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 범우 사르비아 총서 612
N. 호손 지음, 이장환 옮김 / 범우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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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기까지 이 책이 이토록 깊은 생각을 담고 있는 줄은 깨닫지 못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홍글씨를 단 헤스터와 딤머즈데일 목사 두 사람을 대비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죄는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저질러지고 또 주어졌다.

헤스터에게 죄는 너무나 명백하여 스스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뉴잉글랜드에 태어나 누구나 철이 들면 그녀 가슴에 새겨진 글씨의 뜻을 알았고 그녀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았다. 더욱 확실한 것은 헤스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처벌을 달게받고자 했음이다. 주홍글씨는 그녀에게 끊임없는 죄의식의 자각이며 또한 그래서 이 땅에 살아갈 이유이며, 절망인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자기가 되었고 이 단독자는 절대자와 독대할 가능성을 갖는다.

그 반대편, 이야기의 핵심에 딤머즈데일이 놓여있다. 그도 죄인이다. 하지만 그의 죄는 그에게 단독자의 죄로서 인식된 적은 없다. 그는 날이면 날마다 스스로를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죄인이라 말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면 신도들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듯 바라보며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존경을 보낸다. 그가 죄인이라 말하는 건 이를테면 교회의 교리로서 죄인이다. 이 때 죄인은 결코 단독자 혹은 개별자로서의 죄인은 아니다. 이 죄는 결코 헤스터에게처럼 죄인이길 요구하지도 쳐부숴 쓰러뜨리지도 않는다. 보편성 안에 있는 죄인이다. 죄는 보편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딤머즈데일은 슬그머니 그 옆으로 놓여난다. 그는 사실 이런 죄 안에서 절대안전한 셈이다. 고해든 주기도이든 사람들 앞에 보편죄인은 죄인이 아니다. 개별자로서 단독자로서의 죄와 그는 무관하다. 칠년의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그의 속 안에는 타들어가는 다른 죄의 자각이 있었다. 이 자각이야말로 그에게는 구원의 표지일 수 있다. 헤스터에게 밖으로 나타난 주홍글씨가 구원의 표지일 수 있듯이, 보편성의 허울 밑에 자라난 마음속의 주홍글씨는 그에게 죄를 똑바로 보도록 한다. 그 글씨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펄이야말로 그의 양심과 함께 그에게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이다.

복수의 악마적 화신 칠링워즈는 딤머즈데일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죄책감을 느낄데로 느끼게 해도 딤머즈데일은 결코 죄를 자기 것으로 삼지는 못하리라고...그런데 그만 그가 칠링워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버렸다. 자기의 죄를 자백한 것이다. 죄인이라 여겨짐을 진정 받아들여버린 것이다. [아깝다. 다 잡은 것을 놓쳐버렸다. ]  절망을 잡음으로 그의 희생물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 버렸다.

나도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아니다. 때로 사람들이 나의 허물을 이야기하거나 비난할 때 나는 억울하고 화가 날 뿐이다. 또한 명백한 죄 앞에서 나는 많은 변명의 둥지를 만들고 거기에 틀어 앉는다. 나는 나를 속이고, 꾸며진 나를 다른 사람들 앞에 보인다. 보편성의 죄에 너무나 익숙한 내 방식의 죄에 대한 수용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속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구원의 자격이 있는 듯이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백 수십년 된 미국소설이 내게 이렇게 부딪힐 줄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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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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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의 글은 당시의 독일이나 영국의 사상적 전통이나 사고와 구별되는 19세기 미국정신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그 자신이 교회에 나가길 거부하긴 했지만 그의 뿌리에는 미국의 건국이념과 올바른 신정국가에 대한 기본이념이 깔려있다. 시민정부에 대한 관점에서 루소와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루소는 로마에 미치지 못하는 프랑스의 엉뚱한 군주정치에 대안으로서 시민정부를 생각했다면, 소로우에게 시민정부의 잘못은 존엄한 피조물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의 허접함에 있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점에는 닮았으나, 로마적 모델이 아닌 성경적 모델에서 그 이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뉴잉글랜드의 숨쉬는 공기와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둘째, 개인주의적 정치관이다. 집단은 오로지 개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가치는 청교도 정치관의 전형이며 이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 미국적 침례교 전통의 핵심이기도 하다. 청교도에게 미국적 정치란 영국으로부터의 단절이며 또한 국가지배적 종교와 사회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개인의 존재는 오직 신 앞에만 의미가 있으며 국가,단체, 교회는 오직 이들의 모임체로만 존재할 뿐, 그들은 헤겔과 같은 살아있는 절대정신의 국가도, 지상의 유일한 그리스도의 대변자인 교권도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뿌리에서 소로우의 정치관은 신적 기준으로 현실의 정부에 냉엄한 판단을 가한다. 개인에게 의미없는 정부란 없는 것과 같다.

세째, 그래서 이런 높은 기준은 근본주의적 미국 행동의 뿌리를 이룬다. 옳다면 소수라도 끝까지 저항할 것이며 분리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다. 노예제도에 반대한다면 나라를 깨서라도 서로 결별하거나, 하나로 남으려면 결말은 전쟁이다. 남북전쟁... 끝은 결국 하나됨이다. 그들의 역사는 옳음이 정복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승리는 신적 명분을 보여줄 것이다.  그의 북부정신은 분명 전쟁을 불사했다. 그는 권력의 승리를 거두지 못해 존경받을 인물로 남았지만, 이런 정신이 권력의 승리를 거두었다면 혹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명분 없는 정부에 대한 불복종 운동과 명분을 갖는 전쟁에 주저하지 않음. 이 둘은 모두 미국정신의 양면이다.

네째, 삶의 실제적 강령으로서의 사변이다.  미국정신은 거대한 사고체계의 완성이 아닌 실제로 되느냐(Does it work?)의 입증에 있다. 소로우의 강점 또한 자신의 신념을 살아낸데 있다. 그는 말하지 않고 살아냈다. 그의 폐결핵 또한 걸어서 숲속을 헤매지 않았다면 걸리지 않았을 그의 삶살이의 결과임에 틀림없지만, 그에게 영향 받은 수많은 사람 또한 그의 이런 실제적 행동에 따른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은 [작은 듯 보여도 한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는 힘이 있고 분명 살아있는 진실로 남아있다.

당시의 유럽국가의 분위기와 사뭇다른 이런 뉴잉글랜드적 사고는 19세기초 신생 주변국 미국의 상황에선 존경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간디와 함선생님의 감탄도 이런 [정신적 힘의 우월에 대한 명확함]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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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 케고르 지음, 최석천 옮김 / 민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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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게 있어 문제의 실마리는 [형이상학의 한계]였다.  의미를 찾고자하는 인간의 갈 수 있는데까지를 가보는거다. 그것은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경계선의 표시이며 신앙의 시작점을 알려주는 푯말이기도 했다. 헤겔에게 있어서 화두는  [역사의 배후]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성의 자율적 발전과 이성한계의 돌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성은 절대기준과 원동력으로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제 인생은 허접하게 느끼든 거룩하게 느끼든 인간이 부여한 의미를 획득케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 모든 논의의 궁극적 실마리가 [고통]이라고 이야기한다. 무의미 속에 던져진 인간의 고통이다. 그는 의지에서 그 절대힘을 발견하며 헤겔처럼 그 힘을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자기 안에서 소멸시키기를 원한다. 의미를 요구하는 인생에 대해 인간의 자기정립을 통한 비웃음으로 무시하는거다. 의미는 소멸되고 인간은 자유로와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기 다시 [고통]을 실마리로 하는 한 사람이 있다. 1849년 그의 용어는 [절망]이다. 그는 이 절망을 차근차근 쪼개어가는 방법으로 파고들어간다. 절망하여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하는 경우이다.

가장 흔한 형태는 절망하여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성이 아닌 감성적인 것에 지배되는 보편적 인간은 비소크라테스적인 오류 안에(생각없이!) 살기를 즐겨한다. 신 앞에 자기를 개인적 정신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외관이 찬란하고 행복하고 선하게 살고  타인에게 헌신적이며 보편자를 인정하고 기독교회에 몸담고 있어도 무정신성 안에서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의 바쁨과 물질성, 기술문명과 과학주의의 자기 맹목성은 인간을 절망하지 못하게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쾌락에 마취시켜서라도 절망에 잠들게 한다. 절망이 그를 최후에 집어삼킬 때까지...그가 느끼지 못하는 절망을 산다.

절망을 느끼게 되면 인간은 자기이려하지 않는다. 젊은이는 [이따위로 계속 살진 않을꺼야!] 나이들면 [돌아갈래!] 나같은 30-40대는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무엇이든 지금의 자기이고자 하지 않는다. 고상하게 헨리 애덤스처럼 오직 웃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자아로 바꿔입길 원하기도 한다. 이런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은 지상적인 것 자체에 대한 절망으로 바뀐다. 세상은 다 쓸데없다...운운. 이것은 그래서 영원과 영혼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 고독만이 친구이며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자살]만이 출구인 듯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왜 죽냐? 나는 살고 나를 이렇게 만든 상황을 소멸시키리라(절망하여 자신이려 하는 경우). 이 때 자아는 무한한 자기확대적 과대망상을 필요로 한다. 대단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이 가상 속의 자아를 스스로 성취시키거나 스스로 세뇌하여 그렇다고 믿거나 어쨌든 나는 살아야 한다. 능동적일때 역사의 실험자이던 그는 수동적일때는 지상적 고뇌를 제거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 구걸하여 이 고뇌를 제거하느니 차라리 이것을 지닌 채로 자기자신으로 남겠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이렇게 조제한 자아는 현실 앞에 갑작스레 무의지, 무력 혹은 無가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자아를 반항의 존재로 본다. 고뇌는 받아들여도 구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쇼펜하우어가 느끼는 불안과 절망의 고통은 인간 안에 보편적 요소 혹은 구원의 기회로서의 축복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 삶이 치유받아야 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 혹은 절망을 통해 치유자에게로 나아갈 필요를 안다.  고통은 자기자신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점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닮았지만 그에게 절망은 구원의 신호탄인 셈이다. 그는 더 나아가 교회안에 숨어 이 절망을 맞닥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조차를 끄집어내어 드러낸다. 그리고 헤겔의 영향에 있던 구원가능성의 부정을 말하는 당시 새로운 신학의 정체까지를  말한다. 절망하나 구원을 거부하거나, 구원은 인정하나 개인으로서의 구원이 아닌 [집단이 담보한 자기들것으로의 구원]을 말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당시 유럽 기독교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이 아닌, 교회에 소속된 회원이 되는 것으로서의 절망에 대한 도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모든 요소는 사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며 일어나는 일들이다. 현실에의 매몰, 고통에의 절망, 자아의 과대망상, 싸구려 복음.  오직 기도하고 있을 때, 다만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있을 때만 나는 절망의 골짜기 속을 지나면서도 희망을 지닌다.  어떻게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만족하고 살 수 있을까? 신적 부조리를 믿을 수 없다면 그것 밖에는 선택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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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2005-04-06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시작은 켄가이어, 영혼의 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동일한 느낌을 가지고 읽었던 분이 계신가 보다, 하고 들어왔는데 키에르 케고르의 책도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였어요. 이번주에 키에르 케고르에 대해 열정을 가진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사실 조금 떨리기도 합니다.

오르세 미술관의 사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첫 인사 치고 너무 곳곳을 구경하고 갑니다.

새벽을 깨우기 위해 그만 자야겠습니다. 자주 들리게 될 것 같네요 ^^

카를 2005-04-06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요즘 저의 도전입니다. 얼마동안 게을렀었거든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쉽게 읽는 철학 5
수잔네 뫼부스 지음, 공병혜 옮김 / 이학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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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관심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있지 않다. 그의 질문은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고통으로 점철된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에 있다. 그에게 고통은 자아의 필연적 조건이다. 삶을 意志하는 한 고통은 따른다. 죽음의 길을 향한 이 처절한 여행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평안을 얻는 방법은 자아의 의지를 거부하는데 있다.

자뭇 힌두적 사고방식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힌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바가바트기타]에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난다. 아르주나의 존재론적 질문[크리슈나여, 도대체 삶이 무엇이길래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에 대한 대답으로 크리슈나는 환영에 현혹 되지 말고 신성을 좇아 아트만(참자아)에 이르러 神인 브라흐만과 합일하여 머무르라고 한다. 이 책의 3,4권은 그래서 우파니샤드의 반향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충실히 서양 철학의 틀안에서 설명해낸다. 책의 순서는 칸트의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의 순서를 의식한 서술이기도 하다. 고통의 원인을 설명키 위한 근거율적 이해는, 결국 칸트적 틀위에 이성이 아닌 생명에너지인 의지를 관념적 일자로 하는 세계의 설명방식에 있다. 질문이 동일한 만큼 해답 또한 우파니샤드적 체계를 따라간다. 붓다의 질문이 바로 고통의 이유였고, [바가바드기타]의 아르주나가 크리슈나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고통의 이유는 무엇인가? 쇼펜하우어의 질문이 동일했듯, 대답 또한 닮아간다.

그래서, 3권에서의 플라톤의 재등장은 당연한 귀결이다. 칸트[판단력 비판]의 대응으로 첨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의지가 어떻게 우리에게 인지되는지 여기에서 다리를 놓는다. 사물 배후의 의지의 발현은 힌두의 신이거나 혹은 가상적 이념처럼 표상으로 존재하되 개체의 표상이 아닌 [이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적이라는데서 이 체계가 힌두적이기보다 불교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그 이념의 표현으로서 예술은 가치를 갖는다고 그는 말한다. 의지를 인식할 수 있다는거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된 의지앞에 두가지 길이 존재한다. 의지의 긍정과 부정. 긍정은 도덕에 의해서만 제어되는 삶의 모습이다. 구원은 부정에 있다. 고통을 벗기 위해 자기의지를 부인하는 자는 자기 안에 있는 세계를 부정하며, 현상인 세계가 사라지면 보편적 형식인 시간,공간,인과성 그리고 근거율인 주체와 객체도 사라져 버린다. 고통의 근원인 개별자의 죽음이다. 그는 평정의 상태에 들어간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괴멸되었다.

자기의지의 부인, 과연 진정한 구원인가 아니면 절망의 다른 이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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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02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리뷰 입니다! 저도 이 책을 갖고 있지만 원전을 읽는 깊이는 없어 좀 아쉬웠습니다~
 
영국 낭만시선 영한대역문고 76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시사영어사 편집부 엮음 / 와이비엠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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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영어권의 시집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원문으로야 읽을 수 있겠지만 영어에 익숙치 않고 특히 고어체들에 맞닦들이면 [감상]이란 물건너가고 해석 숙제로 변하고 마니까...특히 코울리지나 번즈의 시들을 접하는데 이 책은 유일한 우리말 통로인 듯 하다.

블레이크(1757-1827)의 The lamb,Infant joy,The sick rose, The tyger, Ah sun-flower, The garden of love, London, The fly, Love's secret, The blossom.

로버트 번즈(1759-1796)의 Ye flowery banks o'bonnie Doon,Sweet afton,A red, red rose,My hearts in the highlands,

윌리엄 워즈워드(1770-1850)의 My heart leaps up, Lines written in early spring, Written in March, She dwelt among the untrodden ways,Lines composed a ffew miles above tintern abbey,The daffodils, Ode:intimation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The solitary reaper,Composed upon westminster bridge, By the sea,London,1802,The reverie of poor Susan,To the cuckoo.

사무엘 테일러 코울리지(1772-1834)의 Answer to a child's question, Song, Love, Kubla Khan,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조지 고든 바이런경(1788-1824)의 When we two parted, Good night!,She walks in beauty,On the castle of Chillon,The ocean,Maid of Athens, ere we part 

퍼시 비쉬 셸리(1792-1822)의 To-, Ozymandias,The indian serenade,The lament,Love's philosophy,The poet's dream,Ode to the west wind 

존 키이츠(1795-1821)의 On first looking into Chapman's Homer,On the grasshopper and cricket,Bright star!, La belle dame sans merci,To autumn,Ode on a Grecian urn,Ode to a nightingale

그리고 랜더, 무어,램,클레어의 시들이 수록되어있다.

[시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 시평은  읽는 각 사람에 맡기고...^^ 혹 읽고 싶었는데 못 찾던 시가 있으시면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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