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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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는 1982년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남아메리카의 고독]이 [그들의 삶을 믿게끔 만들 수 있는 어떤 방편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마르케스가 진정 바랐던 고독이 사라진 그곳은 아무도 타인을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고,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며, 백년 동안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두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은 한편으론 좌파적 세계이면서 동시에 좌파로 밖에는 보호 받을 수 없었던 근대사 속의 남아메리카가 지향했던 유토피아이다. 

마르케스는 이런 남미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늪지대의  한 가문의 시작과 종말까지의 고독의 순간으로 그려낸다. 그 고독의 본질은 사실 이들 미개지의 한 남아메리카인 가족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인위적인 외부세력]에 그 원인이 있다. 파견 공무원, 군대, 좌파와 우파, 바나나 재배 미국 기업... 유토피아와 같았던 그들의 삶은 처절한 고독과 슬픔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우스꽝스럽고 신비적인 가문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그들의 고통이 결국 결코 고독하지 않은, 끝내 멸절되지 않은 이들 정권들과 군대, 미국에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결국 가장 처절하게 생존과 자손의 번성을 원해왔던 그들의 꿈은 짓밟혀 사라져 버려 그들은 자취도 없어지고, 그들을 그리로 몰아넣은 자들은 여전히 자손을 퍼뜨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대비하여 보여준다. 독재자, 변호사, 자본가, 장군들... 이대로 가다가는 남미는 고독 속에 죽어버리고 말리라. 이 땅에 먼저 살았던 인디오들처럼. 왜 그들이 이 땅에서 좌파 게릴라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체게바라의 전기가 아닌 마르께스의 소설을 통해서야 알았다.

남아메리카에서의 어느 대령의 죽음. 그들은 이해받지 못하여 고독하고,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아무런 사람을 갖지 못하여 고독하다. 그것은 한때 믿을 인간을 하나도 갖지 못하던 자본주의 개화 앞에 [그후]의 다이스케의 고독이었고, 아르헨티나의 체게바라의 고독이었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고독한 죽음이었고, 여전히 남아메리카의 고독이고, 또한 여러 아시아 나라의 고독이다. 만약 이 고독이 여전히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결국 유럽인과 북아메리카도 이 고독의 맛을 보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대한民國의 고독한 자들을 소멸로 몰아넣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면, 이 땅의 기득권자인 우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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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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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케는 자연으로의 선택을 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지는 동백꽃과 같은 붉음으로의 추락. 감정의 결을 따라감으로 인한 현실의 안락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사랑으로 인해 물질적 혜택을 버리는 근대적 일본 청년상의 탄생이라고도 하고, 혹은 반자본주의 또는 심미주의의 촉발이라고도 해석하지만, 나에게 다이스케는 작가자신을 그려내는 자화상으로 비친다.1907년 동경제대와 제1고등학교 전임강사 자리를 사임하고 쓴 [산시로]에 이은 두번째 아사히 신문 연재 소설. 그에게 포기하려고 했던 문학이 결국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될 숨이 꺼져가는 그의 사랑이었다. 문학을 위해 교수직을 버린, 혹은 소명으로 인해 安住를 버린 작가의 어절한 마음이 미치요를 향한 다이스케의 마음에 묻어난다. 소세키는 정말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인습을 깨고 말았다.

그가 그리는 20세기초 일본에서의 삶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속의 연명일 뿐이었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믿을 수 없게 되어가는, 근대화에 끼어버린 인간들이 모여사는 곳.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에 휘말려, 전통적 가치를 말하나 스스로는 져버린 사무라이였던 아버지. 칼잡이 무사였던 한 청년이 양복과 공장과 귀족의 삶을 누린다. 하지만 근대화의 뻥튀기 위에 자기의 인간됨과 고고함을 포기한 사람들. 뇌물과 횡령의 유혹에 걸려든 친구 그리고 기자가 되자 다이스케 아버지의 비리를 눈감아 주듯 말하는 태도, 그들에게 한때는 숨쉴 공기였던 신뢰와 존경을 이제는 찾기 힘들어져 버린 낯선 사회. 수입물품으로 집안을 장식하고 유럽에 직접 주문한 원단으로 옷을 지어입는 호사들(그러나 하필 그 원단이 메이드인 재팬이라니),  왠지 굉장히 친숙한 풍경이다. 우리도 반복했었고(하고 있고?) 중국도 시작한...돈을 위해 무언가는 잃어버리고 있는 동양나라들... 시리즈물 같다.

이런 삶을 살다보면 언뜻 죄의식이란 것이 머리를 든다.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과 내 안에 있는 어떤 기준과의 충돌이다. 다이스케 안에 들끓던... 이른바 근대적 인간상과 인간 본성간의 충돌이다. 이 인간본성이란 그냥 옛날부터 우리가 지니고 있던 우리 안의 전근대성의 잔재일까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던 정말 나락의 끝에 발견하는 인간성 그 자체일까? 그 후 일본이라는 나라는 스스로를 미화하기 시작했다. 공무원은 청렴하고 사회는 깨끗하며, 근대화도 옳고 전근대성도 보존해야 한다고... 세뇌하고 선전했고, 스스로 믿다보니 스스로 변하기도 했다. 그들 나름의 가치관 확립과 사회통제, 일탈과 엽기. 발전의 모델과 파국의 모델 사이를 여전히 오가고 있는 그들. 그들은 지난 백년동안 소세키가 그려냈던 근대화 초기의 일본으로부터 어쨌든 여기까지 변형시켜 왔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위한 무슨 좋은 대안이나 묘수가 있는가? 아니면 일본따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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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인간 1 - 3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3
랠프 엘리슨 지음, 송무 옮김 / 문예출판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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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나는 내가 거의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는 것을 알았다. 물론 서로 쳐다보면 무안하고 또 괜한 오해를 살까봐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서로를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서로를 주시하지 않는다면 서로를 존중하기 어렵다. 보지 않기에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사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상대이기에 서로 무례하게 되고, 따뜻하게 말을 건내기도 힘들어진다. 문득 지나는 사람들을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양보와 존중이 쉬워지는 것 같다. 사랑이라는 것은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외면은 그 뜻이 얼굴을 피하여 보지 않음이니까.

왜 서로를 보려하지 않을까? 미국 생활을 하며 흑인들이나 히스패닉들을 잘 보지 않았는다는걸 안다. 나에게는 백인들만이 보였고, 그래서 무얼하든 그들 백인은 고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는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놀랐었다.  나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있는 대상은 눈치를 보고 그 행동이나 얼굴에 나타난 감정등에 관심을 갖지만, 나를 좌우할 수 없는 상대는 주시하지 않고 지나치게 된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시나 거절이 아닌 아예 보지 않는 것. 자신의 고려나 생각의 대상으로 떠오르지 않게 되는 것. 사실 이것이 가장 나를 힘들게 하던 미국 생활의 일면임에도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다 이제 고국에 돌아와서야 그 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사회의 고급 옷과 섹시함, 튀는 문화의 원인에는, 사실은 자신을 보아달라는 아우성이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나를 보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눈을 끌고 싶은 욕구. 더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수록 더 나를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하는 사람들만이 늘어감에야 이런 일들을 이해해 줄 수 없으랴..

친절이란 사실 상대를 인간으로, [보이는] 인간으로 여기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못 보는 이유에는 또 한편으로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피부색이 그러하듯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거부감. 다양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에 더욱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상대를 좀비로 혹은 꼴통이라는 인간성이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 우리 사회는 서로의 얼굴을 기억치 않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는것일까. 나는 의견을 가지며, 있는 존재로 취급해 주기를 원하는 인간이다. 내가 오늘 스쳐갈 수많은 사람들도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기 사람 있거든요!] 그것이 지나간 촛불의 의미였을까. 어쨌든 이제부터 나는 볼 것이다. 모든 한사람 한사람을, 마음을 두어, 무표정하지 않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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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로 가는 길
앙드레 말로 지음, 김붕구 옮김 / 지식공작소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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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의 이후 작품 [인간의 조건]이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들을 보였다면 [왕도로 가는 길]은 프랑스인 혹은 작가 자신의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생각들을 피력한 소설이다.  

작가 혹은 주인공에게 [삶이란 무의미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된다. 첫째는 밀림과 곤충으로 대표되는 수동적이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연에 대한 도전이고, 둘째는 원주민으로 나타나는 적대적이나 인간의 힘과 지혜로 극복할 수 있는 타인에 의한 도전, 셋째는 적대적이며 파멸로 이끄나 저항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도전이다. 인간이라는 것이 인간의 주어진 조건에 의해 이미 결정나 버렸다면 인간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말로가 생각하는 인간의 조건이 이것이다. 인간은 불가항력적 조건에 의해 죽음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존재이다. 성공과 부, 명성 혹은 악명, 인간은 스러져갈 자기 존재에 대한 드리워진 그림자 아래 항상 살고 있으며 이것을 잊을 방법 혹은 이것을 비웃을 방법을 찾고자 한다.  

이 소설은 사실은 말로의 경험담이다. 말로 자신이 1923년 캄보디아 밀림에서 한 석상을 싣고나와 밀반출하려다 실패했었다. 이 석상,  테바다(여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라마야나]설화에는 타인에게로부터 강탈해서라도 빼앗아 자기것으로 삼으려 애쓰는 인간의 존재악인 라마나가 등장한다. 바로 [라마야나]는 이 라마나를 진멸하려 애쓰는 신의 화신 라마의 영웅담이다. 혹 서양인들이  이 짐승같은, 원숭이를 닮아 하찮게 여기는 동남아의 토인들의 눈에 사실 약탈자 말로의 일행이 라마나의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자연과 어울리고 동료인간과 어울리며, 또 죽음과도 어울려 살아온 그들에게 프랑스적 인간의 조건 아래 사는 말로 일행은 사실 악의 화신의 재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이 주는 혜택을 몰랐고 동료와의 약속의 신성함을 모르며 죽음의 그 자연스러움을 무시하는 이상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80여년이 지난 지금, 이미 동남아에도 질서와 선에 대한 확신, 인간과의 약속에 대한 신뢰, 평범함과 평화로움에 대한 동경은 이제 모두 밀림과 함께 사라져 없어졌다. 조화를 잊고 도전 혹은 약탈로 삶을 정의하는 우리는 결국 말로일행과 동화되고 말았다. 삶에 대한 환멸과 비정상에 대한 동질감, 또 이로 인한 우월감을 느끼는 우리들. 이런 것이 무언가 멋있는 듯하고 폼난다고 여기는... 바람에 불려가는 겨와 같은 삶... 나는 무엇 때문에 아침부터 성질을 부려가며 운전을 하고, 주위사람들을 누르고 일어서야 우월한 존재로 느끼며, 아이들을 조화보다는 우월을 위한 인간으로 개조시키며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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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와 인간
존 스타인벡 지음, 안의정 옮김 / 맑은소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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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친구를 하는 수 없이 짐승처럼 죽이게 했는가? 쓸모가 없고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늙은 양치기개를 죽이는 일처럼, 캘리의 아내를 얼떨결에 죽인 레니에게 조지가 할 수 밖에 없었던 일.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인간의 어떠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때론 자기의 이해를 넘어서 남을 돕고 싶어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때론 자기가 돌보던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이건 너무 당연한듯 일어나는 일이어서 도리어 무섭다. 과연 나는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던가? 나에 대한 허상. 나의 인내의 한계. 조지는 좋은 사람이다. 레니 같은 말썽거리 밖에는 안되는 사람을 위해 자기 형편을 제쳐두고 보살펴 주었으니까. 현명하고 책임감 강한 슬림은 인간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별 수 없다. 사람을 죽였다. 추행의 의심은 도망쳐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살인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죽이면 편안해질까? 그들은 화가 났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가. 왜 누구에게 화가 났나? 레니를 그리로 몰아넣은 상황들? 조지에게 다른 선택은 없을까? 또 다른 도망? 아니면 농장의 꿈이 컸을까? 인간의 삶살이다. 잊고 또 살아가야만 한다. 죄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삶살이의 고달픔이 죄라는 것을 잠깐 잊고 지나가자고 한다. 그거하나 희생시키면 모두가 편안할걸.

생쥐들과 인간들. 약하기 그지 없는 존재들. 조그만 압박에도 죽어버리는 존재. 살아가는 어려움에 영혼의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는 모습들. 이것은 정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대단한듯 무척이나 지고한 것을 향하는듯 하나 결국 그렇고 그런 존재인...스스로에게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존재인...그런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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