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2.0 시대, 포털과 언론의 바람직한 관계는? 
[기고] 매체의 권위 벗어난 '개방' '분산' '공유'의 정신
 

(출처: 프레시안)

미국의 시사주간지

하지만 이런 현상을 낯설어 하는 이들도 아직은 많다. 이와 함께 블로그, 미니홈피 등을 타고 전파되는 'UCC 열풍'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저작권 문제, 콘텐츠의 신뢰성 문제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웹(Web)'이 처음 등장할 때부터 지적돼 온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떼 놓을 수 없는 도구로 자리잡은 '웹'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불과 14년 전의 일이다. '웹'이 없던 시절에는 복잡한 명령어를 사용할 수 있는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었다. 1991년 스위스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소속 물리학자 팀 버너스 리가 인터넷을 이용해 보다 쉽게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www'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3년 4월 '웹'은 첫 모습을 드러냈다.

'웹'의 다양한 부작용에 주목하는 이들조차 지난 14년 간 '웹'을 통해 빚어진 변화의 의미를 통째로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웹'이 큰 변화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웹'을 만들어 낸 이들이 품었던 '개방', '분산', '공유'의 정신을 이유로 꼽는다. '웹'의 탄생이 소수의 정보 독점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가능하게 했고, 그것이 21세기의 시대정신에 부합했다는 것.

수많은 부작용과 해결되지 않은 과제에도 불구하고 'UCC 열풍'이 전문가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것이 '웹'을 만들었던 이들이 꿈꾸었던 것과 맞닿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정보의 생산에 참여하고 자유롭게 그것을 나누는 세상'이라는 꿈이다. 'UCC 열풍'은 최초의 '웹' 기술이 가져온 것만큼의 변화를 낳을 수 있을까.

사실 언론이 'UCC 열풍'에 주목하기 전에도 이런 의문을 품었던 이들은 많았다. 그들은 정보기술(IT)의 세계에서 'UCC'로 대표되는 어떤 새로운 흐름이 일고 있다고 여겼고, 그것을 '웹2.0'이라 칭했다.

단지 웹 사이트를 운영하는 수준을 넘어 웹을 처음 만들었던 이들이 꿈꿨던 '대중의 폭넓은 참여와 공유'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는 기술과 서비스가 태동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2.0'이라는 것이다.

'UCC', '웹2.0' 등의 용어가 낯설게 여겨지는 이들이라도 이런 개념에 바탕한 서비스에는 대개 익숙하다. 대표적인 것이 네이버의 '지식인'서비스. 누리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초보적인 '웹2.0' 서비스인 셈이다. 소규모 벤처기업이던 네이버를 거대기업으로 도약하게 된 것도 이런 서비스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네이버는 '웹2.0'의 정신을 절반만 수용했다는 비판을 종종 받았다. 누리꾼들의 참여를 네이버라는 거대 포털의 틀 안에 가뒀다는 것. 언론도 이런 비판에 동참했다. 언론이 제공하는 기사를 네이버가 자의적으로 배치하면서 편집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권력 행사는 네이버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누리꾼들의 참여 정신과 어긋난다는 비판이다.

네이버는 지난달 초 이런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 중 하나가 '아웃링크' 방식의 뉴스 면 개편이다. 포털의 뉴스 면 편집권 일부를 해당 언론사에 넘기고, 누리꾼들이 자유롭게 언론사를 택할 수 있게 한 것. 그리고 뉴스를 클릭할 경우 해당 언론사의 웹 사이트가 열리게 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기존의 언론-포털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그리고 '웹'을 창안한 이들이 품었던 이상에 비춰볼 때 어떤 의미와 한계가 있을까. IT칼럼니스트 김중태 씨가 이런 의문에 관한 글을 보내왔다.

김 씨는 '웹2.0'을 다룬 <시맨틱 웹>을 비롯, IT분야에서 다양한 저서를 집필했으며 IT업체 관계자들이 '웹'이 낳을 변화의 방향에 대해 종종 자문을 청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김 씨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중에게 낯설던 시절부터 '정보화'가 낳을 변화가 과학기술자들만의 관심사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해 왔다. 인문사회과학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라는 것. 그리고 김 씨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한글 문화운동에도 적극적이다. 그래서 김 씨의 글에는 '클릭'을 대체하는 한글 표현인 '딸깍' 등이 쓰인다. 다음은 김 씨의 기고 전문이다. <편집자>

모든 정보의 연결을 꿈꾸며 세상에 나온 웹

웹을 만든 팀 버너스 리는 '전 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된 상태에서 서로의 자료를 공개하고 이렇게 공개된 자료를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해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한민국 안에서 정보 유통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포탈 사이트는 웹의 기본정신과 거리를 두었다. 포탈 1위인 네이버의 지식인이나 블로그를 예로 들자면 네티즌이 공개한 자료를 이용해 만든 게시판임에도 외부 웹검색이 불가능하다.

네이버의 정체 자체가 다른 사이트에 공개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검색해서 보여주는 검색 사이트이면서 정작 자기 사이트의 문서는 외부에서 검색할 수 없는 이기적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닫힌 인터넷'이라고 비난을 받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네이버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 포탈, 신문사 사이트를 비롯해 대형 사이트 상당수가 가지고 있는 문제다. 웹2.0이라는 열풍이 전세계를 휩쓸 때도 그 흐름에 선뜻 참여하기 어려운 이유는 닫힌 구조를 가진 서비스였기 때문인 것이다.

2006년에 인터넷업계에서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웹2.0은 쉬운 웹(easyweb)을 향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이 좀 더 쉽게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미니홈피나 블로그의 글쓰기를 이용하면 과거와 달리 두꺼운 HTML 문법과 FTP 사용법을 몰라도 글을 쓸 수 있고, 코덱이니 인코딩이니 하는 작업을 몰라도 동영상 파일을 손쉽게 사이트에 올려 공유할 수 있다. 그 결과 2006년 한 해 동안 일반인이 만든 동영상을 뜻한 동영상 UCC가 큰 인기를 끌었다.

쉬운웹을 통해 정보 독점을 벗어나고 공유와 분산 시대로 향하다

이러한 공개와 공유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한국의 포탈도 웹2.0 시대를 준비했다. 네이버는 2006년에 불여우(Firefox) 브라우저 지원을 시작으로 공개API(Application Program Interfaces, 소프트웨어 개발에 필요한 함수들의 집합. 이를 공개할 경우 특정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이용할 수 있다) 제공, 네이버 지도의 Ajax(웹에 접속한 PC에 별도의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고 이용자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기술) 변환, 아웃링크(뉴스를 클릭하면 뉴스를 제공한 사이트가 열리는 서비스)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역시 웹표준 지키기를 비롯해 블로거뉴스, 다음TV팟 등의 다양한 웹2.0 서비스를 실시했다.

폐쇄적인 시스템을 이용한 정보 독점으로 성장한 국내 포탈이 좀더 개방적으로 바뀐 이유는 폐쇄적인 시스템으로 정보 독점이 가능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미 정보의 생산과 유통은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라는 계층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네이버 지식인에 답변을 다는 대신 자신의 블로그에 지식과 경험을 올린다.

포탈을 거쳐야 검색이 가능하고 유통이 가능했던 정보는 RSS(자주 업데이트되는 웹사이트의 새로운 정보를 자동으로 받아 볼 수 있는 서비스)와 같은 배포도구의 보급을 통해 중앙기관을 거치지 않고도 유통이 가능한 분산화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신문사나 포탈 등이 장악하던 중앙집중식 정보 독점이 개인에게 점차 분산화되기 시작하면서 중앙기관의 힘은 약해지고 개인의 힘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 결과 좀더 많은 사람에게 성장의 기회가 생겼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정부나 언론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이 모든 일은 개인용 정보기기의 발달과 쉬운웹의 발달 덕분이다.

이제는 기자가 폭탄 테러 현장으로 향하고 있을 때 동네 사람은 이미 블로그에 현장 사진과 함께 테러 상황을 보고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동네 사람이 찍어 올린 사진과 글은 RSS라는 배포도구를 통해 순식간에 네티즌에게 퍼지게 되고, 올블로그나 플릭커, 유튜브 같은 공유 사이트를 통해 몇 시간이면 전세계에 퍼진다.

평범한 대학생 임정현 씨가 캐논 변주곡을 기타로 연주하는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유투브에서 수백만의 조회수를 기록하기까지 포탈이나 언론이 한 일은 없다. 자기 방의 캠으로 찍은 동영상을 웹에 올린 임정현 씨의 노력과 이 동영상을 보고 추천한 네티즌, 동영상을 공유할 수 있는 서비스가 동영상 UCC 열풍을 가져오고 한 개인을 스타로 만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처럼 웹2.0이라는 낱말로 표현되고 있는 쉬운웹의 물결은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웹사이트와 매체에 새로운 변화를 줄 것이다. 웹을 통해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딴지일보>, <미디어몹> 등과 같은 온라인뉴스가 만들어지고 시민기자가 가능해진 것처럼 쉬운웹을 통해 메타사이트 방식의 새로운 언론이 생길 것이고, 1인기자 시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메타언론의 주요 경쟁력 기준은 개인 정보를 최대한 많이 가져오는 것과 이들 정보에서 대중적 가치가 높은 정보를 가장 효과적으로 뽑아내는 추천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될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살아남으려면 기존 언론 역시 분산하고 개방하고 혼합하는 변화를 이룩해야 할 것이다. 네티즌이 사이트로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다가서야 하며, 저작권을 공개하고 공유함으로써 2차 생산물을 획득하는 정책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웹에서 출발한 포털이 끊임 없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언론사는 과거의 영화에 사로잡혀 변화에 둔감하다. 그 결과 언론사의 힘은 점차 약해지고 포탈의 힘은 점차 강해지고 있다.

애초 포털이 뉴스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 이유는 언론매체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 많은 서비스 중 하나로 뉴스 서비스를 시작했고, 다른 포탈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존 신문사에 돈을 줘가면서 뉴스를 공급받았던 것이다.

포털로서는 뉴스를 사오는 돈이 일단은 부담이다. 결국 경쟁에서 진 사이트는 추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1세대 포털인 네띠앙 등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누구도 네띠앙이 신문사 때문에 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네띠앙은 단지 경쟁에서 진 기업이고 경쟁에서 진 기업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문사가 망한다면 다른 기업과의 경쟁에서 져서 사라지는 것이지 포탈 때문이 아니다.

신문의 경쟁자는 동종 신문에서 스포츠지, 경제신문, TV, 라디오, 영화, 잡지를 거쳐 케이블TV, 위성방송, 온라인신문, 온라인잡지, DMB, IPTV, 포탈, 무가지까지 확장되고 있다. 신문이 살아남으려면 이 모든 경쟁자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포털에 기사를 공급하는 방식 대신 자사의 기사를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정책을 실시해 효과를 거두고 있다. 다음은 블로거들이 올리는 글을 기사로 제공하는 블로거뉴스를 성공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종교방송인 CBS는 인터넷언론과 무가지 시장에 진출하며 영역을 확대했다.

반면 디지털조선이나 조인스닷컴, 동아닷컴은 독자적인 언론으로 운영되는 것도 아니고, 모기업에서 모든 책임과 운영경비를 부담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SBSi, iMBC 등 역시 방송국도 아니면서 인터넷 기업도 아닌 애매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터넷 기업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기존 매체의 권위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시대에는 빠르게 변화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138년 전통의 독일 업체로 1936년에 세계 최초로 컬러 필름을 판매한 아그파가 파산한 이유는 디지털시대를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수십 년 전부터 디지털카메라를 대비해 온 코닥은 여전히 건재하다.

1975년에 코닥의 엔지니어 Steve J. Sasson이 만든 KODAK Ptorotype CCD Digital Camera는 현재까지 알려진 세계 최초의 디지탈 카메라다. 코닥은 이미 1991년에 상업용 제품인 DCS100을 출시하며 디지털카메라 시장과 디지털 인화시장에 대비하지만 아그파는 디지털 시대에 대비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현재 한 기업은 망하고 한 기업은 살아남았다. 미래를 준비하고 변화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특히 디지털시대에 더욱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다.

남이 마련해준 아웃링크, 내가 마련하는 변화

2006년 12월 1일부터는 네이버가 뉴스 서비스에서 제한적인 아웃링크 방식을 시작했다. 아웃링크는 네이버에서 뉴스 제목을 딸깍(클릭)할 경우 해당 뉴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로 이동시켜주는 방식을 말한다.

예전에는 네이버뉴스 안에서 <프레시안> 기사를 보여줬지만 아웃링크는 <프레시안> 사이트의 해당 기사 화면으로 이동시켜주는 방식이므로 네이버라는 주소를 벗어나게 된다. 단 모든 뉴스에 적용하는 것은 아니고 검색 결과에 나타난 뉴스 등으로 적용 범위에 제한을 두고 있다.

아웃링크는 언론사의 요청을 네이버가 수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대형 언론사에게 큰 이익을 안겨줄 것으로 보지 않는다.

모든 뉴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검색결과 등으로 한정되어 적용되기 때문에 아웃링크로 해당 언론사를 방문하게 될 네티즌의 수는 한정된다. 또한 아웃링크로 해당 언론사를 방문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들 네티즌은 해당 기사만 보고 창을 닫을 확률이 높다.

언론사는 자기 사이트로 방문객을 보내달라고 요구만 했지, 아웃링크로 유입된 네티즌을 붙잡는 방법과 수익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은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2007년 초부터 IE7(인터넷 익스플로러 7) 브라우저가 보급되어 탭브라우징이 일상화될 경우 사람들은 아웃링크로 열린 탭을 더욱 쉽게 닫을 것이다. 네이버에서 보고 싶은 기사를 탭으로 주루룩 열어서 본 뒤에 하나씩 닫는 방식으로 탭브라우징을 사용할 것이다. 결국 외부에서 기회를 마련해준다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준비하고 변화한 언론사만이 그 결과를 얻을 것이다.

더구나 아웃링크를 통해 방문객과 함께 악용(abusing, 음해성 댓글에 대한 책임 등을 가리킨다) 처리비용도 자신들에게 넘어오기 때문에 방문객 증가를 마냥 기뻐할 수 없다. 규모가 작은 사이트일 경우 아웃링크로 유입된 방문객에서 빼내는 수익은 크게 증가하지 않는 반면 트래픽 부담이나 악용 처리비용에 들어가는 비용은 크게 증가할 우려가 있다. 아웃링크의 득실을 따지려면 아웃링크로 인해 전가되는 비용 문제까지 내다봐야 하는 것이다.

개방, 분산, 공유, 공개가 화두다

지금까지 폐쇄적인 국내 포탈은 점차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다음을 예로 들자면 daum.net이라는 도메인에 서비스를 가두려는 욕심을 포기했다.

다음블로그는 daum.net이라는 도메인을 포기하고 티스토리로 새롭게 태어났다. 미디어다음의 블로거뉴스는 2007년에 다른 포탈사이트의 블로거나 설치형 블로거들에게도 개방될 것이다. 다음의 각종 서비스는 공개API로 제공되어 다양한 곳에서 활용될 것이며, 다음의 TV팟 동영상은 외부의 모든 홈페이지 문서에 삽입될 것이다. daum.net이라는 도메인에 가두고 폐쇄적으로 독점하려는 마음을 버리는 순간 더 큰 땅이 다음의 땅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개방화와 분산화, 공개와 공유는 웹2.0 시대의 중요한 흐름이고 이에 맞추기 위해 포탈은 노력하고 있다. 반면 언론사는 변화에 느리다. 아직도 기사의 저작권을 주장하고 자기 사이트로 와서 보라고 외친다. 언론사의 기사와 사진을 다른 사이트의 문서에 삽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신문사가 없고, 공개API를 지원하는 신문사가 없다.

그러나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한다. 초창기 웹의 시대에는 신문사로 와서 기사를 보라고 했지만 웹2.0 시대에는 신문사의 기사를 미니홈피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도록 분산형 도구를 지원해야 한다.

네티즌들이 한 개인의 블로그에 놀러갔다가 A신문사의 기사를 보고 그 자리에서 덧글을 쓰거나 기사를 작성해 송고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신문사 사이트가 아닌 곳에서 기사를 검색하고 덧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블로거들이 인용하는 뉴스가 자기 회사의 뉴스가 되도록 최대한 편리한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블로거들이 생산한 각종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해 잘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당장 언론사들이 추구해야 할 단기 과제다.

웹2.0 시대는 기존 매체와 사이트의 변화를 요구한다. 분명한 것은 변화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환경에서 네띠앙은 죽었고, 네이버는 더욱 커졌다. 똑같은 환경에서 온라인 매체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반면 <굿데이>를 비롯한 몇몇 기존 신문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역사를 보면서 변화의 주체는 외부가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포탈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한다고 해서 기존 신문사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신문사 스스로 변화할 때 살아남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변화의 방향은 '쉬운웹'이며 '공개, 공유, 분산, 수집과 추천'임을 유념하자.

웹2.0 시대는 포탈과 언론사의 경쟁시대가 아니다. 변화하려는 자끼리의 경쟁시대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자는 경쟁 대열에 서지도 못하고 자멸할 것이다. 언론은 포탈 사이트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자기 변화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웹2.0 시대는 스스로 변하는 자일수록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김중태/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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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2007-01-08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군요^^ 퍼갑니다^^
 

- 한국어 초판이 88년에 나왔고, 실제 인터뷰는 60년대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입니다. 토인비가 말하는 '요즘의 세태' 가 주로 60년대 미국의 히피족들을 꼬집고 있는 것 같군요. 60년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가장 오래고 화려한 호황을 맞았던 세계 자본주의가 일단락되었던 시기이지요. 61년에 시작된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서 반전운동을 비롯해 68년 '혁명' 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때이기도 합니다. <토인비와의 대화> 는 인생의 목적, 삶과 죽음, 여성 해방, 지적 생물로서의 인간, 건강과 복지를 위하여,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사랑과 성, 현대의 과제,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장편의 인터뷰를 담고 있습니다. 발췌독 하였습니다.

- (2장. 삶과 죽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학과 종교의 갈등, 종교와 종교의 갈등, 이데올로기 갈등은 도덕 내지 윤리라는 공통의 가치에 의해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 과학 이전에 종교가 있었다고 봐야 할까요? 과학이 종교로 부터 그리고 철학으로 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종교의 시작 - 그것이 다산의 기원이든, 풍년의 기원이든 - 이었던 것 처럼, 철학이나 과학도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철학자 과학자는 기원전 OOOO년 OOOO문명에서 탄생했을지 모르겠지만, 철학이든 과학이든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노력 안에 모두 뭉뜽그려져 있을테니까요. 우리가 최초의 철학자니 과학자라고 지칭하는 이들 역시, 종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생존 이래 계속 존재해왔던 고민이 어느 순간 집약되고 전문화되었음을 알려주는 척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도, 결국은 오늘날의 우리이니 말이죠.

- 역사의 길이로 과학, 철학, 종교의 우위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것은 처음 하나의 목적 안에서 뭉뚱그려진 상태로 존재했으나, 어떤 계기로 인해 하나씩 떨어져나가 각자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들이 각각 독립하여 종교 철학 과학이라고 불리우기 위해서는 나름의 완결된 체계가 존재해야 할텐데요, 종교가 이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독립했다는 것은 곧, 종교야말로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체계화를 시도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일부가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독립을 시도한 만큼, 이제 남겨진 이들과의 구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름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 고민' 이라고 하죠. 선뜻 여기에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름들은 후세의 역사가들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인데, 이런 이름들은 오히려 종교, 철학, 과학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름을 붙일 만큼 확실한 것은 '종교' 일 뿐, 종교로의 체계화 속에 편입되지 않은 고민들은 뭉뜽그려 '나머지 고민' 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나머지 고민' 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과 과학이 뭉뜽그려져 있을 것이구요. 이들은 종교와 더불어 끊임없이 인류 생존의 과제를 탐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 하지만, 예전 같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을 끊임없는 탐구와 문제제기가 이제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수준은 비슷하면서도 가장 먼저 체계화되어 활약하고 있었던 종교이니 만큼, 가장 큰 지지세력을 형성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정치권력이기도 했을테니까요. 이들의 문제제기는 종교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가 바로, 종교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인 '나머지 그룹' 이 종교에 의해서 억압받았던 중세에 해당한다고 보여집니다. 이 '나머지 그룹' 은 종교처럼 강력한 '스폰서' - 그것이 지지세력이든 정치권력이든 - 가 없어 고통받았을 것이고, 종교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올바른 문제제기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와 '나머지 그룹' 모두에게 불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직자 당국은 과학이 논파한 뒤에도 전통에 입각한 종교적 회답을 지켜 나가려고 하여 성직자 자신이 종교에 대한 평가를 떨어뜨렸습니다." 라는 토인비의 지적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 종교가 독립한 이래, 결과적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한 탐구 전체가 억눌렸다는 이런 밑그림은, 동서양에 보편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중 서양의 가톨릭은 '면죄부 판매' 로 비화되는 극도의 폐쇄성과 부패 속에서 '종교개혁' 이라고 불리우는 일대 변화를 겪게되죠. 그리고, 이것을 통해 줄곧 억압받았던 '나머지 그룹' 에게도 기회가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이들 모두 본래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그룹' 의 발전은 곧 종교의 발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개신교의 탄생이 그것이지요.

- 여튼, '나머지 그룹' 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제법 혁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훗날 역사가들로 부터 '근대 철학' 이라는 이름을 선물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오늘까지도 이 '나머지 그룹' 이 종교와 같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고 보여집니다. '나머지 그룹' 중의 일부가 '과학' 으로 독립하고, 과학의 발전이 인류가 가진 욕구의 상당부분을 해결하면서 크게 주목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를 대체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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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서로 분리된 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과학은 오늘날 종교 못지 않은 아니 어쩌면 더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토인비는 이 점과 관련해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요, 첫번째는 종교와 철학으로 부터 독립한 과학이 스스로 이룩한 놀라운 업적입니다. 두번째는, 과학의 놀라운 발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렴하려 하지 않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인데요, 실재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과학이 좀 더 명쾌한 언어로 추상적인 종교 교리를 뒷받침함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 스스로 과학과의 논쟁을 통해 스스로의 역할을 망각할 뿐 아니라 지위마저 떨어뜨렸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

- 과학은 종교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 도덕이나 윤리라는 교집합을 통해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극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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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고명섭 기자  
 
밥을 먹듯 책을 파먹고 숨을 쉬듯 문자를 호흡하는 이들. 인터넷상을 어슬렁거리는 책벌레들이 있다. 새 책에 관한 정보를 재빨리 잡아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책의 내용을 평가하며 책의 허점을 일러준다. 열렬히 옹호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냉정히 외면하는 책도 있다. 책에 관한 한 이들은 인터넷상의 안내자이며 파수꾼이고 정보의 허브다. 책에도 여론주도층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익명의 바다에서 등대 노릇을 하는 책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오피니언 리더들의 집합처 가운데 하나가 인터넷 포털 다음의 카페 ‘비평고원’이다. 책의 숲이라 할 이곳은 저마다 무림의 고수를 자처하며 갈고 닦은 내공으로 일합을 겨루는 공간이다. 일본의 최근 소설에서부터 프랑스 현대 철학까지 막 출간된 책들이 품평의 대상이 된다. 서슬 퍼런 칼날이 책의 허점을 찌르고 오래 쌓은 지식으로 책의 특장을 증명한다.

지난 2000년 문을 연 이 카페의 회원은 줄잡아 3천명에 이른다. 매일 500여명이 이곳에 들어와 책의 정보를 얻어간다. 이 무림에서 돋보이는 고수는 30~40명 정도다. 대다수가 문학·철학·정신분석학 등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 박사과정이다. 이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고서 매번 새로운 초식을 선보인다.

이들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사람이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 알려진 필명 ‘로쟈’다. 로쟈의 강점은 문학·역사·철학·사회서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 나온 책은 거의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개해준다는 점이다. 로쟈의 순발력은 전광석화급이다. 책이 나오면 즉각 해당 책의 내용과 배경을 설명해주고 저자의 다른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며 중요한 서평을 끌어다 덧붙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책과 관련이 있는 해당 분야의 다른 책들도 성격별로 정리해 소개해준다. 말하자면 로쟈는 최근에 나온 책의 지도를 그려주는 사람이다. 로쟈의 지도는 오차가 적을 뿐더러 군더더기가 없고 신속한 편이어서 책 정보 전달꾼으로서 그의 지위는 확고하다. ‘비평고원’의 초기화면에는 로쟈가 운영하는 코너 ‘책의 바다’가 떠 있다.

비평고원 회원인 최성희(37·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씨는 “로쟈처럼 책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올려주는 회원도 있지만, 회원들의 다수는 책 자체를 놓고 평가하고 토론하는 일을 주로 한다”고 이 카페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글 쓰는 이들이 주로 대학 박사과정급 이상이기 때문에 전공 지식이 풍부하고 그러다 보니 논쟁이 일며 격렬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한번 싸움이 붙으면 몇 달씩 진행되기도 하고 논쟁에서 졌다 싶으면 아얘 카페에서 탈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논쟁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평가가 많지만, 외서의 경우 번역의 질을 놓고 벌어지기도 한다. 잘못된 번역을 문제 삼아 품평이 오고가는데, 때때로 번역자가 직접 들어와 항의하다가 일대 격전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있다. 최성희씨는 “비평고원은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좋은 번역서를 추천하고 질 나쁜 번역서를 걸러내는 기능을 하는 곳”이라며 “대학에서 강요하는 답답한 논문식 글쓰기의 대안을 찾아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주로 인터넷상에서 필명으로 교류하지만 1년에 한두 번씩 오프라인 모임도 연다. 지난 연말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 10여명이 서울 종로 맥주집에서 모여 송년회를 열기도 했다. 이 카페를 만든 운영자 조영일(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씨는 “카페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많다”며 “책에 관한 수준 높은 담론을 원하는 네티즌들이 물어물어 이곳으로 찾아들다보니 지금은 인문학 책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곳으로는 가장 다채로운 곳이 됐다”고 말했다.

논문 글쓰기 벗어난 대안공간

비평고원이 인문학 연구자들의 자생적 모임이라면,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나의 서재’는 서점에서 북마니아들을 위해 만들어준 방이다. 로쟈를 포함해 비평고원의 주요 필자 가운데 일부가 알라딘 ‘서재’에 들어와 글을 쓰는 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알라딘의 인문서 담당 김현주씨는 “‘나의 서재’는 서점을 찾는 독자들에게 책을 안내해줄 수 있는 필자들이 주로 사용한다”며 “2003년 8월에 문을 연 뒤 3만~4만명이 서재에 필자로 가입했고 그 가운데 40여명이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현직 일간신문 기자로 알려진 필명 ‘딸기’, 대학 3학년 때부터 3~4년째 활약하고 있는 ‘평범한 여대생’, 계간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서평을 쓰는 ‘바람구두’, 단국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인 ‘마태우스’ 등이 알라딘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 대표급 필진이다. 김현주씨는 “이분들은 책이 서점에 깔린 직후에 번역이나 내용을 꼼꼼히 따져 품평하기 때문에 일종의 검증장치로서 기능한다”며 “특히 인문서의 경우엔 이들의 평가가 초반 판매량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고 말했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 제시

알라딘은 이들이 쓴 글을 읽고 책을 구입할 경우 책값의 1%를 적립해주는 인센티브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필진은 한달이면 1만원 이상의 적립금을 받기도 한다고 김현주씨는 말했다. 적어도 100명의 독자가 필자의 글을 읽고 책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이들의 의견이 책을 선택하는 데 기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데, 말 그대로 책의 오피니언 리더들인 셈이다.

또다른 인터넷서점 예스24도 알라딘과 유사한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리뷰를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을 위해 독자칼럼란을 두고 있는데,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한동안 인기를 끈 난이었고, 요즘 가장 조회수가 많은 칼럼난은 ‘정군의 책 대 책’이다. 이 칼럼의 필자인 ‘정군’은 1주일에 한두 번씩 두 권의 책을 선정해 비교 분석해준다. 예스24에서 블로그 관리를 담당하는 심현숙씨는 “40명 정도가 개인 블로그에서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적으면 1주일에 한두 편, 많으면 하루에 한 편 정도 책 리뷰를 올린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 필자들 가운데 특히 인기가 있는 필자에게 따로 코너를 마련해주기도 하는데, 정군의 코너가 바로 이 경우다. 심현숙씨는 “주목도 높은 필자들의 글에는 적어도 열 건 정도의 댓글이 달린다”며 “대다수 댓글이 좋은 정보를 고맙다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교보문고도 알라딘·예스24처럼 서평자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터넷 책 오피니언 리더의 시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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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imbc)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시아 혁명’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자마자 그 영향은 범세계적인 것이었다.
먼저 러시아 혁명은 중국 혁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볼쉐비즘에 대항하여 유럽에는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2차 대전 이후에도 냉전의 한 축이 되어 한국 전쟁과 쿠바 혁명, 베트남 전쟁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제 3세계의 반 식민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91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는 몰락하였으나 중국과 쿠바, 북한등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주의의 유산을 물려받은 국가는 여전히 지구상에 남아 있다. 또한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이념 갈등’은 뜨거운 이슈에 속한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은 한편으로는 20세기 현대사 이해의 열쇠를 제공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한국 사회가 떠안고 있는 ‘이념 갈등’과 ‘분단’이라는 난제를 반추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문제의 해법을 암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1부>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으로 이루어진 농업국가, 러시아.

19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늘어난 농촌인구로 인해 농민들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또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혹독한 노동조건을 견뎌야했던 노동자들의 원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1917년 폭설로 인해 막힌 철도는 도시의 식량사정을 더욱 악화 시키고 견디다 못한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여성노동자들에 의해 시작된 시위는 시 전체로 확산되고 처음의 경제적 요구는 곧바로 ‘전 제정 타도’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사태수습을 위한 황제의 시위진압 명령은 무고한 시민들까지 죽음으로 몰고 갔고, 이는 병사들의 반란으로 이어지고 만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20세기 초반부터 1917년 2월 혁명에 이르기까지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 그리고 1차 대전을 겪으며 어버이로 추앙받던 황제가 무너지고 제정 러시아가 붕괴의 위기를 맞기까지... 그 과정과 원인을 다양한 실황자료와 재연 등을 통해 분석해 본다.

<2부>

1917년 2월 혁명의 성공 이후, 사람들은 새로운 체제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일종의 자치 기구이자 대의 기구인 소비에트의 결성으로 연결됐다. 소비에트에 파견되는 대표는 자신들이 일하는 작업장과 병영의 동료들이 직접 선출했기 때문에 구성원의 의견이 보다 효과적으로 반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2월 혁명이 성공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혁명만 성공한다면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병사들은 끝나지 않는 전쟁에 분노했고, 혁명 이후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무렵 레닌이 이끄는 소수 정파인 볼셰비키는 농민과 병사, 그리고 노동자들의 욕구를 정확히 표현함으로써 인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러시아 내의 권력을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17년 10월 25일, 레닌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했음을 선언했다.

2월 혁명 이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역사적 상황과 재연을 통해 살펴본다.

<3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는 영토의 3분의 1을 독일에게 넘겨야하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을 전선에 묶어두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끊임없는 간섭을 받는다. 결국 볼셰비키는 외국의 간섭국은 물론 러시아 내의 다른 세력들과 처절한 내전을 벌이고, 계속되는 내전은 러시아에 혼란을 가져온다.

내전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 때문에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러시아 경제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볼셰비키의 선택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뒤섞인 NEP(신 경제정책)라는 혼합 경제 정책에 이르게 되는데...

10월 혁명 이후 국내외의 적들과 내전을 벌였던 볼셰비키들의 생존 과정, 그리고 혼합 경제 정책을 통해 체제를 유지해 나갔던 1920년대의 러시아를 들여다본다.

<4부>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러시아의 구체제가 무너졌다. 그리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삶의 방식, 그리고 사상과 문화의 실험이 시도되었다.
레닌의 죽음 이후, 새롭게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그는 안정적인 식량 확보와 생산성 증대를 위해 ‘농업 집단화’를 실시하면서 농촌을 완전히 통제했다.
또 농업국가 러시아를 산업국가로 탈바꿈하기위해 ‘스탈린 혁명’이라고 불리는 정책을 강행한다. 이러한 정책은 유럽 사회가 수세기에 걸쳐 이룬 것을 단숨에 달성하는 엄청난 성과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러시아 국민들은 대기근과 생활수준 하락이라는 끔찍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1917년 혁명을 뛰어 넘어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격변을 초래했던 ‘스탈린의 혁명’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그리고 그들은 스탈린과 그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그 현장을 통해 알아본다.

<5부>

1937년과 38년.
2년 동안 68만 명의 사람들을 처형하며 대테러를 감행한 스탈린.
그의 행동은 군대와 문화를 약화 시키며 러시아 사회에 큰 재앙을 가져왔다.
권력에 대한 모든 위협을 없애려고 했던 편집증적인 의심이 강했던 스탈린.
그의 성격은 대숙청의 원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탈린이 벌인 행동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대테러의 그림자는 한국인도 피해갈 수 없었다. ‘스탈린 대숙청’은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한국인 구철석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것이다.
아버지 구철석을 회고하는 구 스베뜰라나와 당시 처형된 한국인들의 모습.
그리고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스탈린 대숙청’의 근본적 이유와 그것이 러시아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본다.
더불어 ‘스탈린주의로’ 마무리되는 러시아 혁명의 본질과 그것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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