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1
손아람 지음 / 들녘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한국 힙합의 꽤 오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 기록은 너무 부족하지 않은가. 한 해 전, 모 스포츠 의류 회사에서 제품 홍보를 겸해 발행한 책을 제외하면(그나마 한정판이었다.), 한국 힙합에 대한 독립적인 출판물은 없었던 셈. 시내 대형 서점을 둘러봤지만, 미국 힙합 뮤지션에 대한 단행본이 한 권 있을 뿐이었다.

-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눈에 띄었다. 더구나, 글쓴이는 한국 힙합 1세대.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소설이라는 형식이 다소 방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겠으나, 대신 한국 힙합 씬에서 활동했던 뮤지션의 자전 소설이라는 장점이 내용의 깊이와 생동감을 더한다. 아래는 본문에서 발췌.  

--------

[사건]

- 전속계약, 음반제작, 장당 인세
- 세션을 통한 음반사와의 갈등
- 한국어가 잃은 발음의 역학적 측면, 쉽지 않은 발음체계. 혀의 운동 부담까지 고려해야.
- 천자문 힙합. 대중을 경멸하면서, 난해하고 익숙하지 않은 소리들을 찾아 헤매고 다니는 음악.
- 감동은 항상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
- 산문은 쉬워. 단지 좋은 글이면 충분하니까.
- 마리의 힙합으로의 전향
- 객석에 침투한 한 명의 프락치는 건전한 관객 백 명을 바보로 만든다.
- 작곡이 본능적인 감각이라면, 편곡은 훈련이다.

"방황은 삶이 평탄한 사람들의 특권이다."

[용어]

클럽 크립
AKA: Also Known As
멀티트랙레코딩
소울트레인: 흑인음악 시상식
MR: Music Recording
케이크워크 미디시퀀서: 전자적으로 음악 구성
BPM: Beat Per Minute, 1분마다 반복되는 드럼 구간의 개수.
텅트위스터: 저항이 심한 발음을 연달아 사용
롤랜드: 저렴한 악기상표
에이징: 음향기기 진동판이 모든 음역에서 작동하도록 음악을 틀어두는 것
패칭: 음악에 사용된 악기 또는 소리를 바꾸는 것
부클릿
초자연적인 현상
인스트루멘탈
킥/드럼/하이햇/스네어
LA를 중심으로 한 웨스트코스트 음악(멜로디 중심) / 뉴욕을 중심으로 한 이스트코스트(나스-랩 중심)

[인물]

DMS: 부산에서 제일 큰 흑인음악그룹
Twista: 텅트위스터의 대가
주석
메타 가리온: 노친네
렉스: 테이프 직거래
Sid
손 전도사: 가장 빠른 랩을 구사
오 박사
DJ Uzi: '우지스 마인드' 친해지기 위해 씹는다.
김도현: 전업 작곡가
UMC: 성대 국문학과
현상: 유명한 작곡가. 인기 많아.
조PD: 성공, 얼굴 감추기, 대기업의 후원, 음반사 창업
마리: 프릴
태완: 흑인음악의 신봉자.
버벌진트, 4WD: Uzi, 조PD 디스
Insane Deegie: 술꾼
SNP: 나우누리 흑인음악 동호회. 휘성, 버벌진트, 4WD, 데프콘
소울트레인: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니네 방 -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
언니네 사람들 지음 / 갤리온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 신촌 홍익문고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 책을 처음 훑었었나. 두 권의 책을 다시 찾아 읽었다. 아래는 책에서 발췌.

-----------

# 섹스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웠을까? 누가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아무 느낌도 없으면서 아니 아프고 힘들기만 하면서, 헉헉대는 신음 소리를 내고 느낌이 있는 척을 하고 심지어 좋은 척, 만족스러운 척까지 해야 한다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나에게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 정서적 교감이었다면 굳이 그 남자들과 몸으로 교감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정서적으로 교감한 상태에서 육체적 교감도 나누고자 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에서 아프다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즐겁지 않다고 정직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미 그 사람과 정서적으로도 교감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에 들어올 때, 여성은 굉장히 다양한 느낌과 감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감각들은 때로 힘으로 때로는 부드러움에 의해 살아나고, 여성의 성기와 남성의 성기가 다양하고도 섬세한 움직임에 의해서 만날 때 더욱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섹스에 있어서 마음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몸과 감각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의식적 억압들을 내던져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런 감각을 느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독점하려고 하지도, 함께 할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더 잘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고 상대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주었다. 그것이 비록 잠시일지라도, 시간과 공간, 정신과 육체를 나누면서 서로의 가장 좋은 모습을 일깨워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자위

“자위는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위해 빨리 하고 끝내는 게임이 아니라 자신과 나누는 대화이다.”

# 여자와의 남자

“어떤 남자들은 말 그대로 관계에 기생하며 여자들의 감정을 착취한다.”

# 비혼

“나는 이 삶의 문제를 ‘결혼’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을 뿐이고, 더 솔직하게 결혼으로 해결될 것인가에 대해서 확신도 없다. 우리 비혼들 스스로도 결혼이 보류된 상태로 조용히 불편해할 일이 아니라 내가 언제 어느 때 결혼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현재로 비혼인 나의 삶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야 할 것 같다. 단독가구와 맞벌이가구 추가공제를 없앤다는 안이 나왔을 때 맞벌이 부부들이 얼마나 당당하게 반대여론을 형성했는지.”

“그녀들의 수많은 감정과 경험이 오직 단 하나, 결혼을 못 했기 때문으로 해석되는 단순무도함은 끔찍할 지경이다.

# 이혼

“어쩌면 의부증을 끝내고 싶은 욕망의 발현인지도 몰라. 지긋지긋하게 힘들고 괴로운 시절을 지날 때,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워주면,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그런 욕망의 발현 말이야…”

# 밤길

“전국에서 열린 ‘달빛시위’는 성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현실에 반대하고, 일방적으로 억압당하는 여성의 자유와 권리가 회복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여성이 보호의 객체가 아닌 저항의 주체로서 자신의 힘을 발견하고 키워내며 모아낼 수 있음을 선언하는 자리였다.”

“노처녀라는 단어가 말해주는 건 ‘노처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편견과 무식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공존

“언젠가부터 내가 너무 행복하지 않고, 너무 자주 주변사람들과 충돌하면서 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상처 주고, 이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는 술과 담배와 게임과 쇼핑 따위밖에 없고, 그렇게 지구와 우주에 폐만 끼치면서 살고 있다는 게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니네 방 2 -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울 때 내게 힘이 되어줄 그곳
언니네 사람들 지음 / 갤리온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 신촌 홍익문고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 책을 처음 훑었었나. 두 권의 책을 다시 찾아 읽었다. 인정함에서 얻는 마음의 평화, 당당함에서 얻는 유쾌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들. 언니들에게 감사하다. 아래는 책에서 발췌.

-----------

"제대로 된 가족이나 친구, 애인이 없으면 왠지 불안한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역시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고 말하고, 남들처럼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고도 말한다. 진정한 친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런 말들은 현재의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게 만들기보다 왜 나는 더 좋은 집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지금 만나는 상대는 결혼을 해도 괜찮은 사람일까, 내 친구들은 과연 진정한 친구일까 하며 계속 의심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한다.
이제 우리는 다르게 살고 싶지만 그 시작이 두려운 사람에게 이 책을 내밀면서 손을 잡고 싶다. 제대로 된 가족, 친구, 애인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좀 더 쉽게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했으니까 당신도 할 수 있다."

「관계맺기」
"한번 비밀을 말하기 시작한 관계는 비밀의 무게만큼 점점 더 무거워진다."
"환상만큼 관계에 해로운 것도 없다. 환상 속에서는 내가 누구일 수 있는지보다 누구여야 하는지가 더 중요해져 버려서, 결국은 서로를 답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하려 하지 말 것"
"식민지 상태의 평화는 싫다. 당신과 나, 일단은 전쟁, 그러고나서 가능하다면 화해다."

「연인과의 새로운 이별공식 - 왜 꼭 안 만나야 해?」
"우리 사이에 익숙함과 신뢰가 자리 잡은 대신, 서로에 대한 끌림이 사라진 것이다."
이별의 단계1. 헤어짐을 인정하기
이별의 단계2. 상대에게 애인이 생겼음을 인정하기
이별의 단계3. 나에게 애인이 생겼음을 인정시키기.

「결혼하지 않고도 외롭지 않게 사는 법」
"병에 대한 두려움은 병에 걸린 상태를 제대로 살아가는 상태로 여기지 않을 때, 병을 완전히 비정상적이고 전적인 무기력 상태며 벗어나야 하고 고쳐져야 할 무언가로 생각할 때 감당할 수 없게 커진다. '강해져야 한다.'거나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다른 약한 타인들과 시선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동거하는 법」
한 집에 산다고 모든 것을 공유하려 하지 말 것
공동의 방 보다는 각자의 방을 갖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서로의 공간을 존중할 것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을 땐 함께 하고, 원하는 것이 다를 땐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것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하려 하지 말 것

「과거의 깊은 상처와 마주하다.」
"그것은 해결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나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거친 설득이 아니라,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녀들은 '너는 살아남았다.'는 축복을 먼저 건네주었다.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스스로를 마주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는 사랑을 선택하는 가장 특별한 기준을 깨달았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길 것, 그리고 남보다 나를 먼저 안아줄 것."

「1년 반의 동거, 결코 후회하지 않아.」
"사랑이 끝났다고 실패라거나 슬픈 결말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함께 살며 만들었던 크고 작은 기억들이 내 안에 오롯이 남아 있기에 후회나 아쉬움은 없다."

「비혼이 두려운 여자들에게 - 행복한 삶을 위한 유쾌한 상상」
1단계. 비혼 여성 네트워크
2단계. 비혼 가족 구성
3단계. 의료생활협동조합: 여성 의사, 여성 환경미화원, 여성 의대생과 간호대생
4단계. 여성신용금고
5단계. 비혼 마을: 반상회, 공동 육아, 클럽, 용역 교환
6단계. 여성 정당
7단계. 비혼 여성 협동 농장: 농산물 직거래, 실버타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과서에서는 시를 이렇게 정의한다. ‘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고. 나는 이 케케묵은 사전적인 정의를 대폭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의 내용을 이룬다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라는 용어는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애매하다. 이 말을 ‘사람의 생각과 느낌’으로 순화시켜 읽어도 마찬가지다. 또한 시 아닌 다른 문학 장르에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다루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함축과 운율’이 시의 형식적 특성을 드러내는 용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우리 시는 운율적 결속력이 대단히 미미해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운율을 따지는 게 난처할 때가 많다. 한 편의 시가 인간의 사상적 체계에 관여하고 거기에 기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상을 해설하거나 추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감정을 드러내고 쏟아 붓는 일은 시작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당신이 보고 싶다거나,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우리는 ‘고백’이나 ‘넋두리’ 혹은 ‘하소연’이라고 부른다. 그런 것들이 시의 일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시의 모든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감정의 정화조다.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여과시키는 일이 바로 시인의 몫이다. “시란 개인적인 욕망에서 이루어지는 욕망의 발산 형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나’의 욕망 가운데 가치 있는 어떤 경험을 선택하고 객관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남과 다른 세계를 유형화해 보여주는 의도적 행위이다.”(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고 눈에 번쩍 뜨이는 말을 해준 이는 연암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감정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하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의 받아 적기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감정을 언어화하는 이 과정을 ‘묘사’라고 한다. 그러니까 묘사란 감정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그려내는 것이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묘사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낮추거나 무릎을 구부릴 줄 알아야 한다.
혹시 들길을 걷다가 당신은 달개비 꽃잎 속에 코끼리가 한 마리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묘사는 시쓰기의 출발이면서, 또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세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세밀하게 그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서정시에서 흔히 자아가 대상에 스며드는 것을 ‘동화’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하고, 거꾸로 어떤 대상한테 자아를 맡기고 비춰보는 것을 ‘의탁’ ‘투사’ 혹은 ‘투영’이라고 한다. 애처롭고 딱한 감정(惜)을 단순히 토로하는 게 아니라 꽃잎이 낡은 지붕을 덮는 객관화된 풍경과 동일시하는 이 기법은 묘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묘사는 무엇보다 구체적 형상화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시에서 구체성은 감동의 원천이고, 삶의 생생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마나 몸이 아플 것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노래를 시켜도 한 번쯤은 뒤로 뺄 줄 아는 자가 시인일진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겨레,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임의로 발췌 편집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엊그제, 아주 아름다운 결혼식을 보았다.
음악회를 겸한 결혼식이었다. 초대객은 양가 가족을 합해서 100명을 넘지 않았다. 먼저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단의 연주가 시작됐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중 ‘서곡’이 첫 곡이었다. 이어 소프라노 강혜정·이아경씨가 노래를 불렀고,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1번 <엘비라 마디간> 중 2악장을 연주했다.

결혼식은 그 다음에 이루어졌다. 신랑과 신부는 상기되어 있었다. 두 사람 다 50대로서, 일찍 혼자된 뒤 오랜만에 새 짝을 만나 하는 결혼이라 감회가 남달리 큰 듯이 보였다. 신랑에겐 전부인과 낳은 20대의 남매가 있었고, 신부에게도 일찍 얻은 19살짜리 딸이 하나 있었다. 이제 한 가족이 된 꽃다운 세 젊은이가 신랑·신부 입장을 앞장서서 인도했다. 세 젊은이는 오랫동안 함께 자라온 것처럼 다정해 보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연주회가 계속됐다.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 작품 20의 연주가 끝나고서야 자리를 옮겨 피로연이 벌어졌다. 100여명의 하객들이 포도주를 곁들여 식사를 했다. 사이사이 하객들의 덕담이 이어졌다.

수가 적은데다 평소 신랑·신부와 워낙 가깝게 지낸 지인들이라서 하객들은 모두 금방 한통속으로 친해졌다. 식사 뒤엔 팝페라 가수가 초대돼 노래를 불렀고, 양가 직계가족들이 앞에 나와 인사말을 했다. 신랑은 혼자 남매를 키우던 때가 생각났는지 딸을 소개할 땐 목이 메었다. 가족들도 눈가를 닦았고 하객들 몇몇도 눈시울을 붉혔다. 딸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고백까지 이어졌다. 정말 사랑과 성찰이 넘치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결혼식이었다. 연주회까지 포함해서 그때까지 거의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리를 뜨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른 결혼식 장면이 떠올랐다.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거의 살포하다시피 하는 금빛 찬란한 청첩장들과 돈봉투를 들고 접수대 앞에 늘어선 사람들과 끝 간 데 없이 줄지어 세워놓은 화환들. 번쩍번쩍하는 조명과 속된 나팔소리. 신랑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거나 야한 농담과 함께 팔굽혀펴기를 시키거나 부모 앞에서 깊은 키스를 주문하는 얼빠진 사회자와 그 친구들. 접수만 끝나면 식장 안에 발도 들여놓지 않고 연회장으로 내달아 접시 가득 산더미처럼 음식부터 날라다 먹는 사람도 부지기수이고, 뒤에 몰려 서서 주례사를 들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잡담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이고, 접수대에서 태연자약 돈봉투를 열어 지폐를 헤아리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많은 이들은 청첩장을 차라리 ‘고지서’라고 부른다. 요즘은 아예 동창회에서 동창생 전원에게 결혼식을 일괄해 문자로 공지한다. 당연히 혼주는 하객들 수를 예측조차 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난장이나 다름없다. 혼주는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지위를 과시하는 데 혈안이고 하객들은 혼주와 눈도장이나 찍으면 그만이다. ‘센 자리’의 혼주에겐 축의금을 빙자한 ‘뇌물 공여’가 다반사라는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니 무슨 축하할 마음이 생겨날 것인가. 혼주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허장성세하려고 하객 아르바이트를 산다는 소문도 있다.

나라고 이런 관행을 비켜간 것은 아니다. 두 아이를 결혼시키면서 좀더 고요하고 품격 있는 결혼식을 상상해 보았지만 상대가 있으니 내 뜻대로만 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관행이 잘못됐다는 걸 아는 사람도 관행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관행의 구조화가 너무도 단단히 진행돼 온 것이다. 낯선 사람끼리 수백 수천 명씩 모여 앉아 게걸스럽게 밥 먹고 공허히 헤어지는, 문화라곤 손톱만큼도 깃들 여지가 없는 이 따위 야만적인 혼례 관행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 관혼상제의 관행은 예법의 기본이고 문화의 척도이다. 이런 야만적인 관행이 어디 혼례뿐이겠는가.

(한겨레, 박범신 작가·명지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