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신옥희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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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인간은 자신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무얼 위해 그래야 하는지 물을 때 종교가 필요하다. 칸트는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이 책에서 계시에 나타난 가르침이 인간 본성안에 있는 이성적 판단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찾고자 했다.

 

그는 계시가 제시하는 악의 존재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앞뒤를 바꾸어 놓는 고의성에서 먼저 발견한다.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생명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리고 신의 성품을 가진 이가 오셔 보인 실천만이 이것을 보고 따를 수 있는 근거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실천이란 사랑이며 방법은 공동체이다. 하지만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이런 계시와 이에 따른 이성의 반응을 왜곡하여 인간에 봉사하고 엉뚱한 의식에 스스로 만족하는 종교를 만들고 말았다. 


칸트는 대안으로서 이성으로 파악되는 범위에 머무르길 제안한다. 더 나아가 계시된 교리(계시신앙)가 자연종교(이성신앙)를 최고명령 원리로 삼도록 해야한다고까지 나아간다. 선하게 만들기 위한 계시의 내용과 이성의 판단이 일치한다면 안전하게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파행으로 치달은 종교의 곁길을 교정할 방법은 이성의 깊은 반추로 교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기적이나 비밀, 은총의 수단인 제사란 망상신앙이며 일체의 종교적이라고 하는 비이성적 행위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이 종교를 교정할 수 잇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럽의 정치적 상황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카톨릭의 이교적 성향과 개신교의 자기의적 충돌은 칸트로 하여금 종교적 종교인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기독교 체계에 대한 기획을 의도케 했다.이 의도의 근저에 있는 것은 최종적인 권위를 인간으로부터 박탈하기 위한 보편이성에의 의지 곧 계몽이었다. 결국 이성에 기초한 종교일 때 비로소 유럽의 평화는 가능할거라는 것이다. 그 기획의 과정에서 그는 계시를 넘어 너무 멀리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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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한길그레이트북스 58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지음, 이기숙 옮김 / 한길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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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19세기 독일의 사학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문화, 예술, 종교의 모습을 제시하여 그것에 나타난 근대성의 뿌리를 밝히고 있다. 경제적 안정 위에 고대 로마 문화를 모델로 각 개인의 자존심이 성장한 것이 이 시기를 그 전 중세와 이후 서양근대를 구획짓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자아확장에 대한 열망과 윤리적 제약을 벗은 인간의 모습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사치와 쾌락에 대한 세련된 경쟁을 시작하게 한다. 

 

아름다움과 멋에 대한 현대적 가치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실용이 아닌 패션적 관점의 옷과 집, 매너와 말솜씨. 인간은 각 개인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인생에 집중할 때 이러한 부분들을 발전시켜 가는 존재인것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전하다 전쟁으로 밖에는 그 재정적 소모를 지탱할 수 없어 붕괴할 수 밖에 없었던 이런 경향이 경제적 부의 산출과 무역과 자본의 축적이라는 전쟁 이외의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지탱할 수 있게 되면서 또 다시 비약적 발전의 계기를 갖는다.

 

르네상스의 의미는 이런 자본과 인간 본래의 성향이 결합된 문화의 형태가 이 시기 이후 지금까지 왕정과 근대 식민국가, 현대 기업국가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그치지 않고 이어져 세계로 파급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적 미술 음악 무용 조각에 대한 이해와 그것에 주어지는 예술적 경제적 사회지위적 가치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며 기틀을 마련했다. 요리의 세련됨, 축제의 계급압력의 카타르시스, 국가지원 사업, 공동체 만들기, 국가간의 경쟁과 광기들이 이 시기에 이르러 그 모양이 세련되고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는 각 개인이 갖는 특성들이 천재적으로 표출될 기회가 주어진 이 시대의 분위기 때문이다.시대는 천재를 필요로 하고 천재는 시대 안에서만 꽃피울 수 있었다. 그들은 거친것을 아름다움으로 제련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의 여성의 자아가치가 성장하는 것은 국가의 경제적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각 개인이 중요하고 가정에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여성의 지위는 상승하며 여성의 지위가 보장된 곳에서만 지속적 경제 발전의 모티브인 안락과 아름다움과 세련됨에 대한 수요는 지속된다. 여성적 가치의 증가는 자본주의의 유지와 확장에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적 문화의 등장이란 힘이 아닌 비폭력적 비남성적 인간 가치의 등장이다. 법과 경제 규범과 자본 증식과 유행과 사회적 수준이란 그래서 여성적 성격을 갖는 가치들이며 그 여성이란 사회적으로 용인된 힘을 갖는 여성성을 의미한다. 안정된 체계는 스스로 내분을 일으켜 내부폭력에 희생되지 않고, 또 다시 로마를 멸망시켰던 외부 야만족의 폭력으로부터도 보호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여성적 힘이란 정치력이며 외교력이다.

 

이 체계 아래에선 종교는 더 이상 그 원래의 가치를 갖지 못하는 자리에 선다. 즐거운 인생, 멋있는 사교에서 종교는 대중 권력 획득의 수단이나 생계를 위한 도구가 되어간다. 잘 살게 되고 좋은 지위가 주어지며 유쾌한 사람들이 떠들석하게 하지만 난잡하지 않게 놀아준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친구들과의 관심과 오락에 더 마음이 가는 존재다. 명분이 필요한 종교 밖에는 남지 않는다. 종교자체를 위한 포교와 명분을 위한 세 늘리기. 아니면, 되도 않는 자기 신격화이다. 고행적 분리적 종교를 통해 남과 다름을 종교 안에서 찾으려는 노력으로 다른 옷 다른 집, 다른 문화를 가지려 한다. 우리 신앙의 타락이 벌어지는 자리. 종교가 직업이 되거나 나의 포장을 위한 틀로만 극단적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기치는 이런 부분들을 다소나마 극복하려 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르네상스적 기치 위에 선 현대 문화 앞에 또 다시 똑같은 반응들을 보인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한계 내의 종교도 낯 부끄럽지만 이런 초월적 종교로의 도피도 창피한 일이다.

 

인간이 각 개인으로 존중받을 가치를 갖는 것을 그 외양이나 치장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그런 토대 위에 자신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종교란 삶의 전반과는 분리된 세련된 사교활동, 봉사활동이 아니면 극단적 자기 희생 행위나 외양적 분리 행위로 밖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르네상스적 가치가 아닌 인간 본래의 아름다움, 장식하지 않아도 되는 깊은 아름다움을 각 개인 안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타인에게서도 찾으려하는 방법은 어쩌면 꽤 큰 반란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것. 너무 힘든 반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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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32
데이비드 흄 지음, 이태하 옮김 / 나남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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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신에 대해 갖는 이해는 역사 이래 반복되고 유사하다. 신적 존재를 느껴 알므로 그것을 설명해 내려하고 그 설명의 틀 안에서 주어진 규칙, 도덕률, 계시를 인용하게 된다. 이 틀 안에서 이해된 신은 인간을 제한하고 규범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시킨다. 인간으로서의 특장점이 아닌 다른 차별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성론적 신이해는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한 깨어지지 않고 유지된다.

 

또 다른 선택은 인간의 이성의 관여를 전혀 허락치 않는 규칙, 도덕률, 계시 중심성이다. 기존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포기하고 주어진 것에 부착하여 삶을 설명해 내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양한 삶의 경험과 의문들에 대해 침묵할 수 밖에 없으며 스스로도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함에 불만스러워 한다. 계시를 중심 삼는다고는 하나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주어진 내용에 집중하므로 현재 자신과 연관된 신과는 별 연관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의론은 그래서 이 모든 문제를 의심한다. 규정이 갖는 원래 의미, 전승의 타당성, 이성의 순수성, 논리의 궁극적 타당성의 의심 위에서 아무런 결정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흄의 입장이기도 한 회의론은 고통은 이유를 갖다 붙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의 귀결은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동물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간다. 우리가 데카르트에서 시작한 과학의 시대에 얻은 자연스런 귀결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머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이다. 우리라는 존재는 알을 깨뜨리지 않으면  우리의 이해의 범주 안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유신론적 신이든 전승적 신이든 회의적 불가지론이든 우리가 스스로 자라 알이 깨어져 이런 이해를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 같다. 아예 우리는 알에서 나올 생명이 없는 무정란적 존재인지 모른다. 알은 외부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아야만 깨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틀로도 설명 되지 않는 신을 만날때. 그래서 흄의 필로는 고난 당하며 논리적으로 헤매이며 하나님을 찾던 욥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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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2
스탕달 지음, 김붕구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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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을 겪은 프랑스의 각 계급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믿지 않는다는 면에서 지금의 우리를 닮았다. 서민계급의 포병장교가 황제가 될 수 있다면 누구나 평등하며 권력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몇대를 걸쳐 일하던 하인들도 주인을 비웃고, 주인들은 하인들이 어느날 자신들을 살해할까 두려워하고 가족처럼 여기지 않고 잔인해진다.  주인공 줄리앙은 사랑하는 부인을 비웃고 마틸다를 비웃어 주려 애쓴다. 사실은 그들이 누리는 여유 자유 사치를 부러워하여 비웃음으로 자신을 유지하려하기 때문이다.  

 

줄리앙에게 신분의 계단을 올라가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은 독선이다. 나는 너희보다 도덕적으로 계급적으로 지성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어차피 딴 놈들도 다 나보다 못하거나 마찬가지인 것들뿐이니, 내가 기준이고 남은 다 틀렸다고 생각한다. 19세기초의 프랑스는 서로를 무시하는 시대이다. 21세기초의 우리는?  정치하는 자도 종교인도 군인도 다 똑같은 권력지향적이며 물질적 안락과 사치와 설레임을 원하는 존재들 뿐이라면, 때로 이건 아닌데 싶어도 주위를 둘러보면 이 상태는 [정상]이다. 독선은 내 책임이 아니고 남이 나쁘기 때문이 된다.

 
남녀간의사랑은 이 계급 극복의 시대의 구원이 된다고 스탕달은 주장하고 싶은가? 계급의 격차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다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랑은 줄리앙의 발돋움의 덫이 된다. 스탕달은 자기자신의 분신인 줄리앙을 파멸시킨다. 부러워하면 지는거라면 이미 출발부터 지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다도대상과 같은 목표를 가졌다면, 기득층의 인간을 경멸하면서도 그 계단을 오르려 애쓰고 있다면 그는 패배의 게임을, 논리적 자충수의 연산을 시작한 사람이다. 가장 소중해야 할 것들이 경쟁과 승리, 비교와 열등감 앞에선 도구가 되었을 때, 그것은 결국 그를 파멸시키는 절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소설은 [그 시대를 비춰주는 달리는 거울]일지 모른다. 계급의 상승, 힘의 획득이 더 가치있는 것들을 말살하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던 소설이 있는 것처럼 우리 시대에도 미움과 욕설 억울함과 두려움이 무엇을 죽이고 있는지를 보이는 거울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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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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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바시는 그의 최근 책 [버스트]에서 혁명 혹은 어떤 폭발적 사건은 답보되어 오던 어떤 느릿한 흐름의 갑작스런 행보라고 설명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행동의 배후에 존재하는 이러한 버스트는 때로 우리로 그 사건의 전후 맥락을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 이유는 똑같은 화합물을 섞었을때 한동안이나 발생치 않던 일들이 갑자기 어떤 상황에서는 폭발을 일으키는 주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혁명을 앞둔 18세기 중반, 프랑스는 여느 유럽 국가와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던 다른 국가들과 거의 같은 요소들을 갖춘 초강대국이었다. 이러한 국가발전과 맞물려 여러 문화의 진보와 각종 고급 사치 풍조가 왕궁을 중심으로 앙시앵레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한편에는 이러한 발전의 혜택에서 한걸음 뒤에 물러나 비판적 시각으로 이런 추이를 지켜보던 철학자들과 문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백과전서를 편찬하던 디드로와 달랑베르, 그리고 볼테르와 루소다.

루소는 1753년 디종 아카데미의 질문인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이 책을 썼다. 그는  불평등은 본태적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먼저 타고난 것과 인위적인 것의 구분에서 시작한다. 타고난 인간의 원리로 그가 제시한 것은 두 가지, 안락을 포함한 자기보존의 욕구와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이다. 하지만 본태적 자기보존과 타인의 아픔을 피하고픈 욕구의 조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을 개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달은 인간은 자기보존과 타인보존의 조화에서 자기 보존만을 위한 존재로 바뀌어간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고 그런 자신이 더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감정을 만족시키려는, 속이는 욕구에 좌우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이성에 의한 추론화 과정은 연민을 눈에 보이고 느끼는 것이 아닌 관념으로 만들어 약화시키고 이기심을 합리화한다. 

자기 욕구를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할때 평등은 사라지고 私有가 도입되고 타인의 노동이 필요해 진다. 야금술과 농업의 발전으로 토지는 사유재산이 되고 이 사유재산을 보호코자 사회 법률이 교묘히 만들어지고 국가라는 형태로 강제화된다. 자연적 자유는 포기되고 소유와 불평등은 고착화 된다. 소유의 발생과 소유의 보호, 그리고 불평등의 심화는 사실 피지배층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또 다른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을 남에게 굴종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 실패의 한 동인이었다, 자유만을 원하는 자에게는 강요할 수 없었던 상황이 이제는 일상이 된 이유는 인간이 자유를 팔아 지배를 산 때문이다. 

루소의 해결책은 원래 자연의 미개인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의 교육철학처럼 스파르타를 닮은 자연교육은 실현되어야 겠지만, 현재 프랑스를 뒤덮은 전제군주의 타도는 힘으로만 가능했다. 이것은 자연에 거스른 체제에 대한 합법적 행위다.  힘으로 유지되는 권력은 힘으로 타도하는 것이 자연질서임을 넌즈시 그는 내비친다. 루소의 디종아카데미의 질의에 대한 답변은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인가?- 인간능력 발달과 정신진보에 따라 성장강화되어 소유권과 법률 제정에 따라 안정 합법화된다.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실정법의 도덕적 불평등은 신체적 불평등과 조화되지 못할때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분명 그 시대가 도출한 것이며 이후로 36년이 지난 후에야 혁명 안에서 현실화되었다. 그의 이 책은 그의 백과전서 동료들이 시도하던 때론 중요한 것 같고, 때론 의미없어 보이던 수많은 글들과 넋두리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폭발의 시간에 이것은 그 연료가 된다. 그들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폭발, 혹 없을지도 모르는 폭발의 연료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36년은 지루한 답보의 과정으로만 보였고 볼테르, 루소, 달랑베르, 디도로는 혁명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36년이라는 이런 답보의 과정들은 우리가 지금하는 모든 지지부진한 옳은 도전들,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시도들이 비록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또는 전혀 독창적이지 않아 보일지라도 그 방향이 올바르다면 때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것은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꿈과 옳음에 대한 믿음이다. 그들은 죽었으나 꿈은 남았으며 시대는 그들을 버렸어도 옳음은 그들의 편에 섰다. 이것은 계산대로만 돌아가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살만한 근사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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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7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래 본 사회과학 고전 리뷰 중 최고로 멋진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읽은 건데 감회가 새롭군요! 카를 님의 리뷰는 언제나 봐도 최고입니다~

근데, 이 책의 번역은 괜찮은가요?

카를 2010-08-1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비교적 곤란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번역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