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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용기 도모생애교육신서 11
폴 틸리히 지음, 차성구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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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가 1952년 쓴 이 책은 그의 사상의 맥락을 잘 보여주면서도 대중에게 접근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작이다.

 

그가 설명하는 실존주의적 존재 이해에 기반한 자신의 실존을 뛰어넘는 진정한 용기는 우리의 죄됨과 파멸의 운명을 극복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죄의 용서를 인정하는 용기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얻는 경험으로서 이루어진다. 거룩한 분과 교제할 수 있게 된 존재는 자신이 받아들여졌음을 인정한다. 파멸의 존재로서의 운명이 극복되었음은 자신의 불멸성 획득이 아닌 불멸의 존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긍정이다. 인격적 만남에 들어간 자는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것을 알므로 그 생명의 영원성을 눈치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믿어드리거나 획득한 것이 아니라 믿음은 존재자체의 힘에 사로잡힌 존재의 상태라고 말한다.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 자이다.  존재의 힘에 사로잡힌 자는 존재 자체의 힘이 자신을 긍정함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런 믿음이 존재의 용기의 바탕이 된다.현실적으로 만나는 절망 속에서도 용납하는 힘을 경험하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신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닌 이미 붙잡힌 자로서 그 분을 알아가는 관계가 된다. 이런 이해는 보편성에 기초한 유신론적 객관화나 인격주의로 이해되는 손에 잡히는 신을 거부한다. 그의 이러한 설명은 구원론 이해의 여러 일탈들을 피해갈 수 있는 근거와 구원 이후의 삶의 올바른 기초를 제공한다. 자기를 긍정할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 것은 우리 구원의 확실한 근거가 되며 구원 이후의 삶의 실패에 대한 자기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용기는 구원 이후의 십자가를 지는 삶에도 적용되는 용기인가? 용기가 이렇게 주어지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이라면 분명 따라 죽으러 가겠다던 제자들이나 자기는 부인하지 않으리라던 베드로의 용기와는 다를 것이다. 그 분이 용납하신 자는 용납하신 자를 알고 그 분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의 용기에 그치면 사랑 안에 거하는 용기는 알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업다이크의 래빗에게서 느꼈던 그 이질적 구원의 느낌이었나보다. 젖먹는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야 하는데 아직은 이 모양 이대로 몇년을 또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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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 세계기독교고전 14
우골리노 지음, 박명곤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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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무신정권 아래 고려시대무렵인 13세기 초, 교황청의 권력은 십자군 원정을 일으키던 무렵 한 청년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고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가 문자적으로 고치려던 교회의 본뜻은 교회의 원래 모습인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 뜻대로 사는 삶이었다. 이 청년 프란체스코에 의해 시작된 작은 형제들의 모임은 그 위대한 정신과 기적들로 점차 이탈리아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 수도회 운동의 출발이 된다. 

 

하지만, 아시시의 토지와 교황의 인정을 받는 기구로의 탈바꿈은 수도회 내부의 분열과 자리다툼을 만들고, 나름 더 성결하고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파벌의 분리도 일으킨다. 이 신성주의자의 관점에서우골리노가 프란체스코 사후 백년 정도에 저술한 행적이 [작은 꽃들]의 기초자료가 된다. 기존 전기보다 기적과 영적 활동, 청렴과 기존세력 비판에 더 비중을 둔 이 작품은 도리어 신앙의 핵심을 인간과 조직보다는 신적 동기와 은혜, 전적인 수납과 겸손에 뿌리를 두어 이후 수도원의 정신과 종교개혁 운동에도 영향을 준다.

 

반대하지만 상대를 낫게 여겨 교회에 남으며, 복음을 설명하지만 상대의 비판 앞에 무릎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 그것은 그 자신이 온전한 사랑의 은혜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면 어찌 가능할까? 권력과 성취의 신앙운동 한 가운데서 인격과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나는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결심은 내주하시는 영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진정한 신앙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으로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누린다. 그래서, 명예와 부유, 넉넉함과 안정을 버린 이들만이 이제도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한 본보기도 남아있을 수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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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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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토끼연작의 첫 작품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1971년 [돌아온 토끼] 1980년 [토끼는부자다] 1990년[토끼 잠들다] 1995년 [사랑의 수고] 중 [기억 속의 토끼]로 이어지는 그의 토끼 시리즈는 작가 자신의 연령과 함께 나이들어가는 래빗 앵스트롬(불안한 토끼)을 추적해간다.

 이 작품의 사상적 배경으로 작가는 키에르케고르와 바르트를 지목한다. 그가 당시 이 소설에 적용한 기독교적실존주의적 구원 이해는 그로 하여금 기꺼이 인간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드러낼 용기를 주었다고 말한다. 노골적 성묘사에 드러나는 그의 [존재의 용기]가 그가 이런 인물, 혐오스런 그러나 구원받는 인물을그려냈다고 말한다. 그 이후 업다이크는 바르트에서 그의 사상을 틸리히로 옮겨간다. 이 책 속에서도 사실 루터교적 배경의 틸리히가 연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업다이크의 믿음은 인간이 죄인이며 그래서 애시당초 인간에게 희망이라고는 없다는 것이다. 여유로와지고 살만해진 인간은 더욱 가관이 되었다. 미국적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은 회심 혹은 열려있는 세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궁극적 관심]이다. 내세에 대해 열려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존재에게 변화란 꼭 일어나지 않더라도 희망은 있다. 인간의 구제 불가능성 위에 내리는 이해할 수 없는 용서와 은혜.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버티는 것. 그것이 혐오할만한 래빗을 통해  자신있게 내보이는 신학적 인간이해이다.

그는 우리 자신이다. 뼈속까지 무책임하고 더러우며 속이고 부끄로워하지 않고 변명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는 호손처럼 잘 보여주고 바르트처럼 당연히 여긴다. 똑같은 나에게도 그와 같은 구제불능적 어두움이 있다는걸 깨닫게 하는 찢어짐이 이 책에는 있다.  

 혹 이것은 은혜의 구원에 대한 조롱인가 싶을 정도이다. 부시 부자가 아버지때와 아들때 모두 예술,인문훈장을 준 사실까지 합치면 정말 약간 코믹한 느낌이 들 정도다. 구원은 과연 그런 것인가? 비록 애초에 인간에게 희망이 없고 변하지 않아도 그래도 그 구원은 유효한 것인가? 이런 믿음은 과연 성경적인가? 이것이 이 책의 독후감으로서 올바른 질문이 되겠다. 혹 본회퍼가 말하는 싸구려 복음은 아닌가? 우리는 이 바르트적 절대 은혜 위에 섹스의 죄됨의표상을 보는가? 아니면 그 용납을 보는가? [사랑의 수고]는 아마도 그 해답이 될듯하다. 결국 하나님께서 뒷처리를 담당하신다는...결국 이 모두는 실존적 이해 위에 선 미국적 복음 오해는 아닌가? 아니면 내가 아직도 죄인으로서의 단독자로 서지 못한 까닭에 포기하지 못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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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 - 개혁 신학의 젊은 기수 마이클 호튼 시리즈 3
마이클 호튼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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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십계명을 순서대로 따라가며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으면서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며 살고 있는지를 고발한다. 십계명에 나타난 간음, 탐욕, 살인, 도적질, 하나님의 자의적 숭배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드러나건 숨겨지건 비일비재함을 지적한다. 자본주의하의 현대 기독교에 이르러서는 이런 기준에 편승하여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써 심리적 사회적 목적의 종교생활을 하고, 죄는 이미 해결된 문제로 치부하여 죄를 알지 못하는자와 방불한 삶을 살고 있다는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를 죄인으로 인식하게 하며 그로 인해 은혜를 필요로 하게 하신다. 죄를 인식하는 것은 칭의에만 필요한 것이 아닌 우리를 궁극적으로 부르시는 성화의 과정에서도 우리가 어떤 존재로 거룩하게 만들어지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얼마나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지를 깨닫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타나 있는 십계명은 우리로 우리의 죄인됨을 알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해 감에 있어 믿음의 역할을 오해하여 자의적 노력에 힘을 쏟고 그 실패에 의아해하며 다른 붙들거리를 찾고자 했었다. 이제 완성됨을 여기서는 보지 못할, 그러나 은혜로 완성될 것을 믿으며 그의 자녀로 죄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죄악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나의 모습과 사람들의 군상을 보며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마음을 알아가게 된다. 

불쑥불쑥 솟는 악의와 복수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녀되었음의 큰 축복 아래 있음을 알게 된다. 용서함 받음을 아는 것은 우리가 용서하는 자가 되는 이유이며, 거룩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이유가 되고, 사랑받는 존재임을 아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죄인임을 아는 것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부름에 동행하기를 권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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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이룰 그 자손 예수 - 마태복음강해 1
박영선 지음 / 세움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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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목사님은 [구원, 그 이후], [하나님의 열심] 등의 책으로 한국 기독교에서 구원의 이해와 기독교인 삶의 포괄성을 보여준 분이다. 남포교회 설교의 내용을 책으로 정리한 [마태복음 강해] 은 요한복음 강해, 에베소서 강해와 함께 박영선 목사님 설교의 흐름과 중심내용을 보여준다.  

인간의 희망이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메시야에 있음에서 마태복음은 출발한다. 유대인들이 공유하던 이 생각. 하지만 유대인의 기대와는 달리 왜 예수는 죽임을 당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지를 마태는 그의 글의 서두에서 구약의 예언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인간자신은 어쩔 수 없는 죄악을 고쳐 그 백성을 만드시는 일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인간으로서는 손하나 꼼짝할 수 없는 불가능한 숙제이다. 자신내면의 구제불능함을 그리고 구원자의 필요성을  모른다면 우리는 구원을 위해 불가능한 경주를 계속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이 죄악을 우리가 어떻게 해 보려하는 시대를 산다. 지금 불만스런 것들은 늘 해결방법이 있을 것이라 여긴다.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속속들이 가난하고 죽음을 향해 곧바로 달려들어가는지 알지 못하고, 하루를 일희일비하며 사는 작은 우상들이며 작은 왕들이다. 마태는 예수의 오심으로 어떻게 우리가 이미 자녀가 되었으며,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자기 폭군으로 멸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경에 나타난 그 뜻을 따르고, 그분께만 채움받고 사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보인다. 자기 혼자 만인에 대한 투쟁을 치르는 애처러운 존재가 아닌 하나님을 부모로 모신 삶이다.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복을 얻어내는 우상으로서의 신이 된다면,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이웃을 사랑하게 하지 않고 천국가는 통행증이고 만다면 이것이야말로 마태가 지적하려하던 유대인들의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임을 이 책은 명확히 드러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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