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생각 -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
안철수 지음, 제정임 엮음 / 김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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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 제법 지난 책이다. 그때는 안철수가 대선 출마를 공식 발표하기 전이었고, 지금처럼 18대 대통령이 결정되지도 않았던 때이다. 그러니 보다 열린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이제 정치판에 뛰어든 안철수를 경험하고, 또 선거의 결과까지 알아버린 시점에서 그가 쓴 글을 다시 들여다 보니 어쩐지 서글픔이 몰려온다. 안철수가 주장한 내용들은 특별히 혁신적이거나 아주 가파르게 진보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지극히 '상식'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그 상식적인 주장들이 '퍼주기' 식으로 오염되어 통용되기 일쑤다. 가슴 아픈 일이다.

 

자살률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수치라고 생각하는데요, 불행히도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전체 중 1위입니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낮은 나라에 비해 10배나 높아요. 거의 매일 40여 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1년이면 1만 5,500여 명이 비극적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각박한가를 보여주는 수치죠. 출산율이란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낳은 아이가 앞으로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기대에 따라 출산율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거의 세계 최하위 수준입니다. 자살률이 가장 높고 출산율이 낮은 나라. 한마디로 지금 가장 불행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얘기가 아닐까요?  – 83쪽

 

선거 끝나고 고작 일주일 지났을 뿐인데, 벌써 다섯 명의 노동자가 생을 달리 했다. 이 절망의 죽음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그들은 죽을 이유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선진국들의 경험을 보면 복지국가는 정치·사회 세력 간에 대립이 아니라 소통과 합의가 이뤄져야만 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보수, 진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저는 이 두 진영이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라는 것은 그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세력이고, 진보는 새롭게 도전하고 발전하게 만드는 세력이죠. 양쪽이 소통하고 타협해야 한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도전과 발전의 기회도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상식과 비상식의 대립이 보수와 진보의 건전한 협력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누가 봐도 절실한 복지 확충, 경제 민주화 같은 과제에 대해서도 ‘좌파’의 딱지를 붙이며 색깔 공세를 펴는 비상식적 세력이 건전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방해하거든요. 이제는 우리가 상식을 회복하고 합리적인 소통과 합의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90쪽

 

건전하고 건강한 보수를 대선 막바지에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보수를 만나기까지 몇 십년이나 걸렸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김구 선생님이 천수를 누리셨다면, 극우 성향을 가진 분들 중에서도 건강한 보수주의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역사의 슬픔이다.

꼭 아파트를 새로 지으려고만 하지 말고 민간의 다세대주택을 사들여서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정책 같은 것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많은 재원을 갖고 있는데 국민의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미래가 불안정한 오피스빌딩을 매입하기보다 국가 보증하에서 안정적이고 공공성이 높은 공공임대주택 건설에 투자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 106쪽

은평 뉴타운의 실패로 분양되지 못하고 놀리던 집들을 박원순 서울 시장은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는 방안을 제시했다는 글을 보았다. 누군가는 얼토당토 않다는 반응을 보이던데 나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었다. 비록 아주 가까이에 대학교가 있지 않아서 거리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은평구에서 서대문구 신촌은 그다지 멀지도 않다. 일년 만에 서울시의 부채를 1조 2천억이나 갚아낸 시장님의 능력을 믿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본주의의 모든 장단점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고 사실 많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부패에 대해 엄격한 법과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아름의 건강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본시장이나 기업 범죄, 탈세 등에 대해서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나 병합선고, 즉 모든 죄의 형량을 합산해서 처벌하는 방식으로 엄벌을 내리죠. 기업 간의 공정거래를 해치는 범죄행위도 강력하게 처벌하고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대통령까지도 하야시킬 수 있는 법으로 부패를 막고 있죠. 우리나라는 미국의 제도를 많이 들여왔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아요. – 144쪽 

제발, 정말 제발이다.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재벌들만 살만한 나라 말고, 국민 모두가 살맛 나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한다. 정치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정치 때문에 신명나는 대한민국 말이다.

 

북한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북한과 평화적인 경제협력이 활성화되면 내수시장이 확장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어요. 우리 경제는 현재 성장이 정체된 상황인데 북한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북한 내 지하자원, 관광자원, 인적자원을 활용할 수 있고요. 동북아 경제권 형성을 위한 길이 열릴 수 있고 육로를 통해 부산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연결될 수도 있죠. 지금은 북한에 막혀서 남한이 사실상 섬나라와 같은데, 대륙이 연결돼 원자재와 수출품 등의 수송이 쉬워지는 거죠. 그러면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북이 경제협력을 통해 격차를 줄여나가면 서독과 동독이 교류협력을 통해 통일 비용을 줄인 것처럼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통일 비용도 줄일 수 있을 거예요. – 152쪽 

북한을 통일의 대상이 아닌 '적대'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그리하여 북한 퍼주기가 겁나 겁나는 어르신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한없는 슬픔을 느낀다. 우리가 정말 슬픈 세월을 살았다는 게 실감나는 대목이다.

 

여러모로 되새겨볼 만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과, 이런 정치를 해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테지만, 안철수가 건강한 정치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그가 부르짖었던 상식과 소통이 건강하게 진행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주역으로 말이다. 이번 대선은 그에게도,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도 많은 아쉬움을 남겼을 것이다. 그에게 남아있는 어떤 의구심마저도 모두 걷어낼 수 있는, 그런 진정성 있는 정치인으로 다시 조우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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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2-12-2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간절히 바란다는 현실이 참 서글프죠.....
대단한걸 바라는것도 아니고 그저 상식적인 사회를 바라는건데 말입니다.
솔직히 안철수씨가 정치를 하지 않길 바랬던 사람중에 하나지만
본인이 정치를 꼭 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좋은 정치인의 모습을 기대할뿐입니다.


마노아 2012-12-28 01:47   좋아요 0 | URL
상식적인 일을 간절히 소망해야만 하는 처지에 와 있다는 것이, 참으로 막막하게 만드네요.
안철수 씨에게 희망을 걸었던 많은 분들이 실망하는 일이 없게, 이런 정치인도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으면 해요.

순오기 2012-12-2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가장 바람직한 사회인데.... 우린 그걸 소원하는 나라에서 살아요.ㅜ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고 불끈 힘을 내자고요!!
안철수~~~ 5년 후는 어떨지 기대해봅니다.

마노아 2012-12-28 01:49   좋아요 0 | URL
오늘 곽노현 교육감 헌재 판결 보고서 또 주르륵....ㅜ.ㅜ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사실에 또 놀라면서 좌절감이 들지만,
그조차도 사치스러워서 다시 불끈 힘을 내봅니다.
5년 후, 이 나라의 정치 지형이 '상식'적으로 바뀌기를 소망해요. 그날까지 고고씽!!!
 
뉴욕의 상페
장 자크 상뻬 지음, 허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3월
구판절판


참 마음에 드는 삽화가 상뻬의 작품집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주간지 '뉴요커'에서 상뻬에게 표지화를 요청했다.
그것도 미국적인 그림이 아니라 '상뻬다운' 그림으로 말이다.
상뻬에게도 엄청 영광스런 일이었다.
그렇게 이어져온 인연이 무려 30년 이상 이어져왔다.
이 책은 바로 그 표지화를 모은 작품집이다.
1925년 창간된 이래 뉴요커는 표지에 제목이 없이 그림을 싣는다는 원칙을 일관성 있게 고수해 왔다.
우리나라 잡지들은 표지에 기사의 제목들이 빼곡히 담겨 있는데, 오로지 삽화로만 승부하는 이 배짱이 참으로 근사하다.

상뻬가 처음 뉴요커의 표지를 그렸던 1978년에 이 잡지의 가격은 1달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잡지의 가격은 대략 25센트씩 올라갔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그림은 2009년도 뉴요커로 가격이 4.99달러다.
30년에 5배면 그래도 비교적 양호한 물가 상승률이라고 해야 할 듯.
고양이가 등장한 표지는 원래 소녀도 있었는데 사장의 만류로 몇 번이나 수정을 거듭한 끝에 소녀 없이 가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에는 상뻬와의 긴 인터뷰도 실려 있는데, 그 속에서 상뻬의 어린 시절과 뉴요커와의 만남, 그리고 그림에 대한 철학과 음악에 대한 열정까지도 함께 읽을 수 있다.

고양이가 또 등장한다. 뉴욕이 아니라도 고양이라면 저렇게 우수에 잠긴 뒷모습이 무척 어울릴 거라고 상상한다.
제목 외에는 글자가 없지만 그림 속에서 음률이 보이고 이야기도 숨쉬고 있다.
상뻬의 힘이다.

살짝 삐져나온 카드가 하트라는 게 마음에 든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협주자에게, 그리고 협주자는 다시 연주자들에게 박수와 공을 돌린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는데, 빛이 많이 들어간, 그래서 아주 맑고 투명하게 보이는 상뻬의 수채화 그림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는 빛의 화가다.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일을 하는 사람들,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적 감각'이 느껴진다.
상뻬가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좋다.

이번 사진도 좀 안 나와서 아쉽긴 한데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 가득하다.
이런 게 상뻬 스타일이라고 전에 리뷰도 짧게 썼던 그림이 바로 뉴요커의 표지였던 것이다.
이렇게 다시 만나 반갑다.

뉴욕의 밤과 낮, 그리고 조명 아래에서 꿈과 땀과 열정이 보인다.
무대 뒤 대기 중인 이들에게는 무대 위에 선 사람의 그림자가 이렇게 크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 역시 그 큰 그림자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떨지마, 쫄지마, 파이팅!

진열장을 바라보는 남자와 소년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관심일 수도 있고, 호기심일 수도 있고, 혹은 욕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시선이 좋다.
간절함을 담는다면 더더욱!

피아노를 향해 걸어가는 연주자의 발걸음.
그의 심장 고동 소리는 본인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긴장시키는 구도다.
싸이클 선수들의 대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아름다운 선수의 모습이 뭉클하다.

저 해변을 내가 거니는 것 같고,
저 물 속에 내 발을 담근 것만 같다.

엇갈린 손의 피아니스트의 표정에게서 자신감과 더불어 자부심이 느껴진다.
음악에 충분히 심취해 있겠지만, 바로 그런 자신을 만족스러워하지 않을까.

심벌즈 연주자가 연주 도중에 객석의 아이에게 딸랑이를 흔들어 보인다.
연주 도구를 이용한 센스가 재미 있다.

붉은 튤립밭 가운데 파란 꽃을 들고 방문한 남자가 눈길을 끈다. 이 남자 감각 있네!
넥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숲길을 거니는 남자의 표정이 충만하다.
시간을 이탈한,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좋다.
미로 속 만남은 또 어떤가. 저 속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나같은 길치라면 특히나 더!

지각한 연주자와 지각한 관객의 대구가 재밌다. 익살스런 상뻬 할아버지!

뉴욕에서 머물던 아파트에 불이 났을 때 입주자들이 모두 원고나 그림 등 자신의 작품을 들고 뛰쳐나왔다고 한다. 상뻬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역시 예술가들에게 작품 이상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32년 생인 상뻬 할아버지는 올해 여든이시다. 우리 나이론 여든 하나!
그렇지만 아직 정정하실 거라고 기대한다.
오래오래 작품 활동 계속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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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1-0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덕에
이 참에 보일러가 아니라 상뻬 하나 장만해야 겠어요^^
상뻬 책 중에 가장 좋았던 거 추천 하나 해주시어요. 고맙습니다.

마노아 2012-11-06 00:11   좋아요 0 | URL
으하핫, 상뻬 스타일 보일러가 이 계절을 따끈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ㅎㅎㅎ
여러 책들이 좋았지만 저는 '겹겹의 의도'를 사놓고서 하루 두편씩 아껴가며 볼 때 참 행복했어요.
여백과 상상의 힘을 적절히 쓰는 상뻬 할아버지예요.^^

순오기 2012-11-06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30년을 그린 뉴요커 표지라니요!!
마르지 않는 샘물같은 쌍뻬할배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경탄을!!

마노아 2012-11-06 19:57   좋아요 0 | URL
엌! 소리 나는 세월이지요?
젊은이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을 상뻬 할배의 저력이에요.^^

arise99 2013-01-05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쌍뻬의 얼굴빨개지는 아이를 시작으로 한권씩 빠져들고 있는데 겹겹의 의도라...당장 사 보고싶네요. 이렇게 잡지표지 작업을 오래한줄은 몰랐구요...와~ 역시~ 좋은 글 감사해요^^

마노아 2013-01-05 19:17   좋아요 0 | URL
한권, 한권 상뻬의 그림책을 천천히 들여다보던 시간이 참으로 좋았어요. 이렇게 표지 구경하게 한 뉴욕의 상뻬도 좋았구요, 상뻬의 그림은 상상하게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요. 훌륭한 작가님이에요.^^
 
구본창 Koo Bohnchang 열화당 사진문고 20
김승곤 지음, 구본창 사진 / 열화당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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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 함부르크, 1980

생략된 공간과 강한 선이 구성하는 조형미가 아름답다.
전체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된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일까, 어디로 향하는 중일까...

피나코텍 박물관, 뮌헨, 1983

인체를 표현한 조각품과 창밖 휴게소에 앉아 있는 관람객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인다.
생명이 멈춰있는 조각상, 그리고 생명이 팔딱팔딱 뛰고 있는 사람들의 극명한 대조성!
게다가 손발이 잘리고 없는 조가이기 때문에 더 극적으로 보인다.

트러팰가 광장, 런던, 1983

수많은 관광객이 운집해 있을 광장에 비둘기가 하늘 가득 날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너도 날고 싶은 거니? 훨훨?

밀라노, 1984

물새 두 마리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세 마리다.
외로이 홀로 깃털을 고르는 새와, 서로 도와 가며 깃털을 다듬는 한쌍.
이 대조적인 모습의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보고 있자니 내가 꼭 왼쪽에 홀로 있는 물새 같구나...

노이에발, 함부르크, 1981

일년 중 240여 일 넘게 비가 온다는 함부르크에서 모처럼 햇빛을 보게 된 날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찬란한 햇빛 덕분에 운하에 건물이 화려하게 반사되었다.
그 화려한 실루엣을 오리 한 마리가 깨뜨리며 잠수하고 있다.
너의 나비효과로구나.

멘퀴벡 스트라세, 함부르크, 1983

북유럽의 겨울은 몹시 맹렬할 것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차가운 날씨가 이어지다가 살짝 날이 풀린 어느 날, 도로 표지판 위의 눈이 살포시 주저앉았다.
아슬아슬한 중력의 힘이 적용된 까닭이다.
회색빛 하늘과 붉은색 신호등이 분명하게 대조된다. 그 바람에 저 붉은 빛이 더 선명해 보인다.

피사의 탑, 피사, 1984

탑 위에서 아래를 직은 사진이다. 한낮의 볕을 피해 사람들이 탑 그늘 속에 들어가 있다.
거대한 그림자를 시원하게 가로 지르고 가는 대각선 길이 통쾌하고, 이런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뒷짐 지고 걸어가는 인물이 적잖은 긴장감을 준다.

밀라노, 1984

무성한 담쟁이 덩굴에 뒤덮인 창이 인상적이다. 그 창에 비친 제삼의 공간이 주는 구도가 깊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작은 담쟁이야, 너 참 힘이 세구나!

숨, 1995

스페인 여행 중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시계라고 한다. 망가진 시계지만 그 속에 사연이, 추억이 있을 것이다. 더불어 기다림도...

물 이미지의 사진 위에 시계를 올리고 촬영했다. 그 덕분에 마치 파도 위에 떠 있는 시계처럼 보인다.

숨, 1995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계셨던 아버지의 사진이다. 생명이 서서히 증발, 소멸되고 있다.

그 아버지의 수분이 증발해 버린 메마른 손이다. 삶의 흔적과 노력이 고스란히 보이는 손이다.

오랜만에 사진집을 보니 좋다. 과감한 구도와 극명한 대비들이 선명한 이미지를 남긴다. 작가의 유학생활과, 그 속에서 느꼈을 외로움이 보이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이은 죽음이 그에게 안겼을 내적 트라우마가 사진 속에서 이미 잡힌다. 말보다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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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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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꽃나무

당신의 정원에 두 개의 꽃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잎이 예뻤고 다른 하나는 가지가 탐스러웠습니다

당신은 두 개의 꽃나무 앞에서 서성거리는 나를 보고 그 중 하나는 가져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두 개의 꽃나무 다 갖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뜰에 심고 다른 하나는 문 앞에 두고 싶었습니다

내 다 가져가면 당신의 정원이 헐벗을 줄 알면서도, 허전한 당신 병드실 줄을 알면서도......

당신의 정원에 두 개의 꽃나무가 있었습니다 두 개의 꽃나무 사이, 당신은 쓸쓸히 웃고만 계셨습니다-18쪽

슬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대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나를 미워하고 그대를 사랑하거나 그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거나 갈래갈래 끊어진 길들은 그대의
슬픔입니다 나로 하여 그대는 시들어갑니다-79쪽

이별1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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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 자연 - 정선의 진경산수화로 배우는 옛 그림 학교 3
최석조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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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친구의 딸에게 주려고 샀던 책이다. 선물로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읽다 보니 아주 재밌었고, 친구를 만날 때까지 다 읽지 못해서 결국 친구의 딸이 아닌 내 책이 되어버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마음에 드는 결과라고 할까.^^

 

이 책 아트북의 옛 그림 학교 시리즈는 우리 조상들이 그린 옛 그림을 읽어주는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앞서 '김홍도의 풍속화로 배우는 옛 사람들의 삶'과 '신윤복의 풍속화로 배우는 옛 사람들의 풍류'에 이은 세번째 시리즈다. 초등학생과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아주 친근한 말씨와 어렵지 않은 설명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마치 정선의 그림 속으로 뛰어들어간 것처럼 생생하게!

 

정선의 그림은 유명한 게 워낙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이 그림의 장엄함은 특히 인상적이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저 가사로 익숙한 금강산의 모습이다. 노래 가사처럼 정말 일만 이천봉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하겠다.^^

정말 금강산의 봉우리는 1만 2천개일까요? 이렇게 알려진 건 금강산의 이름과 관련 있습니다.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 “동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는데 법기보살이 1만2천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구절이 있거든요. 여기서 1만 2천봉우리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만큼 산세가 험하고 다양하다는 뜻도 되겠지요. 실제로 금강산에는 1000m 이상 되는 봉우리만도 100개가 넘는답니다. -15쪽

 

일만 이천봉우리는 아니더라도 금강산을 실제로 본다면 그 절경에 입이 쩍 벌어질 것만 같다. 살아서 금강산에 오르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고, 금강산을 직접 보면 소원을 이룬다는 말까지 생겼으니, 이 산이 얼마나 경탄의 대상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금강산 때문에 머리 깎고 속세를 떠나려고 하였을까.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출발해서 보통 4~5일이면 금강산에 도착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단발령이란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이곳에 오르면 저 멀리 금강산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단발령은 ‘머리를 깎는 고개’라는 뜻입니다. 처음 마주치는 금강산의 절경에 감탄한 나머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금강산에 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그래서 화가들도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을 즐겨 그렸습니다. -32쪽

 

다시 그림을 보자. 사계절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던 금강산! 이중 '금강산'은 봄의 이름이고, 여름엔 신선이 산다는 뜻의 '봉래산', 가을엔 '풍악산', 그리고 저 그림의 모델이 되어준 계절인 겨울엔 뼈를 드러낸 것 같다고 해서 '개골산'이라고 불렸다. 이름 탓인지 그림의 산이 더욱 앙상하게 느껴진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왼쪽과 오른쪽 산의 풍경이 무척 달라 보인다. 왼쪽 산은 나무가 울창하고 오른쪽은 바위 봉우리들이 뾰족뾰족해서 영어 이름 '다이아몬드 마운틴'을 연상시킨다. 왼쪽은 육산, 오른쪽은 골산으로 보면 된다. 자세한 설명을 옮겨 보면 이렇다.

골산은 바위산을 가리킵니다. 마그마가 그대로 땅속에서 굳어져 생성된 화강암이 오랜 세월을 거쳐 땅 위로 드러났지요. 아름답기는 하지만 식생이 빈약합니다. 설악산, 관악산, 인왕산은 골산에 속합니다. 육산은 흙이 많이 뒤덮인 산을 가리킵니다. 흙산이라고도 하는데 완만한 산줄기에 숲이 울창하며 여러 가지 식생이 잘 발달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육산으로 지리산을 꼽지요. -19쪽

한 글자의 한자가 그림 속 산의 풍경을 잘 표현해 주었다. 이름으로 다가가니 산이 살아있는 인격체로 느껴질 정도다.

 

정선은 이 그림을 금강산에 다녀온 후 무려 22년 만에 그렸다. 이렇게 정교한 그림을 어찌 그렇게 오랜 시간에 뒤에 그렸나 놀라울 법하다. 하지만 정선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그려본 게 아니었으니까.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수도 없이 그려보았다.

 

금강산은 멀고 험해서 쉽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금강산 유람이 유행처럼 번집니다. 너도나도 앞 다투어 유람을 떠났지요. 여행이 끝난 후에는 무얼 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행 중에 찍었던 사진을 꺼내보며 추억을 되새기겠지요. 선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을 더듬으며 그림을 감상하지요. 이렇게 방 안에 앉아 그림을 한 장씩 펼쳐보는 일을 와유(臥遊)라고 합니다. ‘방 안에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려면 썩 잘된 그림을 구해야 합니다. 바로 정선이 선비들 입맛에 쏙 맞는 그림을 그렸지요. -26쪽

만화가가 같은 얼굴의 주인공을 계속해서 그려낼 수 있는 것처럼 정선 역시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금강산을 방금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수없이 그렸던 경험과 감동의 기억을 더듬어서 말이다.

 

이 책은 2박 3일 동안 정선의 그림 세계를 여행한다는 취지로 구성을 했는데, 첫째날의 주제가 금강산이었다. 그리고 여행 사이사이에는 마치 휴게실에 들러서 잠시 쉬어가는 것처럼 다른 주제를 하나씩 담아냈는데, 그 첫번째 휴게소에서는 동물 그림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 중 내게 인상깊었던 그림은 이것이다.

 

 

 

어라? 고슴도치 등에도 오이가 한 개 얹혔군요. 어쩌다 등에 떨어진 것이라고요? 하하하, 고슴도치가 직접 딴 것이랍니다. 오이 위에 그대로 뒹굴면서 가시를 이용해 포크처럼 쿡 찍어 따지요. 그래서 ‘고슴도치 오이 걸머지듯’이란 속담도 생겨났답니다. 남에게 진 빚이 많다는 뜻이지요. -49쪽

포크처럼 콕! 찍어서 오이를 나르는 고슴도치의 모습이 재밌다. 나름의 신성한 노동이 아니겠는가! 이 그림에는 많은 자식을 계속해서 주렁주렁 낳으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쭉쭉 뻗은 오이 넝쿨과 셀 수 없이 많은 고슴도치의 가시가 바로 그 뜻을 보여주고 있다.

 

정선이 그린 내금강 그림 중 '백천교'도 눈길을 끌었다. 까닭은 그림 속 가마중 때문이다.

 

 

 

금강산의 절에 사는 스님들이 선비들이 탄 가마를 메기 위해서 대기 중이다. 참으로 천대 받고 괄시 받던 조선 승려들의 처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에 대한 복수일지 모르겠지만, '백천교' 그림에는 다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림 제목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다리가 없는 곳은 필시 선비들도 발을 적시며 건너야 할 것이다. 물론, 하인 등에 업히는 방법을 택할 인사가 더 많을 것 같기는 하지만!

 

 

 

지난 5월에 간송미술관에서 정선의 그림들을 보았다. 그때 보았던 '총석정'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날 수가 있었는데, 덕분에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해금강에는 육각형의 돌기둥이 다발로 묶여 세워져 있는데, '총석'이란 돌 다발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총석적은 그 옆에 있는 정자를 말한다. 육각 돌기둥은 지각 변동으로 생긴 것이다. 바위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풍화된 것인데, 금강산의 화강암과 달리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용어로 '주상절리'라고 하면 되겠다. 아직도 가보지 못한 제주도! 그곳에 가서 저런 모양의 돌기둥을 보게 되면 그땐 또 다시 정선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첫째날의 주제가 금강산이었다면 둘째날 여행의 주제는 수도 한양이었다. 정선은 한양이 곳곳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송파 나루의 모습이다. 유유히 떠가는 배의 모습도 눈길을 사로잡지만, 송파진에 대한 설명에 눈길이 더 꽂혔다.

 

송파진은 한양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중요한 나루터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10대 상설시장이 세워질 만큼 붐비던 곳이지요. ‘임금님께 진상하던 꿀단지도 송파를 거친다’는 속담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왜 이렇게 붐볐냐고요? 한양 4대문 안의 상권을 독점하던 시전상인들에게 밀려난 영세 상인들이 이곳에 송파장을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송파장의 규모가 커지자 시전상인들이 송파장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송파상인들이 아니지요. 구파발·애오개·녹번·아현 등에 있던 놀이패를 끌어다가 산대놀이를 공연했거든요. 이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장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지 뭡니까. 그런 송파진이 지금은 왜 사라지고 없을까요? 홍수 때문에 자주 물이 넘치자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송파진은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바로 지금 놀이공원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도 나루터가 있던 흔적은 남았습니다. 놀이공원 옆 석촌호수 말입니다. 바로 이 석촌호수가 바로 송파진이 있던 흔적이랍니다. -101쪽

이제 롯데월드를 가게 된다면, 그래서 자이로드롭을 타서 멀리 석촌호수를 바라보게 된다면 정선의 이 그림을 떠올릴 수 있을까? 긴장으로 손발이 오그라들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건 무리겠다. 그래도 땅을 다시 밟으며 안도의 숨을 내쉴 때 석촌호수와 송파진을 함께 떠올린다면 좋겠다. 혹시 마음이 평화로워질지도 모르니까.^^

 

아마 김홍도나 신윤복이었다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송파장을 더 선호하며 그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비 체면에 풍속화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을 터! 정선의 입맛에는 풍속화보다 산수화다. 그것도 진경산수화!

 

 

 

드디어 기다리던 그림이 나왔다. 내가 보지 못한 금강산보다 내가 본 인왕산을 그린 이 그림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두 그림 모두 리움미술관을 가야 하지만, 비온 뒤의 인왕산을 직접 보는 쪽이 더 끌린다. 물론, 비오는 날의 산행은 좀 두렵긴 하지만... ^^

 

셋째날의 그림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주제를 가졌다. 금강산과 한양을 제외하고도 정선의 그림 소재가 된 곳은 조선 팔도에 널려 있었다. 그중 그림이 소리를 재생시켜주는 효과를 주는 멋진 그림이 있다. 바로 박연폭포다.

 

 

 

 

 

같은 소재지만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나는 박연폭포, 하나는 박생연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폭포수가 떨어지는 물길 옆의 정자와 오른쪽 위의 성문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래도 저 장대한 물줄기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그 힘의 파괴력이 그림 밖으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당장 이무기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모양새다. 힘있는 그림에 거칠고도 섬세한 붓질이다.

 

 

 

수많은 그림을 그렸던 정선이지만 자신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을까? 이 그림을 보자. 부채를 든 선비가 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서 꽃을 감상하고 있다. 책장엔 책이 가득하고, 그 앞에는 그림이 걸려 있다. 선비가 들고 있는 부채에도 그림이 옅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이 실린 것은 '경교명승첩'이라는 화첩이다. 그것도 제일 첫번째 그림으로 실려 있다. 이병연과 정선이 서로 시와 그림을 교환하며 만든 화첩에 첫 장에 실렸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정선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병연이었다면 책장 앞에 그림이 아니라 시가 걸려 있었을 테니까.

 

자세히 보면 그림은 아주 많은 정성을 기울인 표시가 난다. 책장의 꽃무늬, 마루의 결, 돗자리의 촘촘한 무늬도 꼼꼼하게 담아냈다. 선비를 상징하는 난과 부귀영화를 뜻하는 모란꽃이 한자리에 있어 선비다우면서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도 그림에 비친다. 참으로 솔직한 그림이다.

 

 

 

 

'목멱조돈'이라는 제목이다. 남산 해돋이란 뜻이다. 정선은 이 그림을 서울 한복판에서 보고 그린 게 아니라 강서구 가양동 근처에서 보고 그렸다. 당시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붉은 해가 산 중덕에 걸려 있지 않고 비켜서 걸쳐 있다. 그런데 그 편이 더 운치가 있다.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서울시 엠블럼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호라! 정말 그럴싸하다. 알고 보니 참 반갑다.^^

 

 

 

 

부록같은 코너에서 소개받은 조선 양반들이 쓰던 모자다. 천원짜리 지폐와 오천원짜리 지폐에 등장하는 모자를 비교해 보시라.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사모'의 날개가 아래로 쳐졌는데, 성종 이후로는 평행을 유지하는 모양새로 바뀐다. 사극을 자세히 보면 그 변화를 눈치챌 수 있다.

 

 

진경산수화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정조의 그림이어서 특별히 애정이 가서 한컷 찍어봤다. 이 재주많은 임금님은 이리 잘 하는 게 많아서 명이 짧으셨나... 조선 시대 기준으로는 단명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움에...^^;;;;

 

책 속에서 옮겨 적은 내용 중에 또 마음에 드는 대목을 옮겨본다.

 

4대문에 얽힌 이야기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둘레에 17km의 긴 성을 쌓고 출입문인 4대문과 4소문을 만들어 저녁 10시에 닫고 새벽 4시에 여는 통행금지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정식 명칭은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정문 또는 숙청문,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입니다. 4대문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인데, 유교의 다섯 가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방위에 맞게 나타냈지요. 숭례문은 ‘예를 숭상한다’, 흥인지문은 ‘인을 일으킨다’, 돈의문은 ‘의를 돈독하게 한다’입니다. 북쪽도 원래는 지혜 ‘지’자를 넣어 홍지문으로 하려 했는데 백성들의 지혜와 지식이 늘어나면 왕실이 위태롭다고 하여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자를 사용하지 않은 건 지혜는 ‘인의예’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보물 1호인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 달리 이름에 갈 지(之) 자가 들어갑니다. 흥인지문이 위치한 곳의 지형이 낮아 ‘갈지’ 자를 넣어 약한 기운을 보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신(信) 자는 바로 종로 한가운데 있습니다. 바로 보신각입니다. 원래 ‘신’자의 방위가 가운데라 중심에 보신각을 지었지요. -135쪽

이런 설명과 마주칠 때면 불타버린 숭례문이 다시금 안타깝기만 하다. 복원된 숭례문을 예전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한양의 풍수지리

한양은 크게 바깥의 4개 산(외사산)과 안쪽의 4개 산(내사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외사산은 동쪽의 용마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북쪽의 북한산이고, 내사산은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을 말하지요. 한양을 둘러싼 17km의 성곽을 바로 이 내사산을 연결하여 쌓았습니다.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 서쪽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궁궐을 동향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개국공신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쪽의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남향으로 자리 잡은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양은 주산인 북악산을 중심으로 청룡인 낙산(125m, 일명 타락산), 백호인 인왕산(338m), 주작인 남산(265m, 일명 목멱산)의 맥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입니다. 내사산에서 시작된 물이 한데 모여 서울의 내수인 청계천을 이루고, 청계천은 중랑천과 합쳐져 외수인 한강과 만나게 되지요. 이처럼 한양은 산세가 빼어난 여덟 개의 산과 여러 줄기의 물이 한데 어우러진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한양의 ‘양’은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산은 북악산, 강은 한강을 가리킵니다. - 149쪽

21세기를 살면서 풍수지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명당 관련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오늘은 시내에서 타로점 치는 집이 유독 눈에 띠어서 유혹을 느꼈는데, 그것도 혹 이런 관심사를 반영한 것일까? ^^

 

내가 읽은 그림책의 넘버 원은 언제나 '오주석의 한국의 미특강'이었다. 앞으로도 그 순위는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그 책을 넘어서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한 종류의 재미와 감동을 주는 책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 책도 독서 대상으로 삼은 연령대를 고려한다면 무척 즐겁고 의미있는 책읽기였다. 그럼에도 별점이 다섯이 아니라 넷이 된 것은 편집 상의 아쉬움과 몇몇 오타 때문이다. 내가 만나지 못한 이 책의 시리즈 1,2권도 찾아볼 생각이다. 애정을 담아서!

 

*

43쪽 설명에 '몽고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은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라고 나와 있다. 몽고는 '몽골'로 고쳐주면 좋겠고, 팔만대장경은 '장경판전'으로 바꿔야겠다. 유네스코는 움직일 수 있는 유물이 아닌 움직이지 않는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팔만대장경이 훌륭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 훌륭한 대장경을 이렇게 완벽하게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을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119쪽에는 영지버섯이 '생각대로 되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며, 새해 인사용 그림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런데 영지버섯이 들어간 그림은 제목이 '노송영지'인데 책에서는 앞서 나온 그림 '노백도'라고 표기했다. 수정해야 마땅하겠다.

 

121쪽 이인좌의 난 설명에서 청주성을 정령하고라고 적었다. '점령하고'로 고쳐야겠다.

 

179쪽에서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을 소개했다. 감사가 곧 관찰사이니 아래쪽 평안도 관찰사라고 쓴 것처럼 '평안감사'로 고쳐야겠다.

 

215쪽에 '조선중화중의의 결과라는 의견과'라는 구절이 있다. '조선중화주의'의 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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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2 0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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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3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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