요리가 대중화되어 젓가락으로 먹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을 추측하게 했다. 실제로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당나라 때 밀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제분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하면서 밀가루 가격이 하락해 귀족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분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면(麵)’과 ‘병(餠)’이라는 글자가 온전히 구분되지 못했다. 당시 밀가루 음식을 가리키는 병처럼 면도 밀가루라는 뜻 이외에 밀가루로 만든 요리를 총칭하는 말로 쓰였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국수처럼 밀반죽을 끓는 물에 데치거나 삶은 형태로 먹는 음식을 ‘탕병(湯餠)’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국수는 탕병의 부분집합에 불과했다. – 147쪽

수많은 학자들은 송대 사람들이 많은 음식들 중에서 특히 국수를 즐겼던 이유를 도시발달로 인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던 송대 사람들은 그 전의 중국인들과 달리 현대인들처럼 대단히 바빴다. 때문에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시간이 없어 주로 외식을 했다.
– 150쪽

당시 카이펑은 음식 배달이 대단히 일상적일 정도로 외식문화가 꽃 피웠다.
일상의 속도가 빨라져 외식을 즐겼던 송대 사람들. 이들은 외식을 할 때도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국수는 길고 가늘어 삶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조리법도 간단해 빨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했던 송대 사람들에게 최적의 메뉴였다.
파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시간 때마다 밀어닥치는 손님들을 감당하기에 국수만큼 훌륭한 상품은 없었다. 국수는 다른 재료와 함께 조리를 해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심지어 미리 삶아 놓았다가 살짝 데쳐서 국물을 붓고 고명만 얹으면 음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단시간에 손님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 151쪽

송나라 당시 식당 점원들은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메뉴판을 들고 가서 주문을 받아 정확하게 기록을 해두었다가 주방으로 가서 주문 내용을 큰 소리로 전달했다. 그러면 주방에서는 빠른 속도로 음식을 완성했고, 때문에 서빙을 하는 점원들은 쉴 틈 없이 양손은 물론 어깨까지 사용해 많은 음식을 날라야 했다. 그들은 아무리 음식의 가짓수가 많아도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정확하게 그 손님 앞에 놓았다. 하지만 주문을 잘못 받아 다른 음식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점원들은 주인에게 야단을 맞거나 월급이 깎이기도 했고, 심지어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 153쪽  

그 시대에 급격히 발달한 도시 생활, 인구 증가, 시장 문화 등을 구체적인 '국수'라는 매개체로 설명을 하니 좀 더 그 시대가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일본에서 만난 사찰 국수에는 '들깨'가 들어가는데 '기름진' 음식을 접하지 못하는 그들 승려들에게는 고기 파티와 가까운 즐거움을 주는 국수라는 사실이 재밌었다. 묵언수행에 가까운 침묵 속에서 국수 먹는 날만은 요란스럽게 소리내며 식사를 해도 된다는 금기의 깨뜨림에 같이 신이 나기도 했다.  

일본 에도 시절에 국수가 발달한 것도 중국 송나라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사회가 바뀌고 라이프 스타일이 바뀌면서 빨리 빨리 해먹을 수 있는 간편한 식사가 필요했던 것. 

그리고 이런 사정은 일본뿐 아니라 이탈리아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과히 국수의 세계화와 국수의 문화사랄까. 

이러니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라면이 그토록 사랑받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우리의 유전자에는 국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역사가 새겨진 듯하다.  

날은 덥고, 목은 자꾸 타들어가고... 이런 날은 냉면을 먹는 게 제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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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 Children's Playing House
편해문 지음 / 고래가그랬어 / 2009년 7월
품절


내가 학교 다닐 때에도 학원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학원을 가지는 않았다. 난 집이 좀 잘 사는 애들이나 다니는 곳인줄 알았다. 학원에 가건 가지 않건 성적과는 크게 상관 없기도 했다.
요즘의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학원이다 학습지다 온갖 사교육에 엄마보다 더 바쁘다. 나의 큰 조카만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고, 바이올린과 미술도 한 번씩, 영어와 컴퓨터는 학교에서 방과후 수업으로, 그리고 주5일 태권도를 다니고 있다. 수영도 한참 배워서 접영 마치기 직전에 아토피가 심해져서 그만두었다. 언니는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조카는 너무 바쁘다. 형부와 언니도 조카의 스케줄 대로 움직여야 한다. 둘째 조카가 거기서 치이는 건 당연지사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이런 것 모두 하지 않고 놀려고 마음을 먹어도 같이 놀 아이들이 놀이터에, 공원에, 학교 운동장에 없다. 아마 놀라고 풀어주어도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몰라 서성거리지나 않을지 염려된다.

이 책은 인도와 네팔의 아이들을 찍은 사진집이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마을의 헐벗은 아이들이건만 이들의 해맑은 웃음 앞에서는 벗은 발도 초라하지 않다. 낡고 버려진 것들도 소꿉놀이에서는 당당하게 주인공이 된다. 아이들이 놀이의 주체가 되어 있듯이.

도깝지놀이, 도꼬바지놀음, 도꿉놀이, 동갑살이, 동굽살이, 동굽질, 동도가미, 동독게미, 동두께미, 동드깨미, 또갑질, 바꿈살이, 바꿉질, 반두게미, 반두깨미, 반드깨미, 반주까리, 빠꿈살이, 빵깨이, 새금박질, 세간놀음, 소꿉장난, 소꼽재, 소꿉질, 수꿉질, 시간살이, 시간장난, 시감치, 통곱질, 퉁굽질 등등. 모두 우리나라 안에서 소꿉놀이를 일컫는 말들이다. 이렇게 낯설고도 다양한 소꿉놀이가 있었다니 놀랍다. 이름이야 어떻든 모두들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었던 놀이들이다.

돌을 이어서 만든 벽이 소꿉놀이 울타리가 되어준다. 저 안에서 아빠 엄마, 아이가 되어 소꿉놀이 하고, 집에 갔다가 다음 날 다시 찾아온다. 이쪽은 부엌이고 이쪽은 침실이고, 이쪽은 화장실이라며 구역도 나누어 보았다. 천장도 없는 집이건만 상상 속에서는 궁전처럼 찬란했다.

손발이 더러워지면 어떤가. 철봉 대에 매달려서 놀다가 물집이 잡히면 또 어떤가. 그 모든 게 추억이고 놀이고 즐거움이었다.
놀다보면 웃게 되고, 웃다 보면 행복해지는 게 자연스런 이치였다.
그렇게 놀면서 행복을 찾아갔다. 다른 걱정과 근심은 어린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아이들은 철없어도 용서가 되는 그런 존재였다.

놀이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일,
만약 놀지 않으면 추억도 없을지 모른다.
아이때 뿐이던가. 대학 시절에도 엠티와 같은 여럿이 어울리는 자리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다. 일하기 바빴고, 중간에 휴학을 2년 했고, 전과도 하는 바람에 끼일 자리가 없었다. 지금도 아쉽다.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추억을 나눌 친구가 많지 않다는 것에.
하물며 더 어릴 때에는 오죽하랴. 우리는 고무줄로도 하루종일 놀 수 있었고, 줄넘기로도 그랬으며, 그런 도구 없이 맨 손으로도 얼마든지 뛰어놀 수 있었다. 우리에겐 모든 게 가능했다. 해만 떠 있다면.

놀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다큐멘터리 안에서나 저런 게 있었다고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엄마와 아이가 같은 시절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통된 놀이가 사라지고 있다.
이제 아이들은 닌텐도와 휴대폰에 열광하고 있으며 '함께' 놀지 못하고 따로 놀며 그 안에서도 소득 격차에 따른 선들이 그어지고 있다. 어휴...

이렇게 맑디 맑은 웃음이라니.
찬란함 그 자체다.
요새 아이들은 한약을 많이 먹는다고 한다. 체력이 달려서.
그 체력을 키우고자 어린이 축구 교실 농국 교실도 다닌다.
뭐든 교과서에 등장하기만 하면 학원과 과외로 선행학습을 해야 안심할 수 있는 교실 풍경.
아이들이 바쁘기 때문에 엄마도 지나치게 바쁘다. 가족의 모든 시간표가 아이 위주로 돌아간다.
교과서부터 확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엄마 숙제가 가득하고 엄마 없인 공부 못하게 만드는 교과 과정은 혹시 정치에 관심 가지지 말라는 어떤 음모일까???

뒤입어라 엎어라~ 대대찌(?)~ 뭐 이런 놀이들.
국경을 달리하지만 비슷한 놀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가장 흔한 놀이였던 얼음땡을 요새 초등학생들은 알고 있을까?
땅따먹기를 해봤을까.
정글짐이나 허수아비, 말타기 등등은?

어제는 조카가 딱지 치자고 동그랗게 생긴 딱지를 갖고 왔다. 나 어릴 때 하던 종이 딱지는 나란히 기울여 놓고 손을 볼록하게 만들어서 탁! 치면 넘어가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는데, 어제의 그 딱지는 어찌나 딱딱하던지 하나도 안 넘어갔다. 네모나게 접어서 딴딴하게 만들어 넘기던 딱지처럼 놀아야 한다고 조카가 가르쳐준다.
병뚜껑을 얇게 펴서 놀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끝이 날카로워서 위험할 법도 한데 우린 다치지도 않은 채 재밌게 놀았었다. 우유곽도 제기가 되었고, 무엇으로도 얼마든지 놀 수 있었던 게 우리들이었다. 그래도 '놀이'라는 걸 경험하였던 세대라는 게 다행인 것일까, 아픈 것일까.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책이었다. 추억만 떠올리며 미소를 지으면 좋을 텐데, 여러모로 착잡하고 안타깝게도 했다. 그런 마음을 생각하며 만들었을 책이기도 하다.
사진이 거의 다이고 글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책값은 좀 센 편이다.
도서관이 있어서 너무 고마웠다.
고래가 그랬어 발행이어서 더 믿음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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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0-07-12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도와 네팔에서 만난 꼬마들의 눈동자가 또 떠오르네요.

마노아 2010-07-12 20:53   좋아요 0 | URL
순수하고 예쁜, 선명한 눈동자였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