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셜리 잭슨 지음, 성문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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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일가족이 독살된 블랙우드 저택. 그 끔찍한 사건에서 살아남은 두 자매, 콘스턴스와 메리캣. 그녀들은 외삼촌과 함께 커다란 저택에서 고립된 채 살아간다. 어느 날 저택을 찾은 낯선 남자 찰스. 그녀들의 사촌인 찰스가 나타나면서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저택의 공기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찰스가 악마라고 믿는 메리캣은 그를 몰아내고자 저주의 주문을 외우는데...


헨리 제임스의 '나사못 회전'과 함께 고딕 호러 소설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힐 하우스의 유령'의 작가 셜리 잭슨.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이 소설은 '힐 하우스의 유령'처럼 본격 호러물은 아니다. 심리 스릴러에 가깝지만 스토리 내내 터질 것만 같은 불길함과 낯선 위화감, 그리고 으스스한 살의를 품고 있어서 오히려 '힐 하우스의 유령'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힐 하우스의 유령'때도 느꼈지만 셜리 잭슨의 문장력은 정말 탁월하다. 설명이 아니라 몇 개의 에피소드와 심리 묘사만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그려낸다. 또한 시한폭탄과도 같은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도 허를 찌르는 유머감각이 일품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그러한 장점이 정점에 올라 있는 작품이다.


스토리만 떼어놓고 본다면 잘 읽히고 전후 관계 또한 뚜렷하다. 다만 '나사못 회전'처럼 이 소설도 작품 내적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여러 해석이 나올 여지가 있다. 소설 속 메리캣 가족은 정말로 집 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외삼촌과 언니는 아예 집 밖으로 일절 나가지 않고, 메리캣만 가끔 바깥으로 나가 식료품을 사 온다. 메리캣은 바깥 세계를 자신들을 위협하는 '적'으로 생각한다. 안전지대는 오직 집안이고, 그러므로 언제나 집을 둘러싸고 있는 벽 안에서 꼼짝 안고 사는 게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녀가 그런 강박증을 갖게 된 이유는 실제로 마을 사람들이 메리캣 자매를 마녀 취급하며 조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많은 부분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한다. 사실 메리캣은 어느 정도 작가의 분신과도 같다. 셜리 잭슨도 '마녀'로 매도당한 경험이 있기에 언제나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고 한다. 그녀가 이 소설에서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개인과 집단의 공포'가 아닐까 싶다. 군중 심리란 묘해서 언제나 손가락질할 대상을 찾아 나선다. 실컷 욕하고 조롱하고 마녀사냥을 하는 동안에는 초라한 자기 모습을 잊을 수 있고, 얕은 우월감을 나눠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소설은 사르트르의 '타자는 지옥이다'라는 말에 가장 걸맞은 작품이다. 소설 중반부터 등장하는 찰스라는 낯선 남자는 그 자체로 메리캣에게 지옥이다. 그때까지 잘 지켜오던 침묵의 질서를 찰스는 멋대로 휘젓고 다니며 깨뜨린다. 찰스는 그 자체로 타인과 군중이 가진 공포 모두를 대변한다. 어찌 보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성'에서 안락하게 지내길 원한다. 그 공간을 침해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메리캣이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그녀들의 집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자아'였던 것이다.


작가는 유령이 등장하는 공포소설을 많이 썼지만, 그녀는 유령을 통해 늘 인간의 아이덴티티를 건드린다. 또는 인간을 통해 '실체가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 충격의 라스트를 지나 에필로그에 이르면 '나사못 회전' 때처럼 이 소설이 가진 세계관에 혼돈이 찾아온다. 애초에 메리캣은 누구였을까? 이 소설은 인간의 이야기인가 유령의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유령은, 과연 무엇인가? 셜리 잭슨의 소설답게 많은 상징적인 부분을 되짚어보게 만들지만 그러한 여운을 떠나서 앞서 말했듯 소설은 스토리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가독성과 흥미로움으로 넘쳐난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첨예한 긴장감과 오싹한 공포, 그리고 탁월한 블랙 유머와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셜리 잭슨 최고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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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환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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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봉우리 칸첸중가를 등반하다 눈사태로 사망한 형의 등반 유품에서 칼집이 나 있는 자일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손을 댄 흔적이다. 그렇다면 형은 정말로 눈사태로 죽은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고의로 죽인 것일까? 그러던 중 형과 함께 칸첸중가를 등반한 대원 두 명이 생환한다. 그런데 그들의 증언은 정반대로 엇갈린다. 진실은 무엇이며, 칸첸중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69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최종 후보에 오른 시모무라 아쓰시의 '생환자'는 유메마쿠라 바쿠의 '신들의 봉우리'에 필적하는 산악 미스터리다.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 칸첸중가- 실제로 에베레스트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를 낳는 악명 높은 곳이다. 이토록 지옥 같은 봉우리를 그래도 오르고자 하는 산악인들은 많다. '신들의 봉우리'에서도 느꼈지만 그러한 산악인들의 뼛속에는 산을 사랑하는 순수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 그들은 산을 이기려 하지 않고, 산을 우롱하지 않고, 산을 만만하게 보지도 않는다. 산을 존경하고, 산을 신성시하며, 혈관까지 얼려버리는 설산의 공기마저 깊이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산악인들이 산에서 조난을 당하고 대다수가 눈사태로 죽는다. 그리고 가까스로 생환한 남자. 모두의 이목이 주목되는 가운데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산에서 조난 위기에 처했는데 한 등반가가 구해줬다. 그 등반가 때문에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으나 그의 생존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후 두 번째 생환자가 나타난다. 두 번째 생환자는 첫 번째 생환자와 정 반대의 말을 한다. '첫 번째 생환자를 구해줬다는 그 등반가는 다른 등반팀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 배신자다.' 전혀 다른 두 생환자의 증언. 누구 말이 옳은 것일까? 누군가 거짓말을 한다면 어째서일까? 산악인은 산에 관해 절대 거짓을 얘기하지 않는 법인데!


칸첸중가를 비롯해서 많은 산들의 이야기가 언급되고, 또 산악인들의 생생한 등반기가 히말라야의 폭설처럼 무섭게 휘몰아치지만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미스터리 소설이다.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빙벽과 설산이라는 공간이 그 자체로 외부와 차단된 커다란 밀실이 된다. 그 고립무원의 봉우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실은 차가운 얼음 속에 동결되고, 두 생환자도 입을 다문다. 형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고자 동생은 마침내 죽음의 산, 칸첸중가의 빙벽을 오르는데... 


'신들의 봉우리'를 읽었을 때와 같이 이 소설은 책장을 펼치는 순간 독자를 히말라야 14좌 눈 지옥 속으로 끌어당긴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현장감, 빙벽 등반의 서늘한 공포와 긴장감- 그리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날의 미스터리'. 산악소설과 추리소설의 묘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수백 미터 빙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아찔한 재미를 선사한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은 무섭고, 슬프고, 처절하면서도 따뜻하다. 작가는 그렇게 혹한의 눈보라 속에서도 따스하게 숨 쉬는 인간의 온기를 희망처럼 그려내며 긴 여운을 던진다. '신들의 봉우리'와 함께 강력 추천할만한 산악 소설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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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를 다시 만난다
나카타 에이이치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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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가 눈처럼 세상을 덮던 날, 잔혹했던 우리들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어느 집에 복면강도가 침입, 소녀의 엄마와 아빠를 죽인다. 옷장에 숨어 있던 소녀를 찾아낸 강도. 그때 모르는 아이가 나타나 소녀를 구해 달아난다. 아이가 말한다.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같이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야구공에 머리를 맞고 눈을 떠보니 어른이 되어 있는 소년. 병실 문이 열리고 모르는 아줌마가 나타나 말한다. 너에겐 오늘이 나와의 첫 만남이겠지?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벤치에서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 남자. 눈을 떠보니 20년 전으로 돌아가 있다. 그에겐 사명이 있다. 이제부터 그녀를 구하러 그 집으로 가야 한다.


오츠이치의 또 다른 필명인 나카타 에이이치의 신작 '오늘 너를 다시 만난다'는 판타지와 스릴러가 뒤섞인 퓨전 로맨스 소설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어떤 사건'을 바꾸려 한다는 것은 이제 흔한 타임슬립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츠이치는 역시 남다른 작가였다. 이 흔한 설정을 가지고 이 장르의 공식에 충실하면서도 이 장르가 더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실현시킨다살인이 벌어진 20년 전의 사건을 축으로 돌아가는 스토리는 절묘한 플롯의 묘가 힘을 발하며 뒤로 갈수록 긴장과 공포가 더해진다. 


오츠이치의 소설답게 미로 속을 달리는 듯한 암담한 공포와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중 플롯이지만 초반의 모든 장면이 복선이며, 후반으로 갈수록 모든 복선은 깔끔하게 회수된다. 라스트의 반전과 함께 아련한 감성도 함께 묻어둔 것은 역시 나카타 에이이치의 소설답다. 공포, 스릴, 판타지, 그리고 로맨스까지- 장르소설 팬들이 원하는 재미가 모두 녹아 있다. 누구나 오늘 다시 만나고픈 '그리움'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이제 곧 만나리라는 희망이 우리들의 힘든 하루를 견디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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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시간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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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초등학교 강당에서 강사가 강의를 하던 중 한 청년에게 살해된다. 체포된 청년은 살인 여부에 관한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자백도 속죄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딱 한 마디만 말한다. '이것은 도덕 문제입니다' 13년 후 이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는 이들이 모여 그때 강당에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사건을 재구성'한다.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며, 살인으로 치닫기까지 어떠한 공기가 그곳을 지배했을까? 그러나 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늙은 도예가의 사망 사건이 일어나고, 그 현장에서 이상한 낙서가 발견된다. '도덕 시간을 시작합니다. 죽인 사람은 누구?'


'스완'으로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오승호의 데뷔작 '도덕의 시간'은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으로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작품이다. 이 데뷔작으로 오승호는 단숨에 일본을 대표하는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가로 떠올랐다. '스완'을 무척 재미있게 읽어서 '도덕의 시간'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스완' 못지않게 이 작품도 출발이 너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훌륭한 선생으로 칭송받는 강사가. 강의 도중 한 청년으로부터 칼을 맞고 죽는다. 더구나 청년은 강사의 옛 제자이며, 선생을 무척 존경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청년은 체포되고 15년 형을 받기까지 모든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를 남긴다. '이것은 도덕 문제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청년의 살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정말로 그가 살인범인 게 맞는 것일까? 


소설은 13년 전 그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는 젊은 여자 감독이 팀을 꾸려 그때 그 강당에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장면들로 상당 부분 채워진다. 그와 맞물려 유명 도예가의 사망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이상한 낙서 사건이 교차로 이어진다. 초중반은 상당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과연 두 사건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이며, 두 사건의 연관성은 또 무엇일까? 거기에 더해서 독특한 카리스마를 지닌 젊은 여 감독 캐릭터도 수수께끼를 자아낸다. 여러모로 '스완'과 비슷한 구성이며 그만큼 가독성도 높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13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있고 전혀 다른 사건임에도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도덕 문제입니다', '도덕 시간을 시작합니다' 둘을 잇는 키워드는 바로 '도덕'이다. 소설은 스토리 진행 내내 이 도덕의 문제를 강조해서 다룬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나니 작가가 '도덕'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뚜렷이 알기 힘들었다. 뭐랄까,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내내 들었다. 작가가 의도한 것과 독자가 느낀 바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작품의 흠으로 직결될 수는 없지만- 경악스러운 '라스트 진실'과 맞닥뜨리고 나니 머릿속에 혼돈이 찾아왔다. 미리 말하지만 스토리는 완벽하다. 미스터리의 궤가 딱 맞고, 복선도 빠뜨리지 않고 회수한다. 이것은 스토리의 문제가 아니라, 메시지- 말 그대로 '도덕의 문제'였다. 


여기서 다시, 그렇다면 도덕의 문제란 무엇일까? '도덕이란 무엇일까'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는 무엇일까다. 대학시절 문학 강의 시간에 교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스님이 길을 가다 생선장수가 생선을 죽이려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돈을 주고 그 생선을 산다. 그러고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며 다리 밑 강물로 던져 방생한다. 생선장수는 재미가 들려 스님이 지나갈 때마다 생선을 죽이려 하고 그때마다 스님은 생선을 사서 방생한다. 나중에 생선장수는 스님이 지나려 할때 마침 생선이 떨어지고 없자, 옆에 있던 어린 아들을 죽이려는 시늉을 한다. 스님은 돈을 주고 아들을 산다. 그러고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며 다리 밑으로 던진다. 이 에피소드에서 스님의 문제는 그가 '혼자만의 도덕'에 빠져 산다는 점이다. 도덕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이 소설 '도덕의 시간'과도 미묘하게 맞물렸다. 


살인이든, 꽁초를 버리는 행위든- 그것은 작든 크든 모두 법과 도덕의 문제 속에 포함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범법행위이기 때문일까, 부도덕한 행위이기 때문일까? 인간이라면 법의 문제보다 도덕의 문제 때문에 '살인'을 망설이기 마련일 테다. 그러나 도덕에는 강제적 구속력이 없다. 때문에 법의 문제만 비껴간다면 '도덕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 문제로 귀결된다. 어떤 이유로든, 내 삶이 더 나아질 수만 있다면 도덕의 문제는 건너뛸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할수록 이것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문제다. 다수의 권력자들은 이미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며 '이것은 범법행위가 아닙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런 권력자를 향해 미디어는 범법행위가 아니면 다냐? '이것은 도덕의 문제다'라고 비난한다. 여기서 도덕은 곧 정의다. 


그렇다면 장발장은 어떨까? 배고픈 청년이 빵을 훔쳐 자신과 병든 어머니에게 줬다고 한다면- 그것은 물론 엄연한 범법행위다. 하지만 살기 위해 빵을 훔친 그를 도덕적으로까지 몰아세울 수 있을까? 때론 도덕은 마녀사냥처럼 한 인간을 옮아맨다. 우리는 한 사람의 '개인사'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가 저지른 부도덕한 '행위'만 놓고 그를 저울질한다. 어린 나이에 양부모에게 구타당해 갈비뼈가 부러진 소년이 집을 나와 떠돌이 개를 잡아먹었다면- 사람들은 도덕을 앞세워 그 아이를 '개 살생마'라고 비난한다. 그가 겪은 지옥 같은 삶에는 어떤 구원의 손길도 내밀지 않지만, 그의 부도덕한 행위에는 언제든 '도덕'이라는 총알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 소년에게 도덕은 어떤 의미일까? 소년에게 도덕은 곧 혐오일 테다. 도덕이 아무리 대단해도 소년의 삶보다 위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도덕의 문제'란 무엇일까? 


소설의 라스트에 13년 전 강당에서 있었던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데- 그 대목에서 충격과 함께 '혼란'이 찾아왔다. 그런 사연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도덕'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도덕의 양면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다뤄지는 두 사건은 결과적으로 도덕의 다른 정점에 선 사건이었다. 위 예로 든 '스님 이야기'처럼 혼자만의 도덕에 빠진 도덕을 비웃는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도덕이 가진 정의로운 힘을 믿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후자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라스트는 꽤 마음에 들었다. '스완' 때도 그랬지만 작가는 비정한 사회의 단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한편 작은 휴머니즘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전자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라스트다. 이것은 도덕 문제입니다,라고 툭 던진 매력적인 메시지로 인해 뭔가 커다란 세계관을 품고 있을 거라 막연히 짐작했는데,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조금은 비약적인 동기가 아니었나 싶은 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찾아왔다. '그런 이유로' 그 모든 행위가 설명되어지는 걸까? 그것이 도덕이 가진 '문제'를 직설하는 거라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것도 같은데- 정말로 내가 느낀 점들이 작가가 의도했던 것들인지는 지금도 모호하다. 마치 도덕이 가진 모호성처럼. 


쓰다 보니 글이 무척 길어졌다. 그만큼 나로 하여금 할 말이 많아지게 만든 소설인 것은 틀림없고,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가진 가치는 높다고 본다. 총평을 하자면 매력적인 출발로 시작해서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의 긴장감, 그리고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충격의 라스트까지 소설 자체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손색이 없다. 다만 라스트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독자가 느낄 감상은 다 다를 것 같다. 우리가 막연히 입에 담는 '도덕'이 가진 '문제'에 관해 곱씹어 볼 수 있기에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단계 올라갈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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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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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지도 않은 여학생이 연주회 초대장을 보내온다. 초대장의 주소대로 찾아가 보니 그곳은 언덕 위 외딴 집. 인기척이 없는 그곳의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초인종을 눌러도 침묵뿐! 어둠이 내리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언덕 밑에서 이상한 노인이 다가와 말한다. 자네는,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떠올릴 수 있겠나?


하루키의 소설을 꽤 읽은 편이지만 솔직히 스토리가 기억나는 작품은 거의 없다. 그의 책에는 일목요연한 스토리가 없기 때문이다. 뚜렷한 주제도 없다. 그래서 작품의 의미를 느끼기가 힘들다. 소소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뭘 말하고자 하는지 통 알 수 없다. 그래도 한때 하루키의 마력에 푹 빠져 열렬히 그의 책을 탐독했다. 첫 시작은 군 복무 시절 읽은 '태엽 감는 새' 1권이었다. 낯설고 어렵지만 소설의 신세계를 경험하는 듯한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키에 조금 질려 있다. 너무 똑같은 얘길 미사여구만 바꿔서 우려먹는 기분이 든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지 그의 소설에는 지속적으로 야구, 재즈, 클래식, 팝, 술, 여자, 성- 이런 것들이 반복된다. 좋게 말하면 사랑의 고독, 현대인의 자아성찰 등으로 읽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작가가 소설을 통해 투영하는 중년 남자의 성적 판타지 같기도 하다. 그런 것에 너무 오래도록 집착한다는 느낌마저 들며 그의 소설이 지리멸렬해졌다. 늙어가는 작가가 자신의 로망을 소설로 채우려는 몸부림처럼 여겨진다. 소설 속에선 젊음도, 여자도, 성적 유희도, 이지적인 자아도 언제든 소환할 수 있으니. 


실제로 '일인칭 단수'는 작가가 일부러 메타 소설적 분위기로 엮으며 소설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하게 봐주길 바란다. 마치 실제로 겪은 에세이를 기술하듯이. 물론 이것이 작가의 교묘한 노림수일 수도 있다. 앞서 비판을 조금 했지만, 역시 하루키가 녹록지 않은 작가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지적인 분위기에 대한 판타지는 중년 남성들의 로망이기도 하며, 작가는 일부러 그것을 드러내 보이면서 스스로에게(혹은 그런 로망을 품은 중년 남자들에게) 역습의 펀치를 날린다. 이 책은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됐는데 7편은 일본 문예지에 실린 작품들이고, 마지막 한 편인 '일인칭 단수'만 새로 추가해서 엮은 것이다. 이 마지막 한편이 작가의 통렬한 노림수였다. 어째서인지는 꼭 책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키 소설은 잘 읽히지만, 결코 쉬운 소설은 아니다. 이번 소설은 대체로 하루키 입문자용으로는 적절하니 하루키에 도전하고 싶은 독자라면 좋은 독서가 될 수 있다.


제목이 뜻하는 일인칭 단수란 '개인의 시점'을 말하는 것이리라. 개인의 시점은 좁을 수밖에 없고 그것으로 타인을, 세상을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 그 시점만으로는 자신을 다 이해하기도 힘들다. 세상은 모든 일인칭 시점들이 모이고 부딪치고 교류하며 형성되는 곳이다. 삼인칭 복수의 시점으로 삶을 볼 수 있다면 모든 정답이 한눈에 들어올 테지만, 인간에게 그런 전능은 없기에 일인칭 단수의 시점으로 삶의 단편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하루키가 늘 자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다. 자아 깊숙이 들어가다보면 그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그 우주의 시선으로 다시 나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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