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구약폐기론’ 반박 “요한복음 해석하는 것 자체가 도전행위”
“앞으로 정치적 집회 참여 안해…사학법은 대선후보 검증”
 
조연현 기자 김정효 기자 
 
개신교 교단 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이용규 목사는 20일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도올 김용옥 교수가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새로운 계약(신약)이 맺어지면 옛계약(구약)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며 ‘구약성경 폐기론’을 편데 대해 “성경에 대한 몰이해”라며 반박했다.
이 목사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뤄지며, 예수님도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고, 완전케 하러 왔다’고 했다”면서 “(구약 폐기론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또 김 교수가 기독교계 대표와 공개 논쟁을 제의한데 대해 “일일이 대꾸하지 않겠다”며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다만 “(도올의 교육방송 인터넷 영어강의인 요한복음 강해를) 어느 정도 들은뒤 논평은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기총의 대선 행보에 대해선 “한기총이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사립학교에 이어 복지기관에도 개방형 이사를 도입해 사유권을 침해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만큼 대통령이 된 뒤 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해 검증할 것”이라며 사학법 재개정 운동을 대선과 연계할 뜻을 내비쳤다. 이 목사는 “(한기총은) 앞으로는 정치적 집회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한기총의 기자간담회엔 최근 대표회장에 취임한 이용규 목사와 총무 최희범 목사가 참여해 도올 김용옥 교수를 공격했다. 이들은 “지난해 영화 <다빈치코드>의 개봉을 앞두고 한기총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해 오히려 선전 해줬기 때문에 ‘도올 발언’에 대해서도 논쟁하지 않겠다”며 발을 뺐다. 그러나 기자들이 질문이 ‘도올 발언’ 한기총의 ‘대선 개입’ 문제에 집중되면서 도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도올이 구약폐기론을 주장하며, 공개 논쟁의 제의했다.

최희범 총무=도올은 동서를 아우를 수 있는 보기 드문 실력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다. 철학자가 성서를 해석하려는 것은 자기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성서는 철학이 아니라 신앙의 마음으로 봐야 한다. 성경을 철학서적으로 취급하면 종교가 무너져 버린다. 따라서 그와 논쟁하지 않겠다.

-신학과 철학이 회통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용규 회장=하나님은 영이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한다. 지식, 과학의 눈으로 보면 열리지 않는다.

-그것이 기독교가 지동설조차 세상의 상식이 된 이후에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한 것 아닌가.

이 회장=과학을 부정한다는 게 아니라 지식이나 과학의 한계를 얘기하는 것이다.

-신학계에서 ‘구약 폐기론’이 나온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 않은가.

최 총무=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일부 교회의 문제로 전체 교회를 매도하고, 교회를 훼손하고 파괴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음모가 숨어 있다는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뚱딴지처럼 그가 요한복음을 강의하겠는가.

-도올이 교회를 훼손하고 파괴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 총무=의구심일 뿐 근거는 없다. 다만 그가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자체가 도전행위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알레고리적, 즉 우화적(비유적) 해석이 있다. 구약의 사건들을 그렇게 해석하면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를 전부 새로 써야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회장=도올이 (<요한복음강해>에서) 모세가 홍해를 건너는 것과 주몽이 강위를 건너는 것을 일맥상통한 것처럼 해석한 것도 신학자나 목회자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왜 아무데나 갖다 붙이나.

-도올의 주장은 우리민족이 유대민족의 역사를 자신의 민족의 역사로 여겨 기독교를 외세의 강요가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최 총무=<주몽>과 <대조영>과 <연개소문> 등 방송국마다 현실에 없는 삼족오를 띄우는 것이 단군신화와 단군상 등과 연계되어있지않은지 의구심이 든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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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7-02-2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거가 있든 없든 의구심을 가지는건 한기총 마음이겠지만, '구약 폐기론' 이나 '요한복음'에 대한 논쟁이 무산된건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회통은 해야한다면서, 해석하는 것은 도전행위라니. 종교 지도자들끼리 만나서 밥 먹는게 회통인가. (농담입니다.)
 

(출처: 한겨레)

“정치권력보다 오만가능성 적다”
“기업권력 자제력 잃었다”
 
고명섭 기자  김경호 기자
 

사회=논쟁 촉발의 계기가 된 ‘기업사회론’의 논지를 먼저 분명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동춘=기업사회란 세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첫째, 기업권력이 정치권력이나 법·행정을 압도하는 사회가 기업사회다. 둘째, 기업이 아닌 사회조직이 기업을 모델로 하여 조직되는 사회다. 과거에 군사사회가 군대를 모델로 삼아 공장이나 학교를 조직했던 것처럼 기업사회에서는 사회의 모든 조직이 기업을 모델로 한다. 셋째, 기업의 문화나 시장논리가 다른 문화의 가치를 압도하고 모든 사회구성원이 종업원과 소비자로 지칭되는 사회가 기업사회다. 한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기업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해 97년 외환위기 이후 그 전환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고 본다.

공병호=사회를 표층과 심층으로 나눠본다면, 김 교수가 말씀하신 기업사회는 표층적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표층적 현상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기 전에 심층의 변화를 따져봐야 한다. 1990년 사회주의권 붕괴와 글로벌 자본주의화라는 심층적 변환이 있었다. 냉전의 시대로부터 세계화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고, 한국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특히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런 심층적 변화가 표면에 드러난 것이 기업사회론에서 말하는 현상일 것이다.

사회=김 교수는 기업사회 특징의 하나로 정치·사회가 기업활동을 통제하기보다는 기업에 봉사하는 구실을 하는 것을 꼽았는데….

김동춘=우리 사회에서 ‘규제’라는 말이 쓰이는 방식을 보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규제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규제를 그렇게만 봐선 안 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규제 없이 그대로 놔두면 필연적으로 약육강식의 사회가 된다. 사회공동체의 처지에서 보면 규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내 경우를 말하면, 1990년대 세계화 담론이 등장했을 때 한동안 ‘기업에 국경이 없다’는 이야기에 동조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1년 남짓 공부하면서 미국 기업들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울타리 없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걸 똑똑히 보았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이라는 국가, 국민, 교육제도, 한국어 등의 인프라 없이는 대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한국이라는 국가적 인프라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사회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이 횡행한다. 불필요한 통제는 좋지 않지만, 국가의 개입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미국에서조차 국가 개입이 있다.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기업을 처벌하는 것조차 규제나 통제로 생각하는 건 문제가 있다. 어느 일간지에 대학교수가 삼성이 8000억원 내놨으니 이제 발목잡지 말라는 주장을 폈다. 이런 생각이 문제다. 사회가 기업에 봉사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공병호=중요한 것은 국민, 서민이 잘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질이 전부는 아니지만, 보통의 서민들에게 가장 화급한 것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물질의 풍요를 위해 정치와 정부가 적극적으로 치어리더, 유인자 구실을 해야 한다. 정치나 사회가 기업에 봉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물질의 풍요를 생산하는 것이 기업이라는 사실에 있다. 일반 국민에게 풍요를 주기 때문에 기업을 돕는 것이다. 우리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그런 경쟁을 하고 있다.

김동춘=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일인 건 사실이고, 그래서 정치가 나서서 기업투자도 장려한다. 문제는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기업에 특혜를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이건희 삼성 회장 소환이 국회에서 문제가 됐을 때, ‘우리가 이건희 회장 소환할 자격이 있느냐’ 그런 말들이 (정치권에서) 나왔다. 이렇게 국회의 정당한 활동까지 축소시키는 게 문제다. 얼마 전 법무부 장관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 발언을 했다. 법무부 장관이면 법이 우선이고 질서를 바로잡는 게 우선인데,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공병호=정부가 법집행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공정성이다. 위법한 행위는 명백하게 (처벌)해야 한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합법적 절차에 따른 정치의 역할이지, 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는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사면권을 남발해 기업주의 편의를 봐주는 것, 나는 그런 건 납득하기 어렵다. 법집행은 공정해야 하고 불법행위와는 선을 그어야 한다.

사회=자유경쟁에 맡겨둘 경우 강자만이 살아남는데, 정부나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병호=국가가 앞장서서 재분배정책을 펴고 세금 부담을 높이고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20세기에 이미 다 써본 정책이다. 지금은 자본이 무한 자유를 누리는 시대다. 세계의 규칙을 만들 힘이 우리에겐 없다. 우리는 규칙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자본거래에 막대한 세금을 매기면 자본이 들어오지 않는다. 국가가 보호하려고 했던 서민이 결과적으로 더 어렵게 되는 것이다. 재분배정책은 항상 의외의 결과를 낳고 만다.

김동춘=무한대에 가까운 자본자유, 기업자유 시대라고 하지만, 세계 전체로 보면 서민의 삶의 조건이 하향평준화하고 있다. 세계화 상황에서 복지국가 독일이 위기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시스템 작동을 개입 없이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타협의 접점을 마련해야 한다. 규제를 풀면 (외국)자본이 들어온다는 주장은 위험하다. 규제를 철폐하더라도 한국의 인프라나 다른 여건이 매력 있어야 들어오지 규제만 푼다고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탈규제보다 인프라가 중요하다. 규제만이 문제라면 삼성이 왜 유럽에 투자를 하겠나.

사회=김 교수가 글에서 ‘기업 파업’ 이야기를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공병호=20대 때부터 기업하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본 경험으로 말하면, 그들은 대단히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모여서 깃발 들고 파업하겠다고 협박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자본파업하는 건 불가능하다. 파업하자마자 다른 기업이 그 자리에 달려들게 돼 있다.

김동춘=공장이전이란 방식의 기업파업은 있을 수 있다. 기업들이 투자를 회피하거나 공장을 국외로 이전함으로써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는 실례가 있다. 스웨덴도 그런 경험이 있다.

공병호=나는 기업가를 자유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독점 유혹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공정거래위가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 내부로 들어가보면, 그들의 심리는 매일 전전긍긍이고 노심초사다. 소비자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언제 밀려날지 알 수 없다. 삼성공화국이라고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소비자가 엄청난 권력이다.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를 지속할 수 없다. 고객에게 구애해야 하는데, 그런 비합리적인 일을 계속할 수 없다. 그들은 불안하고 취약하다.

김동춘=나도 그런 점에서 기업권력을 정치권력과 같은 것으로 보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업이 시장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있고, 일정한 수준에서 자제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 있는데 그게 안 될 때, 다시 말해 과도하게 상황을 장악하려고 할 때 공화국이라는 표현에 맞는 상태가 나타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삼성이 공정거래위 조사를 방해하려 한다든지, 언론의 논조를 장악하려 한다든지 정권을 입맛에 맞게 창출하려 하는 것은 정당한 선을 넘은 상태다. 이런 상태를 두고 사람들이 삼성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국 사회가 견제해야 하는데, 기업의 권력에 비해 사회의 견제력이 너무 약하다.

공병호=자제력을 잃었을 때 그런 오명을 덮어쓸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겠다. 힘이라는 것은 스스로 제어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차이가 있다. 강조하고 싶은 건 사업하는 사람들의 절망적 상황, 벼랑끝에 서 있는 상황을 한국 사회가 좀더 따뜻한 눈길로 봐줬으면 하는 것이다. 기업가들은 선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오만해질 가능성은 정치권력보다 훨씬 적다. 오만해지면 소비자로부터 멀어진다. 경제권력은 생각하는 것보다 오만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적다.

정리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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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7-02-2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부의 규제, 세계의 규칙에 대한 공병호 소장의 극단적 태도에 대해서, 김동춘 교수는 "규제 보다 인프라가 중요하다."며 적절히 대응합니다. 공화국에 소비자 권력으로 맞서는 공 소장의 동문서답이 우습군요.

여울 2007-02-2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공 소장의 식견이 의심스럽네요. 인문학적 소양의 깊이?도 말입니다. 논쟁이랄 것 까지 없는 싱거움이 보입니다.

마법천자문 2007-02-2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 너무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부를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공병호라니.. ㅎㅎ
 

(출처 http://en.wikipedia.org/)

Alexander Gavrilovich Shliapnikov (1885~1937)

was a Russian communist, trade union leader and skilled metalworker.
러시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 숙련된 금속노동자였다.

Shliapnikov was born in Murom, Russia to a poor family of the Old Believer religion. His father died when he was a small child. Shliapnikov began factory work at age thirteen and became a revolutionary at age sixteen. He joined the Bolsheviks in 1903. He was arrested and imprisoned at various times for his radical political activities, including his involvement in the 1905 revolution. Shliapnikov left Russia in 1908 and continued his revolutionary activities in Western Europe, where he also worked in factories and was a devoted trade unionist.
그는 러시아 무롬(Murom, Russia)의 가난한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죽었다. 그는 13살 부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16살에 혁명가가 되었다. 그는 1903년에 볼셰비끼(Bolsheviks)에 가입했고, 1905년 혁명에 연루된 것을 포함해, 그의 급진적인 정치활동 때문에 수차례 체포와 투옥을 당했다. 그는 1908년에 러시아를 떠나 서유럽에서 혁명활동을 계속했고, 거기서에서도 그는 공장에 다니며 노동조합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Shliapnikov returned to Russia in 1916. He, Vyacheslav Molotov, and Petr Zalutskii were the senior Bolsheviks in Petrograd at the time of the February Revolution in 1917. More prominent figures such as Lenin, Zinoviev, Kamenev and Stalin were abroad or in Siberian exile when the February Revolution began. In 1917, Shliapnikov became a member of the Executive Committee of the Petrograd Soviet of Workers' and Soldiers' Deputies. He also was elected to chairmanship of the Petrograd Metalworkers' Union and later of the All-Russian Metalworkers' Union. He led negotiations of a wage agreement between Petrograd metalworkers and factory owners in 1917.
그는 1916년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와 몰로또프(Vyacheslav Molotov), 짤루스끼(Petr Zalutskii)는 1917년 2월 혁명 당시만 해도 뻬뜨로그라드에서 고참 볼셰비끼 당원이었다. 레닌(Lenin), 지노비예프(Zinoviev), 까메네프(Kamenev), 스딸린(Stalin)과 같은 더 유명한 인물들은 2월 혁명 당시 해외에 있거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있었다. 1917년 그는 뻬뜨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뜨 최고위원이 된다. 그는 또한 뻬뜨로그라드 금속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되며, 후에 전(全)러시아 금속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된다. 그는 뻬뜨로그라드 금속 노동자들과 공장 소유주 사이에서 임금 협상을 이끌었다.

Following the October revolution and the Bolshevik seizure of power, Shliapnikov was appointed Commissar of Labor. Lenin called for a Bolshevik dictatorship, which was opposed by some Bolsheviks. Shliapnikov supported a coalition government composed of left socialist parties, but he did not resign his post in the government, as some other Bolsheviks did. H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vacuating industry from Petrograd, as the Germans approached in 1918. As Commissar of Labor, he helped draft important directives on workers' control of industry and nationalization of industry and he staffed government bureaucracies with staff from trade unions. In the summer of 1918, he went to the south of Russia on a mission to gather food for the population of the Bolshevik-controlled cities of central Russia.
이어진 10월 혁명과 볼셰비끼의 집권에서, 그는 노동인민위원으로 지명(was appointed)되었다. 레닌은 몇몇 볼셰비끼들이 반대했던 독재를 요구했다. 그는 좌파 사회주의 정당들로 구성된 연합 정부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볼셰비끼들이 그러했듯이, 노동인민위원직을 사임하지는 않았다. 그는 1918년 독일군이 공격할 때, 뻬뜨로그라드 산업시설을 소개하는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동인민위원으로서, 그는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와 산업의 국유화에 대한 중요한 방향을 이끌었고, 노동조합 지도자와 정부 관료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1918년 여름, 그는 볼셰비끼에 의해 통제되는 중앙 러시아 도시의 인민들을 위해 식량을 징발하러 남부 러시아로 향했다.

In fall 1918 and continuing into early-1919, Shliapnikov served as Chairman of the Revolutionary Military Council of the Caspian-Caucasian Front in the Russian Civil War. He also served in the Revolutionary Military Council of the Western Front during the Civil War. During the Civil War, Shliapnikov began to criticize the increasing tendency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and Soviet government to rely on authoritarian measures to enforce policies towards industry and industrial workers. To Shliapnikov, denial of workers' right to participate in economic decision-making was a step away from the goals of the 1917 revolution.
1918년 가을부터 1919년 초까지, 그는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에서 Caspian-Caucasian 전선과 서부 전선의 혁명군사위원회에서 일했다. 내전 도중, 그는 러시아 공산당과 소비에트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정책을 강제하기 위해 권위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증가한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경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의 노동자들의 참여권이 거절되는 것은 1917년 혁명의 목표와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Shliapnikov became leader of the Workers' Opposition movement inside the Russian Communist Party. Alexandra Kollontai was a mentor and advocate of the group, which was composed of leaders of trade unions and industry who were all former industrial workers, usually metalworkers. This movement advocated the role of workers, organized in trade unions, in managing the economy and the political party. The Russian Communist Party leaders succeeded in suppressing the Workers' Opposition and in 1921-1922 finally subordinated trade union leadership to the Party. In 1921, Shliapnikov was forced out of his elected post as chairman of the Metalworkers' Union.
그는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 운동(Workers' Opposition movement)의 지도자가 되었다. 꼴론타이(Alexandra Kollontai)가 모두가 (금속)노동자 출신인 노동조합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노동자 반대파 운동의 조언자이자 격려자였다. 이 운동은 경제와 당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역할을 지지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노동자 반대파들을  억누르는데 성공했고, 1921~1922년 사이에 마침내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당에 복종시켰다. 1921년에 그는 금속 노동조합 위원장 직위를 박탈당했다.

In 1922, Shliapnikov and some others from within and outside the Workers' Opposition, including Alexandra Kollontai, presented an appeal, called the Letter of the Twenty-Two, to the Communist International Executive, requesting that the Comintern help heal a "rift" within the Russian Communist Party between Party leaders and workers. Party leaders and Party-controlled media condemned the appeal. Two of the signatories of the appeal were expelled from the Party, but Shliapnikov, Kollontai, and Sergei Medvedev narrowly escaped expulsion.
1922년 그와 꼴론타이를 포함한 노동자 반대파 운동 안밖의 몇몇은 공산주의자 국제 위원회에 러시아 공산당에서 지도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균열을 치료해줄 것을 요청하는, '22인의 편지(the Letter of the Twenty-Two)'라고 불리어진 소원을 제출했다.(present an appeal) 당의 지도자들과 당에 의해서 통제된 언론은 이 소원을 비난했다. 이에 서명한 사람 중 2명이 당으로 부터 축출되었다. 그러나, 쉴라프니꼬프, 꼴론타이, 메베데프(Sergei Medvedev)는 가까스로 제명(expulsion)을 피했다.

Shliapnikov turned to writing his memoirs and held jobs in metals import and economic planning institutions. The Party Central Control Commission investigated him and Sergei Medvedev in 1926 and in 1930 for alleged factionalism in connection with the formation of oppositionist groups among workers in Baku and Omsk. In 1930, the Party Politburo forced Shliapnikov to publish a public confession of "political errors" in writing his memoirs of the revolution. This was not the same as a confession of political errors committed by him since the revolution.
그는 금속을 수입하고 경제 계획을 세우는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당의 중앙위원회는 1926년과 1930년, 바쿠와 옴스크(Baku and Omsk)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대파가 형성되었던 것과 관련하여 분파주의로 그와 메베데프를 조사했다. 1930년 당 정치국은 혁명에 대한 회고록에서 그의 정치적 오류를 공공연히 시인한 것에 대해 그를 처벌하기로 했다. This was not the same as a confession of political errors committed by him since the revolution.

Shliapnikov was expelled from the Communist Party in 1933 and imprisoned in 1935 for fabricated political crimes. Charged under Article 58 of the Soviet Criminal Code, he did not confess guilt, nor did he implicate others. Nevertheless, he was found guilty, based on others' testimony, and he was executed on the 2 September 1937, during the Terror.
그는 1933년에 공산당으로 부터 축출되었고, 1935년 조작된(fabricated) 정치 범죄로 투옥되었다. 소비에뜨 형법(the Soviet Criminal Code) 58조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그는 유죄임을 시인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들을 연루시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의 증언에 의해 유죄로 결정되었고, 1937년 10월 2일에 사형되었다.

Shliapnikov was posthumously rehabilitated and restored to membership in the Communist Party in 1988.
그는 죽은 뒤에 복권되었고, 1988년 공산당에 의해서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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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완종 <10월 혁명사>)

1920년 노동조합 논쟁

- 뜨로쯔끼 <노동조합의 역할과 과제> : 노동조합 군사화, 지도부 교체
- 9차 당대회: 노동자 반대파(쉴라쁘니꼬프)에서 생산과 분배 등 경제영역의 모든 권리와 기능이 당연히 노동조합에 넘겨져야 한다고 주장, 뻬뜨로그라드 당 조직 뜨로쯔끼 비판, 민주집중파 테제(부하린, 라린, 쁘레오브라줸스끼) 제출
- 모스끄바 당 위원회 반박, 10인 강령(레닌, 스딸린, 까메네프, 지노비예프, 똠스끼, 깔리닌, 루주딱) 제출
- 뜨로쯔끼 입장 철회, 노동조합의 국가화 '정도'만을 논의
- 10차 당대회: 10인 강령, 부하린 + 뜨로쯔끼 초안, 노동자 반대파 토론 / 신경제정책 실시로 토론 무산
- 11차 당대회: 꼬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소원

노동자 반대파

- 선거에 의한 지도기관의 구성, 당 업무 및 쏘비에뜨 업무의 지방조직으로의 이관, 지방조직의 통제와 지도에 대한 모든 당원의 복종, 해당 선거민들의 동정에 관한 간부의 정기보고, 당내 비판의 자유 보장, 당 지도기관의 노동자화, 구성원의 정기적 교체
- 레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대에 강제성을 거부하는 것은 미친 짓이오. 여기서 행정과 사업에의 관료주의적 접근은 필수적이오."
- 뜨로쯔끼: "그러한 방식의 운영은 비효율적이며, 경제적 측면에서 일을 모두 망쳐버리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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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박노자의 '진짜 사회주의'

온라인 한겨레에 들어갔다가 오랜만에 박노자 글방을 들르게 됐다. 최근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을 놓고 프레시안에서 벌어진 논쟁을 정리해두려다가 여유를 못 내고 있었는데('트로츠키와 크론슈타트 문제'가 정해놓은 제목이다) 마침 그와 관련한 '만감'이 있기에 옮겨온다. '진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를 다루면서 필자의 '사회주의'관을 내비치고 있다. 다른 자리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가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가 '당신들의 러시아'인지라 박노자 교수의 러시아 이야기는 챙겨두게 된다. 원문에 오타가 여럿 되기에 교정해두었다.

박노자 글방(07. 02. 07) '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요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라는 신간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반갑게 느껴지는 측면은, 정 교수께서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정의하시면서도 일단 트로츠키의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무오류의 교황"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을 역시 꽤나 야만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타개하려 했던 그들의 자기 모순 투성이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레닌과 트로츠키가 잘한 부분 - 예컨대 처음에 멘세비키들이 추진했던 "소비에트식 노동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적어도 이론상 수용한 것 - 도 배워야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정 교수께서 1920년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의 군사화" 프로젝트가 하나의 오류이었음을 매우 옳게 지적하시더랍니다(445-446쪽).

물론 "전시 공산주의의 불가피한 상황의 영향", "레닌, 부하린 등 다수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차원의 착각" 등의 여러 가지 단서를 달면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오류의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츠키와 레닌 등이 왜 그러한 종류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한번 깊이 고심해보고, 그 당시에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세력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이론상으로 주장했던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기관으로 만들어 그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징집하여 군대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요충지"에 배치하려 했을까요? 노동자 출신의 노동 운동가 같으면 '징집'되어 가족과 헤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는 노동자의 심정을 이해해서라도 진시황의 부역 노동 징발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안할 터인데, 트로츠키가 왜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단순히 국방부 장관이라는 벼슬의 포획력일까요?

물론 국방부 장관으로서 가지게 돼 있는 "행정 편의주의"란 부분도 있었는데, 여기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의 한 가지 비극적인 파행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 정당"을 이끌었던 트로츠키나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등이 과연 하루라도 "노동"해본 적이 있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980년대식의 유행어로, 다들 "학출 군단"이었지요. 그들 중에서는 가방끈이 가장 짧은 스탈린이라 해도, 그래도 신학 대학을 좀 다녀본 사람이었고 그루지아어로 꽤나 괜찮다는 시 몇 편을 잡지에 싣는 등 "문단 데뷰"까지 했었지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의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해본 레닌 정도면은, 형님이 황제 암살 음모 혐의로 사형집행돼서 그렇지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출세를 크게 할 수 있는 "먹물"의 대열에 속했어요. 고급학력이 하도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는 "문단 데뷰"나 "변호사 경력"은 별 것처럼 안보이지만, 인구의 70%가 아예 글을 몰랐던 100년 전의 러시아에서는 레닌/트로츠키와 일반 공장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거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었어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글쎄, 1920년대의 조선에서 고급 한문 문장을 잘 구사했던 조공의 최초 책임비서 (1925년) 김재봉선생과 일선 노동자의 "관계"의 형태를 생각해보시기를. 그러니까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지도하의 전위당" 이론은 운동판에서의 "학출 군단"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그들의 "지도, 계몽"에 피로를 느꼈던 많은 일선 노동자 활동가들이 차라리 조직 형태가 조금 더 느슨한 멘세비키 쪽을 택하기도 했었어요.

일찍부터 현장 활동을 한 일도 별로 없이 노동자들을 "조직, 지도"해온 트로츠키 같은 "고급 학출"에게는,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대오로 세워 노동 현장에 투입하겠다는 생각이 꽤 쉽게 들 수 있었어요. 즉, 그의 "노동의 군사화" 망상의 근원을, 실제로 자본주의적 사회의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운동판의 정치 역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참, 지금의 한국의 운동판은 좀 달라졌나요?

그러면, 이 망상에 맞선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1921년3월의 소련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의 '노동 군사화'에 반대한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는 슬랴프니코프(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1885-1937)이었지요(*이 '만감'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이름이다). 최종 학력은 보통학교 3학년 퇴학, 12살부터의 공장 노동, 1890년대 후반에 노동자 파업 주도, 현장 운동하다가 1901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08년 해외 망명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레닌과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독일 사민당의 후원금을 받거나 "문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슬랴프니코프는 프랑스의 금속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거기에서도 노동 운동의 현장 지도자가 됐지요. 그가 1918년부터 인민위원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늘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에서 "벼슬"하는 동시에 러시아 전국 금속노조의 집행위원을 하는 등 "현장"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에거 "지금 우리가 노동자의 독재 아닌 당의 독재를 겪게 되는 감이다"라고 일갈하고 "당의 관료화 위험"에 대해 - 트로츠키보다 훨씬 일찌기! - 경고하고 당과 국가 관료들을 일정 기간의 만료 이후에 다시 공장의 현장으로 보내고 현장 노동자들을 관료를 채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리고 공장에 대한 관리권과 소비예트 공화국 공업 전체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노조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었지요. 노동자의 민주주의라면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경제를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즉,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 그렇게 됐다면 그나마 소비예트 민주주의를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학출" 출신의 고급 "직업 혁명가"들은 어찌 보통학교 출신의 노동자들의 감독을 달게 받겠습니까? 레닌이 슬랴프니코프에게 "신디칼리즘"같은 딱지를 붙였고, 당 대회는 슬랴프니코프와 그 동지들의 주장을 부결한데다 아예 당내의 "종파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습니다. 그후로는 일선 노동자보다 당 관료들이 당의 주인이 되고 말았지요. 트로츠키가 1923년에 정신을 차려 당의 관료화 위험을 눈을 떴을 때, 이미 다 늦었어요...

그런데, 우리 주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많이 볼 수 있어도 "슬랴프니코프주의자"들은 별로 없어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갈구했던 보통 학교 출신의 슬랴프니코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안보이나요?

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슬랴프니코프: 그는 1920년대에 혁명사에 대한 좋은 책을 꽤 썼어요 (물론 국내에서 소개된 것은 하나도 없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07. 02. 19.

P.S. 단순하게 말하면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라는 대비 속에서 '트로츠키주의'와 '슬랴프니코프주의'의 차이를 읽어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차이/대비는 제목에서 암시되는바, '사회주의 vs 진짜 사회주의'의 구도로 정식화될 수도 있겠고. 의미심장한 멘트는 맨마지막 문장이다.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필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러한 비극적 운명까지도 '진짜 사회주의'의 구성적 요건이 아닐까, 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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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네21)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한동안 그 여자만을 떠올리지만, 서서히 남쪽 생활에 젖어들면서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결혼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는 북한에서 사랑했던 그 여자가 남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귀에 익은 이 이야기의 배경은 3·8선 획정 때일 수도, 한국전쟁 당시 ‘바람찬 흥남부두’일 수도 있다. 분단이라는 상황이 낳은 이 의도치 않은 삼각관계는, 하지만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국경의 남쪽>은 시간차로 북한을 빠져나온 ‘탈북자’ 남녀를 통해 이같은 관계를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준다.

관현악단 호른 연주자 김선호(차승원)는 평양의 평범한 중산층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했다고 ‘기록’된 할아버지 덕에 남부럽지 않은 형편을 누리고 있으며, 부모님과 누이 부부와도 그럭저럭 화목하게 살고 있는데다 “성격도 얼굴도 동치미처럼 쩡하고 시원”한 여성 연화(조이진)와 목하 열애 중이니, 별일이 없는 한 그의 인생은 거침이 없을 듯 보인다. 하지만 별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어느 날 온 가족을 소집한 아버지가 ‘할아버지는 실제로는 남한에 살아 있으며 그동안 서신을 교류해왔다’고 고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서신교류가 당국에 적발된 탓에 가족의 운명까지 위험에 처하게 됐다. 결국 이들 가족은 탈북을 결행하게 되고, 선호는 ‘사람을 보내서 남으로 부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연화 곁을 떠난다.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남한에 도착한 선호가 연화와 접촉을 시도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또 다른 여인 경주(심혜진)를 만난 뒤에야 시작된다. 북한쪽 소식통으로부터 연화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호는 그의 상처와 삶을 보듬어주는 경주와 함께 가정을 꾸린다. 그리고 그 삶에 익숙해질 즈음, 연화는 탈북자 수백명과 함께 남한에 나타난다. 선호는 연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당황하지만, 서서히 옛사랑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고 초라한 자신을 온몸으로 받아준 현재의 여인 경주를 저버릴 수도 없다.

<국경의 남쪽>은 인민들이 탈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북한의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드라마도,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겪는 고단한 삶을 드러내는 사회드라마도 아니다. 때때로 사회성과 정치성의 민감한 바늘숲을 그냥 지나치는 영리함을 발휘하면서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엇갈리는 사랑의 슬픔이다. 신파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신파성’을 숨기지 않은 채 이야기를 밀어붙인다. 그런데도 영화 속 사랑은 눈물을 짜내기 위한 가식이 아니라 진실로 느껴진다. 아마도 그것은 이들 모두가 변방의 존재이기 때문일 것. 남한에서 이들이 발붙일 곳은 거의 없다. 북녘을 떠나면서 ‘공화국’을 배신한 이들에게 배신은 이제 운명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들은 한때 존경했던 지도자 동지의 이름을 명찰에 달고 행인의 옷깃을 붙든 채 호객행위를 해야 한다. 아웃사이더의 마음은 아웃사이더만이 헤아려줄 수 있다. 연화가 분식점에서 ‘랭면’을 주문했을 때 종업원이 “혹시 연변에서 왔수까?”라고 묻는 것처럼. 남한에서 살아왔지만 경주 또한 아웃사이더의 마음을 가진 여자다. 그의 과거는 영화 속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선호를 성심성의껏 도와줄 때나 가게를 찾아온 연화에게 냉면을 대접하려 할 때 연화의 내면은 짐작된다. 이 경계인들은 사랑 말고는 별달리 가질 수 있는 게 없는 존재들이기에 어긋난 사랑의 교집합은 더욱 애처롭게 다가온다.

<국경의 남쪽>이 신파를 극복하는 또 다른 지점은 연화라는 캐릭터의 존재다. “이 세상에서 제일 통쾌한 처녀” 연화는 직설적이며 씩씩한 인물이다.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게 될 때나 결혼 이야기를 할 때 관계를 주도했던 연화는 남한에 온 뒤에도 쿨한 사랑법을 보여준다. 연화는 미적대는 선호에게 “만났으니 됐어요”라고 의젓하게 말하거나 “그 여자 가슴이 만져집디까?”라고 ‘직사포’를 날린다. 선호의 내레이션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며 이야기의 중심에도 선호가 놓여 있지만, <국경의 남쪽>을 연화의 시점에서 읽어도 무방한 것은 둘의 관계를 이끄는 것이 연화이기 때문이다. 반면, 선호는 소심할 뿐 아니라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지금 와서 보니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음표로 가득 찬 악보와도 같아서 제가 할 일은 그저 더듬더듬 연주하는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유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다. 이 작품을 남성적 판타지가 내재된 선호의 성장영화로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의 다음 말은 선호의 독백에 대한 성숙한 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브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좀더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인물과 대사 위주의 단조로운 구성은 방송사 PD 출신 안판석 감독이 대형 스크린에 적합한 영상 화술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며, 반복되는 플래시백 또한 감정몰입을 막는 지나친 친절로 느껴진다. 하지만 소박한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국경의 남쪽>은 세련되거나 섬세하진 않을지언정 성실하고 정직한 연출의 미덕을 오랜만에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놀이공원, 옥류관, 보통강 유원지 등 평양 시내를 재현한 실감나는 미술, CG 작업과 배우들의 집중력있는 연기 또한 영화에 무게를 싣는다. 특히 이 영화를 통해 연기자로 ‘발견’된 조이진의 활약은 인상적이다.
 
글 :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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