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맥스무비)

한 사람의 인생을 주어진 러닝타임 안에 담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이미 알려진 사람이라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부담이 더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라면 어떨까? 그 인물에 대한 선입견 없이 영화를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략)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행복이라는 것은, 그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삶의 질곡을 넘어서야 맛볼 수 있다는 얘기다. 노력한 만큼, 고생한 만큼, 능력만큼, 성실한 대가만큼. 그만큼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세인들의 눈에는 박경원의 모습이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단, 그것은 영화를 보기 전까지의 일이다. 우리의 인생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인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행복의 순간들이 아니라 삶의 고역을 참아왔다는 사실이다. 윤종찬 감독이 연출을 맡고, 장진영이 박경원을 연기하는 <청연>은 푸른 상공에 자신의 꿈을 펼친 그녀의 질곡 가득한 삶을 통해 그것을 보여줄 것 같다.

3년간의 기획을 거쳐 30여 차례 시나리오 작업으로 탄생한 <청연>은 실존인물을 영화화하는 만큼 철저한 역사적 고증과 주변인물들의 검증을 바탕으로 기획되었다. 순제작비만 80억이 넘는 <청연>은 그녀의 삶을 스크린에 복원하기 위해 세심한 준비를 했다. 국내에서는 그녀에 관련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윤종찬 감독과 제작진은 일본 도서관을 이 잡듯이 뒤졌다. 또 일본의 그 시대 영화도 여러 편 참고했다. 특히, <청연>의 미술 감독으로 영입된 다케우치 감독의 영화 4편(<도다가의 형제> <사사메 유키> <무법송의 일생> <사다>)이 쇼와 시대를 다룬 영화들이어서 국내 제작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다치가와 비행장 이야기>의 저자이기도 하고, 박경원과 친분이 있었던 미타 상과의 만남은 박경원의 삶을 영화로 재구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5월 6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윤종찬 감독은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보다 실존 인물을 영화화하는 것이 몇 배 더 힘든 것 같다. 완벽하게 그녀의 삶을 재현해내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삶을 영화적 재미를 위해 왜곡시키거나 비화시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소름>에서 윤 감독과 배우로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장진영은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희열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만큼 박경원 역은 여배우라면 누구나 탐을 냈을 것이다"며 캐릭터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싱글즈>에 이어 장진영과 또 한번 연인관계가 된 김주혁은 영화속에서 자신이 맡은 한지혁이라는 인물을 부드러움과 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청연>은 오랜 준비과정을 거친 작품인 만큼 촬영 현장에서의 누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 중 하나가 3D 콘티 작업이다. 지면에 있는 시나리오를 또다시 지면에 옮기는 2D 콘티 말고 3차원의 영상으로 옮기는 3D 콘티. <청연>의 모든 항공 촬영씬은 실사로 촬영되기 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고, 제작진은 그 결과를 토대로 촬영을 진행해나갔다. CG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인사이트 비주얼’에서는 콘티북을 바탕으로 <청연>에 등장하는 모든 비행 씬, 14씬, 610컷을 32분 분량의 애니매틱스로 담아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CG로 가짜 비행기를 만든 적이 있는 ‘인사이트 비주얼’은 6개월간의 작업을 거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적인 항공촬영을 할 수 있도록 든든한 조언자가 되줄 3D 콘티를 완성해냈다. <인디펜던스 데이>의 항공 코디네이터 케빈 라 로사와 항공 촬영감독 버논 노블즈 주니어는 이 3D 콘티가 없었으면 비행촬영에 걸린 시간은 지금보다 9배(<청연>의 제작진은 미국에서 항공촬영을 11일 만에 끝냈다)는 늘어났을 것이라고 장담했을 정도다.

하지만 <청연>의 제작진을 가장 괴롭혔던 건 박경원의 삶이 아니라 그녀와 운명을 달리한 복엽기였다. 제작진은 복엽기를 찾기 위해 미국을 비롯해 필리핀, 러시아, 한국까지 전세계를 샅샅이 뒤졌다. 영화 속에서 너무나 중요한 소품이라 복엽기를 찾는데 1년 동안 노력을 기울였고, 그러면서 그들이 다녀온 해외 출장거리는 239만km로 지구를 60여 바퀴 도는 거리와 맞먹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 것일까? 제작진은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어렵게 미국에서 박경원이 탑승한 ‘청연’과 똑같은 1930년대 모델인 복엽기 살무손(Salmuson)을 찾아냈다. 하지만 당시의 사진과 동영상 자료는 모두 흑백이었기 때문에 수백장의 컬러링 테스트를 통해 <청연>만의 복엽기가 새롭게 재창조되었다. 거기에다 '특수제작회사 아트인프라' 오선교 대표가 미국 서부 공항에서 007 첩보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어렵게 찍어 온 복엽기 도면과 설계도는 <청연>의 복엽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중략)

나에게 <청연>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았다. 박경원의 삶도. 그녀의 마지막 비행도. 80여년 동안. 어쩌면 당연한 일일게다. 그녀는 영웅이 아니었으므로, 따라서 <청연> 속에 영웅은 없다. 꿈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삶의 궤적을 남기고 간 평범한 사람들만이 있을 뿐. 암울한 식민지 시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지 않았을까. 이제 허구 반 사실 반의 그림으로 박경원을 다시 날려 보낸다. 시대에 대한 몰이해가 있다면 감독의 사려 깊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얄팍한 상상력이 행여 망자(忘者)의 삶에 누를 끼쳤다면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감독 윤종찬 2004. 4. L.A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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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는 http://blog.naver.com/annemyungg/40030964298 / http://blog.naver.com/smphillips/80020365978 입니다. 두 개의 원문을 바탕으로 임의 편집합니다.)

# 들어가며

일제하 자료를 찾아보면 비행사는 여덟 명이고 그중 여류는 세 명이었다. 안창남이 처음이었고 그 뒤를 이어 박경원이 있다. 그리고 이정희, 김복남 등 여류비행사와 장덕창, 강세기, 윤창현, 윤공흠 등이 뒤를 계속 잇고 있다.  


▲ 박경원의 고려신사 참배. 최린, 이등비행사 박경원, 그 옆에 체신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박경원에 대한 관심은 1993년 ‘고려신사'에 갔을 때 그 신사의 방명록에서 그녀의 이름을 보고 난 후부터였다. 1928년 방명록에는 이름이 쟁쟁한 권력자와 함께 2등 비행사 박경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이름은 최린(崔麟, 1878-?), 일본 체신대신 고이스미 마타지로우(小泉又次郞, 1865-1951)와 나란히 있었다. 최린은 33인 중의 하나 아니었던가. 또 하나 의혹의 인물은 체신대신 고이스미인데, 그는 박경원을 돕기도 했지만 그녀를 괴롭힌 자이기도 했다. 턱없는 루머가 떠돌아 다녔기 때문이다.

# 박경원의 생애 

 

박경원은 1897년 대구부 덕산정(德山町) 63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덕산로이다. 탄생 100여 년이 지났다. 1912년 대구에 있는 미국 장로회 계 명신여학교에 들어가 1916년 졸업했다. 이어 고등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한다. 당시 보통 여자가 이만큼 공부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1917년에는 일본을 향해 떠나간다. 9월 13일 아침 대구 역을 떠난다. 1903년 이래 대구에 와 제사기술을 지도하고 있던 미와(三輪如鐵)의 후원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진 것이다.  

그녀는 비행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일본에 건너 간 그녀는 곧 요코하마(橫浜) 미나미 요시다 죠(南吉田町)에 있는 가사하라(笠原) 공예강습소에 입학했다. 그곳은 견직, 마직물 등을 짜는 기술을 가르치는 직공양성소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2년 반을 지낸다. 어려움 속에 돈을 모으려 했으나 돈은 모아지지 않았다. 1919년부터는 재일 대한 요코하마 교회에 나가 크리스천이 된다. 이듬해 1920년 2월 일단 귀국한다. 같은 해 10월 그녀는 대구의 자혜(慈惠)의원 조산부 간호부과에 입학한다. 간호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 비행사 교육을 받을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22년 12월 10일 1등 비행사 안창남은 동아일보 주최로 고국 방문 비행을 한다. 여의도 상공을 나는 그의 자랑스런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 왔다. 그는 서울에 오기 직전인 11월 제국비행협회 주최의 도쿄-오사카 간 우편비행에 참가해 입상,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안창남은 1921년 도쿄 수자키(洲崎)에 있는 오구리(小栗)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웠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1등 비행사 자격을 얻었다. 

박경원은 도쿄 가마다(蒲田)에 있는 일본비행학교 본교에 들어갔다. 1925년 1월이었다. 그녀는 원래 안창남이 교관으로 있는 오구리 비행학교로 가고 싶어했으나 오구리 비행학교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고 없어졌다. 안창남도 가고시마에서 혼다(本田稻作)가 경영하는 수륙(水陸)비행장으로 옮겼고 그 뒷소식은 끊겨 있었다. 1925년 2월 경 중국 상하이에 가 있다는 뉴스뿐이었다. 안창남은 박경원보다 4살 아래였다. 

그녀가 입학할 즈음 이미 일본 여류 비행사 두 명이 탄생하고 있었다. 3등 비행사였다. 당시 비행사 급수는 1, 2, 3등 비행사로 나눠지고 있었다. 20시간 비행 경력이면 3등, 50시간은 2등, 100시간이면 1등 비행사 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순서는 3등부터 시작한다. 
3등 비행사는 자가용 비행기로 운동장 주변만 비행하고, 2등 비행사가 되면 비행은 자유였지만, 조종은 자가용 비행기뿐이었다. 1등 비행사가 되면 영업용 비행기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런데 1등 조종사는 남자에 한하여 자격이 생긴다. ‘여자는 엉덩이가 커서 조종은 무리'라는 성차별의 조롱도 있던 시대였다. 

그녀는 이곳에서는 먼저 지상 교육을 받았다. 아직 자격과 경제력이 허락지 않아 조종과에는 들어 갈 수 없었다. 그 지상 교육이 자동차 운전이었다. 이것이 비행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안창남도 먼저 자동차 운전을 배웠고 많은 비행사들도 그 코스를 밟았다.

그녀에게 후원자는 동아일보였다. 1925년 7월 9일자를 시작으로 9월 4일자, 12월 12일자에 연속으로 그녀에 관한 기사가 나갔다.
‘여 용사 박경원 양 비행학교에 입학, 부모의 거절과 많은 청혼도 버리고 단연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가 지원'(동아일보 1925년 7월 9일자) 
‘녀자가 비행긔 공부를 한다고 그리 장할 것야 무엇이겟슴닛가마는 일본에서는 아즉 이에 뜻을 두는 녀자가 드물 뿐 아니라 조선 녀자로는 나 한사람뿐임으로 때로는 남달은 곤난을 격근 일이 만앗슴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들의 호의로 그 학교 조교수로 잠간 잇게 되엿섰슴니다. 그런데 작란 조화하는 일본 학생들이 하도 놀리고 못살게 굴어서 할 수 업시 남복(男服)을 하고 다닌 일까지 잇섯슴니다마는 역시 그들의 성화로 결국 그것을 그만두게 된일도 잇슴니다.' (동아일보, 1925년 12월 12일)



▲ 동아일보 기사(1925년 9월 4일자)

그녀는 순회 간호부와 자동차 운전수를 하며 모은 돈으로 비행 훈련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 탈 때마다 돈이 들었는데, 1시간에 15원이었다고 한다. 기름이 귀할 때였다. 면허증을 따려면 2천원이 든다고 했다. 당시 대학 초임이 40원일 때이고 500원이면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때였다. 

조종과에 정식으로 입학한 것은 1926년 2월 1일이었다. 이은 왕세자는 구한국 정부 학부대신을 지낸 이용직(李容稙, 1852-1932)을 통해 거금을 기부했다. 박경원은 1926년 2월 이른 봄, 일본비행학교인 다치가와 분교에서 비행기 조종 연습을 위해 시모 다치가와 정(下立川町)으로 이사왔다. 이곳 주변은 뽕나무 밭이 많았고 붉은 바람이 유난히도 심하게 부는 곳이었다. 다치가와 역에서 북쪽으로 5분, 비행학교에서 남쪽으로 10분 거리였다. 스즈키(鈴木) 집이었다. 집은 단층 목조로 방 두 칸에 부엌, 현관, 목욕탕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지금 다마(多摩)지구에 속하는 이곳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비행장 터였다는 것 외에는 당시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비행장 터 일부인 니시 다치가와(西立川) 역 주변에는 ‘국영 소화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는데 히비야 공원의 11배 면적을 자랑하고 있다. 부근에는 히토쓰바시 대학(一橋大學)이 들어서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다.

1927년 초까지 그녀는 194회 째 비행 기록을 세웠고 25시간 44분, 이상을 탔다. 1회 비행은 보통 3분에서 5분이므로 25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1927년 1월 25일 그녀는 3등비행사 시험에 합격했다. 일본에 온지 3년 만이었다. 28일 면허증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월 29일 가마다 본교에서 졸업식이 열렸다.(동경 朝日新聞, 1927년 1월 30일자) 

그녀는 이어 2등 비행사에 도전했다. 일본 최초의 2등 여류 비행사도 탄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7월 12일 관동비행구락부 주최로 도쿄 시부야 구(澁谷區)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제 4회 비행경기대회가 열렸다. 이때 일본비행학교에서는 박경원을 포함 네 사람이 참가했다. 그중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과 같은 한국 여인 이정희(李貞喜, 1910-?), 그리고 일본 여자 1명이었다. 박경원은 고도상승 경기에서 3등으로 입상했다. 30분간 요요기 연병장 상공을 나는 것이었다. 2회, 3회 때는 입상하지 못했으나 이 때는 입상한 것이었다. 삼궁교(參宮橋)에서 시상식이 행해졌다.

박경원은 같은 해 7월 30일 2등 비행사가 됐다. 면허증 번호는 81번이었다. 여성으로는 일본인 두 명에 이어 세 번째였고 우리 나라 여자로는 모두 처음이었다. 물론 한국 최초는 안창남이었다. 그녀가 2등 비행사가 됐을 때 일본인 교장과 교관들은 “박 양은 일본 비행학교의 꽃으로서, 머리가 좋은 미인이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정희도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았다. 이정희는 박경원보다 1년 늦게 비행학교에 들어 왔다. 1927년 2월 13살 어린 나이였다. 서울의 숙명 여학교를 나온 그녀는 박경원보다 출신이 좋았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와 동기동창이었다. 박경원이 동승해서 직접 조종 지도를 해주었다. 그녀는 박경원의 뒤를 이어 1927년 11월에 3등, 1929년 7월에 2등 비행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최승희의 영향으로 무용가의 길로 진로를 바꾸고 박경원을 떠나갔다. 그녀는 1930년대 초 서울 누상동에 살다가 1933년 8월 14일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들보다 조금 뒤에 또 한사람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한다. 그녀는 김복남(金福男)이다. 1939년 3월 2등 비행사가 되었다.

남자 비행사로는 당시 오사카의 일본항공수송연구소에 근무하는 장덕창(張德昌)이란 1등 비행사가 있었다. 박경원과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또한 강세기(姜世基)란 이름도 보인다. 그는 충청남도 출신으로 이정희와 입학 동기였다. 그는 어렵게 공부하여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땄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1929년 4월 18일 도코로자와 비행장에서 비행 연습을 하다가 추락사했다. 기체는 1미터 흙 속에 처박혀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23세의 꿈 많은 젊은이였다. 이정희, 강세기 모두 꿈을 접고 있었다. 

다치가와 일대도 변모하고 있었다. 1929년 4월 이곳에 도쿄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민간 정기편을 운영하는 일본항공수송회사가 이 일을 맡았다.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를 연결하는 비행장이었다. 8인승 네덜란드제 비행기와 6인승 미국제 비행기가 투입되었다. 9월 10일부터 후쿠오카-울산-경성-평양을 지나 만주 대련에 이어지는 여객 수송이 시작되었다.

시간표를 보면 아침 8시 다치가와 출항, 오사카 10시 30분 도착, 후쿠오카 밤 12시 57분 도착, 새벽 2시 50분 후쿠오카 출항, 울산에는 4시 46분 도착했다. 후쿠오카 울산은 240km구간이었다. 아침 7시 울산 출항, 서울 여의도의 일본 육군 이착륙장에는 9시 32분 도착이다. 다치가와에서 서울까지는 비행거리 1,500km였다. 물론 운임이 비싸 처음 승객은 호기심 많은 사람, 돈 많은 사람, 고관대작 등이었다.

당시 일본 비행사들은 면허를 따면 자신의 고향까지 비행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굳어져 왔다. 그들에게는 금의환향이었다. 선전 도구로도 이용되었다. 안창남의 경우도 그런 것이고, 박경원도 고향 방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1930년 현재 일본에서 2, 3등 비행사는 12명이었는데 그중 직접 비행을 하는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 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여류 비행사를 꿈꾸고 있었다. 

1931년 4월 3일 그녀는 도쿄 제국호텔에서 고이스미 체신대신과 처음 만난다. 그 대신이 몇몇 여류 비행사를 점심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그녀는 고국 방문 비행기를 불하 받기를 원했다.

1931년 8월 29일에는 하네다(羽田) 공항이 개장했다. 1929년부터 하네다 앞 바다를 메워 만든 공항이었다. 다치가와의 동경국제비행장 시대는 이제 끝났다. 1967년 나리다(成田) 공항에 국제공항 지위를 물려줄 때까지만 해도 하네다는 일본의 현관이었다. 지금은 국내선 위주로 운항되고 있다.

그녀는 도코로자와 육군비행학교로부터 비행기 ‘살무손'을 불하 받았다.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체신대신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오해도 생겨났다. 함께 고려신사를 간다든가 개인적인 만남이 신문 가십란에 오르내렸다. 

그녀는 비행기 이름을 ‘파란 제비 호'라 붙였다. 이제 이 비행기는 그녀의 소유였다.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1931년 10월 23일)은 이를 보도하고 있다. 
“드디어 11월 20일경 정비가 완료될 전망이다. 이 조선 비행의 출발에 직접 관계가 있는 다치가와 시 및 민간 비행관계자들은 대대적으로 전송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 연락비행'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비행을 해야 했다. 제국비행협회에서 지어낸 명칭으로, 군국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고국 비행은 비행사에 뜻을 둔지 13년, 일본비행학교에 들어가서 9년, 2등 비행사가 되는데 5년이 걸린 후였다.

이즈음 그녀의 후배로 윤창현(尹昌鉉)과 윤공흠(尹公欽)이 입학한다. 윤창현은 1931년 7월 일본비행학교에 입학, 11월 2등 비행사가 되고 1932년 5월 15일 다치가와 시를 날아 서울로 갔다. 윤공흠은 윤창현보다 한달 뒤 입학하여 1932년 6월 초순 2등 면허를 땄다. 그는 조선으로 비행 중 히로시마에 불시착했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미뤄지고 있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 35분 ‘파란 제비호'는 하네다 국제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런데 이날 날씨는 아주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으나 일정 상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 1933년 8월 7일, 이륙하기 직전의 박경원, 오른 손에 일장기가 쥐어져 있다

기수는 도쿄를 벗어나 가와사키 공장지대 상공을 지났다. 멀리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의 선로를 건너 에노시마(江ノ島)를 지났다. 이제 별장, 해수욕장이 즐비한 오다하라(小田原) 상공을 지나고 있다. 고도 400-500이었다. 이어 아타미를 지나 하코네 산을 넘는다. 비행 40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빽빽한 구름과 난기류가 그녀의 비행기를 둘러쌓다.  

그녀의 비행기는 11시 17분 하코네의 남쪽에서 폭음을 울린 후 사라져 버렸다. 하코네 항공 무선소에 폭음이 들려 왔다. 얼마 후 시스오카 현 전방군(田方郡) 다하촌(多賀村) 상다하(上多賀) 현악치(玄岳峙)에 기수를 거꾸로 밖은 채 그녀의 비행기가 발견되었다. 시계는 11시 25분 30초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강타 당한 채 조종석 핸들을 잡고 죽어 있었다.  모든 꿈은 사라졌다. 33세의 생애는 마감됐다.



▲ 산중에 추락한 박경원의 비행기

서울에서 그를 기다리던 많은 군중들은 그 충격적인 뉴스에 어쩔 줄 몰라했다. 4일 후인 8월 11일 제국비행협회 강당에서 장례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일본 육군대신, 체신대신, 척무대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동군 참모장 등이 조화를 보내왔다. 그녀의 유골은 14일 오전 10시 47분 대구 역에 도착해 불교 포교원에 안치되었다.

조난 당한 그 자리에는 ‘1933년 박경원양 조난위비'라고 새긴 돌기둥이 세워졌다. 1983년 8월 7일 아타미의 의왕사(扇王寺)에서 ‘박경원 추락사 50년제’가 열렸다.

# 배경1_일본의 비행기 개발

일본의 비행기 연구 개발은 1895년 청일전쟁에 투입된 일본군의 한 병사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애원현(愛媛縣) 우화도(宇和島) 출신 이궁충팔(二宮忠八)이란 병졸이었다. 그는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제 5혼성여단의 한 병사로서 조선 땅에 들어 왔다. 그는 당시 경성 마포(麻浦)의 공덕리(孔德里)에 주둔했다. 그는 새를 자세히 관찰해 비행의 원리를 발견하고 모형비행기 실험비행에 성공했다. 그는 자기가 고안해 낸 비행기를 제작하자고 군 당국에 건의했다. 공덕리에서 그는 상관을 통해 비행기의 군사적 가치를 설파, 자신이 고안한 비행기를 군에서 채택하여 구체화하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여단장이었던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1850-1926) 소장은 이를 각하시켰다.  

일본인 최초 비행은 1910년 12월 14일에 이뤄진다. 이에 따라 일본 육군은 1911년 4월 사이타마 현 도코로자와(所澤)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수, 일본 최초의 비행장을 개설하게 된다. 본격적인 비행기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1919년에는 이곳에 육군비행학교를 개설한다. 프랑스에서 온 폴 대령이 교관으로서 항공장교를 양성한다. 도코로자와-경성간 육군대비행도 이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 배경2_다치가와 비행장

육군 다치가와 비행장은 도쿄에서 1시간 거리로 1922년 육군이 41만 5천 250평의 대지를 매입해 만든 것이다. 제5 비행연대의 비행장이었다. 제국도시 도쿄를 방위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하여 이 다치가와는 ‘하늘의 성지'라고도 했다. 비행장 공사는 히로시마의 모리타 구미(森田組)가 맡았다. 이때 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이 공사판에 투입되었다. 우리 동포들의 땀과 피가 섞여 있는 곳이다. 조선인 인부들은 삼태기로 흙을 나르고 바닥을 다듬었다. 격납고도 세우고 수리 조립공장, 막사 등도 세웠다. 1922년 3월 준공되었다. 1923년 12월 무렵에 이곳은 시골에서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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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7-15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원..영화 '청연' 정말 감동깊게 봤어요. 실제 사진과 기사를 보니 다시 영화가 보고싶어 지네요..^^

sb 2007-07-1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식민지 조선의 시각과 여성의 시각이 결합되어 있는 영화로 봤어요. 특징적인 점은, 주인공인 박경원이 당 시대의 주된 역사적 이슈(식민지배)에서 한발자국 물러나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극 고유의 분위기를 해치기는 커녕 더욱 자연스러운 빛을 낸다는 것이에요. 약간 부족하게 느껴지는 CG와 시나리오가 아쉽지만, 꼭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역사영화였습니다. Jade 님은 어떤 부분이 감동깊으셨어요? 역사영화를 주제로 테마카페도 개설해봤는데, 알라디너들의 관심을 한참 벗어났나봐요.

비로그인 2007-07-1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연>, 인상깊은 영화였어요. 배우들도 다 괜찮고... 친일적인 영화가 아니냐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그런 영화로 봐지진 않았어요. "조선이 네게 해 준 게 뭔데?" 였던가.. 비슷한 대사가 인상깊었어요. 한 개인의 소망이 식민지배와 같은 큰 역사흐름 속에서 어떤 질곡을 겪을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글을 읽으니 다시 보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sb 2007-07-16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일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사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은 '그렇다'가 될거에요. 스무살 이후로 계속 일본에 살았고, 일본의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박경원이 친하고 싶었던 일본은, 비행학교가 있는 나라였을 뿐, 식민통치를 하는 나라는 아니었거든요. 2등 비행사 자격을 딴 이후, 그토록 열망했던 조선으로의 고국비행이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저 푸른 제비가 많은 고향이었던 것 처럼요.
그런 점에서는 '조선 최초의 여류비행사'라는 칭찬이든 '친일파'라는 비판이든, 그녀를 이해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요.

sb 2007-07-1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서울1945> 후기에도 댓글 달아주셨었죠? 저하고 취향이 비슷해 반가워요. ^^
 

(출처: 한겨레)
 
문화방송 국제시사 프로그램 〈더블유>(W)가 13일 밤 11시50분 방송하는 ‘인류의 재앙 말라리아’ 편으로 100회를 맞는다. 2005년 4월29일 ‘카슈미르 평화버스’ 편으로 첫 방송을 한 지 2년2개월 만이다. 그동안 70여개 나라의 전쟁, 인권, 환경, 사회문화 현상 등을 짚어왔다. 특히 평소 접하기 어려운 아프리카(23번)와 중남미(22번)를 집중적으로 다뤄왔다. 2년여 동안 피디 22명이 〈더블유〉를 거쳐갔으며, 지난해 8월부터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의혹을 파헤쳐 유명세를 탔던 〈피디수첩〉의 최승호 책임피디와 한학수 피디가 제작진(사진)에 합류했다.

서구의 시각이 아닌 우리만의 시각과 감성으로 국제 문제를 들여다보자는 기획의도로 출발한 〈더블유〉는 미국·유럽 중심의 정치·시사 보도에서 벗어나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제3세계의 빈곤·환경·분쟁·인권 등을 깊이 있게 다루며 심야시간대 프로그램치고는 꽤 높은 평균 시청률(6.6%·수도권 기준·티엔에스미디어코리아 집계)을 기록했다.

최 책임피디는 “초기에는 분쟁·인권·정치 문제를 많이 다뤘는데, 이제는 가급적 다양한 사회문화 현상에 접근하려 애쓴다”며 “다른 나라의 여러 모습을 접할수록 우리 사회 내부가 더 건강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스페인의 저체중 모델 축출, 인도의 카스트 벽 허문 결혼 바람, 쓰레기 더미에서 음식을 찾아 먹는 새로운 환경운동 ‘프리건’ 등을 예로 들었다.

한 피디는 “캄보디아 봉제공장,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랙파워 등 아이템을 잡고 현장에 가보면, 영국 비비시(BBC)가 직전에 취재하고 간 경우가 많더라”며 “‘세계를 보는 창’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비비시보다 시기는 뒤져도 프로그램은 더 잘 만드려 애썼고, 실제 영상은 더 뛰어나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첫 방송부터 줄곧 진행을 맡아온 최윤영 아나운서는 “〈더블유〉는 가장 애정이 가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라며 “진행하다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방송분을 묻는 질문에 ‘시에라리온, 다이아몬드 잔혹사’ 편을 꼽았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로도 만들어졌는데, 우리가 앞서 다뤘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껴요.”

100회 특집에선 피디 세명이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는 우간다(박정남), 미얀마(연왕모), 아마존(한학수) 지역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었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홍보대사인 연기자 조민기도 우간다 취재에 동행했다. 그는 지난 6개월간 우간다를 3차례나 찾아 현지 실상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해왔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1만원이면 살 수 있는 모기장이 없어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일, 이젠 우리가 막을 수 있습니다.” 조민기의 말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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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처음이다. ‘도대체 누구야’라는 제목이 무색해졌다. 이번만큼은 제목을 바꿔야 한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도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박훈규(36)씨는 (나름) 유명하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팬도 많다. 많은 사람이 그를 알고 있지만 모두 다른 모습의 박훈규다. 그는 마치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굴곡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타지마할’과 같다.

그는 우선 디자이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화가가 되겠다고 가출했다. 그러나 만화가에게 퇴짜를 맞았다. 그리고 신문배달, 평화시장 노동자 등을 거쳐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곧 그만뒀다. 그리고 디자인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미련 없이 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그는 화가였다. 호주, 영국의 런던과 에든버러를 무작정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사람들을 그렸다. 그리고 그는 사진작가다. 홈페이지(www.parpunk.com)를 운영하는 웹마스터다. 두 권의 여행책(<박훈규 언더그라운드 여행기>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을 펴낸 여행작가다. 그리고 그는 가수 비, 노브레인, 김장훈 등의 공연 영상 연출(브이제잉; Vjing)을 했다. 박훈규씨의 삶은 ‘그리고’와 ‘그러나’의 연속이었다. 삶이란 언제나 그리고와 그러나의 연속이지만 유독 그의 삶은 두서없고 정신없다.

새 책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기>를 펴내면서 또 하나의 ‘그리고’가 추가됐다. 음악 앨범을 기획하고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기 OST’를 만들었다. 그냥 노래만 골라 모은 것이 아니다. 참여 아티스트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콘셉트를 설명했고, 영국 도시의 느낌을 전달하고자 수많은 자료를 건넸다. 참여 아티스트들은 쟁쟁하다. 디제이 소울스케이프, 프라이머리, 캐스커, 노브레인, 안치환 등 색깔도 다양하다. 그의 이름 앞에 ‘프로듀서’라는 설명이 새롭게 붙게 됐다.

“지금까지 워밍업 했죠. 그런데 워밍업을 좀 격하게 했죠.(웃음) 이번 앨범 작업하면서도 좀 심하게 힘들었어요. 아, 이렇게 일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참여 아티스트들 만나서 한 세 시간씩 설명하다 보면 진이 쫘악 빠져요. 프로듀서라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대충 하려고 들면 쉬울 수도 있는데, 제대로 하려니까 힘들어요. 덕분에 많이 배웠죠. 이제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 나가야죠.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일, 함께 생각을 나누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 프로듀서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걸 제대로 하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프로듀서는 ‘장악’하는 사람이 아니라 ‘연결’시키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프로듀서’라는 단어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그리고’로 이어왔던 모든 일들을 이제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다. 워밍업이라는 표현은 그래서다. 박훈규씨는 디자인, 사진, 브이제잉, 웹, 포드캐스팅, 여행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각 분야에 이정표를 박아 놓고 왔다. “다음에 다시 갈 때 얼마나 편하겠어요”라는 그의 말이 이해된다.

박훈규씨는 뭘 해도 남들이 간 길을 뒤따르지 않는다. 디자인 작업을 할 때도 그랬고, 책을 펴낼 때도 그랬고, 시디를 제작할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길을 배우지만 길에 익숙해지면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다.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기>를 펴낸 이후 새로운 형태의 세미나(라고나 할까 프레젠테이션이라고나 할까)를 계속하고 있다. 이름하여 ‘트래블로그’(Travelog)다. 이를테면 ‘여행보고만담쇼’다. 직접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보여 주고, 오에스티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이 공연을 펼치고, 독자들과 여행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그에게 여행은 과정이나 목적이 아니다. 여행은 시작에 불과하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의 대화와 관계와 나눔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앨범 제작 하느라 돈이 많이 들었어요. 일반 시디 제작비의 두 배가 들었죠. 제대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참여한 뮤지션들이 ‘아, 이렇게 만들기 위해 박훈규라는 사람이 그렇게 돌아다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이런 시도들을 계속 할 거예요. 지금은 새로운 형태의, 아마도 국내 최초일(웃음) 여행 책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제 꿈은 ‘최고의 조직’을 만드는 겁니다. 놀던 사람들을 모아서는 계속 놀아요. 그런데 노는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언젠가는 그런 조직 혹은 집단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진지한 프로듀서가 없다는 겁니다.

그의 머릿속은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영국의 문화·도시·예술 이야기를 담았던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기>를 촉매제로 홈페이지에서 수많은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다. 영국의 거리를 찍은 동영상도 재미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런던 사운드’였다. 런던 사운드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런던 거리의 소음을 녹음해서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음악 같다. 음악처럼 아름답다. 어쩌면 그 소리들이 도시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건 정면승부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여행이란 무엇일까?’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사진이란, 음악이란, 웹이란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꾸준히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박훈규씨는 세련된 형식의 질문을 계속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글 김중혁 기자 pen@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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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한국 정치에서 사법기구와 준사법기구, 즉 헌법재판소, 법원, 검찰, 선거관리위원회의 역할과 영향은 최근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다. 사법기구가 민주주의와 민주정책의 향방을 좌우하는 경향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뚜렷한 특징의 하나였다. 필자는 이를 ‘정치의 사법화’, ‘민주주의의 일탈’, ‘소송사회화’라고 비판한 바 있다.

민주사회에서 사법기구의 역할은 인간의 권리와 안전에 대한 보호의 영역에 그쳐야 한다. 민주주의가 사법에 의해 좌우될 때 ‘다수의 지배’는 ‘소수의 지배’로, ‘법의 지배’는 ‘법률가의 지배’로 전락하고, 정부를 구성·심판·교체하는 국민의 주권과 정당의 역할은 크게 침해받는다.

문제는 정치 사법화가 민주정치의 주체들에 의해 반복되는 데에 있다. 지난 6월21일 노무현 대통령의 헌법소원 심판 청구건을 보자. 우선 국가원수·행정수반과 정당 지도자라는 이중 지위를 갖는 민주정부의 대통령에게 정치 중립이란 성립 불능의 원칙이다. 특히 정당 지도자로서의 행위를 행정수반으로 의제하여 탄핵·심판·경고하는 것은 정당민주주의를 부인하는 위헌이다.

선거 중립 위반에 대한 대통령 심판이 필요했다면 ‘정치자금 모금’, ‘국회의원 공천’, ‘정당자금 지원’, ‘국회 및 정당 고위직 임면’을 통해 제왕적 위헌적 통치를 지속했던 전임 대통령들이 먼저였다. 그러나 의회와 선관위는 당시엔 침묵한 반면, 위헌적 관행을 중단한 현 대통령에게는 탄핵소추와 사법심판을 시도하였다.

결국 2004년 탄핵소추와 최근 선관위의 결정은 정치적 요인 및 대통령 지위에 대한 헌법·입법 흠결로부터 초래된 사안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법적, 제도적 권한을 확정받아 보려는 노 대통령의 시도는 일단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헌소 청구는, 민주주의의 위축과 사법화를 더욱 촉진한다는 점에서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없다. 외려 의회가 대통령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입법화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도 제왕적 위헌적 관행과 헌법적 제도적 권한 사이에서 계속 충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둘러싼 고소·고발은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주의의 향방이 연방대법원에 의해 최종 결정되는 현실에 대해 일부 미국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조종’이라며 통탄하였다. 정치 경쟁과 선거 결과가 사법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중대한 후퇴를 의미한다. 특히 사법적 진실이 항상 정치적 지지 여부의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고소·고발을 통한 사법적 문제 해결이 갖는 근본문제는 이로부터 연유한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정치 문제의 사법으로의 호소와 철회, 즉 고소·고발과 취하를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자의로 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것은 정치 사법화를 넘어 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불법이 있었다면 대통령 후보이기 이전에 국민으로서 사법심판을 받아야 한다. 물론 공동체를 책임질 인사에 대한 진실 규명은 필수적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는 공적 삶에 시민윤리의 합의 기준을 갖추어 오고 있었다. 그 점에서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이 민주정부의 총리·장관 후보에 비해 훨씬 약한 검증 기준을 최고 공직후보에게 적용하고 있는 현실은 심각한 자기부정이자 우리 공동체를 크게 후퇴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능력과 시민윤리를 갖춘 공직사회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반복적 위장전입만으로도 총리·장관은 물론 고위 공직 임용조차 불가능한 기준을 풀어, 그 최고 권력자 수준의 인물들로 공직사회가 구성된다면 어떻게 법치, 공직윤리, 임용 검증, 준법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나라당과 이 전 시장은 지금 고소·고발을 넘어 아예 정치와 진실, 권력과 양심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박명림/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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