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씨네21)

경의선 개통 기념행사장, 꽉 채워진 행사장 한쪽에 늘어선 빈 의자들이 눈길을 끈다. 외국 인사들은 아무도 참석을 하지 않은 것.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더니, 남쪽 대통령(안성기)의 휴대폰이 울린다. “경의선 개통을 불허한다고요?” 일본쪽은 대한제국 시기에 맺었던 조약을 빌미로 경의선의 모든 권한을 주장하고 나선다. 경의선 개통을 취소하지 않으면 경제적 압박에 들어가겠다는 것.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이때 일본이 제기한 문서에 찍힌 국새가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학계에선 퇴출된 사학자 최민재(조재현)가 진짜 국새의 존재를 입증하겠다고 나섰다. 이후 영화는 진짜 국새를 찾으려는 최민재와 진짜 국새가 있어도 없게 해야 한다는 국정원 요원 이상현(차인표)의 대결로 진행된다. 이상현은 최민재의 학교 후배. 오늘날 일본은 대한민국에 없어선 안 될 스폰서라고 믿는 현실주의자다. 국새를 둘러싼 논란 속에 대통령은 갑자기 쓰러지고, 국정은 또 다른 현실주의자 국무총리(문성근)의 권한대행으로 이뤄진다.

100여년 전에 작성된 문서로 갈등의 축을 만드는 영화 <한반도>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전작 <실미도>에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급습 장면과 강인찬(설경구)의 결혼식 습격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줬던 강우석 감독은 <한반도>에서도 고종황제(김상중)의 독살 장면과 남쪽 대통령이 쓰러지는 장면을 교차로 잡아낸다. ‘우리는 한번도 이 땅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는 영화의 메인카피처럼, 해방이 된 지금도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는 셈이다.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영화는 대한제국 시대의 역사적 사건과 오늘날의 현실 정치를 너무나도 단순하게 연결시킨다. 국새만 찾으면 주변 강대국들의 문제도 모두 해결된다는 식이다. 드라마의 허술함도 보인다. 일제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등장한 것 같은 애국지사 민재는 “민비를 이미연”이라고 답하는 주부들을 상대로 핏대를 세우고, 민재를 한심한 민족주의자라고 칭했던 상현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민재의 손을 들어준다. 캐릭터들의 내적인 감정 변화는 쏙 빠져 있다.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시작했지만, 끝내 국가주의를 긍정하며 끝났던 <실미도>처럼, 강우석 감독은 다시 역사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길을 잃는다. 땅 주인 노릇 좀 해보자던 애국심은 어느새 국수주의로 빠져들고, 극일(克日)이라는 주장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손을 잡는다. 의욕만 앞서 드라마적 재미는 물론 자신의 주장마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경우다. 강우석 감독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너무 우습게 알고 사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문제의 원인은 우리의 무심함이 아니라 강우석 감독의 어깨에 들어간 힘이 아닐까.
 
글 : 정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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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네21)
 
“불꽃같이 살고 젊은 나이에 죽어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보니와 클라이드, <트루 로맨스>의 클레런스 같은 부류의 막 가는 청춘을 위한 이 슬로건은 뤽 베송 감독이 잿더미 속에서 부활시킨 15세기 프랑스 성녀 잔 다르크에게도 꼭 들어맞는다. 뤽 베송이 연인 밀라 요보비치의 육체에 불어넣은 잔 다르크의 영혼은 흡사 고조기에 접어든 조울증 환자다. 구원받고 구원하려는 신열에 들떠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는 그녀는 잠자지 않아도 피곤을 모르며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도 아픈 줄 모른다.

1899년 이래 열여덟편에 이르는 ‘잔 다르크 영화’가 만들어진 사실이 웅변하듯 오를레앙의 처녀는 스크린이 누구보다 경애하는 성인(聖人)이다. 칼 드레이어(<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잔이 지복에 닿은 순교자였고, 빅터 플레밍(<잔 다르크>(1948))의 여성 전사가 페미니스트의 원조였으며, 오토 프레밍거(<성녀 잔>(1957))의 히로인이 감당 못할 일을 저지른 틴에이저였다면, 뤽 베송의 잔 다르크는 그 모든 것이 되기를 욕심낸다. 베송과 앤드루 버킨의 무엄한 각본은 잔 다르크 신화에 드리운 가톨릭적인 휘장과 성스러운 동기마저 쑤시고 찔러본다. 대관절 군사들은 뭘 믿고 애송이를 따랐는지, 어쩌자고 신쯤 되는 존재가 인간들의 패싸움에 끼어 들었는지, 엄청난 살생을 하고도 성녀가 될 수 있는지. 평범한 현대인이라면 품음직한 ‘경망스런’ 궁금증을 툭 까놓고 던지는 것이다.

잔 다르크는 그저 환각에 홀린 운 나쁜 광신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고 소근대는 무람없는 태도는, 실상 최신판 <잔 다르크>가 지닌 제일 쓸 만한 창과 방패다. 하긴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간구할 때마다 응답하는 존엄하고 아름다운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너를 믿노라고 어떤 소명을 쉼없이 속삭여온다면, 어떻게 그를 실망시킬 수 있으랴. 전장에 나선 소녀는 죽도록 무서웠을 것이다. 토막난 팔다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이처럼 눈높이 전략을 택한 베송은 기적에 대해 철저히 인색하다. 잔의 통쾌한 무용담이나 기적을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여, 나를 따르라!”고 소년 같은 목소리로 외쳐 병사들의 미묘한 집단 심리를 휘젓는 ‘치어리더’를 보여줄 뿐이다. 대관식의 성유를 보통 기름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화도 기적에 대한 코웃음에 다름 아니며, 잔의 종교적 비전을 원색의 넝쿨과 꽃잎으로 장식된 다소 유치한 소녀적 판타지로 꾸며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성한 후광을 걷어낸 <잔 다르크>의 승부수는 상업 영화의 그것이다. 악귀 같은 적군과 기회주의적인 왕실과 교회에 포위된 외로운 영웅, 남녀 관객 모두에게 호소하는 요보비치의 중성적 섹시함, 카메라로 드럼을 치는 듯한 베송 특유의 박력있는 스타일에 <브레이브 하트>류의 중세적 잔혹함까지 버무려진 액션 시퀀스는 기나긴 상영시간 동안 관객을 붙잡아둔다. 그러나 피부 안쪽까지 소름돋게 하는 흉칙한 모양새의 무기들이 일으키는 피보라와 불필요하게 잔혹한 강간 장면은 알레르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잔 다르크>의 또다른 주요 병기는 강인한 젊은 여성의 이미지. 잔은 시종 여자를 얕잡아보는 병사들에게 으르렁대고, 끝내는 남장이 독신(瀆神)보다 더 큰 죄인 양 심문받는다. 하지만 전장에서 바람둥이, 무뢰한, 지적인 미남 등 다양한 유형의 장군들에게 보호받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든든한 ‘오빠’들을 거느린 ‘막내공주님’을 연상시킨다. 들판을 누비고 성벽을 타오르던 영화는 잔이 포로가 되는 순간 잉그마르 베르히만 풍의 사이코 드라마로 변신한다. 인간의 형상을 한 잔의 양심으로 등장하는 더스틴 호프먼은 “들판에 놓인 검! 그것이 징표였어요!”라고 도리질하는 잔을 “아니. 그건 그저 들판에 놓인 검일 뿐이야”라고 일축하며 가엾은 소녀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미국과 러시아의 배우들이 영어 대사를 주고받는 프랑스 시대극 <잔 다르크>는 베송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 프랑스영화의 적통과도 관계가 멀지만 할리우드 관습에서도 비스듬히 비껴간다. 국적없는 영화가 2000년대 영화의 한 경향이 된다면 베송은 훗날 개척자로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예산 6천만달러의 대작 <잔 다르크>가 당장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스타일의 소화불량이다. 서로에게 단단히 동여매졌더라면 이완과 긴장의 매력적인 리듬을 창출할 수도 있었던 전쟁 서사극의 악장과 심리극의 악장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데 그쳤고, 전투 시퀀스 내에서는 다시 중세적 하드고어와 코미디가 서툴게 공존하는 딱한 광경이 연출됐다.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 되는 인물 잔을 민중의 벗과 근왕주의자, 광신자와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고단하게 방랑하도록 만든 것도 시대극 팬들을 맥풀리게 할 만하다. 스펙터클과 영웅담, 인간성의 비밀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위대한 서사극의 징표를 <잔 다르크>에서 찾기는 힘들다.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승전고를 울린 지점에서 뤽 베송의 <잔 다르크>는 총총히 퇴각하고 만다.

실존인물 잔 다르크(1412∼31)
성녀인가 정신병자인가

 
“절망과 복수심으로 싸웠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구원으로 믿고 계속 피흘리게 했습니다. 저는 오만하고 편협했으며… 그래요, 잔인했습니다.” 영화 <잔 다르크>에서 화형을 앞둔 잔은 메마른 목소리로 이렇게 고해한다.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든 근세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프랑스 국민의식 형성의 마스코트가 된 영웅 잔 다르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로렌 근교의 시골마을 동레미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잔은 대천사 미카엘과 성녀들의 음성을 통해 프랑스를 유린하던 영국군과 부르군디 일파를 축출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신과 직접 교통한다는 그녀의 고백은 후일 종교재판에서 교회의 심기를 거스른 원인이 된다. 잔의 언니가 반송장 상태로 강간당하는 영화 속의 끔찍한 사건은 역사에 기록된 바 없지만 시농성에서 신분을 감춘 황태자를 한번에 알아본 일화는 유명하다. 기록에 의하면 잔은 힘세고 건장했지만 얌전한 몸가짐을 가진 처녀였고 영화와 달리 태자를 만났을 때 이미 무장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진두지휘에 나선 잔은 계시를 받은 듯 갑작스런 공격을 명하거나 그녀가 들어봤을 리 없는 지역으로 출동을 명해 승리를 거둠으로써 프랑스 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했다. 현실적 조건을 초월한 몇 차례의 승전과 잔의 불가해한 육체적 정신적 용기는 신화가 됐고 영국군은 잔의 흰 옷자락이 나타나기만 해도 줄행랑을 쳤다. 1430년 콩피에뉴 전투에서 후위를 방어하다 사로잡힌 잔은 극심한 탈출 욕구에 시달린 나머지 첨탑 위에서 몸을 던져 실신하기까지 했다. 잔 다르크의 마지막 부탁은 화형의 순간에 십자가를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현대의 연구들은 잔 다르크가 적인 영국인보다 프랑스 내분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을 밝혀내왔다. 종교에 비판적이던 후세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성직자들의 조종을 받은 신경쇠약증 환자라고 냉정히 평했으나, 전기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프랑스사>에서 잔 다르크를 가리켜 신앙과 의지가 성취할 수 있는 기적의 가장 경이적인 예라고 썼다. 1920년 5월16일 성녀로 추증된 그녀의 축일은 5월30일이다.
 
글 :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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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교육방송 ‘독립영화극장’ 5년만에 부활
“젊은 감각·재능 담을 것”…봄개편서 다큐 프로 대거 편성

 
교육방송 〈독립영화극장〉이 5년 만에 부활한다. 14일 봄개편 설명회에서 교육방송은 2002년 2월 막을 내린 〈독립영화극장〉(금 밤 12시35분)과 2004년 8월까지 방송됐던 〈예술의 광장〉(화 밤 11시45분)을 각각 3월과 2월부터 다시 방송하겠다고 했다. 특히, 〈독립영화극장〉은 얼마 전 비슷한 취지의 프로그램인 〈KBS 독립영화관〉이 영화·문화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폐지된 뒤라 관심이 모아진다.

1998년 〈단편영화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EBS 독립영화극장〉은 한때 독립영화를 방송하는 유일한 프로그램으로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함께 누렸으나 2001년 한국방송에서 〈KBS 독립영화관〉을 시작한 뒤로 작품 수급과 프로그램 차별화에 어려움을 겪다가 문을 닫았다. 연출을 맡은 오정호 피디는 “교육방송이 5년 전 프로그램을 부활하는 이유는 독립영화의 창구가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만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판단도 있다”고 했다.

상업영화의 흥행성적 잣대를 독립영화에 들이대 비주류로만 보는 시선에 대한 의문도 있다. “해마다 독립영화 600편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그만큼 독립영화의 가치나 잠재성을 보여주는 일이며 한국에서 독립영화 제작여건이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전 독립영화 프로그램이 카메라를 든 몇몇 게릴라들의 독립 권역이었다면, 2007년판은 일상적으로 영상을 만들어내는 젊은 세대들의 반짝이는 감각과 재능을 담아낼 것입니다.” 첫 방송인 3월2일에는 진행자 없이 영화아카데미나 영상원 영화제 졸업작품 중에서 2~3개 작품을 선별해 방송할 예정이며 1년에 600편 이상의 극영화, 애니메이션을 방송하는 독립영화의 대중적 창구를 목표로 하고 있다.

교육방송은 이번 개편에서 다큐멘터리를 대거 편성했다. 2006년 전체 방송의 12.5%였던 다큐멘터리 비중을 2007년 19.1%로 높였다. 편성기획팀 김시준 피디는 “다른 방송3사에서 밤 10시만 되면 드라마를 방송한다면, 교육방송은 매일 밤 9시20분부터 2시간 동안 다큐멘터리를 집중 방송한다”고 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밤 9시50분에는 인문·교양을 소재로 한 국내외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는 〈다큐 10〉이 방송된다. 매주 목요일 밤에는 여러 분야의 명의들을 찾아나서는 〈명의〉, 화요일 밤에는 문정현 신부, 이문열 작가 등이 나오는 〈시대의 초상〉 등 인물 관련 다큐멘터리 여러편도 신설한다. 소수자 인권을 조명하는 〈똘레랑스〉는 폐지 반대론이 많았으나 결국 3월부터 〈EBS 시사 - 세상에 말 걸다〉로 바뀐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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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조기원 기자)

온가족 ‘도드리’ 장단 맞춰 어깨춤 덩실
설 연휴 국립국악원서 상설공연

어머니와 함께 ‘공연 나들이’를 간다는 것은 조금은 난감한 일이다. 우아한 오케스트라 공연은 폼이 날지 모르나, 클래식 음악에 취미가 없으시면 마냥 졸리울 수 있다. 그렇다고 신파극을 보자니 내 몸이 배배 꼬일 것 같다. 모처럼의 겨울 휴가, 방바닥에 눌어붙어 주전부리만 하는 게으름뱅이에게 효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참을 뒹굴다가 공연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서울시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하는 토요상설공연! 지난 10일 토요일 오후 5시 어머니를 모시고 국악원을 찾았다. 반응은? 다음날 한우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막이 오르자 조선시대 궁중 정악 연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마네킹 마냥 앉아 있던 30여명이 일제히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들을 거리’ 뿐 아니라 ‘볼 거리’도 제공했다. ‘다시 돌아가서 들어간다’는 뜻인 장단 ‘도드리’를 연주하는 이들은 화려한 궁중 예복으로 눈을 사로잡았다. 어머니 역시 “한복이 곱다”는 말을 먼저 하셨다.

이어서 대금 산조와 가곡 ‘태평가’, 남도 선소리 ‘화초 삼거리’, 창작곡 ‘섶섬이 보이는 풍경’, 장구춤이 이어졌다. 산조란 가야금이나 대금 등의 연주자가 다양한 장단에 맞춰 여러 악장을 단독 연주하는 양식이다. 19세기말 삼남지방에서 나타났다는데,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가락을 덧붙이거나 덜어내기도 한다. 물론 이런 상식은 공연 팸플릿 읽으며 얻은 덤이다. 생경한 한자가 많은 가곡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어진 남도 선소리와 장구춤의 흥겨움은 평범한 관객도 금방 들썩이게 할만 하다.

국립국악원 장악과 서정호씨는 “토요상설공연은 1시간10분 동안 7개 팀이 출연하고 각 공연이 10분 안팎”이라며 “일반인들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하이라이트 위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중국에서도 경극, 인형극, 변검 등 전통 연희들을 맛보기로 짧게 이어붙인 프로그램을 쉬이 볼 수 있는데, 국악원에서도 이런 공연을 내놓은 것이다. 실제 공연장에는 외국인도 많이 온다.

토요상설공연은 한 해 동안 12가지 레퍼토리가 반복된다. 1년치 공연 일정은 국악원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공연장에서 천원짜리 팸플릿을 사면 공연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읽을 수 있다. 국악원 소속 악단만이 연주를 담당하는데, 한 차례 무대에 30여명에서 많게는 100여명이 출연한다. 서씨는 “정악단과 민속악단, 무용단, 창작악단 4개 악단에 출연기회를 고루 안배한다”고 설명했다.

설 연휴가 시작되는 17일에도 공연은 이어진다. 전통 음악의 십이율에서 다섯번째 음이자 절기로는 삼월을 뜻하는 <유빈>이란 제목 아래 경기민요, 살풀이, 설장구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공연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부모님과 나들이 나선 김에 국악원이 자리잡은 우면산을 산책하거나 국악박물관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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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레시안)

"지금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국장 기고] 21세기, 왜 트로츠키를 기억하는가?

2007-02-05 오전 9:01:41

정성진 교수의 새 저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출판사 펴냄)를 둘러싸고 트로츠키가 한국 사회에 주는 현재적 의미를 묻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국장은 정 교수의 저서에 대한 평가에 앞서 트로츠키의 삶과 사상이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주는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짚는 기고를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편집자>

"너희는 이제부터 영원히, 너희가 비롯된 곳으로 돌아가라, 역사의 먼지 속으로!"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앞두고, 혁명에 반대하며 소비에트 회의장에서 퇴장하는 온건파 사회주의자를 향해 이렇게 장엄한 외침을 남긴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금도 '역사의 먼지' 속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 아니, 우리가 그를 그렇게 보낼 수가 없다. 그는 바로 레온 트로츠키다.

지금 우리가 트로츠키를 돌아봐야 할 이유

최근에 그의 이름을 불러내 마르크스와 나란히 세운 책이 나왔다.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그것이다. 요즘 그 책에 대한 서평 탓에 좀 떠들썩한 것으로 안다. 나는 책을 아직 꼼꼼히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에 대해 직접 언급하거나 논쟁에 뛰어들 처지도 아니고, 그럴 의도도 없다. 다만, 1917년 10월 혁명이 아흔 돌을 맞는 올해에 트로츠키를 다시 불러내는 두툼한 분량의 책이 국내 저자의 손으로 나왔다는 것은 일단 의미가 적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 책을 훑어보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더 생각났다. 바로 아무도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지난 2006년이 1956년으로부터 50주년이 되는 해였다는 사실이다. 1956년은 어떤 해인가? 1956년 2월 25일 새벽,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의 폐막을 앞두고 갑자기 대회장이 봉쇄한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예정에 없던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장장 일곱 시간에 걸쳐 계속 소개된 보고서의 내용은, 3년 전 죽은 스탈린 대원수의, '전 세계 노동계급의 영도자'라 불리던 그 사람의 (사실은 그 개인만이 아니라 그의 일파와 그 체제의) 죄상이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제20차 당 대회의 스탈린 비판이 새로운 시대의 개막 선언인 줄 잘못 이해한 헝가리 민중이 그로부터 39년 전 10월의 러시아 민중과 똑같은 포즈로 역사의 무대 위에 나섰다. 그리고 이들에게 '사회주의 조국'은 탱크로 대답했다. 이른바 '노동자 국가'에서 일어난 노동자·민중의 봉기, 헝가리 혁명이었다.

사회주의 조국의 탱크에 유린당한 헝가리 민중을 보며 가슴이 찢어진 서유럽 사회주의자는 결국 1956년 말부터 공산당을 집단으로 탈당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이른바 '신좌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20년 전에 연초에 있었던 흐루시초프의 지루한 연설보다 더 정확히 소련 '사회주의'의 문제를 꿰뚫고 또 한 번의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한 사람을 재발견한다. 착잡하지만, 작정하고 낸 그 책의 제목도 다시금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배반당한 혁명>(김성훈 옮김, 갈무리 펴냄)이 그것이다. (편집자 : 트로츠키는 1929년 스탈린으로부터 추방당한 후, 암살 위협을 피해가며 터키, 프랑스 등을 전전하며 1936년 이 책을 완성한다. 1937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결국 1940년 트로츠키가 멕시코에서 비극적으로 암살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바로 이 1956년으로부터 50년이 지난 작년에 '스탈린주의 대 제국주의'의 구도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이 한반도에서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와 연관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왕년에 미국과 소련이 벌이던 핵무기 개발 경쟁 비슷한 일이 재연됐고, 남한의 좌파정당이 북한 정권과의 관계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아니, 지금도 와병 중이다). 이때마다 내가 주문처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름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1917년의 승리를 통해 한 세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올 뿐만 아니라, 1956년의 패배를 통해 여전히 우리와 동시대인인 저 트로츠키 말이다. 그리고 그가 반백의 나이에 망명지에서 새롭게 시작한 투쟁을 새삼 다시 돌아보았다.

"관료주의적 전제체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비판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것은 볼셰비키를 비롯한 소비에트 내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의 회복, 그리고 노동조합의 부활을 의미한다. 산업 활동에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이것은 근로 대중의 이해에 들어맞도록 기존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경제문제를 자유롭게 논의함으로써 관료주의적 오류와 좌충우돌 때문에 생겨나는 비용 전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소비에트 궁전, 새로운 극장, 전시용 지하철 등 실속은 없으면서 비용만 많이 드는 사업들은 순위에서 노동자 주택단지 건설에 밀려날 것이다. (…) 군대 내의 계급은 즉시 철폐될 것이다. 훈장의 번쩍거리는 쇳조각은 용광로 속에 던져질 것이다." (<배반당한 혁명> 중)

이 짧은 문장이, 지금 이 사회에서 똑같이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 안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미래의 절실한 과제일 수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종파주의'의 딱지를 붙일 이유가 될 수 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쓰인 글월이 아직도 이렇게 격한 찬반 대결을 낳는다면, 이런 현상을 '동시대성'의 징표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 아직도 이렇게 치열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꼭 그만큼 트로츠키는 21세기의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적이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이기를 사양하는 이유

그럼 이 시대의 좌파는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뒤늦게라도 트로츠키'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운동을 만들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건 아니다," 이렇게 답하겠다. 트로츠키주의는 우리의 '교과서'가 아닐 뿐더러, 우리에게 새삼 또 다른 교과서가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 속 혁명 사상의 '위대함'은 그것의 '해방을 지향하는 힘'에서 나온다. 가령, 우리에게 레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혁명의 공식과 상투어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다.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잡동사니를 헤치고 혁명의 '정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한데, 그 '레닌'이라는 이름을 앞에 내건 '레닌주의'는 정작 또 다른 공식과 상투어로 변질하곤 했다.

트로츠키의 경우 이 반전은 좀 더 희극적인 양상을 띠었다. 한평생을 역사에 대한 진지한 응시와 현실에 대한 창조적인 돌출로 일관했던 트로츠키 자신과는 정반대로,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는 지루하고 번잡한 교리 문답과 스콜라적 논쟁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한계를 돌파하기에는 자기만족적이기만 했던 소규모 정파들의 가족 멜로 드라마였다. 지금도 '위키피디아(www.wikipedia.org)'에 들어가서 영어로 '트로츠키주의(Trotskyism)'를 검색해보면 나라마다 족히 열 개 아니 스무 개는 넘는 무수한 트로츠키주의 정파를 찾아낼 수 있다.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애초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갈라져서 지금은 서로 어떤 심오한 차이를 갖는지조차 확인하기 쉽지 않다.

우리가 굳이 이런 역사까지 외국 것을 수입해서 반복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먼지' 속으로 돌아가야 할 것들 중의 하나일 뿐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간판을 내건 이론가나 활동가의 무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 것일 테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 나라 안에만 붙잡힌 시각으로는 그 한 나라의 변화마저 이뤄낼 수 없다는 각성과 한반도 안에 존재하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의 한계와 모순을 돌파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동안 우리는 그 각성과 용기를 일깨우는 상징으로, 평생을 현실의 문제에 대한 각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용기로 일관했던 트로츠키, 그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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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주의가 죽어야 트로츠키가 산다" 
[이재영 기고]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읽고
 

2007-01-29 오전 10:40:13    

책읽기는 즐거워도 책에 대한 글쓰기는 즐겁지 않다. 글쓰기를 작정하고 책을 드는 순간부터 책읽기가 숙제가 되어 버리니, 소란스런 지하철이나 쾌적한 화장실에서 가끔 책 꺼내 보는 소소한 재미는 사라지고, 책상 위에 책 펴두고 밑줄 긋는 고역이 시작된다. 더군다나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펴냄) 같이 두툼하고 묵직한 책은 제대로 읽는 데만 족히 반년이 걸릴 거리이다. 언론 편집인의 시간관념이 그런 '긴 시간'을 용납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서평'이 아닌 '책 소개'를 겸한 개인적 '단상'이다.

경제사상사에 대한 고급 읽을거리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첫 번째 장점은 그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간 한국에 트로츠키주의를 소개한 이들은 크리스 하먼, 토니 클리프,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이 영국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국 SWP 당원에게 트로츠키가 갖는 오늘날의 의미는 한국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간 이렇게 영국 SWP 당원의 눈으로 해석된 트로츠키를 소개받아 온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에 대한 책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정성진의 책은 그간 공간적, 시간적 번역을 따로 해야 했던 독자의 수고를 덜어 준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또 다른 장점은 이 책이 (제목과는 다르게) 트로츠키에 시선을 온전히 고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이 책(1~3부)은 경제사상사에 대한 국내외의 최신 해석을 종횡무진 다루고 있다. 리카도, 마르크스, 제2인터내셔널, 레닌, 월러스틴, 브레너, 네그리는 물론 장상환(경상대 교수), 이병천(강원대 교수), 신정완(성공회대 교수)도 언급된다. 19세기 이래 정치ㆍ사회 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됐던 경제이론을 비판적으로 일별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가 이 책을 "대학 학부 수준에서 정치경제학 기초를 이수한 이들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쟁점들을 공부하는 '고급 정치경제학' 과정 또는 대학원 수준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과정의 교재"로 권하는 자신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책 제목만 보고 한국 경제에 대한 정치한 트로츠키주의적 해석을 기대했던 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부지런한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영구군비경제론'이나 '장기파동론'의 방법 틀을 이용해 한국 경제를 분석한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펴냄)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가 계승할 트로츠키주의?

총 4부로 구성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본격적으로 트로츠키가 언급되는 것은 맨 마지막 제4부의 네 장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는 트로츠키의 사상은 '트로츠키주의'의 눈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를 위해 정성진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 태어나 2000년에 사망한 토니 클리프의 생애를 되짚는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영국 SWP의 창당을 주도한 클리프는 20세기 트로츠키 추종자의 투쟁과 분열의 핵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정성진은 클리프의 생애를 통해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자의 이론과 실천을 일별함으로써 이른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계승해야 할 트로츠키주의를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마지막 장(15장) '21세기 사회주의와 참여계획경제를 위하여'에서는 이렇게 도출된 트로츠키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대안 경제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겠지만 이 '참여계획경제'는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김익희 옮김, 북로드 펴냄) 등의 논의에서 따온 것이다. 정성진은 이 15장에서 최근의 참여계획경제의 논의에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사회주의적 비전이 아닌) 스탈린주의적 편향이 엿보인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이런 식의 비판은 책 전체에 걸쳐서 한결같이 보이는데 이 중에는 현실과 맞지 않는 과장이 적지 않아 눈에 거슬리곤 한다. 그 중 몇 개만 살펴보자.

예를 들어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는 (…) 차베스가 제창한 21세기 사회주의"이고 그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언급은 영국 SWP와 긴밀한 연관을 맺은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의 사회주의자들 안에서나 그렇지 세계 진보 운동의 최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황 파악이다.

다음과 같은 언급은 또 어떤가? "스탈린주의는 청산되기는커녕 알튀세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자율주의 등 '포스트스탈린주의' 경향으로 변이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진보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인식도 자의적이다.

바로 정성진이 그렇게 적대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장사회주의 역시 트로츠키주의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비판을 받는 대상이 이미 '~주의'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운 상황에서 온갖 흐름에 대해서 '~주의'라고 낙인을 찍는 식의 비판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도 의심스럽다.

'계획경제' 집착한 스탈린의 재탕?

물론 진보학자들이 거시적 변혁 전망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비판은 타당하다.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이론가 장상환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의 한계가 명확하다. 정확한 정보 수집의 불가능과 동기 유발의 어려움, 개인의 개성적 발전의 저해 등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장상환의 '솔직한' 고백에는 사회주의를 일종의 경제학적 계산 가능성으로 치환하려는 욕망이 보인다. 즉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제거된 계획경제만 가능하다면 사회주의가 가능할 텐데, 하는 식의 아쉬움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정성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살펴보자.

"정보화의 핵심인 네트워크 경제의 발전에 따라 아래로부터 참여 계획의 실행 가능성이 20세기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11장)."
"가령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를 사이트에 공개하는 것을 의무화한다면, 이를 수집 분석해 전국적 및 전 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투자를 계획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15장)."

이런 정성진의 언급은 무척 당혹스럽다. 그가 되살리려고 하는 트로츠키뿐만 아니라 역사 속 대다수 사회주의자는 계산 가능성과 같은 요소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배경, 그 배경 속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설 정치적 주체의 역동적 형성을 사회주의의 요체라고 보았다. 바로 이 역동적인 흐름을 계산을 통한 계획경제의 실현과 같은 식으로 곡해한 것이 바로 스탈린주의가 아닌가?

사실 이것은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니다. 트로츠키 역시 정성진이 '경제주의'로 후퇴했다며 비판한 레닌의 신경제정책(1921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당시 트로츠키가 신경제정책을 "퇴각이되 항복은 아니"라며 과도 단계로 인정하고, 그 과도기가 "한 세기 또는 반세기 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측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신경제정책은 어쩔 수 없이 채택해야 할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정성진이 얘기하는 '트로츠키주의'와는 다르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면 정성진의 책 곳곳에서는 (그가 그토록 비판하는) '스탈린주의'적 문법이 보인다.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배분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신속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귀결될 것이다(15장)." 트로츠키의 경제 이론대로 따르면 다 해결되고, 잘 될 것이다? 이 인용문의 '트로츠키'를 '스탈린'으로만 한 번 바꿔보라. 스탈린이 그토록 강조했던 '국가사회주의만 되면 모든 것이 다 자동으로 해결이 될 것이다'라는 인식과 무엇이 다른가? 매사가 그리 잘 풀린다면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 정도로는 21세기 한국 사회 진보 이론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 정성진은 이 책의 원고를 '다함께'에 보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IS 경향의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다함께는 한국을 대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단체다. 나는 한국에서 이들이 과연 트로츠키의 주장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들이 트로츠키를 잘 알고 자주 인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요한 정치 일정 때마다 트로츠키가 살아 있었더라면 비판을 넘어 혐오해 마지않았을 북한의 현실 사회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이들과 어울린다(연대?)는 추문이 계속 들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레닌, 스탈린보다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의 반란을 진압한 당사자다. 또 현실 정치인으로서 트로츠키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평의회의 자율성에 반하는 결정과 실천을 했다. 내가 굳이 트로츠키의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은 걸출한 혁명가였던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트로츠키주의' 교과서의 문구를 신봉하는 것보다는 트로츠키의 실천적 굴절을 연구하는 것이 트로츠키가 꿈꾸었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살려내는 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정성진의 이 노작을 끙끙대며 읽은 후, 마음 한 칸이 개운치 않은 것은 과연 나 혼자뿐일까? 

이재영/민주노동당 前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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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심사인가?"
[이정구 반론] 이재영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서평에 부쳐

2007-01-31 오전 9:27:21

정성진 경상대학교 교수가 펴낸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도서출판 한울 펴냄)는 근래 보기 드물게 마르크스주의를 정면으로 다루는 책이다. 정 교수는 그간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오면서 특히 트로츠키를 매개로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을 꾀하고, 21세기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이 책은 이런 정 교수의 최근 고민이 집대성된 것이다.

지난 29일 이재영 전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이 책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트로츠키주의를 지렛대로 새로운 진보 이론을 구축하려는 그의 노력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정 교수도 트로츠키주의를 '만능'으로 보는 오류를 보이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진보 이론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 전 실장의 서평에 대해 민주노동당 당원 이정구 씨가 반론을 보내왔다. 이 씨는 국내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임인 다함께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씨는 "이 서평이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며 조목조목 이 전 실장을 반박한다.

<프레시안>은 정 교수의 새로운 책에서 촉발된 이번 논쟁이 한국의 새로운 진보 담론과 한국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유의미한 토론으로 전개되길 바라며 이 씨의 반론을 소개한다. 앞으로도 생산적인 논쟁이 이어질 경우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정성진의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쓴 이재영의 글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편파적이고 부당한 깎아내리기, '아니면 말고'식의 억측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부터 살펴보자.

이재영은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의 반란을 진압한 당사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 당시 트로츠키는 우랄산맥 지방에 출타 중이었고, 그곳에서 곧바로 모스크바로 가서 제10차 당대회에 참가했다. 진압 책임자는 서부전선 담당 적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다. 심지어 그 당시 트로츠키의 직책은 군사 분야의 지도력을 갖고 있는 적군 사령관이 아니라 당의 전쟁문제 정치위원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당시 혁명의 최정예 부대였던 크론시타트 수병과 1921년의 수병은 계급 구성이 달랐다. 1917년의 수병은 농민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과 페트로그라드의 공업 노동자로 구성돼 있었고 내전 동안 혁명을 방어하며 전투를 이끌었기 때문에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했다. 반면 1921년의 수병은 새로 징집된 농민 신병이었다.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은 반혁명 위협이 사라진 뒤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를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요구는 반혁명 세력의 복귀를 부르는 신호나 다름없었기에, 볼셰비키가 이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더욱이 백군과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계급들은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반혁명의 발판으로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을 진압한 것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비극적 결정이었고 불가피한 폭력이었다.

사회주의는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

그러나 이재영의 억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장사회주의 역시 트로츠키주의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주의"라고 낙인을 찍는다고 힐난하지만 오히려 그런 식의 근거 없는 비난과 낙인 찍기는 그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듯하다.

이재영의 서평은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 동안 스탈린주의(NL과 PD)와 각종 포스트스탈린주의(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케인스주의 등)에 맞서 트로츠키를 지렛대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새로운 대안으로 구체화하려는 그의 노력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성진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논의 과정, 그리고 잠정적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성진의 노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재영이 찾아낸 이 책의 장점이라곤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에 대한 책"이라는 점이다. 그의 글을 따라가며 반박해보자.

이재영은 "세계 진보진영의 화두가 (…) 사회주의"라는 '상황 판단'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긴밀한 연관을 맺은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 안에서나 그렇다고 치부한다. 그렇다면 그도 언급했듯이,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한 차베스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또 세계사회포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대안 사회를 논의하는 주제라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재영은 정성진이 참여계획경제에 대한 논의를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에서 가져왔다고 폄하하고 싶겠지만, 앨버트 또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논객 중의 한 사람이다. 1999년 시애틀 시위 이래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던 반자본주의 운동과 남미의 반란에 고무된 사람들은 오직 IS만이 아니었다. 다양성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생태주의자들, 노조원들, 자율주의자들 등이 반자본주의 운동에 동참했고, 또 남미의 격변에서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 이런 운동의 성과 덕분에 세계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체제와 시장경제가 아닌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옛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민주노동당이 등장했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의 내용에 대한 이해는 저마다 다르지만, 한국 사회의 대안 사회 모델 중의 하나로 사회주의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계획경제의 가능성 모색해야

이재영이 계획경제의 불가능성을 반박하는 정성진의 주장을 1930년대의 사회주의 계산 논쟁과 비교하고 더 나아가 이와는 무관한 1921년의 신경제정책과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을 뿐이다. 이재영은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이 불가능하다는 장상환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사실 정성진은 바로 이런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 최근 세계 진보진영에서 논의되는 앨버트나 팻 데바인 등의 참여계획경제를 원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이루지 못하는 이른바 '시장의 실패'는 진보진영에 속하는 많은 사람에게 분명한 사실이다. 그 때문에 생산과 투자를 전국적으로 또 전 세계적으로 계획하는 일이 가능한지 아닌지, 또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 조정 메커니즘은 어떨지를 논의하는 것은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이고 연구 대상이다. 또 참여계획경제 논의는 적어도 시장과 계획의 결합이나 시장의 활용을 담고 있는 시장사회주의와는 그 지향점이 다르다.

이재영은 시장이냐 계획이냐 하는 논의에서 불쑥 사회 변화의 주체 문제를 끄집어내고는 정성진을 스탈린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어느 곳에서도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투쟁이 없는 계획경제의 청사진만으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 않다.더욱이 이재영은 스탈린식 "계획경제의 실현"을 레닌과 트로츠키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신경제정책을 들고 있다. 즉 레닌과 트로츠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신경제정책을 정성진이 경제주의라고 비판했으니, 트로츠키 자신과 정성진이 말하는 트로츠키주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재영의 논법은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맥락에서 떼어내 그 자체로만 파악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역사적 추상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사람이 죽은 뒤 앙상한 뼈만 남은 것을 두고 '같은 뼈조각이니 사람과 원숭이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노동자 국가가 안팎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한 신경제정책을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권력을 장악한 채 위로부터 내리는 일방적 지시에 따른 '계획' 경제(사실 계획경제라기보다는 지령경제라는 말이 더 맞다)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트로츠키에게도 약점과 실수가 있었고 또 1956년 헝가리혁명에 대한 소련의 진압을 옹호하거나 1989년 톈안먼 항쟁을 진압한 중국 지배자들을 옹호한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국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자기해방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정수를 보존하고 후대 사회변혁 운동가들에게 전수하려 한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와 정성진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함께 한미 FTA 반대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한편, 이재영은 "한국을 대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단체인 '다함께'가 "북한의 현실 사회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이들과 어울린다(연대?)는 추문이 계속 들"린다며 다함께가 "트로츠키의 주장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주장했다. 이재영은 진지하지 못하게 "추문" 운운함으로써 마치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야합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면서도 이를 간접화법으로 표현해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함께가 북한을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는 사실과 북한 지배자들의 억압에 반대하고 탈북자들을 환영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남한의 범자민통 동지들은 대체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고 피착취·피억압 대중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하며 사회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우리 운동의 일부다. 다함께가 이들의 전략과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들과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다함께는, 이재영의 주장과 달리, 트로츠키가 말한 공동전선 정신에 부합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정치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쑥덕공론을 펼치거나 지지하고 연대해야 할 운동을 그 지도 세력의 정치사상을 핑계되며 지지하지 않는 종파주의가 진정한 문제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이재영의 서평은 비판이 아니라 근거 없는 중상과 비방일 뿐이다. 물론 진보진영 내부에도 다양한 차이들, 상충되는 정치적 노선들이 존재하며, 이들 간의 비판과 토론은 역사의 진보를 앞당기는 것으로 존중되고 고무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재영 씨의 서평은 이와 같은 진보진영 내부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 기초한 비판이 아니라,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식의 비방으로 일관되어 있는데, 이는 진보진영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를 저버린 것이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입장이야 어떻든 우리나라 진보 학계에서 정말 오랜 만에 나온, 또 오랜 기간 숙성된 역작임은 이재영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영은 이 노작을 비판하려면 우선 시간을 갖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비판을 할지라도, 지금 이 서평처럼 자신이 지지하지도 않는 트로츠키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며 너스레를 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민주주의 혹은 케인스주의의 입장에서 '다함께'에 대해서든 정성진에 대해서든 인식과 대안에서의 차이와 논리적 비판을 분명하게 제기했더라면, 21세기 우리나라 진보의 대안 모색을 위한 토론의 발전에 약간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정구 / 민주노동당 당원ㆍ다함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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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하나…훈고학은 이제 그만"
[반론]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묻는다

2007-02-06 오전 9:50:37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출판사 펴냄)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트로츠키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실장을 지낸 이재영 씨와 국내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자 단체 '다함께'의 이정구 씨가 한 차례씩 주고받은 논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에 이재영 씨가 다시 재반론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그는 이번 글에서 "이정구 씨의 반론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와 근거 없는 논리적 비약이 많다"며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좀 더 솔직하게 담았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트로츠키, 레닌, 마르크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훈고학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도 던지고 있다.

<프레시안>은 트로츠키의 한국적 수용을 둘러싼 이번 논란이 현재 한국 진보 세력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한 지표라고 판단해 기고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없다

'다함께'의 이정구는 내가, 트로츠키가 크론시타트 반란을 파괴했다고 비판한 것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한다. 사실 러시아 혁명을 잘 알지는 못한다. 잘 모르는 내가 알고, 잘 아는 그가 모르는 사실 몇 가지만 확인하자.

이정구는 크론시타트 진압 당시 트로츠키가 외지에 출타 중이었으며, 군사령관이 아니라 '당 전쟁 정치위원'이었다고 변명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업적 역시 대부분의 전투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무시되어야 한다. 반란이 진압되기 며칠 전인 3월 5일, 트로츠키는 국방 인민위원 자격으로 크론시타트 수병들에게 무조건 항복을 통첩했는데, 이 일도 타자병이나 전신병의 책임이지 트로츠키의 책임이 아니라고 구차하게 변명해 보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1980년 5월에 전두환이 어디에 있었는가가 아니다. 나는 혁명가 트로츠키가 무엇을 했는가를 묻고 있다.

이정구는 '트로츠키가 진압하지 않은' 크론시타트 반란을 달가워하지도 않는다. 안타깝지 않은가? 트로츠키가 현장에 있었다면, 더 많은 치적을 쌓았을 텐데. 이정구는 반란이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고, 반란자들이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의 제거를 주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농민 신병'이라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도 거짓이다. 그 해 2월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푸틸로프 공장을 비롯한 노동자 파업이 줄을 이었고,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계하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봉기에 내걸었다. 이에 볼셰비키 사병 당원의 3분의 1이 공식 탈당하여 봉기에 동참했다. 반란자들이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그런 유언비어는 국외에서 밀류코프(Miljukov)가 만들어낸 것이고, 반란자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연장선에서 "소비에트에서의 선거"를 주장했다. 이정구의 러시아 혁명 얘기는 역사 날조다. 이정구는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을 두고 이재영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운운하는 것은 트로츠키의 ABC에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크론시타트 수병들은, 노동자 파업을 봉쇄한 계엄령 철폐, 사회주의자 석방, 집회의 권리,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소비에트 선거를 요구로 내걸었다. 이게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트로츠키의 ABC'는 잘 모르지만,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는 조금 안다. 그래서 노동조합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부정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노동조합의 자주성은 자신이 권력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할 대상이 아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노동계급의 생산적 산업조직은 매우 큰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어떠한 과제일까? 그것은 물론 노동의 이익을 대표하여 국가와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제휴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조합은 원칙적으로 새로운 조직이며, 종래의 노동조합과 다를 뿐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혁명적 노동조합과도 다르다."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중)

혁명과 내전기의 상황에서 볼셰비키와 트로츠키가 옳았는가, 노동자 반대파가 옳았는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발달한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민주주의의 최고양식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차원에서 당시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한 일은 카니발리즘에 가깝다. 그래서 노동자 반대파들이 트로츠키를 짜르 시대 반동 장군이었던 트레포프에 견주어 비아냥댔던 것이다.

"인민위원 지배 타도! 권력 인수 당시 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모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3년 전 우리는 '당신들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당신들의 대표를 소환할 수 있고 당신들은 새로 소비에트 선거를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크론시타트에서 당으로부터의 압력이 없는 새 선거를 요구했을 때 새로 부상한 트레포프 트로츠키는 이렇게 명령했다. 총알을 아끼지 말라!"

민주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천박한 태도는 차베스에 대한 돈독한 애정으로도 확인된다.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한 차베스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가 인기 있는 이유를 알고 싶기보다는 그가 입법권까지 독점한 것이 걱정된다. '사회주의'나 '반미'를 내걸었다고 열광할 필요는 없다. 그런 군부 쿠데타 정치인은 나세르 이래 수없이 많았다. 국유화나 미국과의 긴장이라면 단연 박정희를 꼽는 것이 옳다. 차베스의 실험은 페론보다 훨씬 덜 진지해 보인다.

딱지 붙이기는 이제 그만!

이정구는 "이재영은 (…)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야합이라도 한 듯하게 말"했다고 타박한다. 그런데 바로 몇 줄 아래에서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여 투쟁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라고 반문한다. '야합'이든 '연대'든, 했다는 말인가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재영의 다함께 비판에는 안타깝게도 (…) 분파주의가 엿보인다"고? 다함께가 당당하고 분파적이지 않다면 "주사파와 어울려 논다"는 지적에 그저 "그렇다"라고만 답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 필요한 것은 "국내외 보수언론조차 (…)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도"했다고 뿌듯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통해 그것을 이루었는가를 스스로 되짚어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 조상의 비극을 피할 수 있을 테니, 다행스럽다.

물론 다함께는 옳다. 옳기 때문에 옳다. 옳은 조직이 하는 일이므로 누구와 놀든 그것 역시 옳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정성진 역시 충실한 트로츠키주의자로서 다함께의 이 같은 철학 방법을 따른다. 정성진이 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케인스주의가 청산되지 않은 포스트스탈린주의라 규정할 때 그런 방법론이 가장 빛을 발한다. 왜 포스트모더니즘이 포스트스탈린주의일까?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논하면서도 스탈린에 반대한 트로츠키의 투쟁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 (…)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은 스탈린주의를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포함시키는데, 나는 이것 역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것뿐이다. 올바른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로 인정했으므로 포스트스탈린주의다! 자율주의는 왜 또 포스트스탈린주의일까? 이정구는 "정 교수의 책을 조금만 훑어 보아도 (…) 풍부한 논거에 입각한 논리적 비판을 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안내해주는데, 그곳 어디에서도 자율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관계에 대해 단 한 줄도 설명돼 있지 않다. 케인스주의에 대해 정성진은 이렇게 말한다. "진보 진영의 케인스주의로의 경도는 (…)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스탈린주의적 뿌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이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을 채택하면서 케인스와 같은 개량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이들과의 연합을 도모했던 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런 논박은 모리스 돕이 케인스 비판에 비적극적이었던 데 대한 증명일 수는 있지만, 장상환, 신정완, 이병천 등 한국의 '케인스주의자'를 비판하는 논거는 못 된다. 대입논술에서 이런 주장은 '논리 비약, 논거 부적절'이라 채점한다.

훈고학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나는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투쟁하는 당대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다함께 같은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망명객 시절의 언행에 더욱 주목한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체제의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토대의 상당 부분은 트로츠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는 생산민주주의를 주장한 노동자 반대파에 대항하여 '지령 관료제'를 옹호하였고, 노동조합을 군대처럼 통제하기를 희망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트로츠키주의자'는 그것을 보지 않는다.

"흠집 없는 권위로의 도피", 고르바쵸프가 내건 "다시 레닌에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이 경향의 시초이다. 모든 죄과를 스탈린에게 뒤집어씌우고,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자 했던 이 발상은 마르크스 이래의 후계자들에게서 오도(誤導)와 왜곡보다는 계승이 더 많이 발견됨에 따라 스탈린에서 레닌으로, 레닌에서 마르크스로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파산하고 만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향에 아직도 둘러싸여 있다. 기존 사회주의 실패의 책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추정되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의존, 청년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를 대립시키고 후기 마르크스를 취사선택하는 알튀세르의 방식, 그리고 유행하는 외래 사조(思潮)를 직수입하는 한국 진보진영의 천박한 상업주의. 그러나 우리의 실패가 상당 부분, 현실 적합성에 대한 주체적 검증 없는 차용(借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더욱 중요하게는 진보사상 또는 진보운동이라는 것이 특정 사상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분리 곤란한 게슈탈트적(Gestalt的) 거대한 총체라는 점을 되짚어 볼 때, 특정한 이론적 권위로의 도피는 잠시의 모면책일 수는 있어도 진보사상 본래의 목적인 대중 조직, 국가 운영에 기여하기는 어렵다.

"모건 스탠리의 2004년 4월 26일 민주노동당 방문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만남에서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당이 직면하게 될 두 가지 시험대, 즉 시장과 대중 투쟁에 대한 개량주의자의 본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국유화 계획'을 묻는 모건 스탠리의 물음에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이 없다'고 답변했다." (김인식, 『다함께』 30호, 2004)

개악보다 개량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는 분명히 '개량주의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2004년 4월에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다함께는 그 때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현재는 있는가? 다함께는 개량주의자인가? 국유화는 카페 혁명가의 낭만이다. 혁명을 준비하는 정당의 정책실장이라면 어떤 이유로, 어떤 기업을, 어떤 시기에, 어떤 방법을 통해 국유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지, 국유화를 되풀이하는 데 멈춰서는 안 된다. 그의 책상 위에는 국유화 법률 공포안과 재정 충당 계획, 정치적 경제적 프로세스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04년의 민주노동당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가질 필요도 없는 당이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렇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있어 우리는 실천의 문제에서 이론상의 문제로, 실존하는 구체에서 검증되지 않은 추상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집권하여 대한민국을 개조할 날이 멀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겨우 한두 걸음을 내딛는 것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대장정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혁명을 이룰 정보와 지식,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어림과 나약함,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유물론은 다른 철학 체계들과는 달리 결코 자기완결적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여러 과학들과의 연결에 의해서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물질 생산의 후진성은 그리스 철학을 명민한 추측으로서만 긍정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진보적 원칙과 몇 가지 과학적 발견의 '절대적 구성'일 뿐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유물론은, 유물론의 내용을 채울 과학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나마 성과조차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물론 실현의 관념적 과도기였다.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했는가? 세상에 대한 무지,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

후진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마르크스주의의 얼굴을 덮고 있던 카리스마 가면이 벗겨졌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그것에 접근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다함께처럼 "마르크스로 돌아가자(Return to Marx)"가 바른 길은 아닐 듯 하다. 마르크스로의 복귀 또는 그의 수많은 문헌에서 그럼직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은 고순도의 결정을 얻기 위해 알코올 램프의 불꽃을 돋우는 아편쟁이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 짓은 마르크스 훈고학(Marxolgy)이지, 마르크스주의(Marxism)가 아니다. 체제가, 매순간마다 재생산되는 물질과 의식의 최후 종합이라는 점에서 지난 150여 년을 거슬러 반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지평에서 이륙을 위한 가속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 모두를 안다. 우리의 이륙이 성공했을 때 그 비행기에 어떤 이름이 새겨질지를 알 필요는 없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 J. Gould)는 진리를 찾는 도상에서 인류가 지표 삼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적절한 가르침으로 코코란 선장의 말을 인용한다. "아직 멀었다."

이재영 /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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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사민주의' 비행기로는 절대로 날 수 없어"
[이정구 재반론] 지금 진보 세력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2007-02-12 오전 9:14:17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출간을 계기로 트로츠키가 21세기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일 소개된 이재영 전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의 반론에 대해 '다함께'의 이정구 씨가 재반론을 보내왔다.

이 씨는 "이재영 위원이 낡은 마르크스주의(트로츠키주의)에서 벗어나자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전혀 새롭지 않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 진보 세력의 혁신은 마르크스-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로 이어지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편집자>

누가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재영은 내가 "역사 날조"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누가 그런지 크론시타트 반란 문제부터 살펴보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과 그 진압은 우익,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자, 아나키스트들이 애호하는 쟁점이다. 이 사건이 볼셰비키가 자기 자신의 지지자를 공격한 대표적 사례이자 러시아 혁명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레닌ㆍ트로츠키 정치와 스탈린 공포정치의 연속성 명제를 가장 잘 뒷받침해 주는 호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재영은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농민 신병'이라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크론시타트 반란자들 대부분이 '농민 신병'이라고 말한 것은 실은 크론시타트 반란 연구의 고전인 <1921년 크론시타트>의 저자이자 반란군에 호의적인 아나키스트 역사가 폴 아브리치였다. 최근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도 이 통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재영은 크론시타트 반란 직전인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푸틸로프 공장을 비롯한 노동자 파업이 줄을 이었고,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계하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봉기에 내걸었다"고 주장하면서 크론시타트 반란을 마치 '제3의 노동자 혁명'처럼 미화하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아브리치에 따르면, 크론시타트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은 마무리되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반란을 지지하기는커녕 반란 진압에 동조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서도 크론시타트 기지의 노동자들이 반란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인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사실, 내전 말기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것은 주로 식량 부족 때문이었는데, 이들이 식량 배급을 더욱 악화시킬 게 뻔한 '곡물 징발 중단'을 요구했던 크론시타트 반란을 지지할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이와 관련해, 이재영은 당시 "'노동자 반대파'들이 트로츠키를 짜르 시대 반동 장군이었던 트레포프에 견주어 비아냥댔다"면서, 그 증거로 "총알을 아끼지 말라" 운운한 <크론시타트에 관한 진실>을 인용한다. 그런데 이재영은 그 인용문을 쓴 것은 '노동자 반대파'가 아니라 크론시타트 반란 지도부인 '임시군사혁명위원회'인 것 정도는 알고나 인용했어야 했다. 이재영은 자신이 크론시타트 반란군과 함께 노동자 민주주의의 구현체로 애지중지하는 '노동자 반대파'조차 크론시타트 반란 사태가 터지자 당시 10차 당대회에 참석했던 '좌익공산주의' 등 다른 반대파들과 함께 투하체프스키의 진압 부대에 자원 입대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어야 했다.

이재영은 또,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는 내 주장도 "거짓"이며 "역사 날조"라고 공격한다. 하지만 볼셰비키와 공산당에 호의적일 리 만무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반란군이 "경제 개혁 이외에도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와 (…) 공산당 독재의 종식 (…) 등을 요구했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반란군은 군대, 공장 등에서 볼셰비키 기구들을 폐지하라고 요구했고, 당시 크론시타트 함대에 있던 볼셰비키 정치위원 등 수백 명을 체포 구금했다. 물론 반란군이 내건 15개 강령에 "소비에트 선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 반란군들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어떤 초보 운동가도 어떤 조직이나 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그들이 내건 슬로건만을 갖고 판단하지 않는다. 진지한 역사가는 박정희와 공화당이 "한국적 민주주의" 기치를 내걸었다고 해서 그들을 민주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크론시타트 반란은 다름 아닌 그 크론시타트 기지의 노동자들조차 반대했던 반란이고, 1920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에 맞서 당시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던 '노동자 반대파'까지 무력 진압에 동참한 반란이다. 그런데 그 반란을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향한 '제3의 노동자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재영의 주장처럼 크론시타트 반란군이 "자유로운 소비에트 선거"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요구하고 실현하려 했다면, 도대체 왜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 로마노프 왕조의 복귀를 노리는 러시아 왕당파들, 자본가들의 자유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등이 모두 크론시타트 반란을 지지했을까? 그들이 언제부터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지지자들이 된 것일까?

이재영의 주장은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따로 떼어내 그 자체로만 파악하려는 역사적 추상주의의 발로다. 예컨대 이재영은 내전 시기 트로츠키가 제기했던 노동자의 군대화나 노동조합의 국가기관화 주장과 관련해 이 주장이 제기된 역사적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당시 출판된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의 구절(트로츠키 자신은 곧 자기비판을 하며 이 주장을 철회했다)을 인용하면서 마치 트로츠키가 내내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부정"한 사람인 양 암시한다.

비판 대상에 대한 무지

이재영은 트로츠키가 1920년대 스탈린주의 관료에 맞서 당내 민주주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해 투쟁하고 1936년 <배반당한 혁명>에서는 다당제를 주장한 사실(이는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잘 서술되어 있다)은 피해 간다.

다함께는 물론 정성진도 트로츠키 사상의 적잖은 부분에 대해, 또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비판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현재 같이 뜻을 같이하고 있는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의 이론과 정치에 대해서도 중요한 쟁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재영은 이 역시 전혀 "보지 않는다". 이재영의 억측과는 반대로 "흠집 없는 권위로의 도피"만큼 다함께의 정치와 거리가 먼 것은 없다. 다함께는 이재영이 주장하듯이 우리와 다른 정치적 입장들에 대해 "트로츠키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결코 매도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그가 21세기 사회주의의 대안 구상을 위해 중요한 자원으로 고려하는 참여계획경제의 세 가지 모델('파레콘', '협상조절', '노동시간 모델')이 모두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적대적임에도 그들로부터 배울 것은 배운다. 또, 같은 책에서 정성진은 때로 다함께보다 더 나아가,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의 이론적 발전을 위해 심지어 알튀세르주의자로부터도 수용할 것은 수용한다.

정성진과 다함께는 북한의 사회 체제를 노동자 권력과 혁명으로 타도되어야 할 국가자본주의적 착취, 억압 체제로 규정하지만, 남한의 주체사상파가 북한 체제를 지지한다고 해서 이들을 이재영처럼 하나의 적으로 대하는 종파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들이 반신자유주의, 반제국주의, 반전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한 이들과도 연대한다.

이재영은 "다함께 같은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망명객 시절의 언행에 더욱 주목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트로츠키 사상의 정수는 1906년에 발표한 영구혁명론에 있는가 하면, "망명객 시절", 즉 1930년대의 "언행" 중에도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이나 섣부른 제4인터내셔널 창건과 같은 오류들이 적잖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재영은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체제의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토대의 상당 부분은 트로츠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는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반복한다. 그런데 정성진이 각종 자료와 논거를 동원해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와 같은 종류의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마르크스-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과 스탈린주의 간의 연속성 명제이다. 1989~91년 붕괴된 현실 사회주의의 실체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형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일 뿐임을 논증하는 작업은 정성진의 책이나 다함께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적 부분인데, 이재영은 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고는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실패를 이유로 "실존하는 구체에서 검증되지 않은 추상으로 내려 앉았다"고 주장한다.

정성진이 옛 소련의 국가자본주의적 본질을 논증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를 매개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스탈린주의 간의 질적 단절을 논증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를 기초로 21세기 조건에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창조적 발전과 한국적 착근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자인 이재영은 물론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왜 어떤 점에서 동의하지 않는지를 논리적으로 근거를 대며 지적해야지, 이런 시도와 모색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애써 간과하며 논쟁을 원점으로 되돌려서는 우리 진보 진영의 이론과 정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파주의

한편, 이재영이 다함께와 범자민통의 "야합" 또는 "연대" 운운하면서, 다함께가 당당하다면 "'주사파와 어울려 논다'는 지적에 그저 '그렇다' 라고만 답하면 되는 것"이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이재영이 인용했듯이, 나는 지난번 글에서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광범한 대중운동을 건설하려면 자신과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과도 기꺼이 함께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야합'이라면 다함께는 '야합'을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분파주의에 눈이 멀어 연대와 투쟁의 대의를 종파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다함께의 정치와 거리가 멀다. 게다가 다함께는 민주노동당 선거에서 범PD 계열일지라도 지난해 하반기 이래 최대 쟁점인 북핵과 일심회 사건과 사회연대전략 문제에서 우리가 보기에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면 그를 지지했고, 민주노총과 현 금속선거에서는 NL계열이 아니라 노동자의힘 등 옛 PD계열 내 좌파를 지지하고 있다.

이재영이 다함께의 정치를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마르크스 훈고학"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다함께 신문이나 사이트를 잠깐 둘러보아도 다함께가 "마르크스 훈고학"자들이기는커녕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정세 분석과 반전ㆍ반제국주의ㆍ반자본주의 투쟁에 헌신하는 투사들임을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재영 자신이 경멸해마지 않는 "마르크스 훈고학"도 이재영처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면서도 역사와 사상을 그 전체 역사적 맥락 및 진화 과정 속에서 판단하지 못하고, 뻔히 보이는 것조차 보지 않고, 자기 맘에 드는 것만 골라 보고, 그것도 멋대로 날조해서 진보를 호도하는 사람들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때로 유용하다.

낡은 사회민주주의

이재영은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지평에서 이륙을 위한 가속을 시작해야 한다. (…) 우리의 이륙이 성공했을 때 그 비행기에 어떤 이름이 새겨질지를 알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재영의 문제의식을 추적하다 보면 이재영이 타고 있는 '비행기'의 이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영은 "지난 150여 년을 거슬러 반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이 비행기의 이름은 분명히 사회민주주의다.

이는 이재영이 민주노동당의 집권이 "겨우 한두 걸음을 내딛는 것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대장정이 아니다"라거나, 국유화 계획을 "앞으로 오랫동안 가질 필요도 없다"는 말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낡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자"며 이재영이 제시한 것은 전혀 새롭지 않은 사회민주주의행 비행기 티켓이다. 그러기에 이재영에게는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로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지적이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 파악"처럼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재영은 글 끝 부분에서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했는가?"하고 자문하고 그 답은 "세상에 대한 무지,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하고, "우리는 사회혁명을 이룰 정보와 지식,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어림과 나약함,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이재영은 고전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적 방법을 버리고 계급투쟁과 역사 발전을 지식의 문제로 환원하는 관념론을 채택했음이 분명히 확인된다. 이재영이 이륙을 시도하고 있다는 그 개량주의적 관념론의 비행기는 이미 지난 20세기 동안 무수히 되풀이된 이륙 실험에서 형편없이 실패한 바 있다.

이재영이 글 끝 부분에서 "아직도 멀었다"며 일갈하며 자신의 "무지"를 시인한 것이 진심이라면, 그 이륙은커녕 추락할 것이 뻔한 고물 비행기에 동승하라고 어쭙잖은 말장난과 거짓말로 호객하는 짓은 당장 그만 두고, 먼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무지"부터 깨쳐야 할 것이다.

이정구 / 다함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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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7-02-1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입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재영 씨가 진지하지 못한 것 같다. 왜 자신들이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사회주의는 아니다 라고 말하려는거지?

마법천자문 2007-02-15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의 몇몇 책들은 읽어볼 가치가 있겠지만 '트로츠키주의자' 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sb 2007-02-1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저 역시 트로츠키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정성진 교수의 책은 - 그가 트로츠키주의자 이든 아니든 - 한국 사회에서 트로츠키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는 것으로 환영하고 싶습니다. 이재영씨가 좀 더 책 소개에 충실했다면, 프레시안에서 기대했던 좋은 논쟁이 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