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노동절주간 ‘노동현실과 미래’ 조명
교육방송·문화방송 특집…세계화 속 열악한 일터·고령화시대 문제 다뤄

교육방송과 문화방송이 노동절 주간을 맞아 노동의 미래를 통해 우리 사회공동체가 겪게 될 앞날을 비춰보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있다. 교육방송 〈다큐10〉은 1일에 이어 2일 밤 9시50분에 〈빈곤의 늪, 저임금〉을 방송한다. 시급 11달러의 임금으로 아이 셋과 손주들까지 부양해야 하는 미국인 진, 시급 8달러25센트로 다섯 아이를 키우는 바브라, 11달러 임금을 9년 동안 저축해서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는 꿈을 이룬 제리. ‘아메리칸 드림의 세계화’ 시대에 저임금과 빈곤의 악순환에 발목을 잡힌 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렸다. 3일 〈팔려가는 아이들〉(영국 BBC 제작)에서는 성매매와 노동력 착취를 위해 짐승처럼 팔려 다니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어린이들의 실태를 추적한다.

〈빈곤의 늪, 저임금〉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타결 이후 노동환경이나 기회가 개선되리라는 순진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오히려 양극화와 빈곤문제가 확대되는 암울한 미국의 현실이 전세계의 미래가 되리라는 예견을 불러일으킨다. 프로그램은 경제대국이라는 미국에서 아무리 일을 해도 최소한의 생활수준도 얻기 어려운 근로빈곤층이 늘어나고 있는 문제를 조망한다. 지금 미국에서는 3000만 노동자가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직에 붙들려 있는 상황이다. 2005년 기준으로 상위 1%의 고소득층이 전체 국가 수입의 19%를 벌어들이며, 최저임금의 실질적인 가치는 30% 추락하는 등 상위와 하위 20% 간의 연간수입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빈곤층은 매년 100만명 가까이 늘어 미국인 8명 중 1명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파이를 키우면 개인의 몫도 커진다던 장담들은 어디로 갔을까? 자격증을 따고, 학위를 받고, 좋은 조건의 결혼상대자를 찾아 헤매도 좀처럼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다큐멘터리 속 미국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문화방송은 노동력 고령화 문제를 다룬 〈평생일자리 프로젝트-새로운 시작〉(오후 3시10분 방송·오른쪽 사진)을 내보낸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2030년 대한민국 사람들의 평균나이는 48살에 이르고, 100년 뒤엔 인구의 3분의 1이 줄어든다고 한다. 사회적으로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고령자 개인으로서는 일자리가 절실하게 필요한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프로그램은 고령화 문제를 우리 사회의 시한폭탄에 비유하며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따른 노동문제를 대비하자고 주장한다. 현재로서도 대다수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퇴직한 뒤 평균 14년 정도를 새로운 일자리에서 일해야 하지만 고령자가 통과할 수 있는 고용의 문은 매우 좁다. 고령 노동자를 훈련하고 재고용하는 정책뿐 아니라 정년을 80살까지 늘린 몇몇 기업들의 혁신적인 조처가 미래지향적으로 보인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히피드림~ 2007-05-0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두 저임금인데 ㅋㅋ
 

미국 패쓰파인더 출판사에서 나오는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자의 책들은 대부분 한국 풀무질 출판사에서도 나온 것들이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트로츠키주의자 조지 노박의 <어떻게 유대인들은 생존할 수 있었는가?>.
이번에는 영어 판이 나왔으나, 곧 스페인어 판도 나올 것 같군요. 아래는 패쓰파인더 출판사 소개글입니다.



A Socialist Answer to Zionism By George Novack $3 (List price: $4)

"Every expedient short of the struggle for socialism will end in calamity for the Jews. They cannot achieve security for themselves or anyone else so long as the root causes of discrimination, racism, and reactionary nationalism continue to exit." (출처: http://www.pathfinderpress.com/s.nl/it.A/id.60/.f)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유대인들에 대한 참사로 끝날 것이다. 차별과 인종주의, 반동적인 민족주의의 뿌리깊은 원인들이 계속되는 한, 유대인들은 자신이나 어느 누구의 안전도 얻지 못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히피드림~ 2007-05-06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는 오븐에 넣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고 하는 유태인의 변명을 들었는데요, 계속 그런 식으로 하면 다시 오븐에 넣어질지도 모를일이죠...^^;;
오랜만입니다. sb님~

sb 2007-05-0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
 

(출처: 한겨레)

지난 19일 비정규직 관련법 시행령에 있는 고학력의 전문직 노동자에 대한 예외조항, 즉 의사, 변호사, 변리사, 회계사 등과 함께 박사학위를 받고 해당 분야에서 일하는 자는 2년 이상 근무해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조항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불안한 고용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연구직들에게는 정규직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문제이겠지만, 연구의 질을 생각할 때에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이 부적절한 종류의 연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교적 표준화된 매뉴얼을 가지고 연구를 할 수 있는 종류는 정규직이거나 혹은 장기간 고용해도 되는 경우이다. 연구자 개개인의 창의성이 상대적으로 덜 요구되며 매일 같은 장소에 출근을 해야 할 정도로 집단적 작업이 필요한 일이다. 이런 일들을 주로 맡는 연구소들은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경험 있는 연구자들을 장기적으로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해마다 그런 비슷한 일들이 계속 주어질 것이며, 비슷한 일을 하는 인력은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 경우 임금을 아끼기 위해 하급직 연구원들은 비정규직으로 채운다.

그에 비해 표준화된 매뉴얼에 따라 수행하는 방식이 아닌, 개인의 창의력이 많이 요구되는 연구는 좀 다르다. 이 경우는 그 연구와 정확하게 짝이 맞는 능력 있는 연구자를 찾아 일을 맡겨야 한다. 이런 연구를 하는 연구소라면 연구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은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다. 한 연구에 능한 연구자가 다른 연구에도 능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 직장에 고용되어 있다는 이유로 연구에 참여하는 경우 연구를 추동할 연구자의 자발성이 생기지 않고 연구의 질은 현격하게 떨어지게 되어 있다.

사실 자신의 영혼의 무게를 실어 머리를 짜내는 창의성 있는 연구에선 한 연구자가 일생 동안 그렇게 많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잘 안다고 다른 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니, 한 연구자가 능력을 발휘하는 영역은 아주 협소하고 특수한 영역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영역, 그 주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고, 이 작지만 중요한 성과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연구는 정규직화가 힘든 대신, 연구에 대한 값을 매우 높게 쳐주어야 한다. 일생의 성과를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어차피 정규직화가 힘드니 마음 편하게 사안별로 일을 맡기고, 정규 고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매우 싼 가격으로 처리해 버린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적 지식에 대한 가격은 지나치게 싸다. 원고료는 25년 전에 비해 고작 20배 올랐고, 파트타임으로 일을 맡으면 일의 전문성과 무관하게 그저 일용잡급직으로 처리될 뿐이다.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알아낸 지식에 대해서도 공짜로 인터뷰하는 것이 상식이다.

돈과 일자리를 쥐고 있는 것은 연구자가 아닌 고용주와 관리자이니, 이를 개선하기란 매우 힘들다. 일의 속성상 개별화된 연구자들은 단결로 힘을 모으기도 힘들다. 가장 열악한 조건의 피고용자이며 도급제 노동자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리 전문가라도 피고용자가 되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악한 요즘 젊은이들은, 스스로 고용주가 될 수 있는 의사, 약사, 변호사만 되려고 한다. 똑같이 일하여 똑같이 소중한 전문적 지식을 얻고서도 여전히 불안한 피고용자나 도급제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공 분야나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가 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래저래 대한민국의 학문의 미래는 암울하다.

이영미/대중예술 평론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한국을 바꾼 지식인

경향신문의 기획기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을 그만 옮겨올 생각이었지만 내일자 조간에 실리는 내용은 그런 생각을 접어두게 한다. 무엇보다도 설문조사에 근거한 데이터이기에 '한국을 바꾼 지식인'이란 타이틀만큼이나 흥미를 끌고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저술들의 목록도 일별해 볼 만하다. 지난 2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군...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3. 한국을 바꾼 지식인

지식인들 사이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 지식인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세 사람이다.

경향신문이 최근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을 위해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복수응답) 조사 결과, 24명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백교수를 뽑았다. 이어 21명이 리전교수, 17명이 최교수, 10명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를 꼽았다. 여기에 ‘대중적 글쓰기’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깨는 도전적 작업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90년대 이후 등장한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77)는 지난해 9월 “지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상의 은사’로 기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대의 흐름을 이끈 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나 “한국사회에 보기 드문 보편주의, 국제주의자로 ‘지적 거인과 같은 존재’”(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 아직도 리영희인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는 “87년 민주화의 분수령 이후 한국사회는 새 변화를 추동할 세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주 활동기가 87년 이전인데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지방 말단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혼자 서울의 공업학교로 유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하였다”고 되뇌곤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은 리영희 서재에 걸려 있는 백범의 휘호로 리영희의 꼿꼿함을 설명한다.

“踏雪夜中去 / 不須胡亂行 / 今日我行跡 / 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 내가 걷는 발자국이 /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중국전문가로서의 리영희는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단련됐다.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해·복직을 거듭하면서도 굵직한 특종들을 남겼다. 특히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함과 중국 사회주의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서구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방식으로 반공주의에 맞섰다. 리영희는 기자직과 교수직에 있는 동안 다섯 차례 구속되고 모두 1012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독재의 시대에 그의 글들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강준만)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는 힘은 사회적 발언의 중단을 선언할 만큼 스스로 자신의 육체적, 지적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가 의미있는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한국사회를 ‘시장맹(盲)’ ‘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리영희를 본격 비판한 것은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 ‘비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윤평중은 이번 경향신문 설문에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는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리영희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계속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일까. 그 대답은 백낙청, 최장집 등 후배지식인들의 왕성한 지적, 실천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말해준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69)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1위로 꼽힌 것은 40년 창비 역사와 함께 해온 그의 실천적 글쓰기 덕분이다.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은 “한반도 특유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민족 문제를 고려하면서 지속적으로 분석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의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이라고 했고, 박명림(연세대 교수)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맞는 화두를 잘 던지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맛깔나는 문체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55년 경기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백인제·백붕제가 각각 그의 백부·친부이고, 현 인제대 이사장인 백낙환이 형이다. 스스로 ‘변칙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한 바 있는 백낙청은 28세 때인 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의 분단현실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데 투신했다. 창비는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반복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해오며”(조효제) 백낙청의 실천적 지성 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백낙청의 담론 주도력 뒤에는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인 창비”(류준필 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에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문학론’을 펴온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최근 그 이름에서 ‘민족’을 떼느냐 마느냐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 민족의 삭제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최근 이명원(문학평론가)과의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2825).


“상당수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전제를 깔고, 분단 안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아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학문적, 실천적 역량을 쏟았다는 점에서 최장집(고려대 교수·63)은 백낙청에 비견된다. 최장집은 강릉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고려대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한 4·19 세대다. 그는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여 일하기도 했으며 잡지 ‘세대’에서 기자생활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만개했던 각종 변혁이론들이 91년 소련 붕괴로 몇 년 못가 시들해졌을 때 최장집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1983년 40세 늦깎이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장집은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제3세대 학자군’을 이끌며 그람시류의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소개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교수 정치학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장집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 민주주의 이론’(1993) 때부터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하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휘말려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뒤로 그의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 책 제목이 하나의 관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학문적 천착보다는 사회적 활동으로 유명해진 학자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교수도 아닌, 이 둘을 아우르는 이론적 실천가라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 리영희

1929년 12월 평북 운산 출신. ‘삭주 대관국민학교 개교 이래 몇 천재 중 하나’였다. 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에 이끌려 한국해양대를 다녔다. 외신부 기자생활을 거쳐 72년부터 한양대 신방과 교수를 지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최근 저작 활동을 접었다.

◇ 백낙청
1938년 1월 대구 출신. 남들보다 2년 일찍 학교에 다녔다.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에서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고 귀국했다. 66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뒤 72년 미국작가 DH 로렌스 연구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최장집

1943년 5월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청와대 공보비서실과 잡지사 ‘세대’에 잠시 몸 담았으며 이후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 DJ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때문에 물러났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90년대 강준만 등장

전통적 지식인이랄 수 있는 세 지식인의 틈새에서 90년대에 등장한 전북대 교수 강준만(51)의 약진은 변화된 지식인 지형의 일면을 보여준다. 10명의 응답자가 그를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았으며 그가 글을 쓰는 잡지 ‘인물과 사상’은 6명이 영향력 있는 저술로 꼽았다.



강준만은 ‘지역주의 비판’ ‘서울대 망국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등의 민감 이슈를 도발적인 문체로 제기한 ‘게릴라 지식인’이었다. 모든 ‘금기와 성역에 도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인물과 사상’은 강준만 1인이 글을 쓰고 출판하는 독특한 체제도 관심을 끌었지만, 거침없이 실명을 거론하는 전방위적 비판으로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은 “다작의 교양도서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화 이후 기성체제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로운 시각과 직설적 논쟁화법으로 비판해 ‘강준만식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강교수가 남긴 사회문화적 영향은 매우 컸다”고 강조했다.

강준만은 “진의가 왜곡되기 쉽다”며 기자들의 전화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팩스 또는 e메일로만 외부와 소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회적 개입은 책 쓰고 신문에 기고하는 것으로만 한정된다. 강준만은 언젠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는 등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만큼 스스로의 행동에 조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강준만의 칼날 화법은 어느 순간 많이 순화된 것이 사실이다. 1인 출판으로서의 인물과 사상은 지난 2005년 막을 내리고 지금은 다수 필자가 참여하는 잡지로 성격이 바뀌었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강준만으로 대표되는 게릴라 지식인들은 몇 년 못가서 초기의 기개와 전의를 크게 상실했는데 이는 기존 제도권 지식인 사회의 무응답과 외면에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보수 지식인으로는 송복(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박세일(서울대 교수) 김대중(조선일보 고문) 복거일(소설가) 이문열(소설가) 등이 이름을 올렸다. 자연과학자로는 임지순(서울대 교수)과 황우석(전 서울대 교수)이 거명됐으며 김대중(전 대통령), 기업인 황창규(삼성전자 사장)를 선택한 이도 있었다. 영향을 준 지식인을 국내·외 구분 없이 물었기 때문에 해외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카를 마르크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새뮤얼 헌팅턴,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꼽혔다.(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 국내서적

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07. 04. 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장윤정이 아니라 제가 직접 부른 ‘어머나’를 자신의 홈페이지 배경음악으로 띄우는 건 어떨까. 에릭 클랩턴의 기타 반주로만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을 들을 순 없을까. 가능하다. 인터넷 업계와 누리꾼들은 이미 이를 ‘뮤직 2.0’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용자 참여를 알짬삼아 공유, 개방, 소통의 가치가 절대 미덕이 된 ‘웹 2.0’의 세상에선 누리꾼의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과 감성조차 껴안지 못하면 호응을 얻기 어렵다. 손수제작물(UCC) 서비스는 첨병이 됐다. 그러나 기술적 한계로 여전히 동영상 등 시각물에만 머물러 있다.

뮤직 2.0의 시작=음악 콘텐츠는 웹 2.0 세상과 어울리기 어려웠다. 10여년 전 엠피3 파일로 음원이 저장되는 유통 기술만 진화했을 뿐, 콘텐츠에 직접 접근해 입맛대로 편집하거나 재가공하는 ‘소통’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디지털음악 솔루션 업체인 오디즌은 자신만의 취향대로 음악을 재가공하는 ‘뮤직 2.0’ 서비스를 4월 중순 시작했다. 국내 처음으로, 특허 출원 중이다. 한 곡이 한 트랙으로 구성되었던 기존 음악과 달리, 모든 종류별 음 요소를 각기 트랙으로 구성(멀티트랙 서비스)했다. 덕분에 취향대로 악기음을 선별하면 사용자가 직접 한 곡을 믹싱하는 셈이 된다. 이를 통해 전혀 새로운 음악 유시시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사용자 편의의 서비스까지 가능할 전망이다. 이 기술로 지난 26일 가수 장혜진의 ‘뮤직 2.0’ 시디 음반을 출시하기도 했다.

노래는 내가 부른다?=웹 2.0의 누리꾼은 노래를 듣기만 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를 자신의 홈페이지에, 또는 휴대폰 벨소리로 장착할 수 있다. 음악포털 멜론은 반년 전부터 ‘멜론 노래방 서비스’를 시작했다. 인터넷 노래방 기기가 설치된 노래방이나, 멜론 홈페이지에서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를 엠피3 파일로 저장해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태영, 금영 등 기존 노래방 회사도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멜론의 조원용 뮤직사업팀장은 “인터넷 노래방 기기를 설치한 노래방도 늘고, 유시시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자신의 노래를 저장하는 이용자가 대폭 늘고 있다”며 “민망할 정도의 노래도 애교있게 봐주며 웹상에서 또다른 화제를 낳기도 한다”고 말했다. 현재 하루 1만건의 이른바 노래 유시시가 웹상에 올려지고, 이 가운데 1천건 정도가 홈페이지 배경음악 또는 휴대폰 벨소리로 활용되고 있다.

전망과 한계=멀티트랙 서비스 경우, 현재까진 사측의 음악 포맷 작업을 거친 곡들만 이런 재가공이 가능하다. 김정훈 오디즌 콘텐츠사업부 과장은 “세계 어느 기술로도 기존의 음악을 편집하는 건 현재 불가능하다”며 “앞으로 외국 음반사와도 계약해 매달 5~10장 정도의 패키지 앨범을 온라인을 통해 보급해 활용폭을 넓힐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비스가 얼마나 빨리 안착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오디즌이 사업 개시에 앞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64%가 이 서비스를 이용할 의사가 많거나 조금 있다고 답한 반면, 70%가 이에 대해 비용을 지급할 의사는 없다고 밝혔다. 기존 선도적 온라인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대안적 수익 모델을 찾아 서비스를 안정되게 공급하는 일이 사업의 대마루이기도 하다. 물론 저작권 문제도 섬세하게 매듭지어야 한다. 멜론 등의 서비스도 대부분 유료로 제공되는데다, 용처가 제한되어 있다. 사용자들의 시각적 허기를 채우지 못하는 단점도 있다. 티브이 시대의 라디오처럼 끼어 있는 셈이다.

2.0은 민들레 씨앗=4월 말 현재 한 의류업체의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뮤직비디오가 인기다. 선택한 에피소드에 따라 노래 가사와 영상이 다른 뮤직비디오가 만들어지고 이를 퍼나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에피소드가 많지 않아 짐짓 단조롭지만 저마다 주인공의 얼굴을 직접 그려넣어야 하기에 하늘 아래 유일한 뮤직비디오다. 블로그에 제 ‘작품’을 올린 한 누리꾼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여기저기 2.0을 붙이는 데 재미가 들렸다. 나는 이것을 ‘뮤직 비디오 2.0’이라 명하노라.” 웹 2.0은 살아 있는 세포처럼 쉼없이 분화하고 있다. 음악도 이제 ‘2.0적 상상’의 영역에 들어선 셈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