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의 누 - 동양문학 7
이인직 지음, 권영민 교열해제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 신소설,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기에 한번 읽어봤습니다. 70여쪽 남짓한 분량인데, 책장을 덮으니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롭다' 는 경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새롭지 않은' 소설을 좀 더 읽어두었어야 했는데요.

- 결국, 교열을 맡은 권영민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 모두에서 차별이 되더군요. 우선, 형식적인 면을 보자면, 말하는 이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점인데요, 대화체나 '~하더라' 라는 방식의 서술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내용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주인공의 주체적 태도로 표현됩니다.

- 신소설의 새로움이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설명입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자 했던 일본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죠. 일본의 생산양식과 문화에 대한 강조는 곧 조선의 그것에 대한 비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소설 주인공들의 주체적 태도란, 기존 조선사회의 가치들을 부정하는 것으로 표현되구요. 아예 노골적으로 일본이나 미국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 참고로 저자 이인직은 적지 않은 나이에 일본에서 유학하고, 조선에 돌아와 송병준 이용구의 도움으로 신문사를 운영했다고 합니다. 이 신문사들의 논조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인데, <혈의 누> 역시 이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입니다. 친일의 이데올로기 내지 계몽의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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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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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 양세봉 피살
- 민생단 투쟁: 중국공산당 내에서 밀정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다수의 조선독립군을 살해된 사건
- 1935년 농촌계몽운동의 금지
- 집단농장(콜호스)의 건설
- 소수민족들에 대한 소련의 동화정책
- 소련의 조선독립군 무장해제
- 혈청단
- 미나미의 총독부임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 금메달 / 동아일보 정간사건
- 1차 만주이민 10만여명
- 조선혁명당군이 양세봉의 죽음 이후 동북항일연군으로 흡수
-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반 파시즘 인민전선’ 을 주창하면서, 중조항일연군, 조선민족 자치구, 조선항일혁명당이 건설
- 학생첩
- 1937년 보천보 전투
-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1925년 결성)
- 1936년 이재유계 경성트로이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실패
-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우즈베키스탄 8만명, 카자흐스탄 10만명, 지식인 2500명 총살
- 황국신민서사와 내선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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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레시안)

화엄의 소리, 연꽃처럼 피어나…
<기고> 국내 최초 영성음악제 '화엄제' 참관기



▲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에 환호로 화답하는 세계 각국의 뮤지션들 ⓒ 2006화엄제·김문

우리에게는 소리가 있었다. 소리는 말이 되고 염불이 되고 또한 노래가 된다. 소리는 부름이다. 우리 속에서 흘러나와 세상과 공명하는 소리. 그 소리는 언제나 다른 소리들을 불러들이고 다른 소리에 화답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거나 이름을 '부른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다른 피부색과 다른 말, 다른 사상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 소리들의 향연을 펼쳤다.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노래로 영혼의 교감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공연 장소도 전남 구례의 화엄사로 정했을 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영혼의 교감을 나눈다"

<화엄제> 팸플릿을 읽어보고 제1회 국제영성음악제를 왜 열게 되었으며 어떤 고민들이 있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이루어낸 물질문명의 대가인 환경문제, 인간성 파괴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가 화두였다. <화엄제>의 주제를 '첫발자국'으로 정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기주의와 혼란을 극복하고 정신과 물질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한 첫발자국이 되고자 하는 바람일 것이다.

본행사가 있기 전날인 지난 17일, 구례 천은사 앞 통나무 카페에서 일종의 제의로 '타라를 만나러 가는 밤'이라는 작은 콘서트가 열렸다. 타라는 티벳 문화에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의 고통을 함께하며 행복을 발원하는 치유의 원형이 되는 여신의 이름이다. 전설에서의 타라는 수행자이기도 하고 자식을 잃고 의지가 무너지는 아픔과 약함을 경험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어둠과 추위로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카페 안에서 들려오는 악기와 목소리가 다듬는 소리로 다독였다. 드디어 일곱 시가 되어 문이 열리고 입장을 시작했다. 관객들은 각자 촛불을 들고 전깃불 대신 초로 밝혀진 실내로 들어섰다. 인도에서 온 연주자들의 타블라 소리가 낮게 깔리고 객석이 채워지는 동안 공연 참가자인 디첸 샥 닥사이, 박치음, 제니퍼 베레잔이 타라의 그림이 걸려 있는 제단에 불을 켰다.

여성 가수인 디첸 샥 닥사이, 제니퍼 베레잔는 모두 타라를 노래했다. 제일 먼저 디첸이 티벳의 전통적인 형식으로 옴마니반메훔을 들려주었다. 표정, 말투, 몸의 움직임과 노래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삶과 사람과 음악이 서로 스며들어 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런 친구 하나 있으면 나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노래를 듣자니 내가 했던 나쁜 일들이 떠올라요"…"그냥 다 밖으로 내보내 버리세요"

다음엔 화엄제의 총감독 박치음 순천대 교수가 1970~80년대 고단했던 젊은 정신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 '산국화'를 불렀다. 그가 작곡한 만트라인 '님에게로'를 관객과 함께 부르는 시간도 있었다. 함께 어우러져 노래를 부르는 관객의 호응은 연주자들의 카리스마에 걸맞게 아주 열광적이었다. 그는 깨달음의 실천,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화엄사상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님에게로'라고 말했다. 여기서 님은 부처일 수도 있고 또 우리 주변의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제니퍼는 현대식으로 편곡한 옴마니반메훔과 대표곡인 '쉬 캐리스 미(She carries me)', '이프 아이 캔 댄스(If I can dance)'를 불렀다. 앞의 곡은 타라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고, 뒤의 곡은 춤을 출 수 없다면 혁명의 대열에 참가할 수 없다고 했다는 한 여성운동가의 말을 패러디한 노래라고 했다. 노래 중간에 이 음악회를 기획한 이정명 씨와 영적 수행으로써 음악을 선택한 두 여성 음악가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디첸은 유럽 문화 속에서 살면서도 언제나 티벳 고유의 노래와 춤을 통해 내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찾고자 한다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잃어버린 지혜를 되찾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제니퍼는 세계평화와 여성 영성에 관한 노래로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다.

공연이 끝난 뒤 와인 파티를 열어 서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마련되었다. 제니퍼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당신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까 오래전에 내가 저질렀던 나쁜 일들이 막 생각나던데요." 그녀는 두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그냥 다 밖으로 내보내버리세요."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마음을 비우고 비워, 마침내 맑고 드높은 세상을 얼핏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이 표정에 묻어났다.

"반야심경과 법고에서 미국의 영성음악까지 이어지는 여운"

다음날인 18일, 화엄사 대웅전 앞에서 열린 화엄제에는 승려와 신도, 일반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1000명도 넘는 것 같았다. 단청을 하지 않아 더욱 고색창연한 각황전과 그 뒤로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룬 지리산이 공연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영성음악제를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구경하다 스태프들한테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여?"
"영성음악제예요."
"뭐라고?"
"마음을 기도하는 음악회예요."
"그럼, 부처님 음악이구만."

중생을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게 하기 위해 친다는 사물(운판, 목어, 법고, 종)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으로 음악제를 시작했다. 스님들이 읊는 반야심경과 법고 소리가 절정에 이르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첫 번째 출연자인 디첸의 챈팅이 그 여운을 이어 받아 객석은 숨죽인 듯 고요했다.

영성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인도는 물론, 몽골, 일본의 음악은 전통음악에 가까워 보다 근원적인 영혼에 호소하는 느낌이었다. 몽골 인간문화재에 해당하는 공훈가수인 네르구이의 장가(長歌, 오르팅 도)는 마치 넓은 초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친구를 간절히 부르는 소리처럼 아련하고 깊은 울림을 길게 뽑아냈다. 함께 출연한 18세의 몽골 연주자 테무진은 마두금을 켜며 배에서부터 올라와 목과 머리통까지 함께 울려서 내는 소리인 후미(Xuumii)를 들려주었다. 객석에서 그 소리의 독특함과 마력에 대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의 대표적인 타악 그룹 '푸리'의 소리와 연주에 이어 마지막 출연자인 제니퍼가 무대에 나타났다. 모든 출연자들이 다함께 무대에 나와 스님과 관객들이 어우러져 '프레이시스 포 더 월드(Praises for the world)'를 부를 때는 눈물을 훔치는 관객도 눈에 띄었다. 우리에게 생소하기만 한 영성음악을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일상에서는 여간해서 움직이지 않는 저 밑바닥의 마음을 흔드는 음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단순한 콘서트 아닌 개인과 세계의 평화 기원하는 제의"

불교법회의 한 형식인 '야단법석'처럼 화엄제는 단순한 콘서트가 아닌 개인과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제의라 이름붙일 만하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문자 그대로 열린 마당이었다. 서서히 산사에 어둠이 내리면서 음악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잠시 저 아래 세상사의 티끌을 잊게 했다. 쉬이 떨쳐버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인생고라 할지라도 잠시 바닥에 내려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종삼 주지스님 말씀대로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화엄이고, 빈 병에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처럼 선행을 쌓아가면서 우리 마음의 빈 병을 조금씩 채워가는 것이 해탈일지도 모르겠다.

태초에 빛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소리가 있었음을 일깨워준 이번 공연에 대해 말로써 감상을 늘어놓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소설가로서 언어의 힘과 언어가 가진 공감 능력을 믿지만 음악은 언어보다 더 본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젖먹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와 아이의 대화만큼 원형적인 형태라는 느낌이다. 다만 그 날 그 자리에서 소리와 영혼의 공명을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할 뿐이다.

최옥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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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시간은 언제나 널널, 실컷 놀고…일해요

깔끔해도 너무 깔끔했다. 만화가 이원복(60·덕성여대 예술학부) 교수의 서울 테헤란로 작업실은 벽 한쪽에 캐비넷이 줄지어 있는 것 말고는 온갖 잡다한 것이 일체 없었다. “사실은 오히려 어지르는 편이에요. 이것 저것 늘어놓으면 찾지를 못해서 꼭 필요한 것만 꺼내놓아 깨끗해 보이는 겁니다. 대신 집은 완전 난장판이에요. 집은 제 놀이공간이거든요.”

이 교수는 뜻밖에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놀기’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 교수의 1년 작업량은 책 2권 정도. 쪽수로는 500쪽 안팎이므로 하루 작업량은 대략 2쪽 분량이니 실제 작업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인맥이니 그런 것을 아주 싫어해서 사교 모임에 나가지도 않으니까 시간은 언제나 ‘널널’합니다. 실컷 놀고 남는 시간에 즐겁게 일하면 되요. 창조적 휴식을 갖는 거죠. 그게 확대재생산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노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또 있으랴. 놀려면 돈·시간·건강이 필요한데, 대부분 사람들에겐 늘 이 셋 중 한두가지가 없기 마련이다. 이 교수는 그런 점에서 선택받은 사람이다. 저술가로 거둔 성공, 그리고 교수란 직업이 그에게 경제적 여유와 시간을 확보해준다. 휴식이 필요하면 과감하게 여행을 떠난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은 9년 동안 유학했던 독일. 해마다 두 세번씩 간다. “행복해요. 만화 그리면서 대접 받고, 내 시간 즐길 수 있고, 남는 시간에 일할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죠. 남들 염장 지르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니까…. 제 보기에 돈은 생존 개념만 넘어가면 자유의 의미에요. 여행 떠나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것, 그게 돈이고 자유죠.”

분명 이 교수의 말이 듣는 사람을 배아프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그가 44년 동안 만화를 그려왔다는 사실이다. 올해 환갑인 이 교수의 일정은 언제나 집-학교-작업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다른 만화가들과 달리 ‘교양 만화’라는 ‘블루 오션’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44년 개척한 ‘블루오션’ 교양만화

이 교수가 만화를 그린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다. 1962년 우연히 후배 아버지가 다니는 소년신문에 놀러갔다가 후배 아버지가 그가 만화를 잘 그린다는 말을 듣고는 “아르바이트 한번 해보라”고 권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필명을 쓰면서 미국 만화를 트레이싱지로 베껴가며 만화를 그렸다. 일찍 부모가 돌아가셨고, 7남매 중 막내여서 별다는 간섭을 받지 않았던 덕분에 가능했다. 대학에 들어간 197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림풍은 일본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 최대 전환점이 왔다. 바로 독일 유학이었다.

유학을 결심한 것은 만화를 제대로 배우고 싶고, 또한 그림체도 바꾸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유럽에도 만화를 가르치는 대학은 없어서 가장 비슷한 일러스트레이션을 골랐다. 유학 생활 6년에 접어들 즈음 그동안 유럽 생활속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유럽만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아스테릭스>에서 영향 받은 새 그림체와 구성방식으로 시작한 만화가 <먼나라 이웃나라>다. 유럽 문명에 대해 알아야 할 각종 교양 상식을 알기쉽게 들려주는 새로운 방식의 만화였다. “만화에도 전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우영, 허영만씨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는 없겠고…, 그래서 제게 맞을 것 같은 저만의 장르로 찾은 게 ‘교양’이었어요.”

<먼나라 이웃나라>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미국편으로 끝나기까지 20년 넘게 이어온 이 만화는 지금까지 1000만부 넘게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여전히 이 교수의 만화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다. 또한 이 만화는 ‘이원복 만화’의 틀을 완성했다. 이후 이 교수의 만화는 이 만화에서 세운 틀을 벗어나지 앟는다. 어려워보이는 지식을 이 교수식으로 객관화, 일반화해 설명하는 것이다.

이 교수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주제 선정이다. “세상을 싸돌아 다니다 보면 뭔가 보이는 게 있어요. 우리 사회에 지금 이게 빠져있구나, 이게 부족하구나 느껴지는 것들이 주제가 됩니다.” 그 다음은 자료 차례. 외국 이야기면 현지에 가서 실제 ‘분위기’를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본다. 나머지 자료는 물론 책과 인터넷으로 구한다. “인터넷은 신이 내린 선물이에요. 예전에는 외국 신문·잡지 구독료로 월 100만원씩 썼는데, 요즘에는 실시간으로 다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게 우리나라에선 인터넷 신문이 왜 공짜냐는 거에요. 외국은 다 유료인데 말이죠.”

이렇게 모은 지식은 백과사전을 기본으로 해서 가공한다. 정확성과 중립성을 위해서다. 그 다음 콘티를 짜고 그림을 그린다. 연필 밑그림까지는 그가 그리고, 펜 작업은 제자들에게 맡긴다.

세상 모든 것엔 ‘키워드’가 존재

이 교수는 자신을 콘텐츠 생산자라기 보다는 콘텐츠 전달자라고 본다. 교양만화는 ‘콘텐츠 70, 그림 30’이며 당연히 그 핵심은 콘텐츠 전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가 하는 작업을 오만하게 이야기하면 문화 통역인 것 같아요. 문화라는 것을 만화라는 언어로 통역하는 겁니다.”

이 콘텐츠란 것의 기본 원리는 ‘단순명료’란 네 글자다. 지식이나 정보 자체는 단순·명료한 것인데 이걸 어렵게 해석해서 그 위에 덧씌웠기 때문에 어려워 보이는 것이므로, 다시 이런 해석을 벗겨내 단순명료한 본래 알맹이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복잡해보이는 여러가지를 묶어 명쾌하게 일반화하는 것인데, 말은 쉬워도 상당한 지적 자신감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에는 키워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는 신앙이 필요하다”고 이교수는 말한다.

난 만화가…교수는 직업일뿐

이런 일반화 능력에는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독일에서 유학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외국에서 10년 가까이 살아봐서 동양과 서양의 사고를 모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독일에 자주 찾아가는 것도 유럽식 사고를 수시로 접하기 위해섭니다.”

실제 이 교수가 가장 중시하는 가치가 합리성이다. “만화는 과학이에요. 결정적인 순간에 웃기기 위해서는 기승전결을 통한 결정적 반전이 필요해요. 그걸 짜내는 데에는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합리적 사고를 깰 때 웃음이 나오는 것이니까 합리적 사고를 알아야 역발상이 나오는 거죠. 그 역발상이 과학입니다.”

한국 만화사에서 이 교수는 자신이 의도한 이상의 의미와 위상을 지닌다. 만화가 저질문화로 취급받던 시절 그처럼 학벌좋은 교수가 만화를 그린다는 점 자체가 만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실제 그가 처음 한 인터뷰의 주제는 어떻게 교수가 만화를 그렸냐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저를 뽑았던 대학 재단 이사장께서 몇년 뒤 웃으면서 ‘당신 본질이 만화가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교수로 안뽑았을 것’이라고 하신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이 교수는 요즘 덕성여대 학교 모델이다.

세상이 바뀌고 만화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한 이 교수의 대답이다. “제 정체성이요? 당연히 만화가죠. 교수는 제 직업일뿐입니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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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11-26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운 이야기네요. 따라하고 싶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