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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 / 스핑크스 / 2018년 11월
평점 :
절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신흥 종교 집단이 자급자족하며 살아간다. 그곳의 일원이었던 소년과 소녀는 탈출을 꿈꾼다. 어느날 지진이 일어나자 교주는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통로를 폭파하고 마을은 완벽히 고립된다. 그리고 마지막 날- 모두가 한 방에 모여 기도회를 하던 날, 이상한 소리가 들려 소녀는 기도를 하다말고 눈을 뜬다. 그때부터 소녀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모호한 기억으로 남는다. 무시무시한 피의 참극과 신비한 현상... 10년 후 여인은 그때 있었던 일의 수수께끼를 풀어달라며 탐정을 찾아온다. 현실적인 진상이나 논리적인 트릭보다 '기적을 믿는 탐정' 우에오로에게 여인은 이런 말을 한다. 이건 단지 가설이지만, 그때 소년은 목이 잘린 채로 저를 안고 도망쳤던 것 같아요...
이노우에 마기의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는 본격 미스터리에 라이트노벨의 감각을 섞은 퓨전 추리소설이다. 퓨전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만화적인 캐릭터성 때문이지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은 무척 논리적이고 탄탄하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출발은 크리스티 여사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마지막 장과 흡사하다. 탐정이 추리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미 사건은 10년도 넘은 과거의 일이 되어 있다. 즉, 그때 그 고립된 장소에서 일어난 대학살극의 진실을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스토리다. 앞서 말했듯,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10명 모두가 죽은 섬에 도착한 형사들이 이 불가능한 사건의 진상을 캐보려고 이런저런 추리를 짜내는 것과 비슷한 설정인 것. 다만 여기서 작가는 기존의 추리소설이 가진 틀을 크게 비튼다.
목 잘린 소년이 소녀를 안고 구출했다- 라는 판타지적인 가설을 탐정은 오히려 그대로 받아들인다. '상식은 만고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이 세상에 기적은 존재한다' 라는 게 탐정의 지론이다. 그래서 탐정은 이때부터 이상한 대결을 펼친다. '그때 그곳에서 있었던 불가능한 사건'을 논리적으로 추리하려는 여러 사람에 맞서- 그 논리를 논리적으로 파괴하며 반증을 시도한다. 탐정은 그런 식으로 가능한 모든 논리적 추리를 논리적으로 파괴해서 마지막에 남은 하나의 진실, 그것이 비록 '비현실적인 진실'이라고 해도- 그 자체를 하나의 기적의 현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추리소설 역사상 이토록 독특한 탐정의 탄생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기적을 믿는 탐정이라는 설정은 무척 근사하다. 마치 꿈이 사라진 세상에서 꿈을 꾸는 마지막 몽상가처럼. 아스팔트처럼 딱딱한 논리와 물리의 법칙으로만 빈틈없이 굴러가는 이 팍팍한 세상에 꿈도 희망도 어쩌면 그 아스팔트 속에 함몰된 게 아닌가 싶다. 꿈과 희망을 잃은 현대인의 삭막한 가슴에 단비처럼 찾아온 '기적 탐정'은 그래서 우리가 오래전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신흥 종교의 집단 대학살이라는 무시무시하고 어두운 사건을 담고 있음에도 묘하게도 소설은 뒤로 갈수록 따뜻한 정서를 뿜어낸다. 두려움이 용기로, 절망이 희망으로, 죽음이 삶에 대한 의지로 거듭난다.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꿈과 기적을 믿으며 '살아라!', 라고 듀라한은 우리를 위로한다.
목이 잘렸음에도 소년은 소녀를 품에 안고 길을 걷는다. 끝까지 소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한다. 목 없는 기사와도 같은 그 소년을 바라보는 소녀는 안심한다. 목이 없지만 자신을 끝까지 지켜줄 것 같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논리주의자들은 탐정이 미처 생각지 못했을 '현실 가능한 추리'를 열심히 늘어놓는다. 그때마다 탐정은 고고히 나서서 말한다.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