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 10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1천여명이 처형당하거나 고문받다가 또는 귀양 중에 숨지고 투옥당하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당시 인구 500만이던 조선 전토를 참화 속에 몰아넣었다. 뒤이은 임진년 왜란조차 기축옥사의 황폐가 부른 재앙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사태는 참혹했다. 그 중심에 정6품 홍문관 수찬에 올랐던 당대의 귀재 정여립(1546~1589) 모반사건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은 바로 정여립 모반사건의 시대적 배경과 연루된 인물들을 종횡으로 추적한다. “조선왕조는 정여립 사건 이후 300년을 더 버텼다. 하지만 영·정조 때 잠깐 불꽃을 피워올렸을 뿐 지리멸렬했다. 그때가 개국한 지 200년이었는데, 한 왕조의 수명은 200년 정도면 족하다는 얘기들이 많다. 그때 차라리 정여립이 반란에 성공했거나 다른 왕조가 시작됐더라면 이후 우리에겐 새 역사가 전개됐을 것이다.” 전주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서울에 사무실을 둔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대표도 맡고 있는 ‘문화사학자’ 신정일(53)씨. “1980년대 말부터 정여립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니 20여년간 공부해온 셈이다.”

정여립은 정말 반란을 꾀했을까? 실은 이 기초적인 사실조차 규명돼 있지 않다. 사건조사기록 <기축옥안>은 임진란에 불탔고, 남아 있는 얘기들은 당파에 따라 극단으로 엇갈려 어느쪽이 진실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정여립은 행적이 모두 말살돼 남들이 전하는 얘기 외에 그가 쓴 문서 하나 남은 게 없다. 유혈낭자했던 그 ‘최대의 역모사건’은 애초부터 시비를 가릴 아무런 물증도 없었다. 동서 ‘붕당’의 파벌전쟁 속에 고변과 음해, 아비규환의 고문과 자백만으로 엮어낸 대숙청극이었다. 그래서 완전한 날조극이라는 주장이 예부터 있었다.

지은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정여립이 모반을 꿈꾸고 준비를 한 것은 사실이다. 50%가 날조된 옥사이고 50%가 정여립의 역모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인 김지하씨는 정여립을 “(세상 뒤엎기를) 하다 만 사람”이라 평했다.

사건은 발생 초기 선조(1552~1608)마저 거의 뜬소문으로 여길만큼 첩보조차 구체성이 없었다. 조정은 정여립이 붙잡혀 와 자초지종을 고하기만 해도 해소될 별볼일 없는 무고사건 정도로 여겼으나 첫 비밀장계가 뜬 지 닷새 뒤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장계가 떴고 곧 다시 그가 자살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가 도망쳐서 자살했다는 것은 곧 실제 반역을 꾀했다는 얘기가 된다.” 지은이는 이를 당시 정권에서 소외돼 있던 서인들이 정권 재탈환을 위해 정여립 일당을 이용한 모략극으로 본다. “기축옥사 최고 지휘관이 정철이었다면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은 송익필이었다.” 토정 이지함이 율곡 이이, 성혼과 더불어 시대의 스승으로 꼽았던 서인 송익필은 조선중기 8대 문장가에 들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나 아버지 송사련이 기묘사화 때 사건을 날조해 좌의정 안당 가문에 멸문지화를 안긴 과거사 때문에 동인의 핵심 제거대상이 됐고 마침내 동인 이발 등이 나서 송익필의 조모가 원래 안씨 가문 노비였던 걸 들춰내 송씨 일가를 모두 노비신분으로 ‘환천’시켜버렸다. 

가문 몰락의 한을 품고 보복의 기회만 노리던 송익필은 낙향한 뒤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 반왕조적 대동사상에 빠져 이상사회를 꿈꾸던 정여립의 대동계를 반격의 고리로 활용했다.

신씨는 <동소만록>에 나오는 “정여립이 진안 죽도로 단풍놀이 삼아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죽인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는 기록을 믿는다. 정여립이 고변으로 역모가 들통나자 도망친 것이 아니라 서인 쪽이 미리 심어놓은 진안현감 민인백 등이 단풍놀이 가자며 정여립을 죽도로 유인한 뒤 죽여버리고는 도망치다 자살했다고 보고함으로써 역모사건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건조사 총책임자가 된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은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에 정여립이 도망갔을 것이라 발설했다. 사전에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신씨는 단재 신채호도 “동양의 위인”이라 칭송한 “당대의 인물” 정여립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기록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얘기가 세월 갈수록 그에겐 더욱 깊게 와 닿는다. 하지만 ‘정여립이 억울하게 당했다’며 그의 누명 벗기기에 골몰하는 역모사건 날조설엔 부정적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해서는 영국의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선 공화주의자였던 정여립의 진보적 개혁사상을 재조명할 수도 없고, 역사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축기사>에는 정여립이 남겼다는 몇 마디 말이 기록돼 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유비의 촉한이 아니라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는데….” 가히 혁명적이다.

신씨는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허균의 호민론으로, 그리고 다산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으며 근대의 동학사상과 강증산의 화엄적 후천개벽사상, 미륵신앙도 그 줄기로 엮여져 있다”고 본다. 민중은 새 세상을 염원했다.

<한국사의 변혁을 꿈꾼 사람들>, <섬진강 따라걷기>, <다시 쓰는 택리지>, 그리고 이번 책까지 33권의 책을 써낸 신씨는 그 자신이 학위날조로 얼룩진 요즘 세태에 대한 하나의 ‘모반’이요 ‘풍자’처럼 보인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는 진안 백운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 중·고교 모두 검정고시로 넘었고 대학은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옛문서들을 웬만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도 오직 독학한 덕”이다. “학벌 없어 당한 설움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이젠 그게 오히려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야말로 학맥 학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통합적으로 쓸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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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문국현 신당’이 14일 첫 모습을 드러냈다. 문국현 대선 예비후보는 14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창조한국당(가칭) 창당 발기인대회를 열고, 창당 작업을 본격화했다.

이 행사에는 이계안 의원, 정범구 전 의원, 주애란 생명의 숲 대표, 윤준하 환경운동연합 대표, 이경자 녹색 네트워크 대표, 허상만 전 농림부 장관,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김용정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영호 전 산자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이들을 비롯해 2500명의 지지자들이 몰려 행사는 성황을 이뤘다. 이들은 행사 중간중간에 ‘문국현 대통령’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창조한국당의 중앙위원 1번을 배정받은 문 후보는 연설에서 “문국현의 등장은 이 혼탁한 대선 판에 ‘사람중심 진짜경제’와 특권층만을 위한 ‘부패한 가짜경제’의 ‘가치논쟁’을 점화시켰다고 저는 자부한다”며 “창조적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결합한 국민통합의 정당은 사람의 가치를 모든 분야의 중심에 두고 대한민국을 재창조하는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후보는 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청년실업 문제를 거론하며 ‘눈높이를 낮추라’는 훈계를 늘어놓은 적이 있다. 이러한 발상이 가능한 근저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경멸과 무책임이 드리워져 있다”며 “5% 특권층의 눈으로만 사회현상을 파악하는 천민자본주의적 천박성이 문제의 핵심”이라며 이 후보를 비판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일자리 500만개 창출 △건설부패 등 각종 부패행위 척결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 △행정고시 폐지와 민간전문가 등용을 통한 정부 재창조 등의 공약도 내놓았다.

창당 작업을 실무적으로 주도한 창조한국 조직위원장 전재경 생명회의 대표는 이날 행사에서 “과거형 정당은 외줄을 즐겨 타지만, 좌우 어느 한 쪽 트랙만을 도는 정당은 곤란하다”며 “미래형 정당은 오른쪽에 있는 시장과 왼쪽에 있는 사회적 약자를 번갈아 보살펴야 한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문국현 신당의 성패는 문 후보 자신의 힘으로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문 후보는 오래 전부터 대통합민주신당 등 범여권의 러브콜을 받아 왔지만, 기존 정치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대선 행보를 해 왔다. 양극화 심화에 책임이 있는 정치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통합민주신당 의원들도 문 후보의 잠재성은 인정하면서도, 탈당까지 결행하며 그를 위해 ‘제대로’ 돕겠다는 의원은 극히 일부다. 문 후보 쪽은 자체 역량으로 지지율을 높여, 통합신당의 대통령 후보를 압도해 단일 후보가 되겠다는 계산이지만, 아직까지 변화 조짐은 뚜렷하지 않다. 일단 통합신당 경선이 끝난 뒤 단일화 국면에서 문 후보의 지지율 추이가 그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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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에서 발췌 및 임의 편집)

바리공주 설화에서는 바리가 서천에 가서 약수를 구해다가 죽은 부모를 살린다. 하지만 〈바리데기〉에서는 바리가 찾는 생명수가 무엇인지조차 나타나 있지 않다. 혹시 ‘눈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든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사람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물이 과연 생명수일까? 각종 끔찍한 폭력으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한줄기 연민조차 없다면야 그 어떤 대처방안도 없겠지만, 눈물만으로 굶주림, 구타, 집단강간, 죽임, 테러와 전쟁이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21세기 지구촌을 구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폭력에 관한 정당한 대처 방안은 비폭력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면 그 역시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의 확산과 악순환을 막을 길이 없다. ‘올바른 폭력은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직접행동’이라는 용어와 함께 비폭력의 새로운 형태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식의 전통적인 비폭력은 ‘폭력을 가하는 자가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 이 주장의 시발점이다.

따라서 폭력을 줄이려면 적극적으로 맞서 전략적으로 싸워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직접행동이다. 그 결과 직접행동은 때로 과격해질 수도 있지만 그 목적이 비폭력에 있다는 점에서 테러와는 다르다. 대표적인 예로 ‘간디의 소금행진’을 들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영국이 독점하는 내용의 소금세법이 실시되고 있었다. 간디는 이와 같은 영국의 폭력적 억압들을 폐기하기 위해 11개 항목의 요구안을 제출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제자들과 함께 아마다바드에서 출발하여 무려 388㎞를 걸었다. 그리고 단디 해안에 도착하자 소금을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인도 독립의 견고한 발판이 되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직접행동이라는 표현 없이는 비폭력은 무의미합니다. 직접행동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장 행동적인 힘입니다.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비폭력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직접행동이라는 적극적 저항에 의해서만 폭력을 줄이고 비폭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직접행동은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에 자기 몸을 묶고, 핵폐기물을 실은 열차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뽑아버리는 등의 다양한 시민운동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직접행동〉을 쓴 에이프릴 카터는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실천이며,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렸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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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2008년 사극의 시계는 앞으로 당겨질까? 193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전설적인 마피아 보스 제이슨 리(이장손·사진) 일대기를 담은 <자이언트>, 가수 이난영(사진)을 그린 <목포의 눈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를 다룬 <비운의 이방자 여사> 등 20세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이 줄줄이 제작을 앞두고 있다.

이는 사극 열풍이 우리 시대 가까운 역사로까지 확대됐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전 같으면 20세기를 그린 시대물은 대부분 시대 배경만 빌어 쓰는 허구적인 드라마로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사극과 구분됐다. 그런데 2008년 예정작 가운데 <단군> <일지매> <홍길동>은 고대와 중세를 배경으로 허구와 상상력을 강조하는 반면에 20세기 실존 인물을 다룬 드라마들은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역사극에 가깝다.

<다모> <주몽>의 정형수 작가가 집필하는 <자이언트>는 100여년 전 미국 뒷골목을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해 미국 쪽 작가진이 합류할 예정이다. 가수 이난영의 굴곡진 인생사와 주변 음악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목포의 눈물>은 이선희 작가가 여러 해 동안 연대기와 관련 자료들을 취재해온 결과물이다. 이 작가는 해방 전후 가요사와 문화적 분위기를 꼼꼼히 고증한 데다가 이난영씨의 유족들을 통해 인간 이난영의 캐릭터를 되살리는 작업을 거쳤다.

작가들이 ‘20세기 역사극’에 도전하는 이유는 압제와 전쟁의 시대 자체가 어떤 작가의 상상력보다 극적이기 때문이다. 또 채 잊혀지지 않은 20세기 초반 인물들의 영화와 부침은 실감나는 역사극의 재료라는 것이다. 이선희 작가는 “일제시대와 전쟁, 만주·일본·한반도를 활동 무대로 했던 한 스타의 사랑과 욕망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동경과 공감을 얻기에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이방자 여사 일대기를 준비하는 정하연 작가는 “격렬하고 자극적인 사극이 유행하는 경향이지만, 가까운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인물의 이야기는 굳이 허구적인 재구성이나 자극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며 “극화를 배격하고 사실에 충실한 사극의 원형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20세기 역사극’은 퓨전, 판타지 사극이 방치했던 사료와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돌리고, 퇴행하는 사극을 견인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지만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에스비에스 구본근 드라마 국장은 “요즘 사극은 영웅과 승리를 지향하는 경향인데 암울한 시기를 재현한 역사물이 과연 대중성이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제작과 편성에서부터 난관에 부딪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또 드라마 <서울 1945>를 둘러싼 논란처럼 근현대사에 따르는 이념 시비와 유족들의 이의제기는 제작진들의 사전검열을 부추긴다. 현실과의 긴장관계는 ‘20세기 역사극’의 자산이자 걸림돌이 될 것이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사진한국방송,목포문화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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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온라인 유료 콘텐츠의 성공적 모델이었던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이 지난달부터 무료 서비스로 돌아섰다. 또 일본에선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포털에 대항해 공동 뉴스사이트를 만들기로 1일 합의했다. 미국과 일본 신문업계의 온라인 전략 변화가 관심을 끈다.

■ 미국의 온라인 전략=뉴욕타임스는 그동안 온라인 콘텐츠의 이원화 전략을 추구해 왔다. 어느 언론에서나 다 볼 수 있는 기사는 무료로, 토머스 프리드먼이나 폴 크루그먼 등 유명 칼럼니스트의 ‘킬러 콘텐츠’는 온라인상에서 유료로 제공했다. 온라인 구독료는 월 7.95달러, 연간 49.95달러로, 가입자가 꽤 됐다.

월스트리트저널 온라인판은 연간 99달러로 뉴욕타임스의 2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평판이 좋았다. 따라서 월스트리트저널의 콘텐츠 유료화 전략은 굳건해보였다. 그러던 월스트리트저널이 갑작스레 무료화로 선회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이런 방침은 새로운 인수자 루퍼트 머독의 뜻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무료화 선회는 유료 콘텐츠 수익보다는 광고시장에 무게를 둔 것으로 해석된다. 웹사이트 출입에 장벽을 없애면 방문자와 광고효과는 일단 늘어나기 쉽다.

또 이들도 한국 신문들처럼 포털과의 경쟁에 내몰렸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부분적 제휴를 하는 야후·구글 등 포털이 아웃링크 방식으로 뉴스를 제공하는 마당에 정보의 집적성과 편의성에서 뒤질 수밖에 없고, 뉴스 접근방식이 다양해졌기 때문에 더는 유료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분석된다.

■ 일본 신문의 공동대응=아사히(공인 발행부수 800만부), 요미우리(1천만부), 니혼게이자이(300만부)는 내년초 세 신문의 사설·일반 기사·해설을 한눈에 비교해볼 수 있는 공동사이트 설립 등 인터넷 분야의 제휴방침을 밝혔다. 3사는 산간벽지 등 배달망의 유지가 어려운 지역에선, 판매와 배달을 3사가 협력하고, 재해 때 신문 발행을 서로 돕는 계획도 발표했다. 3사의 업무 제휴는 종이신문 시장으로 침투해 온 포털을 견제하기 위한 공동전선 구축이다. 아사히의 아키야마 고타로 사장은 “야후와 구글 등이 내보내는 뉴스의 대다수는 신문사의 취재에 의한 것”이라며 “신문사의 역할과 영향력을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인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휴한 것이라고 밝혔다. 공동 사이트의 인터넷 접속은 무료로 할 방침이다. 그러나 요약기사만을 올린다. 자세한 기사는 종이 신문을 통해 보도록 독자를 유인할 계획이다. 

신문 강국인 일본에서 그것도 경쟁 관계의 유수 신문들이 업무 제휴에 나섰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올 초에 니혼게이자이 등 전국지와 지역신문 52개사가 참여해 만든〈47뉴스〉라는 인터넷 동맹이 포털과의 경쟁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해, 3사 전략의 귀추가 주목된다.

■ 국내 시장 시사점은=황용석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국도 미국·일본처럼 온라인 전략을 강화해 새로운 수익모델을 눈여겨볼 것을 제안했다. “뉴욕타임스는 아카이브와 브랜드 가치가 높은 신문이다. 웹 2.0 모델을 채택해 개방형으로 접근하고 있다. 우리도 웹 환경은 오픈 경영으로 하되 제휴를 통한 다자간 수익모델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웹 2.0 시대에 맞춰 많은 사람들의 정보 공유와 소통을 바탕으로 배너광고뿐 아니라 저작권 보호 측면의 디비사업인 뉴스코리아나 뉴스뱅크, 그리고 기사의 신디케이션 등으로 수익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현숙 기자, 도쿄/김도형 특파원 hyuns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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