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d Pony / The Pearl (영어 원문, 한글 각주) 신아사 영미문학시리즈 81
존 스타인벡 지음 / 신아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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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d Pony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을 갖게 되는 것은 우연일 때가 많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그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때 그것은 어떤 희생도 감수케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한 망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해 주어진 빌리의 책임, 그는 그것을 지켜야 했다. 그 약속은 어떤 어려움과 피를 뚫고도 이루어져야 했다. 선물은 거져 주어지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것은 사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책임감의 산물이다. 그것을 위해 묵묵히 그들은 삶이라는 단 하나 밖에 없는 재료를 갈아 바쳤다. 모두 끝나고 그 책임이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게 다른 사람들에게 비칠지라도 그들은 현재의 우리 삶을 만든 선물을 준 사람들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꿈꾸었던 것은 굶지 않는 나라였다. 그리고 그들은 손에 더러움과 피를 묻히며 그 약속을 지켰다. 누가 그들을 욕할 수 있는가 그들은 자기가 맡은 책임을 다 했을 뿐. 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들의 삶을 무슨 더러운 죄인양 모욕했었다. 그리고나서 물러받은 우리가 꿈꾸던 것은 억울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러면 이제 눈물이 없을 줄 알았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알고 있었고 그 일을 우리 힘껏 이루어야 한다고 느꼈다. 우리는 우리 책임을 우리 아버지만큼 다 했는가? 아직 시간이 더 있다고 나는 믿는다. 

또 올 세대는 그 세대의 환경과 할 일이 있을 것을 안다. 땅은 다시 물려지고 그들은 이 땅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선물은 잊고 또 힘든 그들의 삶을 꾸려갈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숙제와 같은 할 일이 있을까.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다만 그 때에 그들이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산 우리를 모욕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러러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와도 같은 우리의 아버지를 무시하는 일을 그치고, 혹 우리가 하는 책임이 삶에 영원한 가치를 주는 잣대에 혹 어그러지지 않기를 노심초사할 일이다. 그건 그리 거창치 않게, 하루의 일상을 조금 더 열심히, 생각하며 사는 단순한 문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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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ttle Prince (어린왕자) - 영문판
생 텍쥐페리 지음 / 반석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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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읽고 두번째가 영어다. 언젠간 불어로 볼 날도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이 인간을 소중하게 만든다는 삶의 깊은 깨달음이 마음에 사무치는 나이가 되니 다른 의미의 책으로 다가온다. 믿음, 기도, 헌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을 만드는 구성요소다. 우리가 인간다울 수 있는 것, 우리가 소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때문인지 모른다. 상대가 나에게 소중한 인간이 되는 까닭은 상대의 가치에 있지 않고 내가 그를 위해 한 헌신에 달려있는 까닭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은 곧 인간 누구나에게 있는 신의 형상이다. 그 존재만으로 즐거워하고 사랑하며 희생하며 섬길 수 있는신의 모습을 누구나 가지고 있어 더욱 소중하다. 이 생의 바쁨과 자기 자신밖에는 우주에 없는 삶이 아닌 다른 인종, 다른 문화, 다른 교육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인간의 모습,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삶. 그것이 우주적 창조자를 알고 사는 삶이다. 인간 안에 하나님을 보는 자, 그 사람만이 사실 진정 하나님을 본 자인지도 모른다.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

.....It is the time you have wasted for your rose that makes your rose so impor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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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ARL : 진주 - 영한대역시리즈 13
J.STEINBECK / 조은문화사 / 198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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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분노의 포도]의 성공 후 1944년 뉴욕에서 고향 몬트레이로 돌아온 스타인벡은 옛 동료들에게 오히려 그의 작품에 대한 혹평과 냉대를 경험한다. 그는 그가 얻게된 행운에 친구들이 같이 기뻐하고 그 가치를 더 높여주리라 기대했는데 이는 어찌된 까닭인가?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설화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 흑과 백, 좋은 것과 나쁜 것만이 있음을 본다. 인간의 안에 있는 상대의 기쁨에 대한 질투와 파괴하고픈 욕구, 서로를 적으로 만들게 하는 공통요소인 악에 대한 이해없이 인간을 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악의 결과로 생기게 되는 감정인 억울함이란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이다. 삶의 조건으로 인해 이런 억울함의 분노와 고통을 고스란히 참아야한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그 마음을 이해할까? 최근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 사람이 약자이며 약자란 이런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이다. 사회적인 지위와 차림새, 피부색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한다면 이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억울함은 지식에서 시작하고 구조로 굳어져 외형으로 표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통로는 이미 어떤 사람들에게는 닫혀있고 외형적으로 받는 차별은 한 세대에는 즉 내가 살 동안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곳 미국에서 요즘 느끼는 것은 외국인으로서 받는 권리없음이다. 사회의 일원인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을 꿰뚫는 감정은 억울하다는 것이다. 더 이상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호받고 정당한 댓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런 억울함을 더욱 크게 한다. 이때 할 수 있는 선택은 억울함을 내려놓고 하늘에 맡기는 것, 또는 끝까지 그것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부딪히면 깨지는 것은 개인이다. 억울하여도 참고 그러나 끊임없이 냉정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무방비한 편견의 주체를 설득과 사랑, 기도와 헌신으로 무너뜨리고 마는 것. 요즘은 이런 억울함과 대안을 고스란히 겪어보는 시간들이다. 혹은 이것은 오직 진주를 버릴때만 사라지는지도 모른다. "네 진주를 버려라. 인간과 같이 어울려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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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Mr. Know 세계문학 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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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59세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일제하의 우리 민족만큼이나 절망적 상황의 민족 현실을 산 그리스인이었다. 그에게 [신, 그 이후]의 삶에서 희망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무릇 신이란 진심으로 믿어마지 않는 그 무엇이지 않은가? 그가 신을 버린 이유는 신의 존재와 도덕의 가치를 어떤 이익 집단의 것, 인간의 자기 이익을 위한 부산물로 바라보게 하는 시대를 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그러했고 그 뿌리에 놓인 니체가 그러했다.
 
신이 떠난 자리에 인간이 채워넣을 수 있는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첫째는 이성이다. 이성의 신격화된 존재인 진리 혹은 우주정신. 이것이 파생시키는 삶은 금욕과 무욕, 공허를 붙잡고 나락을 응시하며 마음 속에서 나락을 모두 품고 뛰어내리는 삶이다. 힌두적 정신이며 헬레니즘이며 스토아이고 다시 부처이며 무신론적 실존이기도 하다.
 
둘째는 인간자신이다. 인간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가치를 알고 있다. 다수의 행복, 혹은 적극적 소극적 쾌락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인간의 목적적 추구.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며 가치의 창조자가 되며 땅의 영원한 주인으로 선다. 이것은 다시 니체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니체와 베르그송의 영향 아래 있는 자유의 갈망과 탈윤리의 몸부림. 부처의 세계에 대한 부정, 절망에 의한 에피쿠로스적 쾌락으로의 회귀이다. 먹고 마시고 지치게 하고 마음껏 뿜어내는 것, 이성을 버리고 떠나는 세계. 카잔차키스는 이런 에피쿠로스와 베르그송의 머리 속에 든 것을 개념인 아닌 한 인간으로 표출하여 낸다. 상점 주인 같은 이성은 사람에게 기쁨과 벅참보다는 정죄와 억눌림, 잔임함과 궤변만을 만들고 인간이 인간되지 못하게 했기에, 이제 다른 선택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인간에게 득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선이 되는 촛불 한 개를 밝힌 어두움인 삶.
 
그리고 지난 60년, 이 이미지는 한 흐름으로 실체가 되어 이제 내 속에 한 모습으로 살아있다. Imagine there is no heaven. 이 매혹적 세계관의 실험은 히피라는 마약과 난혼의 극단적 형태의 문화를 거쳐 성적 해방과 결혼이라는 약속의 약화, 가정의 해체,  유럽과 남북미, 그리고 일본의 문화적 코드로 우리에게까지 삼투되어 들어왔다. 실험은 진행중이고 유혹은 점점더 강렬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각 사람은 여전히 쾌락과 스토아, 또는 그리스도 앞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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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 랄프 왈도 에머슨의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이창기 옮김 / 하늘아래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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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의 1,2 수필집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한 책이다. 번역이 매끄럽고 잘 이해되도록 써진 편이다.

이해의 깊이를 더 하기 위해선 영향을 받아 미국적 철학과 시를 꿈꾸었던 소로우나 휘트먼을 같이 보면 좋을듯하고, 역사적 배경으론 에머슨에 영향을 주었던 유니테리언파의 종교적 가르침과 촤닝을 중심으로한 당시 하버드 신학의 흐름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당시 영국의 칼라일,디킨스나 독일의 관념철학적 흐름과 연결되어 산업자본주의와 대중주의와 맞서 있었음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런 맥락의 콘텍스트이외에 텍스트 자체에의 접근은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의 힌두사상과  담마파다의 불교사상이 이해에 직접적 도움을 준다

 

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기나긴 대답의 역사에서 이 책은 명확히 우주정신적 일신론의 한 부류에 속하다. 인간안의 공통적 요소에 의해 발견되어지는 공통분모로서의 신이다. 인간 심성 안에 있으며 그곳을 파내려갈 때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질 수 있는 인간정신의 근본을 이루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이와 다른 대답은 계시되어진 상태로 이해되어지기 시작하는 신이다. 인간은 이그러지고 자신의 능력으로 신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어그러지는 일이 시작되기 이전의 인식을 위해 우선 신의 계시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해는 여전히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종교간의 경계선을 이루며, 종교생활을 넘어 문화양식, 생활의 습관, 죽음과 삶에 대한 사회적 합의, 전쟁의 필요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만들며 우리 삶 한가운데의 세계 정치, 경제, 적대와 동맹을 결정짓는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인류가 당면한 최우선의 쟁점이면서 가장 오래되면서 가장 적절해보이는 대안들의 충돌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삶을 살며 느낀 것은 나 스스로를 계시의 빛 아래 두었을 때는 에머슨의 인간 안의 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고 기쁨이 있었던 반면, 인간만을 들여다보고 있던 때에는 도저히 인간 안에서 신의 형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느낄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점점더 미워하게만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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