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46
임선희 지음, 최복기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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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세계와의 관계를 철학자다운 자기 중심성과 나타나는 상황을 아우른 세계파악 위에 세계와의 타협과 협력, 대치와 독립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관계 속에 파악된 존재를 죽음이라는 불안과 마딱드리게 하여 그 의미를 추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존재의미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의 세계파악과 거기서 선택한 자기 세계관이 있어야한다. 인간은 과연 각자가 자기가 원하는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을까? 세계관을 강요당하게 되었던 때를 지나 이제는 각자가 택하는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강제되어 살고 있는 시대에 들어온 건 아닐까? 그것이 마케팅이든 민주주의 압력이든...어려움은 세계관에 있어 우리가 끌려다니고 있었다는 인식의 부재가 아니라 주어지는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하는 능력 없음이 아닌가?

 

또 다음 단계인 죽음을 끌어안는 실존적 부딪힘을 우리가 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은 아닐까? 하이데거만큼 강하지 못한 우리는(^^;) 다가오는 죽음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실존적 확신으로 살다 막상 죽음을 맞을 때 자기 존재라고 믿었던 것이 이건 아니었구나라고 하게 될 것이 뻔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실 앞에 자기 개똥철학이 일시에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또다른 불안. 근거가 자기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살면서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전존재타자(신)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다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존재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전존재타자를 조정하거나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이 구원을 이루는 까닭은 절대타자의 독립적인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알고 따르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불안을 제거하려는 경향으로 치닫는 루터교적 타락의 기독교를 힐난하였다. 불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자인 신과의 올바른 보편성의 관계가 아닌 실존적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본 까닭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사랑의 신이 계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건 마찬가지다. 신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배제하고 불안을 존재자체로 이해한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불안을 조장하는 사고자체를 진리 본체로 삼고 이것으로 세계를 보려하였다. 하이데거는 보이는 세계의 현상적 흐름에서 불안의 인간을 당연히 실존주의로부터 길러내고 이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려 발버둥칠 수 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개방형과 폐쇄형 세계관, 인격적과 비인격적, 사랑과 생존의 세계관 중의 선택이었다. 

 

사랑의 신에 대한 세계관에는 또 다른 두 생각이 존재한다. [업다이크의 토끼]는 사랑을 향해 열린 태도만으로 충분히 전존재타자를 소유할 수 있도록 그는 약해지신 분이라고 믿는다. 이 키에르케고르적 불안의 인간은 그의 의지체계와 상관 없이 구원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며 그가 얻는 구원은 교회밖의 실존적인 것이라 여긴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므로 벗어나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며, 잊어버리고 있으면 어찌 될거라는  세계관이다. 이런 구원관의 혼란의 중심에는 인간의 행위와 예정이라는 주제를 실존적 입장에서 이해하려한다는 원인이 있다. [사랑의 하나님은 내 실존을 이해해 주셔야 한다.]  사랑의 신은 실은 감정적이고 같이 사는 아버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분명 관계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계가 발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두고 보지는 않는다. 세계를 보는 방법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하며, 죽음을 원래 모습대로 만만치 않게 여기게 하고, 동일한 인간 기준에 놓인 동료의 아픔을 느끼고 자기 힘을 넘어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태도를 기르게 한다. 끝은 불안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만만하신 분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 [긴장의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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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리콘 - 노먼 린지 일러스트판
페트로니우스 지음, 강미경 옮김, 노먼 린지 그림 / 공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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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니우스의 외설문학으로 주목받은 작품. 그 가치는 사실 이미 망실된 줄거리가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보다는 이 책을 단편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채프먼, 드라이든, 오스카 와일드,시엔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 엘리엇의 황무지, 에즈라 파운드, 헨리 밀러의 참고문헌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내게 페트로니우스의 생애와 이 작품을 연결 지을 수 있는 단초는 풍자이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존경과 능력에 대한 기본가치 위에서 볼 때 사티리콘의 풍자는 분명 즐기기 위한 표현이 아니고 비웃음과 고발이다. 사티리콘(풍자)라는 형식 자체가 의미하듯.

수 많은 강탈과 어리석은 욕심의 여행으로부터 다다른 푸테올리, 그 강탈의 동료와의 더러운 욕망을 위한 다툼. 잠시 이어지는 무제한적 연회, 시인 과의 동행이 가져온 불행,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일도 행할 능력을 잃어버린 남자가 아닌 자가 되어버린 사내. 시인을 먹어치워 달라는 요구. 이 모든 풍자는 스스로의 풍요에 매몰되어 자신의 더러운 과거와 부끄러운 행적을 돌아볼 줄 모르는 로마의 나약함과 역겨움이다.

로마는 이 무력과 역겨움에서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파멸로 치달을 것인가? 페트로니우스의 죽음은 이 풍자소설에 대한 마지막 결말이었는지 모른다. 로마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모험은 저급한 욕망을 위한 것 밖에는 남지 않았고, 흥청되는 풍요함 안에 존귀함은 그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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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KIM)
루드야드 키플링 지음, 하창수 옮김 / 북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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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디어드 키플링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영국 전성기를 살았던 [정글북]의 작가이다. 그 자신이 뭄바이미술관장이었던 부친 아래에서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 받고 다시 졸업후 인도로 돌아가 저널리스트로 10여년을 보내었던 경험이 그대로 이 소설 [킴]에 담겨있다.

 

이 소설은 두개의 큰 흐름, [큰 게임]이라고 불리는 영국 정보부의 첩보활동과  [신비의 강]을 찾아나선 라마승을 따라다니며 강을 찾도록 돕는 제자로서의 삶이 병행하여 진행된다. 영국 식민지인 인도의 조건, 남하를 원하는 러시아의 정보활동, 북왕국의 반란 움직임 속에 영국의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인도출생의 백인아이가 바로 [킴]의 이성적 삶의 행태라면, 인도인의 삶에 대한 태도에 깔려있는 부적과 저주, 기복과 예언의 단계를 넘어 신에게로의 귀속, 해탈, 브라만과 하나됨,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을 좇는 구도자의 제자로서의 총명한 [만인의 친구]가 그의 종교적 양태이다.

 

이성만을 위해 사는 자로서도 무의미하고, 희망만을 좇는 자로서도 살 수 없는, 어느 한쪽의 모습으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이 [킴]이 좇는 목표이다. 희망의 이유가 존재해야한다는 것, 그것은 사실 작가 자신의 영국적 삶에 대한 회의와 인도적 삶에 대한 온전히 받아들일수 없는 갈등의 표현이다. 한편으로 모든 것을 등지고 희망 하나만을 위해 살고 싶지만, 그의 현실은 자신이 영국인인 것에 기대어 명성과 생계를 꾸리기 위해 희망으로부터 내려와 땅에 살아가야하는 존재여야 했다. 인간은 이 존재 조건에 몸부림쳐본다. 죽음을 향해 부질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고 의미를 부여하거나[큰게임] 가없는 희망을 찾아 자신의 이성과 결별하여야 한다[신비의 강].

 

작가에게 인도적 삶만은 해답이 아니었나보다. 그들의 삶은 희망을 근거로만 성립되어있다. 희망이 삶으로 나타난 종교적 사회인 천축국에서 그들은 삶의 방향이 또다른 욕심에 물들어간 채로 외양만을 희망으로 치장하여 살고 있다. 영국적 삶도 마찬가지다. 어리석은 영국인 또한 종교를 이름뿐 만으로 가진자들이어서 그들의 배가 부른 것만으론 만족치 못하고 허기를 더 많은 부와 권력과 우월감으로 채우려한다. 종교를 위해 평생을 얽매어 사는 자들이나 종교를 수단거리로 삼는 자들이나 모두 희망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사이에서 해답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막상 라마승으로 대표되는 진짜 희망을 찾아다니는 자는 그 근거를 가지지 못하는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에 지쳐있다. 광기와의 경계를 드나드는 희망의 끝. 거기에 기댈만한 근거가 어디엔가 솟아 올라와야 인간은 살 수 있는데 그 샘은 어디나 있으나 찾는 자에게 보이지 않고 어린아이에게만 주어진다. 두 노력이 만나지 못하고 한 없이 평행으로 이어지는 까닭은 그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출발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찾아온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참고: 키플링의 『킴』에서 드러난 소설의 내적 분열 : 아일랜드 소년과 라마승과 제국, 오은영(Eunyoung Oh), 19세기영어권문학회, 19세기 영어권 문학, 제14권 2호 2010.8, page(s): 11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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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
조지 오웰 지음, 김병익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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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이 좌파적 지식인으로 [동물농장]과 [1984년]을 쓴 이유는 구소련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동물농장]이 [배신당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라면 [1984년]은 이 체제를 존속시키고 있는 [기억을 조작하는 권력의지]에 대한 설명이다. 전체주의적 집단지도체제란 소수 권력을 위한 사회주의의 변형이며 이들 소수 권력엘리트들의 자기권력 유지를 위한 속임수라는 것이다. 날조되는 역사, 외부와의 차단, 숨겨진 정보들, 우월을 과시하려는 건축물과 첨단산업들. 이런 기만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이 속한 체제가 우월하며 거지가 들끓는 적대국보다 행복하다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죽음과 아랍권력 붕괴를 즈음한 때 읽어보는 [1984년]은 다른 감회로 와 닿는다. 조지오웰이 그리던 사회의 전형인 공산독재체제국가인 북한은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정신적  통제가 실제 가능하다는 것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정신적 통제가 가능한 것은 지배층의 [이중적 사고] 즉 현실적 판단을 유보하고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도 진실이라고 믿는 능력에 달렸다. 이중적 사고의 동기는 소수 엘리트층의 이익이다. 우리는 너무 유아적으로 북한을 이해하고 그들의 집단 권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김일성 계보라는 것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노동자층이 김일성의 지상낙원에 대한 착각을 깨달았을 때 그가 제거되고, 다시 김정일이 그의 대표성을 상실했을 때 사라진 것처럼, 다수 독재의 이 형태는 그것으로 살아가는 소수의 지배계층의 이익이 그 중심이다. 결국 문제는 김정은이 아니라 평양을 중심으로 프롤에 얹혀 그들의 정신을 스스로 세뇌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배계층의 이기심과 불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권력 세습은 다시 이런 집단권력체제 즉 그들의 권력을 위한 집단적 이익이라는 인간의 이기심이 흔들리지 않는한 충실하게 이행될 것이다. 언제 이들이 스스로를 죽이고 다른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 권력을 내려 놓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대표인물을 갈아치울지라도 이 체제는 계속될 것이다.

 

이번 겨울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와중에도 쇼는 계속되고 다시 지도자에 대한 미화와 신화창조가 이어질 것이다. 과연 이 체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 혹 그 틈새는 중국이 될 수 있을까? 중국 국경을 통한 정보의 유입과 일반노동계층의 자각의 기회를 늘려 가는 것. 이 자각이 무력진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광기에도 휩쓸리지 않는 자들이 나와야만 한다는 오웰과 윈스턴적 기대인지 모른다. 아니면 구소련적 결말도 가능한가? 소련에서 장기간 확립되어오던 이런 체제의 괴멸은 공산당원 스스로의 의심과 권력에 대한 지속적 욕구의 소실로 달성되었다. 러시아 관료 지식인의 자기반성 능력이 철저히 [이중사고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여전히 명목상으로 존재하던 러시아정교로부터 비롯된 영향이 고르바초프같은 권력을 가진 계급내에서의 회의를 일으켰다. 실제로 소련은 권력층이 스스로 장악력을 포기함으로 붕괴가 진행되어질 수 있었다. 북한을 붕괴시키는 힘은 결국 지배층 내부로부터나 피지배층의 자각으로부터 나오는 수밖에 없다.

 

북한은 소련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북한 스스로가 원했던것은 중국같은 변신인데 그렇게 하기엔 자원과 자본이 너무 없다. 중국으로의 변신을 도왔던 우리의 노력은 옳았을까?  아니면 정말 노동자들의 고통만을 연장하고 말았던 것일까? 또 한 매듭을 넘어가는 북한을 보며 이 책이 찹찹한 마음을 다시 깊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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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셀라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6
새뮤얼 존슨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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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셀라스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에티오피아의 왕자다. 하지만 그는 인간은 희망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모험과 진정한 행복감과 사는 것의 의미를 찾고자 풍족함을 버리고 떠난다. 새뮤얼 존스는 한 왕자의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찾는 여행기를 통해 여러 인간군상의 인생에 대한 시도들을 펼쳐보인다. 죽음이라는 한계를 알아차리는 것, 목적의 무의미함에 대한 고찰, 은둔은 결국 도피이며 이 곳의 삶의 진실만이 중요하다는 생각, 혼자 학문을 탐구하는 삶은 결국 점차 자기 오류에 매몰되어 간다는 것들을 마치 [어린 왕자]의 행성 탐험과 같은 여러 모험들을 통해 보여준다. 거창한 꿈을 품으며 떠난 여행은 결국 [밥벌이와 주어진 의무를 위해 일하며.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길임을 알려줌으로 끝난다.

 

희망은 광기와 맞닿아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꿈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꾸는 인간은 희망이 부르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리 없는 계곡으로 발을 내딛거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건너뛰어보려한다. 진정 희망을 갖는 것은  희망에 미치는 것과 그리 멀지 않다. 희망은 분명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그 희망으로 인해 인간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얼마나 많은 희망들이 인간을 고통의 광기로 몰아갔던가. 스탈린의 소련은 그 첫 희망이 인민이 주인되는 세상이었다. 인간을 정보와 폭력으로 무기력화 시키는 이 전제통치는 희망으로 인해 합리화되었다. 중세의 희망은 신이 통치하는 제국이었으며, 공자의 희망은 인간본성의 옳음으로 정돈되는 국가였다. 어떤 희망은 국민을 배고프지 않게 하는 국가, 또 다른 희망은 서양인에게 꿀리지 않는 떳떳한 동양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 희망들이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차별과 고문과 학대와 살육을 낳았다. 인간은 큰 희망을 삼키면 자신이 미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타인을 억압하고 목표를 위해 희생시키는 것, 과정에서의 폭력과 인간을 얽어매는 규범들은 희망의 이름으로 덮여진다.  

 

결국 희망은 인간을 미치게 할 수 있는 있을 정도의 삶의 에너지이다. 반대로 희망이 없는 인생은 인간을 죽음으로 내 몬다. 가장 큰 무기력과 회의, 의미상실의 원인은 꿈이 사라지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쾌락을, 자랑을, 오락을 추구하며 살 수 밖에 없고, 그 결말은 무의미이다.  희망이 사라진 인간은 또한 다른 인간을 먹이로 삼아야 한다. 비판과 정죄, 소외시킴과 타인을 궁지로 몰아가는 것을 통해 [희망없음의 무의미]를 없애려 한다.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말초적 우월감으로 무의미를 없애버리려하나 잠시뿐이다. 술은, 도박은, 오락거리는, 새로운 것들은 이것을 잠시 잊고 자연수명까지 무의미를 참아내게 할 뿐이다. 꿈이 없는 자에게 무의미한 인생이란 당연한 결론이다. 죽을 때까지 이걸 무시하는 것이 더 큰 싸움이다.  

 

 새뮤얼 존스의 관점은 진정 잘 [실현되는 희망은 이성으로 균형잡힌 희망]이라는 것이다. 새뮤얼 존스는 정신질환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 유전적으로 자신이 정신 이상에 걸리지 않을까 항상 염려를  가지고 살아갔다. 그의 어린시절 질환자인 아버지완 다른 옥스포드에 다니는 사촌과의 만남은 그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성공적 옥스포드 입학과 문학공부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가난으로 인한 옥스포드 중퇴와 라틴어 번역에 대한 스승의 냉담한 반응으로, 그는 희망 그 자체는 좋은 것이나 그 방법을 냉철한 이성 위에 두지 않으면 가지지 않았던 것보다 더 처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년시절의 경험으로 그는 이성적으로 추구되지 않는 희망은 가슴 아픈 실패를 가져옴을 깨달았다. 축제의 한밤의 열기와 같은 희망은 다음날 아침이면 아무 결실 없는 참담함을 남길 뿐이란걸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희망을 가지되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한 철저한 조사와 기획, 그리고 그 일 자체의 변수들, 궁극적 목표와의 연관성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처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 이 우화와 같은 소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다.  

 

궁극적 목표란  죽음 이후의 세계와 맞닿음이다. 인간의 소망이란 헛되며, 이성적이며 희망에 의해 공급되는 삶만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나, 그것이 영원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을 얻는다해도 이 땅의 것이므로 사라지고 말 것임을 이성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헛되다. 오직 이곳에서 내세를 준비하는 삶의 원천은 희망이  되어야 한다. 희망은 이성으로 뿌리박고 이성은 희망으로 작동되되 희망의 내용은 영원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759년 새뮤얼 존슨으로부터 우리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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