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희 10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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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 10권이 나왔을 때, 드디어 내가 인터넷 연재분으로 본 것 다음을 보게 될 줄 알았다. 팝툰 연재 시절부터 단행본으로 구입했는데, 팝툰 잡지가 폐간되고 나서 다음 연재할 때 인터넷으로 보았고, 그후 한동안은 그 연재분이 단행본으로 나오는 걸 지켜보았다. 가장 중요한 내용, 즉 설희의 비밀이 드러난 지점까지 무료 연재였고, 이후 유료로 전환되면서 단행본 나오길 목빠져라 기다렸다. 일년 더 기다린  것 같은데 속상하게도 이번 단행본도 딱 내가 본 부분까지다. 그 후 진행 상황을 모른다. 아흐 동동다리....;;;;


뭐, 여태 기다렸는데 더 못 기다릴까. 11권을 다시 목메어 기다려야지.ㅡ.ㅜ


설희 10권의 내용은 10권 분량 중에서 가장 속시원하기도 하고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매번 최악으로만 치닫는 현실에 끌려다니기 바빴던 세라가 설희를 만나면서부터는 조금씩 변해 갔다. 좀 더 주체적인 모습을 보였고, 조금 더 제 감정에 솔직해졌고, 자신에게 다가온 행운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제일 바랐던 모습은 세라를 호구로 여기는 아영이에게 한방 먹여주는 거였다. 이번에 드디어 해냈다.



그렇다고 머리끄댕이 잡고 싸운 것도 아니고, 뺨을 날려준 것도 아니지만, 밟는다고 밟히는 상대가 아니란 걸 제 목소리로 드러냈다는 게 중요하다. 그 잘난 여시 아영이도 금세 꼬리를 내린다. 자기한테 유리한 패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 아이도 외롭고 못난 성정 탓이라는 걸 알지만 본인이 자초했으니 가련하게 여기진 않으련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기가 어딘지 바로 생각나지 않는 설희의 모습이다. 그럴 수 있겠다. 무려 400년 이상을 살아왔는데, 100년 남짓 사는 인간들의 하루와, 400년을 살고도 앞으로 400년 더 살지도 모를 설희의 하루가 같을 수 없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상대는 전생에 자신의 남편이었고, 환생해서 현남친으로 있는 사람이다. 애증이 교차하는 상대이기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걸 세이는 모르니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면 되지만, 긴 시간의 터널 속에서 외로이 갇힌 설희의 입장은 얼마나 복잡할까.


뱀파이어든 외계인이든... 인간의 시간을 뛰어넘어 사는 불멸의 존재라면, 그런 존재가 적어도 둘은 되어야 할 것 같다. 나홀로 그렇게 외로이 외로이 오래 살라고 하면, 그것도 참 못할 짓이지 싶다. 호기심도 생기고 탐이 나기도 하지만, 적어도 파트너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이렇게 생각하니 다시 '나의 지구를 지켜줘'가 떠오른다. 우리 집에 나혼자만 살아남았다고 가정해도 끔찍한데, 우리 동네, 우리나라도 아니고, '행성' 하나에 자기 혼자만 살아남아서 십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 사람의 절망과 외로움이라니....


각설하고, 다시 설희로 돌아가 보자.



아라시는 지독히 우울하다. 실제로 우울증을 앓고 있고, 끝없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세라는 아깝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 유난히 가슴 떨려하고, 그 긴장감마저도 기뻐하는 세라를 보고 있노라면 두 사람의 시간이 좀 더 허락되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김밥 말던 중이어서 장갑 끼고 있던 세라에게 앞치마를 둘러주는 모습이다. 일상생활에서 등장할 수 있는 디테일한 설정이다. 게다가 로맨틱해! 상대가 음악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근사하다. 일본어로 나올 곡이지만, 한국에서는 세라가 입힌 가사로 불러주겠다는 달콤한 약속. 그야말로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노래가 탄생하는 것 아닌가. 캬아, 멋지다!



드라마 별그대와의 공방전이 없었다면 이 사진은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 날짜로 인터넷 검색창에 집어넣으면 설희와 별그대가 함께 뜬다. 이 장면을 보니 인터넷 연재 당시 섬뜩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때도 end of part라는 대목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지금 이 시간이면 별그대 마지막회 방송이 끝나고 한참 후기가 쏟아질 때겠지. 아직 마지막회는 보지 못했다. 어쩐지 설희 신간을 먼저 읽고 보고 싶었는데, 그 신간이 내가 이미 본 거라서 구간 느낌이 되어버렸지만, 왠지 그게 순서일 것 같아서 말이다.


법정까지 가게 생긴 이후로 어느 사이트에서 한참 시끄러웠다. 자칭 만화 쫌! 읽어봤다면서 강경옥 작가를 듣보잡 취급하는 애를 보며 우스웠다. 정말 강경옥 작가를 모른다면 넌 만화 좀 본 사람이 아닌 거란다.ㅎㅎㅎ


학창시절에 좋아하던 작가들이 많았다. 신일숙샘, 이미라샘은 지금 무엇하고 계실까? 신일숙 작가님의 책은 애장판으로 복간이라도 되고 있지만 이미라 샘은...ㅜ.ㅜ 

그래서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해 주시는 황미나 샘과 강경옥 샘이 고맙고 존경스럽다. 황미나 샘은 보톡스로 영화 감독 데뷔도 하신다고....(이건 좀 우려스럽지만... 더 파이브 어째...;;;;)


자신의 색깔을 흔들리지 않고 유지하시고, 독특한 세계관을 계속 확장해 나가는 강경옥 샘께 파이팅을 외쳐 본다. 그런 의미에서 11권은 좀 빨리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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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2-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아르미안의 네딸들, 별빛속에 이런거 다시 보고 싶을때가 있긴해요.
인어공주를 위하여 보면서 만화방에서 목노아 꺼이꺼이 울었던 기억도 나네요. ㅎㅎ

마노아 2014-02-28 23:56   좋아요 0 | URL
정말 명작들이죠. 작가님들의 리즈 시절이네요.
별빛속에 결말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레디온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저도 목놓아 울었었네요.^^;;;

건조기후 2014-02-28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10권까지 있었네요. 저 어제 9권 주문한 거 받았는데... 이런 눈빙신 ㅜㅜ
별그대를 한번도 안 봐서 설희랑 얼마나 비슷한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뒤늦게 몰아보자니 엄두가 안 나고.. 훔.
강경옥 블로그는 말 그대로 난리더군요. 에혀... 표절문제를 떠나 개념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빠순빠돌이들때문에 상처받지 않으셨음 좋겠다고 댓글 썼는데 바로 묻혀버렸던.. 댓글 늘어나는 속도가 진짜 무서웠어요 ;;

마노아 2014-02-28 23:58   좋아요 0 | URL
별그대는 초반에 무지 재미 있었어요. 이렇게 소모적인 논쟁으로 갈게 아니라 제대로 절차 밟고 쿨하게 나갔으면 드라마도 더 잘됐을 것 같아요. 중간에 엄청 산으로 갔거든요. 결과적으로 결말도 좀...;;;;
만화가 분들은 번번이 이런 일들을 당하고 당하는구나.... 싶어서 더 안타까웠어요. 우리 사회에서 만화는 여전히 참 평가절하되고 있어요...;;;;

무스탕 2014-02-2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아직까지 활동해 주시는 강경옥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사실 저 같은 경우는 설희를 아직 안 봤어요. 별그대를 먼저 본 경우지요.
이건 표절이다 아니다는 둘째치고 참 입맛 쓴 이야기에요.
드라마 시작 전부터 표절 시비가 붙었었는지 드라마 시작하고 불거져 나온건지 순서는 모르겠지만 뭔가 문제가 있는건 맞는거 같아요.
이런데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 라는 말을 갖다 붙여도 되는건지 모르겠지만 드라마 작가보다는 제가 애정하는 울 강경옥님 마음 많이 다치지 말고 일 풀려 나가는데 많이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건 글쿠, 나도 빨리 설희 봐야지... ( ")

마노아 2014-03-01 00:01   좋아요 0 | URL
저는 드라마 처음 방영되고 바로 설희 떠올렸어요. 어제 엔딩 방송 보면서는 시간여행자의 아내와 별빛속에 떠올렸구요. 어쩜 좋아요...;;;;;;
장르가 많이 달라서 참고했다, 정도로 인정하고 저작권료 지급했으면 서로 좋았을 텐데요.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 만들 때 한 남자가 영문도 모른채 갇혀 있었다는 설정만 갖고 왔지만 저작권료 지불하고 원작이 있다고 말했거든요. 두 작품은 그 설정 하나만 닮았음에도요. 더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작가님이 스스로 걷어찬 게 아닐까 싶어요. 애정하는 배우들 때문에 즐겁게 보았지만 매번 입맛이 썼어요...;;; 어쨌든, 이제 끝났네요.^^
 
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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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작가의 우화집이다. 아주 직설화법으로 무장한!


뭐든지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대표를 뽑을 때는 물론이고, 
집이나 음식을 나눌 때도,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할 때도 사람들은 가위바위보를 했습니다.
연달아서 이기거나 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규칙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영원히 지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 사람, 이 규칙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 마을의 위험한 일을 맡았다가 손을 다친 후로 주먹을 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한 동안은 주먹만 내는 것으로도 웬만큼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서히 그가 주먹밖에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그와의 대결에서는 모두가 보자기를 내었습니다.-45쪽


마을의 위험한 일을 하다가 다친 거였는데 마을의 누구도 그의 억울함을 돌보지 않는다. 억울하면 법을 바꾸라고 한다. 근데 그 법을 바꾸려면 가위바위보에서 이겨야만 한단다.



결국 영원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사회의 법같지 않은가. 가진 자를 위해서만 굴러가곤 하는 그런 법들 말이다. 오늘 본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기업에서 보낸 협상가는 정치가 본질이 아니라 경제가 본질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경제를 주름 잡는 대기업이 하는 일에 너희 먼지 같은 것들은 밟혀 죽어도 끽 소리도 내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 회장님은 법을 어기고도 대통령 특사로 친절하게 풀려난다. 영화 속에선 그 장면을 합법적 탈옥이라고 명명했다. 주먹을 펼 수 없는 상대를 향해서 오로지 보자기만 내면서 억울하면 이기라고 말을 하는 이 가혹한 사회. 저 무서운 법을 고집하는 인물의 옷차림이 성직자로 보인다는 것이 더 아찔하다.



검은 고양이에게 잡아 먹힌 흰쥐를 향해 멍청하다고 일갈하는 하얀 고양이가 있다. 어차피 잡아 먹힐 바에는 자기처럼 고귀한 자에게 먹혔어야지 족보도 없이 천박한 검은 쥐를 먹는 검은 고양이에게 먹힌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명예롭게 죽기 위해서 흰쥐들은 자체 회의를 거친다. 그 결과 스스로 나서서 흰 고야잉에게 잡아 먹힌다. 흰 고양이가 힘을 내서 검은 고양이를 물리쳐주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정작 그들은 몰랐다. 옆집에 진짜 검은 쥐가 있기나 한 건지... 걸핏하면 종북 빨갱이를 내세우며 가상의 적을 무장시켜서 공포를 조장하는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런 자들의 경박한 목소리에 달떠서 스스로 제 목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다. 투표 때만 되면 이런 사람들이 늘어난다. 멀지 않은 지방 선거에서 이런 장면을 다시 목격할 것만 같아 벌써 숨이 막힌다. 옆집에 있다는 검은 쥐, 정말 보기나 한 거니? 흰 고양이에게 잡아 먹히면 더 명예로운 것 확실하니? 



잿빛 늑대는 숫자적으로 더 적은 흰 염소만 골라서 잡아 먹었다. 처음에는 늑대만 나타나면 반사적으로 도망치던 검은 염소가 차차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여기며 경계를 게을리 했다. 뿐만 아니라 흰 염소가 여기 있다고 일러 바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흰 염소가 모두 사라지고 난 뒤 다음 사냥감이 된 것은 당연히 그들이었다. 연대해야 할 때 나 몰라라 한다면, 다음 차례는 당신이라는 것... 당신은 늑대가 아니라 염소라는 것... 기억해야 할 것이다. 


냄비 속의 개구리 편도 인상 깊었다.


"요 근래에는 나조차 버티기 힘들 정도로 괴롭긴 했어. 하지만 나는 곧 이것이 단순한 고통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이 고통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서 나는 삶의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되었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자만하며 살았는지 반성하게 해서 겸손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지. 또한 이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자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무한한 용기가 샘솟아 더 이상 무엇도 괴롭거나 두렵지 않게 되었지. 이 고통은 아마도 내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일 거야."
개구리들은 모두 그를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들도 고통을 선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민한 개구리는 고통을 참을 수도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는 냄비를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바보들아, 뜨거운 건 그냥 뜨거운 거야.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뜻일 뿐이라고!"
개구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민한 개구리처럼 불평불만만 늘어놓다가 이 순간의 소중함을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152쪽


냄비의 물이 점차 뜨거워지고 있는데 인내심 강하다고 자부하는 개구리는 이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고 힘주어 얘기한다. 예민한 개구리 하나만이 이건 그저 고통일 뿐이라고 소리를 높이지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사회의 많은 부조리와 불합리함에 대해서 시스템이 문제라고 말을 하면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일축해버릴 때가 많다. 더군다나 각 개인도 그걸 자기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비관하며 스스로 낮아진다. 내일을 소망하며 오늘을 포기할 때, 결국 내일도 영영 오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가?



까마귀들은 자신과 달리 포인트가 있는 깃털을 가진 새들을 동경했다. 그들을 따라하느라고 자신을 내팽개쳤다. 꾀꼬리는 따라할 만했다. 닭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점점 더 화려하고 다채로운 빛깔의 새들을 모사했다. 그러나 공작이 나타났다. 이제 어쩔 것인가.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격이다. 까마귀는 까마귀여서 당당하고 멋진 것이다. 어울리지도 않고 가당치도 않은 공작을 꿈꾸지 말자. 공작은 공작 나름의 열등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여러 편 실려 있다. 오늘의 현실을 과감히 꼬집고 비틀어버리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이곳에 권력과 자본의 횡포가, 대기업의 폭력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우리가 몸으로 체험한 용산의 참사가, 쌍용자동차가,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금은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없어져야 할 이야기들이다. 조삼모사의 원숭이도 되지 말고, 개돼지도 되지 말고, 내것이 아닌 깃털로 위장한 까마귀도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우화가 아니다. 은유도 아니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이고 투시경이고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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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 찾기 2016-09-20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규석 작가님의 저서는
스쳐읽지 않고
다 구매하여 모았답니다ㅋㅋ

마노아 2016-09-24 16:30   좋아요 1 | URL
애정하는 최작가님♡
 
그것이 곧 삶이야.
쉬이이잇!
제이슨 지음 / 새만화책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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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웨잇...'을 무척 인상 깊게 보았다. 어릴 적 자신의 실수로 친구를 잃었던 아이가 한순간에 재채기 한번으로 어른으로 훅 성장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살던 그 아이. 묵직한 그림과 절제된 대사의 제이슨 작품을 다시 만났다. 이번엔 대사가 전혀 없다. 그림으로만 이야기한다. 모두 열 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첫번째와 두번째 이야기가 유독 좋았다. 



퐁당 한 번으로 인연을 맺게 된 두 사람. 그러나 사신은 매의 눈을 한채 이들을 지켜본다. 행복했던 순간이 지나가고 병석에 누운 아내. 



그 아내의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서 사신과의 싸움도 불사한 남편이 있다. 



사신을 떨쳐내고 무사히 아내를 구출했건만, 아내는 병석에서 일어난 대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야말로 허망한 인생이다.

실제로 벼락을 맞고도 목숨을 건졌던 한 여인이, 벼락 사고 몇 시간 뒤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기록을 전에 본 적이 있다.

어릴 적에 본 어린이 명작동화에서는 머리 맡에 사신이 와 있는 걸 목격한 남자가 여자의 목숨을 살리려고 침대의 위치를 한순간에 확 바꿔버려서 여자는 살렸는데, 그 바람에 자신의 생명 촛불과 뒤바뀌어 목숨을 잃었던 내용도 떠오른다. 


내가 참 좋아하는 어느 만화가 분이 암으로 투병 중이시다. 젊은 탓이었을까. 전이가 되었고, 힘든 치료를 받고 계시는데, 홈페이지의 글을 보니 항암을 포기할 것처럼 보인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인간이 손댈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병해 주셨으면 한다. 이 작품을 보니 더 그분 생각이 간절해졌다.



해골로 표현된 죽음의 그림자. 이번엔 사신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해 봐도 되겠다.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그래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너무 편해져버린 탓일까. 사신은 직무유기를 해버린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날, 지켜보던 동반자는 죽을을 맞는다. 아찔했고 아뜩해졌지만, 사신은 곧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의 새로운 동반자를... 사신이 직무유기를 하든, 열심히 지켜보든, 정해진 목숨의 유예기간이 달라지진 않을 것 같지만, 끝까지 외롭지 않게 두눈 뜨고 잘 지켜봤으면 좋겠다.


볼프 에를브루흐의 '내가 함께 있을게'가 떠오른다. 외로움에 사무신 사신이 나오는 그림책이다. 


나머지 여덟 편의 이야기에도 줄곧 그렇게 인생을 이야기한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누군가를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 무료함에 무엇이라도 도전해 보지만 여전히 똑같은 일상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아이가 자라고 어느덧 성장해서 부모의 곁을 떠나는,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인생을 이야기한다. 


글이 없어서 빨리 읽을 수 있지만, 그림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야 하는, 천천히 음미해야 하는 그런 작품이다. 그 느림의 기다림이 즐거운 책이다. 쉬이이잇! 조용히, 내 인생의 소리를 들어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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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남매맘 2014-01-18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도 글자 없는 그림책이나 만화책 읽는 것을 더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도 그렇구요.
이 만화책 울림이 있네요.

마노아 2014-01-19 01:05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글자가 없는 그림책들은 해석의 여지가 많은 것이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어렵기도 해요. 그걸 아주 쉽게 표현해내는 데이비드 위스너가 참 좋아요. 이 작품도 좋았지만 전작인 '헤이 웨잇'은 더 좋았답니다.^^
 
에뷔오네 Evyione 12 - 완결
김영희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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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에뷔오네가 12권으로 완결이다. 7년에 걸친 긴 연재기간 끝이다. 아 시원섭섭한 이 마음!



인어왕은 최대 숙적에게 정체를 들켜버렸다. 아니, 놈은(왕자님께 '놈'이래.ㅎㅎㅎ)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시커먼 놈!(멋대로 시커멓대..ㅎㅎㅎ)


내지 컬러 그림처럼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며 마지막 권을 읽었다. 2014년에 읽은 첫번째 만화책이다. 어쩐지 더 두근두근!



인어왕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계산했다면, 그렇게 신사적이고 그렇게 정직하고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에뷔오네 공주와 멀리멀리 떠났을 것이다. 그의 능력을 이용하여 선의를 베풀고, 그로 인해 자신이 위험해지는 일 따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러니 고초는 예정된 수순이다.


이 장면이 참 좋았는데,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그녀에게 새생명이 돌아오는 것이 그림으로도 느껴졌다.

눈밑에 생기가 돌고, 가슴 깊이 새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느낌의 생명력 넘치는 그림이다.

조연 중의 조연인 그녀가 모처럼 빛나던 순간!



저 나쁜 놈이 아직 살아있는 줄 몰랐다. 인어왕이 그래도 이성이 남아 있었구나. 단번에 머리통을 부숴버린 줄 알았는데 멀쩡히(는 아니지만) 살아있다. 이런 놈은 살려두면 꼭 나쁜 짓을 더 하고 만다. 그렇게 이야기는 진행시키지만 독자의 울화통을 치미게 만드는 나아쁜 인물 되겠다!



공주의 결혼식 드레스다. 무척 기대한 것에 비해서 뒤태가 안 예뻐서 살짝 실망.그렇지만 앞모습은 예쁘다. 영혼없는 표정도 적당하다. 그런 공주가 더 예뻐 보이니 왕자님은 가슴에서 불이 일어나겠지. 이렇게 인간의 희노애락에 절절히 매달리는 인물이 어찌 성직자가 되려고 했을까. 테스였던가? 성직자가 되려다가 결국 여자에게 미쳐서 다시 세속으로 돌아왔던 인물이... 하긴, 주홍글자의 딤즈데일 목사님도 그러했지. 애욕전선 이상 없다...랄까.



왼쪽의 인어왕은 원래 누워 있는 사진이어서 반시계 방향으로 90도 틀어야 하지만 오른쪽 그림과 붙여서 삽입하느라고 인물을 바로 세웠다. 우리의 인어왕은 어느 각도로 보나 완벽하다! 앙트완 왕자님의 썩은 표정도, 각잡힌 주름의 의상도 마음에 든다. 왕자의 성품만 마음에 안 들어!


자자자, 스포일러 말 안 하려고 무지 애를 썼다. 과연 공주는 원작처럼 왕자님과 결혼을 할까? 그 바람에 사랑을 택한 인어왕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을 맞아야 할까?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지금껏 이 작품을 기다려왔다. 


좀 조심조심하는 마음으로 읽어갔는데, 다 읽고 나서 조금 아쉬웠다. 뭔가 좀 더 확실한 복수(?)를 해주지 못한 찝찝함이랄까.

우리의 인어왕이 더 멋지게 그 위엄돋는 힘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 


누군가는 바다의 괴생물체 취급을 하며 얕잡아봤지만, 오히려 인간이 넘볼 수 없는 고등 생명체가 아니었던가. 인격이나 능력이나 외모나!


한편, 바다마녀도 안타깝다. 흔히 생각하는 '마녀'의 외모가 아니라 섹시한 글래머로 나온 것은 좋았지만 여전히 짝사랑만 하는 그녀가 가여웠다. 바다마녀와 사랑을 하는 이야기는 아니 나오려나...



후기에 나온 놀라운 이야기! 아니, 앙트완과 스타이너가 그런 관계였어? 스타이너의 고모가 앙트완의 엄마라는 거니까, 둘은 고종사촌이란 건가???


이제 완결 났으니까 1권부터 정주행하는 일만 남았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떡밥과 단서들을 마구 찾아내며 재밌게 읽으련다. 


김영희 작가님 고생 많으셨어요~ 마스카 애장판과 열왕기 후속작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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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4-01-0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요, 이 책을요, 1권부터 차곡차곡 사 모으다 드디어 읽었다는거 아닙니까?!
12권으로 완결이라는 소식 듣고부터 읽기 시작해서 지난 금요일에 12권까지 다 읽었어요.
정말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특하지 뭡니까?
7년을 사 모으다 한 방에 읽어버리기!!!
마노아님 말씀대로 다시 한 번 정독해야지요.
책 날개에 적은 김영희 작가님의 그때그때 기분도 음.. 하면서 읽었고 그림들도 +_+ 하면서 봤고
02의 주저리도 킬킬거리며 읽었고 어시 신과의 대화도 재미있었어요.
끝끝내 말을 아끼는(--;;) 왕님이 밉기도 하네요.

아~ 끝났어. 속 시원해~~ :D

마노아 2014-01-06 21:07   좋아요 0 | URL
헉, 리플 달고 저장 버튼 눌렀는데 로그인이 풀리면서 글이 날아갔어요. 아흐 동동다리..ㅜ.ㅜ

7년 동안 꾸욱 참으셨다니, 그야말로 인동초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ㅎㅎㅎ
저도 이번에 다시 읽으면 미처 못 알아차렸던 깨알 재미가 많이 발견될 것 같아요.
결말도 알고 있으니 이제는 앙트완 왕자 같은 인물도 좀 갸륵하게 여기고요~ ㅎㅎㅎ

그러고 보니 비밀은요? 그것도 완결 났는데...
저도 열심히 읽다가 마지막 두권은 사두고 아직 못 읽었어요.
이것도 조만간 읽어야지요. 읽을 게 늘 많네요. 하하핫^^

무스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올해는 서재에 글도 자주 써주세요.^^

후애(厚愛) 2014-01-08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엉~
보관함에 담아두고 나중에 다 구매하려고 했더니 품절이네요.ㅠㅠ
만화는 금방 품절이나 절판이 되는 것 같아서 속상해요..ㅠㅠ

행복한 하루 되세요~*^^*

마노아 2014-01-08 17:00   좋아요 0 | URL
그쵸? 만화책은 품절이 빨리 되어서 안타까워요. 역시 믿을 것은 중고샵 밖에 없나봐요.
중고 등록 알림 서비스 해놓고 기다려 보셔요. 저도 그렇게 모은 책들도 꽤 된답니다. 하하핫^^ㅎㅎ

BRINY 2014-01-1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공작은 결국 어떻게 된 걸까요?????

마노아 2014-01-19 23:49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공작은 죽은 것 같아요.-_-;;;
세이렌들이 바다에 빠진 사람 구하러 간다고 했으니 에뷔 커플과 럼발 백작 등등 말고도 살아난 사람이 더 있을 것 같긴 한데 공작은....;;;;;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페코로스 시리즈 1
오카노 유이치 지음, 양윤옥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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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오카노 유이치는 1950년 생이다. 이미 환갑이 넘은 그는 동글동글한 체형과 대머리 때문에 페코로스(작은 양파)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50년 나가사키에서 출생했고, 젊어서 도쿄에 올라가서 일을 하다가 아내와 이혼 후 아이만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서히 치매가 진행되기 시작한 어머니와의 일상을 네컷 만화로 그려냈다. 지역 정보지에 싣던 이 만화를 자비 출간을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순식간에 전국 서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순수히 네컷 만화만 담긴 것인 줄 알았는데 에세이처럼 글도 나오고 가끔 시도 나온다. '페코로스'라는 말은 입에 잘 안 붙지만,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라는 제목은 무척 애잔한 느낌을 갖게 한다. 처음엔 집에서 어머니를 돌보았지만 결국엔 힘에 부치다는 걸 인정!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의 기억은 점점 소멸되어 가서 아들을 못 알아보는 사례도 무척 많았다. 그럴 때마다 반들거리는 대머리를 내밀면 어머니는 쓰담쓰담~ 만져보다가 아들을 기억해 내고는 언제 이렇게 대머리가 되었냐고 화들짝 놀라신다. 



치매 걸린 엄니도 슬프고, 대머리가 되어버린 자신의 늙어감도 슬플 것 같은데, 페코로스 씨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칭찬 같아서 기쁘고, 그 머리를 찰싹찰싹 때리는 어머니가 덕분에 운동도 된다며 초극강 긍정모드를 보여주신다. 치매 엄니를 돌보는 아들이 갖춰야 할 첫번째 마음자세라는 것이 바로 이 긍정적 수긍이 아닐까.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러 가기 전에 병원에서 출생 당시 아이가 뒤바뀐 걸 나중에 알아차리고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부모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는 무척 슬플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러니까 예전에 가을동화가 이런 내용이었지 않나?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럴 것으로 생각한다.(문근영이 이걸로 뜨지 않았나?) 


그런데 뜻밖에도 영화는 무척 담담하게 진행되었다. '신파'로 흐르지 않아서 무척 좋았다. 이게 우리나라였다면 7번 방의 선물처럼 죽어라 울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관객은 실컷 울고서 감동은 잊은 채 극장을 나왔을 것이다.(난 그랬다.)


이 작품을 보니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눈물 짠하게 뽑아냈다면 잠시 찡하게 울고는 여운은 짧았을 것 같은데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라앉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을 해주어서 긴 여운과 찐한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녹내장 증세가 있는 엄니의 눈에 푸른 상자가 있다는 표현이 인상 깊다. 그 상자 안에는 엄니가 보아온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정작 당신은 그것들을 자꾸만 잊어가고 계시지만......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엄니의 웃음과, 인생의 무거운 짐을 아직 모르는 아기의 해맑은 웃음은 서로 닮아 있다.

원체도 늙어가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습성을 닮아가는 게 인생일진대, 치매를 겪고 있다면 어린아이로의 회귀 속도는 더 빠를 것이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이 나올 테지.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떠오른다.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려버린 수애가 여태껏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병이 진행됨에 따라 드러나는데,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주었던 동료, 자라면서 내내 구박해 오던 사촌 언니에게 묵은 감정을 터뜨렸다. 이 작품 속의 어머니는 그렇게 미운 감정은 마음 속에 많이 담아두지 않으셨나보다. 젊어서 무지 고생시켰던, 지금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남편을 즐거이 기다리고 반갑게 맞아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요양원에서는 엄니와 같은 분들이 여럿 계셨을 것이다. 반가이 마주 인사하고 수다도 잘 떨고 헤어졌는데, 알고 보니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이래놓고 다음에 다시 만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겠지. 마치 오랜 지인이었던 것처럼......



항구에는 크레인이 있었다. 영어 크레인crane에는 '학'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종이학이 떠 있는 항구로 느껴졌다고 한다.

원폭의 피해를 입은 나가사키에는 천 마리 종이학의 기도가 내려오고 있다. 문득 고베 대지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열렸던 첼로 연주가 떠오른다. 이세 히데코의 '천개의 첼로' 말이다. 


페코로스 씨가 도쿄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이혼하고 돌아오던 그때의 마음은 몹시 낙담해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돌아온 고향에는 가족이 있었고 추억도 있었고 미처 알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늦지 않게 돌아왔다고 안도하는 작가의 표정이 눈에 그려진다. 20년 만에 돌아왔더니 그 덕분에 변해버린 모습의 차이점이 신기하고 재밌고, 그 바람에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고향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이 작가의 초절정 긍정 자세는 여전히 힘이 넘친다.



치매에 걸린 덕분에 아버지를 만나곤 하는 엄니. 그 엄님가 기다리는 아부지. 그러니 치매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진심일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생각을 해야 견딜 수 있는 게 치매가 아닐까 싶다. 죽은 지 십년도 더 되는 아부지가 다녀갔다고 말하는 엄니께 좋았겠다고 맞장구 치는 아들의 넉살이 정겹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내복 바람으로 추운 거리를 내달린 아버지의 기억이 찡했다. 내 친한 지인의 아버지는 딸이 오밤중에 굉장히 아팠는데, 아픈 아이를 빨리 병원에 데려갈 생각을 하지 않고, 본인의 옷을 정갈하게 챙겨 입은 뒤 정작 아이는 내복 바람으로 업고 나갔다고 한다. 그 바람에 나중에 아내한테 엄청 욕을 먹었다고...;;;; 아무리 급한 상황에서도 남들의 시선을 더 먼저 의식해야 했던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얼마나 속이 탔을까, 괜히 내가 지인의 어머니 마음에 빙의가 되고 말았다.



간호사들도 환자를 돌보는 데에 베테랑이 되어 있겠지. 엄니의 기억 속 의식은 수줍은 새색시의 그때에 이미 닿아 있겠지. 



원폭을 경험한 나가사키 출생 페코로스 씨. 그리고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겪은 일본인 페코로스 씨. 그런 작가이기 때문에 그가 보여주는 따뜻한 시선이 더 애틋하고, 그가 말해주는 어머니와의 시간에서 깊은 울림을 느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잊어버렸어도 엄니는 살아있다.

대지진을 겪은 이 나라에

다른 살아남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다.

아니, 아버지도- 아버지도 살아 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는 일 없는 가족의 시간 속에 -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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