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위프트는 원래 말의 나라와 천공의 성 라퓨타를 쓰고 소인국, 거인국 이야기를 나중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사실 그래서 말의 나라, 휴이넘에 대한 걸리버의 표현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이 책의 기본적 생각은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과 혐오이다. 그리고 그 대안을 인간들의 나라인 나머지 세 여행에서 찾으려한다. 걸리버가 자기 가족을 인간 야후의 추악함에서 건져 휴이넘의 생각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처럼 말이다.

소인국이 그런 인간사회의 축소판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라면, 거인국에서는 타인에 의해 야후인 자기의 모습을 조명당한다. 그리고 다시 3부에서는 이런 인간사회의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정체를 드러내어, 그들이 하는 황당한 짓들과 비틀어진 귀족의 뿌리를 보여준다. 자랑할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스위프트의 추악한 인간 야후에 대한 대안은 어쩌면, 당시의 조류를 반영하듯 이성으로의 회귀이며, 또 다소 복고적으로 그리스적 인간상의 회복이다. 휴이넘은 이에 대한 표상으로 보이며 이성과 자연을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 나타난 인간시스템의 전면적 재검토와 계급파괴는 얼핏 급진적 모양을 띄나 그는 곳곳에서 어설픈 시도를 일삼는 현재의 새로운 조류에 대한 역겨움을 표시한다. 되지도 않은 설익은 생각으로 인간사회를 실험하지 말라는거다. 자주 그는 그의 선조대에 순수한 애국심과 신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자기손으로 땅을 파던 중류층을 동경한다. 점차 그의 이 책은 인간이라는 것 전체에 대한 혐오로 치닫는다.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이다.

그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삼고 수많은 사람들을(자신의 나라 아일랜드인을 포함한) 이유없이 죽이고 괴롭히는 유럽의 광기에 분노하고 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런 광기가 세계를 휩쓸고 있음을 알면 그는 또 얼마나 비통해할까? 인간이 있는 한 이런 미친 역사는 계속됨을 그도 알긴 하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국론 - 하나님의 도성
성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조호연 외 옮김 / 현대지성사 / 1997년 12월
평점 :
절판


그의 고백록이 [신적 개입에 의한 개인의 변화에 대한 인식적 틀]를 보여준다면, 신국론은 [사회현상 해석의 구속사적 틀]을 제시한다.

1. 하나님의 통치와 나의나라

먼저 이런 구분의 근저에 있는 [관계]의 측면이 그 기준으로 제시된다. 나의 욕심과 권력욕, 나의 판단과 힘, 경험을 위주로 하는 인간의 영역인 나의 나라(하나님과 무관하다고 주장되는 영역]과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에 대한 계획에 따르며, 그분의 성품, 자녀로서의 위치, 동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실천, 봉사로 대표되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가 있다.

2. 현실의 하나님나라와 종말의 이해

그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나타난 이스라엘과 교회 모두 불완전하고 잠정적이며 섞여져 있다. 즉 관념적 하나님의 나라의 순수성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미래의 실현은 역사에 예고되어있으며 결코 위험한 종말론의 안전장치로서 내세(죽은 후에 천국가는 것)로 밀어버릴 수 없는 확고한 약속으로, 미래라는 시간 안에 제시되어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한 직선적 역사관은 로마적 사고와 무관한 히브리적 성경의 역사관이었으며, 로크가 설명한 대로 역사의 출발이라는 것을 상정한 인간의 사고의 틀안에 영원에 대한 인식과 함께 직선적 진행으로서의 역사철학이 서양역사관을 결정짓게 된 계기가 된다.

3. 서양사상의 변화

결국 처음으로 역사에 대한 철학적 틀을 형성한다.  고대의 회귀적 연속(succession)의 단편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그 극단까지의 영원을 보여주는 역사관으로 바뀌어진다. 이런 거시적 역사관은 국가와 인간의 의미에 대한 철폐를 의미하며, 이후 역사철학과 발전이라는 주제의(헤르더와 헤겔) 틀을 만들어낸다.

또한, 그의 이 책을 통해 인간론의 기저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나타난 이성적 우월에 의한 인간구분이 아닌, 인간이해의 근저에 근본적 타락과 형상의 왜곡에 의한 비참과 허무와 권태(팡세)를 보여주며, 이성의 한계와 신적 계시의 절대적 필요를 기본적 전제로 삼게 된다. 심지어 데카르트와 로크조차도 기본적으로 이성에 대한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다.

종교라는 주제에 대해선는 인간이성의 한계너머를 정념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닌 명확한 로고스적 명증에 의해 이끌어지는 계시적인 것이 된다. 또한 기억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찾는 고백론에서 보듯 종교는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되며, 각 개인은 기억과 경험을 반추(reflecction)하고 형상화하며 계시의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여 자신을 발견케 된다.

이 책을 건너뛰고, 서양의 역사철학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로 넘어가긴 다소 힘들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 끼호떼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6
미겔 데 세르반떼스 지음, 김현창 옮김 / 범우사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팍스 에스파냐의 정점은 1556년에서 1598년에 이르는 펠리페2세의 통치시기였다.그는 레콩키스타의 주인공인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라의 손자이며 신성로마제국 카를5세의 아들이었다.수도는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겨졌고, 이베리아반도와 남부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서인도, 멕시코,페루, 필리핀을 아우르는 유럽 최강국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무적함대 La Armada Invencible 의 진면모는 1571년 레판토 해전의 승리로 나타났다. 하지만 무적함대가 1588년 영국 함대에 패한 후 이런 에스파냐의 영광은 사그러 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영광을 그리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 에스파냐에서의 기사도 이야기의 유행은 이런 안타까움과 과거에 대한 회상과 맞물려있다. 세르반테스는 이런 비현실적인 과거로의 도피를 비웃는다. 또한 그는 그 형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기사소설의 historia 범주를 깨뜨리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규범을 좇아 현실모방의 가상세계를 현실처럼 재현하여(novela) 기존의 기사이야기를 뛰어넘고자 했다.

현실은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화려하지도 장엄하지도 않다. 그러나 누구나 아름다운 현실, 조화로운 관계, 성공적 인생을 꿈꾼다. 기사도 이야기는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사람들의 이런 갈망을 만족시키는 생필품이다. 영웅담과 모험, 로맨스와 사랑의 완성, 고난과 복수, 마법과 승리의 세계는 현실이 각박하고 억압적이며,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유일한 도피처이고 숨쉴 수 있는 곳이다. 환타지나   만화, 무협지와 하이틴 로맨스 혹은 정연한 논리가 먹히는 추리소설의 세계가 지금도 우리의 각박한 현실과의 예리한 접촉을 견딜만 하게 해 주고 있듯이....하지만 소설 [돈 끼호떼]는 이런 기사도 이야기를 마음껏 조롱하고 있다. 현실 어려움의 도피로서의 기사이야기 대신, 가상현실을 통해 도리어 현실의 작태를 비웃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세르반떼스의 소설이다.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는 가상현실, 기사도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현실은 그가 원한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사방은 명쾌한 질서의 선과 악으로 갈려진다. 모든 기분 나쁘게 생긴 놈들은 마법사와 악인이다. 달려들어 창으로 찌르고 물리칠 대상...모든 여자는 공주 또는 그 시녀. 쇠사슬 찬 자들은 모두 억울하게 핍박받는 이들이다. 그는 그들을 위해선 목숨을 던진다. 그의 가상세계가 이 모든 일을 이유있고 옳은 것으로 만든다. 전염성 강한 이 가상현실은 현실적 이익에 눈이 먼 산초 빤사조차 멀쩡한 정신임에도 이 놀음에 미쳐 같이 돌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돈 끼호떼는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짐승처럼 우리에 갇혀 마을로 돌아온다. 가상세계를 사는 사람이 맞닦뜨리는 현실이다. 에스파냐는 몰락했고 그래도 정신차리고 또 삶살이를 살아야한다. 약소국의 국민이라고해도, 내일은 내일다운 현실의 삶이 있으니까 

우리나라는 과연 월드컵 4강에 빛나는 조국인가? 통일의 위대한 앞날을 앞에 둔 평화적 세계의 선도국인가? 혹 우리는 어떤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꿈에서 깰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기에 너무 늦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은 내가 너무 돈끼호떼를 나쁘게만 보려는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 비극 1 - 아이스킬로스ㆍ소포클레스 편
아이스킬로스ㆍ소포클레스 지음, 조우현 외 옮김 / 현암사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3부작이 실려있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그리스 비극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가멤논은 아르고스의 왕이다. 그는 트로이의 승전후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 변절한 아내 클리타이메스트라와 그 정부 아이기스토스는 그를 살해하고 만다. 백전노장 아킬레우스와 눈을 번뜩이며 꾸짖던 이 영웅은 전쟁터보다 위험한 곳이 자기 집임을 알지 못했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이들을 모두 살해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만 에우메니데스 복수의 여신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끊임없는 복수와 죽음의 연속. 결국 아폴론의 비호와 아테네의 중재로 복수의 여신은 오레스테스를 용서하며 끝맺는다.

사실 아가멤논의 죽음도 복수로 인한 것이다.  자기 딸을 죽인것에 대한 아내의 복수, 아이기스토스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아가멤논을 죽인거다. 또 그 위로는 아가멤논 아버지 아트레우스와 아이기스토스의 아버지 티에스테스의 원한이 맺혀있다. 복수는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이며 인간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가보다.

우리의 시대 또한 피의 복수의 연속이다. 미국은 또 이라크에 원한의 씨를 뿌렸다. 후세인의 아들의 주검은 세계 방송에 공개됐다. 포로들은 두고두고 원한이 맺힐 모욕을 당했고, 이제 이라크인들의 피가 끓어오른다.  참수당한 미국인, 또 원한들...그전은 9.11이 있었고 그전은 걸프전, 팔레스타인, 중동전쟁, 그전은 이스라엘 건국, 그전은 예루살렘 학살, 그전은 가나안 정벌이 있었다. 누가 복수의 여신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복수할 삼족을 멸해 복수의 씨를 아예 제거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용서를 시작할 것인가? 폭격당한 아프카니스탄도, 학살당한 쿠르드족도, 누구 자식인지 모르는 아이를 키우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부모들도 지난하게 계속되어온 원한에서 벗어나올 수 없는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우리도 이 일을 시작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곡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1
단테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199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265년 태어난 단테는 당시 오랜 내란이 끝나고 활기로 가득찬 도시 피렌체에서 성장했다. 단테는 그의 나이 35세인 1300년에 교황파의 동맹을 위해 사자(使者)로 산지미냐노에 갔으며 그해 여름에는 6명의 프리오레(통령)중 한명이 되었다. 그 무렵 피렌체시의 행정은 교황파중에서도 공화국의 자립정책을 내세우는 백당(白黨)과 상업상 이익에서 교황과 강하게 결탁한 흑당(黑黨)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흑백 양당의 싸움이 격화하였으므로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조정사절을 파견하여 피렌체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했다.

정권을 쥐고 있었던 백당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1301년 10월, 단테를 포함한 세 사람을 로마에 사자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교황의 사절은 피렌체에 들어갔고, 정변이 일어나 흑당의 천하가 되었다. 1302년 1월, 단테는 피렌체의 궐석재판에서 공금횡령죄로 시외추방과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다시 3월에는 벌금을 지불하러 출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구추방의 선고와 함께 체포되면 화형에 처하도록 결정했다. 이때부터 그의 19년의 유랑생활이 시작된다.

이 기간 중 [지옥편]은 대략 1304년-1308년, [연옥편]은 1308년에서 1313년 사이, [천국편]은 1314년 이후 1321년까지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그의 유랑생활 전체가 이 한권의 책 안에 묻어있는 셈이다. [신곡]의 구성은 단순하다.  1300년 부활제인 성(聖)금요일 저녁부터 부활절(일요일)을 약간 넘긴 시간에 일어난 가상의 사건들이다. [신곡]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 요소는 곡(曲 canto)이다. 이 시는 100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옥편] 34곡, [연옥편] 33곡, [천국편] 33곡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단테의 [지옥편]은 그 기조에 원망이 있다. 자신을 궁지로 몰고, 배반하고 모략하며, 결국 앞에서는 선의의 약속, 뒤에서는 칼을 들이댄 무리들을 단테는 모조리 이 지옥에 처넣었다. 그래서, 지옥편은 지옥의 모습과 악마의 묘사보다 이 생에 살았던, 지금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행태에 더 집중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나라를 등치고 많은 이들을 곤궁에 빠뜨리는 자들에 대한 조롱과 야유인 셈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이런 자신의 감정토로와 복수에만 묻히는 것은 아니다. 이 여행의 안내자가 [아이네이스 Aeneid]의 저자, 로마시의 아버지,베르길리우스인 것. 또한 당시로는 드물게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써진 사실, 단테의 추방이유가 사실 그가 피렌체와, 크게는 이탈리아의 평화와 부흥을 꿈꾸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분명 단테는 로마시의 광채와 지식적 깊이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힘쓴다. 이 시는 분명, 그의 떠돌이 생활의 위로와 자긍심의 근원이기도 했으리라. 결국 이 고통은 문학을 낳았다.

[연옥편]은 그런 면에서 보면 다소 반성적 색채가 강하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사실 얼마나 허잘것 없는 정치라는 일에 일희일비하며, 잘못된 생각과 가치로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이 부분의 안내자는 차라리 베르길리우스보다 단테 자신이라 할 만큼 그의 이마에 씌여진 P(Peccata, 죄)를 지워가는데 더 작자의 마음이 기움을 느낀다. 여기서 그는 피렌체의 지적 스승인 브루네토 라티니 문하의 동료들을  떠올린다. 구이도 카발칸티, 포레세 도나티, 화가 조토, 음악가 카셀라와 벨라쿠아, 시인 소르델로를 계속 등장 시키는 것은 그의 유랑생활이 진정 그가 했어야만 했던 일(나중에 만나는 베아트리체가 꾸짖었던대로), 그의 문학으로 이탈리아를 끌어올려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초래되었다는데 대한 반성이다. 어쩌면 사실 그의 유랑이 그가 해야 했던 일을 깨닫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신곡]이 기나긴 시간 그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은 그래서, 그의 해박한 그리스 로마의 문학, 철학, 역사와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뛰어난 상상력과 정확한 스콜라 철학과 가톨릭 교리의 설명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지난한 고통과 자기성찰, 자기재능을 따라 조국과 대의에 헌신코자 했던 아주 인간적인 그의 모습 때문인지 모른다. 그가 지금도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진정 자기를 낳아준 겨레, 조국을 사랑한다면 자기 가진 것으로 피땀 흘리기까지 노력하라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학문이든, 예술이든, 장사든, 그것이 참 옳은 영광의 길이라 그는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