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제3회 맑스 코뮤날레 학술문화제가 오는 28일부터 사흘 동안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다. 코뮤날레는 비자본주의적 공동체를 뜻하는 코뮌과 격년의 의미인 비엔날레의 합성어다. 코뮌의 이상을 추구하는 격년제 축제란 뜻이다. 자본주의와는 다른 세계를 모색하는 비판적 사유의 ‘정신’이 함께 모여 연구 성과를 내놓고 그 현실 정합성과 이상의 높이 등을 따지는 대동 학술 축제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만의 특수한 이벤트이다. 18개 단체 120여명의 연구자가 발표·토론에 참여한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이다.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화는 더 이상 외부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국가는 초국적 자본의 대행자가 되어가고 있으며 자본의 이윤 증식의 욕망에 존재의 모든 가치와 생명력을 팔아넘기고 있다”고 주최 쪽은 규정한다.

‘공산주의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탐색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대회 주제를 감안할 때 자연스럽다. ‘코뮌적 생태문화사회’ ‘코뮨주의’ ‘21세기 사회주의를 위한 대안적 경제전략’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득재 <문화/과학> 편집위원은 발표문 ‘코뮌주의적 생태문화사회구성체 요강’에서 생태적 문화사회공동체를 대안사회로 제시한다. 그는 △상위체계에서 자본·국가 연합에 균열을 내어 사회공공성을 재구성해나가는 연대를 이뤄내고 △하위체계에서 지역평의회 및 협동조합 등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제안한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는 발표문 ‘대중이란 무엇인가:코뮌주의 신체론’에서 “코뮌주의 역사에서 대중은 대체로 대상화된 실체로 간주되어 왔다”면서 “실체가 아닌 ‘흐름(flux)’으로서의 대중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정훈 ‘수유+너머’ 연구원은 글 ‘코뮌주의에서 능력의 개념’에서 마르크스의 능력개념을 잠재력과 협력으로 파악하고 이런 능력을 구현하는 코뮌이라는 새로운 사회의 구축운동을 ‘코뮨주의’라고 규정한다.

곽노완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사회전체 성원에게 기본생활비를 조건 없이 지불하는 ‘기본소득’ 담론을 확장시킨 ‘사회연대소득’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자본과 임대 소득을 폐기한 뒤 확충된 재원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균등분배할 경우 삶의 질 향상은 물론 소비가 늘면서 국내총생산도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베를린 자유대 철학과 교수이자 국제헤겔연맹 의장인 안드레아스 아른트 교수는 논문 ‘시간의 경제’를 통해 “자본주의가 구조화하는 노동은 생산성 향상이라는 논리로 비노동시간을 노동시간에 종속시키고 있다”면서 “가치증식요구라는 ‘자본의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적 통제’ 아래서 최대의 비노동시간을 확보하고 그 것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20~30대 젊은 석·박사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영 코뮤날레’ 세션도 마련됐다. 이 세션에선 ‘성매매/성노동’과 ‘대학에서 맑스주의자로 살아남기’를 주제로 하는 자유포럼과 15개의 논문이 발표되는 개인토론회가 마련됐다.

코뮌주의 등 ‘공산주의론’에 대한 다양한 탐색이 이뤄진 데 대해 주최 쪽은 마르크스 연구자들의 자신감의 표출로 해석했다. 중앙대 교수인 강내희 집행위원장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위기를 맞고 있고 남미 8개국에 좌파 정부가 들어섰음을 상기시킨 뒤, “자본주의의 대안 세상에 대해 고민한 세력은 마르크스주의자밖에 없다”면서 “코뮌주의 등에 대한 탐색은 새로운 세상을 연구해 오면서 축적된 힘을 자신감과 함께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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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소설은 제법 모아두었으니, 이제 해외로 눈을 볼려볼까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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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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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의 중국 작가 위화의 작품입니다. 문혁의 60, 70년대와 자본주의의 오늘 중국을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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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주화 이전에도 사람들은 잘 살았다. 밥 먹고 돈 벌고 놀고 여행하는 데 큰 불편 없었다. 민주화 이후의 시대 이른바 ‘친북 좌파’가 나라를 망쳐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3공, 5공 시대를 그렇게 기억한다. 그게 ‘자유’였을까? 그 시절 경찰서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더욱이 감방 같은 곳은 선량한 사람들과는 무관한 범죄자의 세계로만 여긴 사람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한눈팔지 않고 산 사람들은 그때 자유로웠을까?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가치의 선전원’이었던 아이제이아 벌린(1909~1997)의 관점에 서면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벌린은 타인 또는 외부의 간섭, 강제,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을 자유라 규정했다. ‘소극적 자유’다. 그것은 권리청원, 찰스1세의 처형, 공화정 수립으로 이어진 17세기 영국혁명을 거부했던 토머스 홉스와 18세기 미국혁명을 부정했던 제러미 벤담이 일찍이 역설했던 자유론과 일치한다. 왕당파와 절대주의 지지자들의 자유론이다. 이들에 따르면 선한 왕이 지배했던 고대왕국의 신민이 21세기 민주국가 시민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을 수 있다.

벌린이 1958년 옥스퍼드대 사회정치이론 강좌교수 취임강연에서 그런 자유론을 설파한 지 40년이 지난 1998년 케임브리지대학 근대사 왕립석좌교수가 된 ??틴 스키너는 취임강연에서 벌린의 자유론에 도전했다. 그가 지지하는 17세기 영국혁명 때의 공화정 의회파 저술가들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했다. 우선 “부당한 간섭 없이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에 대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유인이 아니어도 특정한 권리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예컨대 옛 로마나 미국 노예들도 드물지만 좋은 주인 만나면 즐거운 놀이와 휴식, 맛난 음식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 주인의 기분이나 생각이 바뀌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그들이 누린 자유가 이처럼 전적으로 타인의 자의적 의지, 선의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한들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다. 따라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이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적극적 자유’다.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도, 복수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마음대로 만날 수도,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도 없었으며, 머리카락과 치마 길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뱉는 순간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했던 빅 브러더의 세계, ‘유신’ 독재 이후 군사정권에 고개 쳐들지 않은 대가로 얻은 자유가 진짜 자유였을까. 스키너에 따르면 왕이나 빅 브러더는 그들이 신민을 구속하든 말든 그 존재 자체가 자유를 자유일 수 없게 만든다. 그러면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가 크게 진전됐다는 지금 사람들은 자유로울까?

벌린이나 홉스의 자유론에 따르면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병실을 나올 수 없는 것은 자유를 누릴 힘이 없어서지 자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지금의 신자유주의시대에 극빈자나 사회적 낙오자, 소수자에게도 얼마든지 자유는 있다. 다만 그걸 누릴 힘이 없을 뿐이다. 정말 그들에게 자유가 있을까? 무한경쟁의 우승열패식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강자는 권력을 독점하고 약자는 가속적으로 더 약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 처지에서 평등한 기회는 보장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선 소수 강자, 상위 20%만이 자유롭다.

18세기 공리주의 등장 이후 ‘적극적 자유’론은 쇠퇴했고 자유가 아니라 국가보호 아래 안전과 행복 추구가 최선이라던 왕당파 홉스와 벤담의 소극적 자유론이 세상을 지배했다. 이 때문에 “자유에 대한 좀더 넓고 좀더 깊이 있고 무엇보다도 좀더 민주주의적인 생각이 대부분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게 스키너의 생각이다.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푸른역사 펴냄)는 바로 이 ‘시야에서 사라진’ 적극적 자유론, 공화주의적 또는 신로마적, 민주주의적 자유론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좌파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간섭의 부재라는 의미의 개인의 사적 자유를 옹호”한 벌린의 자유론, 냉전시대 서방진영의 ‘정전’이자 ‘무기’가 됐던 그 자유론을 넘어서서, 공화주의와 시민적 자유론마저 불온시했던 이 땅에선 친숙하지 않은 스피노자, 루소, 헤겔, 마르크스, 자코뱅, 좌파들의 자유론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영국 역사상 자유론을 둘러싸고 가장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17세기 영국혁명 당시, 홉스와 벤담의 자유주의가 판치기 ‘이전의 자유’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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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 김경욱(36)씨가 장편 역사소설 <천년의 왕국>(문학과지성사)을 내놨다. <하멜 표류기>에 한 줄로 언급된 17세기 네덜란드 출신 귀화 조선인 박연(본명은 얀 얀스 벨테브레)을 주인공 삼은 작품이다.

김경욱씨는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등의 소설집과 <아크로폴리스> <모리슨 호텔> 같은 장편을 통해 당대 젊은 세대의 문화적 기호와 존재의 풍경을 주로 그려 온 작가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한 전작 <황금 사과>(2002)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삼기는 했지만, 그가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2003년에 단편을 쓰느라 하멜의 보고서를 읽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대목을 만났어요. 제주에 표류한 하멜 일행을 조사하러 온 조선 국왕의 사자가 하멜과 같은 네덜란드 출신 벨테브레였다는 것이죠. 벨테브레는 하멜보다 26년 먼저 조선에 표류해 와 그때쯤에는 완전히 조선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국경이 무의미해지고 국적이 예전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이 시대에 일찌감치 ‘세계 시민’으로 살았던 그의 생애가 소설적 흥미를 자극했습니다.”

19일 낮 시내 음식점에서 만난 작가는 “서양인 벨테브레가 자신의 불가해한 운명과 화해하고 마침내 조선 사람 박연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영혼의 드라마를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천년의 왕국>은 제주에 표류한 하멜 일행이 국왕의 사자로 내려온 박연과 마주치는 1653년의 상황으로 시작한다. 소설 화자인 박연이 “망각의 악마가 지키는 지옥의 바다를 건너온 내 조상이자 아들”(18쪽)이라 표현하는 하멜 일행과의 만남은 그의 기억을 정묘호란이 나던 해인 1627년으로 데리고 간다. 그 해 그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낯선 땅 조선의 해안에 표착했다. 소설은 이후 병자호란의 해인 1636년까지 10년 동안의 박연의 삶을 꼼꼼하게 되살려낸다.

“<하멜 표류기>나 실록 같은 역사책에는 박연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그런 불친절이 작가에게는 오히려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천년의 왕국>은 아주 잘 읽히는 소설이다. 세련된 의고투 문장들이 독서를 매끄럽게 한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어쩐지 <남한산성>을 비롯한 김훈씨의 역사 소설들이 떠오른다. “죽음은 생을 윽박지르지 않았고 생은 죽음을 따돌리지 않았다”(203쪽)라거나 “성안에서 전쟁은 죽여야 하는 전쟁이 아니라 먹여 살려야 하는 전쟁이었다”(354쪽)와 같은 문장들이 그러하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치욕’을 다룬 소설 말미가 또한 그러하다. 작가는 “김훈 선생의 문체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감명 깊게 읽은 작가의 영향을 받는 건 좋은 일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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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한국 소설이 역사와 바람났다?!
역사를 소재로 삼은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4월 중순에 나온 김훈씨의 〈남한산성〉이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굳게 지키고 있는 가운데, 5월 말에 신경숙씨의 〈리진〉이 출간되어 독자 반응을 타진하고 있으며, 젊은 작가 김경욱(36)씨 역시 신작 〈천년의 왕국〉을 내어 역사소설 바람을 이어갈 참이다.

다음달 초에는 〈미실〉의 작가 김별아씨가 또 하나의 여성 역사소설 〈논개〉를 전작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이미 잡지 연재를 마친 김연수씨의 〈밤을 노래한다〉와 연재 중인 이기호씨의 〈올보리 선생 말년 수난기〉까지 더하면 가히 역사소설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는 〈다빈치 코드〉로 대표되는 ‘팩션’(팩트+픽션) 붐이 한국 소설에도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해석한다. 그는 “굴절 많은 현대사를 겪은 한국인들은 역사적 가정과 추리를 즐기는 편이라서 역사(추리)물이 독자들에게 먹혀들 가능성은 상존한다”며 “여기에다가 디지털 정보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지는 팩션이 결합하면서 역사물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작가들은 역사 소재 소설이 당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과 별 차이가 없노라고 말한다. 신경숙씨는 〈리진〉을 “현대 소설이라 생각하고 읽어 달라”고 주문했다.

그렇지만 최근의 역사 소설 붐은 확실히 나름의 맥락과 까닭을 지니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는 그것을 △작가들이 현실의 전모를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서 손쉽게 과거에 의존하는 측면 △독자들 또한 이야기 자체의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역사 소재 소설로 쏠리는 현상으로 풀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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