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안주무시죠?

전 김규항의 글을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진중권, 강준만과 섞여 그저 글 잘쓰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는 왜 불온한가>를 읽고 그의 블로그에 틈틈히 들리면서, 그의 글이 놋빛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몇 해 전에 글 팔기에 진력이 나서 대중매체에 글쓰기를 포기하고, 이제는 어른들을 상대로 한 글쓰기에도 진력이 나서 어린이 잡지를 만들고 있다고 해요. 직설적이지만 겸손하고, 겸손하지만 자신을 낮추지 않는, 삶의 태도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이 글은 이미 적지 않은 이들이 좋다며 가지려는 글입니다. 저 역시 그 중 하나이지요. 작년 말 서울로 올라올 기한을 정해두고 도서관에 들락거리다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전 이 글을 읽으면서, 그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왔던 것이, 바로 외로움이었다는걸 알게됐습니다.

사실 그 때 잠깐 오해도 있었지요. 난 그 외로움을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으로 무언가를 버리겠다 다짐했던 바로 그 때,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서울에 올라오면 버리고 간 짐들이 그대로 남아있지 않을까 못난 기대도 했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버려진 짐들이 너무나 낡고 닳아있다는걸 알았습니다. 먼지를 닦아내고 닳아진 부분을 조심히 메웠어요. 변명 같지만, '내가 잘못했어' 라는 용서는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좀 심했지.' 라는 반성과 비슷했어요. 집착하거나 매달리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을 해요. 내가 달고사는 외로움이라는건, 근래 몇 년을 떠나서 아주 오래 전 부터, 별 감흥 없던 대학 생활의 시작, 아니 고등학교 시절의 막바지 부터였다구요. 여기까지가 제가 생각하는 진실입니다.

저도 제 외로움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전 늘 딴 짓을 합니다.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 위아래 몇 개 되지도 않는 주머니에 몇 번이고 손을 집어넣는건데, 부끄럽게 빈 손을 꺼냈을 때는 이미 헤어질 시간이곤 했습니다. 나중에 놀러오시면 안그러려구요.

편지 잘 읽으시고,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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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편지
김규항

단아. 아빠는 지금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에 와 있다.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아저씨 집이야. 일 때문에 왔지만 “날씨가 죽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둘이 술만 먹고 있다. 아빠는 즐겁다. 갈수록 사람들은 빠르고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시간만 좋아한다. 그러나 아빠는 이런 아무 것도 아닌 시간, 느리고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시간이 참 좋다.

술을 먹다 단이가 생각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하는 단이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아빠는 그럴 때 담담한 체 하지만 속으론 아주 많이 기쁘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기 생각’을 ‘옳은 생각’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 아빠는 단이가 아빠의 잘못을 들추어내길, 그래서 아빠가 잘못을 인정하길 기대하곤 한다. 기대는 점점 더 잘 이루어지고 있다.

단이는 단이 이름을 닮았다. ‘丹’(붉을 단). 처음 그 이름을 지었을 때 좋다는 사람이 없었다. 칭찬은커녕 “이름이 그게 뭐야?” “배추 단이냐 무단이야?” 따위 놀리는 말만 가득했다. 그런데 단이가 이름과 합쳐지면서 확 달라지더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말은 아빠가 억울할 만큼 빨리 나왔다.

아빠도 아빠 이름을 조금 닮았다. 단이는 아빠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니? 홀 규에 늘 항, ‘늘 홀로’라는 뜻이다. 아빠는 어른들이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물어본 적은 없다. 아빠는 이릴 적부터 왠지 그 이름이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아빠가 외롭냐고? 그래 아빠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단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꼭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은 외롭지 않아도 생각은 외로울 수 있단다.

이오덕 할아버지를 기억하니? 아빠가 누구보다 좋아했던 분이지. 아빠는 그분을 돌아가시기 오년 전쯤부터 사귀었다. 할아버지는 워낙 훌륭하게 사셨기에 그 뜻을 따르는 이들이 참 많았다. 그분이 아빠 글을 읽고 연락을 해오자 아빠도 한달음에 만나러 갔다. 그분을 사귀면서 많은 걸 배웠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분은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너무나 외로워하셨다.

아빠는 그분의 외로움이 그분의 올바른 삶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단아. 올바르게 산다는 게 뭘까? 아빠 생각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삶’이다. 사람들은 지난 올바름은 알아보지만 지금 올바른 건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삶은 언제나 가장 외롭다. 그 외로움만이 세상을 조금씩 낫게 만든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늘 그렇다.

예수님은 가장 외롭게 죽어갔다. 아무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죽인 힘세고 욕심 많은 사람들뿐 아니라 따르고 존경한다는 사람들에서 오히려 더 많았다. 그 후 2천년 동안도 그랬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예수님은 ‘2천년의 외로움’이다.

단이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으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아빠보다 더 많을 거다. 하지만 단이의 거짓 없는 성품과 행동이 단이를 외롭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단이가 외롭길 바라지 않지만 단이가 올바르게 산다면 단이는 어쩔 수 없이 외로울 거다. 단이가 외로울 거라 생각하면 아빠는 마음이 아프다. 외로움은 어디에서 오든 고통스럽기 때문이야. 단이가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 이 편지를 기억하면 좋겠다.

아빠는 아빠 책 머리말에 이렇게 적었었다. “그러나 내 딸 김단이 제 아비가 쓴 글을 읽고 토론을 요구해올 순간을 기다리는 일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아빠는 정말 그 순간을 기다린다. 지금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단이도 술을 좋아하게 될 거다. 내 딸아, 너의 외로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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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의료보험 2종 신세가 대학병원에 가면 의사나 간호사나 한 끗 차입니다. 똑같단 말입니더. 그 사람들 내 같은 사람 절대 인간취급 안해 줍니다. 경찰들은 한 수 더합니다. 틱틱 반말은 우습고요, 쪽방촌 사람들을 완전 좆으로 봅니다. 내 마, 그때 콱 죽어뿔고 싶고 서러버진다 이겁니다. 내 몸이 아파서 우는 거 같지요? 천만에요! 마음이, 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아서…”

2004~2005년 사이에 전국에서 기초생활수급자가 제일 많이 발생한 지역은 대구였다. 장롱 속에서 숨진 아이가 발견된 곳도 대구였다. …2007년 현재 우리나라 기초생활수급자는 150만 가구, 의료수급자는 180만 세대,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빈곤층만도 200만명에 이른다. …전체 국민의 15퍼센트가 암보다 더 무서운 생계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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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당파싸움이 조선 망국의 주요 요인이었다는 오랜 통설은 식민사관에 찌든 사실오인의 전형일 수 있다는 주장들이 힘을 얻고 있다. 개중에는 당파싸움을 정책 중심의 정파들간 정권경쟁 차원으로 파악함으로써 근대 서구 정당제도 발전에 비견될 만한 선구적 정치행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세계사적으로 예가 드문 조선왕조의 500년 장수를 ‘아시아적 정체’ 따위의 부정적 시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당파경쟁이 알려진 것만큼 저급하진 않았으며, 그것이야말로 장수의 비결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일제가 한국사를 조직적으로 깎아내렸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도 짙게 이어지고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조선조 최대 재난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권신들의 과도한 붕당적 처신들은 그런 수정주의적 시각에 일말의 회의를 품게 한다. 전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조사과정에서 가담자들이 의병장들 이름을 발설했다. 항전의 영웅 김덕령도 연루됐다. 전란 발발 이듬해부터 7년에 걸쳐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겸직한 남인의 거두 서애 유성룡은 졸지에 서울로 압송된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서인 거두 판중추부사 윤두수 등은 신속한 처리를 주장했다.

한국사 관련 저술로서는 드물게 숱한 베스트셀러를 내며 역사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는 이덕일의 <유성룡>(역사의아침)은 그때 선조의 처신을 이렇게 전한다.

“그러나 선조가 알고 싶은 것은 김덕령의 유·무죄 여부가 아니었다. 그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전쟁영웅들을 질시했다. 그는 이런 전쟁영웅들이 올무에 걸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올무에 걸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덕령은 ‘수백번의 형장신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졌다’고 <선조수정실록>이 전한 것처럼 숱한 형장을 받았다. 그는 ‘다만 신이 모집한 용사 최담령 등이 죄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말고 쓰도록 하소서’라고 주청했으나 그 자신은 물론 그의 별장 최담령도 고문을 받다가 죽고 말았다. 민심은 극도로 분개했다.”
 
이순신 천거하고 죽음앞 목숨 구해

전란 중 당파싸움의 절정은 ‘이순신 죽이기’였다. 파죽지세의 왜군을 연전연파한 이순신을 두고 서인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아뢰었다. “임진년에 수전한 장수들 중에서 공이 있는 자는 손꼽아 셀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 원균이 가장 우직하여 제 몸을 잊고 용맹을 떨치며 죽음을 피하지 않아 공적이 매우 뚜렷합니다.” 원균의 공을 빼앗은 이순신을 죽여라는 얘기다. 선조는 원균을 통제사 자리에 앉히고 의금부 도사한테 이순신을 잡아올리도록 지시했으며, 서인 쪽 성균관 사성 남이신에겐 현지조사를 해 보고토록 했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가니 군사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이순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섬에 7일간이나 머물러 있었으나 우리 군사가 만약 출전했으면 그를 잡아올 수 있었을 텐데, 이순신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그만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하고 보고했다.”

가토를 죽이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문당해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순신을 살려낸 건 애초 그를 발탁 천거했던 유성룡이었다. 바로 뒤 200척에 이르던 원균의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전멸했다. 다급해진 선조는 죽이려던 이순신을 복직시켰지만 재기불능이라 본 조선수군을 없애버리라고 했다. “신에겐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이순신의 다급한 장계가 올라간 건 그때였으며, 그의 기적같은 명량해전 승리가 정유재란의 물줄기를 바꿨다. 하지만 나중의 논공행상 때까지도 선조는 이순신을 원망하고 원균을 충신이라 치켜세우면서 신하들 의견을 깔아뭉개며 원균을 1등공신에 책봉했다. “선조가 이순신을 증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은 백성들의 조롱을 받는데 이순신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은 것이다.” 저자의 이런 시각은 <유성룡> 전편을 줄기차게 관통하고 있다.

선조가 쳐 놓은 올무에 걸려든 또 한 사람의 최대급 희생자는 바로 유성룡이었다. 이순신이란 영웅을 등장시킨 장본인이라는 점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7년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최고수훈자 유성룡은 바로 그 때문에 전쟁이 승리로 끝나는 순간 제거대상이 됐다. 유성룡은 개전 초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야반도주하듯 피난갈 때부터 무책임한 선조를 나무랐고, 광해군 세자책봉 등을 주장함으로써 선조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대신할 인재를 구할 수 없는 유능함 덕에 전란기간에 살아남은 그는 또 속오군을 창설해 양반도 군역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했고, 대동법의 전신이라 할 작미법으로 조세제도를 혁신했으며, 노비 등 천출들을 과감하게 기용했다. 이순신 등용과 더불어 승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이런 혁신조처들은 전란수습과 조선조 재건의 토대가 됐으나 선조에겐 오히려 유성룡을 질시하고 제거해야 할 재료가 됐을 뿐이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 기록한 명나라의 <대명회전> 내용을 고쳐달라는 요청이 ‘종계변무’인데, 유성룡 반대파들은 혼란스런 전란 중에 몸을 뺄 수 없었던 유성룡을 두고 황당하게도 종계변무를 위한 중국행을 기피하는 등 불충을 저질렀다며 그를 탄핵했고 그것은 선조가 기다리던 바였다. 이 말 안되는 탄핵사유에도 그를 옹호하는 사대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절대자 왕의 뜻이기도 했으려니와, 그것보다는 속오군, 작미법, 신분타파 등의 혁신조처들이 바로 그들 자신의 존립기반을 허무는 ‘독약’임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양반 기득권세력의 담합·작당 쪽에 더 혐의를 둬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파직당한 선조 31년(1598) 11월19일, 바로 그날 이순신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최후를 맞았다. 그 전에 이미 유성룡이 실각으로 내몰리던 상황에서 이순신은 그것이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걸로 받아들였고 전장에서 죽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보면 <유성룡>의 주인공은 유성룡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전쟁수행에 최대 걸림돌’이었던 선조다. 유성룡이라는 재상의 일생을 매개로, 난해한 심리구조를 지닌 한 조선왕의 유별난 처신과 비극적이었던 그의 시대를 다시 읽는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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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그때가 6월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1987년 5월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 출간됐을 때 그 책의 지은이 이진경이라는 이름도 처음 세상에 나왔다. ‘사사방’이라는 약칭으로 통용되던 그 책은 조금 과장 섞어 말하면, 세상을 둘로 갈라놓았다. ‘사사방’을 찬탄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사회과학의 교과서로 삼았고, 경원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서구 이론의 맹목적 추종으로 보았다. 그러나 비판자든 옹호자든 그 책을 읽지 않고는 시대를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한국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자는 제안은 많았지만, 그 과학적 분석의 방법론을 수미일관하게 제시한 책은 ‘사사방’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1980년대 남한 혁명운동을 대표하는 책을 한 권만 꼽으라면, 스물네 살의 젊은이가 쓴 그 책이 맨 앞자리에 놓일 것이다.

그리고 만 20년이 흘렀다. ‘사사방’의 지은이 이진경(본명 박태호)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맹렬한 탐구 한가운데 있다. 1999년 세운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그가 용맹정진하는 곳이다. 연구와 생활을 함께 하는 이 공동체는 말하자면, 사유의 실험실이고 탐구의 양산박이며 공부의 청석골이다. 지식과 지혜를 훔치고 싶은 이들이 이곳에 출몰한다. 최근 한두 달 사이에만도 그는 이 열린 소굴의 멤버들과 함께 쓴 〈문화정치학의 영토들〉(그린비 펴냄)과 〈모더니티의 지층들〉(그린비 펴냄)을 내놓았다. 그 20년 동안 그가 쓴 책은 몇 권이나 될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20여권 될까 ….” 그 자신도 자기 책이 정확히 몇 권인지 모를 정도로 끝없이 공부하고 그 결과를 책으로 냈다. 책을 낼 때마다 매번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고 때로는 급격한 변곡점을 그리기도 했다.

그 변곡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의 만남일 것이다. 1990~91년 시국사건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소련이 무너졌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실태가 파산한 것이다. “그 사태를 보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감옥 안에서 미셸 푸코를 알게 됐다. 푸코의 글 ‘철학극장’을 읽는데, 거기서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만났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출소한 뒤 들뢰즈의 대표작 〈안티오이디푸스〉를 읽었다. “4장쯤 읽는데 뭉클한 것이 솟아올랐다. 변화된 시대 조건에서 혁명을 다시 사유하려는 그의 노력이 감동적이었다.” 이어 들뢰즈의 또다른 대표작 〈천의 고원〉을 공부했다. 그에게 들뢰즈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다가왔다.

말하자면 그는 들뢰지언-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그에게 들뢰즈는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2002년 들뢰즈의 철학을 해설한 두 권의 두툼한 강의서 〈노마디즘〉(휴머니스트 펴냄)을 낸 것은 오랜 학문적 도제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들뢰즈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의 사유방식을 체화해 자신의 목소리로 재해석하는 것, 그것이 이진경씨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들뢰즈를 사숙하던 그 시절에 그의 정신의 안테나에 걸려든 또하나의 사유가 불교였다.

불교에도 심취 ‘사유의 회통’ 경험

“1999년이었는데,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큰 고통이 돼 내 마음을 짓눌렀다. 어느날 관악산 약수터에 올랐다가 불현듯 깨달음이 왔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집착에서 고통이 오는 거구나. 이게 ‘아상’이구나. 그런 깨달음이 들자 ‘차이’가 새롭게 인식됐다. 차이를 적대시하면 그 이질성을 견디지 못하지만, 내 생각을 내려놓고 차이를 받아들이면, 그게 오히려 나를 갱신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불교의 ‘무아 사상’이라는 게 들뢰즈의 ‘차이 철학’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때 머리를 박박 깎았다. 사유의 회통이라고나 할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사상들이 하나로 꿰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남들에게는 서로 적으로 보일 수 있는 마르크스와 들뢰즈와 불교가 나에게는 하나였다.”

그 한 묶음의 사유가 탄생시킨 것이 ‘외부에 의한 사유’ 또는 ‘외부를 통한 사유’라는 독자적인 유물론이었다. 그에게 유물론이란 ‘물질이 우선이고 의식은 물질의 2차적 파생물’이라는 전통적인 유물론과는 전혀 다르다. 본질이나 본성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그것을 둘러싼 외부적 조건과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 ‘이진경 유물론’의 핵심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은 ‘연기적 관계’의 산물이다. 우리가 ‘나’라고 말하는 것은 수없이 얽힌 인연의 실타래일 뿐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이란, 역사라는 외부가 어떤 것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마르크스 〈임금노동과 자본〉) 플랜테이션 농업이라는 특수한 생산관계 속에서만 흑인은 노예가 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의미’란 ‘사건 관계’의 파생물이라고 말한다. 맞고 들어온 아들을 대신해 아버지가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건은, 알고보니 그 아버지가 재벌 회장이었다라는 다른 사건과 만나 ‘돈 많은 자는 법을 우습게 안다’라는 의미를 낳는 것이다. 의미든 본질이든 자기 스스로 고유한 것은 없고 오직 외부적 조건에 따라, 외부적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임을 이진경씨의 유물론은 지시한다.

‘외부에 의한 사유’가 이진경씨의 연구 방법론이라면, 그의 연구 목표는 ‘코뮨주의’다. 이때의 ‘코뮨주의’는 흔히 공산주의로 번역되는 ‘코뮤니즘’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또 공동체주의와도 인연이 멀다. 공동체라는 말을 굳이 쓴다면, 그의 ‘코뮨’은 ‘외부를 향해 한없이 열린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이진경식 유물론에 근거한 세계 인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떤 것도 고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 몸은 세포라는 생명체 200조개가 모여 이룬 집합적 생명체다. 세포 또한 수많은 하위 개체의 집합체다. 지구는 어떤가.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유기적 순환으로 자기를 유지하는 거대한 집합적 생명체다.

외부로 한없이 열린 공동체 꿈꿔

그렇게 본다면 모든 생명체는 최소단위에서부터 최대단위까지 그 자체로 개체이자 집합체다. 이 집합적 개체를 두고 이진경씨는 ‘중-생체’라고 부른다. 모든 개체는 뭇 생명이 모여 이룬 공동체라는 것이다. 인간 사회만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의 코뮨은 인간이 평등하게 모여 서로서로 선물(도움)을 주고받는 상생의 공동체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외부를 적으로 돌리지도 않는다. 외부가 들어와 내부를 더욱 활성화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외부로 열린 공동체의 한 사례가 ‘수유+너머’다. 이 공간에서 벌인 삶의 실험이 없었다면 그의 사유가 이렇게 풍요로워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 이진경의 대표작들 ■

이진경씨의 지난 20년은 ‘사유의 모험’ 20년이었다. 그 20년 동안 이 모험가가 헤쳐나간 길마다 이정표로 선 책들이 있다.    
 

 

 

 

그의 첫 저작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은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과감하게 수용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저작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자본주의 이후 사회주의’라는 역사발전의 도식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이런 도식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포함한 근대성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가 1997년 펴낸 〈맑스주의와 근대성〉(문화과학)이다. 근대성의 여러 영역을 탐색하면서 근대적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특징을 지녔는지를 살핀 것이 이 책이다. 근대주의의 모든 산물에 물음표를 던진 이 책에서 근대주의의 포획장치로부터 벗어나 탈근대로 탈주한다는 생각이 구체적인 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2002년 펴낸 〈철학의 외부〉(그린비)는 이진경식 유물론, 곧 ‘외부에 의한 사유’가 막 솟아오른 책이다. 이어 펴낸 〈노마디즘〉은 철학자 들뢰즈에게 바치는 ‘우정의 기록’이었고, 2003년 쓴 〈자본을 넘어선 자본〉(그린비)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이진경 자신의 유물론으로 재해석한 책이다. “마르크스에게서 풀려나 마르크스와 함께 사유한다는 생각으로 썼다.”

그리고 지난해 그는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를 펴냈다. 오랜 시간 사유를 되새김질한 그는 이 책에서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프롤레타리아를 노동자계급과 구별해 ‘비계급’, 다시 말해 ‘화폐와 권력의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집합’으로 제시하고, 인간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신앙과도 결별했다. ‘중-생체’ 개념으로 개체론(개인주의)과 전체론(전체주의)을 동시에 극복한 새로운 공동체의 그림을 제시한 것도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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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시집살이를 훤희 들여다보는 얄궂은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화려하지 않은 통속적인 운율이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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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 노래
작자미상

형님 온다 형님 온다 분고개로 형님 온다
형님 마중 누가 갈까 형님 동생 내가 가지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뗍데까?

이애 이애 그 말 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앞밭에는 당추 심고 뒷밭에는 고추 심어
고추 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

둥글둥글 수박 식기(食器) 밥 담기도 어렵더라
도리도리 도리 소반(小盤) 수저 놓기 더 어렵더라
오 리(五里) 물을 길어다가 십 리(十里) 방아 찧어다가
아홉 솥에 불을 때고 열두 방에 자리 걷고
외나무다리 어렵대야 시아버니같이 어려우랴?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시아버니 호랑새요 시어머니 꾸중새요
동세 하나 할림새요 시누 하나 뾰족새요
시아지비 뾰중새요 남편 하나 미련새요
자식 하난 우는 새요 나 하나만 썩는 샐세

귀먹어서 삼 년이요 눈 어두워 삼 년이요
말 못해서 삼 년이요 석 삼 년을 살고 나니
배꽃 같던 요내 얼굴 호박꽃이 다 되었네
삼단 같던 요내 머리 비사리춤이 다 되었네
백옥 같던 요내 손길 오리발이 다 되었네
열새 무명 반물치마 눈물 씻기 다 젖었네
두 폭 붙이 행주치마 콧물 받기 다 젖었네

울었던가 말았던가 베개 머리 소(沼) 이겼네
그것도 소(沼)이라고 거위 한 쌍 오리 한 쌍
쌍쌍이 떼 들어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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