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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 - 개정 증보판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1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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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를 드디어 읽게 됐다. 2차 3차 문서로만 보아오던 책을 직접 읽게 되니 뿌듯함이 먼저 든다. 그렇게 오랫동안 플라톤 어쩌구 저쩌구하면서도 늘상 찜찜하던 것이 이제야 개운한 느낌이다. 고전읽기의 즐거움중 하나가 이런 것인가보다. 남이 이런 저런 평을 하던 글을 읽고 직접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

올바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비교적 다른 책에 비해 먼저 써진 1권에는 소크라테스적인 분위기(변론과 무지에 대한 깨달음)가 강하다. 올바름.그건 그냥 돈계산 정확하고 속이지 않는 건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강자의 논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는 그렇다면 [적합한 정치체제]는 무엇이냐로 발전하고 우리가 익히 들어아는 시교육과 철학치자.동굴비유를 통한 이데아적 이상으로의 접근으로서 정치의 개념이 등장한다. 대화속에서 이야기와 논리는 발전해가고 머리에 떠올르는 질문들은 책속의 등장인물들이 주고받으며 읽는 사람을 끌고간다.

이 책을 보며 느끼는 분위기는 플라톤 자신의 올바른 정치체제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사람이 올바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국가가 있을텐데...어려운 시절을 살던 플라톤으로서 그의 출신배경,정치적 경험, 소크라테스의 추억이 얽힌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욕심없는 사람이 올바른 방향(이게 과연 뭐냐?)으로 백성들이 행복하도록 다스려주길 원했다. [소크라테스 같은 이가 다스리는 나라라면 될텐데...]라고나 할까.

우리는 새롭게 政體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는 역사 한가운데 살고 있다.과연 끝까지 통일로 간다는 명제는? 노조의 경영참여는? 병역의 의무는? 더 나아가서 어떤이는 참여 민주주의는 올바른가라고 묻기도 한다. 옛사람 플라톤은 대중적 민주주의를 신뢰치 않았다. 미국도 귀족적 민주주의는 아닌가? 과연 무엇이 옳은 政體인가? 심지어 민주운동과 환경운동, 노동운동과 복지정책의 당위성이 한번도 의문시 되지 않았던 우리에게, 이것조차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대이다. 진정한 발전은 올바름에 대한 질문과 다시 한번 공유된 확신 속에서만 가능하리라. 많은 이들이 확신을 바라되 얻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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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야기 - 과학고전시리즈 2
히포크라테스 지음 / 서해문집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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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리스의 의사. 그가 쓴 여러 글중 이책에는 히포크라테스선서와 '공기,물,장소','신성병', '인간의 자연본성에 대하여' 등의 논문이 실려있다.

왜 그는 의학의 아버지일까? 그는 질병을 신으로부터 기원한다고 신전예식이나 주술에 의존하는 것이,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무관함을 밝혔다. 즉 질병은 질병자체의 원인과 경과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서, '사람'이 고치는 것이라는 걸 주장한 것이다. 또한, 그냥도 낫고 의사가 봐도 안 낫는게 질병이라고 의술의 무용함을 이야기하는 궤변가들에게 경험적으로 질병의 경과와 예후에 의술이 결정적 영향을 줌을 밝힌다. 분명 유익을 주는데도 이를 비웃는 말쟁이들을 그는 힐난한다. 결국 그는 우매한 고대의 사고방식속에 의술의 적합한 자리를 잡아주고 이를 변호한 것이다. 그는 정말 의학을 [낳았다]

그의 오래된 선서는 아직도 유효할까? 의술을 관찰과 경험과 가설하에 신중과 진지함으로 접근하려 했던 그에게 [의술은 커다란 권력임]이 드러났다. 사람들을 전문적 지식이라는 굴레로 우롱하거나 속일 수 있다는 말이다. 진정 환자를 위한다면 이는 반드시 경계되고 바로잡아져야 함을 그는 알았다. 직업윤리라고 해야하나, 자정적 규범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도 그 영역의 진위를 알지 못하므로 스스로 환자를 위해 견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서약케 한 자에게 의술을 가르쳤다. 의업은 자기이익을 따르게 둘 수 없는 힘이 있고 이것은 여전히 [스스로 돌아봄]으로만 견제된다.

최근 문제가 되고있는 정부의 의사에 대한 통제가 과연 제도적 장치나 수가체계로 가능할까? 히포크라테스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실패하는 뺑뺑이 게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이리 죄면 저리 도망치고, 이렇게 비난하면 전문성을 내세워 변호하는 끝없는 쫓고 쫓기기. 이 게임은 어쩌면 의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自淨하고 자기 dignity 위에 자신들을 세우려는 노력조차도 내부에서 힘을 얻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른다.  빈손에 쇠꼬챙이 몇개, 풀잎파리,환자 많이 본 경험밖에는 없던 이 고대인이 알던 것을 다시 되새겨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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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5
호메로스 지음, 유영 옮김 / 범우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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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는 플롯으로 보면 너무도 간단한 글이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육지에서 죽을 생고생 다하고 겨우겨우 집에 돌아온다. 그동안 그의 아내에게 청혼한다며 자기집에서 기생하며 가산을 말아먹던 무리를 오디세우스와 아들이 도살하며 막을 내린다.

왜 오디세이아는 고전일까? 위대한 작품이 그 뛰어난 완성도로 인해 인정받는건 아닌 것 같다. 독창성, 유일성, 오리지널리티가 더 중요한 지표가 아닐까? 기다리던 [님]이 돌아와 자기를 괴롭히던 원수를 진멸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아직도 많은 희곡과 소설의 단골메뉴가 아닌가? 또한, 전쟁에서 갖은 고통을 겪고난 뒤 귀향하는 이야기( 아이네이드와 캉디드), 각종 환타지와 괴물과의 싸움, 표류와 해변의 구조 등 수많은 이야기들의 원형이 이 안에 들어있다.

아직도 사람들은 이 재주 많은 이야기꾼 호머의 입담을 계속 반복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사는 삶이란 것이 척박하고 고달프며, 현실의 고통을 구원하여 줄 님을 바라는 마음만이 희망인 삶의 조건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 이야기의 춘향도 이도령을  기다리며 변사또의 괴롭힘을 참는다. 우리 백성도 춘향을 보며 현실의 구원을 꿈꾼다.위고의 고제트도 부모없는 절대 고립의 삶에서 고립을 공유하는 또다른 인물 쟝발장에 의해 구원된다. 프랑스 백성도 신을 잃은 뿌리없는 고통의 삶에서 누군가 다른 동료인간의 연대를 통해 사악한 압제로부터의 구원을 꿈꾸어왔다. 외부적 구원은 인류공통의 주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학밖에서도 이 주제는 살아있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도, 일제하의 한국민도 어둠이 깊어가는 절망의 끝에서 이런 희망을 바래왔다.  20세기에 이 주제는 절망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점점 사람들은 [고도]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믿고 싶어하고, 아가멤논의 클리타이메스트라처럼 돌아올 님을 죽여버리고, 현재의 타협한 상황을 연장하고자하는 독기로 변하고 있다. 신약의 포도원소작농처럼 이제 주인의 아들만 죽여버리면 제맘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라 믿고 싶어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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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 을유라이브러리 28 을유 라이브러리 28
볼테르 / 을유문화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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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가의 말을 비웃기 위해 이야기를 쓴다면 이렇게 쓸수 있을까? 볼테르는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비웃기 위해 캉디드의 모험이야기를 그려낸다. 서스펜스와 드릴, 진기한 구경거리와 신기한 세계의 모험이 아닌 진짜 18세기의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담. 실재인물이었으면 몇번을 죽었겠지만 007처럼 캉디드는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라이프니츠 (이책의 판글로스 선생님)의 철학이 옳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결국 처참함과 고통, 잔인과 추악함만이 가득한 세상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캉디드와 그의 연인 퀴네공드의 여정.

볼테르는 인생이 아름답고 완벽하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는거다. 라이프니츠의 마음과 그 속내를 읽기보다는 곡해하고 비웃는다.  그리고 꿈이 아닌 현실을 챙기다 보면 후대도 덕을 본다는 그의 생각을 비꼼을 통해 드러낸다. 그 자신이 이렇게 인생을 헤쳐나가려 돈버는데도 열심이고 이상주의 비웃는데 평생 분주했던 사람이다. 결국 이야기의 결론에서 그는 '자기 밭이나 갈아라.'하고 독자들을 내동댕이친다. 어쩌면 요새 우리들이 가진 인생관의 원본이 그의 현실적 가치관이 아닌지... 18세기 코믹 풍자소설이 우리 생각의 뿌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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