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력 비판 쉽게 읽는 철학 6
디터 타이헤르트 지음, 조상식 옮김 / 이학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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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칸트 3대 비판서의 마지막으로 저술된 이 책은 그의 비판철학의 마침표이자 오성과 의지, 판단을 엮어내는 인간 이해의 칸트적 완성본이다. 이런 그의 책을 일반인도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이 책은 쉽게 칸트의 생각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원전의 순서대로 미적 판단력,숭고의 분석,목적론적 판단력비판으로 되어있으나 비교적 [아름답다라는 진술]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취미판단과 압도당하는 느낌인 숭고의 분석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칸트에게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이지만 어느 정도의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다. 어느 것이 꼭 옳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 들어맞는다는 느낌(근사하다)이 질료적 경험이 배제된 순수한 의미의  취미판단이다.  숭고는 압도당하는 느낌이다.상상불허의 이 감정은 도리어 우리의 무제한성(이성의 능력과 실천이성의 존재)을 상기시켜 쾌로 이끈다. 

칸트는 이런 보편적 판단의 근저에 순수 미적 판단의 보편성 필연성이 존재함을 보이며 그의 논의를 이끌어간다. (이런 공통감은 인간의 상호이해와 연대감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미는 철저히 사회에서만 의미가 있다.)  미적 경험은 미적 관점의 세계와 표준적인 방식에서 조화를 이루는 인간지성의 자기반성이다. 미는 오성과 상상력의 조화이고, 실천판단에서는 의지가 보편이성 법칙의 규준에 의거하여 자신과 합치된다. 이런 유사성은 오성과 미적 판단을 묶어준다. 결국 미와 이성과 실천인식간의 이런 통합은 합목적적인 세계현상의 관점아래 주체 인식능력을 강제성 없이 결합한다는 것이다. 분열되지 않는 자기통합이다. 피히테 식으로 말하자면 절대의지의 관점 아래에서, 진정한 인간의 자기통합, 즉 미적 만족, 오성의 질서, 도덕의 유의미적 실천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에서 시작한 인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이 인식할 수 밖에 없는 [합목적적 절대의지]를 드러나게 한 것이다.

자연과학에 있어 생물체안의 인과적 메카니즘은 작동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러나 인과적 설명은 有機體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 연후에야 가동이 가능하다.  기계론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이율배반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담론적 인간오성이 사물들이 구성주체에 의해 산출되는 인공적 메커니즘인 것처럼 가정하며 사유함으로 해소된다. 누군가 배후에 있다는 설명 이후에 가능한 기계론적 이해라는 것이다.

이 자연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다. 인간은 이 자연의 최종목적으로, 합목적적으로 자연의 목적 체계를 만드는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자연에 대한 책임을 알고 있다면 그는 자연을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이 최종목적이라는 것은 이런 위계의 질서를 지킬 책임을 알려주는 것이며, 이 책임은 다시 실천이성을 요구하여 절대의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칸트의 이런 오성과 판단의 전체윤곽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화살표처럼 인간안에 있는 절대자에 대한 선험적 지각과 인간존재의 의존성을 드러내준다. 미에 대한 판단과 숭고에 대한 경외감,대상에 대한 의미부여,도덕에 대한 의지, 오성의 선험적 틀들은 절대자의 존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칸트는 여기까지가 인간오성이 자신의 숲길을 헤쳐가야할 마지막 지점이라고 말한다. 그 너머에는 계시만이 가능한 영역이다.그를 따라 다니다보니 계시앞에 더욱 겸손해짐을 깨닫는다.안내자가 겸손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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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명
J.G.피히테 지음, 한자경 옮김 / 서광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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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프랑스혁명 초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여 4월 프랑스를 공격하여 혁명전쟁이 발발한다. 결국 9월 발미전투의 패배로 프랑스의 원한만 산채로 물러난다. 신성로마제국은 결국 1806년 나폴레옹의 침략과 더불어 사라지고 만다. 이 중간기간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서로 우위쟁탈전을 벌이던 시절, 1800년 프로이센의 베를린에서 이 책은 출간되었다.

프랑스의 혁명의 기운이 넘나들고 칸트의 새로운 철학의 영향이 독일전체에 미치고 있었다. 괴테에 의탁하고 있던 헤르더의 역사발전에 대한 믿음 또한 당시의 독일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던 많은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는 1793년 예나대학 교수시절 분명 칸트 [실천이성비판1788년]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1799년 베를린으로 옮길 무렵 그의 생각은 종교적 신념이 도덕적 이성을 능가한다는 견해로 옮겨간다. 이 저작의 1,2,3장은 이런 그의 견해의 발전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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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은 먼저, 자연결정론 혹은 경험주의적 사고에 대한 불평으로 시작한다. 분명 자연결정론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나, 자기 결정 능력이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만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이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이 슬프다.

2장은 마치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서 등장하는 철학의 여신과의 대화처럼 지식과의 대화로 이어진다. 그 지리한 논의의 끝은 나의 감각에 의한 사물의 상태와, 직관하는 공간을 엮는 사유의 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우리자신의 안에서 벌어지는 표상능력의 결과일뿐 사물 자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씀. 동굴에 갇혀 밖을 내다보는 사람과 같아서 자기의 한계내에서만 인식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오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결국 지식에 의해 지식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오직 지식일뿐, 그 이상은 지식이 접근할 수 없다.

3장은 그 대안을 제시한다.결국 행위만이 이 순환의 고리와 한계를 끊고 나온다. 그 행위의 기준은 양심에 복종하는 것이다. 인간의 유일한 사명,현존의 전체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이것은 칸트의 정언적 명령을 듣는 기분이다. 곧 그는 이런 행위의 지상적 목적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더 나은 세계이다. 혁명과 인터내셔널까지를 비친다! 이런 지상적 목적의 실현은 초지상적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는 그것 또한 철저히 칸트에게서 가져온다.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양심에 대한 복종. 선한 의지의 비물질적 이성세계가 감성계의 물질적 세계를 규정한다. 비로소 삶의 확고한 출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피히테는 절대일자로의 자기견해를 비친다. 의지의 결과가 보장되려면 법칙이 존재하여야 한다. 그는 이 법칙을 무한의지, 일자, 영원한 절대자에게서 찾는다. 칸트철학의 종교적 비약과 연결이다. 그는 역사의 결말 또한 무한의지의 아래 있으므로 우리 행위와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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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삶의 이유와 방향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었던 시대의 피히테는 행복하다. 우리의 시대는 다시 자연결정론의 시대이다.  꿈이 없는 경험주의적 삶의 고단함이 21세기 기술사회의 정체이다. 결정론의 총화인 기술문명의 필연성은 어떻게 극복되어질 수 있나,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이다. 이성의 의지? 이성의 의지에 현혹된 인간의 좌초를 독일민족의 20세기에서 본다.(본회퍼) 20세기의 잘못된 꿈(모더니즘) 역시 이런 꿈없음보다 나을 것은 없어보이긴 마찬가지다.

21세기 혹은 그 후에 있어도 인간학의 근본주제는 그래서 지성이 단순히 자연-표현에 불과한 것인지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든다. 뇌의 화학물질이, 유전적 성향이 결정짓는 인간이라면 이성의 의지란 없다. 그리고 그 판단 수단 역시 자연과학의 손에 들려져 있다. 이런 자연과학의 믿음은 의지에 비우호적이다. 적이 잘 봐주기를 바라는 패잔병과 같다고 할까? 인체의 작동원리라는 것, 정신의 흐름에 있어서 뇌 신경전달 물질의 전달과 시냅스들의 연결이라는 것, 그리고 질병의 발생양상과 그 경과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실, 내 인식안에서 다른 인간의 인식의 틀을 빌려 설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연과학자는 정신병리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시대이다.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을 꿰어맞추는 것은 비단 사이비의학이나 의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의학 자체에서도 과학의 인식틀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인정하긴 어렵다. 의학의 객관성도 의심받지 않는다면, 과학의 객관성이란 신성불가침이 아닌가?

자연결정론의 시대에 인문학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와 신의 형상으로의 인간 창조와 신의 형상의 회복으로서의 의지의 결정의 자유를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피히테의 의견은 오늘 어떤 의미를 갖는것일까? 앞으로 더 생각해 보아야 주제이다.

P.S: 왜 독일 개신교에 뿌리를 둔 관념론에는 하나님만 계시고 그리스도는 사라지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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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영한대역문고 56
헨리 입센 지음, 시사영어사 편집부 엮음 / 와이비엠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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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충격적이었죠. 노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준 정말 몰랐거든요(한숨)

저 나름대론 잘해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니깐요...

물론 제가 그날 좀 심했다는건 알아요. 내 자식을 기를 자격이 없다는둥. 남남처럼 이야기한건 사실이니깐요

하지만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자기가 쌓아올린 지위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리게 생겼는데 좀 제 정신이 아닐수도 있쟎아요?

처음엔 억울하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나쁜 남편이라 욕하는게 화가 나고 그랬었죠. 하지만 그러다가 노라가 한 말들을 곰곰 생각하게 됐죠. 그 날은 내 머리론 도저히 그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더라구요...

이젠 좀 알것도 같아요. 노라가 무슨 말을 한건지...그녀는 제가 자기를 내 인생에 도구로 사용한데 화가 난거죠. 그녀가 나의 인형? 장난감? 저도 실은 그 사실을 그때까지 몰랐어요. 사랑스러워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좋고...(눈물)

하지만, 사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던거였어요, 제 주위 친구들도 다 그렇게들 살죠. 제가 어떻게 그게 잘못인지 알았겠어요. 남들도 다 그러는데...그리곤 다들... 먹고살만하니 권태다 황혼이혼이다 그렇게 치부해 버리죠. 저는 노라에게 처음 배운 셈이에요. 알고보면 직장이나 친구관계 심지어 형제 부모자식 관계까지 요즘 다 그렇잖아요...이 세상이 다 그렇게 살벌하게들 움직이는데 유독 부부관계만 인간적일수가 있겠어요...정말 저 자신도 제가 그녀를 그렇게 대하는게 얼마나 잘못인지는 잘 알아차리지 못했었죠.

글쎄요. 다시 시작한다구요?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노라가 떠날땐 그녀가 돌아오면 언제든 그녀를 맞아준다고 했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아직 제가 준비가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과연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기자양반? 사실 아이들에게나 아내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깊은 애정, 저를 위한 애정 말고요..아직 자신이 없어요. 해본 적이 있나 싶기도 하구요...

(눈물을 닦는다) 하지만  해 봐야겠죠. 누구나 처음부터 할줄 아는건 아니겠죠... 하지만 노라에게 달렸죠.그녀가 결정할 일이니까요. 누군가 먼저 이런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으면 좋았을텐데...

돌이켜보면 노라가 말한 [놀랄만한 굉장한 일]은 저에게나 노라에게나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해요...옛날의 노라와 저의 관계라는건 당하는 노라에게나 멋도 몰랐던 저에게나 진정한 행복, 사람과 사람이 서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존경과 희생이 있는 건 아니었잖아요? 그만합시다.  부디 제 얘기가 다른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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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2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원봉 옮김 / 책세상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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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도 읽을 수 있는 칸트라는 소개도 있지만, 그리 만만한 책은 아닌 듯하다. 그가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한 후 그의 도덕철학의 기본구상을 보이기 위해 쓴 책이니만큼, [순수이성비판]의 [정언적 명령]에 대한 여러 서론적 설명과 배경들을 알아야만 좋은 강독이 가능한 때문이다.

칸트는 이 책에서 먼저 누구가 알고 있듯, 인간은 도덕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설명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도덕적 의무를 안다고 칸트는 말한다. 이 의무의 근거는 자율성에서 나온 정언명령인데, 이것은 어떤 경험에서 유추된 것이 아닌 보편성에 입각해 자신의 준칙을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경험으로나 실리를 따져서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이런 의무를 좇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타당한 것을 자기에게도 부과하고, 스스로 이런 것을 옳게 여긴다. 

이성에 입각한 도덕은 그래서 의지, 즉 자율적으로 스스로에게 보편적 법칙을 명령하는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가능하다. 마치 민주국가에서 국민 스스로가 법을 제정하고 그것에 국민의 일원으로 복종하듯이 그는 이성의 선한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른다. 기이한 일이다(!)  여기에서 도덕의 목적은 [인간이 목적 그자체]가 되게하는 것이다. 나의 이기적 이득이나 허잡한 물질 혹은 가치들이 아닌 인간이다. 인간은 희안하게도 그걸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목적이 되는 경우는 네가지로 제시된다. 자신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론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되고, 적극적으론 자기를 개발하고 발전시킬 이유가 된다. 인간이 목적이라면, 타인에 대해선  내 이익을 위해서나 명예를 위해, 속이거나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적극적으론 타인을 구제하고 자선을 베푸는 행위가 된다. 각 행위의 목적은 물론 인간 그 자신이어야 한다.

이런 그의 제시들은 인간이 목적이 되는 삶의 여러 양태를 제시해 주고 나로 하여금 그 폭을 넓혀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기존의 남을 위해 한다는 일도 과연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인지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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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 쉽게 읽는 칸트 쉽게 읽는 철학 1
랄프 루드비히 지음, 박중목 옮김 / 이학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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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나): 내가 어떤 생물의 세포사멸과정에 있어서 그 주역할을 하는 과정을 차단한다면 그 생물은 영생할 수 있는가? 사멸의 과정이 일정한 방법으로 작동한다면 그리고 그 사멸이 오직 그 방법에 의해서만 일어난다면 분명 나는 사멸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귀납법적인 정보들은 분명 이 [영생의 방법]이 필연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영생은 가능한가?  우리의 인식과 판단, 도덕적 기준의 설정에 조예가 깊으신 고수 두분의 의견을 들어보자.

 

: 수많은 정보의 총합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로크의 주장대로 우리의 일체의 사물의 작동원리가 경험에 의해 도출되며, 우리의 지식이나 신념이란 지각이 남기는 인상과 이로부터 추론된 상상의 산물들이므로, 그 정확성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예로 든 사멸의 과정이라고 일컫는 것 자체도 인과론적인 틀을 추정하고 연결시킬 뿐, 결국 필연적이라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의 확률적 개연성안에서는 결국 명확하고 엄밀한 보편적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앞의 절차는 오류를 거듭하여 인간의 혼동으로 몰아넣고 자포자기하게 할 것이다.

 

칸트:  우선 나는 엄밀한 지식의 불가능성에 대한 흄의 견해에 반대한다. 오성은 선험적으로 존재의 감각적 인지의 기초로서 시간과 공간을 상정하듯이, 사물의 판단의 근간으로서 인과관계,필연성, 실재성 등을 판단하는 범주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식의 엄밀성에 있어 반복적으로 경험되어지는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타당하게 어떤 사실간의 인과관계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비록 지각에 의해 경험되어지지만 우리의 오성은 이것이 원인과 결과로 묶여져 있음을 인지하고 반성하며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이미 갖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앞의 문제에 관하여 이러한 [사멸과정]이 논리적으로 입증되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이것이 [영생]을 얻게 되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비록 해당과정에 의한 사멸은 연기 되거나 취소되어진다하더라도 그 생명체의 영구적 사멸방지는 발생하지 않고 다른 방향의 사멸이 불가피하게 발생할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육체의 생명이 한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육체적 생명체가 불멸하고 지속된다는 관념은 다수의 감각으로부터 얻은 정보로는 적합해 보일지 모르나 불멸은 영혼에 귀결된다. 영혼불멸과 무제약자 그리고 자유의 이념들은 이런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비록 그 선험적 이념들의 존재를 입증할 수는 없으나 그 존재를 가정함으로써만 우리의 인식이 가능함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감각적 직관은 발견된 사멸의 과정이 죽음의 각단계가 아닌 죽음의 현상으로 보도록 한다. 당신은 뛰고 있는 심장을 생명이라 부르는가? 죽은 사람의 심장도 뛴다. 피가 통하는 것을 생명이라 하는가? 기능을 멈춘 뇌에도 피는 흐른다. 이것들은 생명의 현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판단할 기준을 우리안에 가지고 있고, 이것은 당신의 주장에 우호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카를: 당신은 영혼불멸과 무제한자, 자유의 파괴를 두려워하는것 아닌가? 적합한 논리의 과정에 따른 육체 불멸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당신의 선험적 이념들을 재설정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 당신 앞에 불멸의 물적 생명체를 제시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칸트: 당신은 21세기 사람다운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의 사고는 사실 내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던 자연과학에 대한 거꾸로 생각하기, 즉 대상으로부터 인식되고 개념화되는 과정을 뒤집음으로서 시도한 인간의 인간됨, 즉 인간의 독자적 판단의 자주적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 당신에게 철학은 마치 그 변화에 맞추어야 하는 사회기반의 논리이거나  기껏해야 발생한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시어머니 정도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내가 주장한 것은 내 속을 파들어가 발견한 것이지 결코 18세기말의 세계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주장이 여전히 인간인 당신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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