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정책브리핑)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이 권언유착 청산했다”
최영재 교수, 언론재단·언론정보학회 토론회 발제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추진된 정책홍보시스템이 해방 이후 지속돼온 권언유착 관계를 획기적으로 청산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부학부 교수는 6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언론재단과 한국언론정보학회가 공동 주최한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 평가와 과제’ 토론회에서 “참여정부(2003년~2007년)가 기획, 시행한 언론홍보 제도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정부-언론관계 역사에 ‘주요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면서 이같이 평가했다.

최 교수는 “변화의 크기로 보면 해방 이후 정부와 언론의 거리가 참여정부에서처럼 명실공히 ‘상호독립’이 가능한 거리로 유지된 적이 없었다”며 “이로써 과거의 권언유착관계는 획기적으로 청산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날 ‘참여정부 홍보·언론시스템 평가와 과제’란 발제를 통해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의 큰 방향을 △정책정보를 일반 국민에게 노출시키는 ‘개방성’ △언론사 간 차별을 허용치 않는 ‘공평성’ △오보 등에 시스템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하는 ‘체계성’이라고 요약했다. 또 “개방형 국정홍보 시스템은 전반적으로 민주적 정부와 민주적 언론제도를 정착시켜 선진국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적 정당성과 전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호평했다.

최 교수는 “그럼에도 도입 초기부터 개방형 국정홍보 시스템을 ‘언론통제적 수단’으로 보는 비판적 시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고, 현행 홍보 시스템 하에서도 결과적으로 정부와 정부 정책에 적대적인 기사들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홍보시스템마저 제도적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책홍보시스템은 국민 직접 커뮤니케이션 정책(Going Public)”

최 교수는 참여정부 언론홍보정책의 특징을 △ 건강한 긴장관계로 대표되는 보수언론과의 관계 △ 신문법과 오보 대응 등에서 나타난 사회책임주의 언론개혁 △ 브리핑 제도와 기자실 개방으로 요약되는 개방형 홍보-취재시스템 △ 국정브리핑과 청와대브리핑을 통한 국민 직접 커뮤니케이션 정책(Going Public)이라고 정리했다.

이어 “Going Public이란 정파적이고 공격적인 언론의 통로를 피해 직접 국민에게 정책정보를 제공하고 국민과 대화하는 새로운 언론정책의 형태”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현 정부가 개방형 정책홍보시스템을 추진한 배경과 관련, “언론이 정부의 정책정보, 국정상황에 대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의 예를 들어 “참여정부에서는 미국에서 대통령 취임 초기 약 100일간 지속되는 밀월(honeymoon) 기간을 찾아볼 수 없었다”며 “오히려 언론은 2003년 취임 초 밀월기간 동안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그 이후 기간보다 더욱 심하게 했다”고 현 정부가 처한 언론상황을 묘사했다. 최 교수는 구체적으로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초기 조선일보와 한겨레 기사를 분석한 결과,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는 조선일보가 25건 중 한 건, 한겨레는 10건 중에 한 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날 지난해 7월 중순부터 한 달간 정부 6개부처(통일부 행자부 교육부 외교부 재경부 산자부) 출입기자 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정홍보시스템 도입 이후의 취재보도관행 변화에 대한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 조사기간 중 보도된 신문기사 분석 결과를 소개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기자들은 브리핑제 도입과 기자실 개방, 오보대응시스템 등에 대해서는 평균 점수 이상으로 ‘바람직하다’(5점 척도에서 3.5~4점 사이)고 응답했다. 반면 정책홍보관실 신설은 그저 그렇다(3점)는 평가를 받았다.

출입기자들 “시스템 자체는 긍정적이나 운영만족도는 떨어져”

최 교수는 “그러나 기자들은 개방형 정책홍보시스템의 실제 운용에 대해서는 모든 분야에 대해 평균 점수 이하의 불만족을 나타냈다며 이는 제도 도입 취지와는 달리 운영상의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 부처관련 기사에 대한 내용을 분석한 결과 75%에 달하는 기사가 관급기사로 채워졌다”며 “이것은 기자들이 개방형 홍보시스템 도입 이후 공식 채널의 취재경로가 증가했다고 대답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평가했다.

분석대상 기사를 다시 긍정 부정 중립으로 분류한 결과 개방형 홍보제도 아래서 공식적인 채널을 이용한 기사는 긍정적인 기사보다도 부정적인 기사가 3대1 정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언론보도가 대체적으로 긍정보다 부정이 많은 경향을 반영하는 동시에 새로운 제도의 공개성과 투명성 구조 자체만으로 긍정적인 뉴스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최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기자들은 참여정부의 정책홍보시스템에 대해 제도로서의 규범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만족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며 “단적으로 브리핑은 많은데 기사거리가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대안으로 △브리핑제도의 내실화 △오보대응은 하되 언론자유 신장 차원에서 접근 △부처 홍보평가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선 △부처의 홍보 자율성 확보 △취재원과 기자 간의 공감대 형성 △부처 장관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전문적인 대변인제 운영 △광고회사의 매체전략과 유사한 효율적인 매체관리 전략 수립 △선택과 집중에 의한 이슈관리 전략 수립 등을 제시했다.

안차수 교수 “언론오보대응에 긍정적인 옵션도 고려해야”

최 교수의 발제에 대해 토론자로 참석한 안차수 경남대 교수는 “새로운 정책홍보시스템의 목표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며 “비정상적인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광의의 의미에서 대국민 정책서비스를 강화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목표에 따라 성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며 “언론 오보대응에 있어서도 법적소송이나 반론청구와 같은 위협적 수단 외에 긍정적인 옵션들을 함께 고려해볼만하다”고 제안했다.

정연우 세명대 교수는 “홍보는 의지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다”며 “현실을 감안한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홍보관의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며 “일정한 적응기간이 필요하며 시스템 정착시기를 앞당기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이어 “홍보시스템 자체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정책발표 시에는 면밀하고 신중한 검토를 거친 후 발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강수 홍보분석관 “정책홍보시스템은 완료형 아닌 진행형”

세번째 토론자로 나선 서강수 국정홍보처 홍보분석관은 “정책홍보시스템에 대한 토론회는 처음인 것 같다”며 “홍보시스템에 대한 홍보부족을 지적하는 발언에 공감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서 분석관은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이 탄생한 배경으로 △정치·사회적인 환경변화 △민주화로 인한 국민들의 참여욕구 증가 △공공영역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증가 등을 꼽고 “정부는 닫힌 정부가 아닌 열린 정부를 지향하는 있으며 수평적이고 쌍방향적인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는 정책을 만들어 국민에게 설명하는 과정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수범 교수 “정책에 대한 정확한 진단 가능한 평가지수 개발해야”

이수범 인천대 교수는 최영재 교수의 발제와 관련 “정부와 언론 간의 관계가 좋지 않아 개방형 정책홍보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며 “(정부 홍보시스템을 평가하면서) 지나치게 대언론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끝으로 “이 정도 평가를 많이 하는 단계에 왔으면 현 정책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한 평가지수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영태 (medialyt@korea.kr) | 등록일 : 2007.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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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정브리핑)

‘신문 경쟁’ ‘여론다양성’ 원칙 세웠다
‘자전거일보’ 등 신문 유통시장 혼란 바로잡아

[정책리포트] 공정한 신문시장

‘자전거일보’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만큼 2000년대 초반 신문시장에선 ‘자전거’가 단연 화두였다. 월 구독료 1만2000원짜리 신문을 보는데 10만 원이 넘는 자전거 경품이 제공되다보니 “신문 지국이 아니라 자전거 지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곳에서 자전거를 뿌리면 그 지역의 신문시장은 곧바로 초토화된다”는 게 당시 신문지국 관계자의 설명이다. 급기야 2003년 1월에는 자전거 판매업자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매출이 50% 이상 줄어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며“법적 제재를 해달라”는 이유였다.

과다 경품을 앞세운 신문업계의 물량경쟁은 2000년대 초 ‘자전거일보’ ‘비데신문’ 등의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극심했다. 신문 경품은 역사가 길다. 1970년대에는 설탕이 있었다. 그 후 컵, 손톱깎이 등으로 발전하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믹서, 레저용TV, 뻐꾸기시계, 버너, 다기능 도마, 교자상, 위성방송 수신 안테나, 원목탁자, 발신자표시 전화기, 킥보드, 에어컨형 선풍기, 소형 진공청소기, 돗자리, 밥솥, 정수기, 자전거, 비데, 백화점상품권 등 신접살림을 차려도 좋을 만큼 끝없이 이어졌다.

과열 경쟁은 살해 사건까지 빚었다. 1996년 7월 판매 경쟁을 벌이다 중앙일보 경기 남원당 지국 직원이 조선일보 지국원을 살해한 사건은 언론계 안팎에 충격을 줬다.

과당경쟁으로 신뢰 잃고, ‘제살 깎아먹기’

과열경쟁은 신문사들의 수익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김영주 언론재단 연구위원은 국정브리핑 기고에서 “신문사 재정의 80% 이상을 광고수익이 차지하다 보니 개별 신문사들은 보도의 질을 높여 독자를 늘리기보다 고가 경품과 무가지를 통해 구독자 수를 늘리고, 광고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량공세를 앞세운 경쟁은 관행으로 굳어졌고, 결과적으로 신문시장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신문은 제값 내고 보는 게 아니라는 인식은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렸다. 무리한 확장 경쟁은 신문 절독이 “담배 끊기보다 힘들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오게 했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신문이 불법 경쟁을 공공연히 벌이는 모습은 앞뒤가 맞지 않다. 게다가 출혈 경쟁은 부실 경영을 낳는다. 한국기자협회가 “광고주를 현혹하기 위해 벌이는 경품 파티로 신문 경영이 더 부실해지고 있다”고 지적하는 등 언론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2002.5.22 우리의 주장).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익명의 신문사 사주는 “연간 300억~400억원이 출혈 경쟁으로 낭비된다”며 “이 돈을 절약하면 신문 종사자들의 대우가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선 지국장들은 경품 사용을 ‘울며 겨자먹기’라고 말한다. 대개 경품 사용으로 확보한 신규독자 가운데 70% 이상은 기존의 다른 신문 구독자다. 그만큼 이탈 독자가 많이 생긴다는 얘기다. 결국 경품 사용 후 1년이 지나면 지국 수입은 ‘현상 유지’ 수준이라는 게 지국장들의 설명이다. 출혈경쟁이 발전적 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부에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가경품’이 위험한 이유, “여론 다양성 훼손”

경품은 단순히 시장질서를 해치는데 그치지 않고, 훨씬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부자신문’들이 경품을 통해 물량공세를 펴면 ‘가난한 신문’들은 시장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소수 의견은 힘을 얻지 못한 채 여론은 획일화하고, 심지어 왜곡 가능성도 높다. 몇몇 신문이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계층만 대변한다고 생각해보자. 단편적인 ‘사실’은 알려지더라도 전체를 조망하는 ‘진실’은 가려지기 쉽다. 다양한 여론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위협받게 되고, 사회적 손실은 커진다. 매체 선택권을 박탈하는 ‘고가 경품’은 그래서 위험하다.

신문이 ‘질적 경쟁’을 벌이고, 독자들은 자유롭게 신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신문업계도 ‘자율규제’를 통해 시장정상화 노력을 벌여왔다.

신문협회는 1960년대 이후‘영업정화위원회’ 활동, 신문판매협의회 구성, 신문판매윤리강령 제정 등 자정 노력을 펼쳤다. 1977년에는 ‘신문판매 정상화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고, 1996년 조선일보 지국원 살해사건 직후엔 ‘신문 판매질서 확립 공동 결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7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신문고시를 제정하고, 2001년 폐지했던 신문고시를 부활할 때에도 신문업계는 ‘자율규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율규제는 말 그대로 자율에 그치면서 근원적 처방에 실패했다.

불가피했던 정부의 신문판매시장 정상화 조치

이 과정에서 언론관련 단체들의 시장정상화 목소리는 날로 커졌고,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신문고시 개정을 통해 불법 경쟁을 단속하고, 여론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신문유통원 설립,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신문발전위원회 구성 등을 단행했다.

신문고시는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5월 개정됐다. 신문업계가 자율적으로 규제하던 신문고시 위반사건을 공정위가 직접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신문고시는 연간 구독료의 20%를 초과하는 경품과 무가지 제공을 금지하고 있다. 그해 5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공정위가 조사한 신문지국은 1316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신문고시를 위반한 904건에 대해 시정조치를 내렸고, 12억715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2005년 4월 1일부터는 불법경품 등에 대한 신고포상금제를 도입했다. 이후 2006년 9월까지 모두 117건에 포상금 1억4777만 원을 지급했다. 일부에서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는 신문고시는 이미 2002년 7월 헌법재판소의 전원 합의를 통해 합헌 결론이 났다. 헌재는 “신문고시는 신문업계의 과당경쟁을 완화하고, 올바른 여론형성을 주도해야 할 신문의 공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만큼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선풍기 지급’에 첫 수금월도 구독일자보다 4개월 후로 명시돼 있는 애독자 카드. 이 신문 지국은 시민 신고로 적발됐다. 현재 신문시장 신고포상금은 최고 1000만원까지 지급된다.

“참여정부 잘한 일, 신문고시 개정”

신문고시 개정은 신문업계 안팎의 지지를 받았다. 기자협회가 전국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신문고시 개정은 참여정부 언론정책 중 ‘잘한 일’ 2위에 올랐다(2004.2). “잘했다”는 응답이 50.3%, “잘못한 편”이 12.4%로 나타났다. 경향신문이 각계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대(對) 언론조치’ 중 가장 잘한 것 1위로 꼽혔다(2003.6). 일선 신문 지국들은 더욱 강력한 규제를 주문했다. 언론학회의 ‘전국 신문판매지국 실태조사’에 따르면 2531개 지국 중 79.7%가 “판촉활동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서울 소재 지국은 83.7%가 “더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다(2004.3).

신문고시 개정과 신고포상금제 실시로 판매시장은 다소 개선되는 양상을 보였다. 공정위가 중앙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신규독자 중 위법한 경품 및 무가지를 받은 비율은 63.4%(2003)→ 41.9%(2005) → 35.1%(2006)로 줄었다. 그러나 판매시장의 오랜 관행이 하루아침에 정상화되기는 쉽지 않았다. 공정위는 2006년 12월 “신고포상금제 시행 직후 거래질서가 일시적으로 개선되기도 했으나 2005년 말 이후 다시 불공정거래행위가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매체선택권 보장 위해 신문유통원 설립

신문시장 정상화를 위한 또 다른 축은 신문유통원 설립이다. 유통구조를 개선해 신문산업 진흥과 국민의 폭넓은 매체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게 설립 취지다. 신문유통원이 담당하는 공동배달은 언론계의 오랜 주문사항이기도 했다. 매체선택권을 보장하고, 다양한 여론형성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고속도로와 같은 공공인프라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요구였다. 자본력이 약한 신문사는 배달망이 무너져 신문을 잘 만들더라도 ‘질적 경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배달 체계의 효율성을 높여 고비용 구조 개선도 기대했다. 공동배달제 연구는 2000년 언론노조를 중심으로 본격화했고, 2003년 경향신문 등 5개 중앙일간지를 주축으로 과천에서 시범운영을 거쳤다.

신문유통원은 2005년 1월 제정된 신문법 37조에 따라 2005년 11월 문을 열고, 공동배달제의 법적 토대를 만들었다. 기능적으로는 지국의 배달, 판촉, 수금 업무 중 배달에 대해 위탁수수료를 받고 대행해준다. 강기석 신문유통원장은 “신문은 공익에 이바지하는 민간기업”이라며 “공공재인 신문이 물량경쟁으로 도태되지 않고 질적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통한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신문유통원은 2006년에 공배센터 73곳을 구축했고, 2007년에는 223곳을 추가로 설립할 계획이다. 공동배달은 배달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유통원에 따르면 실제 공동배달을 하고 있는 서울 서소문 공배협의회의 경우 평균 배달단가가 공동배달 전 1부당 1,100원에서 925원으로 줄었다. 특히 규모가 작은 신문의 경우 1부당 3,000원에서 큰폭으로 낮아졌다. 부수가 많아지면서 1부당 배달단가가 절감되는 효과다. 또 지국들이 배달 부담에서 벗어나면서 판촉이나 독자관리에 충실해질 수 있다. 지국간 합의를 통해 과도한 경품 사용을 줄일 수 있는 것도 이점이다. 강기석 원장은 “전문지나 각종 간행물 배달 등 2차 사업을 통해 수익모델을 만들 것”이라며 “배달원의 근무여건도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경쟁 지국간 합의를 통해 민영 공배센터를 운영하고, 수익모델을 창출하는 일이 간단치는 않다. 2006년 가을 공배센터에 참여하기 시작한 서울의 한 지국장은 “지국들이 2차 사업을 통해 수익을 내면 지금처럼 무리한 확장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도 “거대 신문들이 지국의 공배센터 참여를 사실상 막고 있어 주저하는 지국들이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공동배달제는 프랑스, 스웨덴, 독일 등 유럽 국가에서 수십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스웨덴은 1969년 도입해 공동배달회사를 이용하는 신문에 국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프랑스는 이보다 앞선 1947년 정기간행물 공동배급회사인 NMPP를 설립하고 국가 지원을 시작했다. 당시 공동배달제 근간을 마련한 전 통신분야 정무장관 로베르 비셰는 “언론의 자유는 편집자가 원고를 작성한 시점부터 독자가 그 기사를 읽는 순간까지 계속돼야 한다. 그러므로 신문, 잡지들에게 동등하고 정당한 운송 및 배급 조건을 보장하는 것은 진정한 언론자유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도 신문유통원에 대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린바 있다. 헌재는 2006년 6월 29일 신문법 위헌 제청사건에 대한 결정에서 “신문유통원을 이용해 공동배달망에 가입할지 독자적인 배달제도를 유지할지는 각 신문사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며 “(신문기업에 대한) 기본권 침해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유통원을 통한 국고지원으로 신문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통제의 길이 열리게 된다고 볼 수 없다”고 일축했다.

신문고시 개정, 신문유통원 설립과 함께 2004년 3월 지역신문발전지원특별법이 제정되고, 2005년 10월 신문발전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경영이 어려운 언론사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민주주의 기초인 여론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신문사는 기사의 질로 경쟁하고, 독자는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신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작업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특별기획팀 (webmaster@korea.kr) | 등록일 : 2007.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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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위기 진단’ 진보학자들 논쟁 불붙었다
최장집 교수 “한나라에 정권 넘겨야” 일파만파
조희연-손호철 교수, 반박-재반박 뜨거운 설전

 
(출처: 한겨레 고명섭 기자)
 
한국 정치 위기 진단을 놓고 진보학계의 지도급 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사이에 논쟁이 불붙었다. 논쟁에 불을 댕긴 쪽은 조희연 교수다. 조 교수는 <한겨레> 인터뷰(1월22일치 4면) 등 여러 매체에서 최장집 교수가 한 발언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인터넷 진보매체 <레디앙>에 기고했고, 이에 대해 손호철 교수가 조 교수의 주장을 일면 동조하고 일면 비판하는 글을 같은 매체에 기고하자 조 교수가 다시 손 교수를 반비판하면서 논쟁의 판이 커졌다.

애초 쟁점을 제공한 최 교수의 논지를 요약하면 노무현 정부는 무능력과 비개혁 때문에 실패했으며, 실패한 이상 특단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한나라당으로 정권을 넘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 원인으로, 사회적 갈등을 제도정치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운동정치(포퓰리즘=민중주의)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정치를 무력화한 데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한나라당 집권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의 이런 주장에서 출발한 세 학자의 논쟁을 진행 순서대로 정리해본다.

조희연의 최장집 비판=조 교수는 최 교수가 한국 정치의 위기에 대한 ‘지적’은 올바르게 했지만 ‘진단’에서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원인은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정당과 국회를 배제한 데 실패 원인이 있다는 최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조 교수는 사회적 힘을 이끌어내는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을 구사하지 못한 데 참여정부 실패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도정치로 갈등을 수렴하는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 저항을 돌파하는 제도정치 바깥의 사회적 힘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확언했다. 민중주의란 정당이나 국회 등 제도권 정치를 뛰어넘어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고 대중과 결합하는 전략을 가리킨다. 진보적 민중주의는 ‘사회경제적 개혁’을 급진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데, 그러려면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르는 대중의 분노를 급진적 방향으로 키워야 한다고 조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제도정치가 정상화하고 그 제도적 틀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기 위해서라도 ‘민중주의적 사회운동’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조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 문제를 진보세력과는 아무 상관 없는 ‘타자의 문제’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과 열린우리당 등 중도자유주의세력을 포함한 진보·개혁 세력 전체가 지닌 본질적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문제의 하나로 그는 노무현 정부가 ‘헤게모니 정치’를 실행하지 못한 것을 들었다. 참여정부는 지나치게 정체성에 집착해 집권 기반을 협소화했을 뿐, 보수적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 함께 가는 기반확대 전략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호철의 반론=손호철 교수는 조 교수의 최장집 비판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자유주의 세력이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줘야 한다”는 최 교수의 주장에 더 무게를 실었다. 손 교수는 한나라당의 집권이 역설적으로 긍정적 요소가 있다며, 정권이 넘어가면 오히려 한국정치가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해 한나라당식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사회적 양극화와 민중 생존의 파탄을 경험”하면 “문제의 핵심이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걸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고 그럴 때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에게서 대안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 교수가 말한 ‘두려움의 동원 정치’를 다시 거론한 손 교수는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안에서까지 ‘한나라당에 권력이 넘어가도 좋으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문제를 풀려는 것은 코미디”라며 “이제 유치한 ‘두려움의 동원 정치’는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이 논리에 ‘두려움의 동원 논리’가 여전히 있다는 인식이 깔린 반론인 셈이다.

조희연의 재반박=이에 조 교수는 “우리 현실의 복합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손 교수의 한나라당 집권 긍정 논리는 최 교수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며, “한나라당 집권 촉진 운동을 해야 한다는 오해도 나올”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손 교수의 논리는 “한국 자본주의가 더 파국적인 상황을 맞아야 대중이 더욱 급진화하고 변혁운동 기반이 강화된다는 1980년대식 인식을 떠올리게 한다”며 매우 위험한 논리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한나라당의 집권은 한국에서 ‘신보수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1930년대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한 뒤 긴 파시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진보세력에게 불리한 상황만 안겨줄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 교수는 2004년 탄핵반대 투쟁에서 확인됐듯이 올바른 일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진보세력의 공간도 확장시킨다며, “탄핵반대 투쟁이 열린우리당에게만 혜택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대약진에도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2007년 대선도 마찬가지”라며 “현재와 같은 구도로 지속되는 것이 좋은가, 한나라당의 패권적 구도가 흔들리는 것이 진보정당의 약진에 좋은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라”고 주문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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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 - [초특가판] 인피니티 특별할인
첸 카이거 감독, 장국영 외 출연 / 인피니티(Infinity)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 1924년 군벌 시대 부터, 1937년 중일 전쟁,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국민당 공산당의 집권, 1966년 문화대혁명 까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경극 배우인 두 주인공(장궈룽 張國榮, 장페위 張風毅)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 급변했던 중국의 근현대사와 그로 인한 사회 문화적 갈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 황제> 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황제> 에서 '황제' 푸이가 갈등의 주체라면, <패왕별희> 에서는 '경극 배우' 데이와 샬로우가 될 것입니다.

- 같은 경극 배우이자, 패왕과 우희라는 중심 배역을 맡아 오래도록 함께 해 온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샬로우의 경우, 연예계의 큰 손으로 등장하는 원 대인이나, 중일 전쟁의 침략자 일본군, 국민당 군대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견지하지만, 문화대혁명 이 후로는 강제를 이기지 못하고 데이와 쥬산(궁리) 뿐 아니라 자신을 파멸시키고 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 데이나 쥬산의 경우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데이는 강제 연행된 샬로우를 구하기 위해 일본군 앞에서, 직권으로 자신을 가석방시킨 국민당 고위간부 앞에서 경극을 보입니다. 쥬산 역시 마찬가지로, 매번 외압에 맞서려는 샬로우를 제지하고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 하지만, 데이와 쥬산의 타협은 결국 자살로 이어집니다. 타협과 자살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모순된 태도인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 후자가 전자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데이에게는 패왕에 대한 정절을 지킨 우희 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쥬산에게는 샬로우에 대한 사랑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전자와 후자를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변화하는 사회와 개인의 갈등, 여기서 더 이상 생각이 진척되지 않아 무척 답답합니다.

- 보탬 하나: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 조선의 남사당 놀이 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관습에 의해 탄생한 여장남자 배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보탬 둘: 아름다운 자태의 궁리를 만나는 것도 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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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박노자가 본 러시아혁명

올해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지금의 달력으론 11월이고 그때쯤이면 러시아 내외에서 이 역사적 사건(이자 소위 '과거의 사건')에 대한 활발한 조명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대학가에서는 이미 이러한 조명이 기획되고 있는 듯하다. 마침 최근에 러시아계 한국인이면서 노르웨이 대학의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글방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예전부터 '당신들의 러시아'를 읽고 싶던 차에 흥미롭게 읽었다. 여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list.html?blog_board=4).

박노자 글방(07. 01. 29)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박노자가 유대인 가계라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The 1917 Russian Revolution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 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Photograph of Lev Davidovich Trotskii]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 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박노자의 포지션은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쯤에 해당하겠다).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1873-1923, 사진)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 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07. 02. 05.

 

 

 

 

P.S. 내가 갖는 의문은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과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가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급하지 않게 인명을 존중해가면서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면서, 즉 어떠한 '과잉' 혹은 '광기'도 배제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열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박노자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주의란 것도 '참 듣기 좋은 이야기'에 속하는 건 아닌가? 해서 경청할 만하지만 내게 '리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 레닌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역시나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정리해놓을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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