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지만, 그다지 영화를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단, 두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라도 만족시키면 꼭 봅니다. '새로운' 생각이나, 새롭지 않더라도 괜찮은 '영상'을 보여준다는 조건이죠. 첫 번째 조건은 영화가 아닌 다른 매체에도 해당되지만, 두 번째 조건은 영화가 아니면 안되죠.

아무튼, 모아봅니다. 이미 본 것도 있고, 앞으로 보려는 것들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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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파치노의 뉴욕 광시곡- 할인행사
알 파치노 감독, 알 파치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8월
8,800원 → 8,800원(0%할인) / 마일리지 90원(1% 적립)
2009년 02월 02일에 저장
품절
셰익스피어의 <리처드3세>를 영화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큐드라마 형식.
귀여워- 할인판
김수현 감독, 정재영 외 출연 / 베어엔터테인먼트 / 2007년 7월
9,900원 → 9,800원(1%할인) / 마일리지 100원(1% 적립)
2007년 07월 29일에 저장
품절
잘못된 착한 어린이 신화. 우리는 어린이를 '어린 아이'가 아니라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훌라걸스 감독판 (3disc)
이상일 감독, 마츠유키 야스코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7년 7월
27,500원 → 23,300원(15%할인) / 마일리지 240원(1% 적립)
2007년 07월 29일에 저장
품절
재일교포라는 이상일 감독. 재일교포 2, 3세들의 생각을 옅볼 수 있다. 이들은 재일교포 1세대를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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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들에 대한 기사를 줄곧 써온 <한겨레21> 신윤동욱 기자의 칼럼집에서 갈무리합니다.

동성애는 '동성간의' 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사랑' 입니다. 동성애 영화 역시, 뻔하디 뻔한 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애로 영화가 아닌 이상, 섹스 장면으로 일관하지도 않습니다. 만남과 설레임, 갈등을 통해 관계가 성립되는 평범한 사랑 이야기들이죠. 물론, 섹스 장면도 나오지만.

여튼, 동성간의 섹스 장면이나 찾았다가는, 재밌는 장면 다 지나갈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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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교습소
변영주 감독, 윤계상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5년 2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30원(1% 적립)
2007년 07월 2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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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 핑크- 할인행사
도리스 되리 감독, 마리아 슈라더 외 출연 / AltoDVD (알토미디어) / 2007년 3월
9,900원 → 8,9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원(1% 적립)
2007년 07월 29일에 저장
품절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소니픽쳐스 9월 초특가]
기타 (DVD) / 2006년 9월
25,300원 → 8,900원(65%할인) / 마일리지 90원(1% 적립)
2007년 07월 2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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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장사 마돈나(2disc)
이해영 외 감독, 류덕환 외 출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6년 12월
15,400원 → 13,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원(1% 적립)
2007년 07월 2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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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2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하장사마돈나>는 동성애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주인공의 성정체성이 여성이고, 남자선생님 좋아하니까요.

sb 2007-07-30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여러 성적 취향을 한 곳에 담다보니 실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제목을 바꿔버렸답니다. ^^;
 

- 난 종신형 가족제도를 불신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는 형성과 대립, 재구성의 운동 과정으로 바라보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제는 솔직한 누구나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현재진행형의 대립이 너무나 확연하다.

오늘날 행복한 가족이 많은가 불행한 가족이 많은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 집안일이나 회사일에 녹초가 된 부부들의 불행, 교육의 부담을 짊어진 부모들의 불행,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의 불행, 경제 취향 종교로 인한 불화에서 오는 불행이 가족제도를 지키기 위한 불행이라면,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들의 불행, 편부모 자식들의 불행, 결혼하지 못하는 동성애자들의 불행은 가족제도를 선택하기 위해 감수하는 불행이다.

- 그럼, 이거 사서 고생인가. 쓰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불량 가전제품 처럼, 사회에게 강매당한 가족제도 속에서 곯치를 썩고 있는 것일까.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가족제도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회사일과 집안일은 자신을 괴롭힐 것이고, 교육비는 무거울 것이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따가운 시선은 여전히 불행할 것이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여전히 길거리쉼터와 PC방을 전전긍긍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들은 가족제도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단, 가족제도를 선택했을 때, 이중삼중의 고통으로 다가올 뿐이다. 나의 불행이 나의 가족의 불행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불행은 가족의 불행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가족간의 관계가 그렇다고 느끼게 만들 뿐이다.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 그렇다면, 행복도 관계수 만큼 배가 되고, 불행도 관계수 만큼 배가 된다면 적어도 손해는 아닌가? 그렇다. 손해는 아니다.

다만, 진짜 문제가 거기에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행복과 불행의 선순환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이 가족의 불행이고, 가족의 불행이 나의 행복일 경우 말이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두 명이고,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세 명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관계는 관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완전히 행복하지도 완전히 불행하지도 않다.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해결되지 않는, 아니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시작된다.

- 어차피 가족제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사회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관계로 인한 행복이나 고통, 행복도 고통도 아닌 갈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손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회에서의 갈등 해결 보다, 가족제도 내에서의 갈등 해결은 훨씬 비민주적이다.

사회와 달리 가족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종신계약이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한 번 이루어지면 영원히 유지되어야 하는 종신계약.

-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족제도 뿐만 아니라, 사랑, 신념, 취향, 등 영원할 수록 더 가치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아도 가치가 있다. 사람의 생각과 취향, 애정은 수차례 바뀔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상식적인 얘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계를 맺을 때 이 상식을 잊는다.

계약, 그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고 그에 맞는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일년이면 일년, 십년이면 십년, 종신이면 종신. 왜 천편일률 적으로 지키지 못할 종신계약을 맺는가.

- 이혼이나 가족의 해체와 같은 계약파기 행위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지사. 누군가가 물질적 정신적 대가를 치루면서 갈등이 수습해가야 한다.

하지만, 이들이 전적으로 파렴치한은 아니다. '무료'라는 말만 듣고 덜컥 가입한 서비스에 된통 요금을 치르는 휴대폰 사용자 처럼, 이들은 분명 자신의 약속(계약의 준수)을 지키지 못했고 그 대가를 치루어야겠지만, 이들이 계약의 주체가 되지 못한 불공평한 계약 과정도 참작되어야 한다.

- 적어도 나만은 종신형 가족제도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질까. 내가 이것을 선택하는 것 역시도, 미약하지만 늙어가는 부모님께는 불행이고, 갈등의 소지가 다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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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7-2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 만만치 않죠. 국가, 자본만큼 제도라는 것이 말입니다. 없는 사람들의 가족이란 것이 말예요. 가족이란 틀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단란함, 사랑..등등도 말입니다. 공적영역을 사적영역과 분리해내고, 사적영역에 지나치게 관심갖게 만든 틀도 가족이란 제도에서 파생된다고 하더군요. 당위의 문제는 아니겠죠. 그 가족제도라는 것이 몇백년은 더 흘러가는 것이고...아니 더 길 수도... 현실은 그렇지 않으면서도...또 선택해야한다면...어이쿠 복잡해지네요. 그냥, 가족제도란 문제제기에 공감하면서 흔적 남깁니다.

sb 2007-07-3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천편일률적인 것은 나쁘지만, 가족제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스스로 선택하고 선택이 존중받았으면 좋겠어요.
 

(출처: 한겨레)

팔봉 김기진, 김유정, 채만식, 그리고 유석 조병옥. 얼핏 하나로 연결되지 않을듯한 이 네사람들에게는 뜻밖에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일확천금의 꿈’을 찾아 금광으로 떠났던 사람들이란 점이다. 물론 누런 노다지는 그들을 외면했고, 이들의 꿈은 한낱 백일몽으로 끝나버렸다. 훗날 김유정이 남긴 소설 <금따는 콩밭>과 <노다지>, 채만식의 <금의 정열>에 지은이들을 사로잡았던 그 열병의 자취가 그대로 담겨 지금에 전하고 있다.

1930년대, 조선땅은 일대 광기에 휩싸였다. 일자무식의 무지렁이부터 대학교수까지, 배운이 못배운이 가릴 것 없이, 가난한 이는 가난해서,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겠다며 광기에 동참했다. 그 광기의 정체는 바로 ‘금광 투기’였다. 국문학자 권보드래씨가 1920년대 조선을 ‘연애’라는 새로운 감정에 사로잡혔던 ‘연애의 시대’로 명명했다면, 그 뒤를 이은 1930년대는 가히 ‘투기의 시대’라 이름붙일만한 시기였다. 노다지를 잡아 조선 최고 재벌이 된 최창학이나 <조선일보>의 사주가 된 방응모 같은 이들이 나오자 사람들은 더더욱 불나방처럼 금광으로 몰려들었다.

국문학자인 전봉관(34)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이러했던 1930년대에 ‘황금광시대’란 이름을 붙였다. 전 교수가 최근 펴낸 <황금광시대>는 저 멀리 150년전 지구 반대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만 ‘골드 러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70년전 이 땅에도 한바탕 골드 러시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다.

역사학자도 아닌 국문학자가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금광열풍을 탐구하게 된 것은 우연같은 필연이었다. 1930년대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시기에 금광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이 많은 점에 주목하게 됐고, 그 배경에 ‘금광 투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뜻밖에도 1930년대 이 열풍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전 교수는 동시에 황금광시대에 대해서도 연구하기 시작했다. 책은 그렇게 5년을 투자한 결과물로, 전 교수의 첫 대중적 저서다.

“처음에 가장 놀라웠던 것은 속물이나 무지렁이들보다 오히려 지식인들이 가장 금광투기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골드러시가 있었던 것을 알게된 그때가 마침 온나라가 코스닥 열풍에 빠져들었던 시기였어요. 이른바 배운 이들이 더 투기에 앞장서는 모습이나 맥락이 같은 것을 보면서 투기의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들여다볼 필요를 느끼게 됐습니다.

전 교수는 책에서 근대화나 경제개발같은 경제적 성과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눈물이 녹아있는지, 그리고 투기란 것이 사람들의 꿈속에 얼마나 교묘하게 파고들어 그 꿈을 왜곡시켜버리는지 역사적 사실을 통해 보여준다. 모두가 최창학이나 방응모가 될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하고 간단한 진리를 사람들은 애써 무시하며 투기에 나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70년대 개발 성과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당시 아파트 투기, 땅투기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금세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근대화, 그 속에 숨은 투기의 뒤에 가려진 서민들의 피눈물을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보물선’ 해프닝이나 이용호게이트 같은 사건을 보면 지금 우리는 여전히 황금광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이용호게이트: 2001년 7월, G&G구조조정(주) 회장 이용호()의 주가조작 사건 때 검찰이 이용호를 불입건하면서 불거진 일련의 로비 의혹사건.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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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앞부분 생략) “홀로 병실에 누워 있으니 묻는다. 아내는요? 자제분들은? 가족간호는 의료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가족에 떠넘기고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다. 핵가족화,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멀지않은 장래를 생각해보라. 의료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가족주의적 인정이라면 바로 지금, 시민 스스로가 가치관을 바꾸려하지 않는 한 미래는 어둡다.”

내 파트너는 그날 밤 내 증상이 안정되는 걸 지켜보고서야 집으로 갔다. 그녀는 다음날 아침 일찍 왔으나, 요건만 상의하고는 그대로 어학당에 갔다. 이런 행동은 한국에서는 드문 것일까. 병실은 6인실로, 내 양옆의 침대에는 여성들이 환자 시중을 들며 함께 묵었다. 환자 부인들인 모양이다. 허물없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 여성들이 내게 “사모님은?” 하고 묻기에 “학교에 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어쩐지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여성이 “자제분들은?” 하고 물어서 “없습니다”고 하자 “왜요?” 하고 거듭 물었다.

한국에서는 아이가 있느냐는 질문을 흔히 받지만, 특히 이런 경우에는 병원에 문안 오거나 곁에서 시중드는 가족은 없느냐는 의미일 거다. “없다”는 대답은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겐 의외이기도 하고 연민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확실히 그 병실 환자들에겐 들락날락하는 아들이나 딸, 며느리들이 병문안들을 왔다.

나중에 파트너한테서 들은 얘긴데, 그날 처음으로 어학당 수업에 지각한 그녀에게 선생이 이유를 물었단다. “왜 지각했어요?” “지난밤 남편이 입원을 해서…” 그 순간, 선생은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저런! 그런데 왜 학교엔 나왔어요?” 한국에서는 남편이 입원하면 처가 시중드는 게 사회적 상식인 걸까? 그렇다면 내 파트너는 상식에 어긋난 냉혈 인간인 셈이다.

일본의 병원에서는 완전 간호가 원칙이다. 중병이나 수술 직후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곁에서 시중을 들 수 없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정해진 면회 시간에만 면회를 할 수 있다. 그런 원칙이 최근 20년 정도 지나면서 사회적 상식이 됐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 원칙을 더욱 엄격하게 지킬 것이다.

(중간 생략) 일본의 보수파는 버블(거품) 경기가 꺼진 뒤 긴 불황을 거쳐 전후 민주주의의 근본이었던 ‘개인의 존엄’이라는 원칙을 버리고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거기에는 의료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가족’에게 떠넘기고 여성의 희생을 강화함으로써 문제를 해소하려는 저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앞으로 일본에서도 완전 간호 원칙이 무너져 여기저기의 병실에서 환자 시중을 드는 가족들 모습이 눈에 띄게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본인의 가족애가 높아진 결과는 아니다. (뒷부분 생략)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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