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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함과 행함 - 기독교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
자크 엘룰 지음, 양명수 옮김 / 솔로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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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o Will and To Do: An Ethical Research for Christians]라는 제목으로 1964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는 1990년 출판후 절판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1964년은 기술의 역사 (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영문으로 번역될 무렵으로, 이 책은 현대사회의 기술지배하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윤리의 올바른 접근에 대해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을 적용한 것이다.

엘룰은 먼저 윤리의 기원이 인간의 타락에 있음을 지적한다.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의 기준을 제시하는 순간 타락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제시하는 인간적 이성에 의한 선과 악의 구분은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윤리의 결과는 자기정당성의 주장과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이다. 에덴에서 그러했듯이... 더군다나 선과 악을 알기는 하나 스스로 그 기준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다.

선악의 기준인 윤리는 결국 타락의 질서이다. 계시가 아닌 인간규범내의 질서, 그리고 동시에 필연성의 질서이다. 필요한 것이 선이 된다. 선들은 새로 만들어지고 우선순위를 달리한다. 이것은 변화하는 가치에의 충성을 의미한다. 윤리란 항상 변하며 이것은 결국 불변하는 것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 두가지의 가치를 가진 자만이 이 충돌을 경험한다.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갈등이다. 인간의 윤리(그것이 그리스도교 윤리라 할지라도)와 하나님의 계시 사이의 충돌이다.

도덕은 그것이 특정 윤리이론에 근거를 둔 이론도덕이든(공자, 모세, 스토아, 아퀴나스, 칸트, 니체, 마르크스, 사르트르), 사회의 영향을 받은 체험적 도덕이든(그리스도교 사회, 공산주의 사회,부르조아 사회) 인간을 자기 뜻대로 자유롭거나 해방되게 하기보다 이론 자체나 사회의 틀속에 인간을 소외시킨다. 비도덕은 그렇다고 대안인가? 도덕의 탈피는 다른 도덕으로 인도하고, 결국 인간을 서로 자기정당화로 분리시키고 서로를 은폐시키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대표적으로 부르조와윤리로 시작된 기술윤리가 지배한다. 그 특징은 행위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과(의도나 동기는 중요치 않다), 그 기준이 정상(normal)이냐, 다수에 속하느냐에 있다. 또한  성공은 선이고 실패는 악이다. 이 시대는 [적응이 최대의 미덕]이며 덕은 노동과 훈련, 인내와 극기이다. 기술노동에 필요한 구조적 선이 윤리적 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엘룰의 논의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윤리란 불가능하다. 결정된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과 윤리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윤리는 필요하다고 한다. 신앙을 상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이럴 때 윤리는 권고이어야 한다. 최소한의 요구이다. 또한 판단을 내세우지 않는 선한 행동이다. 윤리는 하나님의 뜻과 세상윤리 사이의 대립을 보여주는 사람들 속에 나타남이다. 아무 자격이 없지만, 그리스도로 이 땅에 남겨진 사람은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을 위해 살아야하고 말해야하고 구부려야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과 악의 기준 속에 살고 있다. 좌와 우, 노와 소, 빈과 부, 민족, 출신, 학식, 교양, 예의, 종교, 유대인인가, 흑인인가, 아랍인인가 수많은 철조망들이 바리새인과 같은 엄격한 이론으로 무장한 우리안에 살벌한  경계선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하게 하려고, 서로 섬기게 하려고, 도와주게 하려고, 대접하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신 이는 "네 눈의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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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도가 되라
디트리히 본회퍼 / 보이스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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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1일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독)-제자도의 댓가(영)-진정한 사도가 되라(한)]를 다 읽은 날이다. 그의 글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의 내용의 핵심에 가 닿아 있으며 기독교의 본질로서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우리 인생의 의미와 성경 전체 맥락에서의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의 진면모를 분명하게 밝혀 준다.   
 

값싼 기독교와 물질에 대한 굴복이든 사상에 대한 굴복이든  세상과 닮아버린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주며 본질이 사상이나 교리가 아닌 그 분임을 보인다. 이런 순종은 우리의 두려움 없는 삶, 져주는 삶, 거저주는 삶, 사랑하고 용서하며 고통을 인애하는 삶으로 이끈다. 이 일들을 할 능력이 우리에겐 없었다. 오직 기도로 그 풍성함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로 속하여지며 위로와 징계로 자라간다. 그리하여 그의 사심을 본받아 그 분의 모습으로 변하게 하심을 받을 것이다. 
 

자녀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나의 영향력 확대와 늙음에 대한 앞선 두려움이란 것이 얼마나 그리스도의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삶과 다른 주머니를 차고 사는 삶이었는지 깨닫는다. 세상의 번듯함. 물질의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에 대한 과대평가. 아이의 미래를 하나님의 눈이 아닌 사단의 꼬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살아온 실수들.  


 나의 경건의 추구조차 나의 자랑과 영적 성장 프로그램처럼 여기는 자세들. 거짓과 죄들을 숨기고 거룩한 모습만을 드러내려는 노력들. 여전히 나는 죄의 습관의 백성이었구나. 본회퍼의 권유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눈을 부릅뜸이다. 깨어 쉬지말고 기도하라. 

P.S 1937년에 나온 이 책에 대한 우리의 번역본은 지극히 빈약하다. 과연 이유가 뭘까 궁금하다.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더 나은 번역으로 널리 읽혀져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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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그리스도와 문화
라처드 니이버 / 대한기독교서회 / 195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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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니버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관통하는 두 핵심가치를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빛을 던져주고 있다.

정확히 급소를 다루는 통찰력으로 그는 문화 배척론의 반이성성과 계시에 내재한 이성성의 거부를 지적하며, 반대로 문화적 기독교가 계시에 대해 이성이 우월함을 주장한다는 핵심적 오류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이 두 견해를 극복코자한 종합주의라는 것도 결국 형성 당시의 문화적 기독교에 고착되는 문화적 보수주의의 고질을, 이 충돌을 긴장의 지속으로 받아들이는 이원론적 입장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집착함으로 인해 격리적 경향을 가짐을 지적한다. 니버는 종결적 균형으로서의 모리스적 개변주의가 현재의 상황에서 유형적 발전의 최종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그의 견해를 드러낸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다섯가지 유형적 구분에 의한 접근은 수많은 스펙트럼의 종교적 문화에 대한 인식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한눈에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견해가 들어오는 통찰력을 제공하는 저자의 설명하는 힘과 각 견해에 대한 균형이 돋보이는 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현재 입장의 종합적 견해인 개변주의가 독자들에게 그다지 설득력을 갖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약점에는 모리스적 견해의 극단성도 한몫 하겠지만 니버의 구분으로 볼때, 이제 이 책이 나오고 50년이 지난 지금 개변주의 또한 문화적 기독교의 한 견해로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니버의 구분을 따르자면 우리는 여전히 종합주의와 이원론적 입장의 중간에 서 있다. 종합주의에 가까운 견해로 살아갈 때 우리는 헌신과 구별을 꿈꾸며, 이원론적 견해에 가까이 가 있을 때에는 도리어 자유와 창조적 정신을 그리워하게 된다. 해답은 없으며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것이 결국 그리스도와 문화의 결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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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문제 (보급판 문고본) C. S. 루이스 보급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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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이 책은 그의 나이 42세인 1940년 쓰여졌다. 이 책에서 그는 흔히 신적 존재에 대한 부정의 근거로 거론되는 고통의 문제를 들어 그리스도교 전체의 윤곽과 그 참됨을 설명하고 있다.
 
루이스는 철학적으로 인간의 자유라는 전제가 내포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의 가능성과 인간 자신의  약함에서 비롯된 악과 이로 인한 고통의 가중,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의 전제가 그렇듯 이것을 바꾸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함이 고통의 문제에 관계되어 있음을 겸손히 보여준다.
 
뜨거운 불에 가까이 가면 통증을 일으켜 피하게 하듯이 고통은 우리의 원래 모습이 아닌 악을 발견케 한다. 인간의 원래 상태는 현재의 동물적 상태가 아닌 하나님과 닮아가는 존재인데, 인간은 하나님을 따르길 원치 않는다.  인간의 고통은 자기의 반역의지가 노출되는 것이며, 자기악에 대한 인지이기도 하다.  인간은 악을 자신이 당하여 고통이 될때까지 그것이 악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내가 남에게 끼칠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행동이나 말도 그것을 비로소 본인이 당할때는 지독한 큰 해악임을 얼마나 자주 느끼는가? 
 
고통은 우리가 아무일 없다고 만족하는 삶을 깨우고 하나님을 의지케 한다.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한 행할 마음을 먹지 않는 옳은 행위는 바로 자기 양도인데  때로 두려움과 연민만이 이런 순종과 자비를 가능케 한다.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건강하고 성숙하게 한다.  고난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자의적 고행은 때로 철저한 반역의 의지적 표징이기도 하다. 우리의 할일은 고통을 없애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고통을 없애려 한다고 해도 고통은 우리 힘으로 완전히 그치지 않을 것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이 지독한 고통스런 갈망은 궁극적 결핍에서 온다. 채움은 자기를 비워 양도함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심으로 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비워지고 또 우리의 모양으로 채워지면 각 개인은 각자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다른 모든 영혼에게 내어주는 일을 할 것이다. 고통이 우리를 이끄는 곳은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연합, 끊임없는 자기를 드림이며 더욱 드림이다.  지옥은 그래서 동물을 벗어나지 못한 [전에 인간의 영혼이었던] 상태이며   어쩌면 지옥은 영혼이 선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자기포기를 원치 않는 자들이 최후까지 반역에 성공한 곳인지 모른다.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는 말처럼...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은 모두 비워 그 분이 채우실때 채우신 것을 또 나누길 원할때이다. 진정한 하나님과의 맞닿음, 어우러짐의  완성이 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선이며 사랑이다. 그 때야 비로소 파생된 우리는 우주의 심연이신 그 분 앞에 질문을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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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1 0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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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빅터 플랭클의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담은 1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주의로]와 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 3부 [무의식적 신]을 묶었다.

빅터 플랭클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첫날, 고참죄수에게 그가 품에 갖고 온 정신치료 논문을 소각치 않도록 부탁한다. 이 원고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인생의 의미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논문과 인간적 대우 모두를 그 순간부터 빼앗기고 벌거벗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남기 위한 3년을 보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깨달은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이 박탈된 순간 찾아온 [참다운 인간됨]이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 상대를 존재로 사랑하는 것, 우정, 예술, 웃음... 이 모든 것이, 어느 순간 삶의 끈을 놓으면 죽어야 하는 그곳에서 생생하게 살아난 것이다.  재산, 명예, 학문적, 예술적 성취, 자손... 사람들은 이런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고 살다가 이것을 잃으면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아니면 죽을때 잘못 살았다 깨닫기도 한다. 플랭클은 진정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진 후에 그 너머에 진정한 인간성의 모습이 존재함을 수용소의 뼈만 남은 모습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런 [현상]에 놀라와하고, 살아남게 되자 이를 통해 실존적 인간이해와 그 개념을 정신치료에 적용코자 했다. 인간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포함한 삶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자기 발견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자기것으로 여기게 한다. 자기거부와 무의미성에 대한 허탈감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적 정신병리에서 이는 치료의 단초가 된다. 도피와 연관된 신경증들과 자기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기력한 우울은 [고통이 의미가 있는 인생]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와 아울러 책임을 포함하는 인간의 실존의 회복이다. 또한 실존주의 철학과 정신병리학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우연에 따라 결정되는 생존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도리어 신의 존재를 발견케 된다. 이것을 그는 3부에서  영적 무의식spiritual unconsciousness에 새겨진 신의 존재, 혹은 무의식적 신이라 부른다.그리고 이런 신의 존재를 인정함을 통해서야만 진정 자기 삶의 책임과 의미를 발견하는 무의식으로의 여행이 자기 파괴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신분석적psychoanalytic 무의식의 탐구가 인간을 어린 시절 성적경험으로 [결정지워진 존재]로 보는 대신, 이러한 이드id의 무의식이 아닌, 인간 안에 존재하는 초월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영혼의 무의식은, 인간을 [선한 의미를 따르고자하는, 책임감이 가능한 존재]임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무신론으로 억압된 무의식을 풀어낼때 인간의 영혼의 의미들과 각 개인들의 상황에 부여된 의미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때 다시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게 빛나는 것, 가치있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앞을 스쳐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본 것은 인생의 진실한 모습이다. 죽으면 끝이구나, 언제든 죽을 수 있구나, 이렇게 살게 아니구나...죽음이 알려주는 가르침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이론적 논변보다 더 심오하다. 참된 심오함은 인생자체에서 나온다. 죽음을 느끼는 것은 인생이 의미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이론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플랭클은 죽음의 앞에서 인간을 찾았고, 정신병리의 해결이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신을 가지고 있으며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향해 대답하는데 있으며, 여기에 또한 인생의 목적이 있음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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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6-04-12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갑하기 그지없는 이 지적 세계에서) 숨통이 트이는 리뷰, 매번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카를 2006-04-13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후님의 리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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